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624. [역경의 열매] 문성모 (1-25) “한국 찬송가 1000곡을 하나님께 봉헌하겠습니다”
문성모 목사가 25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예배와 음악의 한국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2023년 3월 12일, 강남제일교회에서 위임목사로서의 마지막 퇴임식을 하고 목회 40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동시에 작곡가로서 새로운 삶을 다짐하며 “한국 찬송가 1000곡을 작곡해 하나님께 봉헌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 목사 은퇴 후 작곡가로서 남은 생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목사가 되기 전,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다. 본래 전공은 작곡이었으나 교회 목회와 학교 행정에 매여 하고 싶었던 찬송가 작곡에 온전히 몰두하지 못했다. 은퇴 당시까지 작곡한 찬송가를 모아보니 300여곡이고, 그중 세 곡이 현행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 1000곡을 완성하려면 700곡을 더 써야 하는데, 일주일에 한 곡씩 작곡한다 해도 앞으로 15년이 더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건강을 돌봐 주시리라 믿는다.
나는 평생 학자와 목회자로서 ‘예배와 음악의 한국화’를 목표로 삼아왔다. 한국 찬송가 1000곡은 단순히 5음 음계를 사용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140년 역사를 반영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는 3·1절, 광복절, 6·25전쟁 기념 예배에 부를 찬송이 없다. 길선주 목사부터 한경직 목사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유산을 담은 찬송도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1983년 목사 안수를 받고 독일에서 유학하며 독일 찬송가를 보고 매우 부러웠다. 독일 찬송가는 말 그대로 독일 교회사였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던 날, 찬송가의 생소함과 난생처음 경험하는 예배 의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의 코랄부터 30년 전쟁, 경건주의, 계몽주의 시대의 독일 시인과 작곡가들의 찬송을 독일 회중이 부르며 독일교회 예배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독일교회는 독일 사람의 찬송가 부르고 그들의 교회 역사를 잊지 않고 계승하고 있었다.
미국 예배와 영미 계통의 찬송에 갇혀 살던 나는 부끄러웠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영미 계통의 찬송가가 75%를 차지하고 한국교회사를 반영한 찬송은 극소수다. 한국인을 위한 찬송, 한국교회가 부를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평생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은퇴 후 공적인 사역에서 벗어나 내 시간을 찬송가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매주 1곡씩 찬송가를 작곡해 10여곡이 모이면 ‘신작 찬송가 봉헌 예배’를 드려왔다. 찬송가 작곡 외에도, 20년 가까운 세월 매주 교계 신문에 칼럼을 쓰고, TV 방송을 통해 찬송가 해설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의 교회나 열악한 환경의 농촌교회를 위한 자비량 설교 사역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이 연재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기도로 성취되는 경험이 공유되고, 한국교회 예배와 찬송가가 한국화돼야 할 이유와 목표가 분명히 이해되는 열매가 있기를 바란다.
△1954년 출생 △서울대 음대 △독일 오스나부뤽대 철학박사(음악학) △호남신대 교수 △광주제일교회 위임목사 △대전신학대 총장 △서울장신대 총장 △강남제일교회 위임목사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 “한국 찬송가 1000곡을 하나님께 봉헌하겠습니다”
* [역경의 열매] 문성모 (2) 어린 시절 음악은 안식처… 음악콩쿠르서 대상 수상
* [역경의 열매] 문성모 (3) 진학 실패에 좌절… 한 부흥회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 [역경의 열매] 문성모 (4) 기독교 소재 첫 번째 국악 작품 '부활'로 콩쿠르 입상
* [역경의 열매] 문성모 (5) 음악과 신학 두고 갈등… 점점 신학으로 마음 이끌려
* [역경의 열매] 문성모 (6) 피할 수 없는 목사의 길 "음악 내려놓고 목사 될게요"
* [역경의 열매] 문성모 (7) 교회 음악 한국화 첫 시도… 10년 독일 유학길 올라
* [역경의 열매] 문성모 (8) 최원영 사장의 조건 없는 도움으로 유학 무사히 마쳐
* [역경의 열매] 문성모 (9) 신학부 박사학위 논문 진행과 동시에 음악학도 병행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0) 호남신학대 교수로 사역… 시험·출석 학생들 양심에 맡겨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1) 광주제일교회 섬기며 '예배와 음악의 한국화' 목회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2) 어려운 상황인 대전신학대 총장 맡아 학교 정상화 총력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3) 학교 건축 위해 기도… 기적처럼 건축 헌금으로 이어져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4) 대전신학대 신건물 완공… 예배당 한국적 이미지 강조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5) 역사에 묻힌 초대 교장 이자익 목사 업적 세상에 알려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6) "건축 잘하는 총장 필요해요" 서울장신대 총장으로 청빙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7) "예배당 먼저" 모인 공사비 없으나 믿음으로 짓자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8) 서울장신대 최고 공로자 강신명 목사 새롭게 조명하다
* [역경의 열매] 문성모 (19) 목회 중에도 작곡가로서의 지분 챙겨 주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문성모 (20) 작곡 달란트 주신 하나님… 찬송가 작곡으로 은혜 보답
* [역경의 열매] 문성모 (21) 총장 은퇴하며 쉼이 필요할 때, 목회로 이끄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문성모 (22) 교회 모든 예배 설교 직접 맡아… 이웃 사랑 나눔도
* [역경의 열매] 문성모 (23) 학자로서 연구한 자료 출판… 설교 예배 음악 이론 정리
* [역경의 열매] 문성모 (24) 목회 내려놓고 은퇴… '찬송가 1000곡 봉헌' 주님께 서원
* [역경의 열매] 문성모 (25·끝)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 은혜"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
***[역경의 열매] 문성모 (2) 어린 시절 음악은 안식처… 음악콩쿠르서 대상 수상
유치원 다닐 때부터 노래 실력 두각
가난해 정식 교습은 받지 못했지만
음악 선생님 지도로 지식·경험 쌓아
선생님 권유로 콩쿠르 작곡부 참가
문성모 목사가 대전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모습. 아래 사진은 1969년 한국음악협회 충남지부의 음악콩쿠르 대회에서 문 목사가 받은 특상 상장. 문 목사 제공
우리 집안은 나까지 4대째 기독교 집안이다. 아버지는 내게 조선 말기, 증조부로부터 이어져 온 신앙의 맥을 자랑스럽게 말씀하곤 하셨다. 우리 집안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용천군 동화면에서 친조부는 고령교회를, 외조부는 덕흥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1947년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대전으로 월남하셨다.
아버지 형제들은 대부분 내려오지 못했고, 어머니의 형제 중에는 절반 정도만 월남했다. 외삼촌 최광준 목사는 피난을 거부하고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원에게 총살을 당했다. 그는 한경직 목사와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1954년 전쟁 직후 4녀 2남 중 막내로 대전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내야 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내게는 음악이라는 안식처가 있었다. 교회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부터 노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어린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기계체조 선수 생활을 했지만, 그 시절 내 꿈은 변함없이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 어린 시절에도 유명한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구하면 주신다.’ 어린 나이에도 이 말씀을 붙잡고 단순한 기도를 반복했다. 음악가 집안도 아니었으며 음악을 공부할 만큼 부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믿음의 기도를 응답해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
1967년 대전중에 입학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음악 시간 맨 앞줄 가장 좋은 자리를 꿰차곤 했다. 당시 음악 선생님이었던 박인섭 선생님은 예수를 믿는 분이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매우 기뻐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음악에 대한 열의가 있다는 것을 아신 선생님은 개인 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다. 가정형편으로 정식 교습은 받아보지 못했지만 박 선생님의 도움으로 다른 친구들보다 음악에 대해 여러 가지 지식과 경험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선생님의 지도하에 나는 노랫말에 가락을 붙이고 교정받는 일을 반복했다. 그때 작곡한 멜로디 10여곡의 악보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가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시곤 “성모야 음악콩쿠르 나가보는 게 어떠니”라고 권하셨다. 당시 한국음악협회 충남지부 주최로 매년 음악콩쿠르가 열렸는데 내게 작곡부(창작부)로 나가보기를 제안하신 것이다. 개인지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콩쿠르에 임했다.
시인 김소월의 시 ‘님의 노래’에 곡을 붙이는 것이 과제였다. 시는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로 시작했다. 결과는 ‘특등’. 당시 특등은 지금의 대상이었다. 성악부가 기악부 아닌 작곡부로 출전해 대상을 받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 특별한 수상이 내 진로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오롯이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3) 진학 실패에 좌절… 한 부흥회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간절한 기도 응답 받고 서울예고 입학
서울서 홀로 생활하면서 홀로서기 배워
음대 교수 목표로 국악 전공 진학 결심
문성모 목사가 서울예고를 다닐 때 작곡한 클라리넷 협주곡 악보. 오른쪽은 서울예고 시절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 문 목사 제공
“하나님, 서울예고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작곡가가 되고 싶습니다.” 작곡에 대한 정식 수업을 받아본 적 없던 내가 뜻밖에 서울예고에 합격했다. 내가 서울예술고등학교라는 학교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단 걸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은 후 당시 경기고를 다니던 담임선생님의 큰아들이 내게 서울예고를 소개해 주었다. “음악가로 성장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학교에 대한 정보도 없고 합격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매일 밤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내 작은 기도는 기적 같은 응답으로 이어졌다.
입학식 전 예비 소집일, 당시 음악부장이었던 신인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선생님은 “사실 네가 화성학 점수가 부족해 합격이 어려웠다”며 “그런데 올해는 남학생이 너무 적어 특별히 너를 뽑은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서울예고 합격은 내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달았고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였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나 서울에서 홀로 생활하게 됐다. 하숙, 입주 가정교사, 피아노 학원, 기숙사 생활 등 매번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외로움을 견디며 홀로서기를 배워 나갔고 그 과정에서 점점 단단해졌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삶의 훈련을 시키신 것이었다.
