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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을 물리치는 다윗
삼하 5:17-25
17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
18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20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21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치우니라
22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23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24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5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삼하 5:17-25 / [번번이 승리하는 다윗] 블레셋 족속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병력을 동원하여 그를 붙잡아 가려고 올라왔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먼저 산성으로 들어가 안전하게 피신하였다. 18) 블레셋 족속은 이제 힌놈 골짜기에서 가까운 르바임 골짜기의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19) 다윗이 이것을 보고 여호와께 물었다. `제가 저 블레셋 족속을 공격하면 어떻겠습니까? 주께서 제게 승리하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어서 가서 쳐라! 내가 틀림없이 네게 승리를 안겨 주겠다' 20) 그러자 다윗이 출전하여 블레셋 족속을 거침없이 쳐부수고 이렇게 말하였다. `물이 둑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휩쓸어 가듯, 여호와께서 나의 원수들을 모두 휩쓸어 가버리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둑같은 것을 `무너뜨리시는 주님' 이란 뜻이다. 21) 블레셋 족속들이 도주하기에 바빠 그들의 온갖 신상들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그것들을 치워버렸다. 22)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블레셋 족속이 또 다윗을 치러 올라와 르바임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23) 이번에도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 여호와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는 그들을 정면에서 공격하지 말고 그들의 뒤로 돌아가 바카향나무 숲속에 숨어 있다가 24) 바카나무의 가랑잎에서 행군하는 발자국 소리가 나거든 그때 나가 싸워라.' 25)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움직여 예루살렘 북쪽의 기브온 근처에 있는 게바에서부터 욥바의 남쪽으로 블레셋 국경에 있는 게셀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족속을 쫓아가면서 쳐부쉈다.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이 다윗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옵니다.
다윗과 블레셋과의 전쟁(17-25) 바알브라심 즉,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편에 위치한, 많은 군대가 주둔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한편 여러 정황상 이 때는 다윗이 왕이 된 후, 아직 헤브론에 거하며 아직 수도가 될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이전으로 추측 됩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블레셋의 두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직 다윗의 왕권이 강화되기 전에 그 싹을 자르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첫 번째 마음과, 두 번째로는 다윗을 통한 통일 이스라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때때로 넘어질 때가 있었지만, 다윗은 무엇보다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전쟁을 대비하여 군사를 모으고 전략을 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여쭙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늘 어떠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먼저 그 방편을 마련한 다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방법을 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구하고 나간 전쟁에서 다윗은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전쟁터를 바알브라심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 말은 ‘주(the Lord)’라는 뜻의 ‘바알’과 ‘부수어뜨리다’ 또는 ‘흩음’을 뜻하는 ‘브라심’이 결합된 말입니다. 즉, ‘흩으심의 주’라는 말로 하나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새로운 이름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전쟁에 패배했던 블레셋은 복수를 하기 위한 전쟁을 다시 일으킵니다. 여기서도 철저하게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는 전략가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옛날 다윗이 고백하였던 것처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두 번째 전쟁으로 인하여서 블레셋은 완전히 힘을 잃고 해안까지 밀려가게 되며 가나안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로써 다윗의 가나안 땅 통치의 서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21) 본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라는 참으로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우상조차 버렸을 정도이니 전쟁에서의 급박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각 나라나 지파들은 그들의 신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우상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는 예전에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간 이스라엘의 예(삼상 4:3-4)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으며, 전쟁에서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사건은 전혀 다릅니다. 살아있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우상들은 전쟁의 승리자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 의하여 치움을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궤는 전쟁에 승리하였다고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삼상 5, 6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적 용 : 우리가 버려야 할 우리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건강인가요? 재물인가요? 권력인가요? 명예인가요?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하나님으로 사시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갈 2:20).
어느 날 아프리카에서 제트비행기가 이륙시간이 되어도 이륙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기체내에 생쥐 한 마리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려 4시간이나 걸려서야 겨우 생쥐를 잡아내고서야 거대한 제트 여객기는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쥐가 기관 속에 들어가서 기관고장을 일으키면 아무리 큰 비행기일지라도 추락하기 때문에 작은 생쥐 일지라도 시간을 드려서 쥐를 잡았던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5:17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주석가들은 본절 이하에서 보여 주고 있는 블레셋과의 전투가 실제로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사건(6-10절)이전에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Leon Wood,Keil,Payne,Hertzberg).저들은 그 증거로서 몇가지 점을 들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1)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직후에 다윗과 전쟁을 벌이려 쳐들어왔다는 사실이다.즉 다윗 왕은 즉위하자마자 블레셋의 대침공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할 여유(6-10절)가 없었을 것이다.(2)블레셋 군대가 예루살렘을 직접 공략하지 아니하고 르바임(Rephaim)을 공격했다는 사실이다(18,22절).이와 같은 사실은 아직껏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이다(Leon Wood).(3)본 절의 '블레셋 사람이 다윗을 찾았다'는 말은 다윗이 아직 예르살렘에 그의 거처를 정하지 않았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9절).(4)더욱이 본문의 평행 구절에 해당되는 23:13,14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의 침공을 맞이하여 아둘람 굴에 진영을 설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 준다.이는 그가 아직도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즉,그가 이미 예루살렘을 정복했었더라면,구태여 아둘람 굴에 진영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이상과 같은 여러 증거들로 볼 때 다윗의 블레셋과의 전투는 예루살렘 정복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임에 틀림없다.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다 올라오매 - 블레셋 군대가 전에는 다윗을 죽이려 하지 않다가 그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곧 그를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의 얄팍한 정치적인 계산 때문이었다.즉,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그를 죽일 수 있는 처지에서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삼상 27:1-12).그 이유는 다윗을 당시 이스라엘이 왕 사울의 견제 세력으로 키워 이스라엘이 통일 국가가 되지 못하도록 하자는 계산 때문이었다.그러나 뜻밖에도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1-3절)길보아 전투(삼상 31장)이후 북방 이스라엘 지경에서 크게 세력을 확보한 그들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2:10 주석 참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확장된 세력을 굳히기 위해 이제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이다(Keil & Delitzsch,Lange,Matthew Henry,Pulpit Commentary).한편,본절에서 '블레셋 사람이 다 올라왔다'고 하는 말은 당시 그들이 통일된 다윗의 세력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요해처로 나가니라 - 여기서 '요해처'에 해당하는 '므추다'(* )는 '그물','접근하기 힘든 장소','요새'등을 뜻하는 말이다.그런데 학자들간에는 이 '요해처'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1)요해처는 다윗이 점령한 예루살렘 요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Lange).그러나 이 주장은 앞서 일어났던 사건임을 보여준 여러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옳지 못하다.특히 본절의 '나가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야라드'(* )는 본래 '내려가다'는 뜻이다.따라서 원래 높은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예루살렘 요새로 다윗이 내려갔다는 말은 모순이 된다.그렇다면 여기서의 '요해처'는 분명히 예루살렘 요새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Keil).(2)이 요해처는 아둘람 굴을 의미한다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Keil & Delitzsch,Thenius,Pulpit Commentary).그 근거로 그들은평행 구절인 23:13,14에서 다윗이 아둘람 굴에 그의 진영을 설치해 놓았던 사실을 들고 있다.이는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는 견해인데 많은 학자들도 대체로 이에 동의한다.한편, 이 아둘람 굴(the cave of Adullam)은 다윗이 사울 왕과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일시 도피하였던 곳으로 이곳에서 다윗은 그를 사모하여 추종한 자들의 장관이 되기도 하였다(삼상 22:1,2).오늘날 이곳은 '텔 에쉬-쉐잎 마두쿨'(Tell esh-Sheikh Madhkur)로 알려지고 있는데 가드와 베들레헴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5:18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 르바임 골짜기(the valley of Rephaim)는 그 뜻이 '거이늬 골짜기'인 것으로 보아 이는 아마 그 골짜기 부근에 살았던 거인족 '르바임'(신 2:11)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인 듯하다(Lange,Pulpit Commentary).실제로 그 지명처럼 르바임 골짜기는 길이가 약 5km,폭이 약 3km 정도나 되었으니 엄청난 수의 병력이 그곳에 포진(布陣)할 수 있었을 것이다.한편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다.이 골짜기의 북쪽 끝은 유다 지파의 북쪽 접경지인 동시에 또한 베냐민 지파의 남쪽 경계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블레셋 군대가 이곳을 먼저 점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계지인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단시키고자 함이었다(Leon Wood).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엄청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요인 때문이었을 것이다.(1)르바임 골짜기 바로 남쪽에 그들의 요새인 베들레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3:14).아마도 이 베들레헴은 길보아 전투 때에(삼상 31:1)그들의 손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2)또한 그들은 아직껏 유다와 베냐민의 경계지인 예루살렘 요새가 다윗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17절 주석 참조.
