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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허망한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무엇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사순절 기간 주님과 함께 날마다 동행하는 그런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평안하시길 원하십니까’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원하는 것, 가장 누리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대부분의 성도 여러분들은 평안하길 원합니다. 내 삶이 좀 형통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답변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삶에 있어서 평안과 형통함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지난주부터 산불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지금도 당하고 있습니다. 인명 피해도 많고 가옥이 불타고 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천막에서 텐트에서 임시 숙소에 머물며 지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순간에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상상도 못한 일들이 너무나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요? 바로 삶의 안정, 평안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하루속히 산불이 꺼지고 그들의 삶이 안전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자 메슬로는 인간에겐 욕구가 다섯 가지 욕구가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안전의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안전하지 못하면 불안하게 되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안함, 형통함 얼마나 귀하고 소중할까요?
우리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이 평안함 형통함은 정말 가장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조금 전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영혼이 거룩히 깊은 데서, 내 영혼의 그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올려나네. 하늘 곡조가와 언제나 홀러 나와 내 영혼을 고이 사내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어소서. 평화 평화로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내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어서서 할렐루야 평화 평화로다
어디에서 내려온다고요? 어디에서 내려온다고요?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여러분 우리가 내가 평안해야지 내가 형통해야지라고 한다고 해서 내게 평안과 형통함이 찾아오는 것 아닌 줄을 믿습니다.
내 영혼이 평안하면 저절로 여러 맑은 가락이 흘러나오지 않습니까?
반대로 내 마음이 불안하고 이런저런 걱정 근심이 있는데 내 영혼의 평안함은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이 평안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주님 앞에 나오는 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이 조금 부족함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이 좀 연약하면 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 마음에 평안함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근심 걱정 속에 살아갑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루아침에 재앙이 임함으로 해서 그 재앙 속에서 다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가 근심 속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성도의 간절한 바람, 간절한 기도는 평안인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정말 평안하시길 원하시죠?
그 평안함이 꼭 필요한 것이죠. 그 갈급한 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시편 122편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평안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뻐할 때 평안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뭐 할 때 하나님 만나기를 기뻐할 때 우리 1절 말씀 한번 보겠습니다. 1절의 말씀 시작
사랑이 되길 바라기를 주세요. 내가 기뻐하여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어디에 올라갈 때에 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뭐 하였도다 기뻐하였도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그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줄을 믿습니다. 그래서 누가 죽으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삶의 시작도 하나님부터 와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줄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교회에 올 때 여러분들이 교회에 올 때 누구를 가장 만나고 싶었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올 때 누구를 가장 만나고 싶었느냐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을 정말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성도에게 저는 평안함이 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가서 집사님을 만나고 권사님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제일 좋고 제일 기뻐야 될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들이 교회에 왜 왔습니까? 묻는다면 누굴 보러 왔습니다 주의 일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러분 그게 우선이 아니잖아요. 우선은 여러분 저나 여러분 똑같은 마음, 똑같은 중심에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가 온전히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올라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전에 올라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예배드리러 가는 것 아닙니까?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기뻐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학생일 때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커서 이 강단에 설 일이 있다 보니까 예전에 선생님들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되더라고요. 앞에서 보면 여러분 앞에 서 보면 강단에 서 보면 누가 딴 짓하는지 누가 조는지, 누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한눈에 잘 알 수 있습니다.
앉아 있으면 여러분 다른 사람 뒤에 있으면 잘 안 보이는 것 같지, 잘 안 보이는 것 같은 여러분 숨을 때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 더 잘 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얼굴을 이렇게 활짝 피고 이렇게 밝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아마 우리가 예배드리러 나온 모습을 보는 것 보면 대반 알지 않겠습니까?
누가 정말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러 왔는지 아니면 누가 마누라한테 끌려당해서 왔는지 다 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올 때에 정말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사모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우리의 찬송과 기도가 절로 나오는 줄 믿습니다. 기쁨이 절로 나오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평안함을 주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이 평안함의 기준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다고요?
평안함의 기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 우리 5절 6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5절 6절 말씀 시작
거기 심판의 모자를 쓰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모자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아멘 자 거기에 무엇을 두셨다고요?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뭘 구하라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뭐 하는 자는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오늘 이 말씀에 보면 심판의 보좌를 두셨다라고 했는데 이 심판의 보좌를 두신 것과 우리 마음의 평안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과 이 형통함을 주시는 것도 우리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이런 평안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동안에 정말 진짜 평안도 있지만 가짜 평안도 있다는 것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가짜 평안이 뭘까요?
지금은 평안한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보니까 진짜 평안이 아니라 가짜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숙제를 하면 숙제를 내주면 숙제를 잘 해 나가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특히 방학 때 숙제를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다가 개학하는 날 아침에 숙제를 급하게 한다고 그렇게 애쓴 적이 있습니다. 숙제는 귀찮고 나의 놀 수 있는 시간을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며 다녀오면 친구들과 공찰 생각만 하고 숙제를 미룹니다. 숙제를 미룰 때는 정말 좋습니다.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고 또 굉장히 또 자유롭습니다. 평안이 굉장히 찾아오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학교에 갔어야 숙제가 생각이 나면 그만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특히 무서운 선생님 숙제를 안 하면 그야말로 심장이 두근두근 거립니다.
여러분 이처럼 지금 당장은 평안이 온 것 같이 보이는데 이 평안이 사실은 진짜 평안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적당히 편법을 써서 흉통해 보이는데 나중에 그 범법 행위로 인해서 문제가 되고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다가 받는 순간에는 굉장히 기분이 좋고 뭔가 부자가 된 것 같은데 그것이 덜 추어나게 되면 얼마나 비참하게 불행한 삶으로 끝이 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마음이 지금 평안이 참 평안인지 지금 형통함이 참 형통하는지 이것을 분별할 수가 있을까요?
