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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언약궤 운반
삼하 6:1-11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1)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 6:1-11 /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다] 다윗은 이스라엘 영내에서 블레셋 족속을 몰아내고, 그동안 그들의 지배 아래 있던 국경지대의 마을에서 여호와의 궤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다윗은 우선 온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난 장병을 모았는데, 3만 명쯤 되었다. 2) 다윗은 그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2킬로미터쯤 나가 유다 지파의 바알레 마을에 이르렀다. 이곳은 나중에 기럇여아림이라고도 불렸다. 바로 이 마을에 보관되었던 법궤를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운반할 작정이었다. 이 법궤는 그룹 천사들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서, 그 궤 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다. 3) 이 법궤는 본래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맡겨 놓고 그에게 지키게 하였으나 그 사이에 그는 이미 늙고,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그 임무를 계승하였다. 법궤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에 쓰던 낡은 수레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아비나답의 두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다. 4)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 곁에서 따라가고, 야효는 법궤 앞에서 걸어갔다. 5) 그리고 다윗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며 행진하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모두 목청껏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6) 그런데 그들이 나곤이라는 사람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는 바람에 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그 곁에 따라가던 웃사가 얼른 궤를 꼭 붙잡았다. 7) 그러나 웃사가 함부로 법궤를 만졌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몹시 진노하셔서 그를 치셨다. 웃사는 법궤 곁에서 죽었다.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이렇게 현장에서 쳐죽이시자, 이것을 보고 몹시 언짢아진 다윗은 그곳을 가리켜 베레스 웃사라고 불렀다. 이는 `웃사가 찢겨 죽은 곳'이라는 뜻이다. 9) 이때부터 다윗은 여호와께 겁을 먹고 `이래 가지고서야 내가 어떻게 감히 여호와의 법궤를 가져다가 모실 수가 있겠는가? 잘못하다가는 식구들만 다 죽일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면서 10) 처음과는 다른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으로 모셔 가지 않고, 단 지파의 영역에 있는 레위족의 마을 가드로 보내 그 마을에 사는 오벧에돔의 집에 맡겼다. 11) 법궤가 그곳에서 석 달 동안 있었는데,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내려 주셨다.
예루살렘을 도읍으로 삼은 다윗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오려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1-5)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모인 사람은 35만명 가량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을 제 1차 백성들의 총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어 다윗은 2차 총회을 열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 했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신앙이 회복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생겼다고 법궤를 옮기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궤는 이미 70년 전인 아벡 전투 때부터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을 비롯한 그 누구도 법궤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법궤를 수레에 실어오게 된 것입니다. 법궤는 레위 지파 자손들이 매고 옮겨야 한다고 율법에 명시되어 있으며(출 25:14; 민 4:15, 7:9), 다윗도 법궤를 매어오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2). 그런데 갑자기 언약궤가 수레에 실려서 이동합니다(3). 이는 율법에 대한 다윗의 확고한 지식과 의지가 없었거나 블레셋인들로부터 법궤를 받을 때에 수레로 받았던 것이 고려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베레스 웃사(6-11) 법궤가 나곤의 타작마당을 지나날 때에 사고가 터집니다. 갑자기 소가 뛰고 법궤를 붙들던 웃사가 죽은 것입니다. 앞에서 나온 장면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동차에 무엇을 싣고 가다가 그것이 흔들릴 때 그것은 붙잡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시작이 잘못되었습니다. 앞 문단에서 서술한 것처럼 하나님의 궤는 오로지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이 메고 옮겨야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율법이 무시되었고 수레에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신앙은 무지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는 어느 누구도 만질 수 없습니다. 레위인은 물론이고 제사장조차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궤의 고리를 만들고 고리에 막대기를 끼고, 그 막대기를 빼지 않았습니다. 혹시 모를 잘못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웃사를 치십니다. 그래서 그 지역이 ‘웃사를 치셨다’라는 의미인 베레사 웃사가 되었습니다. 웃사의 사건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깁니다. 이로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집에 모시는 것은 늘 복된 일인 것입니다.
적 용 :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법대로 한 적은 없나요?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그 집안에 복된 일인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6:1
뺀 무리 삼만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3:1-5에 의하면 '뺀 무리 삼만'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골고루 뽑은 자들일 것이다(Keil).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올려 오기 위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의 온 이스라엘'(대상 13:5)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곧 이스라엘 전체에서 골고루 뽑은 수행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데 이 '뺀 무리 삼만'은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다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일종의 군사들이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던 바알레유다(2절)는 블레셋 지경(地境)에서 가까웠으므로 그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작은 법궤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서 삼만이란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 혹자의 견해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The Interpreter's Bible). 이와 관련 70인역(LXX)은 본절의 3만이란 수를 7만으로 기록하고 있음도 기억하라. 한편,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골고루 수행자들을 뽑은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법궤에 대한 온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켜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꾀하기 위함이다. 각 지파간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다시 모으고 - 이 말은 이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총회는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명이나 모였던 총회(5:1-3;대상 12:23-40)에 이은 제 2차 총회임을 보여 준다.
=====6:2
바알레유다 - 혹자는 '바알레유다'(Baale of Judah)를 '유다의 방백들', '유다 백성들'로 해석하였다(LXX, Vulgate, Luther, J. W. Wevers). 그러나 이 해석은 구문법상(構文法上)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한 문장 안에 지명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거기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거기서'가 지시하는 지명을 의미하며, 혹자들이 해석한 대로 일반명사는 아니다. 한편, 바알레유다는 '숲의 성읍'이란 뜻의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의 옛 명칭이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으며 '바알라'(Baalah)로 불리웠다(수 15:9;대상 13:5, 6).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다의 바알라'(Baalah of Judah),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지게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했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 궤는 이제 다윗에 의하여 온 이스라엘의 관심이 집중되기 전까지 이곳에 70년 이상 동안(B.C. 1075년-B.C. 1003년, 이 기간은 아벡 전투 때부터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때까지의 기간이다;Leon Wood) 머물러 있었다(삼상 7:1, 2). 그 궤는...
이름하는 것이라 -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히브리 문구, '아론 하엘로힘 아쉐르 니크라 쉠 솽 여호와 체바오트 이쉐브 하케루빔알라우'(*)를 직역하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그 위에서불리워지는 하나님의 언약궤'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중요한 낱말은 '그 위에서'(*, 알라우)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사이에'로 번역되었음). 과연 '그 위에서'는 어디를 의미하는 걸까? (1)혹자는 '그 위에서'를 '그룹 위에서'로 해석한다(Cleri-cus). 이 경우 본절은 '그룹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되고 만다. 그러나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계시기 때문이다(삼상 4:4). (2) 또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서'를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 위'로 해석한다(Keil,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이렇게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바로 그위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啓示)이며 그의 능력과 속성에대한 표현이며, 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그분의 능력, 그분의성품, 그분의 영광이 임재하여 있다는 말이 된다. 즉, 하나님의 언약궤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寶座)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궤를 '주의 권능의궤'라고 한 표현과 일치한다(시 132:8). 따라서 이 해석은 비교적 타당성을 갖는다 하겠다. 한편, 다윗이 이와같이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 한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정왕국(神政王國)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Ce Graaf).