=====5: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 이말은 다윗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었다는 뜻일 것이다.그 당시 다윗과 함께 했던 제사장 아비아달은 우림과 둠밈을 단 에봇을 소유하고 있었다.2:1 주석 참조.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중요한 일을 당할 때마다 먼저 여호와의 뜻을 구한 다음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그의 훌륭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2:1;삼상 23:9;30:7).
네 손에 붙이리라 -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개인의 생명이나 국가의 장래를 막론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나타내 준다)16:8;창 14:20;신 2:30;수 10:8;왕상 20:13).신 1:2 주석 참조.
=====5:20
바알브라심 - 본절 후반부의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는 말은 이 지명이 옛부터 내려온 고유의 지명이 아니라 다윗의 대첩(大捷)을 기념하기 위해 새로이 붙여진 이름임을 보여 준다.한편 바알브라심(Baal-perazim)은 '주'(Lord)라는 뜻의 '바알'(* )과 '터치고 나옴','부숴뜨림', 또는 '흩음'을 의미하는 페라침(* )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흩으심의 주'이다.즉,이는 블레셋 대군을 물을 흩어버림과 같이 쉽게 물리쳐 주신 여호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다윗이 만들어 붙인 신지명(新地名)이다.한편,이곳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바알'이란 명칭이 이방 종교의 신 '바알'(Baal)과 일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8 주석 참조. 즉 바알 종교로 인해 '바알'이란 명칭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던 후대의 유대인들이 그 명칭을 내포하고 있는 '바알브라심'이란 지명 자체를 말소시켜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Rust).
여호와께서...내 대적을 흩으셨다 - 다윗은 이처럼 블레셋을 격파시킨 일이 자신의 지략,용맹성,군사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즉 그는 어떤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19절)그 일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이는 참으로"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빌 1:20)하여야 할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
=====5:21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 본절은 (1) 당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에 있던 블레셋 대군(18절)이 다윗의 정예 부대 앞에 얼마나 혼비 백산하게 후퇴했는가를 보여 주며, (2) 또한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20절)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보여준다(Hertzberg).한편, 블레셋인들이 전쟁터에 그들의 우상을 가져온 것은 그들의 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준다고 믿었던 당시 고대 근동 국가의 미신적 관습 때문이었다.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갔던 사실(삼상 4:3,4)과 외형상 일치한다(Keil & Delitzsch,Lange,Matthew Henry,Wyccliffe,Pulpit Commentary).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 같은 내용의 기사인 대상 14:12에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우상을 불태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이처럼 다윗이 우상을 불태운 것은 우상에 대한 여호와의 율법대로 순종한 행위였다(신 7:5,25).아무튼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수년 전 아벡 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 군대(삼상 4장)가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 들고 행진한 사실(삼상 5:1)과 대조적이다.즉, 그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들고 갔으나 다윗은 그들의 우상을 가증한 것으로 여겨 불태웠던 것이다(Leon Wood).
=====5:22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 다윗의 정예 부대 앞에 혼비 백산하여 도망갔던 블레셋 군대(17-21절)가 다시 전열(戰列)을 가다듬어 제 2차 공격을 해오는 장면이다.아마도 그들은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하기는 커녕 도리어 예기치 않은 역습을 받아 뿔뿔히 도망쳐야 했던 첫번째의 실패를 만회하려 했을 것이다.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23-25절).즉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힘입은 이스라엘에게 두번 씩이나 연속해서 대패하므로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5:23
올라가지 말고...엄습하되 - 여기서 '올라가지 말라'는 말은 고지(高地)에 올아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블레셋 군대와 정면으로 맞서지 말라는 뜻이다(Keil).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앞서와 달리(19,20절)이번에는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전을 택하라고 하심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즉 당시 (1) 긴장하고 있는 블레셋 군사들의 사기를 완전히 꺽어놓고(2) 그들을 이스라엘 지경에서 아주 멀리 쫓아 내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의 일환 때문이었다(Leon Wood).아마도 블레셋군은 지난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 군의 정면 공격을 예상하여 만반의 대비를 하였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획을 미리 아시고 이번에는 다윗에게 기습 공격을 명하셨던 것이다.
뽕나무 수풀 - 뽕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 (* )가 과연 어떤 나무를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배나무로 보는 견해(Rosenmuler,Vulgate). (2) 한글 개역 성경처럼 뽕나무(mulberry tree)로 보는 견해(Luther,KJV). 그러나 본래 '울다','통곡하다'라는 뜻을 지닌 '바카' (* )에서 파생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우는 나무'(weeping tree)를 가리킨다. 여기서 '나무가 운다'라는 것은 '나무가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니 이는 곧 '수액(樹液)을 낸다'는 의미이다(Wycliffe). 따라서 대개의 학자들은 '바카'가 '뽕나무'나 '배나무'를 의미하지 않고 수액(樹液)을 내는 '발삼나무'(Balsam tree)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Lange,Keil,Rust). 한편, 달만(Dalman)은 이 '바카'(* )가 관목류(灌木類)가 아닌 덤불에 가까운 종류라고 하였다(Hertzberg). 이렇게 볼 때 바카,곧 발삼나무 수풀은 이스라엘 군이 매복해 있기에 아주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5:24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 -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보여 주는 공격 신호(attack sign)임에는 분명하다.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의견이 분분하다. (1) 이 공격 신호는 단지 강한 바람에 의해 나무 꼭대기가 흔들리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Rust).이러한 주장은 바람이 곧 여호와의 영(靈)을 상징하며, 그 움직임은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대의 관념에 기초한다.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공격 신호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중 하나였으며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아닌 걸음 걷는 소리였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못하다. (2) 또한 이 공격 신호를 '나무의 신탁'(tree oracles)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Hertzberg). 즉, 다윗은 나무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징조를 가지고 점을 쳐서 하나님의 공격 신호를 찾았다는 이야기이다.그러나 이 견해는 너무나도 미신적이다.당시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앙하던 다윗(19,23절)이 이처럼 어리석은 미신적 행위에 탐닉하였을리 만무하다. (3) 이 공격 신호는 여호와의 군대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소리였다는 견해이다(Lange,Keil). 즉, 이러한 현상은 야곱과 엘리사에게 보였던 하나님의 군대의 진군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창 32:2,3;왕하 6:17).이 견해는 '걸음 걷는'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체아다'(* )가 '행군하다','전진하다'는 뜻이며 이번 전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성전(聖戰)이었다는 점에 의거할 때 비교적 타당하다.수 5:13-15 강해,'성전'(聖戰)참조.
