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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산성을 빼앗은 다윗
삼하 5:6-16
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9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11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13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14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15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16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삼하 5:6-16 /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다] 다윗은 유다나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는 개인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출동하여 그곳의 원주민인 여부스 족속을 쳤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을 차지하고 살면서 그 도성을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이렇게 출전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단호하게 항의하였다. `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다윗이라도 이 요새는 빼앗지 못한다. 너희들쯤이야 소경이나 절뚝발이라도 막아 낼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은 다윗이 그 도성을 빼앗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다윗은 그 요새 시온을 정복하여 결국 자신의 개인 재산인 `다윗의 도성'을 만들었다. 8) 그날 다윗은 이런 명령을 내렸다. `누구든지 여부스 족속을 쳐죽일 사람은 수로를 타고 들어가거라! 이 도성의 동쪽 언덕에 있는 기혼 샘이 성안으로 연결된 유일한 식수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물길을 따라 들어가서 절뚝발이나 소경과 다름없는 주민들을 쳐죽여라. 나는 그 사람을 군대 총사령관으로 삼겠다' 그러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맨 먼저 물을 타고 성안으로 기어올라가 군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여부스 족속들이 절뚝발이나 소경들이 라는 말로 다윗을 조롱하였기 때문에 다윗이 그들을 미워하여 `소경과 절뚝발이는 왕궁에 들어올 수 없다.'는 속담이 생겼다. 9) 다윗은 이 도성을 거처로 삼고, 밀로 쪽에서부터 성벽을 쌓아 더욱 튼튼한 도성을 만들었다. 10)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점점 더 세력을 굳히게 되었다. 11) [두로왕 히람의 지원] 다윗의 세력이 이렇게 커지자 나라 밖에서는 사절단을 보내 왔다. 두로 왕 히람이 맨먼저 다윗의 궁전 건축을 위하여 송백 재목도 보내고 건축 기술자인 목수와 석수들도 보냈다. 12) 이런 일을 보고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나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시고, 나의 왕국을 튼튼히 세워 주신 분은 여호와이시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높이 세우신 것이다.' 13) [예루살렘에서 낳은 자녀들] 다윗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아내와 첩들을 더 얻어서 아들딸들을 많이 낳았다. 14)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15)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16)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할 뿐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왕위가 점점 더 강성하여 집니다.
예루살렘 정복(6-8) 여부스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 산간에서 살던 민족입니다. 여호수아 당시 일시적으로 그 세가 약해졌으나 완전히 정복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래 여부스 사람들의 땅은 베냐민 지파가 분배받았으나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하였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근거로 정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땅이 한 때에는 여부스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는 가나안 땅 중심부에 위치하여 온 이스라엘 땅을 통치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유다 지파의 땅과 베냐민 지파의 땅 경계에 있으나 베냐민 지파가 정복하지 못해, 두 지파 간에 정치적 충돌을 가져 오지 않고, 민족적으로 화합을 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동쪽에는 기드론 계곡과 남쪽으로는 힌놈의 계곡과 두로베온 같은 계곡이 둘러 있어서 천혜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아직 정복하지 못했으므로 이 땅을 정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이유로 여부스 사람들은 예루살렘 방어에 자신만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도 병자호란 당시 승평부원군 김류의 아들이 강화도 방어를 책임지는 강도검찰사 김경징이 강화도의 험한 지형만을 믿고 방비에 소홀해 청나라 군대에게 강화도를 점령당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전쟁 발발 후 두 달여 만에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한편 다윗의 점령 전쟁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이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니(9-16) 다윗의 강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형통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진정한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형통은 축복을 가장한 멸망의 앞잡이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형통은 로마로 가던 사도 바울이 승선한 배에 잠시 불어온 남풍(행 27:13)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의 형통은 대적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내가 내세우지 않아도 모두가 인정하게 되는 형통의 축복인 것입니다. 한편 다윗은 많은 처첩들을 두게 되는데, 여기서 이를 소개하는 것은 아마도 다음 왕인 솔로몬의 소개를 위한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많은 처첩은 다윗의 왕국에 우상숭배 등의 균열의 씨앗이 됩니다.
적 용 : 우리는 늘 형통함을 바랍니다. 그 형통함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나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을 발견할 수 있나요?
아랍 속담에 “태양만 비추면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밝은 태양을 원하지만 태양만 계속되면 우리 인생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촉촉하고 푸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좋아합니다.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원한다면 소낙비를 각오해야 합니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같은 인생을 원한다면 때로는 아픔과 고통의 소낙비를 맞아야 하기도 합니다. 지금 걷는 길에 비가 내린다고 불평하고 있나요? 아니면 이 비가 그치면 떠오르게 될 무지개를 보고 계신가요?
호크마 주석
=====5:6
그 종자들이 - 여기서 가리키는 다윗의 종자(從者)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그럴듯한 견해가 있다.(1) 다윗에게 서약하기 위해 온 '온 이스라엘의 군대'(1-3절)라는 주장이다(Lange,Keil & Delitzsch,Pulpit Commentary).이 주장은 대상 11:4의 내용과 일치한다. (2)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 종자들이 온 이스라엘의 군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윗과 행동을 함께 해온 그 정예병(精銳兵)들(삼상 22:4;23:13)이라고 주장한다(Rust,Hertzberg).그들은 그 근거로서,만일 온 이스라엘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면 구태여 본서 저자가'다윗의 종자들'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세운다.그런데 (1)번의 견해는 평행 구절(대상 11:4)과 일치하며 (2)번의 견해는 문자 해석상 그럴 듯하므로,따라서 이 두 견해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충적인 견해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즉 다시 말해서,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 가까이까지는 나아갔으나,실제로 지형적으로 험난한 예루살렘을 공략한 자들은 다윗의 종자들,곧 요압과 그 정예 군사들이었다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遷都)하려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지형적,종교적인 이점들 때문이었다. (1) 헤브론(Hebron)은 유다에서 볼때는 중심 지역이었지만 온 이스라엘로 볼 때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2:1 주석 참조.그러나 예루살렘(Jerusalem)은 온 이스라엘을 치리하기에 아주 좋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Pulpit Commentary). (2) 예루살렘은 주위가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었고 성읍 자체가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혜(天惠)의 방어 요새였다(Wycliffe).(3)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골짜기(the valley of Kidron)에는 기혼 샘(the spring of Gihon)이 있어 충분한 수원(水源)을 확보하고 있었다(Lange).(4)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지였다(수 15:7,8;18:6).따라서 예루살렘은 두 지파 간의 심각한 갈등을 해소시키며,더 나아가 온 나라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적합한 도읍지였다(Keil & Delitzsch).(5)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의 중심부로서 중앙 성소를 짓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신 12:4-14 강해,'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참조.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 건축의 최적소(최적소)로 예루살렘을 지목하였던 것이다(Leon Wood).한편 이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보다 전반적인 정보를 얻기 위하여서는 대상 11:4-9 강해,'예루살렘'을 참조하라.
여부스 사람 - 여부스 족속(Jebusites)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예루살렘과 그 주변 산간 지역에 계속 정주(定住)해 왔던 족속이다(민 13:29;수 15:8;18:16).수 9:1,2 강해,'가나안의 일곱 족속'참조.이들은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 일시적으로 패주하기도 했으나(수 10:23,26)완전히 정복당하지는 않았다.그 후 사사 시대에 이르러 유다 및(삿 1:8)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삿 1:21)도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고로 그들은 점차 세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그들의 방어 기지로 삼게 되었다.그러다가 이제 다윗에 의해서야 비로소 완전히 정복당하고 만 것이다(7-9절).한편, 여부스(Jebus)는 한때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수18:16,28;삿 19:10;대상 11:4).
네가 이리로...들어오지 못하리라 - 여부스 족속이 쳐들어 오는 다윗에게 큰소리 치는 장면이다.지리적으로 여부스 족속이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독립한 나라로서 이와 같이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까닭은 다음과 같은 예루살렘의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었다.(1) 예루살렘은 당시 가나안을 남북으로 연결시켜 주던 주요 도로인 '왕의 대로'(King's Highway, 민 20:17;21:22;신 2:27)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2)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의 성벽은 절벽과도 같은 가파른 언덕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3) 예루살렘 주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는 기드론,힌놈,두로베온과 같은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천혜의 방어 기지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었기에,그들은 자신 만만하게 다윗을 향해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고 큰 소리 쳤던 것이다.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 메튜 헨리(Mstthew Henry)는 이와 관련,여부스족들이 다윗을 조롱하기 위해 실제로 예루살렘 성벽에 소경과 절뚝발이들을 세워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Matthew Henry's Commentary,Vol.II,p.468).그 사실 여부는 오늘날 확인할 수 없지만,아무튼 본절은 당시 예루살렘 성을 과신(過信)했던 여부스인들의 자만을 충분히 증거해 준다.하지만 그들은 과거 철옹성 여리고도 함락시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권능(수 6:1-20)을 기억해야만 했다.
=====5:7
시온 산성 - 시온(Zion)은 '요새'란 뜻으로,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丘陵)의 이름이다(Keil & Delitzsch,Pulpit Commentary).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빼앗아 다윗 성(the city of David)이라 이름하였다.그러나 '시온'은 광의 적으로 예루살렘 전체를 묘사하는 말로 곧잘 사용되었는데(왕하 19:21;사 3:16;슥 2:10),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었다(사 24:23;옵 1:17).
=====5:8
수구로 올라가서 - 다윗이 천혜의 요새 시온 산성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었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여기에서 '수구'에 해당하는 '친누르'(* )는 '하수도','배수로','지하 통로'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이는 곧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기혼 샘에서 남쪽 저수지로 흘러 들어온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수직으로 파놓은 갱도(坑道)를 의미한다.이 갱도는 성 안에서 성 밖으로 연결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공 불락의 예루살렘 성안으로 군사들이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따라서 다윗이 이곳을 통해 적 진지에 들어가 공을 세우는 자에게 푸짐한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요압과 그 군사들이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대상 11:6).한편 이 수갱(水坑)은 1886년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1967년 워렌(Charles Warren)이 재차 발견하여 현재 '워렌 수갱'이라 불리워지고 있다.또한 고고학자들은 이 수갱이 B.C 2000년 경에 예루살렘 거민들에 의해 건설되었음도 밝혀내었다.
절뚝발이와 소경 - 여기서는 다윗이 당시 지형적인 이점을 의지하고 교만하게 말했던 여부스 사람들(6절)을 비꼬는 말이다.즉 저들은 불구자가 아니었지만 이제 다윗의 공격 앞에 꼼짝 못하고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절뚝발이와 소경이 된 셈이다.그런데 이는 훗날 속담이 되어 '미운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여부스인들처럼 자기의 힘만 믿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사게 된다.그리하여 결국 어떠한 집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5:9
밀로 - 채우다(* , 말레아)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이 '밀로'(Millo)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그러나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이것이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성채(城砦)를 의미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다.이 성채는 아마도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장 취약 지구인 북방의 방어를 위해 북동쪽이나 북서쪽 한쪽 모퉁이에 세워 놓았던 것일 것이다(Hertzberg,Keil,Lange,Rust).아무튼 다윗은 이 밀로를 기점으로 하여 예루살렘에 성벽을 둘러 쌓음으로써 외세 확장의 기틀과 여호와 종교를 위한 중앙 성소의 기초(대하 3:1)를 마련하게 되었다.한편, 솔로몬과 히스기야는 이 밀로를 증축,또는 수축한 바 있다(왕상 11:27;대하 32:5).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이에 해당하는 '야웨 엘로헤 체바오트'(* )는 '천군 천사(天軍 天使)의 하나님 여호와'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왜냐하면 '체바오트'의 기본형 '체바아'(* )는 본래 '군대','무리'란 뜻으로,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거느리고 계시는 수많은 하늘 군대인 천사들(욥 33:23;느 9:6;시 103:21;마 10:27;히 12:22)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아무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란 하나님의 큰 권능과 위엄을 강조하는 신명(神名)으로서,약칭 '야웨 체바오트'로 종종 표기된다(6:2;삼상 15:2;왕하 3:14;대상 17:24;시 24:10;사 1:9).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의 결과이다.즉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 군대를 인솔하시어 다윗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니(6-9,17-25절)그의 왕국이 안으로는 물론 대외적으로 인정받게 될 정도로(11절)강성해진 것이다.12절 주석 참조.
