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외 1편
박수서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
한때 세 개였던 재킷 단추도 한 개, 두 개로 돌고 돌지
가운데 뻥 뚫린 뒷날개는 양쪽이 잘리기도 막아 두기도 했지
요즘 바짓단은 복숭아뼈가 보일 듯 입는 게 유행이라
생각 없이 바지 기장을 줄여 놓고 한 계절 후회했지
자꾸 심형래 아저씨가 입었던 코미디 프로 바지가 떠올라
어색하고 어디 대놓고 나다니기 창피했지
무릇 유행이란 꽃잎 같은 청춘에게나 어울리는 문화,
찌들고 묵고 홍어처럼 푹 익어 가는 동안
여태 유행에 맞는 시 한 편 못 쓴 나에게는
역시나 무리
평생 쓰는 시도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마음의 치수조차 제대로 재거나 자르지 못하는데
누구에게도 딱 맞는 따듯한 한 벌이 되지 못했는데
짧고 벌어진 다리로 무슨 유행을,
무릎과 무릎 사이로 탱크가 지나가고
바짓바람에 종아리가 까이고
가방이 있습니다
빈 가방이라도 들고 다녀야 마음이 편한 사내는
한 번도 가방이 비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어느 날 사내의 손이 가방끈을 쥐는 순간
어깨 한 점 가방 속으로 스르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떠나려 하는 마음까지 담아 버렸다
그리하여 가방이 사내를 들고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가방에 담긴 사내는 햇빛 쨍쨍한 날 우산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산살을 활처럼 당겼다 폈다
뚫리지 않는 가죽 과녁에 이마를 밀고 졸기가 일쑤,
밖을 나왔으나 어둡고 좁은 세상에 갇힌 사내는
이빨이 깨지도록 지퍼 날을 끊으려 애썼지만 다 헛일
몇 날 며칠 어둠의 공황에 기진맥진하다
환영처럼 더는 부러뜨릴 삶도 동나버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외쳤지만
세상은 강철, 분명 들어왔으면 나가는 방법도 있는 법
밤잠을 못 이루다 이제 틀렸나 싶어 자포자기하고
쥐며느리처럼 작게 한마디 했더니
글쎄, 천국처럼 지퍼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 가방이 있습니다
박수서
2003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 날마다 날마다 생일 내 심장에 선인장 꽃이 피어서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