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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김정숙의 수필세계
- 공동체의 질문에 답하기, 관계와 시간에 말걸기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수필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다. 김정숙 교수의 수필은 지식과 체험과 사상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됨으로써 독자들은 한 편 한 편이 문학수필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은 현란한 빛깔과 진한 향기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현실과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위정자의 이념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평가되지만,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이 배제된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이 일반적 통론이다. 한 작가의 가치는 한 시대를 대변함으로써 그 폭을 확장할 수 있다. 김정숙 수필의 맛은 대상을 보는 예리한 눈맛에 있다. 문학 본질적인 요소 측면에서 수필의 맛은 ‘인식’에 해당한다. 김정숙 수필의 맛은 대상을 창의적으로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이 두 사고 유형이 김정숙 수필을 맛있게 하는 바탕이 된다고 하겠다. 김정숙 수필은 지성적 언어를 통해 구축된 준열한 삶의 실상이다. 그 안에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작가의 강한 공동체 의식의 주체들이 있는 힘을 다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몰입시켜 그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김정숙 교수도 마찬가지다.
교수직 퇴임 후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은 그녀는 여러 가지 인류애적 공동선을 위해 사회봉사를 해나가면서 이제 자신만의 독특한 글세계에 몰입하고자 한다. 몰입해서 하는 일이란 가치 있는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는 인간은 어느 하나에 미쳐야 한다고 했다. 김정숙 교수의 수필 안에는 무엇보다도 치열한 자기반성이 거센 강물을 형성하고 있다. 그녀는 책머리 글을 ‘나는 작가일까?’라는 문장으로 장식한다. 이어서 그녀는 “수필집을 엮을 만큼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역사에 대해 공명公明할 철학을 갖고 있을까? 혹시 짧은 글도 쓸 줄 안다는 칭찬을 장식처럼 달고 사는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적 성찰을 놓고 있다. 물론 그 성찰의 바탕에는 압축된 삶의 진한 영혼이 서려 있다. 그 영혼을 만나기 위해 김정숙 교수는 밝고 맑은 곳뿐만 아니라 어둡고 구석진 곳도 찾아다니며 삶의 진경을 만난다. 바로 생명의식과 진실탐구와의 환상적 교직이다. 작가는 통렬한 종교적 믿음과 지성인으로서의 날카로운 더듬이를 통해 자신만의 인생론을 펼치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영역의 그 순수와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방랑자가 되고 순례자가 되고, 구도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 같다.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수필은 관계 속 삶 살피기, 일상을 통한 말걸기를 지향하고자 한다. 시간과 관계라는 도구를 통해 일상에 말을 거는 것이다. 김정숙 교수는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뜻한 둥지를 찾아 끝없는 순례의 길을 걷는다. 그 둥지의 실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신일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열렬히 집착하거나 몰입하는 것은 둥지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문학은 인류사회가 던지는 공동의 질문에 마음으로 답해야 한다. 인간과 환경, 우주만물에 대해 보다 더 진지하게 열린 가슴으로 고민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이제 이 두 세계를 아우르며 공감하는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나와 타자(他者)의 본성을 선명히 드러내 주는 백자를 굽고 싶다.” 이는 진실로 인류애를 향해 자기 본연의 자세를 다지겠다는 생각이다. 작가가 수필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II. 시간의 흔적과 그 문양과의 관계
수필은 일상을 보다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업이다. 수필의 윤기는 문학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김정숙 교수는 교육자이면서 봉사자이고 수필가이기도 하다. 김정숙에 있어서 수필을 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다. 그는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영원히 기억될 무엇인가를 위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누비며 열정을 바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자기 이상으로 사랑한다. 언제나 진실을 요구하며 신뢰를 요청하는 작가다. 김정숙이 문학에 심취하는 것은 인류애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일 것이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구원의 세계에 안주하고 진정한 행복의 도정에 오른 작가가 김정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녀는 자신이 정확히 몇 년생인지 잘 모른다. 호적상 나이는 1954년생이다. 그런데 세 살이 되어서 다른 사람이 출생신고를 해 준 경우여서 출생연도가 잘못 신고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사람은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우리나라 식으로 세 살을 빼어서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1954년생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1955년생인 듯하다. 어쨌든 그녀는 1955년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즉 아홉 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한 셈이다. 어쨌든 그녀는 나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늘 자신의 출생신고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졌다. 어떻게 되었든 그녀는 대학교수로서 정년퇴임을 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교회사도 집필하고, 야학교사도 하고, 문인단체 사무국장도 맡아 열심히 뛴다.