=====5:25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대상 14:16에는 '기브온에서부터 게셀까지 이르렀더니'라고 되어있다.즉 본절의 게바(Geba)가 대상 14:16에는 기브온(Gibeon)으로 되어있는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심각한 차이에 대해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해석들을 가하고 있다. (1) 본절의 게바는 본래 기브온이었으나 이 두 지명의 세 '자음'(* )이 똑같기 때문에 필사자가 실수하여 기브온을 게바라고 오기(誤記)했다는 해석이다(Keil,The Interpreter's Bible).이 해석은 게바의 위치가 예루살렘 북동쪽인 반면 게셀(Gezer)의 위치는 정반대인 예루살렘 서북쪽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즉, 정신없이 도망치는 블레셋 패잔병들이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정반대인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어쩐지 석연치 않다는 주장이다. 반면,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게셀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이들은 게바보다는 기브온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에 제시되는 견해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옳지 않다. (2) 삼상 13:3에 의하면,게바는 블레셋군의 강력한 수비대(守備隊)가 있었던 곳이다.한때 요나단에게 이곳을 뻬앗겼던(삼상 13:1-4)블레셋 군대는 길보아 전투(삼상 31장)때 이곳을 다시 재탈환 하여 전보다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였음에 틀림없다.따라서 본문에서 물처럼 흩어진 패잔병들이 그들의 강력한 수비대가 있는 게바로 일단 후퇴했다가 그곳에서도 이스라엘군을 막아낼 수 없게 되므로 그들의 본토인 게셀로 후퇴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Lange,Pulpit Commentary). 그러므로 블레셋군이 제 1차로 후퇴했던 곳은 기브온이 아니라 게바임이 분명하다. (3) 그렇다면 이번엔 대상 14:16의 기브온이 또 다른 필사자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왜냐하면 일단 게바로 후퇴했던 블레셋군이 게셀로 도망갈 때 기브온을 거쳐 도망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한편,블레셋군의 최종 도착지인 게셀은 블레셋 영토의 북동쪽 경계지이며 이번 전투 지점(르바임 골짜기)에서 최소한 24km나 떨어진 곳이었다(Leon Wood).이로 보아 다윗 군대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거두게 하신 완전한 승리였음을 알 수 있다.
< 설 교 >
하나님 사람의 승리 비결
삼하 5:17-25
다윗은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목동이었던 그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실로 20여년 세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다윗은 이 긴 세월 동안 그야말로 ‘풍운아’로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났고, 또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 동안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다운 왕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소양을 쌓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왕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 동안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우선 사울이 죽은 뒤 유다 지파의 왕으로 7년을 통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은 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왕으로 추대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 다윗은 명실상부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추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다운 왕으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첫 번째 전쟁을 치른 이야기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다윗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그동안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을 가나안 땅에서 축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겪게 될 여러 형태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 그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시각
우선 다윗은 전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24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뽕나무 숲에서 매복하고 기다리다가 뽕나무 꼭대기에서 군대의 행군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블레셋 군대를 기습 공격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뽕나무 꼭대기에서 군대의 행군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군대라면 당연히 대로에서 행군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군대이기에 뽕나무 꼭대기에서 행군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블레셋과의 전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이라는 시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가 치르고 있는 전쟁은 바로 성전(聖戰)이라는 시각입니다. 그 이유가 영안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지금 자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군대가 전쟁에 개입하는 이야기가 여럿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선 창 32:1-2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에서를 만나러 갈 때 하나님의 군대가 나타나 자기와 함께 함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왕상 6:16-1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죽이고자 도단성을 에워쌌을 때, 엘리사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군대가 함께 함을 보았고, 또 그의 사환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치르는 전쟁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남다른 시각으로 전쟁에 임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가 ‘가위 바위 보’게임에서 이기는 비결을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처음에 가위 바위 보 중 ‘가위’를 내는 것이 이길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해 보니까 가위 바위 보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고 싶어하는 것이 ‘바위’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이 바위를 낼 것이라 생각하고 ‘보’를 선택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위’를 내면 이길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가위 바위 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이중 속임수’방법이랍니다. 그러니까 상대편에게 자신의 선택을 미리 말하면 게임에서 이길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는 ‘바위’를 낼 생각이라고 하면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위를 이길 ‘보’를 내지 않고 대체로 ‘가위’를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자기가 밝힌 대로 ‘바위’를 내면 이길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략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사실 과거 전쟁에서는 ‘책사’, ‘모사’, ‘군사’라는 지략이 뛰어난 사람들이 활약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같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현대전에서는 각종 전술 전략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략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전쟁은 단순히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쟁은 사람들 사이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에 임하는 시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
다윗은 다른 방법으로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1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 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블레셋이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두 번이나 사울 왕을 피해 자기네 땅으로 도망쳐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다윗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다윗이 미친 척도 했고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살려둬서 사울을 견제할 생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부스 족속의 땅을 점령하여 어엿한 국가로 발돋움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윗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기들에게 정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더 강한 나라가 되기 전에 물리쳐야 하겠다는 생각에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온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다는 급한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왕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급히 어전 회의부터 소집하지 않았을까요? 전략회의를 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시급하게 전쟁에 나서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기도부터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 물은 것입니다. ‘어전회의’를 하기 전에 ‘신전회의’를 한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블레셋이 일차 침공에서 선제공격을 받아 대패를 하고 퇴각했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이차 침공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다윗은 일차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번에 기도부터 한 것이 다급한 마음에 한번 해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번 이겼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기들 힘으로 하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난번처럼 똑같이 기도의 자리로 달려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지금 남다른 방법으로 전쟁에 임하고 있습니다. 바로 기도로 나아간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헌신적인 선교사역을 했던 미국의 아도니람 저드슨이 인도에서 사역하던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윌리엄 캐리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함께 정원을 거닐며 캐리 선교사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사실 캐리 선교사는 세 차례에 걸쳐서 살해 당할 뻔했습니다. 그리고 인도 정부의 노골적인 선교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화재를 당해서 그동안 정리해 놓은 모든 자료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모진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섰고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저드슨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캐리 선교사는 저드슨을 정원 한 편 구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바로 나의 예배 장소이자 기도와 묵상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닥쳐온 고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 새벽 5시마다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저 꽃들을 바라보며 묵상을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6시 경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저녁이 되면 밥을 먹고 나서 손에 성경을 들고 다시 이 자리로 옵니다."
그렇습니다. 윌리암 캐리의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기도입니다. 영적 전쟁에 나서서 그가 집중했던 방법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 중의 “오늘 집을 나서기 전”이 있습니다.
1.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 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 했나요.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3. 어려운 시험 닥칠 때 기도 했나요. 주가 함께 당하시면 능히 이기리.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이 찬양 가사 그대로 기도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승리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하면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행동
또 하나 다윗은 다른 행동으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본문 19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이런 이야기입니다. 블레셋이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블레셋과 맞서기 위해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다윗이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 바알브라심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본문 23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공격하라...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이런 이야기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또 다시 침공해 왔습니다. 다윗이 지난번처럼 또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기습하라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난번에는 선제공격을 하라는 말씀이었고, 이번에는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공격을 감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은 이번에도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번에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또 그 뜻을 따랐습니다. 사실 다윗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나름대로 병법도 익히고, 나름대로 승리의 비결을 터득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앞세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순종’은 그 어느 때보다 실천하기 힘이 듭니다. 우선 현대의 시대정신이 비판과 저항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시대정신은 기존의 모든 권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모든 권위를 비판하고 거세게 저항하는 것이 용기라고 인정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순종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다음으로 현대인은 순종을 훈련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달리 가정에서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권위있게 순종을 훈련시키지 못합니다. 사회에서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권위있게 훈계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점점 순종은 하기 힘든 덕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순종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요 14: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성경을 보면 순종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잠 3: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오늘도 순종이 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일이 귀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고, 오늘의 시대정신과는 어긋나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하십니다. 나아가 저에게 이 땅에서 큰 승리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적들과 맞선 채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선한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선한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선 다윗처럼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싸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다른 방법으로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묻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나아가 다윗처럼 다른 행동으로 싸움을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승리하는 길
삼하 5장 17~25절 / 이한규목사
승리도 중요하지만 승리한 후도 중요하다. 승리한 후 승자의 저주에 빠지지 말라. 왜 일본이 어려워졌는가? 과거의 영화에 젖어 혁신에 뒤처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디지털 세계에서 여전히 곳곳에서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다. 그러면서 남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혁신을 이루지 못하니까 점점 뒤처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승자의 저주에 빠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
1.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
이스라엘이 기름을 부어 다윗을 왕으로 삼은 소식을 듣고 블레셋 군사들이 배신자 다윗을 찾아 공격하려고 올라왔다(17절). 다윗은 사울에게 쫓길 때 블레셋으로 피신해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 하면서 목숨을 부지했고 나중에는 아기스의 종처럼 행동했다. 그런 과거를 생각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을 떠나 유다 왕이 된 다윗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고 과거에 미친 척 하던 사람이 왕이 되었다니까 우습게 여기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쳐들어 왔기에 그들은 다윗 군사에게 대패했다(20절).