=====5:11
본절은 다윗 왕과 히람왕 간의 화친(和親)장면이다.그런데 이는 17절 이하에 나오는 블레셋 정복 사건 이전에 기록되어 있지만,실제로는 블레셋 정복이 다윗과 히람 왕의 화친보다 시간상으로 빨랐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주장한다(Keil,Rust,Lange,Leon Wood).이러한 견해가 가능한 것은 성경이 반드시 연대순으로(chronologically)만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도(topically)배열되어 있는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견해가 가능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1) 결정적으로 본문의 내용 자체가 이를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즉 17절에 보면,다윗의 블레셋 정복 사업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직후에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이러한 사실로 보아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며(17-25절)성벽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9절)다윗 초기에 그가 거할 궁궐을 지었을 것이라고는 도저희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2)또한 다윗이 즉위하던 때에는 히람(Hiram)왕이 분명히 왕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즉 왕상 9:10에 의하면,히람 왕은 최소한 솔로몬 통치 20년까지는 생존하였다고 하였으니,그가 다윗의 즉위 초기부터 왕위에 있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이다.이에 대하여 고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우리에게 간접적인 증언을 해주고 있다. 즉 그의 {고대사}(Antiquities)에 볼 것 같으면,히람 왕은 그의 부왕 아비바알(Abibaal)을 계승하여 34년간을 통치하다가 그의 나이 53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Lange,Keil & Delitzsch, Vol. II, pp.319 ff).따라서 그의 증거에 의하면,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할 때(1-3절)그는 왕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따라서 다윗과 히람의 화친은 다윗의 초기가 아니라 말기에 이루어진 사건임이 분명하다.(3) 또한 히람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다윗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였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즉 이는 분명 다윗이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민족들을 보기좋게 제압하자(17-25절)다윗의 큰 세력을 인식한 히람 왕이 화친의 제스처(gesture)로 사자들과 백향목 등을 보내온 것으로 사료(思料)되기 때문이다(Leon Wood).이상과 같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다윗과 히람 왕의 화친은 다윗의 블레셋 정복 사업보다 훨씬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그렇다면 본절은 저자가 다윗의 흥왕(10절)의 구체적 실례를 보여 주기 위해 앞당겨 기록한 내용일 것이다.한편,이
두로 - 두로(Tyre)는 시돈(Sidon)과 함께 B.C. 8-10세기경 베니게(Phoenicia)의 중심적인 도시 국가였다.이스라엘 최북단 국경에서 약 24km 서북쪽에 위치해 있던 이 도시 국가는 지중해 연안 국가로서 일찍부터 목재,밀기름,포도주,금속,노예,말 등을 수출하는 무역 국가였다.한편 B.C. 10세기 경에는 두로가 시돈을 압도한 듯 했으나 얼마 후에 두로는 시돈의 지배를 받은것 같다(사 23:2,12).하지만 그들의 전성 시기에 두로의 상선들은 애굽과 스페인까지도 진출했었다.
히람 - 일명 '후람'(Huram)이라고도 하며,이름의 뜻은'고귀한 자'이다.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두로를 다스리던 왕으로서,다윗은 물론 솔로몬의 건축 사업에 적극 조력한 것으로 유명하다(왕상 5:1-12).
백향목- 레바논이 주산지인 백향목(cedar trees)은 왕궁,성전(왕상 5:5,6;6:9,10),배의 돛대(겔 27:5),우상 등을 건설 또는 만드는 데 사용될 정도로 최고급 건축 자재였다. 이 나무는 잘 썩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으며 또한 내구성(耐久性)이 강하며 방향(芳香)을 지니고 있다.따라서 히람 왕이 이렇게 좋은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다윗이 다스리던 신정 국가의 위세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5:12
다윗이...아니라 - 여기서 '알다'(perceive,KJV)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 )는 단순한 인식을 의미하는 '나카르'(* )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 아는 실제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다.즉,이말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나 어떤 사물에 대한 단순한 인식을 의미하지 않고,전에는 희미하게(막연히)알았으나 여러 경험을 통해 그 본질을 더욱 확실하게 파악한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창 4:1;18:19;신 1:39;8:5).따라서 본절에서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을 왕을 삼으신 것'을 알았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한 사건(3절)을 기억했다는 의미가 아니다.이와는 달리,이 말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 정복(6-10절),블레셋 정복(17-25절),히람 왕과의 화친(11절)등 만사 형통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여호와께서 자기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그 본질을 확실히 파악하게 되었다는 뜻이다.즉 예를 들어 설명하면,'학교'라는 말만 아는 어린이가 직접 학교에 들어가 경험해 봄으로써 날마다 학교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듯이,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그 기름 부음의 실제적인 의미를 통하여 더욱 승승장구하는 여러 경험들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한편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 후반부에서 여호와께서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다윗이 알았다는 말도 같은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즉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사 그 나라를 열방 중에 높이신 것은 다윗 개인에게 탁월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복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5:13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였으므로 - 그당시 동양적인 관습에 따르면,처첩의 수는 곧 권세의 상징이었다(Leon Wood,TheInterpreter's Bible).따라서 다윗도 그당시 보편화된 관습에 따라 많은 처첩을 거느렸는데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유다 지파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으므로(1-5절)더욱 그러하였다.그러나 결론적으로 애기해 다윗이 하나님의 율법(신 17:17)을 어기고 취한 많은 처첩들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를 안겨 주고 말았다.13-16절 도표 참조.그리고 훗날 아비 다윗의 영향을 받은 솔로몬 역시 다윗보다 더 많은 처첩을 거느린 결과(왕상 11:3)나라 안에는 각종 이방 우상 숭배 풍조가 만연하였고(왕상 11:4-8) 외환(外患)이 끊이지를 않았다(왕상 11:14-15).따라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사례만 보더라도 일부 다처주의(一夫 多妻主義),축첩 행위가 명백히 하나님의 뜻(창 2:24)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그에 따르는 불행 역시 엄청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창 4:16-24 강해, '일부 다처제';창 16:1-6 강해,'축첩 제도의 부당성'참조.
=====5:14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 이들은 모두 밧세바의 소생이다.13-16절 도표 참조.그런데 12:24에는 이들 중 마치 솔로몬이 밧세바의 첫 아들인 양 기록되어 있다.아마 그 까닭은 솔로몬을 다윗의 왕위 계승자로 부각시키려는 목적에서 기록한 탓일 것이다.
=====5:15,16
엘리벧렛 -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심'이다.그런데 대상 3:6,8에는 이 이름으로 불리우는 다윗의 아들이 두 명 나온다.본절의 '엘리벧렛'은 이 중 대상 3:8에 나오는 '엘리벧렛'이다.한편 다른 곳에서는 대상 3:6에 나오는 '엘리벧렛'을 '엘벧렛'(Elpalet, 대상 14:5)으로,본절의 '엘리벧렛'(Eliphalet)은 그냥 그대로 표기함으로써(대상 14:7) 양자를 구분하고 있다.
< 설 교 >
마지막 남은 여부스
삼하 5:6-12 / 안효관 목사
며칠 전 월간지 『포춘 코리아』라는 잡지에서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최고의 CEO를 발표했는데, 1위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뽑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경제학자 등 전문가 10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인데, 특이한 것은 벤처기업가요 교수인 안철수 씨가 4위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안철수 씨는 원래 의사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서 단국대학교에서 의과대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대학원 학생 때 우연히 자신의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을 발견한 이후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는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의과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는 ‘안철수연구소’라는 벤처기업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백신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벤처기업가로도 성공했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세운 안철수 연구소의 모든 경영을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사회 의장직만 맡고서, 2010년 KAIST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철수 씨는 성공의 요건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하는 일에 재미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재미있게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공의 요건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특별한 재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성공하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지거나 남들이 하지 못하는 큰 일을 한 사람을 가리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한 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가져서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일이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에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을 가리켜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이나 재능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교수가 되거나 어떤 한 기술 분야에서 최고의 명장이 되면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틀에서 의미부여를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서 돈을 벌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회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좋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거나 자신만을 위해서, 오로지 돈을 버는 것에만 목적을 두고 돈을 벌었다면 우리는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학문과 연구를 통해서 인류와 사회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철수 씨는 정말 우리 시대에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잘 나가는 의사요 대학 교수라는 직함을 버리고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컵퓨터 바이러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백신을 만들어 무료로 공급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할 때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그 길은 험난한 길이었고, 돈이 되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는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컴퓨터를 가지고 계신 분들 가운데 안철수연구소의 도움을 받지 않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우리 시대에 누구도 감히 쉽게 나설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단지 사람을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자신이 말한 대로 그는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는 일을 재미있어 했고, 그 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또 그 일을 통해서 정말 의미 있는 일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일생 가운데 정말 의미 있는 일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하면 저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손에 꼽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에 대해서 참 많이 들어왔습니다. 다윗 - 그러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생각납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무찌른 이야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것,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자 성전건축을 포기하고 대신 성전건축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이야기 등등. 그런 것들도 다 나름대로 다윗의 일생에 참으로 의미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다윗의 이야기를 하면서 잘 떠오르지 않는 본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 세 번이나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① 가장 먼저 어렸을 때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사무엘상 16장)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는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 아들들 가운데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찾아가서, 이새의 막내아들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이도 어렸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아버지의 양떼를 치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 때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다윗이 바로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 기름부음을 받은 후 다윗은 엄청난 시련의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후 골리앗을 죽이게 되었고, 골리앗을 죽인 후 다윗이 점점 유명해지자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피해서 다윗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죽을 고비도 많이 겪었고,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인 블레셋으로 망명을 가기도 했습니다.
② 그러던 중에 사울 왕과 왕자인 요난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유다 사람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무엘하 2장에 나옵니다. 이 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 사람들은 사울 왕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왕이 두 명이 존재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다윗의 세력이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그러자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며 따르던 사람들이 점차 다윗 쪽으로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스보셋이 암살당하고 맙니다. 이제 이스라엘에 왕은 다윗만 남게 되었습니다.
③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 온 지파가 공식적으로 다윗을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그게 오늘 본문 바로 앞인 5: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7년 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 있었고, 그 후에 드디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다윗은 여전히 헤브론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긴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가 다윗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사람들 - 사울 왕과 그 아들 이스보셋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윗에게 과연 이스라엘을 통치할만한 지도력이 있느냐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 출신입니다. 비록 죽기는 했지만, 이스보셋은 사울 왕의 아들입니다. 왕의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이스보셋에 비하면 목동 출신인 다윗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잘 다스릴 수 있는지 신뢰가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것을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또 하나의 이유는 지역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은 남 유다에 속한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땅 중에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북쪽에 위치해 있던 사람들에게 남쪽 출신의 다윗은 별로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지역감정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도 대통령 선거를 하면 후보자가 어느 지역출신이냐에 따라서 지지율이 많이 달라집니다. 자기네 지역 출신에게는 몰표를 줍니다. 지역이 넓으면 넓은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지역에 따라 나눠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있습니다. 심지어 시골에서 이장을 뽑을 때에도 비록 같은 동네일지라도 작은 냇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기네 쪽 사람이 이장이 되어야 한다고 싸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그런 면에서 북쪽 사람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출신 성분도 별로지요, 지역적으로도 별로 반갑지 않지요. 그렇다보니 비록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되긴 했지만, 북쪽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다윗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다윗에게는 남과 북으로 나눠진 백성들의 마음, 또 사울 왕가를 그리워하면서 자신이 왕이 된 것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분열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선택한 것이 바로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될 때까지 가나안의 원주민인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차치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200년도 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가나안 원주민인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분배된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사기 1:21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200년의 사사 시대가 끝나고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왕정이 이루어졌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예루살렘이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약 760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은 남쪽과 동쪽에 힌놈의 골짜기와 기드론 골짜기가 있어서 큰 절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떤 적군이 쳐들어와도 쉽게 점령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던 것입니다. 그런 천혜의 요새에 여부스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200년이 넘도록 그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한 상태로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추대된 왕이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그 예루살렘을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무모한 짓인지도 모릅니다. 200년이 넘도록 감히 넘보지 못한 곳입니다. 더구나 전 왕이었던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베냐민 지파에 분배된 예루살렘인데도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 왕조차 예루살렘을 점령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점령하겠다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군대를 이끌고 오는 다윗을 보고는 조롱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네가 감히 여길 점령하겠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소경과 절뚝발이만 가지고도 너를 이길 수 있어. 여기가 어디라고 까불어.’ 그런 얘기입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겠다고 꿈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마만큼 예루살렘은 점령하기 쉽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왜 굳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려고 했습니까? 어쩌면 정말 큰 모험입니다. 만일 예루살렘을 점령하겠다고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점령하지 못한다면 이제 막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에게는 엄청난 정치적인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왕이 된 후 첫 번째 일로 바로 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려고 나섰습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남과 북을 연결해 주는 교차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 있었던 것은 중간 지점인 예루살렘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남쪽과 북쪽을 연결시켜주는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서 남과 북의 나눠진 감정의 골을 통합하려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곳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울 왕의 출신지역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속한 베냐민 지파에 분배해 주신 예루살렘조차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이 그곳을 점령한 채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 사울 왕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울 왕보다 더 강한 지도자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은 다윗의 정치 지도력에 시험대와 같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치 지도력을 걸고 예루살렘을 점령하려 한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이 조롱한 것처럼 예루살렘을 점령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고지대에 위치한 철옹성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철옹성과 같은 곳이라 하더라도 약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지대의 약점은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도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당시 여부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혼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적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에는 기혼샘에 물을 길러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은 지하 터널을 만들었습니다. 기혼샘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지하 터널을 파서 비상시에 그곳을 통해 물을 끌어와 예루살렘 안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1867년 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파견 받은 영국 장교 찰스 워런(C. Warren)이 히스기야의 터널을 탐사 하던 중 암벽을 뚫어서 만든 원통으로 된 수직터널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부스 사람들이 파놓은 지하터널입니다. 그 터널의 크기는 지름이 약 2m에 달하고, 길이는 무려 533m나 됩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터널을 통해서 기혼샘에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물을 길어왔습니다. 그러니 전쟁이 나서 적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한다 하더라도 물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비밀터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 보면 다윗은 군대를 보내면서 “수구로 올라가라.”고 작전을 지시합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이 그 비밀터널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루살렘 성을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윗은 그 성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다윗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점점 더 강해지고 형통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절에 말씀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 그제야 다윗이 마음을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 전까지는 불안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내에 불신 세력이 존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난 후 다윗의 정치적인 지도력이 확고해지자 다윗이 비로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고, 나를 통해서 이 나라를 크게 높이실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 하나를 빼앗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의 정치적인 지도력을 확고히 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성한 때를 다윗과 솔로몬 시대라고 말합니다. 역사상 가장 번성한 그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바로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한 후에 오늘 본문에서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나간 세월들을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보람된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쉬운 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 가운데 계획했던 대로 잘 된 일도 있지만, 잘 되지 못한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 지난 한 해 우리에게 여부스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것은 없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반드시 쫓아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쫓아내지 못한 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같이 살기로 한 내 삶의 여부스는 없습니까?