그룹들 -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의 일단(一團)이다. 이들의 전체 수효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들의 직무에 대해서는 성경에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즉 이들은 창세초(創世初)에 아담이 쫓겨난 에덴 동산에서 생명 나무를 지켰으며(창 3:22-24) 하나님의 보좌 병거를 끄는 사역을 담당하고있다(겔 1:20). 그러나 이들의 형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다만 성경 곳곳의 기록들(겔, 1, 10장;계 4:6-8)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날개를 지녔으며 사람과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출 25:18, 19 주석 참조.
만군의 여호와 - 5:10 주석 참조.
=====6:3,4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헌 수레가 아닌 새 수레에싣고 운반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존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분명히 법궤 운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민 4:15;7:9). 그런데도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래(삼상 25:1) 다윗의 통일 왕국이 성립되기까지의 혼란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는바 다윗도 율법에 정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2)당시 블레셋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은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였는바 다윗이 이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다(Lange). 아무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은있었으나 그 방법면에서 그릇됨을 볼 수 있다.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 -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장)가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기까지 안치되어 있던 기럇여아림 사람 아비나답(Abinadab)의 집을 가리킨다(삼상 7:1, 2).
아비나답의 아들 -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 )는 복수형으로 '아들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복수 형태 '아들들'은 때로 '손자'(grandson)를의미하기도 한다(민 16:1;왕하 25:22;대상 8:40;에 2:5;스 7:1). 이렇게 볼 때 본절의'아비나답의 아들'은 아비나답의 손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이미 70년 전부터 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7:1, 2). 그러므로 이제는 엘르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들인 웃사와아효가 이 일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Commentary).
아효 - 이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이말은 '그의 형제들'로 번역할 수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법궤는 웃사와 그의 형제들이 운반한 것이 된다. (2)사람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1)번의 경우처럼 '그의 형제들'로 해석하면,본서 저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웃사의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되니 이는자연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2)번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6:5
이스라엘 온 족속 - 이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뽑힌 자들을 의미한다. 1절 주석참조.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주악하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된큰 역사들과 관련하여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다(수 6:4-20;왕상 1:39;대하 5:11-14).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며 음악을 연주한 사실은 그들이이 행사를 지극히 거룩한 의식으로 여겼음을 입증한다. 한편, 여기서 '주악하더라'에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하크'(* )는 본래 '뛰놀다', '즐거워하다'는 의미이다(삼상 18:7;대상 15:29;잠 8:30, 31;렘 30:19).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잔치 분위기에 젖어 기뻐하면서 연주한 것을 의미한다(Lange,Keil). 본절의 평행 구절인 대상 13:8에는 '뛰놀며 노래하며...주악하더라'고 되어 있다.
수금 - 히브리어로는 '킨노르'(* )라고 하는데 6줄로 이루어진 현악기이다. 대개 노래를 부를때 반주(伴奏)를 넣는 악기로 사용되었다.
비파 - 하아프의 일종이다. 역사서(삼상 10:5;왕상 10:12;대하 9:11)와 시편(시33:2;57:8;92:1-3)등에 자주 언급되는 악기로 그 용도는 수금과 같다.
양금 - 히브리어로 '므나아느임'(* )이라고 하는 이 악기는 탬버린(tambourine)의 일종이다.
제금 - 히브리어로 '첼츨림'(* ) 또는 '므칠타임'(* , 대상 13:8;대하 5:12)이라고도 하는 이 악기는 심벌즈(cymbals)dml 일종이다.
여호와 앞에서 - 그 당시 언약궤 앞에 있다는 것은 곧 여호와 앞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민 10:35;수 6:8).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출 37:1-5 주석 참조.
=====6:6
나곤의 타작마당 - 이에 대해 대상 13:9에서는 '기돈의 타작 마당'(the threshingfloor of Chidon)이라고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해석들이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이 두 기록의 차이를 원문 파손으로 인한 두 저자의 실수로 보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기돈'(Chidon)을 타작 마당의 주인 이름으로 보고 '나곤'(Nachon)을 타작 마당의 수식어로 보는 해석이다.즉, 나곤이란 말의 의미는 '예비된'이란 뜻으로 나곤의 타작 마당은 곧 '기돈의 예비된 타작 마당'이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나곤을 '쿤'(* , 예비된, 준비된)의파생어로 본 데서 나온 견해이다. (3)'나곤'을 '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수식어로 봄은 물론 '기돈' 역시 타작 마당을 수식하는 말로 보는 견해이다. 즉, '기돈'(* )은 '파괴', '재앙'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예비되었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재앙이 웃사에게 내린(7절) '재앙의 타작 마당'이었다고해석한다(Lange). (4)세번째 견해와 같이 '기돈'을 사람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재앙'으로 해석하긴 하나 '나곤'을 '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말로 보지 않고 '나카'(* ,치다)의 분사로서 '충돌하는'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Keil). 따라서 이 견해는 이 타작 마당을 '충돌의 타작 마당이며 재앙의 타작 마당'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네 견해 중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중 (3)번이나 (4)번을 지지하는 것이 비교적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1)번은 해설이 너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23:1-7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그리고 (2)번은 본문의 문맥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3)번과 (4)번은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여(8절) 웃사에게재앙이 임했다고 한 본문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상의 제(諸) 견해에도 불구하고'기돈'이 '나곤'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 역시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들이 뛰므로 - '뛴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트'(* )는 본래 '미끄러지다', '걸려 넘어질 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소들이 돌뿌리에 걸리거나 미끄러져 비틀거리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Keil & Delitzsch, PulpitCommentary). 그런데 이러한 소들의 실수는 앞서 블레셋 백성들이 암소 두 마리에 법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운반했을 때에는 없었던 불길한 흉조(凶兆)였다(삼상 6:12). 그러므로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블레셋인들도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긴 하였다. 그러나 블레셋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행위는 묵인될 수 밖에 없었다(삼상 6:10-16).
=====6:7
웃사의 잘못함 -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것을 가리킨다(6절). 그런데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했던 웃사의 행위는 인간적으로 또는 상황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하나님 말씀에 의거할 때 엄연한 신성모독(神聖冒瀆) 행위였다. 18:19-33 강해, '기독교 윤리와 상황 윤리'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법궤의 신적 특성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 중심지어 고핫 자손일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민 4:15).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로서 거룩한 것이니 아무도 들여다 보지도 말라고 명하셨으며(민4:20;삼상 6:19),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민4:15) 채(pole)를 궤의 고리에 꿰어(출 25:14) 운반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매우 엄하게 법궤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웃사가 그것을 만진 것은그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겼으며, 하나님을 가볍게 여겼다는 증거인것이다.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죽으니라 - 이처럼 구약 시대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자를 향하여 급속한 진노를 발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선 그 모든 진노가 영원히 유보된것이다(롬 5:8, 9). 그러니 이 같은 영생의 축복을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엡 2:8).
=====6:8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 여기서 '충돌'로 번역된 '페레츠'(* )의원동사 '파라츠'(* )는 '무너지다', '파괴하다', '분산시키다'등의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사 저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하신 것(7절)을 가리킨다. 공동 번역은 본절을 '야훼께서 우짜를 치신 일이'로 번역하고 있다.