서울예고에서는 새로 부임하신 김중석 선생님께 작곡 레슨을 받았다. 젊은 선생님은 내 부족한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정해진 레슨 시간 외에도 과제를 주시며 작곡 공부를 시키셨고 나는 부지런히 노력했다. 그렇게 쌓인 3년의 시간은 내 실력을 견고하게 다져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서울대 음악대 작곡과 진학을 목표로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내 꿈은 음대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예고를 졸업한 임평용 선배가 내게 국악과 작곡 전공을 추천했다. 서양 음악 분야에서 교수로 자리 잡기는 어려우므로 국악 전공으로 가야 더 많은 기회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선배의 권유를 받아들여 국악과 진학을 결심했지만 입시 준비 방법을 몰랐다. 국악 이론 시험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시간이 부족했다. 급하게 공부했지만, 결국 낙방했다. 그때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누님의 권유로 한 부흥회에 참석하게 됐고, 그 자리에서 지금은 작고하신 강남중앙침례교회 김충기 목사님을 만났다. 나는 모태 신앙이 있었지만, 그날 처음으로 진정한 중생(重生)의 영적 경험을 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 순간 마치 새사람이 된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으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었음을.
***[역경의 열매] 문성모 (4) 기독교 소재 첫 번째 국악 작품 ‘부활’로 콩쿠르 입상
서울대 국악과 작곡 전공으로 입학
국악과 양악 넘나들며 작곡에 매진
최고 권위의 ‘동아음악콩쿠르’ 도전
2등 입상해 음대 교수 꿈에 다가서
문성모(가운데) 목사가 1974년 서울대 입학식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문 목사 제공
나는 서울예술고를 졸업하고 거듭남의 체험을 한 후 이듬해에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 작곡 전공으로 입학해 음대 교수가 되려는 꿈을 키워갔다. 사실 나는 국악을 전혀 알지 못했고 흥미도 없었다. 내가 서양음악 작곡과를 택하지 않고 국악과를 지원한 이유는 오로지 음대 교수가 되려는 인간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국악은 양악과는 다른 생소한 음악이었다. 그 분위기를 익히느라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작곡하는 일은 즐거웠다. 나는 이성천 선생님의 지도로 국악기와 서양악기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실험적 작품을 만들었다. 그때 작곡한 작품 중에는 ‘만삭’ ‘슬픈 잉태’ ‘탈선’ ‘전통과 현대’ 등이 있었다.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당시 국악계의 정통 국악인들 사이에서 이단아로 불릴 만했다.
지도교수인 이 선생님은 본래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국악으로 전향한 분이셔서 실험정신이 강했다. 그는 “네가 서양음악을 공부하고 국악 작품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면 국악만 한 사람보다 훨씬 더 신선한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를 격려해 주셨다. “국악이 발전 없이 옛것만 고수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강조하셨다. 선생님이 미국에 가셨던 한 학기 동안에는 작곡과 강사로 출강하던 윤양석 선생님에게 작곡 지도를 받았다.
3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문성모, 너 이번에 동아콩쿠르 한번 나가봐.” 이 선생님의 권유로 나는 그해 가을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동아음악콩쿠르’에 도전했다. 그해 국악작곡부 지정곡은 거문고 독주곡이었는데, 나는 ‘부활(復活)’이라는 작품을 제출해 2등으로 입상했다. 이는 음악가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실히 굳히는 사건이었고 음대 교수가 되겠다는 비전에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는 기회가 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활은 기독교적인 것을 소재로 한 첫 번째 국악 작품이었다. 서울대 음대에 입학한 것과 동아콩쿠르 입상은 모두 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전적인 주님의 은혜 안에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만한 실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에서 국악을 배운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라고 생각한다. 그 덕에 서양음악과 더불어 국악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폭을 넓혔으니 말이다. 당시 불교음악 무당음악 정도로 인식됐던 국악이 얼마나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품위 있는 음악인가를 배우면서 “이런 훌륭한 음악을 내가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구나”하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그때까지 나의 인생 계획은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한 후 졸업하고 음대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국악 전공으로 서울대 음악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나의 길과 달랐고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서원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를 음대 교수가 아닌 목사로 이끄셨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5) 음악과 신학 두고 갈등… 점점 신학으로 마음 이끌려
담임목사 없는 숭덕교회서 설교 맡아
졸업 무렵 목사 되라며 교인들 권유에
아무 준비 없이 신대원 입학시험 응시
문성모(왼쪽에서 두 번째) 목사가 1977년 서울 성동구 숭덕교회에서 교회 청년들과 함께 추수감사절 특별찬송을 부르고 있다. 문 목사 제공
나는 대학교 3~4학년을 서울 성동구에 있는 숭덕학사에서 생활했다. 숭덕학사는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기에 지방에서 온 나에게는 더 없는 안식처였다. 숭덕학사 안에는 숭덕교회가 있었다. 내가 입사할 당시 설립자 박영출 목사님이 몇 달 전 소천했고, 열악한 재정 상태로 인해 담임목사 없이 장로님 두 분이 설교를 임시로 맡아 하고 있었다.
“문 선생, 신앙이 너무 좋아 보이는데 교회 설교 좀 맡아주세요.” 기숙사에 입사한 내게 당시 장로님들이 뜻밖의 요청을 했다. 함께 설교를 맡아달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못합니다. 저는 음대생이라 설교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엔 못 한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장로님들은 자신들도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설교하고 있다며 도와 달라고 했다.
장로님들은 처음 입사한 나에게 왜 설교를 부탁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신앙은 거듭남의 체험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었기에 불같은 성령 체험의 사람으로 비쳤는지도 모르겠다. 찬송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고, 성경을 하루에도 수십 장씩 읽으며 살았다. 누구를 만나도 전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기도에 열심이었다. 그런 점이 내가 음대생이었음에도 다른 사람들 눈에 설교를 맡을 적임자로 생각된 이유였던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장로님들과 함께 공동 설교자가 돼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설교를 맡았다. 그렇게 나는 신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설교를 시작했다. 당시 내 설교는 어설펐으나 모태신앙에다 뜨거웠던 거듭남의 체험이 더해져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숭덕교회 50명 교인 중 절반이 학생이었고, 그 학생 중 절반은 불신자였다. 도저히 예수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내 설교에 회개하고 눈물 흘리며 예수 믿는 기적이 일어났다. 분명 하나님의 역사였다.
“어이, 문 교주 기도 좀 해줘.” 당시에 학사생들은 나를 ‘교주’로 부르며 한바탕 웃곤 했다. 대학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장로님들과 주위 교인들의 권유가 이어졌다. “문 선생은 음악을 하지 말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세요.” 쏟아지는 말들을 들으며 나는 갈등 속에서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음악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주변 환경은 점점 나를 신학으로 이끌었다. 주위의 권유가 계속되면서 나는 스스로 합리적인 핑계를 만들어 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음악을 시작했으니 이참에 신학 공부를 하고 음대 대학원은 나중에 들어가도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신대원을 ‘신학원’이라 불렀다. 나는 교파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지만 우리 집안은 이북에서부터 대대로 장로교 신앙을 이어왔다. 숭덕교회가 통합 측 교회였던 것이 내가 광나루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된 이유였다. 솔직히 시험을 치를 당시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보다는 일단 시험에 한 번 응해 보고 그 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마음이었다. 물론 시험 준비도 전혀 하지 않았고,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은 채 신학교 시험을 치렀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6) 피할 수 없는 목사의 길 “음악 내려놓고 목사 될게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매일 새벽 기도한 아버지
아들이 목사 될 것이란 믿음 속에
철저하게 생활 속 신앙 훈련 시켜
메모가 가득한 문성모 목사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성경책. 문 목사 제공
주위 권유에 밀려서 준비 없이 장로회신대 신대원 시험을 치렀지만, 뜻밖에도 합격 통지를 받았다. 당시에는 신대원 지원자가 부족해서 거의 모든 응시자를 다 받아주던 때였기에 나도 합격할 수 있었다. ‘내가 신학교에 합격하다니,’ 솔직히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시험을 치른 나는 뒤늦게 합격 사실을 연락드렸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즉시 대전으로 내려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는 내게 처음으로 서원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매일 새벽 기도를 했다. 네가 신학교 합격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다.” 아버지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을 보이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무려 24년간 지속된 기도 응답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충격을 받았다. 목사가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길임을 깨닫고, 아버지 앞에서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주님, 정하신 길이라면 순종하겠습니다. 음악을 내려놓고 목사가 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잠잠히 돌아보니, 아버지는 단순히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목사가 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나를 어릴 때부터 신앙 훈련을 시키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신약성경을 사다 주시며 읽도록 하셨다. “성모야, 너 한글을 읽을 수 있으니 이제부터 성경을 읽어라. 신약부터 읽으면 좋다”며 권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성경을 읽으면 돈을 주셨고, 어린 마음에 요한복음까지 꾸준히 읽었다. 이후에는 돈을 주시지 않았지만, 성경에 흥미를 느껴 신약을 모두 읽었다. 이어 구약까지 섭렵하며 성경을 세 번이나 완독했다. 또 아버지는 거의 모든 부흥회에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곳에서 병자가 치유되는 신유의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어릴 땐 아버지의 의도를 몰랐지만 기도 속에서 응답을 믿고 내게 신앙 훈련을 시키셨던 것이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등록금 문제가 걱정됐다. 당시 30만원이 넘는 입학금과 등록금 마련은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기적 같은 방법으로 신대원 과정을 마칠 수 있게 하셨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연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
서울대 음대 국악과에서 만난 은사 한만영 교수님이 계셨다.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을 때, 한 교수님은 후두암에 걸렸다가 기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응답을 받아 기적적으로 암이 치유된 경험이 있으셨다. 교수님은 이후 신실한 신자가 됐다. 그 일을 겪으신 교수님께서는 나를 개인적으로 불러 성경을 가르쳐 달라 부탁하셨다. 그렇게 학생인 내가 한 학기 내내 교수님에게 성경을 알려드리는 일을 맡았다.