- 때로는 그것 때문에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나의 발목을 잡는 나의 잘못된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 열심히 신앙생활하려고 할 때마다 나를 낙담시켜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도무지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커다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 내 삶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 새해가 되면 한 번 해 보겠노라고 다짐하다가도 또 다시 포기하게 만드는 나의 연약함일 수도 있습니다.
- 너무 철옹성 같아서 아예 내 삶에서 벗어버리겠다고 생각도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을 조롱한 것처럼, ‘너는 안 돼! 네까짓 것이 뭘 하겠어!’ 라고 나를 조롱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내가 해결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갖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약점은 있게 마련입니다. 여부스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에는 비밀터널(수구)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비밀통로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내 삶을 힘들게 만드는 그 어떤 장애물이나 문제라 하더라도 비밀터널은 반드시 있습니다. 잘 살펴보면 약점이 있습니다. 내가 뚫고 들어가서 무너뜨릴 수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그것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점령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 비밀통로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도 골리앗을 무찌를 때 그것을 깨닫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다윗이 어렸을 때 골리앗과 싸우러 갔습니다. 다윗은 양을 칠 때 쓰던 막대기와 물매돌을 가지고 골리앗에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싸우러간 골리앗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완전무장한 군인이었습니다.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습니다. 몸에는 50kg이 넘는 놋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리까지도 갑옷으로 덮혀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골리앗 앞에는 방패를 든 군인이 골리앗을 보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공격할 틈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골리앗이라 하더라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바로 얼굴 - 이마였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곳에다 물매돌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무장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다 약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마 다윗은 그 싸움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이 진치고 있는 예루살렘을 어떻게 공략할까’ 고민하다가, 예루살렘의 약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적군이 성을 포위하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물을 마실까를 생각하다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기혼샘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불과 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기혼샘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다는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분명 물을 가져다가 먹을텐데’ 라고 생각하다가 비밀터널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 내가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반드시 약점이 보입니다. 내 지혜와 지식으로 찾아내기 힘들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후회스러운 것은 없으셨습니까? 계획을 했는데 이루지 못한 것은 없으십니까? 200년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예루살렘의 여부스 사람들처럼 아직도 내 안에서 남아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없습니까?
올해가 다 지나가기 전에 점령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반드시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크고 힘든 것이라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셔서 2010년도에는 반드시 비밀터널을 찾아내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여부스를 내 삶에 남겨두면 그게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가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여부스 사람을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리가 되리라.”(사사기 2:3)
내 삶에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는 것 - 반드시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내 신앙의 발걸음에 걸림돌이 되는 것 - 반드시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점점 더 강성해 집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믿음의 승리자가 됩니다.
생명의 어버이인 대지
삼하 5장 4~13절 / 이병일목사
다윗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추앙되었습니다. 사사시대 이후 사울을 거쳐 다윗이 왕권을 확립한 후, 하나님이 다윗과 영원한 계약을 맺었다는 ‘왕조신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워서 그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해 주셨고, 예루살렘(시온)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에서부터 시작된 전제왕권을 합리화 하고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더욱이 역대기에서는 성군(聖君)으로 묘사되어 아무런 흠이 없는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역대기 사가는 다윗을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제도와 종교의식의 창시자로 생각하고, 종교적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기초는 다윗 때 마련되었다고 말합니다. 역대기에서 사울왕은 단지 다윗의 등장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거론되고 있으며, 사무엘서와는 달리 다윗의 부정적인 면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망명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불레셋에 가담하여 용병이 되었던 일(삼상 27, 29장), 밧세바와의 불륜과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사건(삼하 11장),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했던 일(삼하 13-19장)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기반과 종교적 전통을 확립한 왕으로 여겨집니다.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다윗은 유대 왕조를 회복할 메시아로 기다려졌습니다. 그가 빼앗은 예루살렘과 그의 성은 다윗성(시온성)으로 불리며, 오늘까지 시오니즘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전제적 왕국이 시작된 이후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유다 지파의 이스라엘이 되었다.)의 정치적 지배자들은 그들의 권력이 약해질 때마다 다윗왕조의 계약과 시오니즘으로 백성들을 선동하면서 자기들의 지배를 희구했습니다.
히브리 성서의 왕조 이야기는 주로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는 측면에서 편집되었지만, 그 속에 간간이 예언자들이 외친 야훼신앙에 뿌리를 둔 해방 전통이 숨어있습니다. 왕조 전통의 허구를 드러내는 해방 전통(예언 전통)에 의하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평등공동체를 파괴하고 야훼신앙을 개인의 사적 종교로 축소시킨 장본인입니다.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이상을 모두 파괴하고 전제왕권을 실현한 왕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사사시대)의 이상은 무엇인가요?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휘두르는 왕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왕은 야훼 하느님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의 위기에 처해지면, 하느님의 카리스마를 받은 사사를 통해서 각 지파의 군사를 모으고 백성들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한 사사는 상황이 끝나면 자기 지파로 돌아가서 일상과 재판의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에는 상비군이 없었습니다. 각 지파와 문중(미스파하)과 가족별로는 자기의 땅을 유업(나할)으로 받아서 그 땅을 경작하며 살았습니다. 그 땅은 팔더라도 지파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이상은 전제왕권과 토지의 사적소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제 왕권을 확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나단의 책망처럼, 왕이 된 후에 다윗은 이미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가졌으면서 한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의 그 양을 빼앗는 짓을 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용병을 모아서 자기의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본문(사무엘하 5:4-13)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사유화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성서에는 여부스 족속의 땅이라고 하는데, 그 땅은 이미 사울이 속해 있던 베냐민 지파의 땅이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다윗이 베냐민 지파의 땅을 빼앗은 것입니다.
강제로 빼앗은 땅에 성을 쌓고 자기의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만든 성은 전체 이스라엘을 위한 성이 아니라 다윗 자신의 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다윗성’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그 성은 군사적 기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곳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나 보지 못하는 사람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싸움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병력만 거주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근본을 뒤엎고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전제적인 왕권을 차지하고, 개인적으로 군대를 만들고 용병으로 부렸습니다. 남의 땅을 빼앗고 사적으로 소유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다윗이 철저하게 평등공동체의 이상을 저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땅은 생명의 터전입니다. 땅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버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땅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단지 경작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개인적으로 만든 군대로 땅을 빼앗고 사유화했으며, 그곳에 자기의 안전을 위한 성을 만들어서 또다른 공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는 지금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미국과 남한정부의 행위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정작 국민들의 뜻을 저버리고, 오히려 국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생존권을 짓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넓디넓은 자기네 땅을 두고서 작은 나라의 땅을 빼앗아 자기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어디라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를 무력으로 지배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딸랑거리는 마름처럼 제 나라 국민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미국에 바치려는 노무현과 윤광웅을 비롯한 정치 권력자들의 합법적(?) 정당성에, 개가 주인을 물듯이 국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군대와 경찰과 용역들의 폭력에, 분노와 치를 떨었습니다. 이제 진정한 평화를 향한 걸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날의 사진들을 보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진 영상을 보면서 아래의 편지글을 읽었습니다.>
(5월 5일] 김지태 위원장이 대통령, 국방장관에게 보내는 편지
윤광웅 국방장관께
당신은 승리했습니다. 막강한 군병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크나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당신의 승리는 아주 혁혁했습니다. 유례없는 전과에 치하를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전투에서 이겨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과연 기지이전은 정당했나요? 꼭 그렇게 해야 했나요? 당신이 지켜야 할 것은 미국정부 재산으로 등록될 주민에게 빼앗아서 미국에 조공으로 바쳐야 할 팽성 땅이 아니라, 호시탐탐 일본이 엿보고 있는 독도가 아닌가요? 법적으로 국방부 소유가 되었다는 팽성 수용예정지 땅, 그런 논리라면 이미 국제 지리 학회나 수로 학회에 일본 명으로 등재되어 있는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닌가요?
더 이상 억지를 쓰지 맙시다. 당신들은 법대로 한다면서 이미 법을 수도 없이 어겼습니다.
지난해 가을, 당신들은 우리 땅에 농사짓는 농민들에게 농사짓지 말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중앙토지 수용위원회 결과가 발표되기 훨씬 전에 사유 재산에 대해 파종 중단을 명령했습니다. 중토위의 결과를 아예 무시하거나 아니면 어차피 강압에 의해 토지수용 재결을 이루어 내려 했던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언제 경작손실 보상금을 수령했다고 농사를 못하게 하는 겁니까?
당신은 분명 조직과 상관에게 충성 했습니다. 정작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의 조직과 상관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겁니다. 사기업체 직원도 자신의 조직과 상관에 충성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론 회사에 충성해야 회사가 살고, 직원이 삽니다.
이제부터라도 발상의 전환을 하시고 정녕 국가를 위해 충성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살피십시오. 이미 당신은 당신의 조직과 상관을 위해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더 이상 공무원이 관노가 아닌 진짜 공무원이길 바랍니다. 공무원이 관노로 변할 때 과연 과거에 존재했던 사병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들은 조폭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명철한 두뇌와 양심이 있습니다. 이제라도 양심선언을 하십시오. 더 이상 파국을 막아 주십시오. 그리고 주민을 상대로 대화할 내용이 없다면 단호히 거부하십시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조종한 사람들이 이젠 전면에 나서게 하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방송에 나가서 주민과 대화하겠다거나 충분한 보상 운운하지 마십시오. 당신도 장관으로써 명예가 있겠지만, 우리도 명예가 있습니다.
전투는 이제부터입니다. 당신들이 군병력을 투입해 철조망을 치고 대추분교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듯이 이제 주민의 주택을 상대로 또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또 한번 역사에 길이 빛나는 21세기 최초 전공을 세우십시오.
노무현 대통령님께
대통령님. 당신은 이번 싸움에 철저히 졌습니다. 국가안위를 책임져야 할 대통령으로써 철저히 국민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고 그로인해 이제 이곳 주민들은 철저히 대통령님을 버렸습니다. 행정대집행을 하기 앞서, 군병력을 투입해 철조망을 치기 앞서 미국의 협박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분명히 밝혔어야 합니다. 감히 대통령님께 당신이란 표현을 써서 국가원수 모독죄가 될지 모르지만 당신한테는 너무도 과분한 표현입니다.
