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낀 날의 세상은 하얀 솜뭉치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솜뭉치 속의 나는 답답함은 고사하고 분가루 같은 향기를 온몸에 솔솔 뿌려준다는 느낌으로 황홀하다
안개 속의 세상은 눈을 아무리 치켜떠 보아도 안개일 뿐, 감춘 속은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낀 날 아침 마당 가운데 서 있으면 안개의 무리들이 무엇인가 속삭이는 듯하다. ‘비가 될까, 햇빛이 될까’ 농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안개가 날씨를 되바꾸는 작업을 아침 시간이, 지나면 결정을 내린다.
내 고향은 산도 야트막하고 바다의 물결도 호수처럼 잔잔하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위로 안개비가 자주 내린다.
자욱한 안개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던 봄날 아침에 울음소리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서른을 갓 넘은 당 숙부님이 병고에 계시더니 끝내 떠나셨다. 당시 군청에 근무하다 몸이 아파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던 차였다.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아도 차도는 없고 점점 기력을 잃어 가시더니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접었다.
초상집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혼절하시고 숙모님은 넋을 잃고 입을 닫았다. 곡소리는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초혼(招魂)의 예식은 뒷날 저녁 무렵이었다. 집안 어른이 지붕 위에 올라가 숙부님의 하얀 저고리를 손에 들고 휘이휘이 돌리며 망자의 이름을 부른다. 번 듯 번 듯 영혼의 몸짓이 날개 짓 하듯 소리 없는 서러움을 토해낸다. 북쪽을 향해 몇 번 부를 동안 대답은 흩어지고 어둠이 짙게 깔린다.
상여가 나가던 날 만장 깃발이 줄을 이었다. 만장 중 하나는 아버지가 쓴 추도문이었다. 무슨 글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손수 써 걸은 만장 깃발을 바라보며 나도 요령 잡이 소리 따라 언니 오빠들과 상여 뒤를 걸어갔다. 자욱하던 안개가 장지로 가는 길을 서서히 열어준다. 저승 가는 길을 훤하게 열어서 떠나는 망자에게 두려움을 없애주고 편안히 가라는 인사다.
시부모와 형제 아들 넷, 대 식구를 거느리며 살아가던 숙모도 어느 날 쉰을 갓 넘어 봄 안개 따라 떠났다. 왜 그렇게 재촉했을까. 사는 일이 천길만길 이어서일까.
시아버지의 강직한 성품에 늘 숨을 죽기고, 젖먹이 아들과 위로 아들 셋을 품어 기르며 살아가자니 몸은 늘 젖어 있었다. 집안일을 거드는 계집애도 할아버지의 호통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밤 몰래 집을 나갔다
남편을 보내고 어디 한군데 마음 의지할 곳 없어 치마폭을 적시며 우시던 숙모님, 안개 속을 헤집는 막막한 날들이었던 고단한 몸이 얼마나 아팠을까. 장바구니를 이고 산허리를 돌아오는 숙모의 가느다란 몸짓이 보일 듯 말 듯 휘청인다.
숙모는 나를 보고 당신 딸이 되라고 했다. 딸 셋 아들 셋인 우리 집, 막내딸 하나쯤 데려가서 말벗 삼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철모르고 뛰어다닐 때, 그 말을 들은 후부터 숙모집에 잘 가지 않았다. 숙모 딸아 될 것 같아서 숙모만 보면 곧잘 도망을 쳤다. 숙모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으면 바른길을 두고 돌아서 집으로 단번에 달려왔다. 엄마가 숙모 집에 심부름을 시키면 가지 않으려 떼를 쓰고, 야단을 치면 숙모가 없는 틈을 타서 몰래 갖다 놓곤 했다.
어디서 숙모가 ‘딸아, 오너라 맛난 것 줄게’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아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와 이불속에 숨곤 했다.
어릴 때 나는 안개를 보고 가마솥 뚜껑에서 새어 나온 김이 모여서 된 것이라, 생각했다. 하늘과 땅의 만남을 이어주는 다리라고도 생각했다. 집도 하늘 속에 둥둥 떠오르고 나는 안개 속에서 세상을 날고 있는 들뜬 기분에 휩쓸리곤 했다. 보일 듯 말듯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안개는 어머니의 뽀얀 젖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안개가 산허리를 두르고 있을 때 저 산을 묶어 도망을 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가졌다.
그림처럼 떠오르는 안개 속 풍경에 당 숙부모님이 떠나신 길이 쓸쓸하다. 마을 들길 바다…. 산길을 타고 먼당에 올라서서 안개비가 내리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기우는 듯 감기는 듯 보드랍고 촉촉한 물기를 손바닥에 받아 입으로 가져간다. 눈물과 안개비가 섞여 흘러내린다.
봄 안개와 함께 떠난 숙모님의 무덤 앞에 서서 생전에 당신 딸이 되겠노라 대답 한번 못했음을 빌어본다.
자욱한 안개가 안개꽃이 되어 봉분 위에 소북이 내려앉는다.
나는 비로소 숙모의 딸이 되어 묘 앞에서 절을 한다.
첫댓글 숙모님 께서 이제는 서운함을 다 삮였을 것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