다윗이 분하여 - '분하여'에 해당되는 원어 '하라'(* )는 단순히 괘씸한마음을 품거나 섭섭한 감정을 지니는 것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의 기본 뜻은 '타오르다', '심히 뜨거워지다', '빨갛게 되다'로서 온 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 극도의분노를 가리킨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아니면 무엇에 대하여 이처럼 분노하는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바 크게 두 견해로 나뉘어진다. (1)다윗은 웃사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Lange, MatthewHenry,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이나 그의 백성들 그리고 웃사는 무슨 큰 불경죄(不敬罪)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경솔한 행동을 한 것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처럼 준엄한 형벌을 가하시니(7절) 이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지금껏 하나님을 대해온 다윗의 신실한 태도(2:1;5:12, 23)에 비추어 볼 때 수긍하기 어렵다. (2)다윗은 자신과 웃사의 불찰로 인하여 빚어진 비극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계획이 자신과 웃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중단되게 되었음을 크게 분해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견해는 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구절(9절)에 의거할 때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다윗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분을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 여기서 '베레스'로 번역된 '페레츠'(* )는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곧 '갑작스런 공격', '뜻아니한 재난'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사항에 대한 '위반', '범법'이다. 따라서 '베레스웃사'(Perez-uzzah)란 말은 '웃사를 치심' 또는 '웃사의 위반'이란 뜻이다. 아마 다윗은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웃사가 율법을 어기고선 법궤를 만진 것(6절)과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일로 인하여(7절) 그곳을 이렇게 명명(命名)하였을 것이다.
=====6:9
다윗이...여호와를 두려워하여 - 아직 미처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자신들이 율법에 명한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치 아니한 데 있음을 깨닫지 못한 다윗(3, 4절 주석참조)은 우선 법궤로 인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재앙이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였을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시는 역사(役事)를 중단한 채 황급히 법궤를 변방으로 이송(移送)시켰을 것이다(10절).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또 하나의 경솔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법궤를 맡아 관리하던 오벧에돔의 집에복을 주셨기 때문이다(11절).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를 접하였을 때 무조건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규명한 후 올바른 방법에 따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어야 마땅했다(Matthew Henry).
=====6:10
다윗 성 -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성'에 새로이 명명한 이름이다. 5:7주석 참조.
가드 사람 오벧에돔 - 대상 26:1-4에 의하면, 오벧에돔(Obededom)은 고핫의 자손이며 후에 예루살렘 성문의 문지기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그를 가리켜 가드 사람(the Gittite)이라고 한 것은 그가 단 지파 지경 내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 가드림몬(Gathrimmon)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Keil, Clericus, Wycliffe,Pulpit Commentary).
=====6:11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 아마도 이 말은 그의 가족, 가축, 밭의 소산 등이 풍성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제 하나님의 진노(7절)가 깨끗이 풀린 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Hertzberg, Matthew Henry).
< 설 교 >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삼하 6:1-15 / 지태일목사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왕의 생애에서 왕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측면들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괄하는 명실공히 통일왕국의 왕으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삼하6:1절 이하를 보면, 다윗이 하나의 통일왕국을 건설한 다음 제일 먼저 한 일은 수도를 예루살렘에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심장부에 한 나라를 통괄할 수 있는 정치적인 수도를 정하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수도를 정하고 옮겼다는 사실만 하나로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윗은 잘 알았습니다. 다윗은 그의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참으로 잘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의 영성을 통일할 수 있는 정신적 공통분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다윗은 국민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양한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것, 그들로 하여금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고, 하나의 시선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응집력 있는 유대관계는 “믿음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정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 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법궤가 무엇이길래 다윗은 그렇게 옮기기를 했는가? 이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행진할 때에도 법궤를 제일 앞세우며 행진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앞세우며 삶을 걸어간다는 신앙고백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의 광야행진이 중단되면 법궤를 가장 중앙에 모셔 놓고 대열을 짜고 진을 쳤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신앙고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성소를 거쳐 지성소에 들어 왔을 때에도 마지막으로는 항상 이 법궤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법궤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같이 다윗도 그들의 수도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구체적으로 그 백성속에서 구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무엇보다도 법궤를 먼저 옮겨 오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통치, 하나님이 없는 가정, 하나님이 없는 삶이 얼마나 허탄한 삶인가를 다윗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역사와 삶의 중심에 모시기 원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무엇입니까? 어디서 왓다가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까? 인간의 삶의 존재 의미와 가치, 생명의 존엄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힘들고 어렵다고, 돈과 명예와 인기가 무엇이길래 목숨까지 끊어야 합니까? 현대 세상을 살아 가면서 스트레스 안받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중심하지 아니한 인생들, 믿어도 제대로 믿지 아니하면 허탄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배우를 시켜준다고 할아버지 인감도장을 위조하여 몰래 대출을 받다가 걸린 대학생 손녀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하여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소망이 있고 능력이 있고 힘이 솟아납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던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형이라할 수 있는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가를 우리 모두가 배우고자 합니다.
1.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입니다.(12절)
12절 하반절을 보면,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벳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다윗이 법궤를 옮길 때 어떤 마음으로 행합니까? 기쁨으로 메고 옮겼습니다. 13절에 보면 “소와 살찐 것으로 제사” 했습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면서 찬양” 합니다. 체면도 다 버리고 순수하게 찬양합니다.
15절에서는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면서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옵니다”.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갈채를 보내며 메고 옵니다. 16절에는 “다윗왕이 여호와와 앞에서 춤추며 뛰어 놀았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 잃었던 법궤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안치하는 다윗의 마음은 너무 기뻤습니다. 처음에 법궤를 옮기다가 실패하고 오벧에돔집에 3달 있다가 다시 옮겨오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기뻤습니다. 왕되신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생각할 때 너무 기뻤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에 다윗과 같이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행하시기 바람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억지로 하거나 부득이 하거나 인색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시100:2절 말씀처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그 앞에 나아가자” 고후9:7절의 바울의 고백처럼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나 부득이 한 마음이 아닌 자발적인 기쁨과 헌신 섬김을 열납하심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합시다.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나 마지 못해, 인색한 마음으로 행할 때는 자신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만듭니다.
2. 겸손과 회개하는 마음입니다.(6-7절)
6절과 7절의 말씀을 보면 궤를 내려오던 사람중에 웃사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궤를 옮기는 도중에 소들이 뛰니까 법궤를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웃사가 손으로 그것을 잡습니다. 그런데 잡자마자 그는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붙들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한 웃사의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좋습니까?
하나님은 너무 무정하시고 무자비하시다고 생각하시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성경을 이런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그렇게 죽은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민4:15절을 보면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법궤를 운반할 때의 방법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거룩한 물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모든 물건들은 만지지 말고, 채를 꿰어 어깨에 매어 옮기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옛날에 가마를 메듯이 어깨에 매어 옮기라는 것이다. 이렇듯이 이것을 만지면 죽으리라는 말씀 한 마디없이 그냥 법궤를 만졌다고 죽이셨다면 그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을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이 법궤를 운반하는 방법과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도 이미 분명하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특별히 웃사는 레위지파 사람으로 법궤 취급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메고 옮겨야 되는데 웃사 형제는 세상 불레셋 사람들처럼 수레에 실고 가다가, 내 편리한대로 하다가 봉사하다가 말씀대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만지지 말고 메고 옮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편리한대로 하다가 나곤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뛸 때 법궤가 넘어질까봐 붙잡다가 하나님의 치심으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편리주의를 경계하시기 바람니다. 고핫 자손만 메게되어 잇고, 법궤에 손을 대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웃사는 편하게 수레에 실고 갔습니다. 안일주의 신앙이 보여주는 패망입니다. 그렇게 출발하다 보니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뛰니까 법궤가 넘어질까봐 손으로 붙잡습니다. 여기서 붙잡는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하즈’ 이 말은 소유대념을 뜻합니다. 웃사는 법궤가 마치 자기 것인양,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인양 행동했다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의 의를, 말씀을 깨뜨릴 때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해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일을 한다 하고, 교회를 염려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하지만 주님보다, 말씀보다 앞서거나 지나치면 안됨을 보여 줍니다.
