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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백제-맥제(百濟)의 비밀
나. 만주(滿洲) 백제의 유래는 비류선제(沸流仙帝)로부터.
그런데, 사서(史書)에 보면, 신기하게도 “만주(滿洲)에 백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백제(百濟) 초기이고, 또 그것은 <비류선제(沸流仙帝)-벽라후(碧蘿后)-만후(曼后)>
로 연결되는 <소도(蘇塗) 최고(最高) 명문(名門)>과 관련있다는 것입니다.
1) 장수대제기(長壽大帝紀) 56년{단기2821년/AD488}무진 2월 조(條) -- 3번째 문단(文段)에서 모대(牟大: =동성왕
(東城王))의 말
‘고구리 사초’ 장수대제기 56년 56년{단기2821년/AD488}무진 2월 조(條)는 유난히 깁니다.
그런데 사천 김성겸 선생의 문단 구분에서 3번째에는 매우 특이한 말이 나옵니다.
(**) 원문(原文)과 해석 옮김 (**)
◎ <毗處>移居<月城>而賑四窮放獄囚, 得六眼龜, 有腹文難解, 求其解者云. <牟大>與<魏>相絶而彰<魏>惡于<南齊>,
故<登州>守將<李延>潛師島中, 聞<牟大>來獵, 而欲擒之. <牟大>探知遣兵相戰, 延失利而歸. <牟大>漸復北進. 監國
皇帝恐上勞心而不聞.
○ <비처(毘處)>가 거처를 <월성(月城)>으로 옮기고 사궁(四窮)을 진휼하고 옥(獄)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고 나서
눈(眼)이 여섯인 거북을 얻었는데, 복부에 해득하기 어려운 문양이 있어, 그것을 풀어줄 사람을 찾는다 하였다.
<모대(牟大)>가 <위(魏)>와 단교하고 <위(魏)>의 악행을 <남제(南齊)>에 밝혔다.
그랬더니, <등주(登州)>의 수장(守將) <이연(李延)>이 몰래 사람을 섬으로 보내서 <모대(牟大)>가 사냥하러 왔음을
알아내고는 그를 사로잡고자 하였다.
이에 <모대(牟大)>가 알아채고 군병을 보내서 맞싸웠으나 시일이 걸려 불리하자 돌아왔다. <모대(牟大)>는 점차로
땅을 되찾으며 북진(北進)하였다. 감국황제(監國皇帝)는 상(上)이 노심(勞心)할까를 걱정하여 불문(不聞)에 부쳤다.
- 각설(却說)
이 이야기에서 맨 마지막 구절 ‘<牟大>漸復北進. 監國皇帝恐上勞心而不聞.’ 즉 “<모대(牟大)>는 점차로 땅을 되찾
으며 북진(北進)하였다.
감국황제(監國皇帝)는 상(上)이 노심(勞心)할까를 걱정하여 불문(不聞)에 부쳤다.”은 고대사의 비밀(秘密)을 움켜진
문장입니다.
먼저 유념(留念)하여야할 것이 “모대(牟大)가 땅을 되찾으려고 북진(北進)하였다.”의 북진(北進) 대상이 어느 나라
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북진대상이 바로 위(魏) 즉 북위(北魏)를 뜻하는 것입니다. 절대 고구리(高句麗)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만약에 고구리(高句麗)가 북진대상이었고, 그런 행동을 하였을 때, 감국황제(監國皇帝) 즉 장수왕(長壽王)의 아들인
문자왕(文咨王)이 “부왕(父王)이 걱정할까?” 알리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감국황제(監國皇帝)가 걱정한 것은 연로(年老)하시고, 정치에 손을 뗀 장수왕(長壽王)께 각‘복잡한 국제관계’에
다시 노심초사(勞心焦思)할 것을 우려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가 천자국(天子國)에 바치는 조공(朝貢)대상을 “북위(北魏)에서 남제(南齊)로 바꾸었다.”라는 사실
자체가 당시대에는 천자국(天子國)에 제후국(諸侯國)의 세금을 거두워서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소도(蘇塗)를 통해,
신시(神市)의 화폐로 바꾸어 주는 ‘국제(國際)-조공(朝貢)-공정(工程)’에서 “최종 신시(神市)의 화폐 포괄적 수취인
(受取人)”을 북위(北魏)에서 남제(南齊)로 바꾼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결정 자체가 사실은 북위(北魏)를 멸망시키려는 계획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고, 모대(牟大) 즉 동성왕(東城王)은 정확히 이 수순(隨順)을 밟고 있었으며,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신라
(新羅)와 고구리(高句麗)의 협조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동성왕(東城王)의 북위(北魏)를 멸망케한 전략은 이 ‘씨리즈’의 마지막에 <네명의 전략가 -광개토태왕(廣開土
太王),동성왕(東城王),의자왕(義慈王),흥무대왕(興武大王)>에서 집중적으로 거론할 예정입니다.)
<牟大>上書自訴, 曰;臣祖<溫祖>, <東明>之親子, 而<琉璃>之義子也 .(**) 故封以<汗南>之地, <勾茶>之國.(**)
<모대(牟大)>가 글을 올려 스스로 하소연하길; (**)"신(神)의 조상 <온조(溫祖)>는 <동명(東明)>의 친아들이고
<유리(琉璃)>의 의붓아들이었기에, <한남(汗南)>의 땅과 <구다국(句茶國)>의 땅에 봉함을 받았었습니다.(**)
- 각설(却說),
바로 이 문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행동(荇東)과 구다국(句茶國)>의 반란을 맞이하여 추모대제(芻牟大帝)께서
환나국(桓那國)여왕 계후(桂后)와 행인국(荇人國)의 벽라후(碧蘿后)의 도움 때문에 승리(勝利)하게 되자,
그 구다국(句茶國)의 땅을 백제(百濟)의 봉지(封地)로 주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후(桂后)의 딸인 만후(曼后)께서 비류선제(沸流仙帝)와 결혼하시자, 구다국(句茶國)의 땅은 ‘백제의
봉지’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 구다국(句茶國)은 대흥안령 산맥의 중간에 눈강(嫩江)이 있는 제제합이(齊齊哈爾: 치치하얼)과 합이빈(哈爾濱:
하얼빈) 사이에 있는 나라로 추정이 됩니다.
따라서 만주(滿洲)백제는 ‘백제초기’부터 존재하였던 것이 ‘고구리 사초’에 의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다국(句茶國) 이외 “한남(汗南)이란 땅을 봉지(封地)로 받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위치를 양자강과
한수(漢水)가 갈라지는 오늘날 무한(武漢)으로 추정됩니다.
모대(牟大) 즉 동성왕(東城王)이 “이 두곳의 봉지(封地)가 원래 백제의 소유였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한남(汗南)즉
오늘날의 무한(武漢) 땅을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 ‘고구리사초’의 기록은 비류선제(沸流仙帝)와 온조왕(溫祖王) 때부터 동성왕(東城王)때까지 구다국(句茶國)
이 있었던 지역은 계속 ‘백제의 땅’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後世稍遠不思二帝之志, 分爭境土. <浿河>慘事, 實所愰惧. 先臣<盖鹵>獻首消雪, 則兄弟之國不可久缺恭. 惟監國皇
帝陛下至仁弘義, 上念祖宗一視之恩, 下視大國子育之澤, 還付<汗南>之地, 使此骨肉得以容足報本, 則臣當羽翼得遂
<東明>大計, 西入中原, 誅斬諸蘖樹. 此天孫之裔, 幸甚甚甚.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멀어졌으며, 두 분 황제의 뜻하신 바를 저버리고 나뉘어져서 땅과 경계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패하(浿河)>참사는 실로 황구할 따름입니다. 이전의 신하 <개로(盖鹵)>는 머리를 바쳐 더러움을 씻었음인즉,
형제의 나라들이 오래도록 서로의 직분(職分)에 흠결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감국황제(監國皇帝)폐하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널리 올바르시니, 위로는 조종님들이 베푸신 한 번의 은혜를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큰 나라가 자식을 기르는 은택으로써 <한남(汗南)>의 땅을 돌려주시어서 이 골육이 모양새를
갖추어 뿌리에 보답할 수 있게 하여주시면, 신은 훨훨 날아서 <동명(東明)>의 큰 꿈을 좇아 서쪽의 중원(中原)으로
들어가 버릇없는 싹수들을 주살하여 참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이 천손(天孫)의 후예는 무지무지한 행운으로 여기겠습니다."라 하였다.
- 각설(却說)
‘고구리 사초’에는 이처럼 노골적(露骨的)으로 모대(牟大) 즉 “동성왕(東城王)이 ‘북위 멸망’계획이 있으니, 이를 쉽게
진행시키기 위해서 한남(汗南)땅을 돌려주십시오.”하는 기록이 적혀있는 것이지요.
監國笑, 曰;<毗處>修<三{年}>移<月城>,(**)虜不得安居. <熊津>權且誘引擒之, 未晩姑任其爲.(**)
이에 감국(監國)은 웃으며, 이르길; "<비처>가 <삼{년}성>을 고치고 <월성(月城)>으로 이사하였는데, 놈은 편안히
거주(居住)하지 못할 것이오. 오래지 않아, <웅진>이 사태를 살피며 놈을 꼬여서 사로잡으려 하고 있으니, 그에게
그 일을 맡깁시다.(**)"
- 각설(却說)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비처(毘處)는 바로 신라의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을 뜻합니다.
당시 백제는 황하(黃河)를 통제할수 있는 칠중하(七重河)의 관미성(關彌城)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때, 또다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북성(北城)을 장수왕(長壽王)때 잃어버렸으며, 또 한남(汗南) 즉 양가강과 한수(漢水)의
갈림길인 한남(汗南)이 이때에는 고구리(高句麗)가 관장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쉽게 말씀드려서 문자왕(文咨王)때에는 놀랍게도 중국의 황하(黃河)와 양자강이 모두 고구리(高句麗)의 완벽한
통제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할수 있는 일은 해외(海外)의 백제의 세(3) 세력을 끌어모아서 중국대륙에
있는 하나의 나라를 집중 타격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백제가 이때 지니고 있었던 세(3) 세력이란 것은 첫째가 광동성(廣東省)및 사천성(四川城)의 세력이고,
둘째가 구다국(句茶國)이 있었던 만주(滿洲)-백제이고, 셋째가 일본열도에 있었던 백제세력이었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라의 비처(毘處) 즉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굳건한 방비를 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삼년성(三年城)과 월성(月城)을 쌓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고구리(高句麗)의 감국황제(監國皇帝) 즉 문자왕(文咨王)은 이런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의 행태를 보고
웃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을 꼬여내어서 ‘북위(北魏) 멸망’의 협조자(協助者)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 “왜 이런 것이 가능한가?”함은 바로 관경삼국(管境三國)의 소도(蘇塗)를 통해, ‘국제(國際)-조공(朝貢)-공정(工程)
에서 최종수취인인 천자국(天子國)을 바꿀때, 신라와 고구리의 협조를 받으면 됩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이 ’씨리즈‘ 마지막의 <네 전략가 -광개토태왕,동성왕,의자왕,흥무대왕>에서 상론(詳論)
하기로 합니다.)
원문(原文)에서 “<熊津>權且誘引擒之” - 즉 “오래지 않아, <웅진(熊津)>이 사태를 살피며 놈을 꼬여서 사로잡으려
하고 있으니,..”에서 “‘사로잡히는 대상’이 과연 누구인가?”는 양의적(兩意的)입니다.
비처(毘處) 즉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이 동성왕(東城王)의 ‘꼭두각시’로 이용되는 것을 “사로잡협다.”고 표현할수
도 있고, “또 북위(北魏)의 왕(王)이 사라잡혔다.”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감국황제(監國皇帝)는 동성왕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북위(北魏)가 멸망되겠구나.
좋은 구경꺼리가 생겼다.”는 투로 말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지요.
2) ‘고구리 사초’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 3년(단기2317년/BC17)갑진, 정월 기사(記事)
그런데, “만주(滿洲)에 백제 땅은 초기(初期)부터 있었다.”는 것은 의외로 ‘고구리 사초’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
3년(단기2317년/BC17)갑진, 정월 조(條)에 아주 뚜렷하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三年甲辰,正月, (**)以<順奴>爲<沸流>治, 都<彌鄒忽(密山)>(**). 以<灌奴><桂婁>爲<溫祚>治, 都<牛壤>.
<涓奴><黃龍>(**)<荇茶>(**)<卑離>上與<召>皇后治之,以慰<召>后之心
◎3년(단기2317년/BC17)갑진, 정월,
(**)<순노(順奴)>는 <비류(沸流)>가 <미추홀(彌鄒忽)(밀산)>에서 다스리고,(**)
<관노(灌奴)>와 <계루(桂婁)>는 <온조(溫祚)>가 <우양(牛壤)>에서 다스리고, <연노(涓奴)><황룡(黃龍)>(**)
<행다(荇茶)>(**)<비리(卑離)>는 상(上)과 <소(召)>황후가 다스리도록 하여 <소(召)>후의 마음을 위안토록 하였다.
- 각설(却說)
즉 위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 3년(단기2317년/BC17)갑진, 정월 기사에는 “순노부(順奴部) 자체를 비류(沸流)가
미추홀(彌鄒忽)에서 다스리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즉 산동반도 청주(靑州)에 있는 미추홀(彌鄒忽)에서 이미 대흥안령 산맥의 오늘날 제제합이(齊齊哈爾: 치치하얼)
근처에 있는 순노부(順奴部)를 총괄하는 것이 백제초기에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모대제(芻牟大帝)와 소서노(召西奴) 어하라(於瑕羅)’께서 공동관리하는 것 가운데 행다(荇茶)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는 행인국(荇人國)과 구다국(句茶國)을 합성(合成)한 용어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소서노(召西奴) 어하라(於瑕羅)가 완전히 백제로 돌아간 후에는 이 행다(荇茶) 지역 다시 말하면 구다국
(句茶國)지역은 백제의 봉지(封地)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백제초기에 구다국(句茶國)의 땅을 비류(沸流)에게 맡기는 일이 벌어졌는가?” 이는 지금와서 보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일단 행인국(荇人國)의 왕녀(王女)인 벽라후(碧蘿后)께서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왕후가 되었고, 또 흑룡강(黑龍江)
및 목단강(牧丹江) 유역에서 표국(驃局)-국가(國家)이면서 아시아(Asia)최고의 무가(武家) 가문인 환나국(桓那國)
의 왕녀(王女) 만후(曼后)께서 또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왕후(王后)로 계셨기 때문에, 이 ‘만주지역’의 봉지(封地)
를 비류선제(沸流仙帝)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0. 훈가(訓歌)와 ‘토습수함(土濕水鹹)’의 미스테리(mistery)
그런데, 이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정성일 님’이 해석한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유리(琉璃)의 등장으로 몹시 고구리(高句麗) ‘안’의 소서노(召西奴)와 고주몽, 그리고 비류및 온조(溫祚)와
유리왕과의 관계가 복잡해져서 이윽고 이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내려왔을 때, 비류선제
(沸流仙帝)께서 불렀다는 훈가(訓歌)라는 노래입니다.
가. 훈가(訓歌)가 들어있는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정성일 선생’이 해석한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에 훈가(訓歌)가 나오는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二年甲辰三月太后與乙音歸彌鄒忽, 是年正月王以末曷在北界勇而多詐欲繕兵績穀以究拒守之討, 群臣皆曰若非乙音
不可乃召乙音爲右輔太后亦以此機歸我而重其勢篤臣之奔來者陸續不絶. (*)乙音總執內外兵馬事.(*)
2년(B.C.17) 갑진 3월 태후(太后)와 을음(乙音)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왔다. 이해 1월에 왕이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에 있으므로 (말갈사람들이)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아 병장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아서 마땅히 막아 지킬 계획
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을음(乙音)이 아니면 불가하다고 하니 이내 을음(乙音)을 불러 우보
(右輔)로 삼고, 태후(太后) 역시 이번 기회로 우리에게 돌아오니, 그 세력이 많은 자 중에 믿음직하고 성실한 많은
신하들이 달아나 육지로 오는 자가 계속 끊이지 않았다.
을음(乙音)에게 거느리게 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나라 ‘안과 밖’의 병사(兵事)에 관한 일을 맡겼다. (*)
-각설(却說)
여기서 을음(乙音)이란 사람이 저 산동반도 제수하류의 칠중하(七重河)의 모든 토목공사를 총괄하였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안팎의 병마사(兵馬事)를 맡었다.”는 것은 수리시설(水利施設)로써 병마(兵馬)와 선박(船舶)의 인프라
(infrastructure)를 설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王以親妹甘兒妻王弟溫祚, 甘兒朱蒙王之女也. 能騎馬善射, 類利欲通之爲後宮, (*)阿爾后曰我已見欺悔之無及汝宜從
太后歸依胞兄,(*)甘兒亦心鄙類利無義多詐,
왕(王)이 친누이 감아(甘兒)를 동생 온조(溫祚)의 처(妻)로 삼았는데, 감아(甘兒)는 주몽왕의 딸이다.
능히 말(馬)을 타고 활쏘기를 잘한다. 유리(類利)가 욕보이기 위하여 후궁(後宮)으로 삼았다. (*)아이후(阿爾后)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속이는 것을 보았고 후회(後悔)하지만 돌이킬수 없다. 너는 마땅히 태후(소서노)를 모시고 같은
어머니의 오빠에게 의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유리(類利)는 감아(甘兒)의 같은 아버지의 오빠).(*) 감아(甘兒) 역시
유리(類利)가 의롭지 못하고 속임이 많아서 마음이 더러웠다.
從太后歸彌鄒忽至, 是與溫祚相婚於東明樹下, 大宴君臣太后飮酒樂之命王與后起舞而歌,
(**)其歌曰奉吾母爲王, 吾大愛吾弟爲拖, 吾妹願我子孫樂無窮而不盡, 後人掄孝反者必以比, 歌爲訓.(**)
(감아(甘兒)가) 태후(太后)를 모시고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렀는데 이때 온조(溫祚)와 더불어 동명수(東明樹) 아래
에서 혼인을 하였다. 큰 잔치를 벌여 군신(君臣)들과 태후(太后)가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였는데 왕(王)과 왕후(王后)
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 노래를 부리시기를
“우리 어머니를 받들기를 왕(王)으로 하나니...,
나의 큰 사랑은 내 동생이 (세상을) 이끔이로다.
나의 여동생에게 원(願)함이 있으니, 내 자손을 낳아 즐겁게 끊임없이 이어질지니.
후인(後人)들아 효(孝)를 선택하라!! 반(反)히여도, 반드시 이로써!!”하셨다.
이 노래를 가르침으로 삼았다. (**)
- 각설(却說)
이 노래는 매우 감동적인 것입니다. 즉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는 제왕(帝王)으로써 권력을 장악할 뜻이 없었던 것
이지요. 그래서 ‘배달어미’셨던 소서노(召西奴)를 오직 왕(王)으로 받들며, “비류선제(沸流仙帝)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내동생이 천하를 이끔이로다!”j고 하신겁니다.
<吾大愛吾弟爲>은 문장의 주어(主語)가 오(吾)이고 동사(動詞)가 대애(大愛) 그리고 그 목적어가 오제위타(吾弟爲拖)
즉 “나 아우가 세상을 이끄는 것을 하는 것”인 것이지요.
즉 처음부터 비류(沸流)는 백제의 왕권(王權)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음이 들어납니다.
그다음 <吾妹願我子孫 樂無窮而不盡>에 의해서 이것이 더욱 확실시 되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온조(溫祖)와 감아(甘兒)의 결혼식 ‘뒷풀이’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것도 왕후(王后)인 벽라후(碧蘿后)와 함께 말입니다.
아마도....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선창(先唱)하시고, “춤과 노래”에 유명한 행인국(荇人國) 공주인 벽라후(碧蘿后)
가 멋진 무용(舞踊)과 함께 반복(反復)해서 불렀겠지요..
아무튼 그 다음 구절이 <吾妹願我子孫 樂無窮而不盡,>입니다.
‘吾妹願我子孫’은 “나는 내 누이에게 나의 자손(子孫)을 낳기를 원(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백제왕(百濟王)의 왕권(王權)의 후보(候補)가 되는 자손(子孫)을 “비류(沸流)와 벽라후(碧蘿后)는 낳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지요.
그 몫은 이미 온조(溫祚)와 감아(甘兒)에게 있고, 이것이 내가 간절히 원(願)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 뒤의 ‘樂無窮而不盡’은 그런 자손(子孫)들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하게 번져나가되 그 앞의 락(樂) 즉 “서로 즐겁게”
번져나가라!! - 는 기원(祈願)인 것입니다.
이 노래는 참으로 그 가사(歌辭)가 아주 현묘(玄妙)합니다.
마지막 구절이 ‘사람의 혼(魂)을 뺄 정도로’ 명귀(名句)중 명귀(名句)입니다.
후인윤효(後人掄孝)!! 반자필이차(反者必以此)!! - 먼저 앞의 후인윤효(後人掄孝)에서 륜(掄)의 뜻은 “선택하다.”
입니다. 그런데 온조(溫祚)와 감아(甘兒)의 후손(後孫)이 나의 자손(子孫)인데, 이들이 이 세상에 가득찰정도로
무궁무진(無窮無盡)하게 뻗어나가라는 기원(祈願)을 앞에서 하였으니깐, 이 노래를 부르는 비류선제(沸流仙帝)는
‘백제의 모든 후손들에게 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후인(後人)들아! 효(孝)를 선택하라!” 이는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으로써 “내가 권력욕에서 초연했던 소도(蘇塗)의
정신을 지녔고, 이 정신을 지닌 조상(祖上)으로써 따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를 바로 이어가는 뒷 귀(句)가 완전히 사람의 넋을 뺍니다.
앞 귀의 “선택하라”는 뜻의 륜(掄)의 여운(餘韻)이 아직 살아있는데...반자필이차(反者必以此)가 나오는 것이지요.
즉 효(孝)를 반(反)하는 사람들 역시 ‘나 비류(沸流)를 기준으로 반(反)하든 말든 하거라!“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훈가(訓歌)를 들으면, 권력다툼에 찌들린 이 지구촌에서 “어찌 이런 노래를 부른 사람이 있다니..?!!” 하는 경악
감이 몰려옵니다.
중요한 것은 비류왕(沸流王)과 벽라후(碧蘿后)가 온조(溫祚)와 감아(甘兒)의 결혼식 피로연(披露宴)에서 이 훈가
(訓歌)가 불러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이 훈가(訓歌)가 불러진 것이 <비류왕(沸流王) 2년 3월 >다시 말하면, 비류왕(沸流王)
께서 벽라후(碧蘿后)와 결혼하셔서 미추홀(彌鄒忽)을 개척하는 초기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과연 앞으로 딸만 셋 낳을지, 혹은 아들을 낳을지?” 알수 없는 상황에서 부창부수(夫唱婦隨)한 노래
가 이 훈가(訓歌)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노래는 그 당시 아시아(Asia)전역에 깔린 소도(蘇塗)를 통해 번져나갔을 노래가 틀림없습니다.