그 기준이 바로 아버지의 집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집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으므로 평안함이 찾아왔다면 그 평안은 정말 진짜 평안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내 아버지의 집에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비록 내 아버지 집에 성전 문집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전 마당만 밟아도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새벽에 나와서 주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얼마나 여러분 복이 있을까요?
어떤 성도님은 자신은 매일 새벽 재단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 말씀을 듣는 것도 참 귀하고 행복하지만 이 고요한 시간에 집을 나서서 성전으로 가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15분 한 20분 정도 걸어서 교회까지 걸리는 시간인데, 교회 가는 시간 속에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그 시간, 그 과정이 자기에게는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맛을 본 사람만이 그 행복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주어진 행복과 형통함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행복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돈 많이 버는 거 잘 되는 거 다 좋잖아요. 그런데 그 평안과 행복은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진짜 평안과 형통함은 하나님의 집을 가까이 하게 될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형통함이 주어졌는데 그 형통함으로 인해서 오히려 주일을 지키기가 어렵고 예배드리기가 어렵다면 그 형통함을 한 번 더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목사님께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직장을 잃고 사업도 망하게 망하고 어렵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 청년은 목사님께 순종도 잘하고 또 교회에 열심히 있었던 청년입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고 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정말 그 기도의 응답이었는지 그 청년에게 좋은 사업의 기회가 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 그대로 대박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청년이 그 사업의 대박으로 너무나 바빠져서 교회를 잘 나오지 않더니 점점 믿음과 멀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때 이 청년에게 찾아온 형통함이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형통함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기준을 나에게서 찾지 말고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믿음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잘나고 출세한다고 해서 그거 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 아니거든요. 그 일은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의 성전에 나오지 못할 그 현실이 된다면 그것이 진짜 행복인지 진짜 평안인지를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 가지 않는데 나는 평안해. 나는 아무 문제없어 여러분 속고 있는 것입니다. 가짜 평안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편한데 교회 가지 않는 것이 평안한데 그 역시 가짜 평안인 것입니다. 진짜 평안은 우리 주님께서 더 예배하게 하시고 더 주를 찬송하게 하는 것 진짜 평안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평안함 형통함이 어디서부터 오는가라는 겁니다. 우리 8절 9절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8절 9절의 말씀 시작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하니 내 가운데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아멘 내가 누구를 위해서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해서 이제 말하리니 니 가운데 무엇이 있을지어다. 평안이 있을지어다. 9절 말씀 시작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아멘, 어떤 사람에게 평안과 형통함이 찾아오느냐라고 보니까 형제와 친구를 위해서 중보 기도할 때 평안과 형통함이 찾아온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평안과 형통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예배 시간에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내 형제 자매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예수 믿지 않는 우리 형제 자매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신앙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욥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다 보면 그는 자녀를 한날 한시에 다 잃어버리고, 또 모든 재산과 감옥, 가축을 다 잃어버리고 자신도 병이 들지 않습니까? 그때 누가 찾아옵니까?
엘리바스와 빌라 소발이라는 세 사람의 친구가 찾아와서 욥에게 아주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욥은 지금 당신은 지금 너는 죄 때문에 니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니가 지금 거룩하고 깨끗한 척해도 너 지금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는 안 된다.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이 세 친구들을 야단칩니다.
욥기 42장 7절에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너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데, 여호와께서 그만 타 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내 부친구에게 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하는 것이 내 종놈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아멘,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내 두 친구에게 뭐 하나니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뭐 하지 못하다. 옳지 못하다.
그럴 때 욥이 어떻게 말합니까?
그래 속이 시원하다. 하나님께서 너무 잘 말씀해 주셨어.
경상도 말로 하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잘 했다. 꼬방시다.
그렇게 험담한 말을 험악한 말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욥이 어떻게 합니까? 욥기 42장 10절 말씀을 한번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니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제 공로를 보내주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있는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십니다.
아멘,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뭐 할 때 뭐 할 때에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뭐 하시고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어떻게 갑절이나 주시더라. 욥을 향해서 거친 말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그 친구들에게 요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잘 되게 해주세요. 저 친구들 용서해 주세요.
저는 이게 굉장한 마음에 큰 울림이 된다고 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형통하게 해주세요. 평안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빌어서 평통하고 평안한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원치 않게 때로는 내가 원치 않는데, 때로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때로는 그 행동 때문에 내 마음에 가시가 되고 상처가 되고, 나는 절대 너를 두 번 다시 안 볼 거야.
그러면서 때로는 절단하고 그렇게 평생을 그렇게 지낸 일도 많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정말 우리가 내가 평안하길 원하고 내가 정말 형통하길 원한다면 오늘 이 욥처럼 그 형제를 위해서, 자매를 위해서 기도해 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서 욥을 회복시켜 주시고 갑절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동안에 여러분 이 관계의 문이 닫히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 이유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잘한다 할지라도 이 관계의 문이 닫히면 하늘의 문도 닫힌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 와서 주님 저 사람 용서하기 원합니다. 내가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풀어야지요.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록 절대로 저 인간 내가 용서 안 하겠습니다. 나는 절대 용서 안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마음 가지면 결과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고 형통함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판단과 심판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하시죠. 우리 하나님이 하실 겁니다. 다만 나는 오늘 요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입니다. 인생의 평안함과 형통함은 멀리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으면 이 평안과 형통함은 하나님의 집에서 다시 말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해서 예배드릴 때에 우리의 삶의 평안과 형통함이 주어질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평안과 형통함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런 평화의 형통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