전쟁 직후 태어난 아이들을 ‘전쟁 풍년아’라고 했다. 사회에서는 전쟁 이후 안정을 찾아가던 1955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산아제한을 강행하기 시작하던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베이비붐’ 세대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지금 그녀에게 닿는 말마디는 전쟁 직후에 태어난 ‘전쟁풍년아’이다. 부모가 전쟁 통에 어찌어찌 만나서 결혼했거나, 전쟁에서 살아남아 낳은 아이들을 말한다. 흥부네 집처럼 가난 속에서 너무 많다고 느껴졌던 목숨들이었다. 그녀는 전쟁 끝자락에 태어난 탓에 먹을 것이 없었다. 부모는 폐허 속을 뒤져서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아이는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다. 업혀진 아이는 흘러내려서 거의 엄마 엉덩이에 걸쳐 있어도 엄마는 아이를 추스릴 손이 없었다.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까지도 그녀는 가난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것 같다. 단지 배가 고팠고, 무언가 없어서 불편했다. 남에게 헤진 옷을 보이기가 부끄러웠다. 속옷은 떨어졌어도 겉옷만은 말끔했으면 하고 바랬다.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그것이 ‘가난’이라는 형태인 줄 잘 몰랐다.
그녀는 대학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사회변화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의 집안 3대의 생활사를 적어 오라는 리포트를 낸 적이 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집은 가난했었다고 써 왔다. ‘그때는 자네네 집만 그런 것이 아니란다.’라고 말해주었다. 물론 그때도 가난한 ‘우리’ 범주에 들지 않는 몇몇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유치원을 몰랐다. 학교는 늘 모자랐다. 그녀가 다닌 초등학교는 서울 미아리 고개 넘어 의정부 나가는 길가에 있었다. ‘숭인국민학교’였다. 그녀는 3학년까지 3부제 수업을 했다. 즉 한 교실을 세 반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고학년, 즉 4, 5, 6학년이 되면 2부제 수업을 했다. 학생수는 학급당 90명을 넘었다. 100명을 넘는 학급도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학교, 즉 학생수가 가장 많은 초등학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고 한다.
시설은 부족하고, 갑자기 인구가 불은 사회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시험으로 통과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도 시험 치르고, 고등학교도 시험 쳐서 진학했다. 대학입시도 예비고사라고 하는 대학진학 자격시험이 있고, 그리고 나서 대학 본시험도 있었다. 시험으로 점철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다만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 경제는 많이 성장되어 있었다. 갑자기 늘어난 인구의 악착같은 노력과 교육받은 노동력이 이러한 경제발전에 자원이 되었음을 사회는 인정하고 있다.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가 되어 사회에 들어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달려왔다. 그리고 겨우겨우 집 한 채 마련했다. 그러자 몸은 옛날 같지 않기 시작했다. 억지로 산 집은 이제 산 가격보다 떨어질지도 모른단다.
수필가 김정숙은 공동선의 가치를 추구하고 삶에 만족하며 산다.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면서도 늘 지난날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자신의 생활을 담은 이번 작품들을 꿰는 실도 역시 ‘관계와 시간’이다. 그녀는 결국 관계 속에서 대상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로 차례대로 원고를 읽는다. 그리고 관계적 소재를 언어와 문화, 종교적 시각으로 이 수필을 훑어내고자 했다. 유교가 바탕인 사회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면서 동시에 천주교회사에 매달리는 지방대학 교수가 본 따뜻한 사회가 다른 이들의 생활도 덥히면 좋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앞으로는 인생의 중요한 주제들을 천착하고 동일 주제별로 완성된 책을 만들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다. 예를 갖출 줄 아는 어른이기도 하다. 산업화의 물결로 인간이 기계화되고 인구급증에 따라 기존의 가치관도 많이 변모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김정숙 교수가 가진 그런 문사정신, 선비 정신이 그리운 시대다.
『에세이문예』본격수필신인상 수상을 계기로 자신의 수필쓰기는 삶 방식 자체를 바꾸어 가기 시작했다. 독자가 종이 무덤인 책에서 생명을 찾아낼 때에서야 그 작품은 살아날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따뜻한 무덤을 짓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 무덤 앞에서 험난한 세상을 주절거리면서 얻고 싶어 하는 위로, 그런 위로를 주는 작품을 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또는 그녀가 얻은 에너지로부터 다시 생명을 부여받고 거듭나고 싶어한다. 그리고 ‘에세이문예작가상’이 자신의 약함을 붙들어 주니 더욱 힘이 난다고 고백한다. 등단과 문학상 수상을 시공간을 치고 나가라는 격려로 받아들이면서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가에 천착한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김정숙은 이런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며 우리 인간들이 각자 자기 본연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성찰하게 한 시도는 이 수필집의 수준을 가늠해 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고 하겠다. 세태풍자와 현실비판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제언을 안겨주었으며, 바른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삶에 말걸기라는 작업이 지성과 맞물려 큰 감동을 준다.