집에서 마련해준 첫 학기 등록금을 내고 신학교 합격 소식을 알릴 겸 한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교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앞으로 3년 동안 등록금을 후원하고 싶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덕분에 나는 3년간의 신대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7) 교회 음악 한국화 첫 시도… 10년 독일 유학길 올라
행사 때 ‘한국교회 음악 토착화’ 기획
신대원 졸업 후 신학석사 과정에 진학
목사 안수 후 더 많은 공부·경험 위해
독일 유학 결정
문성모 목사가 1983년 2월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졸업식에서 기념촬영한 모습. 문 목사 제공
나는 장로회신학대에서 공부하며 한국교회의 예배와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장로회신대에는 나를 지도해 줄 교수가 없었다. 예배의 한국화를 주장한 학자로는 한신대학교의 박근원 교수가 유일했으며, 음악계에서는 나운영 작곡가가 “선(先) 토착화 후(後) 현대화”를 교회음악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직접 배우지는 못했지만, 두 분은 내 평생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이번 개교 79주년 행사를 위해 음악부에서는 ‘한국교회 음악의 토착화’라는 주제로 강연과 연주회를 열겠습니다.” 신대원 3학년 때 학우회 음악부장을 맡아 이 행사를 기획했다. 서울대 국악과의 한만영 교수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박동진 명창을 모셔서 성서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했다. 또한 내가 작곡한 한국풍 성가곡 몇 곡을 연주했다. 이는 장로회신학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신대원 졸업 후 신학석사(ThM) 과정에 진학했고, 1983년 4월 29일 용산교회에서 열린 서울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주일은 삼각교회에서 부목사로, 주중엔 쌍문동 정의여자고등학교에서 교목으로 섬겼다.
“주님,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오더라도 우선 유학을 가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석사 과정을 마치자 더 깊은 공부와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미국은 비용이 많이 들어 학비가 없는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구하면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도전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로 떠날 때 삼각교회 교인들과 아는 지인들이 모아준 돈과 내 통장에 있던 금액을 합해 500만원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주님, 가진 돈은 이것뿐이지만 오병이어의 축복을 내리셔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게 해주세요.” 비행기에서 드린 이 소박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10년간의 유학 생활을 가능하게 하셨다.
독일에 도착한 후 먼저 쾰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공부하기 위해 독일어 어학코스를 신청했다. 그러나 본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나 늦은 시점이라 학교 기숙사엔 방이 없었고, 외부에서도 방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한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가톨릭 단체 오푸스 데이(Opus Dei)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은 방값이 두 배로 비싸고 생활 제약이 많아 학생들이 선호하지 않는 기숙사였기에 방이 남아 있었다.
다만 보수적인 가톨릭 단체였던 오푸스 데이는 개신교 목사인 나를 정회원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임시로 머물렀지만, 그곳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이들은 개신교에 대해 형제애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하루에 일곱 번 기도회를 갖는 등 철저한 경건과 금욕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기숙사에서 중세 예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축복이었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8) 최원영 사장의 조건 없는 도움으로 유학 무사히 마쳐
결혼하기 위해 여름 방학에 잠시 귀국
음악·신앙 교분 쌓은 최원영 사장 만나
열악한 재정 상태 알고 재정 지원 약속
문성모(왼쪽에서 두 번째) 목사 부부가 2019년 서울 강남구 강남제일교회에서 최원영 회장 부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문 목사 제공
독일에서 공부한 지 1년 후인 1984년 여름 방학에 잠시 귀국했다. 가지고 간 돈이 바닥났고, 결혼도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같은 해 9월 22일 아내 김은유와 결혼했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기타 여러 사정으로 아내를 남겨두고 다시 독일로 가야 했다.
“최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문 목사님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독일로 다시 떠나기 전, 당시 동아그룹의 최원영 사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최 사장과의 인연은 내가 신학교 다닐 때부터 시작됐다. 그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였던 서울시립교향악단 더블베이스 연주자 안동혁 선생의 주선으로 만났다. 처음에는 최 사장이 나에게 작곡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만나기 시작해 매 주일 그의 자택인 장충동으로 갔다.
음악을 좋아하던 최 사장은 그때 플루트를 배우고 있었다. 나중에는 서울대 대학원에 플루트 전공으로 입학해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월간 음악잡지 ‘객석’을 창간하고, 충무로에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을 여는 등 음악 애호가와 전문가 사이를 넘나들면서 살았다.
“플루트 한번 배워보실래요.” 최 사장은 내게 플루트를 선물하며 직접 레슨까지 해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플루트를 취미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는 최 사장에게 작곡을 가르쳤고, 그는 내게 플루트를 지도하며 깊은 교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최 사장이 신앙에 관한 질문을 자주 던졌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성경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악 레슨보다 신앙적 대화가 우리의 만남에서 더 중요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최 사장은 사업가였지만 예술적 감성이 풍부했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품은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나는 그와 교분을 쌓았지만, 유학을 떠날 때 그의 지원을 기대하거나 약속받은 적은 없었다. “문 목사님, 독일에서 생활을 어떻게 하시나요. 장학금은 받고 있나요.” 잠시 귀국해 만난 자리에서 최 사장은 유학 중인 내 재정 상태를 물었고, 대책이 없는 나를 흔쾌히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당시 최 사장의 조건 없는 경제적 도움이 아니었으면 나는 독일에서 공부를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최 사장의 재정지원으로 독일에서 공부한 지 6~7년이 지났을 무렵, 당시 박창환 장신대 학장이 김용복 전 한일장신대 총장과 함께 독일로 오셔서 유학생 몇을 만나셨다. 박 학장님은 내가 공식적인 장학금 없이 개인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정을 들으신 후에 김 총장에게 부탁해 독일교회 장학금(DAAD Scholarship)을 받게 해주셨다.
당시에 김 총장은 독일 신학계에도 이름이 알려진 세계적인 신학자였다. 그의 노력으로 꿈에 그리던 독일 개신교단 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요 오병이어의 기적이 재현되는 것 같은 기도의 응답이었다. 물론 최 사장님에게는 그동안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고, 재정적 후원을 마무리했다. 그는 나중에 그룹의 회장으로 승진했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9) 신학부 박사학위 논문 진행과 동시에 음악학도 병행
뮌스터대 신학부 블린도우 교수에게
신학 박사학위 논문 과정 지도받으며
오스나부뤽대에선 음악학 박사과정
나중에 시작했지만 먼저 학위 취득
문성모(왼쪽) 목사가 독일 유학 시절 친구 마틴과 함께 뮌스터대 근처에서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문 목사 제공
“당신을 내 제자로 받겠습니다. 대학에 등록하고 나를 만나러 오세요.” 한국 방문 후 독일어 어학 과정을 마친 나는 뮌스터대 신학부의 마틴 블린도우 교수에게 지도받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내 박사학위 지도교수가 돼 주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뮌스터대 신학부에서 예배와 교회음악을 가르치고 있었고 중국에 오래 있었던 경험으로 한국인인 나를 친절하게 맞아줬다.
우선 신학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 필요한 고전어를 다시 수강하고 시험을 치러야 했다. 대학이 한국에서 받은 학점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전어 시험은 학교가 아닌 뮌스터시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고전어가 필요한 다른 학과 학생들 수백 명이 함께 치르는 시험이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교수 5명이 진행하는 구술시험을 봐야 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어려운 시험을 모두 통과했으니 이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다행히 나는 한 번의 낙오 없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시험에 합격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뮌스터대 신학부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진행하면서 약 30분 정도 떨어진 이웃 도시 오스나부뤽대의 교육문화학부에 다시 등록해 음악학에 관한 논문 준비를 병행했다. 내 관심사는 예배와 음악을 한국화하는데 필요한 독일의 역사적 자료와 방법론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스나부뤽대에서 나중에 시작한 음악학 박사학위(Dr. Phil.)를 먼저 끝내게 됐다. 반면 뮌스터대 신학박사 과정은 예상보다 늦어졌고 지도교수가 은퇴하면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결국 수료로 마치게 됐다.
내가 공부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독일 친구 중에 특히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마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나에게 방을 제공해 아내가 독일에 오기 전 약 3년을 함께 생활했던 절친이었다. 그는 내 부족한 독일어 실력을 많이 보충해 줬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채식주의자였다. 본래 정치학을 공부했으나 나의 권유로 방향을 바꾸어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됐다.
또한 유학 기간에 대전중 동기인 유상현 박사를 만나게 된 것과 오르간 제작자 홍성훈 마이스터와 음악적 대화를 나눈 것, 백경홍 목사와의 신학적 담론,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과 편지 교류도 뜻깊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역사적 순간을 목격한 것도 잊을 수 없다. 또한 카를스루에 한인교회에서 목회하며 자궁암 환자를 기도로 치유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독일 유학 중 나는 두 딸을 얻었다. 첫째 딸 예인은 1988년생, 둘째 딸 예지는 1990년생이다. 모두 뮌스터 라파엘 병원에서 태어났다. 1993년 아이들이 여섯 살과 네 살이 되던 해 나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앞으로의 길도 인도해 주소서.” 나는 지난 10년간의 독일 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유학 생활을 마무리했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0) 호남신학대 교수로 사역… 시험·출석 학생들 양심에 맡겨
‘민족음악과 예배’라는 과목 개설
한국적인 예배·찬송가에 대해 강의
정직성 강조하며 무감독 시험 도입
‘결석에 대한 양심선언’도 각자 서명
문성모 목사가 1995년 호남신학대 실물설교론 기말고사에서 학생들에게 제공했던 시험지 일부. 시험지 위에는 ‘무감독 시험에 대한 서약’과 ‘결석에 대한 양심선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오른쪽 사진은 문 목사가 교수 시절 한국적 예배와 찬송에 대한 강의 내용을 담아 출판한 책 ‘민족음악과 예배’ 표지. 문 목사 제공
“주님, 학교는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목회부터 먼저 하고 싶습니다.” 나는 1993년 4월 귀국해 목회를 위한 기도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은 목회의 길을 막으시고 광주에 있는 호남신학대 교수로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 응답을 거절하신 게 아니라 늦추신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가족을 데리고 귀국한 나는 집도 돈도 없는 처지가 돼, 할 수 없이 동서네 집에 방을 하나 빌려 임시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광주에 있는 호남신학대에서 신학과 조교수로 임용하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당시 교수로 있던 동기 노영상 목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승룡 총장이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교회 목회 자리에 연연해 기다릴 처지가 못 됐다. 이렇게 해 귀국 후 첫 사역은 신학교 교수로 출발하게 됐다.