소도(蘇塗)의 선제(仙帝)가 아니면 감히 부를 수 없는 위대한 노래인 것이지요.
아무튼, 하늘도 무심(無心)치 않아, 이 두 부부(夫婦) 사이에는 어머니를 빼어닮은 절세미인(絶世美人)들이 태어났고,
또 이 딸과 결혼하고 싶은 마한왕(馬韓王)이 “차라리 부족한 아들에게 내 직위(職位)를 물려주고, 온조(溫祚)에게
섭정(攝政)을 하게 하고, 나는 백제 소도(蘇塗)의 선왕(仙王)이 되어 저 절세미인(絶世美人)을 아내로 거느리는 것이
낳겠다.”는 생각을 품게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지요.
나. 토습수함(土濕水鹹)과 국호(國號)개정(改定) 미스테리(mistery)
그런데, 이런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미추홀(彌鄒忽)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혀 엉뚱한 이미지
(Image)로 그려져 있습니다.
1)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을 위해서 애초부터 먼저 개발해야하는 미추홀(彌鄒忽)
그것은 오늘날 하남성(河南省) 석인산(石人山)인 북한산(北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서 도읍지를 구할 때,
온조(溫祚)는 하남(河南) 위례성을 택하셨으나, 비류(沸流)는 해빈(海濱)인 미추홀(彌鄒忽)로 가기를 바랬기에
신하(臣下)들이 말렸으나, 비류(沸流)가 고집을 피해서, 결국 둘로 갈라져서 각기 도읍지를 개척하였다는 것의 내용
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미추홀(彌鄒忽)측이 ‘땅이 습(濕)하고, 물이 짜서’ 즉 토습수함(土濕水鹹)해서
나중에 하남 위례성에 와서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즉 “즉 해빈(海濱)을 개척하자고 했을 때, 신하(臣下)들이 말리고, 이에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각기 분열(分裂)되어 도읍지를 경쟁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잘못 기록하고 있음이 분명
합니다.
왜냐?
제수(濟水)의 하류(下流)가 칠중하(七重河)로 관통되어서 조수(潮水)가 에스컬레이터(escalator)역활을 해서 단숨
에 대야택(大野澤)까지 연결되고, 대야택(大野澤)에서 뒤집힌 컵(∩)모양으로 제수(濟水)가 흘러서 황하(黃河)의
범람시에도 가장 안전한 수운(水運) 수단이 됨을 잘알고 있는 삼한(三韓) 사람들이 “해빈(海濱)인 미추홀(彌鄒忽)을
개척 안한 상태에서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을 개척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는 너무나 잘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즉 처음부터 북한산(北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서 지세(地勢)를 살피고는 “백제 수도(首都)를 오늘날 형양시
(滎陽市)인 하남 위례성(尉禮城)에 만들어야겠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그 관문(關門)인 제수(濟水) 하류(河流)의
칠중하(七重河)가 있는 미추홀(彌鄒忽)에 대토목공사를 일으켜야하겠다.” 고 오늘날 석인산(石人山)에서 의견을
맞춘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부터 해운(海運)이 주업(主業)인 삼한(三韓)사람들에게는 ‘백제 최대의 소도(蘇塗)’를 산동반도 칠중
(七重)-구지(衢地)에 만들어야만 하는데, 소도(蘇塗)의 선왕(仙王)이신 비류왕(沸流王)께서 직접 이일을 하셔야할
듯 합니다.“라는 유기적 협조 차원에서 서로 개척(開拓)해야할 지역을 나눈 것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칠중(七重)-구지(衢地)가 “토습수함(土濕水鹹)함을 비류(沸流)가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에 돌아
와서 까지 계속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사실인듯 합니다.
2)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토습수함(土濕水鹹)을 부끄러워 한 까닭 - “혼자만 돌아왔다”는 것.
즉 이처럼 “비류선제(沸流仙帝)가 토습수함(土濕水鹹)한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기록과 사실이 확대해석해져서
삼국사기 기록을 할 때, “비류(沸流)가 고집을 피우고 미추홀로 가더니만, 이윽고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에
돌아왔다.”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토습수함(土濕水鹹)한 것을 부끄러워했을까?”를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칠중하(七重河)가 ‘깔대기 구조’를 함으로써 자연적(自然的)으로 해수(海水)를 웅진강(熊津江)의 조수(潮水)에스칼
레이터()escalator)로써 대야택(大野澤)까지 신속운반하는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었음은 여러번 말씀을 드린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조수(潮水)가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 구조’로 치올라가고, 다시 빠지는 것을 수백년 동안 하면,
‘강(江) 뚝’이 저절로 형성됩니다. 그런데 조수(潮水) 물이 많이 밀려올 때에는 이런 자연스럽게 형성된 ‘강(江) 뚝’
을 넘어서 ‘강(江) 뚝’ 넘어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땅에 소금기가 있게 되면, 함초(鹹草)같은 특이한 식물 이외에는 전혀 살수가 없습나다.
이 이야기는 칠중하(七重河)가 있는 지역에서는 ‘소금기’ 때문에 식물(植物)이 자라지 않는 불모지대(不毛地帶)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산동반도 동녘은 불모지대(不毛地帶)로 버려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불모지대(不毛地帶)에 논밭을 가꾸고, 수목(樹木)이 우거진 옥토(沃土)를 만드려면, ‘소금기’를 땅에서
빼는 방법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그 당시의 기술로써 ‘소금기’를 빼는 방법은 먼저 자연적으로 이미 있는 칠중하(七重河) 주변의 자연의
‘강(江) 뚝’ 위에 인위적인 제방(堤防)을 다시 쌓고, 곧곧에 수문(水門)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저 협산(峽山)-대수고(大水庫)와 백맥(百脉)-대수고(大水庫)에 거대한 인위적
(人爲的)인 산중호수(山中湖水)를 만들고, 수류(水流)를 조절할 수 있는 갑문(閘門)들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는 칠중하(七重河) 주변의 땅을 축력(畜力)을 활용해서 ‘쟁기’로 갈고, 그리고 나서 교래하(膠萊河)와
유수(維水) 상류에 형성된 두 대수고(大水庫)의 물을 방류(放流)시켜서 그 물이 다시 칠중하 주변에 있는 제방
(堤防)의 수문(水門)을 통해서 들어왔다가, 쩔어붙은 소금기를 녹여내서 빠지게 하는 행위를 수없이 하는 것이지요.
쉽게 말씀드려서 일종의 빨래빠는 것과 갈은 행위를 계속하면 ‘소금기’는 제거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간척(干拓)공사를 하였을 때 ‘소금기’를 빼는 것이 결국은 배수(排水)시설을 통해서 물에 의해 저절로
소금기가 나가도록 하고, 몇 번동안 방치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청주(靑州) 즉 미추홀(彌鄒忽)의 정확한 위치는 ‘솟대 님’께서 “[re] 백송님의 미하彌河설에 따른 관미성
(關彌城)위치 추정”에서 관미성(關彌城)으로 추정한 운문산(雲門山)을 좌계는 미추홀(彌鄒忽)이 들어섰던 곳으로
봅니다.
이곳은 ‘구름의 문(門)’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높은 곳이지요.
따라서 ‘소금기’가 가득찬 칠중하(七重河) 주변을 개척할 때에 유일하게 소금기가 있는 조수(潮水)물이 안들어오고
수목(壽木)이 있고, 또 사람이 거처할 수 있는 곳은 이 운문산(雲門山)의 근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나...다른 곳은 ‘소금기’가 있어서 불모지대(不毛地帶)일 수밖에 없고,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시설을 해서
계속 ‘소금기’를 빼는 작업을 몇 년 동안해도...소금기는 여전히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는 바로 이점을 부끄러워 하신 것입니다.
즉 “수많은 갑문(閘門)과 제방(堤防)을 설치해보았자, 이는 인공적(人工的)인 조수(潮水) 에스킬레이터(escalator)
를 만들어 협산(峽山)대수고와 백맥(百脉) 대수고의 물을 방류시켜 가속화(加速化)해서 한순간에 대야택(大野澤)
까지 이르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는 당신 자신이 살아생전에 칠중하(七重河) 주변이 옥토(沃土)가 되어 논에는
쌀이 나고, 밭에는 채소가 가득히 나며, 또한 수목(樹木)이 울창(鬱鬯)하고, 칠중하 제방을 넘어서 가끔 있는 호수
(湖水)에는 새(鳥)들이 나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牛)가 땅을 갈고, 협산(峽山)및 백맥(百脉) 대수고(大水庫) 물을 마치 빨래하듯이 칠중하(七重河)
주변의 불모지대(不毛地帶)를 빨아대도, 여전히 식물(植物)을 자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渦中)에 있었으니 칠중하(七重河)의 모든 지역은 토습(土濕) - 땅이 습(濕)할 수밖에 없고, 또 ‘빨아진
물’이 나갈 때는 수함(水鹹) - 물이 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이 때 비류선제(沸流仙帝)는 저 비성(泌城)-외액(外掖)에 몰려드는 ‘배달화백의 ’말발‘을 대동(帶同)
한 사신(使臣)들과 귀빈(貴賓)들을 그토록 애를 쓰고 만드신 조수(潮水)-에스칼레이터(escalator)를 만후(曼后)의
지휘를 받는 환나국(桓那國) 경호무사들과 벅수군의 철저한 호송(護送)아래, 때로는 대명호(大明湖)에서, 때로는
양산박(梁山泊)에서 때로는 대야택(大野澤)에서 때로는 하남 위례성의 궁남지(宮南池)에서 선제(仙帝)로써 배달
화백을 계속해 가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비성(泌城)-외액(外掖)에서 배달화백에 참여키 위해서 오가는 천독(天毒)들과 그들의 ‘말발’을 지닌 사신
(使臣)및 귀빈(貴賓)들은 “땅이 습(濕)하고, 물이 짠 경험”을 전혀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
래주(萊州) 즉 비성(泌城)의 외궁(外宮)은 원래부터 “봉래(蓬萊)에 비유할 정도로” 산림이 우거지고, 경관(景觀)이
아름다웠고, 한순간에 조수(潮水)-에스칼레이터(escalator)를 타고 이동해 들어왔기 때문에, 칠중하(七重河) 지역
에서 “이 땅을 반드시 옥토(沃土)로 만드리라.”는 처절한 비류선제(沸流仙帝)를 따르는 사람들의 투쟁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무튼, 비류선제(沸流仙帝)가 돌아가시자 “옥토(沃土)가 되면 뭘해...비류선제(沸流仙帝)는 돌아가셨는데, 하고
죄다 하남 위례성으로 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다시 칠중하로 돌아가서 놀라운 현상을 발견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三國史記)에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문(原文)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安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尉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비류(沸流)는 미추(彌鄒)가 “땅이 습(濕)하고 물이 짜셔” (백성들이) 편안히 거(居)하지 못했다.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都邑)이 솥(鼎)처럼 안정화되어 인민이 안태(安泰)하기에 부끄러움과 후회(後悔)하면서 돌아갔다.
(비류(沸流)의) 신하(臣下)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尉禮)로 돌아왔다.
(**) 후(後)에(다시)와보니 백성들이 즐거히 따르고 있어(**) (원래의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라고 개칭하게 되었다.
- 각설(却說)
남당유고(南堂遺稿)에 의하면, 비류왕(沸流王)은 미추홀(彌鄒忽)에서 칠중(七重)-구지(衢地)에 대토목공사를 일으
키면서, 지내다가 중간에 하남(河南) 위례성(尉禮城)에 와서 역시 소도(蘇塗)의 선왕(仙王)으로써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는 오늘날 밝혀진 사실 즉 하남 위례성(尉禮城)에 인공호수인 궁남지(宮南池)가 있었고, 또 황하(黃河)와 양자강을
있는 오늘날 운하(運河)도 있었으니깐 말입니다.
그런데 위 원문(原文)의 내용을 보면,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하남 위례성으로 왔을 때, 매우 특이하게도 그 백성
(百姓)은 따라오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미추홀(彌鄒忽) 주변에 있는 신하(臣下)들과 백성들은 비류선제(沸流仙帝)는 단군(檀君)으로써 당연히 하남
위례성 궁남지(宮南池)에 가서 정무(政務)를 보아야하지만, “우리들은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평생의 업적으로
만드신 칠중(七重)-구지(衢地)가 옥토(沃土)로 바뀌는 것을 보고 가겠습니다.”고 우겼고, 이런 신민(臣民)의 뜻을
꺽지 못하고 혼자만 온 것에 대해서 몹시 돌아가시는 순간 까지 몹시 “부끄러워하셨고, 또 후회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만 습기(濕氣)많고 물이 짠 지역에 두고 오다니... 강권(强權)을 발동하더라도 끌고 왔어야하는데...”하셨
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비류선제(沸流仙帝)가 돌아가시자 신기하게도 이 미추홀(彌鄒忽)에 있던 신민(臣民)들은 죄다 위례성
(尉禮城)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원문(原文)의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尉禮’로 나타는 것입니다.
이는 이들이 비류선제(沸流仙帝)가 돌아가시기 전(前)에 선제(仙帝) 당신께서 “평생 가꾼 곳이 식생(植生)이 잘사는
옥토(沃土)로 변했습니다.”라는 보고를 드리고 싶어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前)에 비류선제(沸流仙帝)가 돌아가시니깐, “선제(仙帝)께 보람을 드리려는
일도 이제는 허사(虛事)가 되었다.”라고 생각하고는 죄다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워낙 어릴때부터 병마(病魔)에 시달리는 허약(虛弱)한 체질이신지라, 말년에 “평생
개척한 미추홀(彌鄒忽)이 드디어 생명이 우거진 옥토(沃土)가 되었습니다. 기뻐하십시오.” 라는 보고를 드리고,
이에 기운(氣運)을 얻기를 바랬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류선제(沸流仙帝)가 돌아가시자, 미추홀(彌鄒忽)의 신민(臣民)들은 “이곳이 옥토(沃土)가 되면 뭘해!! 그
분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더 이상 볼수가 없으니... 작업중단! 다들 하남 위례성으로 갑시다.”라고 했응을 뜻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 구절입니다.
(**)後以來時百姓樂從 (**) 즉 이런 미추홀(彌鄒忽)의 신민(臣民)들이 까마득하게 잃어버린 미추홀(彌鄒忽) 주변의
칠중(七重)-구지(衢地)를 “나중에 다시 찾아보니(後以來時)” 백성들이 즐거히 따를만 한 환경 - 다시 말하면 논에는
벼가 잘자라고, 숲이 욱어지고, 저수지(貯水池)에는 온갖 새가 날고...-하는 환경으로 변(變)해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이 기쁨 때문에, 그 전(前)에는 십제(十濟)라고 칭했는데, 백제(百濟)라고 국호(國號)를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 원문(原文)의 맨 마지막 구절인 <改號百濟>는 “이에 백제(百濟)라고 국호(國號)를 바꾸었다.”로 하는 것
보다도 “이에 맥제(百濟)라고 국호(國號)를 바꾸었다.”라고 해야 그 문장의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百>을 백(百)이라고 읽을 때와 맥(百)이라고 읽을 때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는 곧 다시 언급하게 됩니다.
아무튼,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부끄럽고 후회하면서 임종하신 것의 원문(原文)을 지금까지 잘못 해석해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혼자만 하남(河南) 위례성에 오신것을 ‘부끄럽고 후회한 것이지’ 미추홀(彌鄒忽) 개척 자체를
부끄럽고, 후회하신 적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비류선제(沸流仙帝)여.. 당신의 위대한 사업을 보고 돌아가시소서!!”한 고집스런 신민(臣民)이 있었음과
이들이 <비류선제(沸流仙帝)가 돌아가시자 “생명이 우거지면 뭘해...그분이 돌아가셨는데.” 해서 다 하남 위례성
으로 돌아갔다가 나중에 되돌아와보니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변해있어서 국호(國號)까지 바꾸었다.>는 이야
기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적혀 있는 것입니다.
다. 개척과정
이제 미추홀(彌鄒忽) 주변의 칠중구지(七重衢地)를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개척하는 과정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대토목공사를 할수 있는 것은 고조선(古朝鮮)의 정밀(情密) 금속
학이 없으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즉 갑문(閘門)이란 것이 열고 닫을 때, 물(水)이 새지 않도록 하는 정밀(精密)한 금속제련 기술이 필요로 하는데,
이는 당시 고조선 만이 지니고 있었던 기술이었다는 점입니다.
국보 141호인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은 직경 21.2센치미터 안에 깊이 0.7미리, 폭 0.2미리의 잔금(=세문(細紋))이
무려 1만 300여개의 직선(直線)과 100여개의 동심원(同心圓)이 있는 정교하기 짝이 없는 청동기(靑銅器)인것이지요.
이것이 고조선의 정밀 금속제련 기술인데,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활석(滑石)에 세밀한 문양을 조각하고, 이런 활석
(滑石)-용범(鎔范)에 송연(松烟)코팅 - 즉 소나무의 관솔을 태울때의 그울음을 용범(鎔范)에 코팅하는 방법을 써야
하는데, 이 기술을 지니고 있는 것은 고조선(古朝鮮)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참고: 갑문(閘門)과 송연(松烟)코팅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고조선의 비밀 발진기지 (1) : 태화사(太和寺), 여육
(膂肉)의 공국(空國)>라는 글이 이곳에 있습니다. 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고조선(古朝鮮)의 기술은 부여(夫餘)로 전(傳)해졌던 것이지요.
그결과 송연(松烟)코팅에 의한 갑문(閘門)을 부여는 만들 수 있었고, 부여(夫餘)는 놀랍게도 이 갑문(閘門)시설을
오늘날 감숙성과 청해성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두 강(江)인 소륵하(疏勒河)와 대통하(大通河)의 양쪽에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유사통제(流沙統制)를 해서 저 씰크-로드(silk-load)에의 진입여부를 허가권을 장악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으로는 이 싸이트(site)에 2편의 글이 있습니다.
1. [계속] ‘流沙-統制’로써 silk-load의 진입을 허가한 신라, 월남(越南)의 계림(鷄林)신라
2. (*) 진한육부(辰韓六部)의 주거강(主據江), 閼川, 蘿井, 三危山의 비밀-(G)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축력(畜力)이 필요로 한 것이지요.
말(馬)과 소(牛)를 대량으로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부여(夫餘)와 만주(滿洲)지방의 구다국(句茶國)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부여(夫餘)와 구다국(句茶國)을 장악하고 있었던 비류선제(沸流仙帝)가 당시에 유일하게 이런 토목
공사를 벌릴수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수많은 물자를 나르기 위해서는 해운(海運)을 담당하던 삼한(三韓)의 후예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지요.
또한 갑문(閘門)을 녹이고, 제방의 뚝에 들어가는 벽돌을 구울려면, 대규모의 노천탄광(露天炭鑛)이 필료로 합니다.
그런데 칠중하(七重河) 주변에는 지금도 산동성(山東省) 제일탄광인 탄현(炭峴)이 있는 겄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규모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로 하는데, 당시 국제무격의 최고갑부였던 소서노
(召西奴) 어하라(於瑕羅)가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어머니이신 것이지요.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하면, 이들 만이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이 지구(地球)에서 당시대때 유일하게 할수 있는 사람
들인 것이지요.
배(船)로 수많은 우마(牛馬)를 태우고 오고, 또 철광석(鐵鑛石)과 청동(靑銅)을 탄현(炭峴)의 석탄을 연료로 정밀
가공해내고, 이때 들어가는 모든 송연(松烟)뿐만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목재(木材)는 칠중하(七重河) 동편의
- 이는 산동반도 뾰죽한 부분을 뜻함 - 우거진 산림(山林)에서 구할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육지(陸地)에서의 운반은 부여(夫餘)와 구다국(句茶國)의 우마(牛馬)가 사용되었겠지요.
따라서 이들 만이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가 가능했고, 또 이루어낼 수 있었음도 가능한 것입니다.
11. 맥제(百濟)설과 <백제왕기 시조 온조왕(p2-p9)> 후문(後文) 해석(解釋)
그런데, “과연 산동반도의 래주만(萊州灣) 지역의 칠중하(七重河)가 관경삼국(管境三國) 시절에 조수(潮水)-에스칼
레이터(escalator)역할을 하는 구체적 사서(史書)가 있는가?!”하는 질문을 우리는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제 없었던 가구(假構)된 지리(地理)로써 역사를 해석하는 위험성이 우리가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가. 맥제(百濟) 설과 ‘웅진대천(熊津大川)-대야택(大野澤)-백강(白江)-동해(東海)-웅진대천(熊津大川)
되는 순환구조’가 있는 사서(史書)
1) <백제왕기 시조 온조왕(p2-p9)> 후문(後文)의 중요성
그런데, 의외로 이것이 명확히 적혀있는 사서(史書)가 있습니다.
그것이 정성일 선생의 <백제왕기 시조 온조왕(p2-p9)>입니다.
(참고: 이 자료는 지금 ‘네티즌자유게시판’ 남당유고 해설 란(欄)에 있습니다. 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이 온조왕(溫祖王) 말미(末尾)에는 독특한 후문(後文)이 있습니다.
좀 철학적이고, 우주관이 얼킨 것이어서 해석(解釋)과 해설(解說)하기가 만만치 않는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문의 내용은 결국 <百濟>라는 글자를 ‘백제’라 읽지말고, ‘맥제’로 읽어야한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내용을 가지다고 웅진대천(熊津大川) 이야기가 불쑥 나옵니다.
즉 ‘맥제’로 읽어야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웅진대천(熊津大川)이 - 이는 웅진강(熊津江)을 뜻함 - ‘조수(潮水) 에스컬
레이터(escalator)에 의해 대야택(大野澤)으로 빠졌다가, 다시 백강(白江)으로 늘 놀고도는 것처럼’하는 사례(事例)
로써 들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관점을 운영자이신 송준희 선생께서도 “(재개시)<百濟)를 ‘맥제’로 불어야 역사성이 있다.”로 <운영자
칼럼>에서 이미 논(論)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百의 음은 '백'과 '맥' 두 가지가 있는데 역사의 전통성에서 보면 맥음맥(貊音陌)이 되어 유사형태화에 의하여
백(伯)이나 百으로 바뀌였다고 보면 '맥'으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맥(陌)은 바로 “길(load)”라는 뜻입니다. 맥(脉)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 글자인 것이지요.