III. 김정숙의 수필세계
1. 공동체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기
김정숙은 심기 속에 전류처럼 정이 따뜻하게 흐르는 작가다. 이 수필의 한 축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공동체가 던지는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작가의 지혜가 녹아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작가정신이 오롯히 수놓아져 있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김정숙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공동선을 향한 물음에 답을 찾아나가는 일을 우선적으로 리스트에 둘 수 있다.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류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에서 나오는 체취를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김정숙이 인정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속 모습까지 가감없이 내어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김정숙의 <모래 바위>은 현실 속에서 보기 드문 훈훈한 사제지간의 인연이 수놓아져 있다. 수필은 원래 잊을 수 없는 일이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수가 많다. 김정숙도 별반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그 넉넉함으로부터 작가가 배워나간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면 가져야 할 인간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나는 왜 선생님도 한 명의 생활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내야 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나이 오십이 넘었고 대학교수인 내가 그 긴 세월 동안 왜 선생님 앞에서는 언제나 초등학생 노릇밖에 못했을까? 처음 만났을 때는 거대한 바위이던 선생님이 세월과 함께 한 알 한 알 조각나고 있을 때 그 제자가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위로가 되셨을까? 선생님은 바위이며 모래였다.
- <모래 바위> 중에서 -
제21회 계산 에세이문예 분격수필신인상 당선작이었던 이 수필을 읽으면,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든다. 그녀는 형이하학적 제재의 속성을 잘 파악하여 형이상적인 우주의 본질로 나아가는 데 참으로 익숙하다. 모든 물질은 이중성을 지닌다는 것은 양자역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다 안다. 원소는 입자이면서 파동인 것이다. 그녀는 이런 삶의 이중적 성격을 인생사에 견주어 ‘모래’와 ‘바위’로 의미화하였다. 선생님은 ‘바위’이면서 ‘모래’였다는 마지막 지배적 정황은 그 어떤 장치보다도 인간이 가지는 이중성으로 인해 인간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어쩔 수 없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연으로 여기며 사는 길은 주체적 행보라 할 수 있다.
배치나 장치를 만들어 자기를 확고히 하는 것보다는 열린 자세로 타자인 선생님에게 다가감으로써 작가는 튼튼한 도덕적 모럴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삶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진화 발전할 수도 없다. 그 선생님은 김정숙 교수를 두고 동료들에게 이런 제자 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늘 큰소리를 쳤다니, 두 분의 신뢰 관계가 어떠한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지금까지 김정숙 교수는 그 선생님의 무한 신뢰를 배반하지 않고 현재까지 왔기 때문에 지금도 당당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초등학교때 만나서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면서 삶에 영향을 준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과 어른이자 스승으로서의 근엄한 면을 작가는 ‘모래 바위’로 풀이하고 있다.
며칠전, 12월 22일, 이 학교의 종업식이 있었다. 학생이 10여 명 되는 소규모 학교에 정식 교사들과 강사들을 합치면 선생 숫자가 학생수보다 많은 것 같다. 종업식에서는 강사들에게 감사장 수여가 있었다. 학생이 자신이 감사하고 싶은 강사를 선택하여 편지를 쓰고 학교의 이름으로 감사장을 강사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글을 쓴 학생이 직접 읽었다.
“인생의 방향에 대해 고민할 때 누구보다 열심히 들어주시고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에 저희의 사랑과 정성을 담아 선생님께 감사장을 드립니다.” 감사장을 내미는 학생을 덥썩 안아 주었다. 이 학생은 나를 보면, 내 연배인 농사짓는 자신의 할머니를 생각한다고 했었다.