호남신학대는 신학과와 교회음악과가 있었다. 나는 실천신학 교수로 한국적인 예배와 음악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를 던지고 그 해법에 대해 학생들 스스로가 답을 찾도록 유도했다. ‘민족음악과 예배’라는 과목을 개설해 한국적인 예배와 찬송가에 대해 강의하고 토론했다. 학생들은 생소한 과목에 흥미를 느끼며 경청했다. 학생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성만찬을 위한 재료로 백설기와 수정과를 사용해 보기도 했고, 박동진 명창을 초청해 판소리 ‘예수전’ 공연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가르친 내용을 모아 95년 ‘민족음악과 예배’라는 책을 출판했다.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한 또 다른 면은 정직성이었다. 예배는 삶이고 설교는 삶에서부터 준비돼야 함을 가르쳤다. 한번은 ‘실물설교론’ 기말시험을 무감독 시험으로 치렀다. 수업 중 출석도 부르지 않았다. 나는 시험지 맨 위에 ‘무감독 시험에 대한 서약’과 ‘결석에 대한 양심선언’ 난에 각자 서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시험을 감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양심대로 정직하게 시험에 임하세요. 부정행위를 하고 A 학점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은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설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시험을 치른다면 그 사람은 평생 진정한 설교자로서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기도하고 교실에서 나왔다. 한 시간 후 과 대표가 시험지를 거둬서 내 방에 가져오며 “교수님, 한 사람도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험은 처음입니다. 감동입니다”라고 전하며 울먹거렸다. 나는 너무 기뻐서 그 학생과 함께 감사 기도를 하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채점을 하다가 어떤 여학생이 답안지에 양심선언을 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저는 부정행위를 했습니다.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는 그 학생을 불러 사정을 듣고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다시 재시험 기회를 주어 학점을 조정했다. 이 무감독 시험 사건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내게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고 학생들과 나는 더욱 돈독한 사제 간의 정을 느끼게 됐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1) 광주제일교회 섬기며 ‘예배와 음악의 한국화’ 목회
예배 시간에 한국 악기와 가락 등장하자
교인 반응, 호기심서 점점 감동으로 변해
법률상담·급식 제공 등 나눔과 헌신 실천
문성모 목사가 광주제일교회의 예배당을 이전해 신축을 마친 1999년 11월 진행한 새성전 신축 기공식 포스터. 문 목사 제공
호남신학대에서 2년 동안 강의를 하고 있을 때 1995년 광주제일교회의 한완석 목사가 은퇴하며 당회가 나를 후임 목사로 결정했다. “문 목사님을 저희 교회 후임 목사로 모시려고 합니다.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청빙위원장 이승필 장로님의 연락을 받고 어리둥절했다. 학교생활에 보람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일어난 뜻밖의 결정이었다. 당시 나는 광주제일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몰랐다.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은 내가 그 교회로 가는 것을 반대하며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2년 전 귀국하면서 목회를 위해 기도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늦은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41세, 젊은 목사였으니 100년 전통의 광주지역 모(母) 교회를 맡는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로 했다. 광주제일교회 제14대 목사로 부임하기 한 달 전 아들 은성이가 광주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
교회 목사로 나는 ‘예배와 음악의 한국화’를 목회 현장에서 실천했다. 절기 예배가 특별해지고 한국 악기와 가락이 추수감사예배에 등장했다. 광주제일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3·1운동 기념예배와 광복절 기념예배에서 내가 제작한 특별 순서에 의해 드려졌다. “목사님, 한국적인 예배가 너무 좋아요. 예배 시간에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른 경험은 처음입니다.” 교인들은 호기심에서 시작해 감동으로 예배를 마쳤다.
나는 교회의 사명이 나눔과 헌신에 있다고 믿었다. 교회에는 광주고법 부장판사인 맹천호 장로와 변호사 몇 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아 전국 교회를 상대로 무료법률상담실을 개설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법률 상담에는 전국 각지에서 신청자가 몰려들었다. 그 외에도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과 이미용 봉사, 사랑의 도시락 나누기와 급식 제공 등의 나눔 행사를 실시해 교회가 사회의 그늘진 곳을 돌아보도록 했다.
교회는 역사가 100년이 돼오지만 광주의 모교회라는 자부심에 매여 있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 중에는 고쳐야 할 것들이 많았다. 우선 예배 중 특별석이었던 장로석을 없애고, 장로만 대표기도를 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권사와 안수집사까지 그 범위를 확대했다. 당회에 은퇴 장로들까지 참석하는 관행을 바로잡고 시무장로만으로 당회를 운영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고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의 기초는 말씀임을 강조했다. 나는 주일 수요 새벽 설교에 최선을 다하며 말씀으로 교회가 변화되기를 바랐다. 목회 5년 동안 점차 교회가 변화됐고 나 자신도 인간 이해라는 측면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목회하는 동안에 예배당을 신축하는 일도 있었다. 광주 상무대 신도시 종교부지에 5944㎡(1798평) 규모로 교회당을 새로 지었다. 건축을 준비하는 도중 IMF 경제위기가 닥쳤으나 무사히 예배당을 건축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때 건축이라는 것을 처음 해봤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다음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2) 어려운 상황인 대전신학대 총장 맡아 학교 정상화 총력
전임자였던 정행업 총장의 추천
이사회서 전격적 총장으로 결의
재정 어렵고 비전도 안 보였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여
문성모 목사가 2005년 대전신학대 총장 시절 총장실에서 집무하는 모습. 문 목사 제공
광주제일교회에서 새 교회당을 신축하고 입주 예배를 드린 후, 나는 휴식도 취할 겸해 사단법인 두란노가 주관한 목회자 연수 프로그램에 합류해 미국의 대형 교회와 기관을 방문하는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대전신학대 이사회에서 나를 총장으로 청빙하기로 내정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당시 학교 이사 중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미국으로 가기 전 고향인 대전에 가서 정행업 총장님에게 인사차 들렀을 때, 그는 불쑥 자기 후임으로 이 학교 총장을 맡아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문 목사님, 제가 은퇴를 해야 하는데 후임 총장으로 오셔서 이 학교를 맡아주세요.” 정 총장님은 ‘아리랑 신학’ 등의 책을 저술했고 토착화 문제에 관심이 많은 신학자였는데 내가 교회음악과 예배를 한국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며 특별히 관심을 갖고 사랑해 주셨다.
나는 정 총장님에게 정중히 사양하고 자격이 없음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미국을 가야 하니 이사들을 만나면서 청빙을 받기 위한 운동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했다. 정 총장님은 일단 미국에 가라고 하며 여기에서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노라고 했다.
당시 대전신학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각종학교’ 상태에서 정식 인가를 위해 필요한 건축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학교는 돈이 없었고 비전도 없었다. 이사회는 학교 이전을 계획했으나 이것도 쉽지 않았다. 이사회는 당면한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임 총장은 학자적 실력과 더불어 교회 목회를 5년 이상 한 경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정 총장님은 나를 조건에 맞는 적임자로 보았으니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나는 귀국할 때까지 며칠을 고민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어려운 학교를 정상화시키고 건축을 시작할 자신도 없었고 총장이라는 자리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광주제일교회는 신도시 한복판에 있는 유일한 교회였기에 누가 목회해도 잘 될 교회였다. 그러나 대전신학대는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이 학교를 살리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인위적인 노력 없이 순리적으로 주어진 이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학교로 자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나는 대전신학대의 총장이 되었으니, 내가 총장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사회는 2000년 5월에 나를 총장으로 공식 내정했다. 나는 같은 해 8월까지 광주제일교회에서 목회를 이어갔다. 내 사임이 확실해지자 당회는 서기를 통해 나에게 후임자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조건은 정치하지 않고 목회만 잘할 목사님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이었던 백경홍 목사를 추천했고 당회가 이를 받아 후임을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 교회가 5년밖에 목회하지 않은 나에게 후임자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한 것과 백 목사를 후임으로 택한 것은 그만큼 나를 신뢰해 준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3) 학교 건축 위해 기도… 기적처럼 건축 헌금으로 이어져
신학교 건축 위한 특별새벽기도회 선포
학생·교직원들 기도로 주님께 응답 구해
건물 올라가자 감격해 자발적 기도 모임
문성모 목사가 2002년 대전신학대 건축과 모금을 위한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문 목사 제공
나는 2000년 3월 대전신학대 제12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내 나이가 만으로 46세였으니 역대 최연소 총장이 된 것이다. 학교의 당면과제는 건물을 건축하는 것이었는데, 돈은 마련돼 있지 않고 건축은 필수적이었다. 건축을 위해 한 학기 내내 혼자서 기도했다. 나는 정직과 열심 두 가지를 하나님께 서원했다. “하나님, 저는 재주도 없고 경험도 없고 나이도 젊고 테크닉도 없습니다. 그러나 총장으로 일하는 동안 두 가지는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모든 일을 정직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나는 한 학기가 지난 후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는 성경 구절을 크게 써놓고 학생들에게 학교 새벽기도회를 선포했다. 건축을 위한, 총장이 인도하는 신학교 새벽기도회는 전국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참으로 고맙게도 학생들 절반이 새벽기도회에 출석했고, 교직원들도 거의 전원 출석했다. 우리는 모금에 대한 대책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리라 믿고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2002년 8월 29일 본관동 기공 예배를 드리고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됐다. 패배 의식에 젖어 있던 학생들이 용기를 얻었다.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 현실화해 건물이 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학생들이 감격해 자발적으로 기도 모임을 하고 헌금을 하기 시작했는데, 500명 학생의 모금액이 1억원에 달했다. 교직원들도 봉급 일부를 건축헌금으로 바쳤는데 모여진 돈이 3억원이나 됐다.
학교 건축을 위해 기도하면서 일어난 기적과 기도의 응답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신대원 원우회장 방연영 전도사는 결혼반지를 건축헌금으로 바치기도 했고, 결혼한 한 전도사가 신혼여행 경비를 아껴 50만 원을 헌금한 사례도 있었다. 단체로 금식한 헌금을 바친 학년도 있었고, 여름 방학에 아르바이트한 비용을 모아 헌금한 여학생도 있었다. 이는 어느 학교에서도 없는 기적이었다. 당시 건축위원장 박래창 장로(소망교회)는 1억원을 내 앞에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총장님, 이것은 제 돈입니다. 그러나 제가 했다고 하지 마시고, 소망교회가 헌금한 것으로 해주세요.” 개인의 이름은 감추고 교회 헌금으로 처리해 달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다.