당신이 국정을 맡으면서 추구하고자 한 것이 과연 이것입니까? 계속해서 언론에선 보상과 이념의 문제라고 합니다. 더 이상 싸우고 있는 주민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수차례 말했지만 보상엔 관심 없습니다. 이곳에 그대로 사는 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대북 억지력 때문에 존재한다는 미군, 과연 한수 이남으로 이전하는 게 대한민국 안보에 맞는 것인지 지금이라도 밝히십시오. 또한 지금도 건설비용이 얼마가 될지 모르는 상황(예정에도 없던 기지건설예정지 성토문제 등 앞으로 발생될 문제는 수없이 많음)에서 기지 이전비용이라고 추산해서 국회를 통과시킨 비준안은 과연 정당했는지?
주한미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는 상황에서 그저 미군재배치라고 얼버무리고 통과시킨 LPP는 정당했는지? 우리 주민들이 줄기차게 요구한 것은 미군 재배치의 목적과 정당성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지 보상을 더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닌데도 아직도 보상과 이념문제라니 도대체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이 아직도 제정신인지, 아니면 4700만 국민을 상대로 계속 사기극을 벌이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입이 있으면 답하십시오. 진정 당신이 이 나라의 최고 책임자라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지 답하시오. 수차례 언론 및 측근을 통해 말한 주민들이 불상사를 겪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 피 흘리지 말고 살을 베라는 말과 어디가 다른지 답하시오. 피 흘리지 않게 하려면 무언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더 이상 국방부를 몰아세워 대화를 하라 하지 마십시오. 뒤로 물러설 길을 봉쇄하고 대화하라면 그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보상과 기지건설이외에는 의제로 다루지 말라는 답변 잘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선택은 없습니다. 그대로 죽는 수밖에... 차라리 문인을 가장하지 말고, 무인답게 한칼로 쳐서 완전히 죽이십시오. 고통의 날이 하루라도 짧게...
또다시 국방부를 통하여 대화제의를 절대 하지 말길 바라면서 우리도 깨끗하게 죽기를 원하니 보상이니, 이념이니 다시는 언급하지 마시고, 명예롭게 죽길 바랍니다. 종전엔 이념문제가 이념적 차이에서 발생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념의 차이가 아닌 정책적 모순성의 지적을 이념문제라 하더군요. 아무리 유능한 교수나 족집게 과외교사가 수능시험을 출제해도 잘못된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 경우 이미 출제한 문제이니 번복할 수 없다고 우긴다면 너무 우스운 일이 아닐까요? 아기는 배가 고파 우는데 아직 말을 못해 의사전달 수준이 겨우 우는 것뿐인데, 이 아기가 아파서 운다고 병원치료를 하면 아기는 더 울 수밖에 없겠죠.
또 배가 아파 우는 아이에게 어미가 계속 젖을 물린다면 그 젖꼭지를 물어뜯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이제라도 본질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여태껏 말도 안 되는 이유 대고 기지건설 해야 한다고 했는데 툭 터놓고 대화의 공간을 마련합시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모두 죽겠습니다. 당신이 원던 원치 않던 이제 당신은 21세기 초유의 폭군으로 기록될 기로에 서 있습니다.
각종언론 보도에 주민은 200여 명 밖에 안 된다는 소리 듣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저런 일이 원래부터 반대하던 주민은 채 100여 가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일부 주민이라고 표현했지요. 그런데 그 숫자가 수용지 중심의 주민이고 현재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데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이 숫자는 더 이상 늘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100여 호 되는 농가에서 등교한 학생, 출근한 노동자, 아파서 누워계신 연로한 환자분들, 이런 분들 빼고 나면 도저히 200 여명이라는 숫자는 나올 수가 없는데 정말 겁 없는 사람들입니다. 67만 대군과 경찰 병력 그리고 미군 도대체 이들이 뭘 믿고 공권력에 맞설 각오를 했겠습니까? 이제 명분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사업은 철회하십시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농부의 마지막 간언입니다.
대추분교 운동장에 있는 전봉준 동상 파괴를 온몸으로 막던 평택 시민 신문 양용동 기자,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 자신이 미술을 전공했기에 그 가치를 알기에 절대로 훼손은 막아야 했노라고 하지만, 한낱 농투성이인 내 눈에는 그것과 들판에 뿌려진 씨앗이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 뼘 한 뼘 땅을 가꾸면서 그것을 숭고한 작품을 만들듯, 그리고 대를 이을 자식을 키우듯 어루만지고 가꾸었습니다. 이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당신, 이제 치유의 길은 없습니다. 더 이상 조롱하지 말고, 그리고 더 이상 고통 주지 말고 더 이상 기지이전문제 지연되지 않게 모두를 죽이고 당신 뜻을 이루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훗날 한미동맹을 공고히 했다고 평가받으며 그때 수많은 이름 없는 민초가 명멸해 갔다고 함께 기록되길 바랍니다.
지난 5일에 팽성대책위 김지태 위원장이 대통령과 국방장관에게 공개적으로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사진으로 본 것은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지난 4일부터 지금까지 평택 대추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국방부 장관과 언론에서는 군인과 국민이 충돌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군인이 몽둥이와 방패로 주민과 학생에게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미 몽둥이를 사용하고 있는 사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자위적인 차원에서 진압장비를 제공하겠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노무현 정부는 평택의 생명의 땅을 빼앗고 대추리 농민들이 정성껏 모아서 만든 학교를 산산이 파괴하는 일로 이번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고, 평화를 염원하는 더 많은 촛불이 전국 곳곳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미선이 효순이의 원혼을 달래주던 촛불이, 노무현 탄핵을 반대하던 촛불이, 이제는 노무현 정권의 본질과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을 밝히 드러내는 촛불로 타오를 것입니다.
묵상하겠습니다.
하느님의 평화를 빕니다. 우울한 소식들, 가슴 절이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때에 생명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과 평화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당당하게 삽시다.
하느님의 평화를 모든 생명에 내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거대한 폭력인 로마와 그들의 마름이 된 제사장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과 아픔과 울부짖음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거룩한 영의 역사가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간절히 바라며 희생하는 대추리와 농민들, 평화를 위하여 이 일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삶에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사람
삼하 5장 6~12절 / 박봉수목사(상도중앙교회)
다윗은 사울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의 왕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아직 사울의 자손들이 남아있었고, 백성들 가운데 저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자기가 속한 유다지파의 땅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유대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먼저 유다지파 한 지파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6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이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머지 지파들을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대립이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스라엘 내부의 분쟁이 일어나 이스보셋이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과 전쟁도 하지 않은 채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이스라엘이라는 통일왕국의 왕이 된 후 처음 했던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바로 다윗이 예루살렘의 시온산성을 정복하고, 이곳에 왕궁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예루살렘을 정복했을까요? 우선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은 가나안 땅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이방민족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한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후 차지했었지만 다시 빼앗긴 뒤 오랜 세월 정복하지 못한 채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이 땅을 점령하여 드디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점령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것처럼,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심을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천도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수도로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사실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남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로서는 지정학 상 적절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가나안땅 중앙에 있을 뿐 아니라 지형적으로도 천연요새여서 수도로 삼기에 적절한 곳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해서 이곳을 수도로 삼은 뒤 효율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다윗이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여겨지던 예루살렘의 시온산성을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시온산성을 점령했는지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점령 후에도 점점 강성해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그렇게 정복하기 힘든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또 점점 강성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되면 현재 상황이 어떠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 앞에 서있는 적이 누구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려 할 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한 마디로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을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결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시온산성은 천연요새입니다. 예루살렘은 마치 길쭉한 고구마처럼 생겼습니다. 서북쪽에는 모리아산이 있고, 나머지부분은 세 골짜기가 감싸고 있습니다. 동쪽에 기드론 골짜기, 서쪽과 남쪽에는 중앙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가 맞물려있습니다.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다 점령했으면서도 400년 가까이 예루살렘만은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당시 세계 최강의 로마 군대도 이 작은 산성을 점령하는 데만 꼬박 2년이 넘게 걸릴 정도입니다.
여부스 족속이 볼 때 다윗이 이제 막 통일왕국의 왕이 된 후라서 군사력이 그렇게 센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난공불락의 성 안에 있습니다. 다윗이 아무리 힘써도 자기들을 점령할 수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조롱했습니다.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그러나 다윗은 물리서지 않았습니다. 난공불락의 성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소년시절 블레셋 장수 거인 골리앗 앞에 섰을 때처럼 담대하게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도대체 다윗은 어떻게 이런 용기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옛날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사내아이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이런 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되기 직전에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밤을 지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밤새 혼자서 산속에 머물며 맹수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때 두려움과 싸우게 됩니다. 밤새 두려움과 싸운 뒤 동이 터올 무렵 아이는 뜻밖의 광경을 지켜보게 됩니다. 바로 자기 아버지가 나무 뒤에서 화살을 겨누며 밤새 자기를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용기를 가지게 된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점령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 28:20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면 다윗처럼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면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 눈 앞에 버티고 서있는 난공불락의 예루살렘을 보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길을 찾습니다.
다윗은 난공불락의 성을 어떻게 점령할 수 있었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 성은 지형 상 한 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나머지 세 쪽은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성벽을 넘어서 침공해 들어가는 방식으로는 점령이 불가능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8절을 보면 “물을 긷는 데로 올라가서”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지하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군사를 투입하여 성을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의 성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루살렘 성에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 안에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남동쪽에 있는 기혼샘에서 수로를 파서 성 지하로 흐르게 해서 지하에 저수지를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성 위에서 수직으로 통로를 만들어서 물을 길어서 사용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외부인은 알기 힘이 드는데 다윗은 이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다윗은 이 비밀을 알았을까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은 예루살렘 근처 베들레헴 출신입니다. 어려서 목동으로 예루살렘 성 근처를 수없이 지나다녔을 것입니다. 양을 치면서 계곡에도 내려갔을 것이고, 성 근처 산에도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비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로를 통해서 침공해 들어가는 일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수로가 좁기 때문에 소수의 비밀특공대를 운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비밀특공대는 자칫 성안에 들어가 체포될 수도 있는 위험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선뜻 임무 수행을 위해 나서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대상 11:6을 보면 다윗이 군사들에게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우두머리와 지휘관으로 삼으리라” 이번 특공대 임무를 앞장서서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을 군대 지휘관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요압이 자원해서 나섰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다윗의 약속대로 군대장관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불가능한 일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을 생각해냈고, 요압은 그 임무를 수행해 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 다윗이 길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말로 ‘히브리 민족’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히브리라는 말은 ‘하비루’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하비루라는 말은 “건넌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다가 가나안으로 이주해 온 사람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오려면 큰 강 유프라테스를 건너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건너기 힘든 강을 건넌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은 유프라테스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건넜습니다. 홍해도 건넜고, 요단강도 건넜고, 여리고 성도 돌파했고, 이제 예루살렘 성마저 정복했습니다. 불가능한 난관들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미션 임파서블을 완수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위대한 지도자들이 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의 한 신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신학교 브로슈어에 쓰여 있는 문구를 읽고 공감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리더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가(Know where I am)
둘째,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Know where I am going)
셋째, 내가 그곳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Know how to get there)
그렇습니다. 영적 리더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즉 현실을 알아야 하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즉 목표를 알고,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 즉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실패하는 사람들은 핑계거리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들은 길을 찾아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들은 남들이 찾지 못하는 길을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압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다윗은 난공불락의 성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다윗 성을 세우고 그곳을 이스라엘의 새 수도로 삼고 난 후, 두 가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400년 가까이 점령하지 못했던 이 시온산성을 자기가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다윗 성을 건축하고 수도다운 수도로 예루살렘을 세운 것입니다. 그야말로 남들이 생각도 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순간 결코 자기의 업적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남다르다고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하나님만을 높이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이라는 수도다운 수도를 갖게 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삼상 15:12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라 명하셨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순종하여 아멜렉을 쳤습니다.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대승을 거둔 이후 사울이 보인 태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밤새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찍 누군가가 사무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사울이 아말렉에게 대승을 거둔 후에 갈멜에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높여야 할 때 자신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과 사울은 너무 달랐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놀라운 일을 행한 뒤 저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반면,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모르고 자신의 능력으로 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반면, 사울은 자기가 행했다고 자신의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한 뒤에 사울처럼 해서는 안 되고 다윗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적 앞에서도, 내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속에서도 길을 찾아냅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는 것 같아 포기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돌파구를 찾아냅니다. 또한 크고 작은 업적을 세웠을 때 그리고 무엇인가 공을 세웠을 때 자기를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사, 다윗-승리의 원동력
삼하 5장 6~25절 / 곽창대목사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행한 중요한 일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1) 6-12절: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수도로 삼음
2) 17-25절: 블레셋을 퇴치함
가운데 단락인 13-16절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얻은 처첩들과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에 관하여 알려줍니다.
