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포 봉수대를 찾아
십이월 넷째 월요일은 성탄절로 주말에서 이어지는 사흘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 겨울 들머리는 포근했던 날씨를 보였다가 지난 한 주는 매서운 추위가 찾아와 낮에도 빙점 근처 머물렀다. 이번 주부터 기세를 떨치는 동장군이 물러가고 낮에는 영상으로 올라가 그리 춥지 않을 주간 예보를 접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연말과 연시는 혹심한 추위가 아니었으면 싶었다.
월요일 아침 식후 모처럼 산행을 차림으로 스틱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무릎과 종아리에 불편함이 느껴져 높거나 먼 산은 오를 생각은 하지 않고 진동의 야트막한 산을 오를 셈이다. 예전에 대학 동기와 한번 찾았던 옥녀봉 가는 길에서 나뉜 가을포 봉수대가 떠올랐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101번 시내버스로 마산의료원 앞으로 나가 진동 방면으로 가는 74번 농어촌버스로 갈아탔다.
마산합포구청 맞은편은 월영동 종점이나 구산 삼진 방면 농어촌버스가 지나는 길목이다. 65번이 오면 광암에서 내려 가을포 봉수대로 오르면 좋으나 그 버스는 운행 계기판에 뜨지 않아 74번을 탔다. 진북 의림사로 갈 때 더러 이용했던 버스였는데 동전터널을 지나 태봉을 거쳐 삼진고 정류소에서 내렸다. 진동은 옛 동헌 일부가 남아 있고 교동에 예전 향교가 온전히 유지되었다.
가을포 봉수대로 오르기 전 향교와 동헌은 답사 동선에서 제외하고 한 군데 먼저 둘러볼 곳이 있었다. 진동에서는 30여 년 전 농경지를 공공 택지로 개발하려고 공사를 시공하다가 청동기 유적이 다수 발굴되어, 계획했던 택지는 다른 구역으로 옮기고 유적 발굴 현장은 공원으로 조성했다. 국가 사적 제472호로 지정된 창원 진동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 지석묘와 석관묘 선사 유적지다.
논밭에서 발굴된 선사 유적지를 공원으로 조성한 잔디밭은 인근 주택에 주민들에게는 산책 코스로 알맞았다. 내가 찾았을 때도 몇몇 노인이 산책로를 거닐고 있었다. 웅장해 보이는 커다란 덮개석이 놓인 피장자는 그 당시 부족장급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그 밖에도 여러 기 석곽묘는 발굴 당시 모습으로 재현해 유리관을 덮어 보존했다. 부장품은 지역 박물관에 분산 보관 전시했다.
선사 유적지에서 태봉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요장리로 갔다. 용소산으로 가는 들머리는 지역 유관 단체 이름으로 새해 첫날 아침 해맞이 행사 펼침막이 내걸려 있었다. 몇 해 동안 각처 일출 명소는 코로나로 해맞이 행사를 개최 못하다가 이제 펜데믹이 풀려 어디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지 싶다. 마을에서 절로 오르는 비탈길이 끝난 곳 참새미가 나왔고 절 이름은 영천사(靈泉寺)였다.
절집 바깥 약수터는 기도를 올리는 곳인 듯했다. 뚜껑을 덮어 놓고 낙엽과 먼지가 쌓여 열어보지 않았으나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솟을 샘터로 여겨졌다. 규모가 작은 절의 이름이 신령스러울 령(靈)에 샘 천(泉)자를 붙임으로 미루어 샘물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 그 자리 암자는 나중 세웠을 것으로 짐작했다. 맞배지붕 법당에는 육성인지 녹음인지 낭랑한 비구의 독경 소리가 들렸다.
영천사에서 용소산으로 올라 전망대에서 간식으로 가져간 고구마와 빵을 점심 끼니로 대신했다. 눈 앞에 펼쳐진 거제섬이 에워싼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봤다. 옥녀봉과 나뉘는 이정표 갈림길에서 가을포 봉수대로 내려섰다. 멀지 않은 다대포와 가덕도에서 받는 봉화와 내가 교직 말년 지낸 거제의 봉화를 서쪽으로 고성 곡산으로, 북쪽으로 함안 파산으로 보내는 가을포 봉수대였다.
가을포 봉수대의 석축을 디뎌 밟으면서 옛적 통신 수단과 함께 변방을 지킨 무명 선대의 노고를 떠올려 봤다. ‘가을포’ 지명 유래는 알 수 없어 미제로 남겼다. 봉수대에서 하산은 가르멜 수도원으로 내려섰다. 소나무 숲에는 열 개 동판에 새겨둔 성화와 성구에서 성탄의 의미가 남다르게 와 닿았다. 다구에서 산모롱이를 돌아온 지방도를 따라 광암 해수욕장을 지나 진동까지 걸었다. 23.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