교회가 마치 내가 없으면 안된다는 듯이 웃사처럼 그런 마음, 내 생각이나 내 방법을 따라 그런 자세로 붙들면 오히려 화가 미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자기 본위의 수레를 만들고 가져오고 마음대로 손으로 만진다면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심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화감동을 떠난 인간의 선한 방법은 오히려 하나님앞에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웃사를 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교훈을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다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봉사, 말씀을 위반하면서 하는 모든 봉사는 하나님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방법으로, 그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열심히 섬길 때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처럼 “목적만 선하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 아무래도 좋다”는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시키는 오염된 철학과 사고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도 좋아야 합니다. 올바른 수단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하나님의 일이 수행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웃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다가 참패 당해서는 안됩니다.
이같이 웃사가 법궤를 만지다가 죽었을 때 다윗은 상당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다윗의 반응이 나옵니다. 웃사의 잘못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웃사와 충돌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충돌하심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지금도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과는 충돌하고 계심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과 충돌하지 마시기 바람니다. 충돌 당하지 마시기 바람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름니다. 이런 웃사의 죽음을 보고 9절에 다윗은 이 법궤를 두려워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 이 말씀을 볼 때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 즉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궤를 모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다윗은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왕입니다. 경제적으로 볼 때 부와 재물을 크게 가진 자입니다. 재능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웃사가 죽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겸손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모든 일,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섬기시길 바람니다. 그러면 실패가 없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섬길 때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다윗성 자기에게로 매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갑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오자마자 하나님이 그 집을 축복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준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중심의 사람이요, 웃사가 죽은 두려운 상황속에서 희생을 무릎쓰고, 용기를 내어, 법궤를 모신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알고 모신 사람입니다. 법궤안에는 말씀을 상징하는 돌비가 있고, 만나 항아리로 십자가의 사랑을 감사하고, 성령의 능력을 따라 순종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는 법궤를 잘 모신다는 것,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사람 오벧에돔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역대상을 보면 오벧에돔의 가정과 모든 소유물에 복을 주셨습니다.(대상13:14) 후손들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대상26:1-5) 8아들들이 다스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은 군림한다는 말이 아니고 받은 은혜와 직분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그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들임을 말씀합니다.
역대상 26:6절에 보면 그 아들들을 용사라 그랬고, 8절에는 능력있는 자라 그랬고, 8절에는 직무를 잘 감당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무를 다하기 위한 능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대상26:7-8) 이것은 부모가 하나님을 잘 섬기니까 자식들이 큰 복을 받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자손들에게 승계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기시기 바람니다.
법궤를 3달 동안 잘 모신 오벳에돔의 집이 무사하고, 복을 누리게 되자 다윗의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2절을 보면 3달만에 법궤를 오벳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겨왔습니다. 석달 동안 다윗은 여러가지를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내가 법궤를 옮기는 일을 실패하였을까? 왜 웃사가 그렇게 죽었을까? 오벧에돔은 죽지도 않고 복을 받았다는 것을 보고 결국 다윗은 진리를 발견합니다.
민4:15절과 출37:1-5절을 보면, 법궤를 모시는 법, 운반하는 법이 나온다. 12지파 12명의 제사장들이 6명씩 좌우로 나누어 어깨위에 높이 메고 법궤를 옮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레위지파중 고핫 자손을 뽑아 하나님의 법궤를 무사히 다윗성에 메어오게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섬기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겨가며 섬기면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커다란 문제중의 하나가,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방법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의 일군이 된 다음에도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던 모든 방법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세로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심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요구하심니다.
우리는 육체는 이 세상에서 교회로 옮겨졌지만, 의식구조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일군답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좋은 목적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방법은 아직도 세속적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가, 신앙의 인격이 성경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성경적인 삶과 방법을, 교회운영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직장에서, 아니면 옛날에 이렇게 했는데 하고 그 고집을 교회에서는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씀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대로 살아갈 때 기뻐하심니다.
우리 장로교인의 12신조의 첫 고백과 같이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한 것과 같이, 우리는 성경이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성경을 통하여 삶을 배우시기 바람니다.
성경을 통하여 크리스챤의 행동양식을 배우고, 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 성도의 삶의 스타일을 빨리 배우시기 바람니다. 말씀대로 행동하시기 바람니다. 말씀대로 복종하시기 바란다.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람니다. 말씀대로 봉사하시기 바람니다. 이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먼 훗날 다윗은 노년에도 이 사건을 통해 얼마나 교훈을 받았는지 영영 잊지 아니하고 장막을 치고 하는 말이 대상15:1-2절에 나온다.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가로되 레위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또 역대상15:14-15절을 보면 성전건축을 준비하면서도 다시 한번 더 말한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케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이러한 진리를 배우기 위해 다윗은 젊은 날에 톡톡히 뼈아픈 댓가, 웃사라는 한 사람의 죽음의 댓가 치루고 배웠습니다. 여러분은 혼나고서야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지 마시기 바람니다. 신앙 잃고 물질 잃고 사람 잃고 건강 잃고 지위 잃고 배우지 말고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이 넘치시기 바람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말씀의 귀중함을 깨달아 말씀을 인격적으로 많이 배우고, 말씀속에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시고, 말씀위에 세워지는 영광스러운 귀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노경모목사(함께하는교회) / 삼하 6:1-23
예배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 따라서 예배하는 예배자의 자세가 달라지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닐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지를 않으십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웅장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예배처럼 보이게 드린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그 예배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를 않으십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귀찮아 하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이사야서 1:11-15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배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사울왕 때에 블레셋에 빼앗긴지 70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다시 찾아오는 너무나 기쁜 날입니다.
이 역사적인 날이 예배로 진행이 됩니다. 13절, 17절, 18절을 보면 제사, 번제, 화목제 라는 말이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제사를 계속 드리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예배 가운데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예배가 무엇이며 예배가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란 불로 태워서 바치는 제사를 말합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로 태웁니다. 불로 태우기 때문에 번제를 화제라고 부릅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몫이 되고, 제사장은 가죽을 취하지만, 예배자의 몫은 없습니다. 번제의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전체를 바쳤다는 것이고,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새끼들처럼 마음과 생각이 순전하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깨끗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초점은 예배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지고 있나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은혜받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 예배가 좋았고 은혜를 못 받으면 예배가 안 좋았고... 이것은 예배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내가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합니다.
둘째, 예배는 축제입니다.
먼저, 예배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13-15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해서 춤을 춥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히 환호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비록 예배 안에 경외 즉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지만 가장 근본적은 마음은 기쁨입니다.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기쁨입니다. 즐거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시고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요 축복입니다. 우리 마음이 설레임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데 인상쓰고 만날 것입니까? 예배가 은혜스러운지 그렇지 않은지 검사하는 사람의 자세로 하나님을 만날 겁니까?
예배는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과 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기쁨의 축제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밝아야 합니다. 즐거워야 합니다. 성도들이 얼굴에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웃음이 꽃피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는 감사의 축제입니다.
나를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셔서 감사하고 나로 하여금 지금 예배드릴 수 있도록 믿음과 건강을 주신 것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씀 듣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예배를 드리면서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7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던 법궤를 찾아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겠습니다. 이날 드린 예배는 감사의 연속이었습니다. 특별히 본문 21절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이 나를 택해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다고 감사의 고백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축복의 축제입니다.