1. 다윗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수도로 삼음 (6-16절)
그 당시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이 거주하고 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여부스 는 함의 넷째 아들인 가나안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창 10:16). 그러므로 여부스 족속은 고대 때부터 가나안에 거주하던 족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하나님을 섬기던 살렘 왕 멜기세덱이 예루살렘을 다스렸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예루살렘은 주변의 가나안 족속들처럼 우상을 섬기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하나님을 섬기는 땅으로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5백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모세에게 다시 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약속입니다.
(출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그 약속을 이어받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정복전쟁을 치릅니다. 그때 예루살렘(여부스) 왕과 함께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 군대에 대항합니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승이었습니다(수 10장). 하지만 예루살렘의 남쪽 비탈까지만 점령하고 여부스 족속의 본부요새인 시온 산성은 점령하지 못했습니다(15:8, 63). 그 시온 산성이 예루살렘입니다.
(수 15:63)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오랜 기간 동안 여부스 족속들이 거주하고 있던 난공불락의 요새인 예루살렘을 마침내 다윗이 정복했는데 정복한 이유를 두 가지로 들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가나안 땅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에 타 민족이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수치요 하나님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약속하신대로 예루살렘은 반드시 탈환해야 할 하나님의 땅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부여받은 과업도 가나안 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과업 가운데 난공불락의 요새인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첫 과제로 삼은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이 돋보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부스 족속이 거주하고 있던 예루살렘은 주위의 산들과 깊은 골짜기로 둘러싸여있고 해발 770m나 되는 고원지대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더욱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막강했던 유다 지파는 남부 헤브론을 거점성읍으로 삼았습니다. 나머지 11지파는 북부의 기브온이나 요단강 동편의 마하나임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제3의 성읍으로 수도를 옮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선택한 성읍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루살렘이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동안 여부스 족속이 평안히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천혜의 요새였을 뿐 아니라 그 높은 곳까지 수로를 만들어 물을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골짜기에 기혼 샘이 있는데 그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지하수로를 통하여 성안으로 물을 길어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면 여부스 사람들은 성 밖으로 물을 길러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지하수로를 통하여 얼마든지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여부스 주민들은 다윗을 조롱했습니다. 6절입니다. 장애인들도 능히 다윗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다윗이 정탐꾼들을 보내어 공격루터를 탐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물을 긷는 곳이었습니다(8절, “물 긷는 데”). 기혼의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사용했던 지하수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지하수로로 병사들을 성안으로 잠입하게 하여 성문을 열었고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여부스 사람들을 섬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1838년에 미국의 로빈슨이 이 수로를 발견했고 1967년에 워렌이 수로로 내려가는 통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이 수로의 이름을 “워렌 터널”이라고 합니다. 워렌 터널은 기혼 샘으로부터 성안의 터널 입구까지의 총 길이가 69m이고 깊이가 41m인데, 이 터널은 기혼 샘에서부터 “물을 공급하는 터널, 수직 터널, 수평 커브 터널, 계단 터널, 터널 입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11장 6절을 보면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에게 군대장관이 되게 하겠다고 다윗이 약속합니다. 그랬더니 요압이 앞장섰습니다. 요압이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워렌 터널을 통과하여 성안으로 잠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산성을 점령했습니다. 다윗이 약속한대로 요압이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성을 더 튼튼히 쌓아서 다윗 성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9절).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거기서 33년간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10절: 만군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졌다는 뜻입니다.
11절: 두로 왕 히람이 다윗의 집(궁전)을 짓는데 크게 협력했습니다.
12절: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13-16절: 그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고 기록합니다.
2. 다윗이 블레셋을 퇴치함 (17-25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차적인 사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하여 50년간 숱한 전쟁을 했지만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블레셋 족속의 땅들도 있었습니다.
(수 13:1-3) 『[1]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2]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모든 지역과 그술 족속의 모든 지역 [3] 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쪽 에그론 경계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통치자들의 땅 곧 가사 족속과 아스돗 족속과 아스글론 족속과 가드 족속과 에그론 족속과 또 남쪽 아위 족속의 땅과』
블레셋 족속은 에게 해 부근에서 해양생활을 하던 족속이었는데 주전 13세기 말에 가나안 땅의 지중해 연안으로 건너와 정착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21장에 따르면 아브라함 때에도 블레셋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전 20세기 이전부터 주전 13세기까지 가나안 땅으로 블레셋 족속의 이주가 계속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350년간의 사사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했는데 삼손이 사사로 활동할 때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40년간 다스렸습니다.
(삿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과 초대 왕 사울의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크게 괴롭혔던 족속이 블레셋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다스리기 시작할 때에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이 위기에서 구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무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큰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삼상 7:10-14)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사울 왕의 통치 중반기에 엄청난 규모의 블레셋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삼상 13장).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겁을 먹고 흩어지는 것을 본 사울이 다급하여 제사장만이 집전할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나서서 집전했습니다. 사무엘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 사울은 사무엘이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고 백성들은 흩어지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제사를 드렸다고 사무엘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렇게 변명하는 사울을 향하여 사무엘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 후에 다시 블레셋이 침공합니다(삼상 17장). 그때 소년 다윗이 등장하여 물맷돌로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쳐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둡니다.
사울의 통치 말기에 블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삼상 28-31장). 길보아산에서 맞붙었는데 이스라엘이 대패하여 블레셋의 봉신국가가 됩니다. 그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사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다가 7년 6개월 후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수도로 삼았습니다. 한때 블레셋으로 망명하여 가드 왕의 봉신으로 있던 다윗이 이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블레셋이 듣고는 초장에 다윗의 군사력을 약화시켜 독립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두 번이나 연거푸 침공했지만 두 번 다 다윗과 그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고 오늘 본문은 기록합니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블레셋 족속을 비롯하여 여러 족속을 남겨두신 이유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삿 3:1-4) 『[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다윗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때까지 거의 5백년 간 여부스 족속과 블레셋 족속이 가나안 땅에서 그 위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렇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으로 인하여 그 5백 년간의 불순종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3. 승리의 원동력
오늘의 설교부제를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붙였습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여부스 족속과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그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여부스 족속과 불레셋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던 이방족속들과 통혼하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 전부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땅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소명이었는데 그 소명에 충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부스 족속이 가나안 땅의 한가운데에서, 블레셋 족속이 가나안 땅의 서부 해안에서 수백 년 동안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여부스 족속과 블레셋 족속을 퇴치함으로써 가나안 땅 전부를 하나님의 땅으로 회복한 것입니다. 모세의 시대로부터 계산하면 5백 년 만에 이룬 쾌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이 성경의 한결같은 주장입니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출애굽 2세대들에게 선포한 모세의 고별설교인데 그 핵심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만복을 받아 그 복을 세계의 모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혹 전쟁이 발발해도 하나님께서 승리하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신 28:1-2, 6-7)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 1:2-3, 7-8)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윗이 순종했습니다. 다윗의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부스와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삼하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여기 만군의 하나님이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어떠한 전쟁에서도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점점 더 강성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는 않으십니다. 대신에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가 계속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징계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순종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두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2) 다윗의 잘 훈련된 군사들이 하나가 되어 전투에 임한 것도 승리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먼저 여부스 족속을 치는 자에게 군대장관이 되게 하겠다고 다윗이 약속했는데 요압이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요압이 군대장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압과 함께 전쟁에 참전한 군사들의 헌신과 협력이 없었다면 승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부스 족속을 섬멸한 사건을 기록한 역대상 11:4-9에 이어 곧바로 역대상 11:10부터 12:40까지 다윗의 용사들을 길게 열거합니다. 이처럼 여부스 족속과 블레셋 족속을 비롯하여 여러 전쟁에서 다윗의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용사들이 하나가 되어 전쟁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영적 전투에 출전한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의 군대인 교회의 대적은 마귀(사탄)와 마귀에게 복속된 악한 영들과 타락한 정치권력과 종교권력과 문화입니다.
엡 6:11-13)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사도 바울은 성도와 교회가 악한 세력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성도 개개인은 물론 교회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가운데 가장 탁월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대장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함께 하나가 되어 전진할 때에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영적 전투는 선한 군대와 악한 군대의 싸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군대인 성도와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가 된 교회는 사망의 권세도 제압합니다. 성도의 하나 됨이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3) 오는 본문에서 승리의 원동력으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기도입니다.
두 번이나 연거푸 블레셋 대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이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전술을 명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로써 두 번 다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일차 침공과 그 결과 (17-21절)
17-18절: 블레셋의 침공
19절: 다윗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삼하 5: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20절: 다윗의 순종과 승리
(삼하 5:20)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21절: 후속조치
- 우상제거: 블레셋이 섬기고 있는 신과 우상은 헛것이다.
블레셋의 2차 침공과 결과 (22-25절)
22절: 블레셋의 재침공
23-24절: 다윗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삼하 5:23-25) 『[23]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24]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5]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25절: 다윗의 순종과 승리
금방 살펴본 대로 두 번의 블레셋 침공은 비슷했습니다. 대군이 침공했습니다. 맞붙은 곳도 르바임 골짜기였습니다. 다윗이 기도한 것도 비슷합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일차 침공 때에도 기도했지만 2차 침공 때에도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관하여 큰 교훈을 얻습니다. 매사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비슷한 사건일수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성도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상황을 사탄은 연출합니다. 얼마 전에 위기를 만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지혜와 힘을 주셔서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위기가 다시 닥치면 방심하게 됩니다. 일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응답이 지금도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이전에 위기를 극복했던 방식으로 대처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도록 미혹하는 사탄의 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비슷한 사건이지만 매사에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슷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같은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능한 블레셋 군대가 일차 침공에 실패했는데 2차 침공 때에도 일차 침공 때와 같은 전술을 사용할 리 만무합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여 침공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사건을 만날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도면밀하게 상황을 살피고 다각도로 대처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상식과 경험과 지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기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기도해야 상황의 변화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 주셔서 가장 적절한 대처방안을 찾게 하십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이 일차 침공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맞붙어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2차 침공 때에는 기습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기습공격의 장소와 시간까지 말씀하셨습니다.
- 기습 장소(23절): 그들(블레셋 군사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 기습 시간(24절 상반절):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나거든 곧 공격하라!
- 하나님의 약속(24절 하반절):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블레셋이 침공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시 침공했을 때 다윗은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 다 응답하셨는데 다르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승리했습니다. 기도야말로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우리도 이런저런 위기를 만납니다. 그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한 것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위기를 만날 때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려면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돕기 위하여 우리 안에 내주해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성도는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매사에 항상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항상 기도하는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누립니다. 기도응답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이웃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살아내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입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벧전 5:6-7)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승리하는 삶의 원동력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 주님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한 마음으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3) 매사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한주간도 형제들과 함께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끝) 찬송 352장
신앙인으로 점점 강성해지려면
삼하 5장 10절 / 김필곤목사
세상에 보면 점점 강성해 지는 사람이 있고 점점 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점점 강성해지는 가정이 있고 점점 약해지는 가정이 있습니다. 점점 강성해지는 사업이 있고 점점 약해지는 사업이 있습니다. 점점 강성해지는 교회가 있고 점점 약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떤 사람, 어떤 가정, 어떤 사업, 어떤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대표적으로 점점 강해지는 집과 점점 약해지는 집을 비교해 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2대 왕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점점 약해졌고 다윗 왕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사울은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께 효도하는 예의 바른 아이였습니다. 외모도 준수하고 잘생겼습니다. 그런데도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는데 그 끝은 아주 불행했습니다. 사무엘상 31장 6절에 보면 그의 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었더라(삼상 31:6)" 처음에는 잘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망해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도 그랬습니다. 니골라도 그랬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랬습니다. 아간도 그랬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여러 왕이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어떻습니까?
어릴 때 목동이었지만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대상 29장 2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대상 29:28)”
오늘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님들과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아들딸들은 다윗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사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다윗 같은 가문을 만들고 싶습니까? 사울 같은 가문을 만들고 싶습니까? 다윗 같은 집안을 만들고 싶습니까? 사울 같은 집안을 만들고 싶습니까?