블레셋 군사들이 참패한 핵심 원인은 과거의 승리에 도취했기 때문이다. 그처럼 과거의 승리에 도취되거나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히면 점차 패배의 길로 가게 된다. 지금의 승리가 중요하다. 이단 교주는 과거의 기적적인 체험 하나로 계속 같은 얘기를 하면서 영혼을 미혹한다. 과거의 기적에 머물러 있으면 점차 믿음이 화석화된다. 화석화된 기복주의적인 설교로 영혼을 미혹하는 교주는 ‘기적과 치유의 종’이 아니라 오히려 ‘기적과 치유가 없는 종’이다. 사실상 성도의 삶 자체가 기적의 연속임을 잊지 말라.
예전에 중요한 선교 회의가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있었다. 그 회의 때문에 하루 종일 너무 바빠서 다음 날 새벽 말씀 준비를 못했다. 그날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교회 목양실에 앉자 밤 12시 20분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제부터 새벽 말씀을 준비하려면 밤을 꼬박 새우겠구나.” 그런데 그때부터 하나님이 말씀을 소나기처럼 쏟아 부어 주셔서 몇 시간 만에 그 다음 날 새벽 말씀까지 이틀치 말씀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런 작은 일도 기적 체험이다.
자신의 삶을 잘 살피면 현실 속에서 작은 기적 체험을 많이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신앙 자랑은 현재의 신앙 내용이 없고 현재의 체험이 없다는 얘기도 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진실한 헌신과 꾸준한 기도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승리를 얻어 누리는 것이다. 과거의 승리에 도취하지도 말고 과거의 패배에 집착하지도 말라. 지금 이 시간에 과거의 불행과 상처와 수치의 닻줄을 끊으라. 나쁜 줄을 과감히 끊어야 좋은 하늘의 연줄이 내려진다.
2.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블레셋의 공격 소식을 듣고 다윗이 요새로 나가 보니까 블레셋 사람이 이미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 모여 있었다(18절). 그때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제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갈까요? 그들을 제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19절).” 그 말씀을 듣고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블레셋 군대를 궤멸시켰다(20절).
얼마 후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정비하고 르바임 골짜기로 다시 올라와 공격했다(22절). 다윗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묻자 그때는 하나님이 정면 공격을 하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 매복했다가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면 후미를 공격하라고 하셨다(23절). 다윗이 그 말씀대로 해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또 대승을 거두고 영토가 게셀까지 확장되었다(25절). 다윗은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행했다. 그것이 다윗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핵심 비결이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지금의 모습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조만간 승리의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 모슬렘 신자들은 ‘인샬라(신의 뜻대로)’라는 말을 엄청나게 많이 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린다. 감기가 들어도 신의 뜻이라고 하고 차가 막혀도 신의 뜻이라고 하고 심지어는 죽어도 신의 뜻이라고 한다.
타 종교인도 신의 뜻을 그렇게 앞세우는데 성도는 더욱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살아야 한다. 가끔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당하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아픔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있다. 그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현재는 이해할 수 없어도 그 뜻이 있음을 믿고 거룩한 의지와 성실한 땀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해되고 이뤄질 것이다.
3. 헛된 우상을 버리라
다윗은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대승한 후 그곳 지명을 바알을 흩으셨다는 뜻을 가진 ‘바알브라심’이라고 붙였다. 그곳에서 대패한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을 버렸다(21절). 왜 버렸는가? 그 우상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신의 신이 강해서 승리했고 패배하면 자신의 신이 약해서 패배했다고 여겼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 승리를 위해 그들의 우상을 전쟁터로 끌고 왔다가 대패하자 그 우상을 내팽개쳐 버린 것이다. 그러자 다윗 군사들이 그 우상을 치워버렸다(21절).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라고 해서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다. 언약궤가 전쟁터에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환호했다. “와, 이제는 이겼다.” 그때 블레셋 지휘관들은 두려워하는 자신의 군사들에게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고 독려했다. 결국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겼다. 무엇이 문제인가? 언약궤 자체를 우상처럼 숭배한 것이었다. 승리하기 위해 우상을 버리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승리한 후에 우상을 버리는 것도 잘하라.
어느 날 아프리카 오지의 토인들이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끌어내리고 우상의 볼기짝을 매로 심하게 때리고 있었다. 선교사가 궁금해서 그 연유를 묻자 원주민이 말했다. “지난 7년간 저 우상에게 소원을 빌었는데 들어준 것이 없어서 아무런 힘도 없는 저 못된 우상을 벌하려고 저렇게 볼기짝을 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을 받겠다고 기복주의적인 우상을 스스로 만들어 섬기다가 시험에 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헛된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교회를 순수하게 섬기라. 승리 전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다가 승리 후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삶을 잃지 않도록 하라. 인물이 되길 원하면 승리 후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교회를 잘 섬기겠다고 결단하라. 그러면 승리가 패배로 연결되지 않고 더 큰 승리를 예비할 것이다.
4. 자만에 빠지지 말라
블레셋 사람들은 오합지졸로 여긴 다윗 군사들에게 대패하자 다시 전열을 정비해서 르바임 골짜기로 쳐들어 왔다(22절). 그때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첫 번째 전쟁에서 대승했다고 자만하면서 처음처럼 정면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정면 공격 대신 매복 작전을 펴서 대승을 거두었다(23-25절). 한 번의 승리에 도취해서 자만에 빠져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줄 알고 혼자 힘으로 나아가지 말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다(고전 16:12). 승리하고 자만하면 곧 패배한다.
필자는 설교할 때 “이만하면 잘 준비했다.”라고 하면 이상하게 그날 설교를 죽 쑬 때가 많다. 그러나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하나님! 오늘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성도의 마음을 움직일 능력이 없습니다. 저를 도우소서.”라고 겸손히 기도하면 오히려 더 설교에 은혜가 넘칠 때가 많다. 아무리 상황이 잘 풀려도 “이만하면 됐다.”라고 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라.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7일간 13번 돌았다. 그들은 성을 돌면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 저희는 40년을 광야에서 지냈기에 훈련된 군대나 변변한 무기도 없습니다. 저희를 도우소서.” 그때 기적적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공격한 곳이 아이 성이었다. 아이 성 전투를 앞두고 그들은 자만에 빠져 생각했다. “견고한 여리고 성도 무너뜨렸는데 아이 성처럼 보잘것없는 성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자만심을 품고 공격했다가 7년의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유일한 패배를 당했다.
기도하면 큰 문제도 넘을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작은 문제에도 넘어진다. 하나님이 왜 가끔 문제를 주시는가? 자만하지 말고 더욱 겸손히 기도하라는 뜻이다. 문제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라. 문제로 인해 더 겸손해지고 더 기도하게 되고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각종 우상을 힘써 버리고 자만에 빠지지 않음으로 승리를 계속적인 승리로 만들어내는 복된 심령이 되라.