나. <백제왕기 시조 온조왕(p2-p9)> 후문(後文)의 해석(解釋) 해설(解說)
<백제왕기 시조 온조왕(p2-p9)> 후문(後文) 해석(解釋)
편의상 다음의 원문(原文) 앞에 번호를 붙여 구분하고 해석(解釋) 해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문(原文)
1) 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 馬韓王責百濟王曰 “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百里之地安之” 云. 百濟之起於馬韓東北
明矣,
2) 濟之爲字齊水也.
3) 溫祚沸流之名皆取於溫河今白頭山北溫河之地. 盖其鄕也. 南斗滿鴨綠而王於咸鏡平安之間鴨綠斗滿之間多水可稱
百濟也.
4) 百字本非數而大之矣故伯字亦可矣. 後人以多水解之故改以百也.
5) 十濟之說恐不當矣, 齊水之義本非渡也, 祭水之神也.
6) 百濟之義與太山相表裏矣. 熊津大川皆與百濟義相同.
7) 此皆古陰陽家祕傳之說, 而今人多不解故只取平易之義而己也.
해석(解釋)및 해설(解說)
1) 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 馬韓王責百濟王曰 “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百里之地安之” 云. 百濟之起於馬韓東北
明矣,
살펴보건데, 마한(馬韓)54개국이 있을 때에는 ‘백제(伯濟)’라는 나라가 있었다.
마한왕(馬韓王)이 맥제왕(百濟王)을 책망하여 말하는 말에 “왕(王)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
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 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중략)” 운운(云云)함이 있다.
(이를 살피건데) 백제(百濟)는 마한(馬韓)의 동북(東北)에서 일어남이 분명하다.
해설(解說)
여기서 안(按)은 “(여러가지 자료)따위를 살펴보건데”라는 말입니다.
하여간 쭉~ 살펴보았던니 “마한(馬韓)의 동북(東北)쪽에서 일어남이 분명하다.”는 것이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마한(馬韓)의 수도(首都)가 목지국(目支國)으로써 오늘날 양자강 하구(河口)에 있는 ‘숭명도(崇明島)’
이고 그 위에 진한(辰韓) 그리고 그 밑의 철(鐵)이 많이나는 선하령(仙霞岺)산맥에 ‘쌍알 계란’처럼 틀고, 이보다 서
(西)쪽으로 그 기준을 잡을때, 동북 쪽 즉 산동반도 래주만(萊州灣)근처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 濟之爲字齊水也.
‘구제(救濟)한다’는 것을 글자로 나타내면, “물(水)을 가지런하게 재계(齋戒)함을 뜻한다.
해설(解說)
한문(漢文)에서 어떤 글자 뒤에 지(之)가 붙으면 동사화(動詞化)즉 “무엇무엇하게 하다.”ㅇ의 뜻이됩니다.
그런데 제지(濟之)는 “건너게 하라(=도(渡)”와 “구제(救濟)하다.”로 볼수 있는데, 뒤 문장에서 도(渡)의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제한다는 것을 글자로 나타내자면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물(水)의 흉포함’을 다스려서 가지런하게 함을 뜻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字)는 ‘글자로 나타내다.’라는 뜻입니다.
즉 맥제(百濟)의 <제(濟)>의 터미놀로지(tgerminology)를 하자면 “그것은 물(水)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다.”고
정의(定義)를 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 온조왕(溫祖王) 후문(後文)의 모든 내용이 한결같이 “맥제(百濟)가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글
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定義)가 필요로 한 것이지요.
문제(問題)는 이러한 <용어(用語)의 정의(定義)>부터 해나갈 경우에, 한문(漢文)에서는 이 <제(齊)>의 뜻이 일반
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즉 전문적이거나, 독특한 철학적 의미로 사용함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정의(定義) 뒤에 이상하게 ‘백두산(白頭山)’과 온하(溫河) 이야기가 뒤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제(齊)>는 바로 주역(周易)의 화수미제(火水未濟)와 수화기제(水火旣濟)와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수
있는 것이지요.
즉 하늘의 <태양(太陽=화(火)>가 하늘에 있고, 그 밑에 천지(天池)에 물(水)이 있게 되면, 미제(未濟)의 상태 - 다시
말하여 ‘구제(救濟)받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 개방된 것’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백두산(白頭山) 북쪽에서 솟아오르는 온하(溫河) - 온천(溫泉)의 강(江)들은 위에 물(水)이 있고, 밑에 화산
(火山)이 있어 ‘이미 구제(救濟)함을 마친 것’인데, 이런 구제를 마친 것 위에 오히려 ‘구제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
천지(天池)물이 개방되어 있는 것을 이고(=재(栽))하고 있으니, 물(水)이 모두 다 ‘가지런히 된다.’함을 뜻하는 것
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 참고 : 위주(魏主)의 “거약삼맥(距躍三百) 곡용삼맥(曲踊三百)” 고사(故事)에 대해 (**)
그런데, 이런 <제(濟)>에 대한 ‘용어의 정의’가 나온 다음에 그 다음 문장에서 ‘多水可稱百濟也’라는 문장이 등장
하고 있는데, 이를 해석하자면, “물(水)이 많으니, 가(可)히 맥제(百濟)라 할만하다.”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서 <百>이란 글자를 백(百)으로 읽을 때에는 그 뜻이 ‘100’이란 숫자입니다.
그러나 맥(百)으로 읽을 때에는 전혀 달라집니다. 이는 ‘격려(激勵)하기 위해서 손뼉치듯 만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물(水)과 불(火)의 관계가 백두산 북(北)의 온하(溫河)로 나오는 것은 수화기제(水火
旣濟)의 따뜻한 물과 화수미제(火水未濟)의 천지(天池) 물이 ‘서로 격려하듯 만나고’ -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손뼉침’입니다만 - 그 물(水)이 많으니, 가(可)히 “서로 격려하는 만남에 의한 구제-이것이 맥제(百濟)의 뜻임-
라고 할만 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맥(百)이 ‘손뼉치다’의 뜻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희소(稀少)하다는 데 있
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이의 전거(典據)가 나오는 고사(故事)를 설명하고져 합니다.
(**) 중동(重瞳),변협(騈脇)의 신체를 지닌 진문공(晉文公)과 희부기(僖負羈) 사건
춘추(春秋)좌전(左傳)에 보면, 진문공(晉文公)은 무려 19년동안 방황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이 진문공(晉文公)은 ‘눈동자가 둘’인 중동(重瞳)에다가, ‘갈비’가 판자(板子)처럼 통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 당시에는 이를 최고로 좋은 관상(觀相)으로 쳤음 -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방황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박대(薄待)를 받기 일쑤였는데, 조(曺)나라로 들어갔더니 “먼 여독(旅毒)에
힘드실테니 일단 목욕부터 하시고...”하고 환대(歡待)해주는 척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환대(歡待)한 것은 ‘목욕
하는 나체(裸體)를 보고’ “과연 변협(騈脇)- 즉 갈비가 통으로 이어진 사람의 몸이 어찌 생겼는가?”하는 것을 구경
하기 위했던 것입니다.
이는 최대의 모욕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희부기(僖負羈)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음식과 벽옥(碧玉)등을 이
진문공(晉文公)일행에게 주었습니다.즉 ‘서로 어려움을 이해하는 끈끈한 관계’가 맺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진문공(晉文公)은 송(宋)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조(曺)나라와 위(衛)나라를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진(晉)을 도와서 미약하나마 협력 군(軍)을 위(魏)가 대었습니다.
전(前)에 신세(身勢)를 진 희부기(僖負羈)는 철저히 보호하고, 자신의 나체를 보면서 낄낄대는 조(曺)의 신하는
다죽여 버리게는 명령을 내랍니다.
그런데 이때 같이 싸웠던 위(魏)나라는 “동맹군을 위로하기 보다도 옛 의리(義理)를 중시해??”하고 분노하면서
희부기(僖負羈)를 죽여버립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위주(魏主)는 상처를 입고 누워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홧김에 희부기(僖負羈)를 죽였으니, 분명히 나를 떠볼 것이다.”하고 병상(病狀)에 누워있는데, 진문공
(晉文公)은 “위주(魏主)는 재주가 쓸 만하니 만약에 상처가 깊거든 ‘희부기’를 죽인죄로 죽여버리고 상청가 깊지
않으면 살려줘라.”라고 합니다.
이에 진문공(晉文公)의 사자(使者)가 병문안 겸 찻아보았더니, 위주(魏主)는 무언가 낌새를 채고, “군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데,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오??”하고 병상(病床)에서 일어나 거약삼맥(距躍三百)하고 곡용
삼맥(曲踊三百)합니다.
즉 이는 “앞으로 깡충 튀며 손뼉을 세(3)번 치고(맥(百)=박(拍)=려(勵)), 위로 깡충 뛰며 손뼉을 세 번 치는 것”을
뜻합니다.
이 고사(故事)는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28년 춘(春)의 기사(記事)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왜 굳이 “이 고사(故事)를 소개하는가?”하면 맥(百)의 뜻이 ‘손뼉치다’, ‘격려하기 위해 만나다.’는 뜻임을 밝히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따라서 맥제(百濟)라고 하면,
그 뜻이 (**)격려하면서 서로 만나서 (세상을) 구제(救濟)하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 각설(却說)
이제 다시 <백제왕기 시조 온조왕(p2-p9)> 후문(後文)으로 돌아갑시다.
3) 溫祚沸流之名皆取於溫河今白頭山北溫河之地. 盖其鄕也, 南斗滿鴨綠而王於咸鏡平安之間 鴨綠斗滿之間 多水可
稱百濟也.
온조(溫祚) 즉 ‘따뜻한 물의 복(福)’이나 비류(沸流) - 비등(沸騰)하며 흐르는 것의 모든 이름은 오늘날 백두산
(白頭山)의 북(北)쪽의 ‘온천(溫泉)의 강(江)’에서 취(取)해진 것이다.
모두 그 고향(故鄕)이다. 두만강(斗滿江)과 압록강(鴨綠江)의 남쪽에서 함경(咸鏡) 평안(平安) 사이에서 왕(王)
노릇하는 사람들은 ‘물(水)이 많음’을 “서로 격려하듯 만나서 구제(救濟)할만하다(=맥제(百濟)”고 말한다.
해설(解說)
여기에 보면 온조(溫祚)는 ‘따뜻한 물의 복’이고 비류(沸流)는 물이 끓어 비등(沸騰)하는 모습인데, 이런 말 자체가
모두 백두산(白頭山) 북쪽의 온천강(溫泉江)의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역이 바로 온조(溫祖)와 비류(沸流)의 고향(故鄕)이라는 것입니다.
이 고향(故鄕)이란 말은 온조(溫祖)와 비류(沸流)의 출생지(出生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이신 소서노
(召西奴)나 아버지인 우태의 고향임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이름지어준 자의 고향말을 언급하기 위핸서인 것이지요.
그런데, 백두산(白頭山)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수화기제(水火旣濟) - 이는 물 밑에 화산(火山)이 있음을 뜻함와 -
화수미제(火水未濟) - 이는 태양밑에 천지(天池)가 있게 되면, “물이 많을 수록 ”와!!! 서로 격려해주면서 만남이
로다!!“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4) 百字本非數而大之矣故伯字亦可矣. 後人以多水解之故改以百也.
맥(百)이란 글자는 본래 숫자가 아니고, ‘커지게 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백(伯) 즉 ‘맞이’나 ‘우두머리’란 글자와 역시 그 뜻이 동일하다.
후인(後人)이 ‘믈이 많다.’는 말을 해석하기를 고쳐서 백(百: 100)으로 하였다.
해설(解說)
이 ‘물이 많다.“는 독특한 용어가 백두산 근처에 있었다는 말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물이 좋다.”가 하면 이는 “서로 어울려 놀기 좋다.” 혹은 “물이 나쁘다.”하면 “놀거나 일하는 분위기가 나쁨”
을 의미합니다.
그런 것처럼 이 백두산 근처에서 “물이 많다.”고 하면 무언가 계속 뻗어나갈수 있는 어떤 독특한 언어(言語)가
있었고, 이럴때는 “와 서로 만나는 것 자체가 구제(救濟)로세22”의 뜻으로 “맥제(百濟)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수화기제(水火旣濟) 화수미제(火水未濟)의 구조적인 관계에서 서로 만나면 “와!! 물이 많네그려... 맥제(百濟)로세!!!”
했다는 겄입니다.
5) 十濟之說恐不當矣, 齊水之義本非渡也, 祭水之神也.
십제(十濟)가 맥제(百濟)의 시원(始原)이란 설(說)을 틀릴까바 두렵도다! ‘물을 가지런히 하다’는 제수(齊水)의
의미는 그 근본이 ‘건너다(=도(渡))’라는 뜻이 아니다. 물(水)의 신(神)에게 제사(祭祀)함을 뜻한다.
6) 百濟之義與太山相表裏矣. 熊津大川皆與百濟義相同.
맥제(百濟) 즉 ‘서로 만나 구제(救濟)함을 격려함’은 태산(太山)과 더불어 서로가 ‘안’과 ‘밖’의 관계가 됨을 뜻한다.
웅진대천(熊津大川) 즉 ‘곰나루 큰물’은 모두 맥제(百濟)와 더불어 그 뜻을 서로가 같이 한다.
해설(解說)
아무튼 고대인들은 ‘흘러내려오는 물’과 ‘순환(循環)하는 물’이 함께 존재할 때 이를 맥제(百濟)라고 표현한 듯 합니다.
즉 백수산의 천지(天池) 물은 ‘흘러내려오는 물’이고, 또 화산(火山)의 영향으로 치솟아 올라가서 순환하는 온천강
(溫泉江)이 만나는 것이 맥제(百濟)라는 것이지요.
또한 제수(濟水)의 물이 황하(黃河)와 교차해서 대야택(大野澤)으로 까지 들어오는 물은 ‘흘러들어오는 물’이고,
웅진강(熊津江)이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구조’로써 조수(潮水)물로 역류(逆流)해서 다시 백강(白江)으로 해서
동해(東海)로 순환상생하는 것이 맥제(百濟) 즉 “서로 만나서 - 마치 손뼉이 그러하듯이 -구제(救濟)하는 것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태산(太山) - 이는 중국의 태산(太山)과 해산(海山)의 백두산(白頭山)이 - 순환하는 물 앞에서
보면, 서로 표리(表裏)관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즉 천지(天池)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백두산 위의 천지(天池)를 통해 내려가니깐 백두산이 ’‘속’이 되지만, 다시
백두산 기슭에서 온천강(溫泉江)으로 올라오니 다시 백두산의 ‘거죽’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웅진강(熊津江) 역시 조수(潮水)물로 해서 저 태산(泰山) 주위를 뱅글 뱅글 도니깐, ㅌ태산(太山) 뒤에 웅진강
(熊津江)이 있는 동시에 그 앞에도 웅진강(熊津江)이 있는 셈이지요.
이렇게 돌고 돌면서, 돌지않고 하염없이 제공되는 어떤 물(水)이 있을 때 “믈이 많도다!! 맥제(百濟)로다!!” 했다는
것입니다.
- 각설(却說)
이 <백제왕기 시조 온조왕(p2-p9)> 후문(後文)을 해석해보면, 관경삼국(管境三國) 시절에 칠중하(七重河)가 ‘깔대기
구조’로써 조수(潮水)물이 뒤집힌 컵(∩)모양 역류(逆流)해서 대야택(大野澤)에 이르고, 또한 이 대야택의 강물이
니은(ㄴ)자 모양으로 백강(白江)이 되어 흘러나가는 모양으로 흘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평도백제(平度伯濟) 설(說)과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
지금 쓰는 글을 “<7>평도백제(平度伯濟) 설(說)과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로 붙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의 앞 단계에서 쓴 글 - 즉 <1>~<6>까지의 내용은 결국 “고대 제수(濟水)가 뒤집힌 컵(∩)모양으로 흘렀는데,
제수(濟水)을 하류(河流)는 칠중하(七重河)를 관통하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깔대기 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조수(潮水)물이 뒤집힌 컵(∩)모양으로 흘러서 산동반도의 서(西)쪽에 있는 대야택(大野澤)으로 선박을 한순간에
옮기는 에스컬레이터(escalator)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고대의 자연적인 지리(地理)가 완연히 달랐고, 따라서 실제와는 다른 지리관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그동안 미추홀(彌鄒忽), 관미성(關彌城) 비성(泌城), 황산(黃山)듯의 위치를 찾았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웠다.” 또한
이러한 특수한 지리를 바탕으로한 관경삼국(管境三國)시대의 전략과 정치적인 관계 역시 잘못된 가정(假定) 아래서
펼쳐졌다는 것 등이 지금까지 <1>~<6>까지에서 해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서 좌계는 “이 칠중하(七重河)에 독특한 갑문(閘門)이 설치되어있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독특한 전략이 펼쳐짐이 가능하였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져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각도(角度: angle)에서 역사를 논(論)하다보니, 문득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물이 새지않을 정도로 정밀(精密)한 갑문(閘門)을 만들려면 그 거푸집의 재료로 활석광산(滑石鑛山)이
필요한데 ”혹시 이 산동반도 동(東)쪽에 활석광산(滑石鑛山)이 있지 않을까?“해서 조사하다가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한(馬韓) 50여개국 가운데 백제(伯濟)라고 칭하는 ‘나라’가 바로 ‘활석광산(滑石鑛山)’이 있는 산동반도
동쪽의 오늘날 평도(平度)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마한백제(馬韓伯濟)가 고조선(古朝鮮)의 우이(嵎夷), 또 부여사람들과 교류한 래이(萊夷)등의
이야기가 얽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들이 한꺼번에 이어지는 이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히 이에 대한 상세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긴 글인지라, 원래 한편으로 쓴것을 다시 나누어 후속(後續)되는 글을
‘<8> 마한백제(馬韓伯濟)의 활석광산(滑石鑛山)-우이(嵎夷),래이(萊夷)관련’으로 했습니다.
1. ‘톱질’역할을 했던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 구조’
가. 웅진강(熊津江)의 톱질 작용
<1>~<6>까지의 이야기의 기본(基本)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칠중하(七重河)가 문자 그대로 일곱 개의 강(江)이 하나의 ‘제수(齊水)’로써 관통(貫通)이 되어서 ‘깔대기 구조’가
되어서 밀려들어오는 조수(潮水)물을 증폭시켜서 뒤집힌 컵(∩)모양으로 그 반대편의 대야택(大野澤)에 까지 밀물을
역류(逆流)시켜 보내고, 썰물 때서부터 다음의 밀물까지 계속 제수(濟水)가 순류(順流)로써 그 하류(河流)인 칠중하
(七重河)까지 고구리, 백제, 신라가 있었던 관경삼국(管境三國)시절에 흘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제수(濟水)가 대야택(大野澤)에서 칠중하(七重河)까지 - 사서(史書)에 나온대로 웅진강(熊津江)은
독특한 ‘톱질’을 하였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웅진강(熊津江)이 길게 서(西)에서 동(東)으로 흐르다가, 밀물 때에는 반대로 역류(逆流)해서 흐르는 것을
계속 되풀이 하니깐 톱질을 할때 물건을 한 가운데다 두고, 좌우(左右)로 서로 반대방향으로 밀고 당기는 것을 하는
것과 똑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의외로 중요할듯 싶습니다.
이런 웅진강(熊津江)의 톱질작용은 웅진강(熊津江)이 거대한 유(U)모양의 협곡(峽谷)을 형성할 수 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밀물과 썰물의 교차가 큰 항구에서 물이 빠진후에 그 모습을 보면 진흙으로 된 거대한 유(U)자형 협곡이
나타납니다. 이는 조수(潮水)가 들어왔다가 빼졌다가를 끊임없이하면서 톱질을 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따라서 웅진강(熊津江)은 기본적으로 주변에 진흙의 거대한 협곡(峽谷)을 지니고 있는 모양으로 흐를 수 밝에 없는
것입니다.
1) 웅진강(熊津江)에서 접안(接岸)할 수 있는 것은 두 곳 밖에 없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웅진강(熊津江)은 접안(接岸)할 수 있는 곳이 한정(限定)이 되어 있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 지역은 뒤집힌 컵(∩)모양의 웅진강(熊津江)에서 그 꼭대기에 해당하는 대명호(大明湖)는 넓은 호수 가에서
가파른 언덕 없이 선박(船舶)이 접안(接岸)할수 있는 지역이 될 것입니다.
또한 웅진(熊津)지역은 호수(湖水)없이도 유일(唯一)하게 육지(陸地)와 웅진강(熊津江)이 ‘가파른 언덕’없이 넓은
접안(接岸)할수 있는 지역을 지녔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웅진강(熊津江)의 톱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선박(船舶)을 타고와도 접안할 수 있는 곳이 대야택
(大野澤)의 중간에 있는 사성(泗城)에 이를때까지 두(2) 곳 밖에 없는 셈이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웅진강(熊津江)이 이런 진흙 대협곡(大峽谷)으로 흐르기 때문에, 자연히 육지(陸地)로써 이 웅진강
(熊津江)을 따라서 갈수 있는 유일한 강(江)이 바로 탄현(炭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웅진(熊津)이 오늘날 산동성(山東省)의 장청(長淸)이고, 그 서쪽에 소정방(蘇定方)이 주둔한 산(山)이
오늘날의 효당산(孝堂山)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이런 지리적(地理的) 특성에서 나온 특수시설을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2) 왜 육지(陸地)에서는 탄현(炭峴), 그리고 뱃길로는 백강(白江)을 막으라고 진지전(陣地戰)을 구상하는 사람들이
말했을까?
그런데, 백제가 멸망할 무렵 진지전(陣地戰) 전략을 의자왕(義慈王)에게 권한 성충(成忠)과 흥수(興首)는 한결같이
“뱃길로는 백강(白江)을 막으라.!”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일단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가장 높은 산(山)인 있는 태산(泰山)과 몽산(蒙山)산맥
이 있는 쪽은 워낙 높고 설혹 길이 있어도 대규모의 군(軍)이 행군하기에는 불가능함을 일단 인정해야할 듯 합니다.
그리고, 뒤집힌 컵(∩)모양으로 웅진강(熊津江)과 조수(潮水)가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 구조’로써 역류(逆流)하는
것 역시 이 높은 중앙의 태산(泰山)을 비롯한 산악지대를 우회(迂廻)하기 위함인 것도 이해해야할 듯 합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우리는 성충(成忠)과 흥수(興首)가 왜 “뱃길로는 백강(白江)을 막고, 육지(陸地)
로는 탄현(炭峴)을 막으라!!”는 전략적 충고를 하였을 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하(黃河)를 타고 내려와서 웅진강(熊津江)의 편안한 접안(接岸)시설이 있는 곳에서 선박으로 갈아타고, 그대로
웅진강(熊津江)을 타고 대야택(大野澤)까지 갈수가 있는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탄현(炭峴)만 막으면 된다고
이야기했을까?"하는 것이지요.