축복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축복입니다. 선택받은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지체들에게 축복을 빌고 축복을 선포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 축복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다윗도 가족에게 축복을 하러 가족에게 갑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셋째,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본문 5절을 봅시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지금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합니다. 그런데 그냥 연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주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역대하 5:13-14절을 보면 솔로몬 성전을 짓고 상랑식을할 때의 예배의 모습니다. 다같이 읽읍시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한 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는 항상 경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조용한 것이 경건입나까? 엄숙한 것이 경건입니까?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경건입니다. 우리가 예배시에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춤을 통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내가 망가져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윗을 춤을 추었습니다. 14절,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은 에봇을 입은 채로 춤을 추었습니다. 부인 미갈이 이것을 보고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16절,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춤을 추는 것이 경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배 때 춤을 출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 꼭 말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춤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이 춤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본문 20-23절을 봅시다.
다윗은 자기를 비방한 미갈에 춤을 춘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이 춤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춤에서 대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받으셨고 이것을 비방한 미갈은 하나님이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는 징계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될 때 우리들의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 고정관념, 오해 들을 말씀 앞에 비추어 보면서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해 오지 않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우리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이 이 결실의 계절에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궤
삼하 6장 1~23절 / 이백민목사(브니엘교회)
제가 대학 다닐 때 어떤 한 과목은 일주일에 한번씩 시험을 쳤습니다. 시험친 것들이 그대로 학점에 반영이 되기 때문에 일 주일에 한번씩 시험칠 것을 공부하고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시험을 치고 나면 시험지를 거두어가서 교수님이나 조교가 점수를 채점하든지 아니면, 다른 학생들과 시험지를 바꾸어 채점을 하는데 그 교수님은 학생들 자신이 자신이 친 시험지를 직접 채점하게 하셨습니다. 속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속이고 자신의 점수를 올릴 수도 있었습니다. 교수님도 그 사실을 모르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도 교수님의 가르침의 하나였습니다. 점수 보다는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하는 배움의 기쁨을 느껴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긴 인생에 자신이 공부해서 얻은 진짜 실력이 중요하지 시험에 나타난 점수가 전부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얼마 전에 시험의 신이라고 까지 불리던 학생이 부정행위가 적발되어 학교에서 제적당한 사실이 뉴스에 났습니다. 그 학생은 자신의 실력보다는 허영, 가짜만 쫓다가 결국 일이 터진 것입니다. 허영과 껍질은 우리를 구속합니다. 하지만, 진리로 사는 사람은 자유함을 얻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법궤 또는, 하나님의 궤는 출애굽 때 만들어져서 본문의 다윗의 시대까지 계속 보존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법궤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신앙도 함께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쫓아 살아가는지, 허영을 쫓아 살아가는지가 판가름이 났습니다.
1. 하나님의 궤 – The Ark of God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는데 지성소는 선택된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지성소 안에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궤’입니다. 하나님의 궤 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이 있었기에,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도 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하는 동안 그 언약궤 위에 임재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책망하거나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를 만들게 하시고 간직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제사장들이 직접 메고 이동을 하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법궤가 항상 앞에 있었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였습니다. 그러나, 표는 표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법궤 자체에 미신적인 신앙을 두고 있었을 때 문제가 났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메고 가면 이전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던 것처럼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군사들이 법궤 때문에 전쟁하기를 주저하였지만 이스라엘이 패하고 법궤는 블레셋 군사들에게 뺏겨서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을 두던 신전에 함께 두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이 시대에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십자가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고난, 희생, 사랑과 구원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신적 능력을 자동으로 뿜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 이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2. 하나님의 궤와 순종 – The Ark of God and Obedience
하나님께서 법궤를 주신 목적 중에는 그 법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를 옮길 때도 법이 있었습니다. 법궤는 지정된 사람들 곧 레위 자손들 중에 고핫 자손들이 메고 옮겨야 했습니다(민 4:15, 7:9, 신 31:9). 법궤에는 고리들이 달려 있었는데 법궤를 옮기려면 옮기는데 사용되는 긴 막대기를 양쪽에서 고리들에 끼워서 여러 사람이 함께 메고 옮겨야 했습니다. 고리에 막대기만 끼울 수 있었지 법궤를 만질 수는 없었습니다.
(민 4:15)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그러나, 본문 말씀에 보면 법궤를 운반하는데 말씀대로 고핫 자손이 막대기에 메어서 옮기지 않고 수레에 법궤를 실어서 옮기다가 사고가 납니다. 수레가 흔들리자 웃사가 법궤를 보호하려고 손으로 붙들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웃사를 바로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키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대강대강 지키며 살아갑니다. 웃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강대강 지키다가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법궤를 보호한다는 명목이 있었을 찌라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명목이 있었을 찌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한 하나님이라고 절하고 섬겼습니다. 비록, 거기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섬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1대왕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두 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좋게 보이는 것들을 전리품으로 남겼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전리품을 남긴 이유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때 사울의 변명을 들었던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내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내 식으로 신앙생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궤와 복 – The Ark of God and Blessing given by God
축제 분위기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법궤가 옮겨지고 있을 때, 웃사가 죽는 사고가 나자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웃사가 죽은 장소의 이름을 ‘베레스웃사(웃사를 침)’라고 불렀고, 그것이 그곳의 지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지 않고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두게 하였습니다.
오벧에돔은 그 기분이 어떠하였을까요? 웃사가 죽은 사건 때문에 오벧에돔도 두려워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혹시 오벧에돔의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상과는 달리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3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삼하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그 소식을 들었던 다윗은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 곧 다윗 성으로 옮기기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법궤에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의 축약판인 십계명이 있었던 것처럼 법궤는 곧 하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서 받는 사람이 복을 받을 수도,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신 11: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신 11: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신 11: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법궤처럼,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성경자체에 주술적인 능력이나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면 복을 얻을 것이고 듣고도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눅 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미 말씀을 받았습니다. 복을 받을 것인지, 저주를 받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건물로 지어진 교회도, 십자가 문양도, 성경책도 실상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말씀되신 예수님이 실상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복의 근원이십니다.
<적 용>
* 사무엘하 6:1-23
1.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자유는 어떤 자유를 의미합니까? 나에게는 지금 이런 자유함이 있습니까?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를 만들게 하시고 계속 간직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법궤를 운반하기 위해 일하던 웃사가 죽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웃사가 법궤를 보호하려고 했던 행위가 왜 잘못되었습니까?
4.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법궤와 같이 실상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이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도움을 줍니까?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노경모목사(함께하는교회) / 삼하 6:1-15
법궤를 성경에서 증거궤, 하나님의 궤, 여호와의 궤, 언약궤로 다양하게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궤로 불리워집니다. 이 법궤를 찾는 것을 주제로 한 영화들과 다큐멘타리들이 참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과연 법궤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매우 궁금하지 않습니까?
법궤 속에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계명 돌판이겠지요.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곳입니다.