바알브라심, 격파하시는 하나님
배 혁목사(안토니오교회) / 삼하 5:17-25
여러분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어떤 하나님을 연상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은 블레셋과의 싸움을 통해서, 물을 흩음같이 대적을 흩으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을 기념하면서 그 싸움터의 이름을 ‘바알 브라심”이라고 부릅니다. 바알은 ‘주’라는 의미가 있고, ‘브라심’은 ‘격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알 브라심은 ‘주께서 격파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이라는 강한 대적들을 돌파해 나가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바알 브라심’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얼마 안돼서 일입니다.
다윗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지파인 유다지파의 추대를 받아 헤브론에서 유다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헤브론으로 올라와서 다윗에게 와서 왕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수도를 옮길 필요성을 느낍니다. 유다를 통치할 때는 유다진영에 있는 헤브론이라는 지역이 좋았는데, 전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좀 더 북쪽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을 쳐서 점령하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블레셋 자신들의 강력한 장군 골리앗을 죽인 다윗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위협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수도까지 옮겼으니 그 통치가 강력해 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은 다윗을 찾아 싸우러 옵니다. 그것도 적당히 오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다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다윗에게 커다란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들과 맞서기 위해 요새로 갔는데, 이미 블레셋 사람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했습니다. 마치 골짜기에 흐르는 물과 같이 블레셋 군사들이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정면전이 벌어 졌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이스라엘군사가 골짜기에 가득 찬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손으로 물을 흩어 버리듯이, 이스라엘 군사들이 공격할 때에 그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흩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바알 브라심’의 하나님, 물을 흩으시듯이, 블레셋의 강한 군대를 격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강한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서 블레셋은 꼭 격파하고 넘어가야 할 세력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치고 넘어가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사사시대 때에 블레셋과의 싸움도 버거웠습니다. 엘리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번번이 지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가면 이기겠다고 생각하고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서 싸웠지만 그 언약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사울왕이 전사한 것도 블레셋 사람들을 상대로 길보아산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더 성장하고 번영을 해야 하는데 블레셋이라는 세력이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 블레셋과 맞서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물을 흩듯이 블레셋을 격파하셔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로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들보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닥친 여러가지 장애물들을 돌파해 나갔을 때입니다. 목동시절에 양들을 해치려는 맹수와 맞서서 돌파해 나갔습니다. 골리앗을 만났을 때도 그랬고, 사울과 같은 모진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그는 그 모든 장애물들을 돌파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돌파의 중심에는 ‘바알 브라심’의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성도들의 삶속에서 그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하게 설 수 있는 비결도 믿음생활 중에 만나는 여러가지 위기들을 믿음으로 잘 돌파하고 나갈 때입니다. 그럴 때에 성도들의 신앙이 더욱 성장하고 든든하게 서가게 됩니다.
오늘 다윗이 경험한 ‘바알 브라심’의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에게 닥치는 믿음의 장애물이 어떠한 의미가 있고, 어떻게 그러한 도전들을 이겨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들의 믿음이 성장하며 견고하게 서기를 원하시는데, 그러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믿음의 장애물을 그 앞에 놓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출애굽 초기부터 있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생활을 할 때부터 그들을 견고한 믿음의 백성으로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평안하게 두시지 않고, 광야생활 동안 여러가지 믿음의 장애물들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라고 하는 위험한 곳으로 이끄셨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고 마실 물이 없는 상황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가나안에 사는 강력한 적들을 보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장애물들을 맞주할 때에 그것을 돌파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앞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물이 없으면 여전이 목마르다고 불평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져 버렸습니다.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을 봤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적들에 손에 죽이게 하신다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결국 자신앞에 놓인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도약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성도들 앞에 장애물들을 설치하고 마주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격파하며 뛰어 넘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들에게 먹고 마시는 경제적인 장애물과 맞서도록 만드십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몸의 건강의 문제를 대면하게 하시고, 어떤 분둘에게는 사람과의 관계적인 어려움을 대면하도록 하십니다. 자녀나 가족의 문제를 두시기도 하십니다. 교회안에서도 장애물을 주시어서 주춤하게 만드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장애물들을 주실 때에는, 더 이상 넘어오지 말고 그곳에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파하고 넘어와서 더 크고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도약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경제적인 장애물을 주시어서 그것을 돌파하여 경제적인 상황과 상관없는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의 어려움을 주셔서 더 이상 육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강건한 믿음으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과의 관계의 어려움을 주셔서 앞으로는 사람들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며 견고한 믿음으로 서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믿음의 장애물들은 그것을 통해서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2.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가지 장애물들을 아주 많이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러한 장애물들을 잘 돌파하며 왔기에, 주변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러한 믿음의 장애물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만한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았을 때에 다윗은 블레셋과 같은 장애물들을 만났을 때에, 먼저 하나님께 여쭤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여쭙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어떤 장애물을 직면했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뜻을 묻기 위해서 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향해서 간구하고 여쭙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지혜와 능력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 여쭙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하게 서는 사람을 보면, 내 지혜와 능력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은 도리어 그 신앙의 성장이 머무르고 후퇴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미지옥’이라 것이 있습니다. 모래밭에 깔때기 모양으로 파진 웅덩이를 일컫는 말인데, 이것은 개미를 잡아 먹는 명주잠자리의 애벌레인 개미귀신(antlion)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개미가 일단 개미지옥에 빠지게 되면 그곳에서 나오려고 경사진 모래를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올라오려고 해도 밟은 모래가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개미도 자꾸 구덩이로 밀려 납니다.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는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해 애를 쓰다가 결국 개미귀신에게 잡혀 먹힙니다.
그런데 개미가 개미지옥에서 탈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가던 사람이 그 개미를 끄집어 내주면 됩니다. 개미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앞에 놓인 장애물을 넘어설 수 없지만, 더 강력한 힘이 도와 준다면 그 지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떠한 장애물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께 여쭌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교만을 내려 놓는 일이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 장애물을 격파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으로 도와 주십니다.
다윗은 자신앞에 닥친 장애물들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 아룀으로 ‘바알브라심’의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는 반대로 하나님께 여쭙지 않음으로 그 앞에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망한 왕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왕입니다.
사울왕이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는데, 그것 또한 블레셋과의 싸움에 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싸울 길보아 전투를 앞뒀을 때, 사울은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이 했던 일은 변장을 하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사울왕을 죽게 하는 결정적인 범죄가 됩니다.
역대상10:13-14에 보면,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사울은 하나님께 묻기보다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신접한 여인에게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부탁을 합니다.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고, 죽은 사무엘을 불러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물으려고 했지만, 정작 하나님께는 아뢰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어 사울은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뢰지 않았다고 사울을 죽이시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은 사울의 불신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그의 불신앙의 자세가 죄가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늘 아뢰는 삶을 살았고, 그것이 ‘바알 브라심’의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되었던 비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는 방법은 여러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다윗은 하나님과 대화하듯이 질문을 하고 답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그렇게 손쉬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시편 18:6절에 보면 다윗이 그를 쫓던 모든 원수에서 구원함을 받은 이후에 과거를 돌아보면서 하는 고백입니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께 목놓아서 부르짖으면서 자신의 형편을 아뢰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는 형태가 조용한 중에 아뢰던지, 아니면 세상이 떠나가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던지, 아니면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 가운데 답을 얻던지 간에 그 방법과는 상관없이, 믿음의 장애물과 도전을 직면했을 때에 성도가 할 일은 하나님께 아뢰고 그 뜻을 구하는 일입니다.