총장으로 부임한 후 전국적으로 교회 설교 요청이 잇달았다. 그리고 총장으로 국내외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설교한 국내외 부흥회, 사경회 등을 합치면 약 500회 정도이니 이제는 전문부흥사가 다 된 셈이다.
건축헌금을 위해 개인적으로 사람을 따로 만나 요청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을 아시고, 하나님은 내게 말씀을 전하는 달란트를 주셔서 부흥회와 각종 헌신예배, 수련회, 세미나 등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말씀도 전하고 모금도 하게 하셨다. 학교 건축헌금은 대부분 내가 교회 부흥회나 기타 초청 설교를 통해 교회가 자발적으로 보내온 것이다. 내가 의도하거나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모금을 한 결과가 돼버렸다. 총장으로 학교 건축을 하는 동안 거의 매주 끊임없이 설교 요청이 왔고 건축헌금도 계속됐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4) 대전신학대 신건물 완공… 예배당 한국적 이미지 강조
9층 본관 800석 예배당 갖춘 건물로
한국적인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조성
절기 때마다 한국적인 예배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믿음과 민족의식 심어줘
대전신학대 신축 본관동 건물 전경 모습. 아래 사진은 대전신학대 드림홀 전면으로, 교자상 모양의 강대상과 한지에 붓글씨로 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한국 전통 창살 무늬의 강단 배경이 특징이다. 대전신학대 홈페이지, 문성모 목사 제공
2004년 1월 6일 대덕구청으로부터 준공 승인을 받음으로 대전신학대 신건물이 완공됐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도움의 손길들을 통해 75억원이 소요된 대전신학대 9층 건물과 800석 예배당, 총 9024㎡(2730평)의 건축이 550일 동안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완공되는 축복을 주셨다.
총장인 내 아이디어로 대예배당인 글로리아홀과 소예배당 드림홀의 내부는 한국적인 디자인으로 인테리어 했다. 나는 예배당의 강대상을 비롯한 전면의 장식이 신학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적인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꾸미고 싶었다. 글로리아홀 강대상은 한국의 뒤주를 개량해 생명의 양식이 나오는 강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전면의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베드로의 거꾸로 된 십자가를 장식해 신학생들의 사명감을 고취하고자 했다.
드림홀의 전면은 서예 전문가의 헌납으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한지에 붓글씨로 새겨졌으며, 전통 창살 무늬로 장식된 중앙엔 십자가를 놓았다. 그리고 강대상은 우리나라 교자상을 본떠 만들어서 한국적 이미지를 강조했다.
드디어 2월 18일 제47회 학위수여식이 새로 지어진 본관 건물 글로리아홀에서 거행됐다. 모두들 글로리아홀의 아름답고 품위 있는 분위기에 압도됐다. 지금까지 학교 옆 오정교회를 빌려 졸업식을 하던 과거를 생각하며 새 예배당이 생긴 것에 대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이 많았다.
“오늘 여러분이 졸업식을 거행하는 이 건물은 여러분의 기도 응답으로 지어졌습니다. 이 예배당과 9층의 본관동은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현장입니다. 이 건물은 저와 여러분이 3년 동안 눈물로 기도하고 매달려 이룬 것입니다. 빈손 들고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심에만 의지한 결과물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기도의 용사들이 있었기에 저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큰 믿음의 사람들이 합심해 부르짖었기에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골리앗이 쓰러지듯이, 황무지에 장미꽃이 피는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했던 이 엄청난 기도의 힘과 믿음의 능력을 여러분의 목회 현장과 삶에 항상 재현하며 권세 있는 종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졸업생들에게 이같이 권면했다.
2004년 3월 16일에는 완공된 건물에 대한 준공 감사예배가 글로리아홀에서 드려졌다. 예배 설교를 맡았던 김삼환 명성교회 목사는 학교 건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처음에 대전신대가 70억짜리 건물을 짓는다고 하기에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대전신대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중부지역 교회의 교세가 다른 곳보다 그리 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중부지역 교회들의 저력을 새삼 다시 깨달았습니다. 문성모 총장의 기도 힘과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나는 새 건물 예배당에서 절기 때마다 한국적인 예배를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줬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5) 역사에 묻힌 초대 교장 이자익 목사 업적 세상에 알려
‘대전신학대학교 50년사’ 자료 정리 중 평생 농촌교회 목회자로만 섬긴 이유로
인물로 세워주지 못했던 이 목사 발견 사료관 만들고 추모 및 기념행사 열어
한복을 입은 문성모 목사가 2022년 10월 6일 전북 김제 금산교회에서 열린 ‘제8회 이자익 목회자상 수상식’에서 100년 전 예식대로 남녀 사이에 휘장을 치고 옛날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드리고 있다. 문 목사 제공
2004년 본관동과 예배당 완공 후 나는 ‘대전신학대학교 50년사’를 발행하기로 마음먹고 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초대 교장을 지낸 분이 이자익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 목사님이 어린 시절 고아로 자라 장로교 분열 이전에 총회장을 세 번(13, 33, 34회)이나 역임하셨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자익 목사는 당시 조선 교회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평생 농촌교회 목회자로만 섬겼기 때문에, 아무도 인물로 세워주지 못해 역사에 묻혀버린 것이다.
이자익 목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그때, 나는 교회사를 연구하는 김수진 목사를 만났다. “목사님, 이자익 목사 관련 자료를 학교에 주시면 사료관을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전기를 써 주세요.” 나는 김 목사가 후손에게 받아 간직하고 있던 사진과 책, 육필 자료 등 이자익 목사 소장품을 기증받아 학교 안에 ‘이자익목사기념사료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김수진 목사로 하여금 이자익 목사 전기(傳記)를 쓰도록 했다.
이자익 목사는 70세의 고령에도 1950년 4월 보이열(Elmer T. Boyer) 선교사와 함께 대전고등성경학교를 개교했고, 이를 신학교로 발전시켜 1954년 8월 25일 대전신학교를 개교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나는 이자익 목사의 손자인 대전제일교회 고(故)이규완 장로와 함께 뜻을 모아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를 조직하며 주 사업으로 ‘이자익목회자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이 상의 기금은 후손들과 이사들이 후원하기로 했고, 농촌교회 목회자나 선교사 중에 이자익 목사의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는 하나님의 종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상으로 정했다.
2005년 4월 19일에는 ‘대전신학대학교 초대교장 이자익 목사 기념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2008년 10월 9일에는 ‘이자익 목사 서거 50주기 기념추모예배’를 대전신학대학교 글로리아홀에서 거행했다. 나는 특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재 한국교회는 이자익 목사가 활동했던 시대처럼 난세이고 사회적 혼란과 교회의 분열과 갈등이 고조된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고민은 이자익 목사의 역할을 이어받아야 할 인물의 부재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자다운 목회자가 누구인가. 노회나 총회의 정치에서 법과 원칙을 소신 있게 세워나가는 존경받는 교회 정치인은 누구인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신앙인격자가 누구인가. 우리 시대의 교회는 이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한 채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각 악기마다 뛰어난 연주자는 많은데 이를 모아 하나의 하모니로 조화시킬 수 있는 지휘자가 없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마치 고고학자가 보물을 발굴하듯이, 수십 년간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진 이자익 목사를 발견해 새롭게 조명하고 세상에 알린 것은 나에게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는 학교의 건물을 완공한 것 이상의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이자익 목사가 세상에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6) “건축 잘하는 총장 필요해요” 서울장신대 총장으로 청빙
총장 연임됐지만 개정사학법 바뀌며
2년 뒤 학교에서 물러나야 할 상황
거취 문제로 기도 중 서울장신대서
민경배 총장 후임으로 올 것을 제안
문성모 목사가 2010년 11월 경기도 광주 서울장신대 총장실에서 집무를 보고 있다. 문 목사 제공
2004년 나는 대전신학대 13대 총장에 연임됐다. 건축을 마치고 소진된 건강을 추스르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5년 12월 국회에서 개정사학법이 통과됐다. 이 법의 독소조항 중 하나는, 사립대학 총장은 1회에 한해 중임할 수 있고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법대로 하면 2년 뒤에는 내가 학교를 물러나야 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기도가 시작됐다.
나는 자리를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거나 정치를 할 줄 몰랐고, 또 그럴 마음도 없었다. 단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가장 적합한 곳에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만 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로 살았고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의 진로 문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노력한다고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참으로 놀라웠다. 내가 다음 거취 문제로 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 뒤인 2006년 1월 말에 갑자기 곽선희 목사님께서 전화해 만나자고 하셨다. 그때 곽 목사님은 서울장신대 이사장이었다. 서울의 모 호텔에서 조찬을 함께 하면서 곽 목사님은 나에게 서울장신대 총장으로 올 것을 제안하셨다. “문 총장, 민경배 총장님이 정년으로 물러나는데 서울장신대 총장으로 오세요.” 후임 총장으로 나를 동문회가 추천하고 자신도 흔쾌히 허락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서울장신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누가 이사로 있는지도 몰랐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곽 목사님과 나는 대전에서 건축할 때 건축헌금을 부탁하려고 몇 번 만나 뵌 것이 전부였지 그 이상 친분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런데 총장으로 오라는 청빙 제의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고 기도의 응답으로 느껴졌다.
나는 목사님께 서울에도 사람이 많은데 왜 나를 오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곽 목사님은 웃으면서 “문 총장이 대전에서 건축을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우리 학교도 건축을 잘하는 총장이 필요해요. 와서 집 지으라고 부르는 거야”라고 해 한바탕 웃었다.
