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태어나서 자라고 발전하며 성숙되고 노쇠하며 죽게 된다. 가깝게 부모, 친지들의 죽음으로 가는 모습도 보고, 친구, 주변 사람들의 죽음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언젠가는 죽어 가는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죽음을 맞이하는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슬프고,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정말 이 세상을 떠나간 후 그들을 만나는 그 짧은 순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순간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한다. 다정하게 지내던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이 끝나고 영원한 이별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임종의 생리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뇌를 목격하면 죽음의 원인에는 상관없이 죽음의 무서움에 몸서리치게 될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을수록 슬픔도 깊어진다. 그리고 인간이란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고 저승에 가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므로 죽음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이별 ․비탄 ․공포 ․불안 등은 살아남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죽음의 현상에 대해서 갖는 체험이지 결코 죽은 사람 자신의 체험 그 자체는 아니다. 이런 뜻에서 삶에 있어서 죽음은 여전히 완전한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언제까지나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강력한 집착이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오는 자는 반드시 떠나게 마련인 것이다. 언젠가는 자기도 죽는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역시 불안 ․공포 ․슬픔에 찬 사실로서 죽음을 대하는 것이 인간이다.
비디오 속의 사람은 정말 행복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기보다는 그냥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가 나이가 들면 죽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산다. 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우리는 정말 죽음에 대해 너무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있다. 정말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 모르는 것이다. 교통사고일수도 있고, 어떤 살인자에 표적이 될 수도 있고, 정말 많은 죽음의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우리를 피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실 우리가 뉴스만 보고 있어도 정말 많은 사망소식을 접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식에 대해 잠시 ‘안됐다’라는 생각만 들뿐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그 한낮 뉴스거리가 정말 큰 아픔이 되는데도 말이다.
사람이 죽음에 대해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대해 준비할 수 있다면 인생을 정리할 수도 있고, 또 남은 사람들의 아픔도 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내가 어릴 적에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를 하며 놀다가 파도에 밀려서 죽을 뻔 했던 적이 있었는데, 죽음의 바로 문턱에 있는 나를 아버지께서 구해주셨다. 물을 양껏 마시고 파도에 떠밀려 갈 때는 ‘아 나는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두려움과 공포가 바로이것이구나, 나는 살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아우성을 치며 누구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기적적인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 공포 때문에 다시는 바닷가에 수영하러 가지 않는다.
죽음은 누가 뭐래도 나는 두렵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모두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고 꼭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할까봐 두렵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사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또 죽은 후 내가 가졌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다 잊어버릴까봐 두렵기도 하다. 유치원 때 했던 놀이들, 초등학교 입학전날 새 옷과 새 가방을 안고 잤던 기억들, 고등학교 때 아이들과 야참을 먹던 기억들.. 이런 소중한 기억이 죽고 나면 지워질까봐 두렵다. 그리고 죽을 때의 느낌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심한 고통이 따를 것 이라는 생각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든다. 예전에 어떤 잡지에서 ‘모든 죽음은 아픔을 동반한다.’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안락사의 경우 육체적 고통은 덜 하겠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쉽지 않은 결정까지의 고통과 아픔을 겪고, 환자의 경우 육체적 고통을 느끼진 못하겠지만,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들의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련’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사업의 내년 이익이 얼마나 될까 혹시 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향해 한발 한발 걸어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단 한 번 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 어떤 것이며 죽고 나서 우리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죽음을 맞이할 때 다른 이들과 함께 갈 수 있다면 그 두려움은 어느 정도 감소되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극대화되는 것이다.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고 저승에 가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므로 죽음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영웅의 죽음 앞에서 열광하면서 삶의 연장에 환호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이란 거의 드문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한사람에게 이익이 되면 다름 사람에게는 그 만큼 손해가 되고, 한 무리에게 이익이 되면 다른 한 무리에게는 그 만큼 손해가 된다.
이처럼 우리는 이익에 눈이 멀어서 영웅의 죽음 앞에서도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영웅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일관성에대한 생각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 일관성이야 말로 영웅의 진정한 모습이며, 평범한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일반인들도 일관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일관성이다. 하지만 영웅의 일관성은 강한 신념에서 나오며,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들을 일관성이라고 여기는 생각 때문에 영웅의 목숨 따위는 죽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거의 대부분은 사람들 모두 생명을 연장하고 싶어 한다. 원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이 아니면 무관심 하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첨단 과학의 시대인 요즘도 사람들은 과학의 성과를 이용하여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생명 연장의 꿈’이라는 광고 문구가 요구르트 선전에까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요즘이다. 그리고 지금 황우석 교수가 발견한 줄기세포로 우리의 꿈 중 하나인 생명연장을 실현시키는 것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미국에서는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에어백 장착을 의무화했다가 다시 그것도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논쟁을 벌이는 등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살려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불로장생을 원하고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백신에서 유전공학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속도로 진보 발전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120세, 150세, 심지어 175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 더 이상 공상과학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현실이 되어갈 만큼 우리의 지식수준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다음 어느 세대에서는 이런 평균수명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 사실이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우리가 오래 살고자 하는 이유는 아마도 아직 해보지 못한 많은 일을 해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누가 뭐래도 건강하고 아름답게 오래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도 즐기고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하고 싶어 오래오래 살아있고 싶다. 잊지 못할 인연들 그리고 아직 해보지 못한 사랑을 위해서라도 오래 살 것이다. 그래서 노력하고 있다. 산에도 가고 하루에 40분씩 걷고 가끔 테니스도 치면서... 되도록이면 우리 가족이 키운 유기농 채소와 과일 등을 먹고, 가공식품은 먹지 않는다. 오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 나이 20살. 지금까지 20년이라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내 삶 동안 강산은 2번 바뀌었을 것이다. 강산이 변하는데 내 삶이라고 변하지 않았겠는가! 20년 동안 겪은 변화 속에서 삶의 기쁨도 맛보았고, 슬픔도 맛보았다. 어쩌면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보기엔 고작 21년 살았으면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사 사람이 모르는 법이니 내가 얼마나 더 산다고 장담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20년이란 길고도 긴 세월일 것이다.
일단 내가 맛본 삶의 가장 큰 기쁨은 세상에 태어난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 삶을 살아가게 해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느끼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쁨과 친구의 기쁨,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의 기쁨 등 삶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자살도 실행에 옮기지만 나는 그것은 바보들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는 행복하다 살아있기 때문에...
첫댓글 [3]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잘 작성 하셨네요. 영원한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시지는 안나요?
[3]자기 생각을 상당한 분량으로 쓰셨군요
[3] 질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4] 자신의 주장을 적절하게 표현하신 것같습니다.
[2] <비디오 속의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