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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진실로 진실로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장 1절 ~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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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달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구절의 말씀들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을 나누도록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7이라는 숫자에 맞춰 7가지 기적과 7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먼저 7가지 기적은, ①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2장), ②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기적(4장), ③ 38년된병자를 고치신 기적(5장), ④오병이어의 기적(6장), ⑤ 물 위를 걸으신 기적(6장), ⑥ 날 때부터 맹인을 고치신 기적(9장), ⑦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11장)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적 사건이 적게 기록된 것은, 기적 사건의 상황이나 반응을 기록하기 보다 그 기적 사건들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려는데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의 핵심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며,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다음으로 7가지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을 일컬어 “나는 ~이다”(헬라어, 에고 에이미)라고 선포하신 말씀들입니다. ①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②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③ 나는 양의문이다(요10:7) ④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 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⑥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⑦ 나는 참포도나무다(요 15:1) 라는 말씀들입니다.
이 7가지 말씀들을 선포하신 이유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이시며,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이시며 동시에 심판자의 권능과 권위를 지니시고 계심을 만 천하에 알려주시려고 하신 말씀들입니다.
7가지 기적과 7가지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익투스-ΙΧΘΥΣ,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가 “진실로 진실로” 진리라는 사실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 되었으며, 이 세상에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자가 없으며, 예수님 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실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만 천하에 공개하신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읽으실 때 7가지 기적과 7가지 말씀들을 깊이 살펴보시고, 묵상하실 때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과 감동을 특별하게 경험하신 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소망이 넘쳐나는 시간이 되실 겁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 복음의 7가지 말씀중에 “나는 양의 문이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 1~2절을 읽어 드립니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아멘.
이 말씀에서 문과 양과 우리와 양의 목자와 절도와 강도가 나옵니다. 이 의미들을 알고 말씀을 들어야 이해가 됩니다. 문은 구원의 문이며 예수님을 말합니다. 양은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공간이 아닌 통치의 개념)를 말합니다.
목자는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말하며(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양을 보호하라고 명령을 받은 특정한 사람을 지칭-선지자, 제사장, 목사, 선교사 등), 절도나 강도는 양을 미혹하는 사탄과 그 무리들(혹은 돈과 권력에 취해서 맡겨진 양을 돌보지 않는 위정자들,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우리에 들어 갈 때 문을 통하지 않고 다른 데(담이나 철조망 등)를 넘어 들어가는 자는 절도자와 강도라고 말하십니다. 당연한 것 같은 이 말씀 앞에 “진실로 진실로”를 붙여서 특별하게 강조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그 시대에 정상적인 문을 통하지 않고 양의 우리에 들어가려는 절도나 강도가 다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예수님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을 극히 경계해야 된다고 경각심을 주시면서, “문(gate-출입문)”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자 이 비유를 시작하신 겁니다. 얼마나 문이 중요한지 “진실로 진실로”를 사용하셔서 말씀 하셨습니다.
2절에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1절에 문을 통하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는 절도자나 강도가 있는 반면에, 2절에서는 정상적으로 문을 통과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절도자와 강도, 그리고 목자의 극명한 차이점은 진리의 문을 통과하여 양의 우리에 출입 하느냐, 그 문만을 통하여 양들에게 접근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목자(헬, 포이멘)’라는 단어는 고대에는 왕이나 지배자들과 같이 영예로운 직위를 뜻하는 말이었고, 예수님 시대에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양치는 자들을 말하기도 했고, 히브리서에서는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표준새번역)”라고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파스토르(pastor)’라고 했는데, 이 단어로 인해 목자라는 단어가 현대에는 목사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성경에서는 목사라는 단어는 없고 목자라는 단어를 목사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목자는 우리의 영원한 영혼의 인도자요 보호자이신 예수님(하나님, 성령님)을 지칭하는 단어인 동시에, 목자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도록 임무를 부여 받은 사명자들(목사, 선교사, 복음 전도자 등)을 지칭한다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는 오직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뿐이며 사람에게 목자라는 호칭이 주어지는 것은 임무에 대한 위임일 뿐, 권세나 권한이 있다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목사든 선교사든 상관 없이 우리 인간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목자(구원자)가 아닌 인도와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양의 신분(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문으로 출입하는 목자, 그리고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출입 하려는 절도자가 강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이어지는 3~6절까지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아멘.
여기에서는 문지기가 나옵니다. 이 문지기는 별도의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지키라고 임무를 부여 받은 목자들 중에 한 사람일 겁니다. 양들을 24시간 지키려면 주, 야 교대 근무가 필요했을 것이고, 밤이나 낮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양들을 안전하게 지킨 후에 다른 목자에게 양들을 정확하게 인계하는 것이 문지기의 역할이었습니다.