나는 대전신학대 총장 임기를 아직 마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당시 이사장인 류철랑 목사님을 만나 이 일에 대해 상의했다. 서울장신대의 총장 제안은 있지만 대전의 임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류 목사님의 의견대로 거취를 정하겠노라고 했다. 류 목사님은 여러 상황을 고려한 후에 “섭섭하지만, 문 총장의 앞길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가라”고 허락했다. 2년 뒤에 대전신학대를 떠나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정성을 쏟아부어 세운 학교 건물을 바라보면서 이 학교와 작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학교이니 그다음의 역사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기도했다. 2006년 3월 24일 나는 이임 예배를 드리고 대전신학대의 모든 이사, 동문, 교수, 직원, 학생들과 눈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내가 총장으로 부임하던 2006년 봄, 서울장신대의 당면과제는 역시 건축이었다. 또 다른 건축의 과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예배당, 기숙사, 종합관을 포함하는 150억원 공사였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7) “예배당 먼저” 모인 공사비 없으나 믿음으로 짓자
한 학기 새벽기도회 후 건축 들어갔는데
설계부터 예배당 빠져있어 이사회 설득
경기도 광주에 있는 서울장신대 해성홀 외부가 예수의 보혈을 상징하는 홍색과 황금색, 백색으로 어우러져 있다. 아래 사진은 해성홀 내부 모습. 주기도문이 새겨진 병풍과 격자 무늬 십자가, 뒤주를 개량한 강대상이 놓여 있다. 문성모 목사 제공
서울장신대는 대전신학대와 같은 1954년에 설립됐으며 2004년에 개교 5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건축 계획을 수립하고 건축 허가를 받았으나 막대한 공사비 부담으로 인해 착공이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같은 시기 대전신학대는 건축을 완료했지만 서울장신대는 아직 공사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대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생활관과 종합관 건축에 드는 예상 공사비는 100억원이었는데 모아진 돈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 학기 새벽기도회 후에 나는 믿음으로 건축에 들어갔다.
학교의 생활관과 종합관 건축이 시작될 무렵에 나는 또 하나의 필수적인 건물이 설계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전교생이 함께 예배드릴 예배당이 없었다. 학교에 예배당이 꼭 필요한데 건축에 예배당 설계는 빠져 있었다. 학교는 우선 생활관이 급했고, 예배당은 나중 일이라고 생각해 아예 설계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학교 이사회를 설득시켜 예배당 건축을 함께 하자고 했다. 예배당을 먼저 짓고 싶었다. 하나님의 전을 먼저 지어야 주님이 기뻐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20억원이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우선 조감도만 그려놓고 기도했다. “하나님, 누구를 통해서도 좋으니 20억원이 마련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전이 건축돼 영광 돌리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응답하셨다. 제주도에 계신 김수웅 장로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20억원을 성전 건축헌금으로 쾌척하는 또 한 번의 기적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때까지 김 장로를 잘 몰랐다. 서울장신대 동문인 전만영 목사의 소개로 제주도 서귀포에 사는 김 장로를 만나러 갔는데, 만나는 순간 그분과 나는 서로 영적인 코드가 맞는 느낌이 들었고 금세 친해졌다. 장로님과의 대화는 자정을 넘기며 이어졌다.
“장로님 학교 예배당 건축을 위해 20억원을 헌금할 사람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장로님도 함께 기도해 주세요.” 워낙 큰돈이라 기도만 부탁을 드렸다. 다음날 김 장로님은 헤어지면서 “총장님 말씀 듣고 제가 오늘 새벽부터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왔는데, 얼마 후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헌금을 하라고 강권하시는 것 같아서 20억원을 헌금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된 사건이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당시에 김 장로는 기도 수첩에 빼곡히 자신의 기도 제목을 적어 놓고 살았는데 옛날 기도 제목 중에 죽기 전에 예배당 한 번 짓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이 참으로 놀랍게 느껴졌다.
나중에 건축 자재비가 올라 돈이 더 들었지만, 예배당 이름은 김 장로의 아호인 해성(海聖)에서 가져와 ‘해성홀’로 했다. 1000석의 이 홀은 예배당과 콘서트홀로 사용 중이며 학교의 가장 중앙에 위치해 영적인 구심체로 역할을 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8) 서울장신대 최고 공로자 강신명 목사 새롭게 조명하다
24년 동안 교장과 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새문안교회서 24년 목회해 온 강 목사
탄생 100주년 맞아 강신명홀 건립 추진
문성모 목사가 2007년 4월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부흥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문 목사 제공
학교 건축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인 2009년에 학교 50년 역사의 최고 공로자이신 강신명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강 목사는 24년 동안이나 교장과 이사장으로 봉사하시면서 어려운 시기에 학교를 지켜주신 고마운 분이었다. 새문안교회도 24년을 목회하시고, 총회장도 역임하신 교계의 큰 어른이시다.
나는 6억원이 소요되는 강신명홀 건립을 위해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님을 만나 요청했다. 강 목사님을 기념하는 일은 새문안교회가 비용을 도와야 의미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6억원 헌금을 부탁했다. 이 목사님은 교회의 여러 사정상 어렵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니 함께 기도해 보자고 하셨다.
이 목사님은 방법을 연구한 끝에 내게 부흥회를 인도해 줄 것을 제안하셨다. “우리 교회가 봄, 가을로 부흥회를 하는데 문 총장님이 한번 강사로 오세요. 말씀으로 은혜받고 교인들과 친해진 다음에 당회를 열어 결정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리하여 나는 2007년 봄 새문안교회 부흥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 설교했고 피차에 은혜를 나누는 감동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회 강사인 나에게 보낸 안내문 중에는 “아멘 소리를 의도적으로 유발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부탁의 문구가 있었다. 나는 부흥회 분위기가 매우 경직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다. 한편 새문안교회 교인들은 대학 총장인 내가 설교를 강의하듯 하면 은혜를 못 받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의 설교가 별로 부흥회와는 맞지 않고 재미가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부흥회가 시작되니 새문안교회 같은 교회가 없었다. 은혜의 열기가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분위기에서 교인들이 말씀을 사모하며 받아들였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 부흥회 기간에 ‘아멘’ 소리도 가장 많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교인들에게나 강사인 나에게나 최고의 부흥회가 됐다.
부흥회가 끝난 후 당회는 3억원의 헌금을 결의했고, 강신명홀 건축이 진행됐다. 나머지 부족한 금액은 강신명 목사를 기억하는 교인 300명에게 100만원씩 헌금을 요청해 충당했다. 그 결과 200석 규모의 강신명홀과 로비에 마련된 사료관이 완성됐다. 강신명 목사의 전기도 출판됐다. 2009년 4월 16일 개교기념식에서는 강 목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순서와 함께 강신명홀 현판식, 전기 발행, 사료관 개관을 축하하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나는 대전신학대에서 이자익 목사를 발견해 세상에 알린 것과 서울장신대에서 강신명 목사를 새롭게 조명해 기념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사람을 세우고 역사적 인물을 바로 조명해 세상에 알리는 일은 건물을 건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15일, 총 150억원이 투입된 약 8377㎡(2534평) 규모의 모든 건축이 완료돼 해성홀 강신명홀 생활관 종합관을 포함한 개교 50주년 기념 건물 전체 준공 감사 예배를 드렸다. 같은 해, 나는 제4대 총장으로 연임됐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19) 목회 중에도 작곡가로서의 지분 챙겨 주신 하나님
독일 유학 중 WARC 대회 행사곡 등 작곡
‘문성모 성가의 밤’엔 국악 찬송 성가 발표
문성모 목사가 2007년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를 위해 제작한 대회가 ‘교회를 새롭게 민족에 희망을’ 악보. 문 목사 제공
나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독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해 교회 목회와 학교 총장으로 사역하며 바쁘고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작곡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곡가로서의 나의 지분도 확실하게 챙겨주셨다.
독일 유학 중이던 1989년 나에게 세계적인 행사를 위한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 그해 8월 15일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서울 총회가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됐는데, 이 대회 실무를 총괄했던 박성원 목사가 내게 ‘대회가’(大會歌)와 개회 예배 입례송을 작곡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로서는 이 세계적인 대회를 위해 대회가를 작곡하는 것이 큰 영광으로 생각됐다.
광주제일교회에서 목회하던 1999년 5월 25일에는 지휘자 김명엽 교수님의 배려로 바하합창단이 연주하는 ‘문성모 성가의 밤’을 서울 안동교회에서 개최했다. 당시만 해도 국악 찬송이나 성가곡 발표회가 특별한 일이었고, 교회 무대에 장구와 가야금 대금 무용을 동반한 작품이 연주되는 일도 없었다. 따라서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이 연주회는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교계 언론은 물론, 국내 유력 일간지들의 취재와 인터뷰가 이어졌다.
대전신학대 총장으로 사역하던 2000년 12월 16일에는 임평용 선생이 지휘하는 ‘KBS국악관현악단’의 성탄 음악회에서 합창곡 ‘하나님을 믿는 자’를 국악기로 편곡해 발표했다. 이 음악회는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이래 최초의 성탄 축하 연주였다.
또한 한국 교계의 굵직한 행사를 위한 작곡자에 내가 위촉됐다. 199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가(總會歌) ‘장로교회의 노래’를 작곡했다. 총회창립 80주년 기념행사위원회가 위촉한 것이었다. 광나루문인회가 작사한 가사에 붙인 이 곡은 1993년 9월 20일 제78회 총회(총회장 김창인)에서 총회가로 채택됐다. 21일 폐회 예배에서 처음으로 전체 총대가 불렀다.
2003년에는 순복음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창립 50주년 희년 대회가로 ‘전도곡’을 작곡했다. 이는 이 대회를 총괄했던 안준배 목사의 장편 시에 서도소리 민요풍의 곡을 붙여서 만든 것이다. 전도곡은 5월 22일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서도소리 인간문화재 김광숙과 그 제자들에 의해 초연됐다.
2007년에는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맞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는데, 대회를 총괄했던 조성기 목사가 내게 대회가 작곡을 요청했다. 기념대회준비위원회가 작사한 가사에 ‘교회를 새롭게 민족에 희망을’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대회가는 7월 8일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바리톤 최현수가 독창하고, 전체 10만 명의 군중이 함께 노래했다. 그 감격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한국 교회사에 남을 총회가, 대회가, 기념가를 작곡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덕분에 나는 작곡가로서의 감각을 잃지 않고 찬송가를 계속 쓸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놀라운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20) 작곡 달란트 주신 하나님… 찬송가 작곡으로 은혜 보답
목사 된 후부턴 틈틈이 찬송가만 작곡
독일 유학 중 ‘우리가락찬송가 1집’ 내고
22년 만에 두 번째 우리가락 찬송집 출판
문성모 목사가 2011년 서울 중구 영락교회에서 출판감사예배를 드리고 있다. 문 목사 제공
나는 작곡가로서 서울예고와 서울음대 시절 비교적 많은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그 후 여러 곳에서 발표됐다. 1979년 11월 13일,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문성모 교회음악작곡발표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81년 11월 6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제23회 서울음대 국악과 정기연주회의 위촉작곡가로 선정돼 작품 ‘거문고 가야고 젓대를 위한 변주적 시나위, 살로메’를 발표했다. 그해 12월 26일에는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제4회 신국악예술인회 주최 창작국악발표회의 위촉작곡가로 작품 ‘거문고와 장고를 위한 부활(復活)’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동아 콩쿠르 입상작이었다.