- <‘2023년의 훈장’ 같은 감사장> 중에서 -
위 글은 대학 교수에서 퇴임하고 나와 작가는 ‘꿈꾸라’라는 이름의 대안학교에 강사로 나가서 역사를 가르치고, 종업식때 학생들에게서 받은 감사장을 훈장 같다고 표현한 수필이다. 학생수가 10명 정도 되는 소규모 학교, 그것도 특수학교에 나가 열정으로 가르치고 감사장을 주는 학생을 덥썩 안아주는 인간미 넘치는 작가의 모습이 어떤 화려한 수식어보다도 감동을 준다. 이런 차원에서 이 작품은 인간의 체취에서 풍기는 향기를 더해주는 글이다.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사회적 유산으로 여기고 타자를 위해 기꺼이 쓸 때, 우리 사회는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신임강사인 작가를 보고 한마디 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꿈꾸라와 만나게 된 것이 2023년 한 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런 단언은 언제나 가슴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수필은 힘의 문학이다. 그 힘은 작가의식으로부터 나오지만 인간애의 고양으로부터도 나온다. 이 대목은 더욱 이러한 힘을 느끼게 한다. 주제를 제재에 담아 문학적으로 조리해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김정숙의 역량이 빛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지성적 책무가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여유가 타자의식과 삶에 대한 자각이 잘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작은 것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그 느낌에 나름대로 문학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묻어나서 좋다. 무엇보다도 제재를 통해 주제를 우려내는 솜씨의 탁월성이 김정숙 수필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의 쾌미는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한 학생의 감사장을 ‘훈장’으로 여기는 김정숙 교수의 가난한 마음, 작은 것도 크게 보려는 배려심에서 나온다고 하겠다.
직장을 떠나기 시작한 초등학교 동창들이 보고 싶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들의 정년 이후의 행복을 찾는 일이 숙제처럼 다가온다. 수입이 한정되거나 없으며, 건강이 위태해지려고 하는 장년壯年, 사회 경험은 많은 사람들, 그들이 인생을 즐기며 사는 방법을 찾는 일이 아직 남아 있는 내 일인 것 같다. 내가 내 세대에 지기 시작하는 빚을 갚는 일일 것 같다. 올해는 인간이 행복해지는 조건이 무엇일까를 다른 해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했다.
- <정초에 온 편지> 중에서 -
그녀의 작은 바람이라면 정년 이후를 맞는 동기생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직장을 떠나기 시작한 초등학교 동기생들의 안부를 궁금히 여기면서 그들이 행복해지는 조건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수필이 <정초에 온 편지다>다. 이 수필의 압권은 2차 세계대전 때 나찌 감옥에서의 일어났던 삽화다. 도망친 사람을 대신해서 열 명이 선택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열 번째로 지목된 사람이 울면서 자신에게는 처자가 있으니 살려달라고 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막시밀리앙 꼴베 신부가 자신은 식구가 없으니, 자신이 대신 지목되겠다고 자청했다는 이야기다. 신부 대신 살아남은 그 유태인은 나중에 돈을 들여 그의 이야기를 널리 세상에 전한 덕에 그 신부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는 것에서 작가는 요즈음 신부 대신 살아남은 자의 마음이 새겨진다고 한 대목이다. 이 예화를 통해 작가는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숙제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누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동기생들의 노후를 걱정할까. 작가의 관심은 은퇴자의 노후다. 작가는 ‘국가와 사회는 미리 대책을 세웠어야 한다. 퇴직하는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지니고,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정부나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에 남겨준 숙제로 인식하고, 어려운 동기들의 입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리라 다짐하는 수필이 감동을 주는 것은 타자의식의 훈훈함 때문이다. 은퇴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한 지성인에게 박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건강한 은퇴생활을 바라는 작가의 건강한 인식이 녹아 있어 뜨거운 감동을 자아낸다. 긴 인생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향상을 목표로 삼아 자신을 비워내며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려는 정신이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내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분명 이 세상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성인이라 하겠다.
나는 이렇게 그 맹호부태 용사에 대한 답장을 보내고 있다. 내가 답장을 안 해서이겠지만, 그의 편지는 거의 매일 같은 내용으로 소나기처럼 퍼부어졌었다. 그가 내게 우정으로 남긴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혼자 일방적으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깨우침이었다. 난 베트남 방문 이후 베트남 관계 일을 할 때면 ‘정성’이라는 마음을 얹어 40년 만의 답장을 대신하고 있다. 그가 무사히 돌아와서 잘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200만 명에 이르는 당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이들과 부상 당한 사람들, 그리고 마음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함께 밀린 나의 우정을 보내고 있다.
- <40년만의 답장> 중에서
작가에게서 통상적인 삶의 형태란 어떤 것인가. 수필가의 경우는 다른 장르와 사뭇 다르다. 전업작가가 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문학 한 길에 엄정하거나 단호하지 못한 것이다. 작가라는 이름에 앞서는 다른 직업으로서의 이름을 걸어놓고 세상 속에서 만나지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이면이나 속을 후벼 파서 다른 객관적 상관물로 치환하는 것이 수필가의 일이 아닐까. 삶을 삶답게 헤쳐나가며 나를 나답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말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격렬하게 살기는 어렵다. 남과 다른 관점을 유지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 특수한 체험을 특수한 언어로 말하면서 현실을 살아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여자의 이름으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김정숙은 여느 여성작가와 다르다.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호흡으로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산다. 세계에 부딪치면서 당연한 것에 회의를 제기하며, 경계에 서서 늘 의문을 토해낸다.