문지기는, 문으로 출입하려는 자(사람 혹은 육식동물)들을 확인하고,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침범하려는 절도나 강도를 감시하는 역할이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나쁜 무리들이 양의 우리 안으로 출입하는 순간 양들은 손쉽게 먹잇감이 됩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늑대)의 동화처럼, 양들을 노리는 사악하고 간교한 자들을 절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3절에는 ‘그’라는 3인칭대명사가 세 번 나오는데 이는 ‘목자’를 말합니다. 문지기는 문으로 출입하려고 하는 자가 목자(동료목자)가 맞는지 식별하고 문을 열어 줍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도록 허락 받은 목자는 자기에게 속한 양들을 다 알아보고 그 양들을 부르고, 양들은 익숙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5절에서 보면, 양들은 목자가 아닌 타인의 음성에는 따라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도망 간다고 합니다. 실제로 양치는 농장에서 양들은 아무리 사람들의 음성이 많이 들려도 주인의 음성을 기가막히게 알아 듣는다고 합니다.
목자는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 주지만 우리가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거나, 혹은 타인의 음성을 듣고도 덜커덕 따라가는 것은 전혀 목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목자와 양과의 소통 과정에서 불통이 일어나는 것은 목자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듣고, 따라가는 양들의 반응에서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이 비유를 듣는 자들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여기까지 말씀 하셨지만 6절에서와 같이 그들은 이 비유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 유대인들은 듣지도, 따라가지도 않는 절도와 강도 같은 영적 맹인이었으며, 그에 반해 목자되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다 알아보고 그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따라오게 하시는 선한 목자라는 것을 상대적인 비유로 말씀 하신 겁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더 노골적인 어법을 사용하여 이 비유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7~10절의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1절에 이어서 7절에 두 번째 “진실로 진실로”가 나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아멘. 드디어 문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문은 예수님 이셨습니다. 이 문은, 구원의 문이요, 생명의 문이요, 진리의 문이요,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 하시자 앞서 1~6절에서 말씀하셨던 알아듣지 못한 비유의 말씀이 저절로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양들 만이 예수님에게 속한 양의 무리들이고, 이 양의 문으로 출입하는 양들은 오직 예수님의 음성 만을 잘 알아 듣고, 그 음성에만 따라 간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문으로 출입하는 목자 만이 진짜 목자이고 양들을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참 목자가 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양 무리도 아니기에 음성도 듣지 않는 자들이며, 참 목자가 아니기에 절도자나 강도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 유대인들은 양의 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양의 문을 가르쳐 주어도 자꾸 담을 넘어 다니려고 하고, 문지기가 되어 양의 무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나 강도 같이 양을 해치려고 하고, 목자의 음성을 흉내내어 양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는 양의 문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랑곳 하지 않고 8절에서 더 과격하고 직선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멘.
이 8절 앞에는 “내 앞에”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시내 사본, 시리아 역본, 사히닥-Sahidic- 역본 들에는 없으며, 알렉산드리아 사본 (A), 바티칸사본(B) 등에는 있음) 내 앞에, 즉 예수님 보다 먼저 온 자들은 다 절도자나 강도라고 하셨는데, 이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지칭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 백성들의 영적 상태에는 관심이 없었고 유대전통을 지키고, 율법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습니다. 더 엄격한 율법해석을 통해서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율법의 족쇄를 이중 삼중으로 채웠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고 천국으로 나아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영혼이 피폐해지고 영혼이 상실 되어가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율법, 그저 전통, 그저 권위 만을 앞세워 진리를 침탈하는 절도와 강도 같은 삶을 강요했습니다.
자신들을 절도나 강도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바리새인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추가로 8절을 들려 주시고, 더욱 분노한 그들은 예수님을 당장 끌어다가 돌로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엄청난 기세와 권위로 말씀을 이어갑니다. 9, 10절입니다.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9절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말씀 하시고자 진실로 진실로를 두 번씩이나 사용하신 겁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포 하신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의 문이요, 내가 곧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라고 선포하신 겁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진리의 음성입니다.
어차피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분노하겠지만 제자들이나 군중들 중에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 9, 10절의 말씀으로 소망과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고자 했습니다. 우리도 양의 문으로 출입하는 양들이라면, 양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라면, 양을 먹이는 목자라고 한다면, 이 말씀이 진리와 소망의 말씀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내가 문이니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문은 나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리고 닫힙니다. 아무 때나, 누구든지 마음대로 출입 할 수 있는 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계시록 3장에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계 3:7) 라고 했는데,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분은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심을 드러내신 겁니다.
