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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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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경주, 붉은 꽃 꺾다
무덤과 술과 달의 도시. 십년 전의 경주는 내게 그렇게 기억됩니다. 바라보기 좋은 초승달이 있었고 무욕의 취기가 있었고 비현실적이어서 편안했던 무덤들이 있던 그 도시에서 이십대 초반의 내 마음은 어떤 무늬들을 깁고 있었을까요. 십년 전 내 몸이 캄캄하여 차마 깨울 수 없었던 신라의 마음은 무엇이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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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백성이나 신분이 높은 계급이나 젊으나 늙으나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흥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사모하는 마음을 향해 있을 때 모든 마음은 열렬하고 귀한 것이라는 존재 증명의 싱그러움. 꽃을 꺾기 위해 벼랑을 오르는 노인의 등 뒤로 일렁이는 근육질의 동해 바다가 있었을 것이고 어린아이 웃음처럼 깨끗한 욕망을 지닌 푸른 하늘이 있었을 겁니다. 밀실이 아닌 드넓은 바다와 하늘 아래서, 은밀하고 자폐적인 속삭임이 아니라 일행과 남편까지 있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노래된 이 헌화의 노래는 솔직하고 분방하여 유쾌합니다.
나는 이제 한 사내를 떠올립니다. “서라벌 달 밝은 밤에/ 밤 깊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건만/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노래의 외연으로만 보자면 아내의 불륜을 목도한 비극적인 사내의 노래가 되겠지만 처용의 존재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맥락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나는 이 노래에서 낙천적인 분방함을 지닌 신라의 선남선녀를 만납니다.
달 밝은 밤 주흥을 만끽하다 집에 돌아온 사내. 사내가 밖에서 노니는 사이 여인은 노심초사 발 동동 구르며 남편을 기다리느라 애간장 태우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무르익은 달밤의 관능을 즐기지요. 처용은 돌아와 아내의 유희의 시간을 목도하지만 드잡이질을 하지도,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밤 늦도록 노닐다 돌아온 자신에게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있었듯이 아내의 즐거움을 존중해 주려는 듯도 보입니다. 나는 처용과 그의 아내에게서 문란하다기보다는 자유로운 소통의 방식을 체득한, 서로의 욕망에 진솔하게 다가서 있으므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 오래된 연인의 모습을 만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마음이니, 그 마음의 역동성을 일방적으로 막아두기만 해서야 소통이 가능해질 리가 없지요. 상대방의 욕망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결국은 ‘서로’에게로 마음이 기울어 오도록 만드는 마법의 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
처용가는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벽사진경(酸邪進慶: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치고 좋은 일을 맞이함-편집자 주)의 노래로 읽을 때에도 사뭇 매혹적입니다.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역신이 사랑했답니다. 역신이 아내를 흠모하여 아내를 범했다는 것은 죽음(병)이 아내의 삶(몸)에 깃들었다는 것인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하는 처용의 태도는 처연하고 비극적이지만 평온합니다. 삶으로부터 죽음을 억지로 분리시키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순간이니 젊음도 그러하고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이 비극적이고 냉정한 삶의 순리를 받아 안고 그는 다만 달빛에 온몸을 적시며 춤을 춥니다. 처용의 춤은 생로병사의 번뇌를 일상의 리듬으로 끌어안을 줄 알았던 초월의 자세와 맞닿아 있습니다. 삶은 헐거운 가죽부대를 이끌고 허락된 몇 개의 산구비를 넘어가는 일이니 이 길의 시작은 출발부터 한 병을 치러내기 위한 싸움일 터, 이승에서의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님을 이미 알아차린 처용은 역신(죽음)일지라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놀아주고자 합니다. 처용의 노래 그윽하고 춤사위 깊어가는, 이 ‘놂’의 시간을 통하여 인간의 몸은 재생과 부활을 거듭 꿈꿀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
지게를 지고 가는 사람,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웃는 얼굴, 절하는 아이들과 어머니, 수줍게 웃고 있는 여인, 죽은 이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 사냥하는 사람 등 인간사의 희로애락의 순간들과 뱀, 개구리, 호랑이, 독수리, 두더지, 소, 잉어, 불가사리, 게·가재, 거북, 닭, 개, 말, 족제비, 개미핥기, 원앙, 올빼미에 이르기까지 순간의 호흡 속에서 목숨을 얻어 나온 듯한 이 흙인형들은 신라를 꿈꿀 때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될 것들입니다. |
관음의 벗은 발 |
저 여리고 슬픈 부처들에 비하면 석굴암의 본존불인 석가모니 부처는 완전자가 담지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지요. 그것은 교교한,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인간적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순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석가가 보리수 밑에서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손모양-편집자 주)의 수인을 하고 있는 그의 자태는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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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순례자 선재 동자가 보았던 하나의 탑 속에 들어 있는 수천의 탑들처럼, 우주를 덮고 있는 인드라[Indra:고대 인도의 영웅신. 동남아 여러 민족과 종교의 신화에서도 존재하며, 불교에서는 강력한 신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인 석제환인(釋提桓因) 또는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하며 법(法)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편집자 주]의 그물처럼, 우주를 꿈꾸고 우주와 연결되고자 했던 신라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자리를 스스로 보호할 수 있었더라면 천년의 신라는 한층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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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그릇 속에 든 첨성대를 빤히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쓸쓸해져 서둘러 후루룩 국물을 들이킵니다. 무수한 입술이 스쳐갔을 숟가락이 다시 내 입술을 스쳐 내일이면 다른 누군가에게 따순 국물 한 모금을 떠 넣어주게 되겠지요. 국물을 조금 더 달라고 청했더니 머리칼 희끗한 주인 할머니가 살뜰하게 고명을 새로 얹은 국 한 그릇을 밥상에 내어 주십니다. 투막집 같은 손이 밥상을 자분자분 쓰다듬고 지나가고, 문득 문 밖이 소요스러워지네요. “소 피예요! 소 피!” 그릇을 들고 주인 할머니가 소의 피를 받으러 나갑니다. 어느 틈에 해장국집 즐비한 그 거리의 아낙들이 그릇 하나씩을 챙겨들고 나와 있습니다. 트럭에서 막 내려진 고무통 속에서 뭉클하게 김이 오르는 검붉은 소의 피. 바가지째 퍼주는 붉고 비린 피 냄새 속에서 나는 문득 십우도의 마지막 장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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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 공부 나들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