즉 <황하(黃河)-육지(陸地)-웅진(熊津)-웅진강(熊津江)-대야택(大野澤)>의 훤~하게 뚫힌 공격로(攻擊路)가 있음
에도, 공격하는 측이나 방어하는 측이나 이 쉬운 통로를 전혀 전시(戰時)에는 활용치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당군(唐軍)이야 수륙전환(水陸轉換)하는 이른바 토착기술(土著技術)이 없다고 하지만, 신라군(新羅軍)은 이를 능수
능란하게 활용하는 기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라군 까지도 이 황하(黃河)-육지(陸地)-웅진(熊津) 코스
(course)를 ”그것은 불가능한 계획이야...“하고 처음부터 포기하고, 위험한 탄현(炭峴)으로 군대를 집어넣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3) 효당산(孝堂山)에서 맞은 편까지 연결되었던 석색(石索)및 폭뢰(爆雷) 시설 - 소정방(蘇定方)의 의병(疑兵)전술의
미스테리(mystery)
그런데, 흐르는 강(江)물에 ‘큰 돌덩어리’를 쇠사슬(=철색(鐵索))에 꿰어서 그 양쪽을 당겨놓으면, 배가 가다가 부닥
쳐서 못 가게 됩니다.
이를 때, 그 주변에서 대포(大砲)로 공격하게 되면, 전멸(全滅)을 면치 못하는 것이지요.
충무공(忠武公)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아도, 충무공께서 “돌에 구멍을 뚫은 작업을 승려(僧侶)들에게 시켰다가, 게을
리하자 곤장을 치는 기록(記錄)”이 있습니다.
즉 석색(石索)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아마도 명랑대첩 때 ‘좁은 울돌목’에 이 석색(石索)을 설치했을 수도 있
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쇠사슬에 달려있는 ‘돌 덩어리’ 안에 폭뢰(爆雷) 장치를 해서 이를 끌어당기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는 더욱더 통과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물(障碍物)있는 곳에 화력(火力)을 집중하라.”는 것은 고대나 지금이나 전략의 기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웅진(熊津)의 서(西) 쪽에 있는 산(山) 즉 오늘날의 효당산(孝堂山)에서 웅진강(熊津江)의 반대편에
까지 이런 석색(石索)이 수없이 놓여있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뒤집힌 컵(∩) 모양으로 흐르는 바깥 쪽으로 효당산(孝堂山)이 있었고, 그 안 쪽이 바로 탄현(炭峴)을 건너서
계속 올라왔을때 만날 수 있는 지역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백제의 포대(砲臺)가 설치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설이 되어 있으면, 선박(船舶)으로 웅진강(熊津江)을 타고, 백제의 허락을 안받은 상태에서 효당산(孝堂山)의
석색(石索) 장치를 통과하는 것은 볼가능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저 국로추사(菊露秋史)의 수수께끼 같은 다음 문장을 우리는 이해할수 있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국로추사(菊露秋史)에는 “定方進軍於熊津之左 列旗幟於山上 以爲疑兵” - 즉 “소정방(蘇定方)은 웅진(熊津)의 좌측
(左側)에 진군(進軍)하여 산 꼭대기에 기치를 결어두고, 의병(疑兵)이 있는 양 위장하였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추산(推算)하건데, 이때의 당군(唐軍)은 최소한 30만명은 되고, 의자왕(義慈王)의 백제왕은 계백(階伯)장군이
이끄는 황산(黃山)에서의 전투에서의 패전(敗戰)한 부상병(負傷兵) 만오천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압도적인 군사(軍師)를 소정방은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효당산 꼭대기에 기치(旗幟)를 세워두고,
이 산(山) 전체에 매복(埋伏)이 되어 있는 것 같은 의병(疑兵) 전술을 펼쳤는가?” 하는 것이지요.
4) 웅진(熊津)근처의 신호전달체계와 효당산(孝堂山) 맞은 편의 백제의 포대(砲臺)
그러나, 이는 웅진강(熊津江)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
효당산 밑 웅진강(熊津江) 가에는 건너편에서 석색(石索)이 강물 밑으로 해서 이를 당기거나 늦출수 있는 군사시설
(軍事施設)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효당산(孝堂山) 밑의 군사시설은 그야말로 철옹성(鐵甕城) 같은 시설 - 예를 들면 돌(石)로 된 절벽(絶壁)에
군(軍)과 시설이 숨어있는 식(式)으로 되어 있을 확률이 큽니다.
이럴때, 이 시설(施設)을 군사력으로써 공격하는 것은 짧은 기간(期間) ‘안’에는 불가능함이 당연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 절벽 동굴(洞窟)의 군사시설에서는 “석색(石索)을 몇줄 당겨라.” “늦추어라.”하는신호(信號)를 효당산
(孝堂山) 정상(頂上)으로 깃발과 같은 수신호(手信號)로 받겠지요.
즉 콘트롤(control)센터(centor)가 있어야만 이 지시(指示)에 의해서 웅진강(熊津江)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효당산(孝堂山) 꼭대기의 신호(信號)를 보내는 곳은 오른쪽에 있는 웅진(熊津)에서의 신호를 그 높은곳에서
중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신호(信號)체계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그때 그때 마다 변(變)하고, 당(唐)나라나 신라(新羅)는 도저히 마음
대로 지휘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있을 것은 또한 불문가지(不問可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정방(蘇定方)은 “효당산(孝堂山)의 중간 신호 전달의 요충지를 이미 점령하였다.
그 어떠한 신호를 보내도 마음대로 웅진강(熊津江)의 석색(石索)과 폭뢰(爆雷)를 콘트롤(control)할수 없다.”는 싸인
(sign)을 보내기 위해서 기치(旗幟)를 걸어둘 수밖에 없고, 또 실제 점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절벽에 있는 백제(百濟)의 석색(石索)을 조정하는 사람들은 접근 불가능하기 때문에, 점령할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의병(疑兵)이란 “그속에 군(軍)이 많이 있는 양 위장전술”을 펼치는 것을 뜻합니다.
“왜 소정방(蘇定方)이 압도적인 군대를 가졌음에도 이런 이상한 전술을 펼칠 수밖에 없는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는 “효당산(孝堂山) 밑 단애(斷崖) 즉 절벽(絶壁)에서 효당산 쪽으로 나있는 수많은 비밀통로에로 백제
군대가 몰래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병(疑兵)을 펼친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실제로 당(唐)나라 군대를 풀어서 이 접근통로를 막으려했다면, 수만(數萬)명의 군대를 배치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효당산(孝堂山) 건너의 백제 포대(砲臺)는 이미 당(唐)나라 대군이 점령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시설이 전제(前提)되지 않는다면, 소정방(蘇定方)은 굳이 의병(疑兵)전술을 펼칠수 없는 것이지요.
5) “왜 육지에서는 탄현(炭峴)만 막으면 되는가?!”
또 진지전(陣地戰)을 주장한 성충(成忠)과 흥수(興首)가 ‘뱃길로는 백강(白江), 육지(陸地)로는 탄현(炭峴)을 막으면
된다.“라고 이야기한 것 역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탄현(炭峴)을 통과하지 않는 상태에서 백제의 효당산(孝堂山) 건너편에 있는 포대(砲臺)들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따라서 설혹 황하를 타고 와서 육지(陸地)로 웅진(熊津)에 도착하고, 또 신라의 토착기술(土著技術)의 협조를 얻을
수 있어서 선박을 쉽게 탄다고 하더라도, 대야택(大野澤)까지 군선(軍船)을 타고 갈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 가보았자, 폭뢰(爆雷)가 설치되어 있는 석색(石索)을 만나며, 또한 맞은 편의 백제 포대(砲臺)에 노출(露出)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탄현(炭峴)을 건너온 군대가 이 포대(砲臺)를 점령하는 동안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포대(砲臺)와 효당산 밑의 절벽까지 가설(架設)된 모든 석색(石索)을 철거할 때까지 역시 또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진지전(陣地戰)을 주장하는 성충(成忠)과 흥수(興首)는 탄현을 막으라는 것이었지요.
또 반대로 기동전(機動戰)을 이야기하는 직의(直義) 역시 “석색(石索)과 포대(砲臺)가 있는데, 탄현(炭峴)은 가두리
에 불과하다.”라는 건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지리적 특성은 결국 탄현(炭峴)이 뒤집힌 컵(∩) 모양으로 생긴 웅진강(熊津江)의 방향을 따라서 길이
구불구불 뚫혀 있음을 뜻합니다.
절대로 탄현(炭峴)은 뚫고 나가보았자, 다시 험준한 태산(泰山)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그처럼 괴상하게 놓여진
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이는 “탄현(炭峴)이라는 노천탄광(露天炭鑛)에서 ‘구불 구불’한 길이 왜 생겼나?”는 것과 직결되어 있는 질문
이기도 합니다.
석탄(石炭)을 캐어서 필요한 곳에 공급하는기 위해서 노천탄광(露天炭鑛)은 그 언저리부터 파들어갈 수 밖에 없습
니다. 그리고 캐어낸 석탄(石炭)은 ‘이미 나 있는 교통로’로 운송되어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탄현(炭峴)은 웅진강(熊津江)과 병행해서 뒤집힌 컵(∩) 안쪽에 있는 육지의 교통로와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나. 조수(潮水)물을 역류(逆流)시키는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 구조’
1) 개머리 모양의 산동반도(山東半島)와 ‘개 목 뒷덜미’에 해당하는 래주만(萊州灣)
그런데, 산동반도의 모양은 꼭 개(=견(犬))머리가 동해(東海)쪽으로 툭 튀어나온 모양입니다.
즉 ‘개머리’의 정수리가 봉래(蓬萊)이고, 연대(烟台)가 ‘콧잔등’ 그리고, 이 연대(烟台)에서 수직으로 내려와서 약간
왼쪽에 있는 해양(海陽)까지가 ‘개 입’이 되는 셈입니다.
연대(烟台)에서 우측으로 내려와있는 위해(威海)가 ‘개 콧구멍’, 그리고 개의 입 입구가 몽성(蒙成)이 됩니다.
결국 래주만(萊州灣)은 개머리의 좌측에 있는 ‘목 뒷덜미’부분에 해당합니다.
또한 교주만(膠州灣)은 ‘개 목에 방울을 다는 자리’처럼 옴(ῼ)자 처럼 바다가 들어와 있는 모양인 것이지요.
아무튼, 이 래주만(萊州灣)은 오른 쪽으로 기울려 놓은 듯한 유(U)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 래주만(萊州灣)으로 일곱 개의 강(江)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고대에는 칠중하(七重河)라고 불렀는데,
문제는 고대(古代)에는 이 칠중하를 제수(濟水) 하류(河流)가 관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단 중요한 것이 래주만(萊州灣) 자체가 결국 유(U)자 처럼 생겼기 때문에, 조수(潮水)물의 압력을 수용하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2) 제수(濟水)하류와 래주만(萊州灣)은 서(西)로 기울인 브이(V)자에 칠중하(七重河)가 별(丿)방향으로 빗금친
형식으로 ‘깔대기 구조’를 한다.
그런데, 제수(濟水)하류(下流)가 래주만(萊州灣)을 만나는 방식은 꼭 브이(V)자와 같은 형국인데,
이를 서(西)쪽으로 기울린 모습입니다.
‘신완순 선생님’이 올리신 ‘참고용 지도’를 보면, 래주만(萊州灣)은 수직(垂直)에서 45도 가량 서쪽으로 기울여져
있고, 또 제수하류(濟水下流)는 수직(垂直)에서 더 눞혀져서 60도 가량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수하류(濟水下流)를 관통하는 강들이 대략 별(丿)자 방향으로 겹겹이 되어 있는 방식인 것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깔대기 구조’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칠중하(七重河)가운데 윗부분은 래주만(萊州灣)에서 멀리 떨어져
만나게 되고, 그 다음은 점차 래주만에 가까운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제수하류(濟水下流)는 ‘신완순 선생님’이 올리신 ‘참고용 지도’에서 제수(濟水)가 흐르는 옆을 이어서 도로
(道路) 즉 ‘지도’에서 <빨간 선(線)>으로 되어 있는 쪽으로 계속 강물이 흘렀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입니다.
<참고용 지도>
http://www.coo2.net/bbs/icon/member_image_box/362/suguang.gif
‘대청광여도’에 의하면 - 즉 ‘신완순 선생님’이 올리신 ‘참고용 지도’에 의하면 - 위 즉 북쪽에서 아래 즉 남쪽으로
다음과 같은 그 강(江)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1) 제하(濟河)
2) 소청하(小淸河) (=고제하(古濟河))
(위 1)과 2)는 상하(商河)라는 도시(都市)에서 2갈래로 나뉘어져 각기 입해(入海)함
3) 미하(彌河) (=청수(淸水)) (=치천(淄川))
4) 단하(丹河)
5) 백랑하(白狼河)
(위 단하(丹河)와 백랑하(白狼河)는 서로 다른 하천(河川)으로 흘러들어와서 합수(合水)해서 입해(入海)함. 합수된
강은 백랑하(白狼河)로 불러졌는데, 그 북(北)쪽 바닷가에 짐관성(斟灌城)이 있고, 그 남(南)쪽 바닷가에 고산(孤山)
이 있음)
6) 유수(維水)
7) 오회수(俉淮水)
(위 유수(維水)와 오회수(俉淮水)는 서로 다른 하천으로 흘러들어와서 안구(安丘)라는 도시(都市)에서 합수(合水)
해서 입해(入海)함)
이러한 이야기는 제수(濟水)하류(下流)를 ‘빗변’으로 해서 칠중하(七重河)들이 각각 래주만(萊州灣)의 해안선(海岸線)
에 입구(入口)를 가진 ‘뒤집혀져 있는 계단(階段)’식 구조를 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3) 결국 조수(潮水),칠중하(七重河), 제수(濟水)하류(河流)는 <주사기계단(注射器階段)>의 성격을 지닌다.
이런 칠중하(七重河)와 이를 관통하고 있는 제수하류(濟水下流) 그리고 조수(潮水)의 상관관계를 종합해 보면
우리는 이 독특한 지리(地理)의 특성이 결국 <주사기(注射器)-계단(階段)>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주사기(注射器)는 주사(注射)하려는 약물(藥物)을 넣은 상태에서 주사기(注射器)를 밀게 되면, 주사기 바늘로
약물이 빠르게 멀리 나아갑니다.
그런데 미는 부분의 단면적(斷面績)은 큰 반면에 바늘 구멍의 단면적(斷面績)은 극히 작은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결국 큰 단면적에 가(加)해진 압력이 ‘바늘구멍’의 단면적과의 비율(比率)에 따라, 압력이 유속(流速)으로 바뀌어서 주사(注射)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조수(潮水)물이라는 것은 태양과 달 등의 인력과 상관된 매우 큰 압력(壓力)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수(潮水)물을 받아들이는 칠중하(七重河)와 이를 관통하고 있는 제수하류(濟水下流)가 형성하는 직삼각형은 결국 ‘일곱개의 주사기(注射器)가 놓여진 계단’이라 할수 있습니다.
동(東)쪽에 있는 칠중하(七重河)일수록, ‘짧은 주사기(注射器)’이고, 서(西) 쪽으로 갈수록 ‘긴 주사기(注射器)’가 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階段)의 ‘빗변’을 형성하는 것도 결국에는 조수(潮水)물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여서 통합해서 미는 ‘주사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칠중하(七重河)의 주사기(注射器) 계단이 ‘빗금’부분 즉 제수하류(濟水下流)가 칠중하를 만나는 곳을 기준으로 해서 대략 계산해 볼 때, 무려 160키로 미터 정도 - 400리 정도된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주사기(注射器) 계단(階段)이 자연적으로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칠중하(七重河)는 래주만(萊州灣)의 조수(潮水)는 뒤집힌 컵(∩)으로 흐르는 제수(濟水)를 역류(逆流)해서 한달음에 대야택(大野澤)으로 이동하게 하는 것인 것이지요.
4) 칠중하(七重河)의 낱낱의 강(江)은 하구(河口)가 더 넓은 ‘깔대기 구조’로써 되어 있다.
그런데, 칠중하(七重河) 낱날의 강들이 모두 주사기(注射器) 역할을 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는데, 이 낱낱의 강(江)의 하구(河口)가 ‘더 넓은’ 특징 말하자면 ‘깔대기 입구’처럼 큰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밀물이 몰려올때에나 혹은 반대로 썰물과 자연스런 강물이 빠져들어갈 때에 하구(河口)가 좁으면 이 주변의 유속(流速)이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웅진강(熊津江) 자체가 순류(順流)와 조수(潮水)물에 의한 역류(逆流)의 현상 때문에, ‘톱질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는 칠중하(七重河)가 있는 곳도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칠중하가 흐르는 곳은 진흙으로 된 거대한 유(U)자 모양의 협곡(峽谷)으로 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칠중하(七重河)의 ‘진흙 협곡(峽谷)’들이 만약 그 하구(河口)가 좁다면, 이 주변에서 유속(流速)이 빨라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침식(浸蝕)작용이 더 원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뜩이나 깊은 유(U)자형 협곡인데, 침식으 빠른 유속의 영향으로 일어나면, 그 주변은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칠중하(七重河) 하구는 주변에 암반(巖盤)을 지닌 지형(地形)이 아니면, 반드시 하구(河口)가 훨씬 넓은 구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리(地理)적 특성은 나중에 관미성(關彌城)을 특성을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端緖)가 됩니다. 관미성은 주로 암반(巖盤)을 바탕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칠중하(七重河)는 낱낱의 강들이 모두 ‘깔대기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런 것들이 ‘주사기 계단’으로써 합쳐져서 다시 한번 거대한 ‘깔대기 구조’를 지닌 아주 특이한 지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자연(大自然)이 만들어낸 아주 특이한 환경이 “관경삼국(管境三國) 시절 산동반도 래주만(萊州灣)에 원래부터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짠 바닷물이 칠중하(七重河) 사이의 육지(陸地)에 넘나들어서 결국 식생(植生)이 살수 없는 불모지대(不毛地帶)로 오랫동안 방치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를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이 칠중하(七重河) 주변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대 토목공사를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곳이 옥토(沃土)로 바꿀 꿈 조차 못 꾸었던 것입니다.
2.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의 수수께끼
가. 자연적 지리에 어떤 인공적 지리가 가해져야하는가?
1) 원래(原來)부터 있었던 “하루에 두 번 있는 조석수(潮汐水) 에스컬레이터(escalator)의 작용”
아무튼, 밀물과 썰물은 하루에 두 번씩 일어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을 조수(潮水)라고 칭하고, 저녘에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을 석수(汐水)라고 구분함을 통해서 잘 알수가 있는 것이지요. 엄격히 이야기하자면 조석수(潮汐水)라고 해야하지만, 일반적으로 밀물과 썰물을 통칭하여 조수(潮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산동반도 래주만(萊州灣)에는 낱낱의 칠중하(七重河)가 ‘깔대기 구조’로 되어 있고, 이것이 관통하는 제수하류(濟水下流)와 어울려 주사기계단(注射器階段)으로 되어 다시금 거대한 ‘깔대기 구조’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은 “자연 지리 자체가 조수(潮水)를 하루에 두 번씩 뒤집힌 컵(∩)모양으로 흐르는 제수(濟水)를 역류해서 저 대야택(大野澤)까지 운송하는 그런 자연적 구조를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산동반도 래주만(萊州灣)에서 대야택(大野澤)에 하루 두 번씩 조석수(潮汐水) 에스컬레이터(escalator)가 운행(運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어떤 인공적 수리시설이 첨가되었나?
그런데, 이런 자연적 지리에다가 ‘독특한 수리시설’을 비류선제(沸流仙帝)때 설치하였기 때문에, “인위적(人爲的)으로 이 주사기계단(注射器階段)을 강화시켜서 “더욱 빠르게” 선박을 대야택(大野澤)에 이를 수 있게 하였다.“는 주장을 <1>~<6>에 이르는 이야기를 통해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리시설(水利施設)은 그 핵심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을 알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래하(膠萊河)및 고하(沽河)의 물을 저장하는 백맥(百脉)-대수고(大水庫), 또는 유수(維水)를 저장한 협산(峽山)-대수고(大水庫)의 물의 저장과 방류(放流), 그리고 이 대수고(大水庫)까지 선박(船舶)이 올라갈수 있는 갑문(閘門)들이 그것입니다.
이 첫 번째의 수리시설은 그 요점이 결국은 ‘인공적(人工的)으로 형성된 수원(水源)의 확보와 이용’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조석수(潮汐水)의 ‘밀물’이 올라온 상태에서 갑문(閘門)을 닫은 상태에서 위 첫 번째의 수리시설에서 형성된 거대한 인위적인 ‘밀물’을 버텨주는 갑문(閘門)장치와 이에 부속되는 여러 시설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의 인공적(人工的) 수리시설(水利施設)이 무척 문제가 됩니다.
왜냐?
단순한 갑문(閘門)으로서는 조석수(潮汐水)물을 보내는 해수(海水)의 압력(壓力)을 활용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첫 번째 인공적인 수원(水源)의 거대한 물을 방류시킨다고 하더라도, 제수하류(濟水下流)와 각각의 칠중하(七重河)가 만나서 바다로 향하는 그 입구를 갑문(閘門)으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이는 제방(堤防)역할 - 다시 말하면, 물이 바다로 빠지는 것을 막는 역할 밖에 못한다는 것이지요.
즉 조석수(潮汐水)를 보내는 힘인 ‘해수(海水) 압력’을 전달(傳達)하여야만 주사기(注射器) 기능을 할터인데, 일반적인 갑문(閘門)이면, 이는 이 압력을 전달하지 못하는 제방에 불과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게 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냥 거대한 대수고(大水庫)에 갇혀있던 물이 뒤집힌 컵(∩)모양으로 방류(放流)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분명히 할 것은 고대의 제수(濟水)가 대야택(大野澤)에서 래주만(萊州灣)까지 마치 뒤집힌 컵 (∩) 모양으로 흐르는 것이 해발(海拔)로 보아서는 거의 수평(水平)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동반도(山東半島)는 태산(泰山)과 몽산산맥(蒙山山脈)이 있는 오늘날 산동성(山東省)의 가운데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이 ‘개머리’ 처럼 생긴 산동반도의 동부(東部)가 높습니다. 따라서 뒤집힌 컵(∩)모양의 대야택(大野澤)과 래주만(萊州灣) 구간(區間)은 제수(濟水)가 높은 곳을 피해서 흐르다가 보니 저절로 형성된 흐름의 모습인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이는 조석수(潮汐水)가 역류(逆流)하더라도 가장 낮은 곳을 골라서 역류(逆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해발 높이가 같은 뒤집힌 컵(∩)모양으로 “대수고(大水庫)의 물이 그냥 방류(放流)된 것과 조석수(潮汐水)에 있는 ‘해수(海水) 압력’을 실어주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하는 문제는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해압(海壓)을 받게되면, 주사기(注射器)모양으로 받은 압력이 톱질에서 생긴 진흙 유(U)자 협곡을 통해 유-턴(U-tern)하면서도 물이 분사(噴射)되기 때문에, 그 유속(流速)이 몇배로 빠르다는 것이지요.
