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리의 용산 땅이름 순례 (7)
후암동과 두텁바위
남산 산비탈에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있어
치마바위, 꾀꼬리바위, 구경바위, 잠두바위, 두텁바위, 궤바위 ...
서울 남산 자락에 있던 바위들이다. 이 중 용산쪽의 바위로는 두텁바위가 유명하다. 두꺼비 모양의 두텁바위. 그래서 그 아래 동네까지 두텁바위였고 한자로는 후암동(厚岩洞)이 되었다. ‘두텁’은 ‘두꺼비’의 옛말.
후암동 일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해방촌이다.
해방촌에는 108계단이 있다. 용산고교 뒤편, 후암동 옛 종점에서 남산 남쪽 산비탈 방향으로 오르는 언덕에 놓인 긴 계단이다. 108이란 숫자는 불교의 108번뇌를 상징한다.
광복 직후 북한에서 월남한 실향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촌락을 이루어 해방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후 도시가 발전하며 이촌향도한 이주민들이 다시 한번 많이 들어와 동네를 형성한다. 이 동네는 행정구역상 명칭이 따로 있지만, '해방'이 들어간 상호들이 많이 보인다.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한 곳이어서 한때는 서울시에서 녹지화 계획도 있었지만,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바 있다.
108계단 옆의 골목길은 해방촌으로 오르는 중심 도로다. 꼬불꼬불하고 비탈이 심해 마을버스조차 힘겹게 다닌다. 좁은 이 길은 본래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었다. 도로를 따라 해방촌 언덕을 거의 다 올라갈 즈음에 남산타워(N서울타워)가 골목 사이로 보인다.
후암동에는 한일합방 전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당시, 지금의 한강로와 삼각지, 남영동, 원효로, 용문동 일대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 후암동쪽에 일본인촌이 가장 먼저 형성됐다. 현 후암동 1번지 일대에는 일본인 거류민단 묘지까지 있었다.
후암동에는 전생서(典牲署)터가 있다. 이 기관은 꽤 역사가 있다.
고려시대의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해 1392년(태조1) 전구서(典廐署)를 설치했고, 1460년(세조6) 전생서로 개칭하였는데 그 관서를 서울의 남대문 밖 남산 남쪽 둔지방(屯智坊) 즉 지금의 후암동에 설치하였다.
후암동에 있었던 옛 마을로는 두텁바위 외에 임당말, 양지말, 번말 등이 있었다. 남산의 냉정골짜기로는 웃냉정약수, 큰우물(어수물), 번말우물, 웃우물, 계묵재약수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후암동에는 노후화된 주거지구와 고급 단독주택, 상가 등이 모여 혼재한다. 독일문화원, 남산도서관, 용산도서관, 삼광초등학교, 후암초등학교가 있고, 만초천 지류가 흐르는 물가, 옛 수도여고 자리에 서울시 교육청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최근에는 후암동 일부를 재개발해 제2의 아스테리움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브라운스톤아파트 근처에 후암시장이 있다. 근처 후암초등학교 근처의 두텁바위로에서 남산도서관이 있는 소월로로 가려면 급경사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으나 엘리베이터를 갖춘 전망대가 생기면서 후암동쪽에서의 이용이 쉬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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