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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100인 원정대는 한 주 건너뛰어 가양역에서 출발한다.
가양동은 조선 시대 양천현이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조선의 위대한 화가 겸재 정선이 5년 간 현령으로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현령의 품계는 종 5품, 한 고을 관장하는 수령이다.
흔히 사또라 불리는데 지금으로 치면 시장이나 군수 격이다.
목민관으로서 겸재 정선의 업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양천 현령으로 근무하며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니 바로 '경교명습첩'이다.
배를 타고 다니며 한강 일대의 명승지를 무려 서른 세 폭씩이나 그렸다.
한 두 폭은 일시적 기분으로 그릴 수 있지만 서른 세 폭은 일시적 기분으로 그릴 수 없다.
작정하고 그린 것이다.
이름하여 겸재 정선 프로젝트다.
경교명습첩의 예술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진경산수의 정수가 담겨있는 최고의 작품들이다.
하지만 경교명습첩은 또 다른 가치는 옛 한강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데 있다.
지금의 한강은 겸재가 살았을 당시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개발로 인해 물길이 바뀌고 강 폭도 비할 데 없이 넓어졌다.
저자도를 비롯 강에 떠다니던 섬들도 사라졌다.
1968년 폭파 돼 사라진 밤섬이 되살아난 건 그야말로 기적이다.
1. 가양대교
가양역 집결지를 벗어난 100인 원정대는 곧 한강 남부와 북부를 잇는 가양대교에 접어든다.
가양대교에서 바라본 풍경은 낯설다.
경교명승첩에 본 풍경과는 너무나 다르다.
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호수다.
유람선을 띄우기 위해 강 하구에 보를 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있다.
고여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죽음의 강이다.
생물의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에 적응한 일부 생물만 살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옛 모습이 완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왼쪽으로는 양천관아의 진산인 궁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외사산의 하나인 덕양산이 보인다.
행주산성으로 더 유명한 덕양산이다.
겸재는 행주산성 앞에서 어부들이 웅어 잡는 모습을 그렸다.
행호관어(杏湖觀漁)라는 그림이다.
웅어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 사는 물고기로
조선 시대엔 임금님 수랏상에 올라가는 귀한 음식이었다.
지금은 한강에서 아주 제한된 곳에서만 서식한단다.
2.난지습지생태공원 메타세쿼이아길
가양대교를 건너면 난지도다.
7~80년대엔 쓰레기 매립지였고 지금은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으로 거듭나 있다.
조선 시대엔 난초와 영지가 자라는 아름다운 섬이었다는
이야기를 지난 7회 차 후기에 썼었다.
고산자 김정호가 펴낸 대동여지도 경조오부 편에는 '中草'라고 표기돼 있다.
쓰레기로 산을 이루었던 난지도는 난지생태공원이란 이름으로 우리 100인 원정대를 반긴다.
생각보다 숲이 잘 조성돼 있어 걷기가 편하다.
노을공원 하단을 가로질러 얼마 쯤 걸었을까?
메타세쿼이아길이 나타난다.
너무나 평화로운 풍경.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메타세쿼이아 길보다 아름다웠다.
같은 조 멤버로 마포구민이기도 한 김구성 선생 말로는 달리기의 성지라고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닥도 아스팔트가 아닌 흙 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몇 백 미터를 걸어서야 끝이 났다.
메타세쿼이아는 공룡 시대에 살았던 화석 식물이다.
1940년대 북경 어딘가에서 발견돼 세계에 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나무에 대해 아는 체도 조금 하는 아마추어 숲해설가지만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나무에 관심이 전혀 없는 생태맹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첫사랑을 십여년만에 만났는데 그 장소가 메태세쿼이아 나무 아래였다.
"이게 무슨 나무지?"
"메타세쿼이아"
"메타세쿼이아?"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온 나는 메타세쿼이아를 외우려 했지만 외워지지가 않았다.
"메타... 뭐지?"
검색을 해보고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니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메타가 가볍다는 뜻이고 세콰이아가 깃털인 줄 알았는데
오늘 검색하니 그게 아닌가보다.
어쨌거나 메타세쿼이아 잎은 새의 깃털을 닮았다.
3.불광천
메타세쿼이아 길이 끝나면 상암월드컵경기장이 나타난다.
2002년 월드컵 경기의 함성이 들끓었던 곳은 말 할 수없이 조용하다.
그 왼 편엔 군 방호시설 비슷한 곳이 나타나는데 기사로 한 번 읽은 적 있는 문화비축기지였다.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석유비축의 절실함을 느끼고 건설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안정상의 폐쇄됐다가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지금과 같은
문화비축기지로 거듭났단다.
문화비축기지를 지나면 불광천이 나온다.
불광천의 발원지는 북한산 비봉이다.
역시 북한산에서 발원한 홍제천과 만나 한강으로 흐른다.
불광천은 북한산을 바라보고 걷는 길이다.
냇가에 양귀비를 비롯한 들꽃들이 5월의 햇빛을 온몸으로 떠안고 있었다.
불광천의 우리말은 불광동에선 연신내 중산동에선 까치내다.
모래내등과 함게 살려써야 할 우리말인데 물은 참 더럽다.
악취가 나는 건 아니지만 바라보고 싶지가 않다.
대신 멀리 북한산이 굳건히 서울을 하늘을 지키고 있어 위로가 된다.
- 증산과 봉산
불광천을 따라 걷던 100인 원정대는 불광천을 벗어나 증산으로 접어든다.
횡단 건널목에 있는 표지석을 보니 시루떡을 얹은 모양이라고 해서 시루뫼 즉 증산이란다.