이런 수리시설(水利施設)의 도움이 없이는 승조급공(乘潮急攻)이라는 이상한 전략은 발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단순 방류(放流)로 흘러들어온 물은 해압(海壓)에 의한 분사(噴射)기능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백제군 만(萬)명을 수장(水葬)못 시키는 것이 뻔하다는 것입니다.
나. 갑문(閘門)은 어찌 생겼나? - 아공십여<ㅏ工 十ㅕ>로 생긴 갑문(閘門)
그런데 우리는 “갑문(閘門)이 어찌 생겼는가?”를 좀더 정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갑문(閘門)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야기는 이 싸이트(site)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기바랍니다.
1. 고조선의 비밀 발진기지 (1) : 태화사(太和寺), 여육(膂肉)의 공국(空國)
2. (*) 진한육부(辰韓六部)의 주거강(主據江), 閼川, 蘿井, 三危山의 비밀-(G))
-각설(却說)
1) 좌우(左右)로 여닫는 갑문(閘門)의 기본적 구조
갑문(閘門)은 좌우(左右)로 열고닫는 문(門)인데, 좌우(左右)의 문(門)이 요철(凹凸)로 서로 끼게 되어 있는 대신에 육중한 갑문(閘門)이 움직이는 밑에는 바퀴가 달려있고, 그 밑에는 ‘갑문(閘門) 넘어’의 물이 나오는 하수구(下水溝)와 이를 덮는 맨홀(manhole)로 되어 있음을 이미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런데, 좀더 이를 정교하게 설명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갑문(閘門)은 조감도(鳥瞰圖) 즉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때, 그 모양이 <ㅏ工 十ㅕ>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즉 [갑문(閘門)=아공십여<ㅏ工 十ㅕ>라는 것이지요.
좌우(左右)로 열고 닫는 문(門)의 좌측(左側)이 공(工)이란 글자, 그리고 우측(右側)의 문(門)이 십(十)이란 글자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아공십여<ㅏ工 十ㅕ>의 구조에서 상하(上下)의 폭(幅)은 몹시 좁고, 좌우(左右)의 폭은 몹시 긴 - 다시 말하여 <ㅏ工 十ㅕ>를 옆으로 길게 잡아당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좌측문(左側門)인 공(工)의 사이의 ‘빈틈’에 우측문(右側門)인 십(十) 자(字)의 <ㅓ>가 끼어서 좌우(左右)로 열어젖히더라도 물이 안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좌측문(左側門)인 ‘공(工)자 형태의 문(門)’과 우측문(右側門)인 ‘십(十)자 형태의 문(門)’사이의 밑 역시 수평(水平)으로 된 청동(靑銅)으로 된 판(板)이 물 샐 ‘틈’이 없게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工)자 형태의 문(門)’과 ‘십(十)자 형태의 문(門)’의 아랫부분을 측면도(側面圖)로 보면 모두 기역(ㄱ)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그 밑에 청동(靑銅) 판(板)이 놓여져 있게 되니깐, 밑의 청동판(靑銅板)까지 합치면, 결국 측면도로 보면 <그>란 글자 모양이 돕니다.
그런데 ‘무거운 갑문(閘門)’이 굴러가게하는 바퀴가 있는 부분은 <크>에서 가운데 가획(可劃)한 ‘ㅡ’자 부분에 달려있는 것이지요. 이 바퀴들이 평면도(平面圖)에서 바라보면 수없이 있게 되는데, 바로 그 밑에 ‘갑문(閘門) 넘어의 물(水)’이 갑문(閘門)의 하수구(下水溝)로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이지요.
갑문을 좌우(左右)로 열때에는 이 맨홀(manhole)을 지나게 되므로 맨홀은 ‘갑문(閘門) 넘어의 물(水)’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저절로 열리게 되고, 물은 급속히 맨홀(manhole)을 통해서 흘러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갑문(閘門)을 완전히 열어젖혔을 때에는 ‘갑문(閘門) 넘어의 물(水)’이 이미 맨홀(man-hole)을 통해 다 빠져버렸으므로, 갑문(閘門) 안팎의 수준(水準)이 똑같은 구조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2) 좌우(左右)로 여닫는 갑문을 엣취(H) 빔(beam)으로 강화하고 있는 갑문(閘門)의 구조
이것이 가장 갑문(閘門)의 기본(基本)모습인데 좌측문(左側門)인 ‘공(工)자 형태의 문(門)’이 열리기 위해서 좌측으로 가기 위해서는 공(工)자의 좌측(左側)의 ‘빈틈’에 끼어넣을 수 있는 ‘ㅏ’자 형태의 청동판(靑銅板)이 길게 나와주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측문(右側門)인 십(十)자 형태의 문(門)이 우측(右側)으로 계속 나가기 위해서는 십(十)의 오른쪽에 <ㅏ>로 나와있는 부분이랑 맞물릴수 있는 <ㅕ>가 있어야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갑문은 조감도(鳥瞰圖)로 보자면, 아공십여<ㅏ工 十ㅕ>로 되어 있어야 열고 닫음에 엄청난 수압(水壓)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공십여<ㅏ工 十ㅕ>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엣취(H)빔(beam)안에 청동판(靑銅板)을 끼워넣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압(水壓)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구조적(構造的)으로 서로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에 불과하고, 갑문(閘門)은 기본적으로 ‘물 한방울’이 새여나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정교(精巧)한 정밀공학으로 청동(靑銅) 혹은 철(鐵)의 이음새가 빈틈이 없어야하는 것이 절대적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다. 칠중구지(七重衢地)에 겹으로 설치된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에 대해서
1) 해압(海壓)을 받는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에 대해서
그런데, 칠중하(七重河)들이 이를 관통하고 있는 제수하류(濟水下流)와의 교차점(交叉點) 밑에는 반드시 갑문(閘門)이 설치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 갑문(閘門)이 조석수(潮汐水)의 해수(海水)의 압력(壓力)을 받는 식으로 설계되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사기(注射器) 역할을 할 수가 있으니깐 말입니다.
이 경우 그냥 제방(堤防)의 ‘사이’에 아공십여<ㅏ工 十ㅕ>의 갑문(閘門)이 설치되어 있으면, 이 제방과 갑문이 해압(海壓)을 차단시키는 역할 밖에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구조로 되어 있어야 인공적으로 만든 대수고(大水庫)의 물을 방류(放流)하더라도, 계속 조석수(潮汐水)의 해압(海壓)을 살려서 주사기(注射器)처럼 물을 분류(噴流)시킬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구조가 바로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이라는 것이지요
2)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이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의 전체 모양을 조감도(鳥瞰圖)로 - 즉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엣취(H)자 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
엣취(H)란 글자는 좌우(左右)의 수직(垂直)로 된 벽(壁)이 <ㅣㅣ>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 <ㅡ>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ㅡ>부분에 갑문(閘門)이 설치되어 있으면서도, 조석수(潮汐水)의 밀물이 해압(海壓)을 받아서 그 힘을 위로(↑)로 받을 때에는 갑문(閘門)전체가 위로 활강(滑降)할수 있게끔 하고, 반대로 조석수(潮汐水)의 썰물이 해압(海壓)을 받아서 그 힘을 아래(↓)로 받을 때에는 갑문(閘門)전체가 아래로 활강할 수 있게끔 미리부터 설계가 되어 있는 갑문(閘門)을 뜻합니다.
이런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이 설치되어 있으면, 대수고(大水庫)에 갇힌 물이 더 첨가되더라도, 바다의 해압(海壓)을 그야말로 주사기(注射器)처럼 그대로 밀어누르는 힘을 전달하기 때문에, 뒤집힌 컵(∩)모양으로 되어 있는 제수(濟水)를 역류(逆流)해서 분사(噴射)시킬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는 구조적으로 보면 갑문이 아공십여<ㅏ工 十ㅕ>로 되어있는데, 그 끝의 <ㅏ>와 <ㅕ>의 수직(守直)으로 되어 있는 <ㅣ>의 숫컷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암컷인 엣취(H)가 <ㅏ>와 <ㅕ>의 상하단(上下端) 양(兩)쪽으로 있게 되면 됩니다.
물론 이때에도 ‘물 한방울 새지 않는 정밀(靜謐)한 접촉’과 동시에 굴러갈수 있는 ‘바퀴’가 달려 있어야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제수(濟水)와 칠중하(七重河)들이 교차하는 곳에는 모두 이와같은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대량(大量)의 물을 방류하더라도 대야택(大野澤)까지 이를 분사(噴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3)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을 여닫는 시점(時點)과 선박(船舶)이 계단식(階段式)으로 올라가는 문제
그런데, 이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은 조수(潮水)가 밀려들어올 때에는 완전히 활짝 열어서 조수(潮水)의 통과를 막지 않아야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가 끝난 다음에는 갑문(閘門)을 닫되, 활강(滑降)할 수 있도록 해두면 해압을 그대로 위로(↑)로 받게할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대수고(大水庫)의 물이 방류(放流)가 된다고 가정하고, 이때 마침 선박(船舶)이 이 방류된 물(水)을 타고 저 대야택(大野澤)까지 들어가기 위해서 동해(東海)에서 칠중하(七重河)를 타고 올라온다고 가정(假定)해 봅시다.
그렇다면 “이때에는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이 도대체 칠중하(七重河) 낟낱에 몇 개 필요한가?”하는 문제인 것이지요.
선박(船舶)이 계단식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갑문(閘門)은 무조건 2개 이상이어야합니다.
그래야 격차(隔差)가 지는 수위(水位) 중간 부분 - 즉 계단(階段)에 배(船)가 올라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놀랍게도 이럴 경우를 생각하면, 칠중하(七重河) 낱날 마다 이러한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이 최소한 2개씩 있어야함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선박(船舶)이 수압활강식 갑문을 타고, 계단식으로 상승(上昇)하기 위해서는 일차(一次), 이차(二次), 삼차(三次)하는 식으로 한없이 올라갈수 있으나, 그 최초(最初)의 갑문(閘門)과 최종(最終)의 갑문(閘門)이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따라서 최소한 2개여야하는 것이지요.)
4) 동해(東海)에서 선박을 타고, 밀물이 끝난 상태에서 인공적 방류(放流)되는 물을 타는 경우의 가상(假想)사례
동해(東海)에서 선박을 타고, 밀물이 올라온 상태에서 칠중하(七重河)로 들어가면서 동시에 인공적인 물이 방류
(放流)되는 믈결을 탈 경우를 가상해 보기로 합시다.
선박(船舶)은 밀물에 의해 불어난 물에 의해서 칠중하(七重河)중 하나의 하수(河水)를 선택하여 일차(一次) 수압
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 앞에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 일차(一次)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
그러면 “통과해도 좋다. 대수고(大水庫)의 물을 방류할 준비가 끝났다.”라는 싸인(sign)이 온다음 서서히 최초(最初)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이 열릴 것입니다.
선박(船舶)은 통과하겠지요.
(나) 평상적인 칠중하(七重河)의 흐름에 의한 선박(船舶)의 상승(上乘)현상
이처럼 일차(一次)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이 열리고, 이것이 다시 닫친 상태에서 계속 칠중하(七重河)의 물은
흘러들어오게 되어서 선박(船舶)은 저절로 상승(上昇)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칠중하(七重河)의 자연스런 물의 흐름에 의해서 선박(船舶)은 최후(最後)의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
(閘門)에 이르를 것입니다. (중간의 갑문이 없을 때에는 2개의 갑문으로 족(足)하다.)
(다) 대수고(大水庫) 물의 방류(放流)가 되는 시점은 선박(船舶)이 최종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넘어섰을 때이다.
아무튼, 선박이 칠중하(七重河)의 최종(最終)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에 들어서고, 이 갑문(閘門)이
닫혔을때 대수고(大水庫)의 물은 방류될 것입니다.
이는 결국 대수고(大水庫)의 물은 해발(海拔)의 높이로 보아서는 최종(最終)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의
높이가 대야택(大野澤)의 높이와 같거나 최소한 약간 높은 위치에 있을 때, 물이 방류(放流)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물의 흐름이야 뒤집힌 컵(∩)모양이긴 하지만, 물의 높이로 보아서는 그냥 위에서 아래로 해압(海壓)을 받는
가운데서 흘러나가게 되고, 이런 분사(噴射)되는 물 위에 선박(船舶)은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라) 방류(放流)되는 대수고(大水庫)의 갑문이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으로 되ㅇ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칠중(七重)-구지(衢地)에서 인공적으로 저장되는 물의 원천(源泉)은 오늘날의 교래하(膠萊河)와 고하
(沽河), 그리고 유수(維水) - 이는 유수(濰水)라고도 씀 -입니다.
문제는 이런 인공의 대수고(大水庫)의 물(水)을 방류하는 갑문(閘門)까지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으로 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 가능하리라 봅니다.
일단 규구(葵口)즉 ‘해바라기 입구’ 갑문(閘門)을 닫습니다.
(참고: 이때에는 조석수(潮汐水)가 밀물로 들어와 있는 상태이므로 제수(濟水)는 역류(逆流)해서 대야택(大野澤)을
통해 백강(白江)으로 흐르는 때임)
그리고는 대수고(大水庫)의 물을 방류하면, 규구(葵口)와 칠중하(七重河) 사이에 있는 선박(船舶)은 계속 흘러
나오는 칠중하(七重河) 상류의 물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그 수위(水位)는 높아지겠지요.
이 상태에서 대수고(大水庫)의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의 브레이크(break)를 열면 - 이는 기술적으로
활강하지 못하게 ‘말뚝’을 걸어둔 것을 뽑는것을 뜻함 - 대수고(大水庫)의 수압(水壓)이 그대로 활강하는 갑문(閘門)
을 마치 주사기(注射器) 처럼 밀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슬쩍 규구(葵口)의 갑문을 여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이는 그야말로 주사기(注射器)로 물을 분사(噴射)시키는 듯한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 승조급공(乘潮急攻)의 전략이 가능하려면, 위와같은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의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이 칠중하(七重河)에 최소한 겹(2)으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습니다.
이는 국로추사(菊露秋史)에 있는 “승조급공(乘潮急攻) - 조수(潮水)물을 타고, 급(急)히 공격한다.”는 사료가 사실
이려면, 반드시 있어야하는 인공적인 수리시설(水利施設)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조수(潮水)물로는 이곳 지리를 너무나 잘아는 백제군(百濟軍) 10,000군사가 수장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유압(油壓)기술과 파스칼(Pascal)의 원리
그런데, 위에서 가정한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갑문(閘門)’이라는 것은 결국 그 기술의 핵심이 유압(油壓)기술을
거시적 차원에서 활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유압(油壓)기술이 고조선(古朝鮮)과 부여(夫餘)에 있었겠는가?"하는 것을 우리는 진지하게 살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 요구르트(yoghurt)의 발생과 고조선(古朝鮮)-부여(夫餘)의 기술에 대해서
유압(油壓)장치가 없으면, 복잡한 기계(機械)를 원활하게 움직이는 것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유압(油壓)장치는 기본적으로 파스칼(Pascal)의 원리에 그 기반을 두는 기술입니다.
1) 파스칼(Pascal)의 원리는 어떤 장점이 있는가?
파스칼의 원리는 “밀폐된 용기의 유체(流體)에 힘을 가하면, 모든 용기(容器)의 부분과 그 용기의 벽(壁)에 까지
그 힘의 크기가 방향과 상관없이 전달(傳達)된다.”라는 원리를 뜻합니다.
가) 작은 힘을 긴 길이만큼 써서 순간적으로 짧은 거리에 큰 면적의 힘을 낼수 있다.
아 파스칼(pascal)의 원리가 중요한 것은 - 공동의 유체(流體)에 두 피스톤(piston)이 있을 때, 한쪽은 그 관(管:
Piston)의 굵기가 작고 - 이는 단면적이 적은 것을 뜻함 - 또 한쪽은 관(管)의 크기가 굵을 경우 -이는 단면적(斷面績)
이 큰 것을 뜸함 - 작은 관(管)의 작은 힘으로 큰 면적(面積)에서 큰 힘으로 전환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유압(油壓)으로된 자동차(自動車)의 브레이크(break)는 아주 가는 관(管: piston)에 작은 힘으로 긴 길
이로 힘을 주게 되면, 자동차 바퀴에 연결된 매우 넓은 ‘퍼져있는 관’에 작은 거리를 이동하긴 하지만,
수천배의 힘을 낼수가 있게 하는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나) 유체(流體)를 담는 용기(容器)를 조절하면 힘의 방향이 자유자재이다.
특히 이 파스칼(pascal)의 원리가 흥미있는 것은 ‘유체(流體)’에 의해서 힘을 전달하는 방향을 아주 손쉽게 바꿀
수가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유체(流體)를 담은 용기(容器)를 꼬불 꼬불 휘게 하고 여기에 적당히 관(管) 즉 피스톤(piston)을 박아놓으면
어디로든지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파스칼(pascal)의 원리를 활용하는 장치를 유압(油壓)이라고 하는것은 기름이 산소(酸素)를 적게 지니고
있어서 용기(容器)가 - 이는 주로 철(鐵)로 되어있다. - 산화(酸化)되지 않기 때문에 유체(流體)를 ‘기름’으로 선택
하는 것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유체(流體)를 물(水)로 해도 똑같은 효과를 보는 것이지요.
2) 파스칼(pascal)의 원리와 유목민(遊牧民)의 삶
가) 요구르트(yoghurt)의 발생
그런데, “고조선(古朝鮮)과 부여에 과연 이런 유압(油壓)혹은 수압(水壓)장치 다시말하면, 파스칼(pascal)의 원리를
활용하는 기술체계가 있었는가?”하는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험고고학적인 관점에서는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의외로 이것이 요구르트(yoghurt)의 발생하고 관련이 됩니다.
유목민들은 아주 태고(太古) 적부터 가죽부대에 여러 동물의 젖(=유(乳))을 넣어서 다니는데, 그중에 염소가죽에
우유(牛乳), 양유(羊乳) 등을 넣고 가다가, 이것이 오늘날 요구르트(yoghurt)로 변하는 것으로 발견하였다는 것입
니다.
문제는 그 후에 이런 ‘요구르트’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염소가죽 속에 동물의 젖을 넣은 다음에 인위적으로 이
가죽 밖에서 마치 빨래 빨듯이 힘을 가하는 작용을 해서 ‘요구르트’의 발생 즉 발효(醱酵)를 가속화시키는 행위를
아주 일찍부터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를 통하여, 유체(流體)에 가해진 모든 힘은 다른 곳에 그대로 전달된다는 ‘파스칼(pascal)의 원리’
를 쉽게 깨닫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작업을 하는 가운데 교반(攪拌) 기계까지 생각하기에 이러렀다는 것입니다.
교반(攪拌)이라함은 ‘젖는 것’인데 - 배(船)에서 노(櫓)젖듯이 젖는 것을 뜻함 - 돌(石)로 된 무척 굶은 막대주변에
다가 ‘동물의 젖’을 넣은 가죽을 둘러싸고, 이 돌(石) 막대에 양쪽으로 긴 밧줄을 걸어서 마치 톱질하듯이 왔다갔다
하면서 잡아당기는 것이지요. 그러면 일종의 연자방아처럼 돌(石)의 무게에 의해서 가죽 속에 있는 우유는 이리
저리 가죽의 용기(容器)가 변하는 가운데, 그 힘을 골고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반(攪拌)기계는 ‘파스칼(pascal)의 원리’에 유목민들이 일찍 노출(露出)되어있을 개연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 유해교반(乳海攪拌)의 신화
그런데, 인도(印度)의 우주창조 신화에 의하면 이 북극해(北極海)에서 북극성(北極星)에 이르는 천지(天地)의
축(軸)을 비녀목으로 삼아서 ‘평화를 사랑하는 천신(天神)’과 전쟁을 좋아하는 아수라(阿修羅)신이 서로 줄다리기를
해서 저 바다에서 일종의 요구르트(yoghurt)인 감로(甘露)가 올라오도록 하는 경기(競技)를 벌리는 장면이 등장합
니다.
이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교반(攪拌)기계를 상정하는 것이 되는 신화입니다.
그리고 천지(天地)의 축(軸)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이 기운(氣運)이 몰려있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에서 수압(水壓)을 걸어주는 힘의 원천은 바로 달(月)과
태양에 의한 인력(引力)의 차이(差異)이기 때문에, 일월성신(日月星辰)의 힘이라고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유목민(遊牧民)일수록 특히 물(水)의 원리에 매우 예민한 해운국(海運國)일수록 이런 ‘파스칼의 원리’에
일찍부터 노출(露出)되었을 개연성이 큰 것입니다.
이 유해교반(乳海攪拌)의 신화에서는 결국 우주의 보물(寶物)들이 신들의 교반(攪拌)에 의해서 올라오는데 북두칠성
(北斗七星)을 낳은 가우리(Gauri)여신이 감로주(甘露酒) 한 병(甁)을 들고 나오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고구리(高句麗)를 가우리(Gauri)로 발음하는 것은 어쩌면 이 유해교반(乳海攪拌) 신화의 가우리
(Gauri)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고조선(古朝鮮)과 부여(夫餘)사람들은 유압(油壓)및 수압(水壓)을 활용 파스칼(Pascal)의 원리를 최고도로
활용하였다고 보는 것은 발생론(發生論)으로 보았을 때, 결코 이상한 생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목우사자(木偶獅子)라는 로봇(robot)과 유압(油壓)
그런데, 저 신라(新羅)의 로봇(robot)인 목우사자(木偶獅子)의 경우에 이런 유압(油壓) 기술이 적용 안 되었다면,
매우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따라서 유압(油壓)및 수압(水壓)을 이용한 기계의 작동법에 대해서 고조선및 부여 사람들은 일찍부터 파스칼
(Pascal)의 원리를 활용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또한 부여사람들이 유사통제(流沙統制)을 오늘날 감숙회랑에서 하기 위해서는 서로 엇방향으로 흐르는 소륵하
(疏勒河)와 대통하(大通河)에 갑문(閘門)을 설치하고, 또한 이런 대규모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기중기(起重機)등이
중장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유압(油壓)기술이 없었다면, 사실 공사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고조선및 부여사람들은 ‘파스칼의 원리’를 최대한 활용하는 유압(油壓)및 수압(水壓)에 대한
고도의 기술체계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4. 활석광산(滑石鑛山)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튼, 백제초기에 산동반도 래주만(萊州灣)의 칠중하(七重河)가 제수하류(濟水下流)가 관통하고 있었고, 이로
인한 ‘깔대기 구조’가 형성되어 조석수(潮汐水)의 밀물 때문에 하루에 두 번씩 뒤집힌 컵(∩)모양으로 대야택(大野澤)
으로 보내는 ‘자연적 환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 칠중구지(七重衢地)에는 수없이 많은 갑문(閘門)이 필요하다.