1. 점점 강성해지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5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하게 된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삼하 5:10)”
왜 점점 강해졌다고 합니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곳에 밑줄을 그어 놓고 마음속에 새기고 또 새기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 인생은 점점 강해질 수 있습니다. 많이 배웠다고, 가문이 좋다고, 실력이 있다고, 돈이 많다고, 권력이 있다고 점점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여호와께서 함께하셔서 점점 강해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성경을 찾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하 7장 9절입니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사무엘하 8장 6절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셔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사무엘하 8장 14절에도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 8:14)"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대상 11:9)”
다윗은 목동의 가문에서 어릴 때부터 목동으로 자란 사람입니다. 다윗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어릴 때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기름부을 때 다른 형제들은 다 대상으로 사무엘 앞에 데리고 왔지만, 다윗을 제외했습니다. 그만큼 형제들 가운데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도 죄가 있는 사람이고 실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부하의 아내를 간음한 사람이고 부하를 죽게 만든 살인 교사죄를 저지를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점점 강성해진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하게 하시니라 (대하1:1)"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다윗이 지혜로운 사람이 된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삼상18:14)"
그러나 점점 약해진 사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하나님이 떠나니 무엇이 사울을 지배해 버립니까?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16:14)"
우리 신앙인이 성공하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점점 강해지는 비결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는 잘 될 수가 없습니다. 바다를 떠난 배는 흥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떠난 비행기는 잘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신앙인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서 생명이 떠나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시체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 떠나버리면 우리 가정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난해도, 부족해도, 장애가 있어도, 권력이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가정이 진정 흥하는 가정이고 형통하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혹 아무도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 없다고 낙심하며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점점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제들에게 시기 받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39:2)”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감옥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였고,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니 범사에 형통했다(창39:23)고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는 마침내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어 점점 더 강성해졌습니다.
혹 재능이 없고 능력이 없다고 낙심하며 포기하는 젊은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미래는 점점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은퇴하고 난 이후, 고향에 돌아가 소일하면서 조용히 살았답니다. 어느 날 트루먼 기념 도서관에 갔을 때, 학교 선생님과 함께 여러 아이가 몰려왔답니다. 그중 한 아이가 물었답니다. “대통령께서는 제 나이만 했을 적에 인기가 대단하셨고, 반장도 하셨겠지요?” 트루먼이 대답했답니다. “정반대야, 눈이 나빠 안경 없이는 맹인과 같았고 재주도 없었고 운동도 못 했고, 겁쟁이란 말을 들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어요?”라고 아이가 물어보자 트루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애야 나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성경 말씀을 믿었단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계시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못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혹 가정 배경이 출신 성분이 나쁘다고 낙심하며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점점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북한 꽃제비 출신으로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한 지성호 당선자가 있습니다. 그는 국회의원으로 “복음으로 평화통일이 이뤄지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추겠다.”라는 각오를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밝혔습니다. 그는 “역사의 현장에서 기적을 보았다.”며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기에 가능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에 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니까 점점 강해졌습니다.
북한에서 14살 때 살기 위해 석탄을 훔치려고 열차에 올랐다가 불의의 사고로 왼쪽 다리와 손가락을 잃었다고 합니다. 마취제 없이 뼈를 잘라내는 고통을 당했고, 목발을 짚고 중국으로 건너가 쌀을 구하다가 붙잡혀 북송당해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6년 남동생과 함께 탈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니까 북한에서 먹을 것도 없어 굶주린 꽃제비 거지가, 세상 낙오자로 누구도 눈길도 받지 못한 장애인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당선자가 된 것입니다.
혹 불치의 질병으로 절망하고 낙심하며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치유받고 점점 강해질 수 있습니다.
피겨 스케이팅으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스콧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스콧 해밀턴의 행복을 위한 8가지 기본기>라는 책을 썼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친부모에게 버림받았답니다.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지만 두 살 때부터 괴질에 걸려 병원을 전전했답니다. 1997년 고환암 3기 진단을 받았답니다. 2004년 뇌종양과 뇌하수체암에 걸렸답니다. 2010년 또 뇌종양에 걸렸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갔답니다. 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1984년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81년부터 1984년까지 4회 연속 전미 선수권 대회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세 번이나 암을 이겨내고 현재 암 환자를 돕는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8가지 행복의 비결 중에 "전능한 코치를 믿으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그는 전능한 코치라 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성공의 비결은 내가 얼음판 위에서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나의 신앙심은 혼자라면 절대 이룰 수 없었던 경지까지 나를 항상 끌어주었다."라고 말합니다.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신 웨슬리 목사님은 1790년 3월 2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천국에 가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나는 내가 숨 쉬는 동안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라는 찬송가를 부르고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이렇게 두 번을 외쳤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이 말이 웨슬리 목사님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2-23)”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미친 것 전혀없네) 오 신실하신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사 4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이렇게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그 하나님과 함께 점점 더 강해지는 인생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0절 한 번 다시 보세요.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로 “아도나이 쩨바옷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군대인데(창2:1)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의 주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인생의 모든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생의 전쟁에 동행하시어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쩨바옷트”는 싸우다는 뜻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여러 형태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수많은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적들을 쳐부수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 “그때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삶의 전쟁에서 떠나 있거나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그렇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느 때는 어떤 환경에서든 늘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계시니”라는 말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항상 동행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의도한 대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드디어 왕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고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 날입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무엇을 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기도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시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단돈 50달러로 미국 27위의 부자가 된 텔레비디오의 황규빈 회장이 자신의 삶을 <버티지 못할 시련은 없다>라는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1982년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50인에게 주어지는 AAA 골든 플레이트 수상했고, 1986년 미국 국회에서 일백 년에 한 번 수여하는 앨리스 아일랜드상 수상했으며, 1993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첨단 기술분야 기술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포장과 산업훈장도 수상했습니다. 그는 차고에서 <텔레비디오>를 설립해 6개월 동안 9천 달러를 다 날려버렸지만 낙심하지 않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깨지지 않는 벽은 없다고 말을 합니다. “난공불락의 성벽에도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닐 구멍은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포기하지 않는 도전 정신은 신앙으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중학교 때 만났는데 그의 뇌리에 박힌 말씀은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신앙은 세 가지 선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리더십이었다고 합니다. 십대 후반부터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이끄는 법을 배우다 보니 아무리 많은 수의 사람들 앞에 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답니다.
둘째로는 경영주로서 회사 직원들과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자질을 주었답니다.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가족을 위해, 그리고 친구를 위해, 마지막으로 직원과 회사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직원들과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셋째로는 기도 중에 얻는 영감이었다고 합니다. 15분 이상의 기도시간 동안 머리를 스치는 번득이는 영감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간절히 구하면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점점 강해지는 기업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이루어 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3)"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승리하여 점점 강성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인생은 한 번 승리했다고 승리가 죽을 때까지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한순간 무너지면 그것을 끝이 날 수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똑같은 적이 올라왔다고 과거에 이겼다고 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 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라고 말씀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용맹스럽게 싸워 이긴 다윗인데 올라가지 말고 기습공격하면 백성들이 얼마나 비겁하다고 말하겠습니까?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면 기습하라는 말이 얼마나 요즈음 말로하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미신적인 말입니까?
그 말에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말씀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면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도 이해가 되지 않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씀일지라도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며 승리하여 점점 강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점점 강성해지려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의 주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인생의 모든 전쟁을 우리 앞서 싸우셔서 우리를 이기게 하여 점점 강성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어느 때는 어떤 환경에서든 늘 동행해 주시어 점점 강성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어 점점 강성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면 승리하게 하여 점점 강성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 승부
삼하 5장 10절 / 이익환목사(욥바교회)
인생은 전쟁과 같다. 싸울 일이 널려 있다. 이제 좀 끝나나 싶으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된다. 2년 전 SBS 스페셜-엄마의 전쟁’이란 프로가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의 주부들이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육아전쟁’, ‘입시전쟁’, ‘취업전쟁’, ‘황혼육아 전쟁’과 같이 일련의 전선에 서게 된다고 지적했다. 아빠의 전쟁도 있다. 한국 아빠들은 직장 전선에서 싸우느라 집에 사는 날이 별로 없다. 경쟁업체와의 경쟁, 직장 내에서의 경쟁, 자녀들의 불만은 커져갈 수 밖에 없다. 사는 게 전쟁이다.
어떻게 승부를 걸어야 할까? 어떻게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다윗은 그의 나이 서른 일곱살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왕으로서의 영광을 누릴 일이 기다릴 법 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연속되는 전쟁이었다. 그가 그 전쟁들을 어떻게 치루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인생의 전쟁을 승리하는 비결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된지 7년 6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이스라엘에서는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도 죽고, 왕이었던 이스보셋도 암살당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살기 위해 그들은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그에게 기름을 부으며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다.
다윗은 더이상 유다지파의 왕이 아니었다. 유다의 수도였던 헤브론은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기에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다윗이 수도로 찾은 것이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계에 있으면서 두 지역 모두를 통치하기에 알맞은 위치였다. 그리고 해발 754m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천연의 요새였다. 방어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여부스족속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원래 가나안 정복 당시 유다지파에게 할당 된 땅이었다. 땅 배분이 BC 1400년경 이루어졌다. 그런데 400년이 넘도록 유다지파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다. 여부스 족속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고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하 5: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여부스 족속들은 강했다. 자신감도 넘쳤다. 그들은 다윗과 그의 부대를 향하여 외쳤다.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원수들은 이렇게 싸움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의 기를 죽인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싸워볼 의지조차 갖지 못하도록 우리를 낙담시키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원수가 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 예루살렘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으로 주신 땅이기에 다윗은 이전의 세대들이 포기해버렸던 전쟁을 수행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삼하 5: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다윗이 어떻게 강한 요새였던 시온 산성을 빼앗을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상대가 강하면 아예 싸워볼 엄두조차 갖지 않는다. 그러나 강해보이는 원수에게도 헛점은 있었다. 다윗은 물을 긷는 수구로 올라가 시온성을 접수한 것이다. 다윗은 강한 상대들의 헛점을 보는데 선수였던 것 같다. 그는 이스라엘 모두가 골리앗의 크기에 떨고 있을 때 골리앗의 헛점을 보았다. ‘음, 아무렇게나 던져도 맞을 데가 많겠군’ 다윗은 그에게 가장 익숙한 물맷돌로 거인을 제압했다. 그러나 그가 용감하게 전쟁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전쟁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상 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것은 다윗이 약 십오세 소년이었을 때 터득한 전쟁의 비결이었다.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며 전쟁에 나가는 것이었다.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의 강함에 있지 않고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여부스와의 전쟁에서도 다윗은 동일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전쟁에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었다. 삼하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And David became more and more powerful, because the LORD God of Heaven’s Armies was with him.”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 엘로헤이 쩨바옷(יהוָ֛ה אֱלֹהֵ֥י צְבָאֹ֖ות)이다. 쩨바옷은 군대(צְבָאֹ)의 복수형이다. 결국 하늘의 군대가 다윗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전쟁은 하늘의 군대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때문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이다. 하늘에서 결정하면 땅의 일은 풀리는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전쟁이 진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진짜인 것이다. 전쟁 이전의 전쟁에서 승부가 이미 결정되는 것이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The one thing I ask of the LORD – the thing I seek most – is to live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delighting in the LORD’s perfections and meditating in his Temple.” 다윗의 시다. 그는 평생 한가지 것을 구하고자 애썼다. 그가 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이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세상의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려한다.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이 주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을 그 마음에 소유하기 위해 씨름했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전쟁에서 다윗이 승리했기에 하나님은 그의 편이 되셨다. 그리고 그가 하는 전쟁은 곧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이 된 것이다.
다윗이 여부스까지 몰아내며 시온 성을 차지하자 블레셋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7~8년 전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왕에게 피했을 때 아기스왕은 다윗에게 시글락이란 성을 나누어줄 정도로 다윗을 신뢰했다. 당시 블레셋은 사울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하고 계속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을 때만해도 블레셋은 그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윗이 블레셋의 봉신군주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이 너무 커버렸다. 그가 이스라엘왕이 되어 수도까지 다윗성으로 옮기자 블레셋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총동원하여 르바임 골짜기로 몰려오게 된 것이다.
삼하 5:17-18,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블레셋은 이미 사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만큼 무적이었다. 그들이 다윗성의 코 앞인 르바임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제 막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다윗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만큼 전력에 차이가 나는 전쟁이었다.
다윗은 이 상황에서 자신의 전력을 파악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성을 구한 것이 아니라 절대성을 구했다. 어차피 그가 치룬 전쟁들 모두는 그가 강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께 나아갔다. 삼하 5: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둔 다윗의 태도는 여기서 결정되었다. 그는 이 기도를 통해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얻었다. 상대방이 강한 것과 그들의 수가 문제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자신의 손에 그들을 넘기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바알브라심에서 대승을 거둔다. 바알브라심은 ‘주가 흩으셨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흩으신 전쟁에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한 일은 그들이 버리고 간 우상을 치워 불태우는 일이었다.