이 법궤가 엘리 제사장의 말년에 블레셋과의 전투 이후에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70년 이상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블레셋을 완전히 쫓아내고 정지적으로 군사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법궤를 수도인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다윗과 백성들이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법궤를 옮겨오는 것은 만장일치로 찬성을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 법궤를 옯기기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에서 뽑고 뽑은 3만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습니다. 주악이 울립니다. 즉 고적대가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본문 5절에는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모든 백성들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3장 8절을 볼까요.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이렇게 좋고 감격스러운 날, 수레를 몰던 '웃사'라는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죽이셨습니다. 경사스러운 날, 그것도 70년 이상 방치되었던 그 법궤를 이제 잘 모시기 위해서 다윗 성으로 가져오는 이 선하고 의미가 있는 이 날에 왜 웃사가 죽어야 했을까요?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면 법궤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웃사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잡은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요? 우리가 이러한 부분에 궁금증을 갖고 오늘의 말씀을 살펴봄으로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교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행여나 법궤를 갖고 나가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지 않을까 하여 임시 방편으로 법궤를 가져갔다가 빼앗깁니다. 그 법궤로 인해 블레셋에 재앙이 임하자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 변방에 갖다 놓습니다. 그래서 그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죽고,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가 되었고, 사울 왕의 시대가 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 법궤를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올 생각을 못했습니다. 역대상 13장 3절에 보면, 다윗이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드디어 다윗의 때가 되어서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오는 놀랍고도 위대한 일을 다윗이 시도하려고 했습니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그 일을 말입니다. 다윗과 백성들만 기뻐한 것이 아니겠지요, 하나님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다윗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수레를 준비합니다. 본문 3절을 봅시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새 수레란 좋은 재료로 잘 만든 최고의 수레입니다. 한 번이라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 것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최고급, 최첨단 기능을 갖춘 최신형 벤즈와 캐딜락 리무진과 같은 차이겠지요. 이러한 다윗의 정성은 높이 평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서운 함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고 선한 동기라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내 방법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라고 합니다. 특히 법궤는 반드시 고핫 자손이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법궤를 구별된 자가 메고 가야 함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3장 6절,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수아 6장 12절,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역대상 15장 14절,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법궤를 구별된 자가 메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인가 헤아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해 드려야 하지요. 그런데 다윗은 안타깝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왜 다윗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도저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던 다윗이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의 실수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피생활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방땅인 블레셋에서 거주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율법은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풍습과 습관과 규례에 젖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신상을 옮길 때 수레를 사용해서 옮겼던 것입니다.
블레렛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로 인해서 그들의 우상을 모신 다곤 신당의 신상들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재앙이 임하자 그들은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 수레에 실어 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6장 8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다윗은 법궤를 옮기는 일 때문에 흥분이 되어있었지, 하나님의 법궤를 어떻게 옮겨야 하는 지,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검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잘못된 열심은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주님도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을 때 그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22절에서 23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또한 '웃사'라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성물(聖物)을 만지는 자는 죽으리라'는 민수기 4장 15절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법궤를 손으로 만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겁이 나서 법궤를 다윗 성으로 더 이상 가져 가지 못하고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석 달 동안 두었습니다. 이 법궤로 인하여 오벧오돔의 집은 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옯겨 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옯겨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15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법궤를 가져 올 때, 다시 기쁨이 회복됩니다. 백성들이 기뻐합니다. 다윗도 기뻐합니다. 얼마나 기뻐하면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 만 기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얼마나 기뻐하시는 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것이 내 삶의 목적이요, 내가 행하는 일의 목적이라는 말을 합니다. 물론 성도들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도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의 깊이 있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 목적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목적이 좋은 것은 정말 좋습니다. 의도가 좋아야 하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이래야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2절 처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애정과 묵상과 연구와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게을리 했다가는 다윗처럼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 8절, 9절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을 앞 세우지 말고, 내 생각을 먼저 내려 놓고, 이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인지를 늘 살펴야, 성령님께 하나님의 생각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달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하나님의 깊은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청년이 신학을 졸업하고 마음에 깊이 은혜를 받고 아프라카 오지에 들어가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되려고 모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나려고 하는데 자동차 사고가 나서 다리 하나를 자르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탄식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아프리카 오지에 저 식인종이 들끓는 곳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내가 자동차 사고가 나서 다리를 잃게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고 고무다리를 하나 만들어서 차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다가 그는 식인종에게 잡혔습니다. 식인종 앞에 묶여 나가서 추장이 온 부족들을 모아놓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늘 맛있는 백인 고기를 먹게 되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그러자 이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백인은 백인이지만 맛있는 고기는 아니다. 너희 먹어봤자 별 필요가 없다.”고 고무다리를 떼어서 던져 주었습니다. 달라 들어서 고무다리를 베어먹어 보니 너무나 맛이 없고 질리고 퉤퉤 하거든… 그러니까 그 식인종 추장이 말하기를 “이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어떻게 다리가 이렇게 맛이 없고 질긴 다리가 있느냐?” 그들이 다 엎드려서 회개하고 이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온 추장의 동리가 회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무다리가 아니었으면 잡혀 먹혔어요. 하나님은 미리 식인종의 부족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할 것을 아시고 고무다리를 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다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적으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보다 높기 때문에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중에 지나가 보면 큰 행복으로 돌아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를 믿는 사람으로 로마서 8장 28절을 꼭 믿어야 돼요.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 좋은 것, 나쁜 것, 슬픈 것, 기쁜 것, 성공과 실패, 축복과 어려움이 이 합력하여 선하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생각으로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우리의 생각대로 모든 일들을 진행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마귀가 틈타고 들어와서 마귀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배당할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내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법궤, 예배를 회복하라
이윤재목사(한신교회) / 삼하 6:1-11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언제나 변함없는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드린만큼 믿고 예배드린만큼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의 수준이 곧 우리 믿음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의 윌리암 템플이 말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신자의 수준을 능가한 예배를 드린 적 없고 예배의 수준을 능가하여 세상이 변화된 적이 없다”. 개인의 신앙의 수준은 그가 드린 예배의 수준이고 그 시대의 세상의 수준은 그 시대 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합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가 가장 믿음이 좋을 때는 예배 잘 드린 때였습니다. 교회가기 좋아하고 말씀듣기를 사모하고 예배를 사랑할 때 우리의 믿음이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예배는 우리 믿음을 측정하는 영적 척도입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 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한 때 믿음이 좋았던 이 분은 어느날부터 예배가 싫고 예배때만 되면 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함께 교회에 왔는 데 딸이 말합니다. “엄마, 오늘은 졸지마. 알았지?”. 엄마가 말했습니다. “알았어”. 그런데 예배가 시작되고 장로님 기도가 시작되자 몸이 노곤해지지 시작했습니다. 장로님 기도가 길어지면서 눈이 가물 가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시작되었는 데 그 날따라 설교가 길고 지루합니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주보를 훝어 보는 데 왜 그렇게 오타가 많은지. 오타를 네 개나 잡아내고 교정까지 마쳤는 데 설교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30분이 지나자 자동적으로 몸이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 데 뭐가 툭해서 깨어 보니까 성경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딸이 엄마를 쿡 찌르며 말합니다. “내가 졸지 말라고 그랬지?” 딸이 말했습니다. “엄마, 그럴바에는 빨리 요금 내고 가자”. 딸은 헌금을 “요금”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두 모녀는 얼른 요금 내고 목사님이 축도하는 순간 잽쌔게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믿으면 잘 믿는 것인가요? 결국 신앙생활은 예배입니다. 예배 잘 드리면 신앙생활 살고 예배 못드리면 신앙생활 죽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주 사무엘상을 통해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목숨걸고 쫓았고 다윗은 15번이나 피하면서 수없는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되는 고난은 없습니다. 드디어 사울은 블레셋에게 죽고 사무엘하로 오면서 다윗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어 한 첫 번째 일은 에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일입니다. 당시 에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이 다스리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다윗은 그 성을 빼앗고 다윗성이라 불렀습니다. 에루살렘을 수도를 정하면서 다윗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와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법궤는 불레셋에게 뺏겨 이리 저리 전전하다가 아미나답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로 하여금 법궤를 가져오게 했는 데 법궤를 운반하는 동안 사고가 났습니다. 웃사가 그만 죽은 것입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쳐서 법궤옆에서 죽었습니다.