(가)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 구조’로써 웅진강(熊津江) 전체를 조석수(潮汐水) 에스컬레이터(escalator)로 삼는
공사(工事)에 필요로 하는 갑문(閘門)들.
그런데, 여기에 이를 가속화시키기 위해서 해압(海壓)을 활용할수 있는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제수하류(濟水下流)가 칠중하(七重河)와 교차하는 지점마다 놓았고, 또 오회수(俉淮水 = 오늘날 교래하(膠萊河))와
유수(維水: 오늘날 유수(濰水)) 상류에 선박이 올라갈수 있는 갑문(閘門)들과 또 제방이 설치되고 여기에 백맥
(百脉)-대수고(大水庫)와 협산(峽山)-대수고가 설치되어 있었고,
어쩌면 이런 대수고(大水庫)의 어마어마한 수량(水量)에서 나오는 수압(水壓)으로 역시 ‘수압활강식 갑문’을 만들어
주사기(注射器) 역할을 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역류(逆流)하는 ‘깔대기 구조’의 칠중하(七重河)를 중간에 제동(璪)을 걸 수 있는 규구(葵口) - 즉 ‘해바라기’
입구에도 갑문(閘門)이 필요하고, 똑갈은 제동(璪)의 역할을 위해서 칠중하(七重河)를 모두 아우르는 곳에 있는
화부주(華不注)산 에도 역시 갑문(閘門)이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수리시설의 목표의 핵심은 결국 ‘교통의 편리함’입니다.
(나) 칠중하(七重河) 사이의 육지(陸地)의 농업(農業)을 위한 수리시설(水利施設)에 들어가는 수문(水門)과 갑문
(閘門)의 필요성
(1) 수문(水門)과 갑문(閘門)의 차이
뿐만 아닙니다.
칠중하(七重河)가 조석수(潮汐水)의 밀물과 썰물로 ‘톱질’을 해대기 때문에, 칠중하(七重河)의 ‘강 뚝’은 거대한 유(U)
자 모양의 협곡(峽谷)으로 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따로는 ‘짠물’인 해수(海水)가 ‘강 뚝’ 높이 오르고, 또 이런 밀물이
빠졌을 때에는 이번에는 육지(陸地)의 ‘단물’이 흐르기 때문에 이 칠중하(七重河) 사이에도 역시 수문(水門)이 필요합
니다.
여기서 수문(水門)이라 함은 상하로 문(門)을 열고 닫는 장치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수문 역시 해수(海水)의 ‘짠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하기 때문에 ‘몰한방울 새지 않게하는’ 정밀(靜謐)
한 청동(靑銅)으로 된 문(門)이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칠중하(七重河)사이의 땅에도 간혹 ‘강 뚝’ 즉 제방(堤防) 사이에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선박을 탄채로
들어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칠중하(七重河)의 물에 의해서 거두워 들인 농작물(農作物)을 실어나르기 위한 선박들이 들락거릴 선착장
(船着場)이 필요로 한 것이지요.
(2) 미추홀(彌鄒忽)의 중요성
일단 미추홀(彌鄒忽) 즉 오늘날 청주(靑州)는 칠중하(七重河) 가운데 3번째인 치천(淄川)-미하(彌河)가 위(=북(北))
쪽으로 흘러나가고, 또 아래(=남(南)) 쪽에서는 네 번째 강인 단하(丹河)가 각기 별(丿) 방향으로 래주만으로 흘러
나가고, 또한 칠중하(七重河)를 관통하는 제수하류(濟水下流)가 역시 코 앞의 동쪽에서 불(乀)자 방향으로 있는
사이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은 운문산(雲門山)등의 영향으로 높은 곳이어서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짠물’에 쩌들은 이 칠중하
(七重河)를 개척하기 전에도 미추홀 주변은 생명이 자라는 즉 식생(植生)이 우거진 유일한 곳으로 추정이 되는 곳입
니다.
그런데, 이곳에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배달화백을 하는 도성(都城)’으로 삼았다면, 당연히 제방 사이에 갑문
(閘門)이 설치되고, 선박들이 자유자재로 들어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미추홀(彌鄒忽)은 미하(彌河)가 북(北)으로 흐르고 있고, 또 그 상류가 치천(淄川)입니다.
치천(淄川)의 치(淄)는 ‘검은 빛’이라는 뜻인데, 이는 탄현(炭峴)의 ‘석탄’ 때문에 그런 빛깔을 띠는 것이지요.
‘흙을 찌고, 갑문(閘門)의 재료인 청동(靑銅)을 녹이고’ 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인근지역에 노천탄광(露天炭鑛)
의 석탄(石炭)을 캐어서 이 석탄이 필요로하는 곳에 공급하고, 이를 종합관리하는 지역이 필요로 합니다.
미추홀(彌鄒忽)이 탄현(炭峴)의 석탄을 미하(彌河)와 제수하류(濟水下流)로 연결시켜서 그 쭝간에 있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매우 중유합니다.
따라서 지리(地理)로 볼 때, “이 칠중구지(七重衢地)를 개척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는 이 미추홀을 그 본거지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 오회수(俉淮水 = 오늘날 교래하(膠萊河)) 좌우(左右)에 있는 내외궁(內外宮)의 비성(泌城)과 이에 필요로한
갑문(閘門)
그런데, 배달화백을 하기 위해서, <신시(神市)의 화폐와 배달화백의 의사진행록(議事進行錄)>을 사신(使臣)들과
‘배달화백’을 하기 위해서 직접 귀빈(貴賓)이 이 칠중하 가운데의 맪 끝의 강인 오회수(俉淮水) 즉 오늘날의 교래하
(膠萊河)에 들어와서 조석수(潮汐水)의 밀물을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북류(北流)하는 오회수(俉淮水) 우측(右側)에 이처럼 배달화백의 ‘말발’과 의사진행록(議事進行錄)을 대동한 사신
(使臣)과 귀빈들이 묵는 외궁(外宮) 즉 외액(外掖)이 있었고, 이곳에 ㅇ동성왕(東城王)의 임류각(臨流閣)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관련된 글이 ‘<3> 동성왕(東城王)과 비류선제(沸流仙帝)기 일어나는 발단’로 있습니다.
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처럼 북류(北流)하는 오회수(俉淮水) 좌측(左側)에 외국(外國)에서 ‘배달화백에 참여하기 위한 선박’을
지키는 ‘환나(桓那)-벅수군’과 외국(外國)의 사신(使臣)과 귀빈을 지키는 사표(虒驃)-경호무사들이 있는 ‘환나국
(桓那國)-조차지’가 내궁(內宮)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궁(內宮)과 외궁(外宮)의 -이는 내액(內掖)과 외액(外掖)으로도 표기(表記)되기도 함 - 비성(泌城)
으로도 선박(船舶)을 탄채 들어가기 위해서는 역시 갑문(閘門)이 필요로 합니다.
마한백제(馬韓伯濟)의 활석광산(滑石鑛山)-우이(嵎夷),래이(萊夷)관련
2) 갑문(閘門)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근에 활석광산(滑石鑛山)이 있어야한다.
(가) 송연(松烟) 코팅(coating) 기술
그런데 갑문(閘門)은 그 성격상 ‘물 한 방울 새지 않게 하는’고도의 정밀공학이 필요로 합니다.
이런 기술이 유물(遺物)-고고학으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국보(國寶) 141로 되어있는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인 것
이지요.
직경 21.2센치미터 안에 깊이 0.7미리, 폭 0.2미리의 잔금(=세문(細紋))이 무려 1만 300여개의 직선(直線)과 100
여개의 동심원(同心圓)이 있는 정교하기 짝이 없는 청동기(靑銅器) 기술인 것입니다.
이런 정밀 공학으로 ‘물 한방울 새지 않는’ 갑문(閘門)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이 기술이야말로 근대(近代)
이전에는 전세계에 고조선(古朝鮮)과 부여 만이 자니고 있던 과학기술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해야할 것은 갑문(閘門)을 흔한 철(鐵)로 만들지 않고, 청동(靑銅)으로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철(鐵)이 물 속에 들어가면, ‘물 속에 있는 산소(酸素)’ 때문에 급격히 부식(腐蝕)되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에 비해서 청동(靑銅)은 부식속도가 훨씬 더딥니다.
아무튼 갑문(閘門)은 이런 이유로 청동(靑銅)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을 재현시킨 동국대 문화예술 대학원의 곽동해 겸임교수와 청동주조 전문
가인 이완규 (장인 예술 대표)는 그 기술의 핵심이 송연(松烟) 코팅(coating)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청동기(靑銅器)를 주조할 때에 활석(滑石)으로 용범(容範: =금형(金型: mold)으로 주조할 거푸집을 만들고,
여기에 소나무 관솔을 태울 때의 연기(煙氣)를 코팅(coating)한다는 것입니다.
즉 송연(松烟)-코팅(coating)이라는 것은 연기(煙氣)가 정밀(靜謐)한 표면(表面)과 문양(紋樣)이 새겨진 거푸집인
활석(滑石)에 피복(被覆) - 그리니깐 ‘깔리듯이 누적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연기(煙氣)는 입자(粒子)가 매우 곱고 또한 ‘이미 탄 것’이므로 뜨거운 청동(靑銅)의 주물(鑄物)이 들어가도 변형
(變形)이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송연(松烟)-코팅(coating) 기술이 고조선(古朝鮮)과 부여에 있었던 기술인데, 실전(失傳)되었다가,
동국대 문화예술 대학원의 곽동해 겸임교수와 청동주조 전문가인 이완규 (장인 예술 대표)가 재현시킨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송연(松烟)-코팅(coating) 기술을 쓰게 되면, 용범(容範)으로 썼던 활석(滑石)의 금형(金型)을
‘지속적으로 활용’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청동(靑銅) 갑문(閘門)은 레고-블록(lego-block)의 조립(組立)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데, 갑문(閘門)은 그 크기가 실로 어마 어마합니다. 문제는 이 갑문(閘門)이 정밀공학으로써 ‘물 한방울 새지
않게’하는 것이지만, 이런 정밀공학(靜謐工學)이 있게 되면,
레고-블록(lego-block) 짜 맞추듯이 조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 그러나 물이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통째로 큰 용범(容範)이 필요로 하다.
그러나 조립(組立)에서 오는 편차(偏差: 뒤틀림)이 있기 때문에, 갑문(閘門)의 내부구조에서 ‘물이 통과하지 않는
가운데’ 서로 ‘미끄러지는 부분’은 가급적 통째로 큰 용범(容範)이 필요로 한 것입니다.
(라) 활석(滑石)이란?
그런데 “왜 청동(靑銅)의 주조(鑄造)에는 활석(滑石)이 그 용범(容範) 즉 금형(金型)의 틀 - 다시 말하면, 거푸집
으로 쓰였는가?”함을 일단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활석(滑石)에 대해서 인터넷(internet)에서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활석 [滑石, talc]은 화학성분은 Mg3(OH)2Si4O10이라는 것이지요. 가끔은 운모(雲母)처럼 인상(鱗狀) ·엽편상
(葉片狀)을 이루는데, 대부분 치밀질의 집합체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이다.
엽편(葉片)으로 되어 있을 때에는 휘기 쉽지만 탄성은 없는 특징을 이룹니다.
이 활석(滑石)은 백색 ·은백색 ·담녹색, 때로는 암녹색 ·갈색이고, 엽편의 것은 투명하거나 반투명하며,
괴상(塊狀)의- ‘덩어리’형태를 뜻함 - 것은 거의 불투명한 색깔을 띤다는 것입니다.
(1) 조각(彫刻)하기 좋은 광석(鑛石)
그런데 이 활석(滑石)은 광석(鑛石) 가운데 이 지구상에서 가장 무른 돌에 속합니다.
광석(鑛石)의 ‘굳기(=경도(硬度)’를 1에서 10까지 나누는데, 1이 바로 활석(滑石)이고, 자연상태에서 발견되는
석고(石膏)가 2이며, 10이 바로 금강석(金剛石)입니다.
이처럼 활석(滑石) ‘무른 돌’이기 때문에, 칼로 조각(彫刻)을 할수 있음은 물론 만지면, 지방(脂肪)같은 감촉
- 즉 미끈미끈한 감촉을 느낄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질’을 하게 되면, -그 흔적인 조흔색(條痕色)은 백색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원래의 색깔이 주로 이미 소개했듯이 백색 ·은백색 ·담녹색, 때로는 암녹색 ·갈색인데, 이것이 백색(白色)으로 나타
나니깐, 금형(金型)을 조각할 때, 원재료(原材料)의 색(色)과 차이가 나니깐 작업하기도 편리함을 뜻합니다.
비중이 2.7∼2.8이니깐, 대략 물 무게의 3배쯤 되기 때문에, 가벼운 광석(鑛石)에 속합니다.
(2) 청동주물(靑銅鑄物)의 금형(金型: mold)로 안성맞춤인 돌.
그런데, 이런 활석(滑石)을 금형(金型)으로 만들고, 문제는 여기에 주물(鑄物)을 붇게 됩니다.
이럴때 고온(高溫)의 주물(鑄物)온도에 대해서 이 활석(滑石)은 (700~900℃)에서는 각섬석(角閃石) 구조로 변하고,
(1000~1200℃)에서는 휘석(輝石)구조로 변하고, (1250~1350℃)에서는 크리스토발라이트(cristobalite) 단사완화
휘석으로 분해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동(靑銅)의 용융점은 970도이고, 철(鐵)은 1530도입니다.
따라서 활석(滑石) 용범(容範)에다 청동(靑銅)의 용융액을 부으면, 즉각 활석(滑石)은 그 구조가 일단은 각섬석
(角閃石amphibole:)구조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각섬석(角閃石)은 산(酸)에 녹지 않는 특성이 있고, 또한 ‘굳기’가 5에서 6에 이릅니다.
이는 경도(硬度) 1인 ‘무른 돌’ 활석이 경도(硬度) 5~6인 ‘딱딱한 돌’로 변함을 의미합니다.
굳기 6인 돌이 바로 석영(石英: quartz)입니다. 따라서 힘에 의해서 변해지지 않는 딱딱한 금형(金型)으로 변하면서,
동시에 산(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로 돌변함을 뜻합니다.
또한 이보다 활석(滑石)이 (1000~1200℃)에서는 휘석(輝石)구조로 되는데, 이는 휘(輝)의 뜻이 ‘빛나다.’인 것과
같이 활석(滑石)의 재료 자체가 유리질(琉璃質)로 변해서 ‘유리(琉璃)가 빛을 반사하듯이 반사’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유리(琉璃: glass)는 액체(液體)인지라, 광석(鑛石)의 미세한 빈틈도 메꾸는 기능이 있고, 이런 연유로
유리질(琉璃質)은 빛이 나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활석(滑石) 덩어리를 금형(金型)을 만들되, 아주 세심한 배려로 ‘이어붙이기’ 즉 조립(組立)으로 만들고,
여기에 1000도 이상의 가열을 했을 경우, 이것이 유리질(琉璃質)의 작용에 의해서 하나의 통짜로 된 금형이 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활석(滑石)만치 청동주물(靑銅鑄物)를 넣어서 용범(鎔范=금형(金型)=mold)는 없는 것이고,
특히 갑문(閘門)을 만듬에 있어서는 가장 좋은 용범(鎔范)이 되는 것입니다.
(마) 산동반도(山東半島) 래주만(萊州灣) 근처에 활석광산(滑石鑛山)이 있는가? - 평도시(平度市) 활석광산
(滑石鑛山)
따라서 지금까지 제수하류(濟水下流)가 칠중하(七重河)를 연결시켜 조석수(潮汐水)물이 대야택(大野澤)까지 운반
시키는 에스컬레이터(escalator)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비롯해서, 일반
갑문(閘門)등이 수없이 필요로 하고, 이러자면 이런 갑문(閘門)을 만들기 위해서 ‘청동주물(靑銅鑄物)’의 금형 재료
인 활석(滑石) 광산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1) 산동반도의 평도시(平度市)에 있는 대규모의 활석광산(滑石鑛山)
그런데, 중국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활석광산(滑石鑛山)은 바로 산동반도 ‘안’에 있는 평도시(平度市)입니다.
즉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개 머리’처럼 나가있는 부분에서 래주만(萊州灣)과 교주만(膠州灣)을 연결하는 교래하
(膠萊河)는 와이(Y)자 모양으로 고하(沽河)와 만나 교주만(膠州灣) - 오늘날 청도(靑島)가 있는 곳으로 흘러나가는데,
이 와이(Y)자 모양으로 흐르는 두 강에 대양산(大洋山)의 남쪽에 있는 도시(都市)가 바로 평도(平度)입니다.
즉 와이(Y)자 모양의 가운데 위치하는 도시(都市)인 것이지요.
<또다른 참고용 지도>
http://www.coo2.net/bbs/icon/member_image_box/362/miha.gif
그런데 여기에 대규모(大規模)의 활석광산(滑石鑛山)이 있기 때문에,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이 활석광산(滑石鑛山)
의 활석(滑石)을 활용해서 수많은 갑문(閘門)을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 민족의 극비(極秘) 기술이었던 갑문(閘門)과 백맥호(百脉湖) 미스테리(mystery)
그런데, 이 갑문(閘門)에 관련된 기술은 신기하게도 극비(極秘)로 운영된 냄세가 강합니다.
사서(史書)에는 “갑문(閘門)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발견이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살수대첩입니다. 불과 일박이일(一泊二日)동안 ‘히로시마 원폭(原爆)’에 가까운 수(隋)나라
30만 대군(大軍)을 수장(水葬)시켰는데, 이는 수많은 갑문(閘門)에 가두워둔 물을 동시에 방류(放流)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저히 생길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갑문(閘門)은 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멸망(滅亡)의 위기 때, 감쪽같이 사라지는 한결같은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반도 경주(慶州)와 포항(浦項) 사이에는 인공호수(人工湖水)인 안강호(安康湖)가 있었는데, 오늘날 형산강
(兄山江)은 “원래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이 이어진 제방(堤防)이었으나, 신라가 멸망할 당시에 경순왕께서 용(龍)
으로 승천하시면서 ‘벼락’으로 이 제방을 단맥(斷脈)해서 결과적으로 호수(湖水)에 잠겨있던 거대한 논이 생겼다.”
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따지고 보면, 동해(東海)에서 형산강(兄山江)을 타고 올라가는 갑문(閘門)이 있는 시설이
갇추어져 있었는데, 신라멸망때, 이 갑문(閘門)주변의 제방을 무너트린 어떤 사실(事實)의 흔적이라 할수 있습니다.
아무튼, <갑문(閘門)과 인공호수>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결같이 신기한 것은 이런 갑문(閘門)과 제방을 사용하던 주체(主體)들이 사라질 때
에는 반드시 그 제방이 폭파되고, 그곳에 있던 갑문(閘門)이 깜쪽같이 사라지는 이상한 공통현상도 또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
(가) 갑문(閘門)에 관한 극비(極秘)의 관리를 위해서는 활석광산(滑石鑛山)에서 제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 각설(却說)
‘제방의 무너트림과 갑문(閘門)의 깜쪽같은 사라짐’이란 사실은 결국 이에 대한 기술을 철저히 극비(極秘)로 운영
해왔던 핵심기술 중의 핵심기술이었음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극비(極秘)의 갑문(閘門)을 제조(製造)하려면, 오늘날 아시아(Asia)의 최대 활석광산(滑石鑛山)인
산동성 평도시(平度市)에서 갑문(閘門)을 직접 만드는 것이 가장 그 기밀(機密)이 외부로 새지 않고, 유지될 가능
성이 큰 것이지요.
왜냐하면 금형(金型)의 재료가 있는 곳에서 외부(外部)에서 석탄(石炭)과 청동(靑銅)을 해운(海運)으로 싣고와서
교래하(膠萊河)나 고하(沽河)를 타고 와서 직접 만들게 되면, ‘제조방법’은 외부에 절대로 누출(漏出)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완순 선생님’이 올리신 ‘또다른 참고용 지도’에 의하면, 산동성 평도시(平度市) 남남서(南南西)에 백맥호
(百脉湖)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百脉湖>를 ‘백맥호’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맥맥호(百脉湖)로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백맥호(百脉湖)로 읽을 경우, 그 뜻은 “100개의 맥(脉)이 되는 호수(湖水)”라는 뜻이고, 맥맥호(百脉湖)로 읽을 경우
에는 그 뜻이 “맥(脉)들이 서로 만나서 격려하는 호수(湖水)”라는 뜻이 됩니다.
(백(百)과 맥(百)의 의미 차이에 대해서는 이곳에 ‘<6> 만주백제-맥제(百濟)의 비밀’란 글이 있습니다.
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으로 훈(訓)하든지 간에 “여기에 맥(脉)이 뭉쳐있다.”라는 매우 신기한 호수(湖水)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맥(脉)이란 ‘기(氣)가 흐르는 채널(channel)’인 경락(經絡)을 뜻합니다.
갑문(閘門)은 선박(船舶)이 강물을 타고 역류(逆流)해서 높은 곳에 마치 계단(階段)오르듯이 오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술입니다.
따라서 갑문(閘門)은 <선박(船舶)에의 맥(脉)>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 평도(平度)라는 신기한 지명(地名)
그런데, 대규모 활석광산(滑石鑛山)이 있는 이곳의 지명이 평도(平度)라는 것이 매우 신기한 지명(地名)입니다.
도(度)란 명칭 자체가 ‘길이’를 나타냅니다. 즉 도량형(度量衡)이라고 할때, 도(度)는 ‘길이를 재다’, 량(量)은 ‘부피를
재다’ 형(衡)은 ‘무게르 달다’의 뜻인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보면, 평도(平度)란 지명(地名)은 놀랍게도 “수평(水平)의 길이를 잰다.”라는 뜻입니다.
지명(地名)이름치고는 매우 이상한 지명입니다.
그런데, 실제 갑문(閘門)을 만든다고 가정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길게 수평(水平)이 완벽하게 잡힌 면적이 있는
활석(滑石) 용범(鎔范)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 길이가 갑문(閘門)으로써 ‘막고’있는 길이와 일치해야하기 때문에, 100미터 정도는 되어야할 것입니다.