증산은 지도에 해발 고도가 표기 돼 있지 않을 정도로 낮다.
그럼에도 증산은 중요하다.
봉산과 앵봉산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산 능선.
능선엔 언제나 그렇듯 나무들이 자란다.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벚나무 서어나무 소나무...
나무잎들이 만들어낸 그림자와 그 사이로 비친 볕뉘가 아름답다.
볕뉘의 사전적 의미는 는 '작은 틈을 통해 잠시 비치는 햇볕'이나
'그늘진 곳에 비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이다.
언젠가 사귀던 이의 집을 갔다가 볕뉘란 제목의 잡지를 보았다.
그 이는 경희대 우주과학과를 졸업했는데 우주과학과를 졸업한 이들이 만든 비정기
간행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볕뉘란 말을 처음 알게 되었다.
6조 김인수 기자님의 말씀으로는 이를 일본어로 코모레비 (木漏れ日):라고 한단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뜻한단다.
코모레비를 가장 잘 그리는 만화가는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일본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만화가로 한국에서 출간한 그의 책을 전부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번역이 되지 않는 일본 책들도 다수 갖고 있다.
사실 그의 대표작은 <고독한 미식가>가 아니다.
드라마가 뜨는 바람에 대중은 <고독한 미식가>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은 <열 네살><도련님 시대><신들의 봉우리>같은 작품이다.
나 역시 한 사람의 만화가로서 볕뉘를 잘 그리고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볕뉘를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다.
내가 쓴 스토리엔 볕뉘를 그릴만한 여지가 없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볕뉘를 제대로 표현해보고 싶다.
"후~만만한 곳이 없어."
중산에서 이어진 봉산 역시 해발 200m의 낮은 산이다.
그럼에도 힘들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점심 장소는 편백나무가 자라는 편백정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먹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때가 되어 조원끼리 정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먹는다.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누니 즐거움이 더한다.
회차가 더해지면서 조원들끼리 친분도 깊어지고 있다.
봉산(烽山)은 조선 시대 봉수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서북 쪽에서 알려오는 위험을 산봉우리에서 불과 연기를 피워 알렸다.
최종 도착지는 남산봉수대.
바로 전이 안산봉수대이고 전전 봉수대가 여기 봉산이다.
봉산 정상엔 봉수대를 복원했는데 축소 복원이다.
원래 봉수가 다섯개인데 크기도 복원한 것보다 몇배는 더 크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안하는게 더 좋았을 듯 싶다.
봉산은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어서인지 전망이 참 좋았다.
서울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북한산이 굳건하고 백련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 오른편 뒤로는 안산이 바라다 보인다.
여기 봉산 봉수대에서 연기와 불을 피워 올리면 안산에서 불과 연기를 피워 올리는 구조다
5. 앵봉산
봉산에서 앵봉산으로 이르는 능선도 볕뉘의 연속이었다.
숲이 깊다.
앵봉산에 이르자 봉산에서 보지 못했던 때죽나무와 쪽동백나무도 보인다.
특히 쪽동백나무는 잎이 넓고 투명해 숲을 더욱 청신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띄는 것은 나무를 감싸고 있는 비닐이다.
나무를 비닐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중산부터 앵봉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병이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혹 아는 분이 있다면 알려주시라.
앵봉산의 해발 고도는 봉산보다 조금 더 높은 230m.
서오릉을 품고 있다.
언젠가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서오릉을 입에 올렸더니
왕릉인 사실을 모른 채 서오릉피자를 이야기하였다.
물으니 피자 브랜드가 서오릉피자란다.
서오릉은 서쪽에 능이 다섯 개란 뜻이다.
동구능은 동쪽에 능이 아홉 개라 동구능이다.
동구능은 동삼릉 동칠릉 등으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모르긴 해도 서오릉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서오릉하면 떠오르는 이가 몇해 전 세상을 떠난 고 신영복 선생이다.
육사 교수였던 시절 우연찮게 서오릉으로 소풍가는 아이들과 동행을 한 뒤 정기적인 모임을 이어가간다.
모임 이름도 정한다.
청구회.
하지만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선생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감옥에 갔기 때문이다.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선생은 사형이 언도 되길 기다리며 어린 아이들과의 우정을 글로 썼는데
제목이 '청구회 추억'이다.
사형수의 글은 영원히 사라질 뻔했으나 선생을 존경한 한 간수가 선생의 물건을 따로 챙겼더란다.
선생의 복역 기간은 20년 2일.
감방에서 쓴 편지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묶여져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때 '청구회 추억'도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청구회 멤버들은 모두 가난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안정된 삶을 살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던 아이가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다.
아이는 신문 기자가 되었고 대기업 사보 주필로 활동했다.
나와 친분이 있는 손응현 선생이다.
지금도 서오릉 하면 신영복 선생과 손응현 선생이 동시에 떠오른다.
어딜 가든 유심히 보는게 안내판이다.
장소와 유적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검색해서 알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보는 게 가장 좋다.
앵봉산이라니 무슨 뜻일까?
안내판을 보니 꾀꼬리앵鶯자를 써서 앵봉산이란다.
여름철새인 꾀꼬리는 4월 중순 날아와 번식을 하는데 이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아쉽게도 능선을 걸으며 새소리를 듣지 못했다.
꾀꼬리가 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안내판엔 앵봉산을 대표할 나무가 서어나무란다.
다행히 서어나무는 봤다.
울퉁불퉁 마치 보디빌더를 연상시키는 나무다.
16.9km. 결코 짧다할 수 없는 길.
앵봉산 아래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며 8회차를 마무리한다.
벌써 북한산 구간을 걷는 9회 차가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