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위치 :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도피동 450
불상의 높이는 91cm인데, 대좌까지 鑄造(주조)된
특이한 양식이다. 얼굴은 긴 편이고, 귀가 짧은며,
목에는 一線(일선)을 그었을 뿐으로 위엄이 적다.
通肩(통견)의 法衣(법의)에는 주름이 반복되어
형식적이다. 무릎 폭은 넓으나 두 손이 인체에 비해
작은편이다. 臺座(대좌)는 單瓣(단판) 세겹의
仰蓮(양련) 밑에 8각의 中石(중석)이 있고, 그 밑에
귀꽃이 달린 單瓣(단판) 伏蓮(복련)이 있다.
中石(중석)이 너무 높아 안정감이 없으며, 양련과
복련의 표현도 박력이 없다. 佛身(불신)의등에 백
여자에 달하는 명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데, 그 가운
데 "咸通六年(함통육년)"이라는 紀年(기년)이
있어 이불상의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몇 년전 이 불상에 改金(개금)을 하여 철불의 느낌이
없어져버렸다.

대교천 협곡
주상절리는 용암이 굳어지면서 기둥형태를 이룬 모양을 말하는데 이와같은 형상은 동송읍 대교천 현무암 협곡
층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탄강 유역은 한반도 제4기
의 지질 및 지형발달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
을 하고 있는데, 대교천은 한탄강의 지류이나 하상에
현무암층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탄강 유로였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을 하고 있다. 대교천이 한탄강으로
유입하는 부근의 기반암은 주라기의 화강암이다.
대교천 현무암 협곡의 폭은 25m~40m이고 높이는 약
30m로서 협곡의 곡저 또는 하상과 곡벽에서는 화강암
을 부정합으로 피복한 제4기 사력층 또는 추가령 현무암
의 부정합면, 곡벽에서 관찰할 수 있는 용암류 단위와
주상절리등이 있다. 대교천 협곡은 제4기 지질 및 지형 발달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한탄강 유역에서도 가장 수려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436호 지정 보호하고 있다.

철원지석묘군
-위치 :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821-1번지 외 일원
북방식으로 개석(蓋石)아래에 원래 4매의 판석
(板石)으로 된 지석이 석실(石室)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판석 1 개가 없어졌다. 개석의 크기는 4.02m X 3.05m X 0.24(개석넓이
12.26㎡)이며 들어난 석실의 크기는 1.51m X 0.58m
X 0.55m(바닥면적 0.88㎡)이다. 북방형 지석묘군으로
4매의 지석으로 구축하고 그 위에 거대한 개석을 올려놓
았다. 남대천의 강변을 따라 덕령산 협곡의 소분지 등
에 같은 형, 같은 방향, 일정한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구축되었다. 현재 7기 중 2기만 남아 있으며 유적지
부근에서 마제석기류 무문토기류가 출토되었으며,
석기 유물 20여점이 보관되어 있다.