<40년만의 답장>은 40여 년 전 중학교 1학년때 월남 파병 맹호부대 용사한테서 받은 편지에 대한 단상이다. 프랑스 유학 중에 알게 된 베트남인들이 한국인을 싫어한다는 사실로부터 김정숙과 베트남의 인연은 싹을 틔우게 된다. 역사와 시대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 사과하고, 그 관계를 발전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엇갈린 관계를 더 튼튼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지성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김정숙이 문단에 들어와 새롭게 선보이는 이 수필집은 아마도 세계시민적 가치를 구축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탐색하는 작품집이라는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될 것 같다. 인식과 실천의 교직이라는 나름의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의미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일을 볼 때면 ‘정성’이라는 마음을 얹어 답장을 대신한다는 대목이 압권이다. 김정숙의 수필은 이런 적절한 변주와 다양한 전개가 있어 여타 수필집의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다.
아파트란 단독주택보다도 상호간 더 크게 영향을 주고받는 공간일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획일적 구조 안에서 동일한 물건을 사용하면서 서로 다른 독창성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서로 다른 매력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일이 현재 아파트 거주민의 당면숙제일지 모른다. ‘짜집기 된 이웃’이 누대로 형성된 자연촌 이웃과 같이 되었을 때 행복한 아파트가 될 것이다. (2011.11.03.)
- <짜집기된 이웃> 중에서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열등감이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위의 수필은 작가가 프랑스 출장을 통해서 관심을 갖게 된 한국의 아파트문제에 대한 단상을 담고 있다. 어떻게 아파트가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천착한 이 글은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자세에 설득적 지성이 담겨 있고, 이것이 ‘짜집기 된 이웃’이 누대로 형성된 ‘자연촌 이웃’과 대비구도를 형성하면서 그리고 그 두 구도가 하나가 될 때 행복한 아파트가 될 수 있다는 진단이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김정숙의 수필을 관통하는 한 사상은 인간의 문화, 신체적 지각, 개체적으로 독특함이 인간 주변의 세계를 지각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그리고 그러한 인식에 기반한 지각이 인간의 환경에 대한 선호와 이상향, 더 나아가서는 공간을 조직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바로 환경-인간 사이의 관계와 미학론인 토포필리아다. 누대로 형성된 자연촌 이웃으로 아파트촌이 바퀴지 않는 한 갈등이 없고 인정이 물결치는 축제 공간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조화의 지름길인데, 우리는 ‘다름’을 ‘틀린’ ‘잘못된’으로 인식하니, 작가가 내어놓은 혜안이 힘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부조화를 우리 삶의 터전과 결부시켜 의미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수필의 문학화에 성공했다. 문학은 절실함에서 비롯되고, 그를 자양분으로 해서 커나가는 것이기에 배려가 있어야 결실의 조건이 충족된다. 이 작품은 아파트촌의 갈등을 바라보는 작가의 진지한 안목이 ‘짜집기 된 이웃’이란 어구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2. 일상을 통한 관계와 시간에 말걸기
김정숙은 특별히 다른 면이 있다. 그녀는 감동의 일차적 질료인 철학성과 미학성을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도 깔고 있다. 의식과 문장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차이’를 가치화하는 그녀 나름의 개성이 만나는 사람을 압도하는 신비한 힘이라 하겠다. 김정숙의 수필은 강렬한 관계의 미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세상은 복잡계이고, 복잡계적 시각을 갖지 않고서는, 세상의 숨은 본질을 찾지 못한다. 김정숙 수필의 또 다른 한 축은 인간중심주의의 폐해를 고정관념이란 경직성에 비추어 비판하고 있다. 이성 중심의 근대를 성찰하라는 말은 이분법의 틀을 파하라는 말이다. 이분법은 닫힌 사유를 말한다. 이성 중심주의는 본질과 상관없이 이분법으로부터 가해진 폭력이다. 그 폭력을 오이디푸스 콤플랙스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고, 생태와 인간의 대립구도를 살핀다면 생태에 대한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람 중심의 틀에 내포된 상상의 힘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홍익인간 세계, 도구화된 이성의 시대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드는 단서로 작용하는 것이다.