삼하 5:22,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한번 물리친 것 같아도 원수의 세력은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려고 또 다시 밀려들어온다. 싸움이 반복될 때 우리는 쉽게 지친다. 지겨운 싸움이 언제까지 반복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삼하 5:23-24,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이번에는 구체적인 작전을 지시하신다. 지금 바로 올라가 상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습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공격의 시점은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릴 때’이다. 그것은 곧 여호와가 다윗보다 앞서 나아가서 공격하는 전쟁이었다. 다윗은 그리하여 하늘의 군대가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결국 다윗은 그 소리를 듣고 공격을 개시했고 블레셋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그들을 쫓아냈다.
역대상은 이 전쟁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상 14:17,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고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더라” 사실 이 르바임 골짜기에서 있었던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전쟁이었다. 그만큼 블레셋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다윗을 주목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하늘 군대를 보내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윗을 높여주셨고, 그리하여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군대를 보내신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져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많은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늘을 주목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늘 군대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기 위해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하고, 전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쟁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셔야 승리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땅에서 치르는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 전쟁이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시는가를 결정해야 하는 싸움이다. 나의 실력으로 상대적인 우위를 확보하는 싸움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께 순복하는가 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전쟁이 이 땅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을 구하며 하나님께 순복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전쟁을 시작하신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전쟁의 원리다. 바라기는 하나님 한 분을 구하며, 이 땅에서 우리가 치르고 있는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묻고 또 묻고
김형구목사 / 삼하 5:11-25
1.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읍시다(11-1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는 증거가 먼저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도록 하십니다. 두로는 항구 도시로서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부터 이미 견고한 성읍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싸우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아니기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대신 탁월한 외교적 역량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제는 사절까지 보내오고,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궁궐을 짓게 합니다.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 진행된 사건 사건 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합니다. 본문에서는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도록 하는 섭리를 보고서 은혜를 깨닫습니다. 유대인들은 목축업자들입니다. 이들은 집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이동하는 천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기에 집을 짓는 문외한입니다. 그런데 히람 사람은 건축의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히람이 보내준 백향목과 건축 기술자들을 통하여 궁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워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자기 힘으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높아진 것도 자기들의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기에 그는 겸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도 감사하고, 낙엽을 밟으면서도 감사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도 감사하고, 물 한 모금에도 감사하고, 시련과 환난 중에서도 감사하며, 시련은 있어도 시험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범사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2. 우리는 다스림을 계속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13-16)
본문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후에 처첩들을 더 두게 되어 아들과 딸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당시 왕들이 많은 첩을 거느리는 것은 거의 일반화된 규례였습니다. 그리고 처첩의 수는 곧 권세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범죄 행위입니다. 처첩을 둔다는 것은 음란 때문에 생기는 죄악인데, 성경과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음란죄를 얼마나 철저하게 다스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타락하는 모습이 점차 강대해질 때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의 지, 정, 의를 통하여 창조하십니다. 인간이 생존하여 자손을 번성하도록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본능 속에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이 본능이 다스림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다스림을 받지 못하면 짐승 같은 삶을 살기에 위법임을 성경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왕이 되었음을 깨달았다면 마지막까지 이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다스림 속에 직무를 감당해야지 왕의 직무를 통하여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사용된다면 자기 욕구만을 채우는 짐승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주신 복이 강성이지만 이 복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도리어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시고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경건의 연습이 지속이 되어야 합니다. 형통할 때 조심해야 하고, 일어섰다 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고, 하나의 산을 넘으면 이제 됐다 하는 것이 아니라 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가던 길을 가야 합니다.
형통할 때 더 근신하며 경건의 연습을 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3. 하나님께 묻고 또 묻도록 합시다(17-25)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합니다. 이때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 이 모습을 목격하고서 하나님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라고 묻자 여호와께서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 응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전쟁하여 승리한 후 ‘바알브라심’이란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후 다시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하여지자 또 다윗이 여호와께 물으니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때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하신 응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여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는 대승을 거둡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이길 수 있었던 근본적인 비결은 기도에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삼상 17:47)임을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기에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했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순수한 신앙을 간직했고, 겸손했기에 그는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께 묻고 또 묻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라는 말씀이요, 주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지기에 묻고 또 묻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다윗 왕국의 번영과 승리
이준원목사 / 삼하 5장 11~25절
세상의 웬만한 사람은 다 그렇지만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라고 하면 ‘나쁜 나라’, 또 어느 나라라고 하면 ‘좋은 나라’라고 하고, 사람도 어느 사람 이름을 대면 ‘나쁜 사람’ 또는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모든 기준은 자기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면 좋은 나라와 좋은 사람이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나라이고 나쁜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개 일본을 굉장히 싫어하고, 일본에도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이 중국을 싫어하고, 중국도 한국을 싫어하는 등,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름대로 이미지가 있으실 겁니다. 주변에 나쁜 인도 사람 이웃이 있으면 나쁜 이미지가 있을 것이고, 친근하게 잘 지내면 좋은 이미지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로 단순히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숙하게 인생을 살아가려면 그렇게 단순화하고 내 기준에 따라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이상해질 수 있습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인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이미 30년 전에도 과학 계통의 대단한 논문이 나오면 대부분 인도 사람들이 쓴 것이었습니다. 정말 뛰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도는 1960년대에 중국과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겪었고, 중국이 핵을 개발하자 자기들도 핵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인도에게 30년 동안 경제제재를 가했습니다. 결국 인도가 1974년에 핵 개발에 성공하자, 카슈미르를 분할 점령하고 인도와 대립하던 파키스탄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 핵 개발에 돌입했습니다. 인도 핵 개발을 막으려고 했던 미국이 이번에는 중동과 소련을 견제하고 대항하는 나라로 삼기 위해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눈감아 줬고 결국 1998년에 성공했습니다.
지난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방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할 때 인도는 참여하지 않았고 지금도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인도로 달려갔습니다. 러시아는 카슈미르 분쟁의 UN 안보리 안건 상정에 대해 그동안 인도를 계속해서 지지하며 상정을 막아 줬습니다. 인도의 입장은 카슈미르와 남아시아 문제는 인도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고, 러시아는 중국 견제를 위해서라도 인도를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고 계속 도와주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는 인도에 유조선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식용유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무려 25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물론 제재를 안 당하려고 이리 돌고 저리 돌면서 수입해서 러시아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제조업이 부실한 인도는 중국을 대체할 세계 생산기지를 꿈꾸고 있는데, 실제로 인도는 현재 미국의 대표적 기업인 애플(Apple)의 중요한 하청기지입니다. 전기차 회사 테슬라(Tesla)도 최근 공장을 건설 중이고, 이 근처에 공장이 들어오는 인텔(Intel)도 공장을 지을지 고려 중입니다.
사실 인도는 미국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여 13개국이 참여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의 출범식이 지난 5월 23일 도쿄에서 열릴 때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참석했습니다. 미국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중국과 서로 견제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도움을 많이 받는 인도의 입장에서 모디 총리는 굉장히 실리적인 외교를 너무나 잘 펼치고 있습니다.
인도가 실제로 중국을 대체할 세계 생산기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나뉩니다. 인도는 남아시아 패권국이면서도 또한 아시아 균형자 역할을 자처하는 나라입니다. 이쪽저쪽에 완전히 붙지도 않고 또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고, 가운데서 절묘하게 적과도 교류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우리 편과 상대편을 자유자재로 바꾸어가면서 나아가는 실용 외교가 무엇인지를 인도의 모디 총리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무시하는데, 사실 그런 것은 배울 점입니다.
인도의 모디 총리처럼 아주 절묘한 외교를 펼치던 비슷한 인물이 고대에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두로 왕 히람입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완전히 붙지도 않고 적으로 돌리지도 않으면서, 중간에서 아주 줄타기를 잘했습니다. 주변 강국들 사이에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잘 판단하여 움직인 사람이 두로 왕 히람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그가 재빨리 움직이는 것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다윗 왕국의 번영 (11~16절)
1) 다윗을 위한 집 (11-12)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11절)
보통 두로와 시돈은 함께 묶입니다. 두로는 시돈과 함께 BC 10~8세기에 중계 무역으로 성장한 도시 국가입니다. 세계사를 보면 무역에 뛰어난 ‘페니키아’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두로입니다. 이스라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두로는 지중해를 통해 목재, 기름, 말, 귀금속, 포도주, 심지어 노예 등을 중계 무역하여 크게 번성한 도시국가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두로 왕 히람의 도움으로 왕궁을 건설했다는 것은 다윗의 명성이 주변 지역까지 퍼져 나갔음을 보여줍니다. 히람은 다윗의 집을 지어주기 위해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에게 백향목과 사람들을 보내서 그를 위한 집(궁전)을 짓게 합니다.
다윗이 이것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에는 궁전을 건축할 석공이나 토목 기술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산이나 광야에 살았기 때문에 다듬지 않은 돌이나 목재로 집을 지었고, 초기 이스라엘 마을들에는 방어를 위한 성벽도 없었습니다. 성벽이 있어야 적들로부터 방어하는데, 그것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주변 나라 왕들처럼 그럴듯한 왕궁을 갖고 싶었을 것이지만, 당시 이스라엘에는 그런 건축을 할 만한 재료도 없었고 기술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두로 왕 히람을 통해 도움의 손길을 보내셨습니다. 히람은 '후람'으로도 불리는데(대하 2:3), 표기가 후람이 될 수도 있고 히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두로를 다스리던 왕입니다. 사실은 히람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집트의 파라오(바로) 왕처럼 타이틀입니다. 다윗은 히람의 도움으로 왕궁을 건설하고, 솔로몬 또한 그의 도움을 받아서 나중에 왕궁과 성전을 건설하게 됩니다(대하 2:11-16).
이처럼 다윗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히람이 먼저 왕궁 건축을 위한 자재와 사람들을 보냈다는 것은, 점점 더 강성해지고 있는 다윗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서 자신의 중계 무역의 안정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히람은 이런 외교를 잘하는 사람이있습니다. 무엇보다 시리아로 통하는 무역 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윗과 좋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히람 같은 사람이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겠습니까?
히람은 외교에 아주 능했던 사람이고, 그가 다윗을 위해 그 유명한 레바논 백향목과 자기 나라 기술자들을 자발적으로 보내어 궁전을 지어준 것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 투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러한 히람의 의도까지도 사용하십니다. 히람은 철저히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뿐인데,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사용하셔서 다윗의 궁을 짓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답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12절)
이럴 때 보통 사람이면, 자기가 가만히 있는데 유명한 두로의 히람이 백향목과 사람들을 보내서 자기 궁전을 지어주니까 우쭐해져서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교만하게 되기 쉽습니다. ‘야, 내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바치는 것을 보니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구나. 그래, 역시 나는 잘났어.’라고 하기 쉬운데, 다윗은 이렇게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나라가 강성해갈 때 교만해지지 않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나라의 번영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왕궁을 짓고 번쩍거리는 영광을 드러내며 ‘다윗 왕은 위대하시다.’라는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이런 번영이 주어졌음을 그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 해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이 백성의 목자로서 그들을 섬기기 위해 왕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그가 명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절대 권력을 가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유다 지파 하나의 왕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가장 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자기가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위에 누군가가 계신데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자기는 만군의 하나님의 다스림 밑에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처럼 주어진 이 번영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그는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좋아하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합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한다면 그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일이 잘될 때 내가 잘나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해 주셨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 밑에서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예뻐하시겠습니까?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순간 하나님은 즉시 그 일을 거두어 가시지만, 하나님께 이처럼 영광을 돌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더 큰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2) 다윗의 여려 처첩과 자녀들 (13-16)
이 5장 앞부분에서는 다윗 왕국의 번영에 대해 나오는데, 여기서는 다윗의 첩 소생들에 대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훌륭한 다윗에게 별 필요 없는 것 같은 내용, 이상한 내용이 끼어 있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13절)
우리가 지난 3장에서 본 것처럼 다윗에게는 이미 여섯 명이나 되는 아내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온 후 또 다른 처첩들을 더 두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서 단순히 다윗이 여자를 좋아했나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나 인간적인 정욕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런 면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14-16절)
이중에 우리가 아는 사람은 솔로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들을 예루살렘에서 낳았다는 겁니다. 3장에서는 누구에게서 누구를 낳았다고 하며 그 어머니 이름과 아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여기 보면 처첩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아들들의 이름만 나와 있습니다. 또 역대상 3장을 보면, 이 11명의 아들들이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들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것은 단순히 다윗이 그냥 여자를 좋아해서 결혼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여러 여자들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많이 낳을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왕들에게는 아내들과 자녀들이 많은 것이 왕조의 안정과 직결됩니다. 손이 귀하면 권력다툼이 더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많은 처첩들을 통해 자녀들 특히 아들들을 많이 낳았다는 내용은 다윗 왕국이 점점 안정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힌트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럴 뿐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히람을 통해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달았고, 또 자기가 왕위에 오른 것이 자기가 잘나서 된 것이거나 자기만 잘 먹고 잘살라고 하신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위대한 왕이었지만 그도 한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리 다윗이라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도 다른 왕들처럼 똑같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윗은 그런 방법을 안 쓰고 오직 영적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갔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다 죄가 있었고 실수가 있었고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그냥 보여줍니다. 지금 이게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도 이렇게 악한 사람이었다. 다윗을 우상화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대 왕들이 많은 처첩들과 자녀들을 거느린 것이 큰 권세와 영광의 상징이었더라도,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인도해주실 텐데 뭐 하러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합니까?