9절 마지막에 들어가고 나온다는 것은 들락날락 거린다는 것이 아니라. 동행과 안식을 누리며 진리(예수님)안에 거한다는 뜻이며, 그로 인해 꼴(목초-영생,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도 말씀 합니다.
자, 양의 문이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야만 구원 받는 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문이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에게 문이 열리겠습니까?
양의 문으로 출입하기를 일생의 소망으로 생각하며 양의 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엎드려 구하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문이 열릴 것입니다. 또한 구원 받았다는 안일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끊임 없이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열심히 따라가고, 인도 받은 그 곳에서 꼴(영생, 영광)을 얻고 충만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문이 열릴 것입니다.
들락날락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하며 진실로 예수님을 알아가기를, 닮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함과 사모함과 머물러 있으려는 마음이 진심이 되었을 때 양의 문은 반드시 열릴 것이고, 그 문으로 출입하도록 허락을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일반적일 수 있으며, 이보다 더 중요한 가장 우선되는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양의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 문으로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간직하고 한 주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기에 내가 보기에 너는 사랑하는 양의 무리에 속한 자라고 인정해주셔야 양의 문으로 출입이 허락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죄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속량해주신 예수님을 성령으로 깨닫고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확고한 믿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감정이나 지적 동의가 아니라 반드시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한 주간 동안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진실로 진실로 고백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죄의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 죄를 짓는 즉시 참회 하고, 돌이키려는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죄를 덕지덕지 묻히고 도무지 돌이키려는 회개가 없는 자들은 양의 문이 어딘지 조차도 모릅니다. 예수님처럼, 진실로 진실로 죄와 죽기까지 피 흘려 싸우기로 성령으로 결단하는 자들은 사랑하는 양의 무리에 속한 자들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목자의 음성대로 즉시 따라가려는 양 무리들에게는 양의 문으로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그 문이 상시 개방이 될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도 무반응이고, 목자의 음성이 아닌 절도자나 강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 나서기를 너무나 쉽게 해버리는 양은 목자에게 속한 양무리라고 인정 받지 못할 것입니다.
절도자나 강도는 얼마든지 양 무리에 접근 할 수 있고 목자의 음성을 흉내낼 수 있습니다. 목자의 음성인지 절도자나 강도의 음성인지를 분별하도록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령은 들을 귀를 열어 주셔서 목자의 신령한 음성이 어떤 음성인지를 똑똑하고 명확하게 알려 줄 것입니다.
무턱대고 절도자나 강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 양들은 구덩이에 빠지고, 가시 덤불에 걸리고, 깊은 물에 빠지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후에야 분별없는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성령이 안내하는 길로만 따라가려는 자들에게 양의 문을 출입하도록 허락 하실 것입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양의 문으로 출입 가능한 양 무리는, 목자에게 속한 양이라고 인정 받은 무리이며, 이 무리들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고백하는 양무리입니다. 그리고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따라가는 양들입니다.
예수님은 양들 중에 누가 내 양인지 다 알아 보십니다. 또한 양들도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음성이 어떤 음성이지 잘 분별할 줄 압니다. 이것이 성령이 주는 깨달음과 인도함의 은혜입니다.
10절 말씀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다시 한번 양의 문이신 예수님과 도둑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잘 알려 주십니다. 도둑(절도자, 강도)은 멸망을 주고, 양의 문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양의 문인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의 문으로 출입하는 것이 상시 허용될 것이라는 안일함과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 없음에도, 여전히 죄를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도, 목자의 음성을 듣지도, 따르지도 않으면서 양의 문으로 드나들고 있다고 허황된 망상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양의 문에 들어갈만한 양 무리인지를 판단하시는 것은 목자이시고, 또한 양의 문을 열어 들어가게 허락 하실 것 또한 목자의 판단이시고, 목자의 음성을 진정으로 듣는지, 따라가는지를 알아보시는 것 또한 목자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 안에서 진실로 진실로 밝혀지기 때문에 목자는 절대로 실수로 양의 문을 열어 두거나, 누구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도록 무방비로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목자에게 속한 양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양의 문에 출입을 허락 받도록 그 문 앞에서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하며 겸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 영생과 영광의 꼴을 충만하게 얻도록 목자 안에만 거하도록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는 자는 절도나 강도니라, 양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며 다른 음성을 듣고 도망 하느니라”
오늘 주신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감동되고, 실천과 순종으로 이어져서, 오직 양의 문으로만 출입하는 목자에게 속한 영생과 영광의 주인공으로 허락 받고 인정 받으시기며 평안과 소망속에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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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구원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게 하시고,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죽기까지 순종하며 따라가는 믿음의 양 무리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