작가의 지성적 깨달음을 통해 문명 비판이라는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수필은 강력한 메시지를 갖고, 힘도 갖는다. 사물이 주는 내포가 사회의 아픔으로 전화되는 지점에 드리워진 반성적 성찰은 문학을 ‘실천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새겨진 마음의 윤리를 나타낸다. 사물의 신성이라는 건 곧 이러한 마음의 윤리를 통해 문자로 재현된다. 일상을 통한 시간과 관계에 말걸기는 융합과 통섭을 요구하는 시대적 정서와 맞물릴 뿐만 아니라 복잡한 현대인의 니즈와도 매치가 잘 되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시간의 의미와 관계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복잡한 현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자세의 다름 아니다. 말걸기는 어떻게 보면 우리 문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적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너무도 급속하게 변해가기 때문에 관계적 맥락은 본질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환경이 곧 문학을 지배하고, 문학의 생산력을 결정하게 된다. 작가는 관조의 힘에 의해 얻은 메시지를 객관적 상관물로 전이시키면서 삶 – 시간-세계에 짙게 드리워진 자본적 욕망을 승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
그런데 우리 모두가 새로운 현대 세계를 찾아다닐 때 또 다른 100년의 기다림을 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전통을 이고,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는 동네에서, 모두가 속도감과 편리성을 찾아 사고방식까지 전환하고 있을 때, 묵묵히 400여 년 된 집을 지키고 살고 있었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트 날 위에 서서 온몸을 긴장하듯, 하늘과 역사를 이고 절제와 격조를 위해 긴장해 온 사람들이다. 바로 종가宗家의 사람들이다. 우리의 '준비된 전통'이다.
- <100년의 기다림> 중에서
김정숙 수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적 수필을 읽으면 마치 살포시 내리는 봄비소리 또는 겨울밤 흰눈 내리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여튼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봄비처럼 그녀의 글은 우선 생명력을 띠면서 독자에게 예술적 감흥을 안겨준다. 제재통찰 결과를 감성적인 문장에 담아 울림이 큰 미적 이야기로 변형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파토스와 에토스 등의 수사전략을 집중력있게 활용하는 까닭으로 어떤 수필도 미적 울림이 강하다. 특히 한국적 정조와 얼을 잘 형상화하고 있는 <100년의 기다림> 은 전통의 가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종가정신을 전통에 견주어 고양시키고 있다. 이 수필은 전통을 가꾸고 지켜온 종가 사람들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수필이다. ‘묵묵히 400여 년 된 집을 지키고 살고 있었다.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트 날 위에 서서 온몸을 긴장하듯, 하늘과 역사를 이고 절제와 격조를 위해 긴장해 온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그녀의 수필을 읽으면 그녀가 추구하는 수필의 본령이 무엇인지 쉽게 드러난다. 그녀는 한마디로 수필을 ‘진정성’ ;정성‘ ’신의‘에 방점을 찍고 접근한다는 점이다. 생활인의 단순한 인식을 넘어서서 수필 소재에 담긴, 또는 묻힌 가치를,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 ‘꼭 봐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어 유의미하게 다듬어 낸다고 하겠다.
그는 20년 전에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잠바를 그날도 입고 있었다. 인터넷을 한 적이 없고, 핸드폰도 없었지만, 그의 삶은 분명 아주 잘 살은 삶이었다. 그분을 뵈러 가는 내내 잘 살은 생이 왜 끝날 이렇게 쓸쓸해지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나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보면서 문득 호랑이는 숨어서 죽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곳에서 고생했고, 그러니까 그분이 어려울 때 같이 견딜 의지가 있는 우리를 떠난다는 것은 그가 이루고 싶어하는 또다른 목표인 듯했다. 그는 이제 우리를 피해 가면서 또 그 속에서 행복해 하고 계신 것 같았다.
기차 시간에 쫓겨 일어나면서 나는 이렇게 내뱉었다. 쓸데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신부님, 이곳에서 사신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신부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 <숨어 죽는 호랑이> 중에서 -
숨어 죽는 호랑이‘라는 제목에 무슨 큰 뜻이 있는 듯하다. 김정숙은 한 신부님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 분을 호랑이에 비유한 것이다. 그는 20년 전에 작가가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잠바를 그날도 입고 있었고, 인터넷을 한 적이 없고, 핸드폰도 없는 신부님이다. 작가의 평가는 에이플러스다. “그의 삶은 분명 아주 잘 살은 삶이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신변적 수필이 난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종교인의 사명감을 담고 고통의 길을 걷는 신부님의 거룩한 삶에 주목하면서 신도로서 신부님의 삶을 자랑스럽게 빛내고자 하는 자세를 수필 속에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가치다. 사건이 보다 구체적이라는 것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지만, 그분의 표정을 보면서 ’문득 호랑이는 숨어서 죽는다‘는 말을 떠올려 극적으로 메시지에 상상력을 싣는 저력에 박수를 보낸다.