동송읍마애불상
- 위치 :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 산 142 번지
금학산(947.3m)의 중턱에 소재한 마애불상(磨崖
佛像)을 조성한 곳에 삼층석탑과 부도 탑을 구축하려
던 유물들과 사지와 고려초기것으로 추정되는 와당(瓦
當)들이 남아 있으나, 이곳의 사찰과 불상 및 석탑 등
의 조성년대는 문헌상에 남아 있지 않아 미상이나 금학
산맥과 연결되고 있는 보개산 구령주산 중에는 신라
시대(서기 647년)창건한 심원사를 비롯하여 그 후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차례로 창건(석대암,지장암, 성주
암,남암,안양사,복해암 등)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금학산중의 산록에도 많은
사찰과 암자들의 유지가 남아 있다. 마애불상이 있는 주위에는 약 1,200㎡(400평)정도의
평탄한 곳을 택하여 당시 조성되었던 유물(삼층석탑,
2개의 부도탑의 옥개석,와당) 등으로 고대의 큰 사찰
(고려초기)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상인 마애
불상은 큰 자연석암(화강암)을 이용하여 음각된 것으로
온화한 미소와 옷자락을 잡은 법의가 양쪽으로 퍼지는
듯한 조각미의 형태는 신라시대의 기법이라 하겠다. 불상의 머리 부분은 육신체위에 다른 암석으로, 머리
형태의 자연석을(현재)좌측으로 약간 비스듬히 올려
놓아졌으며, 마애불상의 전체 높이는 3m,폭은 2.5m,
머리부분의 높이는 90cm의 큰 석불이다. 현재 이 유지에
는 석탑과 부도의 조각된 유물과 1974년 태고종 여신도
(손계용)가 미륵 암자를 짓고 수도했던 자리와 오랜
역사속에 신도들이 불공을 드렸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84. 6. 2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3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철원향교
-위치: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철원향교는 태봉국 시절 왕건의 사저 자리(現 月下
里)에 설립하였다 하나 건조년대는 미상이다.
조선 선조 원년(서기 1568년) 유림들에 의해 중건되었
으며 임진왜란(서기 1595년)의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인조 15년(서기 1637년) 유림들이 재건하였으며
일제치하에서는 군수 유흥종(柳興鍾)이 대성전과
명륜당 등을 중축하였는데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재산이 몰수돼 고아원으로 활용하던 중에 6.25전란
으로 소실되었다. 1945년 수복 후 일시 포충사(褒忠祠)로 옮겨 모셔졌다가 유림들의 협조와 정부보조로
화지리로 이전하여 관리하다가 원위치 복원계획
(종전 월하초교 부지)에 따라 2004.12 포충사로 임시
이전하였다. 철원향교 대성전 문묘(文廟)에 봉안된
25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五 聖 : 孔子, 顔子, 子思, 曾子, 孟子
- 二十賢 : 薛聰, 程顥, 安珦, 金宏弼, 趙光祖, 李滉, 李珥, 金長生,金集, 安浚吉, 崔致遠, 朱喜, 鄭夢周, 鄭汝昌, 李彦迪, 金麟厚, 成渾, 趙憲, 宋時烈, 朴世采 | |
 도피안사 삼층석탑
- 위치 :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도피동 450
도피안사 3층석탑은 법당 앞에 건맆된 높이 4.1m의
삼층석탑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법당
안에 안치된 철불상의 명문에 의해 신라 경문왕5년(856
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설과, 연화좌대를
사용한 것과 전체 형태의 비례감과 조성수법을 통해
신라하대 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언제 조성되었는지 여부를 떠나 방형 중흥의 신라계
일반형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탑은 방형 지대석 위에 8각의 기단이 축조되어있다.
기잔의 하부에는 8각의 각면에 안상이 조각되어있고,
그 위에 1장의 돌로된 갑석이 놓여있다. 또한 갑석위에는
1장으로 된 8각의 연화대석이 놓여있는데 이곳에는 단엽
16판의 복련이 돌려져있다. 그리고 그 윗면에는 각형 2단의
괴임으로 써 위의 면석을 받게 하였는데, 면석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기단 상부에는 각형의 2단 받침과 단엽 16
판의 양련이 조식된 갑석이 조성되어있다. 그리고 그 윗면
에는 방형의 괴임3단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은 일반형 석탑에서와 같이 방형이고 각면에는
양 우부가 있으며, 옥개와 옥신은 각기 한돌로 되어있다. 옥개받침은 각형이 아닌 반원형으로 제1층은 4단이고,
2.3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상륜부는 보반만이 남아 있다.

김응하장군 묘비
-위치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278번지
(현위치 화지리 산1-1)
요동백 김응하 장군묘정비는 조선조 광해군때(1619) 명나라군 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이름을 떨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9년(1683)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향교골(전 철원부 서화전리 일봉산 밑 역촌동)에 세운 기념비이다.
화강암의 석재를 사용하여 정면을 응시한 거북이 조각 받침을 한 위에 250cm의 높이와 폭 98cm, 두께 33cm의
사면 비석으로 장군의 일대기를 현종 10년(1669) 6월 우암 송시열(좌의정)의 글과 사헌부 지평 박태유의 글씨에
영의정 문곡 김수향의 서제자를 곁들여 제작하였다. 당초에는 화지리 향교골 포충사에 함께 있었으나 6.25
전란으로 포충사우는 소실되고 비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 이 고장 출신으로 육군 제3군사령관이었던 이세호 장군이 1974년 2월 사령부 연병장으로 이전보호중 1984년 4월 3일 철원의 유생 및 철원군수의 노력으로 원위치에서 남쪽
으로 2km 떨어진 곡암산 기슭인 철원읍 화지리 산 1 -1
번지에 봉안하였다.