법궤가 무엇입니까?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만들라 해서 만든 성물 아닙니까? 그 안에 십계명 돌판, 아론의 지팡이, 만나 담은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줍니다. 십계명 두 돌판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만나담은 항아리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위에 속죄소가 있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거기에 피를 뿌리며 하나님이 그 죄를 덮어줍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말씀, 구원, 공급, 용서가 하나님의 네 가지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백성과 만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궤는 단순한 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법궤를 모셔와야 하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각료를 임명하기도 전에, 아직 정부를 조직하기 전에, 군대를 창설하고 왕궁을 짓기도 전에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법궤를 모시면서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웃사, 다윗, 그리고 미갈입니다. 이 세 사람은 법궤 모시는 세 종류의 사람이요 세 종류의 예배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배자입니까? 이 세 사람을 통해 우리 예배를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먼저 웃사입니다.
웃사와 법궤와의 관계의 핵심은 웃사가 법궤를 운반하는 사이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삼하6: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 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런데 법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쯤 오는 데 갑자기 수레를 끄는 소가 뜁니다. 웃사가 경황중에 법궤를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그 순간, 7절입니다. 삼상6:7, “여호아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곁에서 죽으니라”.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오는 데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땅이 떨어질 위기에 빠지자 웃사가 급히 손으로 법궤를 붙잡았는 데 그 순간 하나님이 그를 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 아닙니까? 공중의 새 한 마리도 아끼고 들의 풀 한포기도 사랑하시는 분이 어떻게 법궤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은 당신의 백성을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웃사는 그때 법궤를 붙잡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 했단 말입니까? 혹시 어떤 이유로 하나님의 심기가 불편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죽일 필요끼지는 없지 않습니까?
오랜 시간, 신학자, 목회자, 성경주석가들이 이 문제를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웃사를 죽이셨을까? 첫 번째 성경적 대답은 법궤를 운반하는 방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법궤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됩니다. 운반할 때도 사람의 손이 직접 닿지 않도록 법궤에 부착된 고리에 막대기를 끼워 운반해야 합니다.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것은 당시 불레셋이 썻던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편리하기 때문에 차용했던 것입니다. 삼상6장에 보면 블레셋 지역에 있던 법궤를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보낼 때 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땅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블레셋이 섰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법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마자 소와 함께 수레를 불사릅니다. 뿐 아니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 보았는 데 그때 오만 칠십명이 죽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자고 만든 법궤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왜 법궤와 관련된 사건들이 하나같이 죽는 사건일까? 이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법궤를 손으로 만지지 말고 운반할 때도 손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고리를 끼워서 운반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됩니다. 출25:13-15절입니다.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그런데 웃사는 이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가 법궤를 운반한 것은 참 잘했습니다. 그도 아마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 하려고 했다면 말씀대로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법궤에 손을 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손대는 것이었습니다. 웃사는 열심히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지식이 없는 열심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는 손대지 말아야 할 법궤에 손을 댓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으로가 아니라 자기에게 편리한 방법으로 법궤를 이동했습니다. 수레에 태워 소가 끌고 가면 고리를 끼워서 가마처럼 운반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너무 가까운 나머지 하나님을 우리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믿을수록 이 위험은 더 커집니다. 누가 무슨 설교하면 “다 아는 소리야. 내가 20년 믿었어. 나 모태신앙이야. 우리 집안에 목사가 7명이야”. 이러면서 아는 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오래 믿어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손에 붙잡히는 아닙니다. 욥23:8-10에서 욥이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니나니”. 욥은 고란이 계속될수록 하나님을 더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알아도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알 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시면 내가 정금같이 된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면 언제나 달게 받겠다는 것만 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가가 요단강 건널 때 백성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말라. 법궤에 바짝 다가 서지 말라. 2천큐빗쯤 떨어지고 절대 가까이 하지는 말라”. 2천큐빗이면 약 1킬로입니다. 법궤와 1킬로쯤 떨어져라. 왜? “하나님은 너와 다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분과 너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그는 하나님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그는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산다. 그는 영원을 살고 너는 순간적 존재다. 그러니 네가 그를 안다고 말하지도 말고 그를 손에 넣으려고도 하지 말라. 네가 그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너를 알며 네가 그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너를 움직인다”. 여기에서 예배가 나옵니다. 웃사가 법궤에 손을 댓는 것을 깊히 들어가 보면 그가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상자안에 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내가 보호하고 내가 관리하며 내가 운영하고 내가 움직일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큰일 날 생각입니다. 단순히 내가 하나님을 많이 안다는 생각으로부터 내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배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목회자는 가장 좋은 예배자이면서 가장 나쁜 예배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예배를 인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를 기획하고, 예배를 진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끔 자신이 예배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설교가 곧 예배라고 생각하듯이 목회자는 자신들이 예배 관리자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느낌이 좋으면 좋은 예배라고 생각하듯이 목회자도 설교만 잘하면 좋은 예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함정입니다. 예배는 목회자를 비롯하여 사람이 만들지만 그가 예배관리자는 아닙니다. 누구도 예배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예배관리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법궤상자 안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설교할 수 있지만 설교자이기 때문에 예배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감동적인 찬양, 율동, 드라마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지만 자신을 performer, 공연자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는 누구도 비예배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상자안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 안에 넣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만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는 예배를 위해 무엇을 했든지 하나님앞에 엎드린 예배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벧에돔입니다. 웃사가 죽자 다윗은 잠시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습니다. 11절입니다. 삼상6:11, “여호아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 데 여호아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두 사람이 대조를 이룹니다. 웃사와 오벧에돔입니다. 웃사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오벧에돔은 가드 사람입니다. 가드는 불레셋 땅이고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오벧에돔은 불레셋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웃사는 힘듣게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갔고 오벧에돔은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죽었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웃사는 열심히 하나님을 관리하려고 했고 오벧에돔은 다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직분이 높고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웃사처럼 열심히 해도 예배를 잘못 드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벧에돔처럼 이방인이고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안해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복을 받습니다. 웃사는 많은 일을 하다가 죽었고 오벧에돔은 아무 것도 안하다가 복을 받았습니다. 예배가 중요합니다. 예배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서 예배자들입니다.
다음 다윗입니다.