작가가 신부님이라 부르는 작중 인물은 “6·25사변 직후 한국 땅을 밟고, 한국인과 더불어 세월을 보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가톨릭 선교사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창설된 파리외방전교회는 수도회가 아니라 교구 신부들의 선교단체다. 이들은 일정한 지역에 파견되어 종신토록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활동을 해왔다. 그러므로 그의 한국어 구사 실력은 완벽하고 한국사회를 보는 눈도 정확하다. 그의 ‘우리나라’는 언제나 한국을 일컫는 단어였다.”는 대목에서 그분이 한국을 엄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분의 우리나라는 ‘한국’을 뜻한다는 말 그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문학을 미적 구도로 인식하고 있는 한 그녀의 수필은 언제까지나 독자의 사랑과 관심을 끌 것이다. 그녀에게는 필마의 기운이 넘쳐난다. 의식적으로 수필을 연마하여 한 편의 글에 반드시 반짝이는 어록을 놓아 미적 울림통을 울리기 때문에 그녀의 글은 힘의 문학을 지향하면서, 수필문학의 위상도 함께 드높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정해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뿌리쳐야 할 유혹의 수가 많으리라. 공자가 나이 사십에 불혹(不惑)이라고 한 것은 바로 사십부터는 다른 것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신이 말머리를 벨 때의 마음을 비워야 하는 순간이 인생을 살면서 어찌 한 번뿐이겠는가? 가을, 이제 내년을 준비하며 털어버려야 할 것을 다시 생각한다. 버리되 진지하게 고뇌하며 버려야 '선택'이 된다.
- <떠나는 마음, 버리는 진실> 중에서
문화컬럼으로 발표된 <떠나는 마음, 버리는 진실>은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우리가 수필을 통해 추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마음 다스리기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복잡하고도 삭막한 도시 생활과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본래적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수가 많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의 상실은 곧잘 삶에 지친 사람들을 패배주의로 몰아가기 일쑤다. 현실적 자아와 본래적 자아라는 괴리감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을 어떠한 형태로든 극복하기 위한 절박한 노력은 누구에게나 일생 동안 끊임없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현실의 온갖 유혹 속에서도 본래적 자아를 지켜 주고 회복시켜 주는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김유신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사랑을 내려치는 칼이었다는 데서 출발한 김유신과 기녀 천관녀와의 사랑이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인 이 수필은 삶에서 어려운 일은 ‘선택’이라고 말한다. ‘진지하게 고뇌하고 버려야 선택이 된다’는 말로 볼 때 고뇌없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란 말이다.
명작은 제재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통찰과 그 결과의 감동적인 미적 배열, 그리고 설득력을 지닌 개성있는 수사전략 등의 상호작용에서 태어난다. 구조와 문장의 상호작용이 원활하지 못하면 미적 울힘은 현저히 약화되는 법이다. 철학성과 미학성의 조화 속에서 생성되는 미적 감동은 그녀의 개성에서 나온다. 우리 문학계에서 자신의 ‘칼라’를 뚜렷하게 갖춘 작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칼라는 단순히 작가가 가진 자기 특유의 숨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다수와 확실히 구분되거나 다른 개인의 사상적 특성, 인생관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문학은 자신도 정화해야 하고 시대도 정화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동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김정숙의 이 수필은 자신을 구원하는 글로써 거울 같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등불 같은 수필이라 하겠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일이나 아름다운 진실을 캐내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이다. 개념을 의미깊은 뜻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삶의 진경을 담아내는 일로 수필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혼자의 길이야말로 모든 쓸데없는 군살을 버리게 한다. 그러므로 무엇엔가 전념할수록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다. 자신을 깨닫고, 자존의 세계를 세우기 위해 힘들어 본 사람이라면 대화는 더 쉽게 열린다. 버리지 못하면 듣지 못한다. 듣지를 못하고 자기 말만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우리는 독재자를 싫어한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한 우리 모두는 자신이 관여하는 범위 안에서 독재자일 수 있다.
- <천 번의 점프> 중에서 -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한 우리 모두는 자신이 관여하는 범위 안에서 독재자일 수 있다.”는 마지막 멘트는 아무리 자주 읽어도 멋지다. 세상의 모든 것이 수필 안에 놓여져 있는 소도구다. 사랑도 아픔도 이 안에 어우러져 있는 일종의 소품이라고 볼 때, 수필은 하나의 우주다. 수필을 쓸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감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먼저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야 된다. 그러려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는 작가의 말씀이 설득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이유가 신선한 까닭이다. “버리지 못하면 듣지 못한다”는 대목도 신박한 어록이다. 이 수필의 문학성은 김연아 선수가 이룬 노력을 “피겨 선수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완공된 것은 1964년이었다. 김연아는 이런 곳에서 혼자 세계적 왕국을 지었고, 세계 피겨 100년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나온다. ‘천 년’이란 구체적 횟수는 압권이었다. 전념한다는 것은 우선 대상과의 일체감을 갖는 일이다.. 즉 물아일체의 동화 상태에 빠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자를 싫어한다’에서 그녀는 독재자도 재해석한다.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하겠다. 대상과의 일체감을 이루는 전념없이 우리는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없다는 걸 잘 말해준다.