3. 그리고 ‘바알 브라심’의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묻고 그 뜻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담대하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앞서서 도와 주실 것을 믿고 장애물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블레셋이 일차 싸움에서 대패를 한 다음에 그대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싸움이 같은 장소에서 일어납니다. 그 때에도 르바딤 골짜기에 가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말씀은 “하나님이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는 말씀입니다(24절).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다윗과 이스라엘 군대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들보다 앞서서 나가시는 분이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여호와를 믿고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닥치는 여러가지 위기들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으며, 그 뜻을 알았다고 한다면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서 담대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장벽을 부수고 넘을 수 있도록, 앞서 가서 도와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것들이 여러분들의 믿음의 성장과 도약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것입니까? 육신의 연약함이나 관계적인 어려움입니까? 가정의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한층 도약하기 위해서 맞서야 할 방해물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러한 장애물들을 주실 때에는 각자에게 믿음의 도약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장애물과 문제를 격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분에게 아뢰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여러가지 믿음의 장애물들과 위기가 올 때에 위축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믿음의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며 도약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수시로 장애물과 도전을 주시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신앙적인 장애물과 도전을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 아뢰지 않는 것도 죄가 됩니다. 하나님 없어도 내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교만이 그 믿음을 병들게 하며, 망하게 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구하고 간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믿음이 성장하고 견고하게 섭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 앞에 놓인 믿음의 장애물과 도전들이 있습니까? 사울과 같이 나 자신에게 자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뢰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아뢰고 믿음으로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도우시는 장애물을 격파하시는 ‘바알 브라심’의 하나님을 만나시고, 우리의 삶의 장애물을 격파하고,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블레셋을 물리친 다윗
삼하 5장 17~25절 / 변한규목사
에디슨은 어렸을 적에 너무 공부를 못해서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퇴학을 권한 바 있다고 합니다. 처칠은 소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습부진아로 특수반에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너무 성적이 나빠서 모두가 그를 정신박약자로 여겼다고 합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여기 세 인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처음 여건이 모두 나빴다는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의 나중은 심히 창대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은 형편들이 미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여질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은퇴를 했습니다. 고향인 미주리주의 인디펜던스에서 남은 날을 소일하면서 조용히 살았습니다. 어느 날 트루먼 기념 도서관에 갔을 때, 지도교사와 함께 여러 아이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중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제 나이만 했을 적에 인기가 대단했고, 반장도 하셨겠지요?” 트루먼이 대답했습니다. “정반대야, 눈이 나빠 안경 없이는 맹인과 같았고 재주도 없었고 운동도 못했고 겁쟁이란 말을 들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어요?” 묻는 말에 트루먼은 “나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성경말씀을 믿었기 때문이야. 지금도 하나님은 나의 등뒤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계시거든.” 하면서 자기 등을 만지면서 보여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 지금도 우리의 모두의 등 뒤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영광의 박수를 돌려보십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친 두 번의 큰 승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골치 아픈 원수요, 문젯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기회만 있으면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다윗이 왕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 초기에 박살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또 사울 왕도 물리쳤으니 다윗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착각을 했습니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었으나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빠뜨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골자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신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어김없이 블레셋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블레셋을 물리친 다윗, 이 시간 말씀의 주제입니다. 본문 말씀 중심해서 세 가지 내용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사모하려고 합니다.
첫째,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19절). 우리 믿는 사람들 앞에는 항상 두 방법이 맞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냐, 사람의 방법이냐. 따라서 성도들은 선택 따라 승하기도 하고 패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항상 사람의 방법보다 하나님의 방법을 고수했습니다. 그래서 전쟁할 때에도 먼저 시냇가로 내려갔습니다. 왜냐하면 물맷돌을 줍기 위해서입니다. 또 먼저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묻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도 다윗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이 자리에 멎어 있으리까? 블레셋을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그냥 두시겠나이까?”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올라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이쯤 되면 전쟁의 승패는 이미 판가름 난 셈입니다. 하나님과 맞서 이길 인생 없고, 하나님의 방법을 꺾을 인생의 방법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문답생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여,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하고 하나님께 물으십니까? ‘하나님이여,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믿음생활하고 있습니까? 성도중 혹자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내 뜻부터 먼저 챙기는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내 뜻을 앞장세우는 성도가 없지 않아 많습니다. 이익이 될 것이냐?, 손해가 될 것이냐? 물으면서 손해가 되는 편을 아예 택하려고 하지를 아니합니다. 예배 시간이 어떤 시간입니까? 우리 나름대로 정의를 해봅시다. ♬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 이렇게 채널을 바꾸는 시간이 아닙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백성들의 절대자입니다. 다윗보다 높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높다고 자만하지를 아니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메뚜기처럼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했을 적에 다윗은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찌 하오리까?” 저도 물을 때가 많습니다. 컴퓨터를 하다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사무국에 있는 직원에게 묻곤 합니다. 길 가다가 어디로 갈까 망설여질 때에 물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설교준비를 하다가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전문가에게 전화로 물을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혜가 나하고는 비교를 못합니다. 하늘만큼이나 높습니다. 그 하나님께 묻는 것이 수치가 됩니까? 그 하나님께 묻는 일이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게다가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그 하나님께 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할 때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어떻게 물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위기의 때, 질병의 때, 환난의 때, 역경의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낭패와 실패와 고통과 역경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모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지 아니합니까? 모세도 기도로 승리했고, 다니엘도 기도로 승리했고, 요나도 기도로 승리했고, 야곱도 기도로 승리했습니다. 어찌 우리라고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도 해낼 수 있습니다. 기도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의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제단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성전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불로, 불로 응답하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움 당한 성도가 있지 않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성도 있지 않습니까? 역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상 어려움을 만난 성도는 있지 아니합니까? 뚫고 나갈 길이 있습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기도하자 마음 합하여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
둘째, 다윗은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25절). 다윗은 자기 고집 부리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주장 내세우지 아니했습니다. 첫 번 공격할 때에 하나님께서 ‘올라가서 마주 싸우라’ 하심에, 그때에 다윗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하고서 그 곳 이름을 바알 브라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바알 브라심 하나님이십니다.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두 번째 공격할 때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올라가지 말고 뒤로 돌아가 숨었다가 급습하라’ 하심에, 다윗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응답이 다릅니다. 싸우는 방법이 반대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문제삼지 아니했습니다. 왜 전법이 다릅니까? 까다롭게 굴지를 아니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매사에 까다롭게 구는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왜 통일성이 없으십니까? 왜 변덕을 부리십니까?’ 역정을 내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은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라는 대로 아멘, 아멘 했다는 말입니다. 염려되는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 5:7). 낭패와 실망을 당한 성도가 있습니까? 그러나 낙망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 빈손 들고 예수께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을 새처럼 나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면 뉴욕이나 프랑스까지라도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속 100㎞의 속력으로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면 100㎞ 속력으로 서울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하나님께 순종하십시다. 하나님은 내 문제를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 그런데 엘리야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때 엘리야의 모습은 처량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또 엘리야의 사역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실패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뿐입니다. 숨은 것이, 도망한 것이 엘리야의 실패입니까? 하나님의 분부를 순종한 것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로 숨으라’ 하셨습니까? 엘리야를 훈련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기도의 골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릿 시냇가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끓일 양식이 없습니다. 식당이 없습니다. 호텔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한 엘리야를 어찌 굶게 하시겠습니까?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여기에 문제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까마귀들은 탐욕스러운 새입니다. 먹기를 탐하는 새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먹지 아니하고 어떻게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에게 명하셨고 까마귀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랴, 두 말할 것 없습니다. 순종, 순종, 순종할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엘리야의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다윗은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25절). 다윗은 블레셋 군대를 완전 소탕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후대사람들에게 크게 교훈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승리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 이는 골리앗과 싸울 때에 소년 시설 다윗이 골리앗에게 외친 말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 어찌 전쟁만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까? 우리의 가정문제, 우리의 직장문제, 우리의 사업문제, 우리의 건강문제 등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고 솔로몬이 허사가를 부르지 아니했습니까?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에 어찌 했습니까? 물맷돌 하나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어불성설이 아닙니까? 전쟁의 개념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닙니까? 그러나 다윗이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사울은 다윗에게 갑옷을 입혀주었습니다. 투구를 쓰게 했습니다. 손에 창을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찌했습니까? “왕이여, 이 방법으로는 싸울 수가 없나이다. 사냥할 때에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면서 다윗은 사울 방법을 벗어버렸습니다. 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골리앗 앞에 나아갔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하찮은 방법이요,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그 방법은 물맷돌 방법입니다. 그때에 전쟁 현장을 보십시오. 다윗이 물매에다 물맷돌을 넣어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윙하고 던졌습니다. 그 순간 거인 골리앗이 신음소리와 함께 거꾸러졌습니다. 하나님의 물맷돌이 빗나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쏘신 화살이 과녁을 꿰뚫지 못합니까? 괜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시킨 것입니다. 이 때입니다. 다윗은 산에서 사냥을 하듯이 달려가 거꾸러진 골리앗을 발로 밟고 골리앗이 차고 있는 칼을 뽑아 그 머리를 베어 버렸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다 도망했습니다. 승리는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성도여, 물맷돌을 돌리라. 그리고 그것을 힘껏 던지라.” 여기 물맷돌이 무엇입니까? 믿음 돌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블레셋을 물리친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어떠한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믿음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방법이요, 교회의 방법입니다. 교회 방법, 이상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방법입니다. 몸에 배어 있어야 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것이 교회의 방법입니다. 성도들의 방법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찬송을 하던지, 헌금을 하던지, 봉사를 하던지, 전도를 하던지, 선거를 하던지, 교제를 하던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 중 문제없는 성도 아예 없습니다. ‘내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 이렇게 장담할 성도는 아예 없습니다. 건강문제, 가정문제, 직장문제, 사업문제 등에서 저마다 고민스러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처럼 내 경험을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밑에 두어야 합니다. 다윗처럼 내 방법을 하나님의 방법 아래 두고 “하나님, 어떻게 하오리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하나님의 방법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블레셋을, 육적 블레셋을 넘어뜨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물어야 합니다. 정말 다윗이 승리했습니까? 정말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쳤습니까?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24절). 여기 뽕나무 꼭대기에 걸음 걷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이 말은 뽕나무 숲 윗부분에서 진군하는 큰 발자국 소리라고 의역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도 없는데 무슨 진군하는 큰 발자국소리입니까? 수많은 천군 천사의 진군하는 큰 발자국 소리입니다. 물론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병력을 당할 인생은 없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혼비백산한 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24절). 다윗이 블레셋을 친 것 아닙니다. 다윗보다 앞서 나아가사 하나님이 블레셋을 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승리를 공짜로 얻은 셈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을 치리라’, 그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물론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우리 모두를 통해서 성전의 대역사를 이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십시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하나님에게 우리 모든 것을 맡겨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능히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어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된 우리들의 소원을 외면하시리요!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 모두의 승리입니다. 승리한 성도가 있습니까? 성공을 가져온 성도가 있습니까? 우리 모두를 승리케 하시고 성공케 하신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께 다시 한번 영광의 박수를 돌리십시다.