물론 갑문(閘門)이 정밀공학(靜謐工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레고-블록(lego-block)처럼 조립할 수 있도록 부분
부분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압(水壓)에 견디기 위해서는 긴 길이를 통째로 청동판(靑銅板)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이런 면을 감안하고 생각해 보면, 우리는 고대(古代)에 - 이는 최소한 해모수(解慕漱) 추모께서 부여(夫餘)를 창건
하실 때까지임. 왜냐하면, 이때 오늘날 감숙성과 청해성의 소륵하(疏勒河)와 대통하(大通河)에 갑문(閘門)을 설치
하였음이 확실하기 때문임. - 이 평도시(平度市)에서 갑문(閘門)을 만드는 광경을 생각하면, 우리의 그 광경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폭(幅)이 20미터 길이가 100미터되는 거대한 활석(滑石) 용범(鎔范)이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주전자로 물을 부어도
사방(四方)으로 조용히 퍼져나갈 뿐, 절대로 한곳으로 쏠려서 흐르지 않는 절대 수평(水平)을 잡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변에 여러 가지 금속을 적절한 비율로 녹여서 ‘물(水)에 들어가더라도 산화(酸化)가 잘되지 않는’ 최고
급의 청동(靑銅)이 녹여져서 들어가는 광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상(假想)하지 않는다면, 사실 역사연구를 함에 있어 좀 게으른 연구방법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요?
5. 평도(平度) 마한백제(馬韓伯濟) 설(說)
가. 흔하지 않은 대규모 활석광산(滑石鑛山) 지역
그런데, 활석(滑石)의 대규모 광산(鑛産)은 의외로 아시아(Asia)지역에서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인터넷(internet)에서 활석(滑石)이란 단어를 조사해보면, 그 끝에 “활석(滑石)의 주산지는 북아메리카 ·중국 동북부 ·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등이다.”로 나오는데, 이는 아시아(Asia)에서는 중국 동북부에 주로 몰려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중국 동부라는 것은 바로 산동반도의 평도시(平度市)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바로 마한(馬韓)가운데 있었던 백제(伯濟)의 땅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왜냐?
백제(伯濟)의 위치를 암시하는 사료(史料)로써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정성일 선생’께서 번역한 <백제왕기 시조
온조왕(p2-p9)> 후문(後文)에 등장하는 것 뿐입니다.
(혹 다른 사료(史料)가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 백제(伯濟)는 마한(馬韓)의 동북(東北)
이 후문(後文)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원문(原文)이 나옵니다.
按馬韓五十四國有伯濟國. 馬韓王責百濟王曰 “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百里之地安之” 云. 百濟之起於馬韓東北明矣,
살펴보건데, 마한(馬韓)54개국이 있을 때에는 ‘백제(伯濟)’라는 나라가 있었다. 마한왕(馬韓王)이 맥제왕(百濟王)을
책망하여 말하는 말에 “왕(王)이 처음 강(江)을 건너 왔을 때 발 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 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중략)” 운운(云云)함이 있다.
(이를 살피건데) 맥제(百濟)는 마한(馬韓)의 동북(東北)에서 일어남이 분명하다.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마한(馬韓)의 입장에서 백제(伯濟)의 위치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맥제왕(百濟王)에게 마한(馬韓)의 동북(東北) 쪽에 있는 백제(伯濟) 땅 100여리를 주었다는 것이 들어납니다.
그런데, 이 백제(伯濟)의 땅이 있는 곳이 ‘王初渡河’ 즉 “왕이 처음 강(江)을 건너서 왔을 때”로써 일단 강(江)을
건너야하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규모 활석광산(滑石鑛山)이 있는 산동반도 평도시(平度市)는 교래하(膠萊河)를 도하(渡河)해야만 하는
위치입니다.
그렇다면, 이 평도시(平度市)가 “과연 마한(馬韓)의 동북(東北)쪽이 되는가?” 정확히 동북쪽이 됩니다.
2) 마한(馬韓)의 또 다른 중심지는 삼성퇴(三星堆)
왜냐하면,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위지(魏志) 마한(馬韓) 조(條)가 그 대표적이겠지만,
마한(馬韓)은 오늘날 양자강 하류(下流)의 길목인 숭명도(崇明島)에 목지국(目支國)에 도읍을 두면서 그 위에는
진한(辰韓), 그 밑의 철(鐵)의 생산으로 유명한 선하령(仙霞岺) 산맥 주변에는 변한(弁韓)을 마치 두 개의 계란자
노란 자위처럼 두고, 위 주변을 광범위하게 해운업(海運業)으로 왕래하였기 때문에, 아시아(Asia)전역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서쪽인 오늘날 사천성(四川省)에도 “마한(馬韓)이 있었다.”는 것으로
마한(馬韓)의 중심위치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사천성(四川省)에서 보면, 산동반도(山東半島)는 정확히 동북(東北)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더 구체적으로 사천성(四川省) 가운데서도 “어디를 기준으로 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천성 성도(成都) 평원에 있는 삼성퇴(三星堆)의 유적이 바로 마한(馬韓)의 유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B.C. 1000년 전에 형성된 괴기(怪奇)스런 청동(靑銅)의 유물들이 대거(大擧) 쏟아진 이 삼성퇴(三星堆)의 원(原)
주인공이 누구인가?”는 것에 사학자(史學者)와 고고학자들은 적절한 가설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한(馬韓)이 집중적으로 관리하던 세 지역 중에 하나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전설적인 해운국(海運國)으로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면서... 이는 누차 언급한 것처럼 갑판 위에 ‘채소’를 키울수
있는 흙집 돔(dome)을 만들어 ‘싱싱한 야채(野菜)’를 먹으면서 항해(航海)한 마한, 그리고 오늘날의 제주도(濟州道)
인 주호(州胡)를 오히려 마한(馬韓)의 바다의 서쪽이라 칭하면서, ‘물에 뜨는 부석(浮石)으로 인공 섬(島)을 만들어
항해한 것으로 나오는 마한(馬韓)의 유적으로 밖에는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마한(馬韓)이 집중관리한 것은 사천성(四川省)의 삼성퇴(三星堆) 지역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모든
양자강의 물류(物流)를 통제할 수 있는 하구(河口)에 있는 섬인 오늘날 숭명도(崇明島)인 목지국(目支國)이 또 그
하나로 볼수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백제(伯濟)이고, 이는 오늘날 평도시(平度市)로 비정해 볼수 있다고 봅니다.
(삼성퇴(三星堆) 유적과 마한(馬韓)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언젠가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계속생각을 가다듬는 문제중에 하나입니다.)
아무튼, 중국사람들의 인식구조에서는 - 이들이 바다로 나간 경험이 없기 때문에 - “마한(馬韓)은 삼한(三韓) 가운데
서쪽에 있었고, 그 중심점은 오늘날 사천성(四川省)의 삼성퇴(三星堆)로 잡고 있음”이 여러 사서(史書)를 통해 드러
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마한(馬韓) 50여개국 가운데 ‘서(西)쪽의 마한(馬韓)의 중심점인 삼성퇴(三星堆)’에서 동북 쪽
이면 백제(伯濟)가 자리잡은 지역을 오늘날 산동성(山東省)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평도시(平度市)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글 다음에 언급하는 “백제는 래이(萊夷)이다.”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곧 언급하게 됩니다. )
그러나 일단 언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삼성퇴(三星堆)의 유물(遺物)에서 나온 무수한 청동기(靑銅器)들과 관련됩
니다.
청동기(靑銅器)를 만드려면, 그 용범(鎔范)인 활석광산(滑石鑛山)을 확보하여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산동성(山東省)의 평도시(平度市)에 있는 것이지요.
나. 활석광산(滑石鑛山)인 턴-키(turn-key)방식으로 제작된 갑문(閘門)
(1) 비밀유지를 위해서 평도(平度)에서 턴-키(turn-key)방식으로 갑문(閘門)을 제작
백제(伯濟)가 오늘날 산동성 평도시(平度市)에서 활석광산(滑石鑛山)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이 활석(滑石)을 주로
수출(輸出)하고, 또 고조선(古朝鮮)과 부여(夫餘)의 기술을 받아들여서 ‘갑문(閘門)의 제조’를 턴-키(tern-key)방식
으로 제조했다는 것은 고대사의 비밀을 풀어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端緖)를 제공합니다.
(참고: 턴-키(tern-Key)방식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공정(工程)을 일괄처리하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사람은
단지 키(key)만 돌리면 되는 것을 뜻함.)
그런데, 이 산동반도(山東半島)에 마치 ‘개머리’ 처럼 되어있는 곳은 그 ‘개머리’의 정수리에 지금도 봉래(蓬萊)라는
도시가 있듯이, 선경(仙境)으로 치는 곳입니다.
따라서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칠중하(七重河) 지역을 개발하기 전(前)에는 제수하류(濟水下流)가 있는 곳은
조석수(潮汐水)의 밀물과 썰물이 넘나들어서 소금기의 영향으로 불모지대(不毛地帶)였지만, 그 동쪽은 삭막한 불모
지대를 지나서 갑자기 선경(仙境)이 나타나는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우공(禹貢)의 래이작목(萊夷作牧)은 백제(伯濟)가 산동성(山東省) 가운데서도 평도(平度) 지역으로 좁혀주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곳이 봉래(蓬萊)이니깐, 자연적으로 오늘날 평도시(平度市) 부근에 있는 백제(伯濟)사람들을 래이(萊夷)
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양(梁)나라의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는
“백제는 옛 래이(萊夷). 마한(馬韓)의 종족이었다.”라는 기록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래이(萊夷)가 유목(遊牧)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초기의 힌트(hint)와 자료는 ‘자유게시판’에 신완순 선생님께서 올리신 글 “백가가 정말로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가 되었을까?”가 많은 참조가 되었습니다. 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즉 래이작목(萊夷作牧) - “래이(萊夷)는 목축업을 했다.”는 기록이 상서(尙書) 우공(禹貢)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오늘날 감숙성과 청해성에 있었던 부여(夫餘)사람들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소륵하(疏勒河)와 대통하(大通河)에 갑문(閘門)을 설치해서 유사통제(流沙統制)를 하였는데, 이들의 생업(生業)이
바로 목축(牧畜)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도시(平度市)에 있었던 백제(伯濟) 사람들은 아주 일찍부터 - 이말은 우공(禹貢)이라는 글이 만들
어질 때부터 부여(夫餘)사람과 교류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즉 부여(夫餘)사람들은 이 백제(伯濟) 땅 - 즉 오늘날 산동성 평도시(平度市)에 와서 갑문(閘門)만드는 기술과
동시에 목축업(牧畜業)을 전수해 주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무거운 갑문(閘門)을 운반하려면, 역시 우마(牛馬)의 힘을 빌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백제(伯濟)가 마한(馬韓)의 삼성퇴(三星堆) 중심점에서 동북(東北)에 있었다”, 또한 “백제(百濟)가
래이(萊夷)이다.” 그리고 “래이(萊夷)가 목축(牧畜)을 했다.”는 3개의 명제(命題)는 삼단논법(三段論法)으로 보면,
결국 백제(伯濟)의 위치가 산동성 평도(平度)임을 나타냅니다.
왜냐?
(3) 농업(農業)을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축(牧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산동성(山東省)주변에서 목축(牧畜)을 할 곳은 의외로 마땅한 지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청주(靑州) 즉 미추홀(彌鄒忽)을 중심으로 한 칠중하(七重河)가 조석수(潮汐水)가 자연 제방
(堤防)을 넘어온 ‘소금끼’ 때문에 불모지대(不毛地帶)로 있었기 때문에, 목축(牧畜)은 커녕, 농업(農業)도 할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해안가는 대부분 어업(漁業)을 하였겠지요. 그리고 수리시설(水利施設)과 관계가 잘된 지역에서는 농업(農業)을
하는 곳이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목축(牧畜)을 하는것 보다 높습니다.
그런데 농업(農業)이 가능하면, 목축(牧畜)도 가능한데, 굳이 사람들이 농업(農業)을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높기 때문인 것이지요.
따라서 목축(牧畜)을 하는 곳은 일반적으로 농업(農業)을 하기에는 어려운 땅이지만, 그래도 짐승을 키울수 있는
초목(草木)과 물이 있는 경우입니다.
문제는 <농업(農業)을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목축(牧畜)을 하는 경우>가 매우 희귀하긴 하지만,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농업을 하게 되면, 사람의 손이 많이 필요로 하고, 또 많이 꾀게 되는데, “작업의 성격이 사람의 접근이 안된
상태에서 해야하는 작업이고, 또 그 작업의 결과가 ‘농업의 생산성을 대체할 수 있는 획기적인 부(富)의 원천(源泉)
일 때에는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목축(牧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가 바로 “래이(萊夷)가 목축을 하였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즉 활석광산(滑石鑛山)을 바탕으로 갑문(閘門)제조를 비밀리에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꾀기 쉬운 농업(農業)
보다는 목축(牧畜)을 하여, ‘비밀유지’를 하는 동시에 축력(畜力)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산동성 평도(平度) 부근에는 농업을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내지 기천년 동안 목축
(牧畜)을 해왔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한백제(馬韓伯濟)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산동성에 활석광산(滑石鑛山)이 있는 평도시(平度市)가 되는
것입니다.
(4) 맥제(百濟)와 백제(伯濟)를 동일시 하는 현상
그리고 “산동성 평도(平度)이곳에 백제(伯濟)가 있었다.”는 것은 “왜 <百濟>를 ‘맥제’로 읽어야함에도 ‘백제’라고도
읽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는가?!”를 해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맥제(百濟)를 개척할 때, 수많은 갑문(閘門)을 칠중하(七重河)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면 백제(伯濟)에서 갑문(閘門)을 만들어야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맥제(百濟)와 백제(伯濟)를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다. 우이(嵎夷)와 개로왕(蓋鹵王)의 증토축성(蒸土築城), 사라진 갑문(閘門)의 비밀(秘密)
아무튼 갑문(閘門)을 설치하려면, 갑문(閘門)이 설치되는 곳 까지 제방(堤防)을 쌓아야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제방(堤防)을 어찌 쌓았는가?” 하고 관련해서 우리가 유념(留念)해야할 기록이 바로 삼국사기 백제
본기 개로왕(蓋鹵王) 21년 조(條)에 등장하는 “흙을 쪄서 성(城)을 쌓았다”는 증토축성(蒸土築城)의 이야기입니다.
1) 증토축성(蒸土築城)의 수수께끼 - 찰흙(=점토(粘土))와 벽돌
“흙을 쪘다.”는 것 즉 증토(蒸土)라는 것은 ‘떡을 찌듯이’ 그야말로 찐 것을 의미합니다.
즉 ‘증기(蒸氣)를 흙에 쪼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가) 찰흙, 점토(粘土)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는 흙 가운데 찰흙 - 다시 말하면 점토(粘土: clay)의 특성을 이해할 때, “왜 흙을 찌는지?” 이해가 갑니다.
(1) 찰흙이란?
찰흙 즉 점토(粘土)라는 것은 도자기(陶磁器)의 원료(原料)가 되는 흙들이 거의 가루 다시 말하면 0.1미리미터까지
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점토(粘土)는 그 말 자체에 ‘찐덕 찐덕’한 찰기 즉 점성(粘性)을 지니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석영(石英)ㆍ
장석(長石) 같은 암석(巖石)이 풍화(風化)하여 직경 0.01mm 이하(以下)로 분해(分解)된 흙으로, 물에 이기면 점성을
가진 것이지요. 철분(鐵分)의 다소에 따라 회색(灰色)ㆍ갈색(褐色) 등(等)의 빛깔이 생기며 수분(水分)을 잘 흡수
(吸收)하고 마르면 균열(龜裂)되는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찰흙이 완전히 마르면, 자연히 균열(龜裂)되고, 균열되어서, 다시 ‘가루’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수분(水粉)을 머금어서 차진 것은 도토(陶土)라 하여 벽돌ㆍ기와ㆍ시멘트ㆍ도자기(陶瓷器) 등(等)의 원료
(原料)가 되는 것을 찰흙, 즉 점토(粘土)라고 합니다.
(2) 찰흙은 소성(塑性)을 지니며, 수분(水分) 보유력이 강하며 점성(粘性)을 지닌다.
그런데 찰흙 즉 점토(粘土)는 사전적(辭典的) 정의에 의하면, “제한된 양의 물과 섞여졌을 때 가소성(可塑性)을
갖는것” 으로 정의(Grim 1953)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소성(可塑性)이란 말의 소(塑)란 말 자체가 따지고 보면 ‘흙’이란 말입니다.
진흙으로 만든 인형(人形)을 니소(泥塑)라고 말하고, 또 조각(彫刻)하기 위해 그 원형(原形)을 만드는 것을 조소
(彫塑)라고 하는 것은 ‘흙으로 형태’를 만드는 오랜 관행이 언어에 남아있는것입니다.
그런데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란 것은 탄성(彈性)과 반대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고체는 외부의 충격이
들어올 때, 그 원형(原型)을 유지하기 위해서 버티는 힘이 있기 때문에 탄성을 지닙니다.
그런데 진흙은 안그렇지요. 힘을 받으면 즉각 모양이 변(變)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흙과 같이 힘을 주면 주는대로 모양이 바뀌어 버리는 성질이 바로 가소성(可塑性)인데, 이 가소성(可塑性)의
특징이 바로 얼마간의 물(水) 즉 수분이 함유되었을 때에는 ‘풀’과 같이 ‘찐덕 찐덕’ 달라붙는 성질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흙, 점토(粘土)는 수분(水分)의 보유력(保有力)이 강해서 ‘잘마르지 않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 개로왕은 왜 증토(蒸土)했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개로왕(蓋鹵王)은 왜 증토(蒸土)했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는 해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하남 형양시(滎陽市)에 갑문(閘門)이 있는 운하(運河)를 만들 때, 제방(堤防)을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1)* 주변에 균열(龜裂)직전에 마른 점토(粘土)를 쌓여져있는 벽돌
벽돌을 구워서 - 이는 절대로 ‘찐다’는 표현이 아니고 ‘굽는것’임을 유의 - 그 주변에 점토를 둥글게 붙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균열(龜裂) 직전(直前)까지 말리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증기(蒸氣)를 쏘이면’ 점성(粘性)즉 ‘찐덕 찐덕’해지는 준비가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마른 점토(粘土)에 쌓여져 있는 벽돌>을 증기(蒸氣)에 쏘이는 공정(工程)을 바로 증토(蒸土)라고 했던 것입
니다.
한자(漢字)로 벽돌을 전(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벽돌을 품고있는 점토(粘土)>를 줄여서 말하자면 함전점토괴
(含塼粘土塊) 즉 ‘벽돌을 품고있는 점토(粘土) 덩어리’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로왕(蓋鹵王)이 ‘흙을 졌다’ 즉 증토(蒸土)한 것은 이런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궁이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이 ‘흙을 쪘다.’는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로왕(蓋鹵王)이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를 미리 많이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시에 찌는 것>이
실전(失傳)된 고조선(古朝鮮)의 제방기술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대나무 올실로 역어진 죽사(竹絲)-포대(布袋)
그런데 오늘날의 각종 건설 장비를 총동원하여서도 제방을 쌓는 기술은 매우 힘든 기술입니다.
“이런 장비가 없는 고대에 어찌 제방을 쌓았겠는가?”를 규명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죽사(竹絲)-포대(布袋)
입니다. 대나무를 잘게 올실을 내서 쪼개고, 이를 서로 꼬아서 실을 만들면, 그 강도는 거의 강철(鋼鐵)강도가
나옵니다.
이런 대나무 올실로 된 실과 로프(rope)를 죽사(竹絲)라고 하는데, 이 죽사(竹絲)의 특징은 물 속에 들어갔을 때,
더 찔기고 강해지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사(竹絲)로써 거대한 ‘그물 포대(布袋: ’자루‘를 뜻함)’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찐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를 잔뜩 집어넣어서, 선박(船舶)으로 끌고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죽사포대(竹絲布袋)는 오늘날 ‘달걀 꾸러미’처럼 길게 되어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방(堤防)을 쌓을 때에는 이런 ‘찐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를 잔뜩 집어넣은 대형 죽사포대(竹絲布袋)를
선박(船舶)에 매달고 바다나 강(江) 바닥에 차곡차곡 쌓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벽돌 주변에 있는 찐 점토(粘土)들이 물기를 빨아들여서 더욱 점성(粘性)을 발휘하게 됩니다.
가운데 있는 벽돌은 모양을 유지해주고, 주변의 점토는 쌓는 무게에 의해서 저절로 벽돌 사이사이 빈틈에 마치 ‘풀’이
틈새로 들어가 메꾸어주는 것처럼 메꾸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달걀꾸러미’같은 죽사포대(竹絲布袋)를 쌓으면 결과적으로 수중(水中)의 제방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또 그 위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쌓고, 위에서 물을 뿌려주면, 이 제방은 딴딴해지겠지요.
이런 전통적인 공법(工法)이 있었음을 개로왕(蓋鹵王)의 ‘증토축성(蒸土築城)’은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3)* 벽돌 제조 공정과 증토(蒸土)와의 상관성
그런데 벽돌을 만드는 방법은 이런 점토(粘土)를 ‘어떤 모형의 벽돌’을 만들것인가? 하는 성형(成形)단계를 거칩니다.
이때 벽돌모양을 갇춘 점토(粘土)의 수분은 15~15%가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양이 갇추어지면 이를 잘 적재(積載)해서 이를 통째로 옮겨 건조(乾燥)하기 위해 건조(乾燥)
격납고(格納庫) 즉 싸이로(silo)로 들어갑니다. 이때에 온도는 200~300도면 충분한 것이지요.
한참두면 벽돌 모양의 ‘진흙’은 그 수분이 1%까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인 것이지요.
즉 벽돌을 만들기 전(前)에 있어야만 하는 성형(成形)단계 다음에는 반드시 건조(乾燥) 단계를 거치는데, 이때 ‘이미
만들어진 벽돌에다가 진흙덩이를 붙인’ 이른바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역시 이 건조(乾燥)-싸이로(silo)로 들어가서
수분함유량이 1%가 될 때까지 미리 바싹 말려두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바싹마른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를 끄집어내서 증기(蒸氣)로 찌는 것이지요.
바로 이 단계의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조에 증토축성(蒸土築城)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지요.
아무튼, 다시 벽돌 만드는 공정(工程)으로 되돌아 가서 말하자면, 이처럼 벽돌을 굽기 전에 ‘바싹 말리는’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물기가 있는 상태에서 굽게되면 수분(水分)이 팽창하면서 결국 벽돌이 깨지기 때문에 꼭 거쳐야할 단계인
것이지요.
그다음에는 굽는 단계 즉 소성(燒成)단계로 들어가는데, 이때의 온도는 청동(靑桐)을 녹이는 온도인 900도와 철(鐵)
을 녹이는 1540도 중간쯤인 1100~1300도 가열하면 벽돌이 됩니다.
