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스물 몇 해 동안 박종우는 넓디넓다는 세상이 과연 얼마나 넓은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듯이 온 세상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그 결과인 박종우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수많은 고무도장이 찍힌 그의 너덜너덜한, 그래서 화려한 여권을 늘 연상 한다. 그리고는 그래! ‘멀티’다. 많이 다니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그러다 지치면 돌아와서 많이 토해내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히말라야 주변이 단순한 여행으로나 전문가의 다큐멘터리, 또는 어떤 연구를 위해 좋은 대상이 되는 것은 단지 지리적 풍경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신 그 풍경 속에 사는 삶의 매력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이들 스스로에게는 그 삶은 환경에 알맞게 적응하며 터득한 보편적인 문화이다. 그러나 ‘물질 부자 나라’ 사람들 눈으로 바라보자면 가난하고 남루하다. 그런 가난과 남루를 사람들은 애써 찾아가고, 갈 수 없다면 책이나 텔레비전에서라도 보기를 좋아한다. 이제 겨우 가난을 벗어난 처지임에도 그런 걸 보며 우월감을 갖고 우쭐하는 사람도 전혀 없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는 아마도 가난을 넘어 인류가 거쳐 온 삶의 원형 또한 간직되어 있을 것이고, 우리가 친애하는 박종우도 그래서 주로 그쪽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어 뛰고 뛰어 디지털같이 삭막하고 차갑게 산다만, 너희는 부싯돌로 남아 있어라 그게 따뜻하고 좋은 거다라고는 아무도 말 못 한다. 모든 것은 시간 차이에 불가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인도의 불가촉천민에게는 가촉이 가능하다. 미국이나 그 비슷한 나라의 상류층에게는 가촉이 거의 가능하지 않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네팔에서도 티벳에서도 라다크에서도 사람들을 찍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이들도 더는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할 것이다. 사생활 보호 또는 초상권은 경제 수준과 관계 없이 공평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어쨌거나 돈 많은 사람들은 보호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수가 흔하다. 이런 일반론이 있다 하더라도 박종우는 그런 곳에 가서 예의 바르게 그이들의 생활과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다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박종우의 사진들은 우리가 진짜 잘사는 데 필요한 것은 물질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늘 그렇게 살아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박종우의 그을린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피곤한 그림자가 배어 있다. 그러나 그 피곤의 그림자가 아무리 짙더라도, 박종우의 빛나는 눈빛과 웃음기 있는 표정을 사라지게는 하지 못한다. 그의 가멸찬 보물곳간에서 막 꺼낸 맛보기가 이 “히말라야”다.
박종우의 사진은 자극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보아 대상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강렬하게 볼 주관이 박종우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주관과 객관이 박종우의 내부에서는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평정된 시선으로 자연스러운 영상을 거둬들인다. 그런 사진들은 강요하지 않으면서 수월하게 우리를 멀리로 데리고 간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