철원토성및석조물
- 위치 :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1005번지
이 성은 우리나라에서 드문 평탄한 곳에 점토를 재료로
정방형으로 성축된 특이한 성이다. 성내의 넓이는 62,500
㎡(18,906평)의 큰 성이었다.
성내 경지에서 당시 주거했던 흔적과 선사시대 유물들인
무문토기와 석기류등 생활용구들이 출토된 바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시 용골대 마태부의
호군이 하루 밤사이에 성축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구전에 불과하다. 수복이후 수차(1976.8.21,1977.5.27)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현지 답사와 감정에 의해 삼한시대
에 성축된 중요한 성지라 평했으며 그 후 지방기념물로 지정
되었으며 현재 오랜 풍상과 경지정리등 변형으로 인하여
삼면의 성벽은 완폐 되었으며 일면의 성곽(길이 70m,
높이 6m, 위폭 4m)이 남아 있다.

철원노동당사
-문화재구분 : 등록문화재 제 22호 ( 2002년 5월 31일등록)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3-2외 4필지
건축물 이력 이 건물은 북한의 노동당사로 1946년 초에 북한정권하에서
착공하여 지상3층에 연건평 580평 규모의 건축물로 신축
되었다. 조적식기둥 및 벽체로 수직재를 이루고 있으며, 보 및
스라브는 철근콘크리트 수평재로 수직재와 결구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천장은 목조 삼각형지붕틀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입구의 1층에 원기둥 두개를 세워 현관을 두었으며
그 위에는 아치로 장식하여 정면성을 부각하고 있다 건축물 연혁 1946년 북한정권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 노력동원과
모금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당시 주민들은 성금 이란
명목으로 1개리마다 백미 200가마씩의 자금과 인력 또는
장비를 동원시켰으며, 그 해년 초에 착공하여 연건평 580평 규모로 완공 되었다. 1947년 초부터 이 당사에서는 북한
의 중앙당으로부터 지령되는 극비사업과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연천지역주민들의 동향사찰은 물론, 대남공작을 주도한
북한정권하에서 중부지역의 주요업무를 관장했던 곳이다. 이런 이유로 당사 내부구조물 축조작업에는 보안을 위하여
열성당원이외 일반인의 작업동원을 일절 금하였다고하며,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취조 및
구금, 고문 등 한번 끌려 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송장이
되어 나오는 악명 높은 곳으로 당사 뒤편에 있는 반공호에는
현재도 유골, 실탄, 낫, 철사 등이 발견돼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음. 최근에는 통일기원예술제, 열린음악회등
평화기원행사가 열리고 있음.

구은사
-위치:철원군 근남면 사곡2리
철원군 근남면 사곡2리에 위치하는 구은사는 서기 1455년 단종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비분(悲憤)을 품고 산간으로 은거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로 일생을 마친 아홉 선비(김시습, 조상치, 박도, 박재,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박인손, 박계손)의 충절을 모신 사당이다. 아홉 선비는 근남면 육단리, 잠곡리, 사곡리 등의 산간 계곡에 초막(草幕)을 치고 은거하면서 권농(勸農)에 힘쓰는 한편 사곡리 속계천(束溪川)변 행화정(杏花亭)에 모여 바둑을 두면서 세상사를 논했는데 그 후 시운이 맞지 않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니 조선 인조
9년(서기 1631년)에 이르러 이지연(李止淵 : 吏曹參判)선생 등 여러 선비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짓고 매년 봄 가을 추모제를 지냈다. 서기 186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는 철폐의 비운을 맞았으나, 1921년 사당을 재건하고 6·25전란으로 다시 황폐화된 것을 지방유지들의 도움으로 1977년 중건(重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철원 천통리 철새도래지
철원읍 내포리에 있는 샘통은 천연샘물이 사계절
내내 쉬지 않고 솟아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샘이 솟는 0.5ha 정도 크기의 연못을 말하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2㎞이내(약12만평)를 73.7.10 천연
기념물 245호로 지정해서 철새도래지로 관리하고
있다. 9세 말 무렵 태봉국의 궁예왕이 이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통치할 때부터 주민들이 거주해 왔다
고 전해지는 이곳은 철원역을 지나 월정역으로 가는
중간지점인 구릉지대에 있으며, 현무암 지반을 뚫고
솟아나오는 섭씨 15° 가량의 미지근한 온천이 겨울
에도 얼지 않고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기 때
문에 300여년 전부터 백로, 두루미, 왜가리 등 철새
들의 도래지로 유명한 곳이다. 오늘날은 6.25전란으로
샘통 주위에 울창했던 노송과 거목들이 자취를 감추
었고 샘통일대가 모두 농경지로 변했으나 지금도
겨울(매년 10월 중순경부터 다음해 3월경까지)이면
두루미와 기러기 등 수만마리의 철새들이 떼 지어
날아와 서식하고 있으며 샘물을 이용한 크고 작은
보가 설치되어 주변 200여 정보의 농경지에 관수를
하고 있다.