그러나 83년 목사가 된 후부터는 작곡에 전념할 수 없었다. 틈나는 대로 찬송가만 작곡했다. 89년 잠시 귀국하면서 독일 유학 중에 작곡한 100곡의 찬송가를 모아 8월 25일 ‘우리가락찬송가 제1집, 나의 힘이 되신 주’를 출판했다. 그리고 9월 25일에는 그동안 작곡했던 국악기를 위한 작품을 모아 ‘한국악기를 위한 교회음악 제1집, 부활(復活)’을 출판했다. 한국국악선교회장 황대익 목사의 후원으로 책을 출판하게 됐으니 감사한 일이다.
독일에서 귀국 후에는 황 목사의 국악선교회를 도와 음반 제작을 위한 국악 찬송가를 작곡했다. 이후 교회 목회와 학교 총장으로서 사역하면서도 틈틈이 찬송가 작곡에 열중했다. 대전신학대 총장 시절 공주교대 교수 민미란 선생이 창단한 가야금 연주단 청흥의 정기연주회를 위한 가야금 곡들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지만, 나는 시간이 나면 주로 찬송가를 작곡하면서 살았다. 찬송가 외의 작품을 쓸 시간도 없었지만 관심도 점점 멀어졌다. 나는 찬송가를 쓰면서 개신교 공인 찬송가 뒤에 붙어 있는 교독문 중 시편 66개의 가사에 멜로디를 붙여 교창송(Antiphon)으로 만들었다. 시편을 노래로 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인데 한국에는 시편 찬송이 없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우리가락찬송가와 시편교독송’ 표지.
이렇게 2011년 10월 28일 두 번째 찬송집인 ‘문성모 찬송가 330곡집-우리가락찬송가와 시편교독송’이 출판됐다. 첫 찬송집을 펴낸 지 22년 만이니 만시지탄의 감회와 함께 찬송가 작곡을 게을렀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이 찬송집의 출판 감사예배는 그해 11월 8일 영락교회 선교관에서 거행됐다.
나는 이 찬송집에 들어 있는 가사를 모두 영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은 고 김용복 박사의 사모 김매련 선생에게 부탁했다. 이 ‘우리가락 찬송가’ 영문판은 2013년 10월 25일 ‘Our Melodies, Our Hymns’라는 이름으로 출판됐다. 이 영문판을 만든 이유는 혹시라도 한국 찬송가를 필요로 하는 외국 교회가 있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고, 적극적으로 한국 찬송가를 세계 교회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때마침 그해 10월 30일부터 열흘 동안 개최된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위해 유용한 자료가 됐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대회 중 내가 작곡한 찬송가 ‘혼자 소리로는 할 수 없겠네’와 ‘예수님은 누구신가’ 등이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돼 예배 중에 불렸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21) 총장 은퇴하며 쉼이 필요할 때, 목회로 이끄신 하나님
너무 바빠서 가정과 건강 작곡에 소홀
쉬면서 학자와 작곡가 활동 꿈꾸다
강남제일교회 목사로 청빙 받고 승낙
위임식 후 한국적인 예배당으로 꾸며
문성모 목사가 서울 강남구 강남제일교회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다. 뒤주를 개량해 제작한 강대상과 십자가, 옛 주기도문으로 장식된 벽면이 눈에 띈다. 문 목사 제공
2014년 2월에 서울장신대 총장 8년의 임기를 마쳤다. 지금까지 쉼 없이 일했으니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려고 마음먹었다. 나는 그다음 거취에 대해 기도하지 않았다. 총장으로서의 14년의 생활이 너무 바빠 나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있었다. 가정에도 충실하지 못했고 찬송가 작곡하는 일도 집중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건강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대전신학대 건축을 마친 후에 이유 없이 체중이 5㎏이나 쭉 빠졌다가 3㎏ 정도 회복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서울장신대 건축 후에 다시 체중이 3㎏ 빠지고는 회복이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으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의사 말로는 과로와 스트레스에서 온 것이니 무조건 쉬라는 것이었다.
몸도 쉬고 마음의 여유도 챙기면서 이제는 그동안 소극적으로밖에 활동할 수 없었던 학자와 작곡가로서의 활동에 매진하고 싶었다. 다만 하나님이 다시 무슨 사역을 원하신다면 순종하겠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나이 60세, 아직 쉴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문 목사님, 제가 은퇴해야 하는데 제 후임으로 저희 교회를 좀 맡아주세요.” 당시 개척해 목회하고 은퇴를 앞둔 이광수 목사님이 갑작스럽게 담임목사 청빙 제안을 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 있던 나는 솔직히 이 제안이 내키지 않았고, 교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이제는 조금 쉬면서 제 일에 집중하려 합니다. 2주 동안 기도해 보겠습니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제안이 찾아온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느껴졌다. 하나님께서 내 마지막 사역을 목회로 이끄시는 듯했다.
교회를 목회하기로 정한 지 한 달 뒤에 두 대학에서 총장으로 오라는 제의가 있었다. 두 학교 모두 좋은 대학이었고, 총장으로 사는 삶이 익숙한지라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기도하는 중에 교회가 마음에 걸렸다. 작은 교회지만, 목회하기로 이미 결심한 이상 그 약속을 저버리고 학교로 가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교회의 요청에 따라 2015년 7월 5일 담임목사로 부임해 맥추감사주일에 첫 설교를 했다. 그러나 교회는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임기 중 세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첫째는 아프리카 콩고에 설립한 대학 운영을 놓고 발생한, 전임 목사와 교인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무려 46억 원에 달하는 교회 부채를 상환하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헌당식을 하는 것이었다. 모두 쉽지 않은 과제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해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기도한 대로 응답하셨다.
위임식 후 나는 강남제일교회 예배당을 한국적인 예배와 음악이 숨 쉬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뒤주를 변형시킨 강대상을 새로 제작해 설교단을 만들고, 전면에 주기도문을 새긴 바탕에 격자무늬 십자가를 설치했다. 헌금함을 한국식 디자인으로 바꾸고, 성찬식 집기는 도자기로 교체했다. 설교 가운은 한복 두루마기를 개량해 입고, 후드는 색동을 비롯한 한국 문화에 맞는 색으로 제작했다. 삼일절, 광복절 등의 예배에는 징과 태극기와 애국가가 사용됐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22) 교회 모든 예배 설교 직접 맡아… 이웃 사랑 나눔도
예배 철저히 준비 ‘로마서 강해’ 완결
절기·기념일 예배자료집도 직접 제작
노인·아기 학교 개설, 도시락 나눔 등
문성모 목사가 2019년 서울 강남구 강남제일교회에서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다. 교인들은 손에 태극기를 든 채 애국가를 불렀다. 문 목사 제공
나는 교회가 말씀 위주로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랐다. 주일 예배 설교뿐만 아니라 수요 예배와 새벽기도회 설교를 모두 내가 담당했다. 감사하게도 목회 마지막에 ‘로마서 강해’를 완결할 수 있었다. 로마서 강해는 모든 설교자의 꿈이다. 제대로 된 로마서 강해를 위해서는 준비 과정이 너무 어렵고 힘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마칠 수 있었다.
나의 로마서 강해는 바울의 사상을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양면에서 해석하고 종합하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의 설교집을 참고하지는 않았지만 칼뱅, 크리소스톰, 그리고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깊이 연구했다. 또한 바울에게 영향을 준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목회를 마무리하며 그동안 내가 직접 제작한 절기 예배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성탄절 예배, 송구영신 예배, 삼일절 기념 예배, 종려주일 예배, 고난주간 예배(성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예배), 부활절 예배, 6·25전쟁 기념 예배, 광복절 감사예배, 맥추감사 예배, 성령강림주일 예배, 추수감사 예배, 종교개혁 기념 예배 등이 포함됐다.
문성모 목사가 제작한 '삼일운동100주년 기념 예배 자료집' 표지. 문 목사 제공
특히 2019년에는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을 제작해 전국 목회자들을 초청한 강습회를 열었고, 4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2020년에는 ‘6·25전쟁 7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을 제작해 강습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국 교회가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해 사용하게 됐다. 2022년에는 ‘광복 77주년 기념 예배자료집’을 제작해, 역시 전국 교회에서 내려받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이를 통해 ‘예배의 한국화’라는 목표를 한국교회에 제시하고자 했다.
나는 교회의 인력을 이용해 ‘강남노아대학’을 개설하고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여기에는 교인이나 비교인을 가리지 않고 참여하도록 했다. 또한 아기 학교를 개설하기도 하고, 홀로 사는 노인 등 몸이 불편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위해 ‘사랑의 도시락 나눔’도 실시했다.
문화 사역으로 예음아카데미를 개설해 음악과 미술 등의 실기 교육을 실시했는데 교인과 지역주민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었다. 또한 예음홀과 예음도서관을 만들었다. 예음홀에서는 나의 신작 찬송가 발표회와 학술발표회, 음악회 등을 열었고, 예음도서관에는 1000여 권의 책을 비치해 아동, 청소년, 어른들의 독서 공간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프로그램들이 코로나 사태로 안타깝게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등록한 사람도 있으니 감사한 일이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교회 주변 동네 사람들과 유지들이 교회의 우군이 되었고 행사 때 함께 돕고 협력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23) 학자로서 연구한 자료 출판… 설교 예배 음악 이론 정리
총장·목회자로 학자 역량 제한됐지만
월간목회·기독교사상 연재 원고 출판
예배음악 한국화 강조한 이론도 정리
문성모 목사가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으로서 2013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원두우 신학관에서 설교하고 있다. 문 목사 제공
나는 학교 총장과 교회 목회자로 지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많이 제한받았다. 학자는 글로 말하는 사람인데 제대로 된 책 한 권이나 논문 한 편 쓰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총 10개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강의하고 원고를 쓴 것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일이 필요했는데, 마침 월간목회에서 ‘한국교회 설교자 연구’라는 주제로 연재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처음에는 1년간 쓰기로 계약한 것이 연장돼 3년을 연재하게 됐다. 이것은 2012년 두란노에서 ‘한국교회 설교자 33인에게 배우는 설교’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또한 곽선희 목사의 은퇴를 기념하며 ‘곽선희 목사에게 배우는 설교’라는 책을 써서 두란노에서 출판했다. 이 두 책으로 나의 설교에 대한 모든 주장이 정리된 셈이다.