승리의 비결
전승문목사 / 삼하 5:22~25
다윗은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전쟁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다윗은 그동안 아무도 정복하지 못했던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정말 중요한 성읍입니다. 예루살렘은 지금도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읍 중 하나로 인정을 받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곳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며 다시 오실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렸던 모리아산도 예루살렘입니다(대하 3:1). 살렘 왕 멜기세덱이 다스렸던 평화의 성읍도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성읍이 바로 예루살렘인 겁니다. 그 성읍을 정복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 이전까지는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도 그리고 사사들도 정복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성읍이었습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였던 겁니다. 그곳에는 여부스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부스 부족은 가나안의 7 부족 중 하나로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라고 명령하신 악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들 중 대부분은 여호수아에게 정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여부스 부족이 남아있는 곳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곳을 다윗이 정복한 겁니다. 예루살렘은 시온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언덕의 이름입니다. 다윗이 그곳을 정복하고 다윗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의 시온 산성을 다윗 성이라고 이름 붙인 겁니다. 아무튼 그곳을 다윗이 정복했습니다. 아무도 정복하지 못했던 예루살렘을 정복한 겁니다. 또한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백전백승을 거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이 헤브론에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다 모여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한 겁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다윗은 이스라엘 전역을 통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왕의 성읍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헤브론은 너무 남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브론이 유다지파에게는 중요한 성읍이었지만 이스라엘 전체로 볼 때는 너무 아래쪽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주목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모리아산이 있는 예루살렘을 주목한 겁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중심부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이스라엘의 왕도로 정하면 모든 지파를 다 잘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난공불락의 도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해 어떤 사사도 사울조차도 정복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다윗이 그곳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살고 있던 여부스 족이 다윗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6절)” 예루살렘이 얼마나 견고한 성읍인지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만 있어도 다윗을 막아낼 거라는 겁니다. 그들은 다윗이 결코 이곳을 정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10절)“ All things are possible with God!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능력의 삶을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여러분 앞에도 예루살렘처럼 난공불락의 문제가 놓여있습니까? 정복을 하긴 해야 하는데, 해결을 하긴 해야 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그건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문제입니다. 이걸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지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야 하는 문제인지를 구분하는 겁니다.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불가강야(不可強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 강제로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 다 삼국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둘 다 재갈공명이 한 말인 겁니다. 하지만 재갈공명보다 훨씬 먼저, 천년이나 먼저 이 말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솔로몬입니다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1)” 그렇습니다. 우리의 계획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계획이든 하나님이 해주시면 됩니다.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은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되는데 과연 하나님이 함께해주실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함께해 주실까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아니 인생의 성패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55:8~9)“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하늘과 땅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알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너무나도 많은 말씀들이 산재해있습니다. 그 중 어떤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일까요? 믿어지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는데 믿어지는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믿고 싶은 말씀과 믿어지는 말씀은 다른 겁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기서 실수합니다. 믿고 싶은 말씀을 믿어지는 말씀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왜냐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마음과 생각이 앞서서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만 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인지 아닌지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분명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 믿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되지 않는 말씀도 있습니다.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건 나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서 아시아를 향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처럼 아시아지역을 향한 계획을 세운 겁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행 16:6~7)” 그랬습니다. 바울이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지 않은 겁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의 일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 다른 사람들은 다 들어갈 수 있었는데 모세만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은 모압평지의 느보산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신 34:4)“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가나안 땅만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힘겨운 광야를 지나면서 단 한 순간도 그곳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겁니다. 모세의 계획을, 모세의 꿈을, 모세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이렇게 간구하셨습니다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태 26:39)” 주님은 이 기도를 밤새도록 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신 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을 믿는 겁니다. 다윗은 그렇게 기도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분열되어 있을 때는 블레셋이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것이 블레셋에게 더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나라를 통일하자 또한 예루살렘까지 정복하자 쳐들어온 겁니다. 이스라엘이 잘 되는 것을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나라를 통일하기까지 7년 6개월이 걸렸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에도 수개월내지 수년이 걸렸을 겁니다. 그동안 블레셋은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거의 10년 동안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이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자 쳐들어온 겁니다. 이런 게 마귀역사입니다. 우리가 분열되어 있을 때는 그래서 서로 다투고 싸울 때는 내버려 둡니다. 가만 내버려 둬도 마귀가 원하는 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면 마귀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마귀가 방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중요한 건 그 때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귀역사가 시작되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간절히 매달려야 하는 겁니다. 다윗은 그랬습니다. 블레셋 군대 앞에서 다윗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18절~19절)“ 그랬습니다. 다윗은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점이 사울과 다른 겁니다. 사울은 전쟁이 시작되면 사람만 바라보는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기도하는 것을 불필요한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든 빨리 해치우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왜냐면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야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이 너무나도 뻔한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움직였습니다. 블레셋은 우상을 앞세우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블레셋 병사들이 바알 우상을 가슴에 품고 쳐들어 온 겁니다. 다윗의 눈에는 그것이 먼저 보였습니다. 이런 게 다른 겁니다. 사울은 육적인 것만 바라보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적인 안목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마귀를 바라볼 수 있는 왕이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에게는 이 전쟁이 사람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이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우상의 영적전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 군대를 무찌른 후 그곳의 이름을 바알브라심(בַּעַל פְּרָצִים)이라고 했습니다. 바알브라심은 바알을 흩어버린 곳이라는 뜻입니다 :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치우니라 (20절~21절)” 이것이 다윗입니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사람입니다. 영적인 안목을 가진 영적인 사람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마귀역사는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집요하고 정말 끈질긴 것이 마귀역사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또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지난번과 똑같은 곳을 침공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22절)“ 지난번에도 르바임 골짜기로 쳐들어 왔는데 이번에도 같은 곳으로 쳐들어온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똑같은 곳으로 똑같은 사람들이 쳐들어 왔으니까 똑같이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기도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고 눈으로만 보면, 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실패합니다. 그래서 마귀역사에 넘어지고 마는 겁니다. 안 됩니다.아무리 똑같아 보여도 내 생각으로 결정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언제나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3절~24절)”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이 전혀 다른 응답을 주셨습니다. 지난번에는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믿고 나아가 그들을 물을 흩어버리는 것처럼 흩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기다리라고 하신 겁니다. 언제까지?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겁니다. 이렇게 다른 겁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처럼 다른 거라고 하신 겁니다. 만약 다윗이 지난번과 똑같은 상황이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요? 그랬다면 패배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서가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윗은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난공불락의 도성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힘겨운 문제가 있습니까?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문제라면 그건 틀림없이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해결될 겁니다. 그러면 반드시 해결될 겁니다. All things are possible with God!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은혜를 기대하라
삼하 5장 22~25절 / 김경수목사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을 힘들어 한다면 그 아이는 공부를 즐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을 보면 성적이 좋고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으면 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믿음생활도 같은 이치입니다. 믿음생활을 힘들고 고단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 지키기가 힘들고 십일조 드리는 것이 버겁습니다. 행해야 할 계명이 많고 모이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을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와 전혀 반대로 믿음생활을 즐겁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루 24 시간은 같은데 그 사람은 세상 일도 하고 교회 일도 합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마치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신비롭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무엇이 같은 믿음생활을 하여도 한 종류의 사람은 힘들어 하고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즐거워할까요?