약 5분 정도 걸친 짧은 인사였지만 그가 만난 새 교구민에 대한 나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에 대한 내 감사였다. 어쩌면 내 이 인사가 큰 파장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 신부의 학창시절 여자 친구가 25주년 은경축에 인사를 했다. 그가 나를 불러 세운 것 자체가 만용(蠻勇)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의 공개적으로 표시한 이 우정에 대한 감사가 우리 사이에 가장 긴 우정에 대한 소회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 <어떤 안녕> 중에서 -
사제 서품 25주년 은경축일에 신부의 학창시절 여자친구로서 작가가 축하인사를 했다는 내용도 눈길을 끈다. 약 5분 정도의 인사였지만 사제가 여자 친구를 불러 축사를 시킨다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신부도 신부의 학창시절 여자 친구였던 작가도 아무런 저항없이 은경축일 행사를 잘 해냈다는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건 왜일까. 쉽지 않은 선택을 용기있게 한 신부, 그 요청을 기꺼이 수용한 작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이 부럽기만 하다. 그러나 그들이 대화를 보면, 싱겁기 짝이 없다. “바로 티켓팅을 마치고 출국 수속하는 데까지 왔다. 내가 그렇게 커피를 좋아하는 줄 알면서도, 또 자신의 집에서 커피 한 잔도 못하고 바로 나온 줄 알면서도, 그리고 탑승 시간이 두 시간 정도 남은 줄 알면서도, 그는 커피 한잔 하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나는 돌아섰다. “서로 연락하자.”라고 그가 말했다.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 사람들의 인사였다.“
문학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작가는 신앙인으로 살면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온 분으로 이러한 이유와 당위성 때문에 작가는 신앙인으로서의 의식이 분명해야 했다. 김정숙 수필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고, 노력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가치나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절제과 품위를 갖춘 우정의 정도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이런 측면에서 또 김정숙 수필은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순간 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원숙한 인생의 맛을 느끼며 살기 위해 수필을 씀으로써 세상의 구원에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김정숙의 수필을 읽으면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는 참다운 이의 깨달음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산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자신에의 집착을 엮어 가는 일이다. 원근과 대소를 재면서 자신과 관련을 현재화시킬 때 집착에 이를 것은 뻔한 이치다. 인간의 일상적 삶은 여기에 그 거점을 정하고 방향을 터 잡아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 수필집에서 읽히는 또 하나는 자신의 존재적 인식을 교정하는 활달함이라 하겠다.
Ⅳ. 나오며
예술적 소양이 높은 작가는 다른 사람을 하나의 대상, 수치로 대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로 사람과 소통한다. 김정숙은 특수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쉽다. 서로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사이에 들기도 철학적 소통도 쉽다. 김정숙 문학은 지성적, 신앙적, 언어적 힘을 바탕으로 독자의 정서에 울림을 주는 파도와도 같은 파동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에이브럼즈는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문제는 거울이 중요하다 등불이 중요하다가 아니라 문학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미덕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런 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문학이 되어야 한다. 수필이 상상력이나 예리한 관조, 지적 통찰의 체로 걸러지지 않은 채 쓰여져서는 안 된다. 수필은 삶과 세계에 대한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이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 있어서 김정숙의 작품은 문학이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김정숙 교수는 ‘글은 곧 그 사람이다’는 버폰의 표현에 정확히 맞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작가다. 생을 선한 마음으로,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 자세로 걸어가는 작가다. 옷고름 하나 흐트러진 데가 없이 단아한 작가다. 글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성인으로서 일상 속에서 느끼는 편편들에 대한 다소곳한 정감을 수필 속에 용해시켜 내는, 가슴 따스한 작가다. 그녀의 글을 만유의 실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물어 보게 한다는 차원에서 감동을 준다. 차분함과 여유에서 나오는 그녀의 글에는 오늘을 사는 생활인의 가슴 저린 애환이 있고, 따스한 정이 소리 없이 흐르며, 감사하는 생활미학, 신앙인의 자세가 녹아 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문제의 한 켠에는 언제나 초극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선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들은 그 세계를 통해 삶의 기쁨을 만끽하고, 처절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녀는 정녕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이 시대의 지성이요, 사상근육이 아름다운 사람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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