아무튼 벽돌을 만드는 열(熱)을 낼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철(鐵)을 녹이는 기술도 있는 것입니다.
갑문(閘門)을 설치하려면, 벽돌을 굽는 기술이 있어야합니다. 따라서 철(鐵)을 녹이는 기술은 이미있음에도 불구
하고, “왜 굳이 갑문(閘門)을 청동(靑桐)으로 만드는가?”는 이유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갑문(閘門)은 물(水) 속에
있는 장치인데, 철(鐵)은 물에 닿으면 급격히 산화(酸化)되기 때문인 것이지요.
개로왕(蓋鹵王)께서 증토축성(蒸土築城)했다는 것은 제방(堤防)을 만들때, 그 주(主)된 재료(材料)인 ‘벽돌을
만드는 공정(工程)’ 자체에 이미 ‘말리는 건조(乾燥) 단계’가 반드시 있게 되는데, 여기에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를
만들어서 함께 건조시키고, 필요시에 ‘찌기만 하는’ 공정이 첨가(添加)된 것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개로왕(蓋鹵王) 때, 대규모 제방을 만들기 위해서 벽돌을 이미 구워놓았고, 또 이를 진흙으로 싸서 함전
점토괴(含塼粘土塊)를 바싹 말린 상태에서 단지 증기(蒸氣)로 쪄주는 공정만 가동시켰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2) 우이(嵎夷)의 비밀 - 제방(堤防)의 흔적이 없고, 또 순식간에 사라지는 갑문(閘門)
그런데 상서(尙書) 우공(禹貢)을 보면, 래이(萊夷)와 더불어 우이(嵎夷)가 나옵니다.
이 우이(嵎夷)의 우(嵎)는 ‘산(山)의 굽이’를 뜻합니다. 산(山)은 맥(脈)을 이어 계속 이어지는데 그 하나 하나를 ‘굽이’
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방(堤防)은 물이 굽이 굽이 휘어져 나갈 때 역시 굽이 굽이 휘어져 나갈 수밖에 없고, 이를 쌓는 ‘전문기술’
을 가진 족속(族屬)을 우이(嵎夷)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고조선(古朝鮮) 사람들 가운데 ‘제방(堤防)을 쌓는 사람’을 우이(嵎夷)라고 칭했다.”는 가설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한단고기(桓檀古記)등에 의해서 “저 중국대륙에 우(禹)임금때 대홍수가 났을 때, 단군왕검의 아드님이신
부루(扶婁)태자께서 이를 도와서 대홍수의 피해를 빨리 가라않게 했다.”는 이야기는 많은데, “도대체 어떤 기술로
어떤 부류(部類)의 사람들이 했는가?!”가 오리무중(五里霧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이(嵎夷)들이 제방(堤防)을 쌓는 방법이 바로 개로왕(蓋鹵王)이 증토축성(蒸土築城)하는 방법과 같이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를 찌고’ 이를 죽사포대(竹絲布袋)에 넣어서 차곡차곡 쌓아서 제방을 만들었다.”고 하면,
좀더 현실적인 주장이 되는 동시에, 관련된 사료(史料)까지도 많이 발견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우이(嵎夷)들의 제방(堤防)쌓는 방법은 워낙 독특해서 “나중에 조사(照査)해보면, 제방(堤防)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왜냐?
결국 죽사(竹絲)로 된 포대는 제방 속에서 썩어서 소멸되고, 벽돌과 진흙이 뒤섞인 이 제방은 후에 설혹 다시 파본
다고 하더래도, 그냥 ‘흙’으로 밖에는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하면, 이것이 깜쪽같이 사라지는 갑문(閘門)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이(嵎夷)들이 쌓는 방식으로 만약 제방을 쌓는다고 할 때, 그들은 아마도 갑문(閘門)과 제방(堤防)이 이어지는
곳에는 벽돌로 된 격벽(隔璧)시설을 많이 만들고, 그 안에 폭약(爆藥)을 설치할수 있는 방(房)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인공호수(人工湖水)의 물을 다 빼고, 갑문(閘門)은 일반인들의 눈(眼)에는 안보이게 하게 할 필요
가 있다.”라는 판단이 서면, 그들은 갑문(閘門)과 제방이 이어진 부분 즉 벽돌로된 수많은 격벽(隔璧)안에 폭약을
설치하고, 폭파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대한 제방(堤防)에 갇혀 있던 물(水)은 쏟아지겠지요.
그리고 갑문(閘門)은 로프(rope)를 걸어서 강하게 흘러나는 물의 힘을 적절히 활용해서 인근 강변(江邊)으로 끌어
올리고, 이윽고 조립형(組立形)으로 되어 있는 갑문(閘門)을 분해, 어디론가 가버리겠지요.
(좌계는 형산강(兄山江)에 있었던 갑문(閘門), 또 고래의 암각화가 많은 울산 반구대 등을 현장탐사하면서,
갑문(閘門)이 있었다면 그 주변에는 반드시 제방의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는 차원에서 몇 번이나 현지탐색을 하였
지만, 제방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생각하는 제방은 오늘날의 공법(工法)을 가정하고, 그 흔적을 찾은 것에 불과하다.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다는 가정에 따른 환상(幻想)을 품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고, 그리고 고대의 제방(堤防)
기술을 오늘날의 제방기술에서 독립해서 여러 문헌조사를 하게 되었고, 결국 지금까지 논(論)한 방법이었을 것이
다는 가설(假說)을 품게 된 것입니다.)
3) 상서(尙書) 우공(禹貢)의 청주(靑州)조(條) 해석
우공(禹貢)을 읽어보면,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록을 보면, 산동성 래주만(萊州灣)에 제수하류(濟水下流)가 꿰뚫어 그것이 조석수(潮汐水)를 ‘깔대기
구조’로써 대번에 저 대야택(大野澤)까지 웅진강(熊津江)-에스칼레이터(escalator)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이야기임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서(尙書) 우공(禹貢)의 청주(靑州)조(條) 관련으로 우리는 마한백제(馬韓伯濟)의 위치가 바로 산동성
평도시(平度市)임을 확실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 “래이(萊夷)들이 목축(牧畜)을 했다.”는 것이 바로 이 우공(禹貢) 청주(靑州) 조(條)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신기하게도 상서(尙書) 우공(禹貢) 청주(靑州) 조(條)에는 칠중하(七重河)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동쪽의
교래하(膠萊河)를 타고 올라가서 평도시(平度市) 근처의 마한백제(馬韓伯濟)와 관련한 래이작목(萊夷作牧)의 이야
기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원문(原文)에 번호를 붙어서 하나씩 뜯어서 음미해 보기로 합시다.
1)海、岱惟青州:嵎夷既略,濰、淄其道。
2)厥土白墳;海濱廣斥。
3) 厥田惟上下,厥賦中上。
4)厥貢鹽、絺,海物惟錯,
5) 岱畎絲、枲、鉛、松、怪石。
6) 萊夷作牧。厥篚檿絲。
7) 浮于汶,達于濟。
1)海、岱惟青州:嵎夷既略,濰、淄其道。
“바다와 태산(泰山=대(岱))사이에 있는 청주(靑州)라. 우이(嵎夷)-‘제방(堤防)과 갑문(閘門)을 놓음에 전문가인
고조선 사람들’이 이미 이곳을 경략(經略)했는데, 유수(濰水)와 치수(淄水: 미하(彌河)를 뜻함)가 바로 그 이끌음
(=도(導))이다.
- 각설(却說)
이 문장은 무척 중요합니다.
(가) 해대유청주(海岱惟靑州)의 해석
해대유청주(海岱惟靑州)에서 유(惟)는 ‘생각하다.’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사이(=간(間)에 있는’ 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저명(著名)한 한학자(漢學者) 이가원(李家源) 선생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요.
해석문(解釋文)의 끝에 “~라”로 되는 것은 이 우공(禹貢)이란 책이 결국은 우(禹)임금이 대홍수를 “어찌 물길을
바로잡는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해서, 구주(九州)를 바로잡았는가?!”하는 것을 쓴 글이기 때문에, 구주(九州)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서술되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이럴때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는’ 이란 뜻으로 유(惟)가 들어가야만 ‘위치비정’이 쉬운 것이지요.
따라서 “우(禹)임금께서 바다와-이는 동해(東海)를 뜻함- 태산(泰山) 사이에 있는 청주(靑州) 부근을 어찌 치산
치수(治山治水)했는가를 말해보겠다.”라는 말로 유(惟)를 쓰고, 따라서 그 끝은 “~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대유청주(海岱惟靑州)는 이미 누차 말씀드린바와 같이 청주(靑州)를 미추홀(彌鄒忽), 혹은 미초홀
(彌肖忽)로 좌계는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좀 의역(意譯)하자면, 이 해대유청주(海岱惟靑州)라는 문장은 “동해(東海)와 태산(泰山) 사이에 있는
미추홀(彌鄒忽)이라...”로 되는 것이지요.
우(禹)임금 때의 대홍수 때 “고조선 초기의 부루태자께서 도왔다.”는 내용이 많은데, 아무튼미추홀 부근은 기록
(記錄)상에 ‘고조선의 도움을 받은 우(禹)임금의 개척’이 있었고, 그 다음에 비류선제(沸流仙帝)의 개척이 있었던
것이지요.
(나) 우이기략(嵎夷旣略)의 해석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이(嵎夷)는 최소한 ‘제방(堤防)을 놓는 고조선 사람’이고 더 나아가서는 ‘갑문(閘門)을
설치하는 고조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청주(靑州) 즉 미추홀(彌鄒忽)을 이미 경략(經略) 가꾸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들이 ‘갑문(閘門)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정도’로 경략(經略)했을 개연성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조선(古朝鮮)의 서쪽 경계는 추수(溴水)이고, 이 추수(溴水)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 웅진강(熊津江)-
에스칼레이터(escalator)에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설치하면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런 인공(人工)의 시설이 아닌, 조석수(潮汐水)에 의해서 형성된 자연 제방을 더욱더 우이(嵎夷)
들이 튼튼히 보강(補强)했음은 분명한 것이지요.
(다) 유치기도(濰淄其道)의 해석
유치기도(濰淄其道)에서 유(濰)는 바로 위에서 칠중하(七重河)에서 위에서부터 ‘여섯번 째의 강(江)’인 유수(維水)를
뜻합니다.
그리고 치수(淄水)는 바로 노천탄광(露天炭鑛)인 탄현(炭峴)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치수(淄水)가 흘러나가서 바로 미하(彌河)가 되는 것이지요.
칠중하(七重河)가운데, 위에서부터 ‘세번째의 강(江)’인 것이지요.
유치기도(濰淄其道)란 말에서 도(道)는 도(導) 즉 “이끌다.”의 뜻입니다.
이는 우이(嵎夷)들이 ‘이미 칠중하(七重河)를 경략(經略)하였다.’라는 앞에 나온 우이기략(嵎夷旣略)의 내용을 대명
사인 기(其)로 받아서 도(導)한 것이니깐, 결국 우이(嵎夷)들이 이 칠중하(七重河)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치기도(濰淄其道)에서 치수(淄水)가 있는 곳에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노천탄광(露天炭鑛)으로 유명한
탄현(炭峴)이 있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제방을 쌓기 위해서는 우이(嵎夷) - 즉 고조선의 제방을 쌓는 전문 족속의 입장에서는 벽돌을 굳고,
또 함전점토괴(含塼粘土塊)를 건조(乾燥)시키기 위해서도 역시 석탄이 필요로 하고, 이를 찌기 위해서도 역시
석탄이 필요로 한 것이 때문에, 이 기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厥土白墳;海濱廣斥
“ 그 땅은 흰 제방으로 으로 되어있고, 바다의 물가가 광역(廣域)에 걸쳐서 갯벌 형태로 되어있다.”
-각설(却說)
여기서 백분(百墳)이란 말에서 분(墳)은 ‘무덤, 언덕, 제방’을 뜻합니다. 백분(百墳)은 조석수(潮汐水)의 밀물과 썰물
이 형성한 칠중하(七重河)의 자연 제방이 소금기가 서려서 흰 색깔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고, 척(斥)에는 원래 ‘갯벌’
이란 뜻이 있습니다.
3) 厥田惟上下,厥賦中上
“그 밭은 (9등급의 사이에)상급(上級)가운데 하급(下級)이며, 세금부과는 중급(中級)의 상(上)으로 부과하였다.”
-각설(却說)
이 우공(禹貢)에 나오는 전답(田畓)의 분류방법은 상중하(上中下)를 세등분하고, 이를 다시 상중하(上中下)로 구분
하는 방법 - 다시 말하면, 9등급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9등급(等級)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厥田惟上下>에서 유(惟)의 뜻 “사이에 있다.”는 말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상하(上下)이면 따라서 9등급 가운데 3번째되는 상당히 높은 등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답(田畓)이 9등급 가운데 3번째 정도이면 옥토(沃土)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禹)임금 때의 ‘대홍수(大洪水) 때’ 제수(濟水)가 칠중하(七重河)를 관통하고 있었는가?”와 관련해서
매우 복잡한 문제을 일으킵니다.
만약에 연결되어 있었다면, 자연히 소금기가 칠중하(七重河) 주변의 자연(自然) 제방을 넘어서 칠중하(七重河)
지역이 ‘소금기’로 불모지대(不毛地帶)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금기’를 빼는 방법으로써 이미 살펴본바와 갈이 비류선제(沸流仙帝)가 칠중하(七重河) 유역을
옥토(沃土)로 바뀌게 하려는 계획 즉 오늘날 평도시(平度市)근처와 유방시(濰坊市) 근처에 대수고(大水庫)를
만들고, 이런 ‘단물’로써 계속 칠중하 지역에 부어넣어 소금기를 빼는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반대로 제수(濟水)가 칠중하(七重河)가운데 첫 번째 강(江)으로만 흘렀고, 나머지 강(江)들이 별도로 흘렀다면,
고조선 사람들은 이를 제방(堤防)을 쌓은 상태에서 제수(濟水) 하류(河流)를 연결시키면 ‘소금기’에 전혀 물들지
않은 칠중하(七重河) 지역이 되기 때문에 전답(田畓)은 대번에 3등급이 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역시 갑문(閘門)이 필요로 한 것임을 유의해야합니다.
조석수(潮汐水)의 물이 웅진강(熊津江)으로 하루에 두 번씩 역류(逆流)하게 되는 것과 그냥 순류(順流)하기만 하는
경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순류(順流)와 역류(逆流)가 합쳐지게 되면, 이는 비유하자면 ‘톱질’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웅진강(熊津江)이 ‘
깊게 파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순류(順流)만 했을 경우에는 ‘덜 깊게 파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문제는 이 우공(禹貢)이란 기록이 중국대륙에 대홍수(大洪水)가 났을 때, “이를 어찌 치산치수(治山治水)했기
때문에, 안정화가 되었는가?”를 살피는 글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대홍수(大洪水)의 물을 뺄려면, 자연히 강(江)의 하상(河床)을 깊게 파서 물을 빨리 흐르도록 해야합니다.
그런데, 설혹 고조선의 우이(嵎夷)들이 “아 이렇게 칠중하(七重河)를 ‘깔대기 구조’로써 만들면 래주만(萊州灣)의
조석수(潮汐水)가 밀려들어가서 대야택(大野澤)까지 흘러가겠다.”라는 계산(計算)을 했다고 치더래도, 갖 만들어진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 구조’로서는 웅진강(熊津江)의 하상(河床)이 낮아서 그 힘이 약한 것이지요.
이 힘을 강화(强化)시키자면, 아무래도 저 유수(濰水)와 교래하(膠萊河), 고하(沽河)에 댐(dam)을 만들고 동시에
여기에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만들고, 또 칠중하(七重河) 낱날에도 역시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을 만들어서 힘차게 시동(始動)을 계속 걸어주어야만 ‘웅진강의 톱질’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또 “웅진강(熊津江)의 하상(河床)을 ‘조석수(潮汐水)의 톱질’로써 깊게 파주는 방법 이외에, 대홍수(大洪水)를 과연
다룰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칠중하(七重河)에 원래부터 제수하류(濟水下流)가 일통(一通)하고 있었든지, 말었든지 간에 상관
없이 고조선의 우이(嵎夷)들이 우(禹)임금의 대홍수 때,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설치하였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대홍수(大洪水)를 해결하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부루(扶婁)태자의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여 우(禹)임금 때의 대홍수(大洪水)를 치수(治水)했다는 것이 신화(神話)가 아니라면, 고조선(古朝鮮)의
우이(嵎夷)들이 제방(堤防)뿐만 아니라,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놓아서 치수(治水)하였다는 것도
결코 신화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거대한 공사를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전답(田畓)에 가하는 세금은 중상(中上)으로 조금 깍아주기도
했다는 군요. (우(禹)임금은 좀 짜군요. 하하)
4)厥貢鹽、絺,海物惟錯,
“현물(現物) 조공(朝貢)으로는 소금(염(鹽), 칡베(치(絺)), 해물(海物)을 그때 마다 번갈아가면서 하도록 하였다.”
5) 岱畎絲、枲、鉛、松、怪石。
“태산(泰山=대(岱)의 밭이랑처럼 나가는 지맥(支脈)에는 명주실(=사(絲)), 모시풀(=시(枲)), 납(=연(鉛)), 괴석(怪石)
들이 난다.
-각설(却說)
<畎>은 “밭이랑 견”인데, 이를 ‘밭이랑처럼 나가는 지맥(支脈)’으로 해석하였습니다.
6) 萊夷作牧。厥篚檿絲
“(평도시(平度市)근처에 있는) 래이(萊夷)들은 목축(牧畜)을 하는데, 이들은 광주리(=비
(篚)로 산뽕나무(=염(檿))에서 명주실(=사(絲))를 걸어낸다.
- 각설(却說)
위 문장에서 래이(萊夷)들이 특이하게도 목축업을 함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이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 구조’로써 웅진강(熊津江)-에스칼레이터(escalator)를 만들자면, 축력
(畜力)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또 극비(極秘)의 기술인지라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아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지역은 칠중하(七重河)에서 더 동쪽으로 와서 오늘날 산동반도에서 ‘개머리’ 형태를 한 모든 지역이 바로
래이(萊夷)들이 있는 곳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태산(泰山) 동쪽은 ‘고조선 사람’과 ‘부여 사람’들의 지역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래이작목(萊夷作牧)이란 글귀 뒤에는 궐비염사(厥篚檿絲)를 한다는 특이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누에는 고치를 뽕나무를 먹고사는데, 평도시(平度市) 근처에는 야생(野生) 뽕나무가 많이
있었고, 여기에 사는 야생(野生)누에들이 고치를 산뽕나무에 친 모양입니다. 그래서 래이(萊夷)들 - 다시 말하면
백제(伯濟)사람들은 이런 ‘산뽕나무와 누에고치’를 한꺼번에 채취해서 거대한 솥(鼎)에 쌂고, 풀어진 명주실
(=사(絲))를 광주리로 그냥 걸러내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산뽕나무와 명주실을 어떤 절차에서 구분해서 광주리로 명주실만 골라내는가?”하는 것은 우공(禹貢)에는
언급이 안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까지 사실은 부여(夫餘)의 기술로 보입니다.
아무튼 ‘누에치기’도 방목(放牧)형으로 부여사람들이 하였으며, 이것이 래이(萊夷) 즉 백제(伯濟) 사람들에게 전(傳)
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7) 浮于汶,達于濟。
“문수(汶水)에서 배(船)를 띄우면, 제수(濟水)에 까지 도달한다.”
- 각설(却說)
문수(汶水)는 서(西)쪽으로 흘러서 오늘날 지리(地理)에서 동평호(東平湖), 고대의 양산박(梁山泊)으로 들어가는
강(江)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특이합니다.
고대의 제수(濟水)가 왕옥산(王玉山)에서 발원해서 황하(黃河)와 엑스(X)로 교차해서 내려가다가 니은(ㄴ)자로
꺽여서 대야택(大野澤)-웅진강(熊津江)-양산박(梁山泊)-대명호(大明湖)-웅진강(熊津江)-칠중하(七重河)-동해
(東海)로 흐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굳이 이런 사실이 우공(禹貢)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수(濟水)가 칠중하(七重河)의 ‘깔대기 구조’로써 역류(逆流)하기 때문에, 이것이 문수(汶水)-(서류(西流))-
양산박(梁山泊) - (동남류(東南流)) - 대야택(大野澤)-(남류(南流))-낙마호(駱馬湖)-(동류(東流)-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동해(東海)로 흐르는 것이 일반사람들에게 더욱 ‘익숙’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문수(汶水)가 서쪽으로 흐르다가 동평호(東平湖)에서 확~껵여서 동북류(東北流)가 되어서 제수(濟水)의
지류(支流)가 됨을 인식해내기는 몹시 힘들었으리라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공(禹貢)이란 상서(尙書)의 기록에 까지 있는 것입니다.
-각설(却說)
아무튼, 위 우공(禹貢)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산동반도의 오늘날 평도시(平度市)의 활석광산(滑石鑛山)에 자리잡은
백제(伯濟)가 아주 일찍부터 저 감숙성과 청해성에 자리잡은 부여사람과 ‘적극적인 교류’가 또한 고조선(古朝鮮)의
우이(嵎夷) 즉 제방(堤防)을 쌓고,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을 만드는 사람들과 적극적인 교류가 있었
다는 것입니다.
우공(禹貢)의 기록은 “우(禹)임금이 중국대륙 전체의 치산치수를 했다.”는 전설(傳說)에 바탕을 두어 아마도
가탁(假託)한 글로 많은 학자들이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기록은 춘추(春秋)시대에 기록된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한백제(馬韓伯濟)사람과 ‘부여’그리고 ‘고조선’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적극적인 교류(交流)를 하였음이
이 상서(尙書) 우공(禹貢) 청주(靑州) 조(條)에서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산동성(山東省) 평도시(平度市)l가 결국 마한백제(馬韓伯濟)이고, 또 이곳이 수압활강식(水壓滑降式)
갑문(閘門)의 제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 “이들은 이곳에서 원래부터 고조선(古朝鮮)과 부여와 밀접한 교류를 지니고 있었다.”라는 것들이 모두 사학
(史學)에서 ‘잃어버린 고리’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잃어버린 고리’들이 신기하게도 ‘또 다른 잃어버린 고리’랑 죄다 연결되는 특성이 있는 것이지요.
이는 결국 아시아(Asia)의 고대사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하는 새로운 지평(地平)이 나타났음을 뜻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말하여....칠중하(七重河)처럼 역사 자체가 ‘깔대기 구조’를 해서 거대한 역류(逆流)를 일으키는 그 발판이 된
것입니다.
(좌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