전자는 믿음생활을 종교적 삶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생활을 계명을 지키고 준행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힘들어합니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을 정죄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계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그 사람도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정죄의식으로 가득 찬 공동체가 됩니다. 무겁습니다. 어둡습니다.
후자는 믿음생활을 신앙적 삶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믿음생활 하는 것이 즐겁고 기쁩니다. 인애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때문에 밝고 쾌활합니다. 감사가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합니다. 하루하루가 그분이 주시는 축복으로 은혜가 충만하고 그분의 약속으로 항상 담대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때로 실수도 하고 죄도 범할 수 있습니다만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원망하고 자학하며 주저앉지 않습니다. 용서하시고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께 지체하지 않고 나아가 회개하고 또 즐겁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늘 두렵고 엄위로우시며 감시자이시고 믿음의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좋으시고 사랑이 무한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믿음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언제나 꾸짖지 아니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있어서 믿음생활은 무겁고 힘든 일이 아니라 즐겁고 복된 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명령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하는 일만 있다면 얼마나 믿음생활이 고되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도우시고 역사하시는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새로운 은혜를 간구하고 기대하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실지로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세밀하신 도우심과 축복 속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세밀하게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을 한량없이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누려야 합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출애굽을 하게 되면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첫 번째 문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애굽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 사실과 그동안 자신들을 학대했던 애굽 군사들이 홍해에서 수장되는 장면을 목격함으로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마실 물이 떨어지고 자신들 앞에 마라의 쓴 물을 맛보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자신들을 이곳으로 오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와 그를 보낸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자유라고 하는 미명하에 방종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면서 남이야 피해를 입던 말던 이기적이며 세상적인 타락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애굽을 벗어나 홍해를 건너므로 구원을 얻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나 찬양보다는 불평과 원망, 대적과 거역, 타락과 방종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게 된 자들을 살려내고 노예생활을 하던 자들을 자유와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모세에게 그들은 감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와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어려움이 발생하고 문제를 만날 때마다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일으킨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과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거룩하고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리석게도 가데스바네아에서 회군하여 다시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단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지는 무엇입니까?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구원하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내일의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룩한 영적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채찍질하며 학대하던 애굽 군사들에 대한 공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두려움이 죄를 예방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렵기는 하지만 생활은 자기 마음대로 방종과 타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와 저주, 사망과 심판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심판하는 재판관 정도로 이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당연히 힘들고 고된 종교적 삶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조금만 성경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저와 여러분들의 죄와 저주를 대신 담당시키시기 위해 저주의 형틀인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오직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요구하고 우리들이 지불할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죽이셨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폭군이나 독재자처럼 우리들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아들까지 죽이면서까지 사랑으로 오신 것입니다. 아들까지 죽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까워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사랑의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들까지 죽이면서 하신 사랑이기에 마땅히 우리들도 죽음을 불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믿고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십시오. 세상을 기웃거리거나 동경하지 마십시오. 자신들을 학대하고 죄의 올무 가운데 빠지게 해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노예생활을 하게 했던 애굽을 그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매일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방탕과 타락의 삶을 청산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토해 내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토해낸 세상의 것들을 다시 주워 먹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을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아들까지 죽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누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하나님께 매일 새로운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는 기도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요16:1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를 교정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풍성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빌4: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바꾸셔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이해를 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들까지 주시면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시되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끝없이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든지 죄송한 마음을 가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움에 빠져 궁핍한 지경에 빠지게 되어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옆집 아저씨 정도로 이해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통해 하십니다. 분명 독생자 예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구원해 내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건만 여전히 죄와 저주, 그리고 마귀의 자식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구걸하거나 도움을 미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상대와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하나님께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은혜를 기대하면서 늘 기도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전에 기도해서 이긴 전쟁이니 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이전에 기도했으니 또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나아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매일 새로운 은혜가 필요합니다. 매순간 새로운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마음과 자세가 필요합니까? 매일 매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새로운 은혜가 필요하다고 요청하십시다.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고 새로운 은혜를 베푸시면서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된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새로운 은혜를 구하십시오. 조그마한 것까지 구하십시오. 하루를 출발하면서 그날에 필요한 새로운 은혜로 인해 좋은 일들이 넘쳐날 것을 구하십시오.
만나는 사람, 이루어질 계약,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들, 좋은 것들을 구하십시오.
만약에 불이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라면 사전에 예방해 주십사하고 구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늘 동행하십시오. 동행하시면서 구구절절이 구하고 요청하십시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시시때때로 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적 삶은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체험이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24)-“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공격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얼마나 새로운 은혜를 간구하는 다윗을 좋아하셨으면 앞서 나아가셔서 적군을 치시겠다고 공언하시겠습니까? 나는 이런 다윗이 좋습니다. 나는 다윗처럼 항상 새로운 은혜를 구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주실 것을 믿고 입으로 선포하시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기도하고 요청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을 구했으면 이루어 주실 것을 알고 선포하시며 감사하십시오.
이렇게 하십시오.
오늘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저와 만나는 사람은 모두가 복이 임할 것입니다. 필요로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때에 도달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댈 곳이 있을 것입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누군가가 커피를 타서 나를 기쁘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계약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니면 좋은 때에 그것은 반드시 성사될 것입니다. 올해 매출은 작년보다 더 월등히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며 그분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고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한두 번 기도의 응답을 이루어 주시지만 여러 차례의 기도에는 짜증을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시되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나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구하고 요청할 때마다 기쁘게 채워주시고 넘치도록 부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큰 것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조그마한 것도 놓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크게 부르짖는 소리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신음 소리도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