그러나 다윗도 다른 왕들처럼 많은 처첩들을 거느리고 그들에게서 많은 자녀들을 낳았고, 이것은 바로 신명기에서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신 17:17). 모세의 고별설교인 신명기를 통해 하나님은 이미 500년 전에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을 통해 나중에 다윗이 큰 화를 겪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더라도, 아무리 남들이 다 하는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남들이 안 하는 것, 기피하는 것, 싫어하는 것, 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하는 것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고 명분이 좋아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안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동시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현실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그것이 결국 우리 삶에서 나중에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좋은 것 같고 괜찮은 것 같더라도, 남들도 다 하는 것이니까 어떠냐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나중에 그것 때문에 꼭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일어나면 그럽니다. ‘하나님, 저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야, 나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했잖아. 그런데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 어떡해?’라고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탓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함께해주시고 사랑으로 돌봐주십니다.
그래도 다윗 정도로 겸손하게 행하며 최대한 교만해지지 않으려고 애썼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완벽하거나 죄를 안 지어서 사랑하신 게 아닙니다. 그도 죄인이었고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바로바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받아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특히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가 실수해서 넘어졌을 때, 잘못을 범했을 때, 죄를 지었을 때, 그 상태에서 ‘나는 안 돼.’ 하고 포기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겁니다.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고 다시 귀한 은혜 가운데 인도해주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한 후에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실패합니다. 성공하고도 겸손한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베푸신 분이며 자신의 번영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된 줄로 생각합니다. 성공해서 믿음이 더 좋아진 사람이 많습니까, 실패해서 믿음이 더 좋아진 사람이 많습니까? 실패했을 때 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있어도, 성공했을 때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며 나오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아니, 오히려 신앙을 떠나 버립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해서 된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렇게 번영과 성공을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 성공과 명성과 부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민자나 유학생이나 주재원으로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만 해도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은 한국에서 사는 것이 아주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 인종차별이 조금 있다고 해도 큰 지장 없이 잘살고 있지 않습니까? 간신히 먹고사는 정도가 아니라, 여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집집마다 이만큼 큰 TV가 없는 집 있습니까? 그렇게 큰 TV를 놓고 살고 있고, 차는 두 대, 세 대씩 있는데 그것도 비싼 차이고, 집도 좋습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잘살고 있습니까?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야, 내가 열심히 하니까 이렇게 돈이 따라오고 성공하는구나. 역시 나는 참 잘난 사람이야.’라고 할 때 넘어지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떠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도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세계적으로 따지면 미국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상위 10%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차가 두 대만 있어도 상위 1% 안에 들어갑니다. 나만 잘 먹고 잘살라고 그렇게 해주신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도 헌금을 하지만 누군가를 돕자고 하면 다 같이 마음을 모아서 구제헌금을 보냅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나에게 재물을 주시고 잘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이 나만 편안하게 잘 먹고 잘살라고 하신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믿음의 고백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과 영향력이 주어질 때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성공하면 그 공을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돌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성공의 목적도 잊어버리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자기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만 사용하려고 듭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성공이 그 사람의 인생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시간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각자 집에서도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또 함께 정기적으로 이렇게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며 섬기는 것은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할 때 우리는 그러한 성공의 저주도 또는 실패의 어려움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2. 다윗 왕국의 승리 (17~25절)
1) 블레셋과의 1차 전쟁 (17-21)
7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두 정부 아래 혼돈의 세월을 보냈던 이스라엘은 이제 다윗을 중심으로 굳게 뭉칩니다. 이러한 연합이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느낀 블레셋은 다윗의 기세를 초반에 꺾으려는 의도로 이스라엘에 쳐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 (17절)
블레셋은 다윗과 이스보셋이 전쟁하는 동안에는 다윗을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전으로 이스라엘의 세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자 위협을 느낀 블레셋은 즉시 이스라엘과 전쟁을 시작합니다.
게다가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자기들에게 와서 가드 왕 아기스 밑의 신하로 있던 사람 아닙니까? 그랬던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다고 할 때는 그래도 자기들 밑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다고 하니까 배신감을 느낀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찾으러” 올라왔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를 찾아 죽이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왕으로 모셨다는 사실이 곧장 이스라엘에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다윗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드디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었어도 여전히 전쟁의 위협은 존재했고, 오히려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 ‘야, 이제는 됐다.’라고 할 때 또 다른 어려움이 온다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가 믿음으로 나갔는데 어려움이 올 수가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우리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시고 피곤하셔서 주무셨습니다. 그때 큰 폭풍이 왔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건너가자고 하셨을 때 ‘피곤한데 뭘 건너가요? 내일 가요, 내일.’이라고 하며 안 갔으면 폭풍을 안 만납니다. 그러나 순종해서 갔기 때문에 오히려 폭풍을 만나고 죽을뻔한 위험을 당한 것입니다.
순종하면 다 잘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어려움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왕이 되니까 이제 다 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윗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삶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18절)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르바임은 원래 가나안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가리킬 때 쓰던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경에서는 거인족(21:15-21)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르바임’이라는 말이 참 절묘합니다. 지금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르바임에 진을 친 블레셋 거인들은 곧 죽은 자들이 될 것이라는 암시가 이 단어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19절)
다윗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굉장히 신중합니다. 그는 이 전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리고 거기서 승리를 주실 것인지를 먼저 하나님께 여쭤보고, 거기에 대한 응답을 얻은 후에 전쟁에 나갑니다.
사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신하로 있었기 때문에 군대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압니다. 누가 어디를 지휘하는지 다 압니다. 그들과의 전투 경험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그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먼저 도우심을 구합니다. 아무리 잘 아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먼저 도우심을 구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실 것과 승리의 약속을 주심으로써 다윗이 담대하게 전투에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20절)
‘바알브라심’은 '흩으시는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신 이 전쟁에서 다윗은 바알브라심, 즉 주님이 ‘물을 흩으심같이 자기 앞에서 자기 대적들을 흩으시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르바임 골짜기의 이름을 ‘바알브라심’ 즉 ‘승리의 장소’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제는 르바임이 아니라 바알브라심, 즉 ‘흩으시는 주님’, ‘승리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치우니라” (21절)
고대인들은 전쟁의 승패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싸움에 나갈 때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나갔습니다(삼상 4:3).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에 ‘언약궤를 들고 나가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까 이길 것이다.’라고 나갔는데, 그건 완전히 우상숭배자의 심리 아닙니까? 이게 있으면 이기고 없으면 진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고 나갔지만 전쟁에 져서 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런 것이 고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그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다곤 같은 우상들을 전쟁터에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큰 우상들을 신전에 세워놓는데, 그것을 작은 형상으로 만들어서 품고 다니며 자기를 보호하는 수호신이라고 믿고 가지고 나온 겁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다 버리고 도망갈 정도로 크게 패배합니다. 큰 우상도 들고나왔고 품고 다니는 사이즈의 우상들도 가지고 왔는데, 다 버리고 도망갈 정도로 크게 패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우상들을 치우는데, 역대상 14장을 보면 그냥 치운 게 아니라 그들이 블레셋 우상을 불에 태워 버렸다고 나옵니다(대상 14:12).
단순한 진리가 여기서 배웁니다. 하나님께 여쭈며 나아가 싸우는 싸움은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영적 싸움이 벌어질 때, 어려움이 닥쳐올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삶에서 우리의 악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나아가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싸우는 싸움은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번 이겼다고 다 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삶 공부 하나를 끝내면 얼마나 기쁨이 충만하고 뭔가를 이루어낸 것 같아 뿌듯합니까? <생명의 삶>, <새로운 삶>, <경건의 삶> 등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 직후가 위험합니다.
또 부흥회나 말씀사경회나 선교사님들이 와서 말씀을 전하실 때 큰 은혜를 받으며 ‘나도 이제 제대로 살아야겠다.’ 하며 성령 충만, 은혜 충만한 그 순간이 사실 굉장히 위험한 순간입니다. 한 번 이겼다고 다 끝난 게 아닙니다. 그다음에 또 옵니다.
그런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마음이 기뻐서 ‘오늘 너무 좋다. 은혜받았다.’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차 안에서 싸워서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 충만, 기쁨 충만할 때가 더욱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여기 보면 블레셋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쳐들어 옵니다.
2) 블레셋과의 2차 전쟁 (22-25)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22절)
블레셋은 1차 전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2차 전쟁을 일으킵니다. 다윗이 이 두 번째 전쟁에서 취한 태도 역시 처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지혜로운 판단을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3-24절)
이때도 ‘저희가 이번에도 또 올라갈까요? 그러면 승리를 주시겠습니까?’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함께하신다는 약속뿐 아니라 ‘아니다. 이번에는 다르게 하라.’ 하시면서 구체적인 전투 방법과 공격 시기까지 알려주십니다. 블레셋을 뒤에서 공격하되, 공격 시점을 다윗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공격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실 뽕나무 꼭대기에서 들리는 걸음 걷는 소리가 뭡니까? 뽕나무 꼭대기니까 저 위를 봐야 하는 건데, 그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군대가 블레셋을 공격하는 사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뽕나무 꼭대기에서 소리가 나는 것은 특이한 소리가 날 수도 있고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인을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군대가 다윗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나가서 싸우는 것입니다. 힘을 모아서 군대를 강력하게 훈련시키고, 훈련된 군대를 많이 동원하는 겁니다. 많을수록 이길 확률이 높아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움직이는 것을 기다려라. 하나님의 군대가 먼저 칠 것이다. 그럼 너희는 할 것도 없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판단과 상식과 지식을 보류하고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동시에, 뽕나무 꼭대기 즉 하늘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상징적으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나는 하나님의 군대의 발자국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 그것이 다윗의 할 일입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25절)
게바는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한 기브온을 말하고, 게셀은 르바임에서 동쪽으로 15마일이나 떨어진 곳입니다. 블레셋 영토에 가까운 곳이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영토 깊숙이 침범했던 블레셋 군대가 완전히 패배하고 도주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보면 단순히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다윗의 자세는 언제나 순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다윗은 전쟁이 일어나자 어떻게 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계속 기도만 한 게 아닙니다. 나가서 담대하게 블레셋과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만 한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판단으로 나가 싸우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기도했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나가서 싸웠습니다. 그 결과 승리를 거두었고,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나아갔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가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각자의 기도와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는 모든 것을 놓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도 제목을 갖고 계십니까? 건강, 사업, 직장, 자녀, 부모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연히 그런 것을 다 기도해야 합니다. 또 큰 것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든지, 경제 침체가 오면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직장 일을 한다면, 또는 사업체에서 일을 한다면,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까? 내가 너무 잘하는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까? 요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십니까? 배탈 안 나게, 맛있게 먹고 소화가 잘되게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 소소하고 작은 일도 기도하는 겁니다.
큰일이나 내가 바라는 일, 즉 ‘이거 잘되게 해주세요. 저거 잘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라고도 당연히 기도하지만, 매일 하는 일상생활에서, 심지어 걷는 것을 위해서도, 밖으로 나갈 때도, 운전할 때도 기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작은 일에는 대개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합니다. 너무나 일상적인 일에는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기도를 했으면 그 다음에 행동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는 기도하고 그 다음에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17)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기도와 행동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믿음 성장에 아주 중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동만 앞서면 세속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기도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상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 영적 이원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육적인 것은 나쁘고 영적인 것은 좋다고 하며 ‘영적, 영적’만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믿음의 사람은 일단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기도와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까 히람 같은 사람이나 인도의 총리 같은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아주 머리를 잘 써가면서 최대한 자신과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애를 씁니다.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안 하는, 순종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기도한 대로 순종하여 참 믿음의 사람들로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