내가 지금까지 예배음악의 한국화를 강조한 이론과 주장을 정리할 기회도 주어졌다. 기독교서회 서진한 사장으로부터 3년간 월간지 기독교사상에 ‘한국교회 예배와 음악 다시 보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해 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이 연재된 논문들은 2019년에 ‘한국교회 예배와 음악 다시보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기독교서회가 발행했다. 이 밖에도 나는 가르치고 연구한 것을 정리해 출판하는 일을 계속했고 총 30권이 넘는 저서를 냈다.
책 '한국교회 예배와 음악 다시보기' 표지. 문 목사 제공
총장으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학회나 총장들의 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각종 모임에서 회장으로 추대돼 활동했다. 2003년 10월에는 한국실천신학회 회장으로 선출됐고 2005년 10월, 국내 최대 신학 교수 모임인 한국기독교학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2010년 8월에는 대교협(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산하 한국신학대학총장협의회 회장, 신학대학총장 조찬기도회 회장, 2012년 3월에는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회장, 같은 해 한국복음주의신학대학총장협의회 부회장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음악인들의 모임에도 참여하게 됐는데, 2018년부터 2년 동안 한국교회음악작곡가협회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또한 2022년부터 현재까지 작곡가들 모임인 한국국민악회 회장으로서 매년 신작 발표회를 주관하고 있다. 같은 해 평론가 모임인 한국음악평론가협회의 공동이사장, 교회음악인 최대 단체인 한국교회음악협회의 명예이사로 추대됐다. 그밖에 오래전인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예장통합 총회 파송 재단법인 찬송가공회 음악전문위원으로 위촉돼 현행 찬송가 개편 작업에 참여했으며, 2012년부터 4년간 찬송가공회 이사로 활동했다.
나는 시인으로도 등단해 지금까지 4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2016년에는 광나루문인회 회장에 선출돼 2년간 활동했고, 시 분야에서 몇 개의 상을 받았다. 2013년 월간 창조문예 신인상, 2014년엔 제19회 ‘광나루 문학상’을 받았다. 또한 캘리그라피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5년 임정수 교수님을 만나 배우기 시작해 지금까지 인사동과 예술의 전당 등에서 20회 넘는 공동전시회를 열었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24) 목회 내려놓고 은퇴… ‘찬송가 1000곡 봉헌’ 주님께 서원
목사 안수 40주년에 맞춰 조기 은퇴
찬송가는 신앙 고백이자 교리의 표현
한국교회사와 역사 담긴 곡 완성 목표
권태진 목사와 한국찬송가개발원 개원
문성모(오른쪽) 목사가 2022년 2월 경기도 군포제일교회에서 권태진 목사와 함께 찬송가 봉헌예배를 드리는 모습. 문 목사 제공
나는 2023년 3월 12일, 8년간의 목회를 내려놓고 은퇴하였다. 비록 70세가 되기 1년 전이었지만 목사 안수 40주년에 맞추어 조기 은퇴를 결심했다. 은퇴에 앞서 2022년 11월 20일 교회에서 마련해 준 ‘문성모 목사 성역 40주년 기념 성가 작곡 발표회’가 강남제일교회 글로리아홀에서 열렸다. 교회 성가대와 서울바하합창단이 출연해 내가 작곡한 성가 합창곡과 독창곡을 연주하고, 찬송가를 회중과 함께 불렀다. 국민일보를 비롯한 여러 교계 언론이 이 발표회를 취재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는 은퇴식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40년이 지나 오늘 은퇴합니다. 독일 유학 10년, 총장으로 14년, 목회자로 13년을 보내왔습니다. 은퇴 후에는 작곡가로서 찬송가 1000곡을 써서 하나님께 봉헌하겠습니다.” 이날 은퇴식에서는 은퇴기념문집 ‘신학으로 묻고 음악으로 답하다’와 ‘문성모 성가작곡집’이 발행됐다.
나는 2020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후대에 남겨지는 것은 한국교회의 교인 수나 교회의 규모가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어떤 문화를 남겼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후대에 물려줄 문화를 남기겠다는 사명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찬송가 1000곡을 써서 봉헌하는 것입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제1차 신작 찬송가 봉헌예배’ 표지.
찬송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신앙 고백이자 교리의 표현이며 역사의식의 보고(寶庫)다. 찬송가에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와 교리와 역사가 담겨 있어야 한다. 내가 찬송가 1000곡을 만들고자 함은 단순히 숫자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한국교회 140년의 역사가 담긴 찬송가를 완성하고 싶은 것이다. 5음 음계를 써야 한국 찬송가가 아니다. 한국교회사가 반영돼야 하며, 길선주 목사로부터 한경직 목사에 이르기까지 교회 지도자들의 시가 찬송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또한 삼일운동, 광복절, 6·25전쟁, 1907년 대부흥운동 등의 역사가 찬송가로 불릴 때 진정한 한국 찬송가가 완성된다. 이것을 독일교회 찬송가에서 배웠다. 독일 찬송가는 그 자체로 독일 교회사이며 독일 민족사인 것을 보고 부러웠다.
찬송가 작곡을 위해서는 좋은 가사를 써 줄 시인이 필요했고, 이를 문화적 가치로 인식하고 지원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나는 기도하던 중 군포제일교회 권태진 목사님을 찾아가 이 일을 의논했고, 한국찬송가개발원을 개원하였다. 우선 권 목사님의 가사에 곡을 붙여 찬송가를 만들어 여러 차례 신작찬송가 봉헌예배를 드렸다. 이것을 묶어 ‘권태진 문성모 신작찬송가 100곡집’이 곧 나올 예정이다.
현재 내가 작곡한 찬송가 중 세 곡(48, 418, 556장)이 현행 찬송가에 수록됐다. 그 밖에 ‘대한성공회 성가’에 2곡, 미국 장로교 한영찬송가(Come Let Us Worship)에 2곡, 미국장로교 찬송가에 1곡, 일본복음교단 찬송가에 1곡 등 여러 외국 찬송가에도 수록돼 있다.
현재 400곡 가까이 찬송가를 썼다. 한 주에 한 곡씩을 목표로 나머지 600여 곡을 쓰려면 약 15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리라 믿는다.
***[역경의 열매] 문성모 (25·끝)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 은혜”
총장 목회자 설교자로 섬긴 귀한 사역
목사 인생 40년 동안 성전 건축 세 번
찬송가 작곡가로 큰 보람과 사명 느껴
문성모(왼쪽 앞줄 다섯 번째) 목사가 2016년 경기도 광주 서울장신대 해성홀에서 열린 훈장 전수식에서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문 목사 제공
연재를 마치며 나의 삶을 뒤돌아본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어진 삶이었다. 나는 목사 안수를 받고 바로 독일로 유학해 10년을 공부하며 살았다. 그리고 귀국해 30년을 총장과 목회자라는 직함으로 사역했다. 귀국해서 호남신학대 교수로 2년을 보내고, 광주제일교회 목회 5년, 대전신학대 총장 6년, 서울장신대 총장 8년, 그리고 강남제일교회 목회 8년의 사역이 이어졌다.
30년의 사역 기간 중 가장 길고 중요한 황금기에 나는 총장으로 살았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나를 ‘문 총장’으로 부른다. 내 사역의 가운데 토막에 총장으로 살았기에 사람들의 뇌리에 총장이라는 직함이 더 강하게 각인돼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나는 목회자로 살았다. 내 목회자로서의 사역 기간은 초기의 광주제일교회와 마지막 강남제일교회를 합치면 13년이 된다. 그리고 그사이에 모(母)교회인 숭덕교회의 설교 목사로 5년을 담임목사처럼 지냈으니, 목회자로서의 사역에도 긴 시간을 보냈다. 목회는 나의 삶에서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였다. 또한 총장 시절에도 학교 새벽기도회를 쉬지 않았고, 채플 설교의 많은 부분을 내가 맡았다. 나는 학교를 경영함에 있어서 행정 책임자로서보다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내 이미지를 굳히며 사역했다.
나는 설교자로 살았다. 교회를 목회할 때보다도 학교 총장으로 사역할 때 오히려 설교를 더 많이 했다. 내가 기획하고 부탁하지 않았으나 계속 설교 요청이 이어졌다. 어떤 날은 하루에 장소를 옮겨가며 4번을 설교한 적도 있고, 연속되는 부흥회 사경회 수련회의 강사로 초빙돼 설교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의 정체성은 설교자이다.
나는 목사 인생 40년 동안에 성전을 세 번이나 건축했다. 사람이 살면서 한 번의 성전 건축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하나님은 나에게 세 번이나 건축을 허락하셨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는 광주제일교회 성전 건축이고, 두 번째는 대전신학대학교 예배당(글로리아홀) 건축, 그리고 세 번째는 서울장신대학교 예배당(해성홀) 건축이다.
나는 작곡가로 살았다. 특히 찬송가를 400곡 가까이 작곡하고 시편송을 66곡 완성한 것은 나와 같은 세대의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로 보람과 사명을 느낀다. 앞으로 찬송가 1000곡 이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는 시인으로 살았고, 캘리그리피 예술 작가로 작품을 만들며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귀한 선물로 감사한다. 나는 건강해서 한 번도 정해진 설교를 거르거나 사역을 중단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성인병도 없고 병원 신세 한 번도 진 적 없이 건강하게 산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수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장한동문상(신학자 부문), 한국음악상(본상), 서울음악대상 등 상도 많이 받았으니 과분한 축복이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으로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