고석정및순담
-위치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725,갈말읍 군탄리 산61
고석정은 한탄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세운 시기를 정확
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
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 있다. 현재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순담은 고석정에서 2㎞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을 일컬
으며, 조선 영조(재위1724∼1776)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1691∼1767)가 요양하던 곳이다. 이름의 유래는,
순조(재위 1800∼1834)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1743
∼1806)가 2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물풀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서 ‘순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기묘한 바위와 깎아 내린 듯한 벼랑 등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계곡에서는 보기 드문 하얀 모래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철원충렬사지
홍명구공은 조선조 선조29년(서기 1596년) 8월 함의 홍성익
의 아들로 경기 연천에서 출생하여 23세에 과거에 급제
한 후 조정의 주요 내직과 외직(경상도 평안도 관찰사)을
두루 거친 문신이며, 병자호란때 김화 진터골에서 적군을
맞아 격전하던 중 인조 15년(서기 1637) 1월 28일 42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 호국의 충신이다.
서기 1636년 병자호란때는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장군과 합세하여 전투조건이
양호한 김화 오성산(김화읍 생창리)의 진터골에 진지를
구축하고 의용병 삼백과 근왕병 이천여명을 지휘하여
청군대장 마부대와 용골대의 대군을 무찔렀다.
싸움이 격렬한 중에 부하 한사람이 공에 피할 것을
권했으나 공은 “군부가 위급을 당했는데, 내 어찌 목숨을
아끼겠느냐, 끝까지 전진하여 칼이 부러질 때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마땅하다.”하면서 결전을 독려하다
순절하니 나라에서는 공에게 이조판서를 증하고 충열이라
시호를 내렸다. 충열비는 조선조 인조23년(서기 1645년)
5월 공이 전사한 김화읍 생창리(향교골)에 유림장군 대첩
비와 동일형으로 나란히 건립(충열비는 우측, 대첩비는
좌측)했는데, 높이 194㎝, 상부폭 94㎝, 하부폭 77㎝,
평균두께 20㎝로서 4개의 석초와 이중석단형식으로
된 화강암 비석이다.

구 철원제2금융조합 건물지
-문화재구분: 등록문화재 제137호 ( 2004년 12월 등록)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 596외 1필지
건축물 이력 본 금융조합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현재는 철근콘크리트로
건축된 금고만 극히 일부 남아있음. 금고만이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건축되었으며 나머지부분은 블록구조로 이루어져
있음.
건축물 연혁 1936년 이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금융(은행) 건물로서
당시 사용된 콘크리트블록이 남아있어 건축 재료사적으로
귀중한 유적지임. 1936년 당시 구 철원 시가에는 석산
은행 철원지점을 비롯하여 동주금융조합, 철원금융조합,
철원 제2금융조합등 4개의 금융기관이 있었는데 본 조합은
그중 의 하나로서 총자산은 49만원 일본 화폐에 대부
실적은 34만원에 이르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이다.

포충사
-위치:철원읍 화지리
포충사는 원래 철원읍 화전리 역촌동에 있었으나, 6.25
전란으로 파괴되고 군부통제 지역에 속하여 1990년 현
위치인 철원읍 화지리 산 1-1번지 곡암산 기슭에 건립
하였다. 포충사는 광해군 11년(서기 1619년)에 여진족
건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3,000여 병력으로 6만의 적군과 접전 최후까지 용전분투, 40세를 일기로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현종 7년(서기 1666
년)에 건립된 사당이다.조선 현종 7년(서기 1666년)에
부(府)의 남4리 화전리 일봉산 기슭(역촌동)에 30간
규모의 사우를 건립하고, 현종 9년 포충사로 사액을 하였다. 현종 10년 (서기 1669년) 명나라 신종이 김장군을
요동백으로 추봉하고 우리 조정에서는 동년 6월 묘정비를
제작하였으며, 숙종 9년(서기 1683년) 송시열이 글을
짓고, 박태웅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서로 제목을 붙여 제작한 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를
사내에 건립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