다윗은 웃사가 죽자 법궤를 잠시 오벧에돔의 집에 맡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자 거기 오래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져오는 데 다윗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삼하6:14, “다윗이 주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니라”. 여러분, 다윗이 얼마나 법궤 가져오는 것이 기뻣으면 춤을 추었겠습니까? 다윗은 지금 의무감으로 법궤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적 화합을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법궤를 가져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법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렇게 한번 예배드려볼 수는 없을까요? 정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해 볼 수 없을까요? 우리 생에 그렇게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히브리어로 예배를 “샤하”라고 합니다. 구약에 17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냥 고개만 숙인다는 뜻에서 엎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경외와 복종의 표시와 함께 마음으로 엎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엎드리는 것입니다. 욥이 엎드렸습니다. 욥1:20, “욥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아브라함이 엎드렸습니다. 창18:2,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느헤미아가 엎드렸습니다. 느8: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엎드렸습니다. 대하20:18,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리고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렸습니다. 계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앞에 드리며 이르되”. 요한계시록의 예배는 엎드리는 예배입니다.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자기 면류관을 드리며 예배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면류관을 던지며 예배한다고 했습니다. 왜 면류관을 던질까요? 하나님앞에 면류관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나라는 존재, 내가 가졌다는 것들이 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면류관을 벗어 던지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런 예배를 한번 드려보고 싶지 않습니까? 나라는 존재를 다 던져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는 예배, 그렇게 예배한다면 조용 조용히 예배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가만히 앉아서 얌전하게 드릴 수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온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배에 거의 빠지지 않은 것이 춤입니다. 춤은 감정의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춤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기쁨으로 가득찰 때 나오는 현상입니다. 예배드리다가 도무지 앉아 있을 수 없다면 일어나 춤을 추는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춤을 춥니다. 사울도 그랬지 않습니까? 다윗을 잡으러 군사를 동원해서 갔는 데 갑자기 사울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순간 사울이 벌러덩 넘어져서 두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예언을 하고 다른 하나는 춤을 춥니다. 예언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임해야 대언할 수 있습니다. 춤은 온 몸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온 몸으로 예배합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성령충만한 예배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예배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성령님이 예배의 주인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고 그 분이 감동주시고, 그분이 깨닫게 합니다. 예배에 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조종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합니다.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예배가 있습니다. 제가 목회했던 교회에서 오래전에 한 권사님이 암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한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몸을 지탱할 수 없을 때까지도 그는 사력을 다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주전, 권사님은 자녀들에 이끌려 휠체어를 타고 나왔습니다. 그녀의 머리는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얼굴빛은 창백했습니다. 그녀는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찬양하는 데 그야말로 온 몸을 다해 찬양하는 것 같았습니다. 찬양을 부르는 동안 야윈 두 손을 위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눈에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아마 그는 그 예배는 땅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침 교회 창문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눈물과 기쁨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과연 그 예배는 그에게 마지막 예배가 되었고 천국으로 가는 첫 번째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강단에 서 있었지만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는 권사님이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렇게 연약한 권사님도 힘을 다해 찬양했는 데 목회자인 내가 힘없이 찬양하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지금도 그 권사님의 사력을 다해 예배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내가 예배하기 위해 이 땅에 산다면서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왕 예배하고 산다면 다윗처럼 온 힘을 다하여 예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보여준 예배의 모습입니다.
미갈입니다
마지막 예배자는 미갈입니다. 미갈은 다윗의 아내입니다. 사실 다윗은 미갈을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미갈은 사울이 다윗을 전쟁터로 보내면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오면 딸을 주겠다는 해서 얻은 아내였습니다. 다윗이 미갈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사울이 그마저 빼앗아 발디라는 사람에게 준 이후로는 사실상 부부라고 할 수도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미갈이 다시 돌아오자 다윗은 받아주었고 그를 평생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갈에게는 다윗같은 믿음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메고 오자 창틈으로 흘끔 본 미갈은 다윗을 향해 이렇게 비난합니다. 삼하6:20,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낸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 밖에서 몸을 드러내셨더다”. 미갈은 다윗이 왕의 체통도 없이 사람들앞에서 자기 수치를 드러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기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법궤가 돌아왔다고 하면 반가워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반갑기는 커녕 왜 법궤 하나 때문에 왕이 체통머리없이 옷을 벗고 춤을 추냐고 비난하고 있으니 미갈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보다는 하나님앞에서의 자신의 품위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다윗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삼하6:21-22,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다윗은 하나님앞에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왕으로 세우셨으니 나는 그를 평생 예배해고 엎드리리라”. 이것이 다윗의 예배신앙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배드릴 때 하나님앞에 낮춥니까? 하나님앞에 나를 낮추면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나를 높이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배시간에 나를 낮추고 하나님앞에 정직히 토로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미갈의 문제는 그는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중심에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관점은 “나”였습니다. 내가 예배의 주인이요 내가 예배의 수혜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미갈은 아마 감정적인 예배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느낌”이 좋으면 좋은 예배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느낌이 좋아야 좋은 예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해야 좋은 예배입니다. 미갈은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좋은 예배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배의 생명은 내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존경입니다. 설교에 있어서도 신자의 “단점”은 건드리지 않고 좋은 말씀만 해주기를 기대했는지아야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설교는 나를 드러내는 설교입니다. 설교 시간에 내 마음을 콕콕 찌르면 표적설교라고 생각하지 말고 회개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미갈은 예배를 통해 무엇인가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배를 통해 받기만 했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미갈이 예배에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과 마음을 드렸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최고의 가치있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드리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다윗도 성전 부지를 구입할 때 공짜로 주겠다는 것을 돈을 주고 사지 않았습니까? 좋은 예배를 위해서는 무엇인가 드려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예배를 위해 시간을 드립니까? 정성을 드립니까? 예배할 때는 모자를 벗고 발을 개지 말고 반듯이 앉습니까? 주보를 만지작 거리지 않고 강단을 주목합니까? 예배때 물질을 드립니까? 구약에사는 동물을 가지고 오지 않는 재사는 무효였습니다. 드리지 않고 받기만 하는 희생이 없어서 좋은 예배가 아닙니다. 교회어면 모든 일을 그치고 예배에 집중하세요. 예배가 우리의 최고의 생명입니다. 우리 교회 청년중 대학졸업후 이마트에 취직한 청년이 있습니다. 3개월 다니다 그만 두었습니다. 왜 그만 두었느냐고 물었더니 다 좋은 데 주일날 예배를 못 드린답니다. 결국 그 청년은 얼마후 더 좋은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예배가 생명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이 예배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 한번 잘드려 행복하고 예배 한번 잘못드려 시험듭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웃사의 예배입니까? 다윗의 예배입니까? 아니면 미갈의 예배입니까?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평생 행복한 예배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으라
유일무목사(은혜교회) / 삼하 6:1-19
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그 미스테리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법궤의 행방입니다. 법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법궤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보면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는데 ‘증거궤’, ‘언약궤’또는 ‘하나님의 궤’라고도 이름 합니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고 그 안팎을 순금으로 쌌습니다.
크기는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입니다. 한 규빗을 45센티로 치면 가로 × 세로, 120 × 70 정도 됩니다. 그리고 높이는 한 규빗 반이니까 약 70센티 정도 됩니다. 어른 허리 정도 찹니다.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해서 법궤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법궤를 만들라고 명령하시고 그 법궤 위에서 “내가 너희를 만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법궤는 단순한 아카시아 나무에다가 금을 싼 정도의 나무 박스가 아닙니다.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 두 개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법궤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고 살았던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귀한 법궤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2. 법궤가 처음 만들어진 장소는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후 구체적으로 신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1년 동안 머무는 동안에 지도자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올리시고 법궤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법궤를 만들었고, 그 때부터 법궤는 존재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동과 함께 법궤도 이동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시대가 끝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실로라고 하는 곳에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한 후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법궤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 성전에 들어와서 제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서 망하던 해인 주전 586년 이후에 법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 어떤 사람은 법궤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약탈해 갔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법궤가 예루살렘 성전 터 지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외경 마카비하에 보면 예레미야가 법궤를 어떤 동굴에다가 숨겨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카비하2:5)
▶어떤 사람은 법궤가 아프리카 이디오피아로 옮겨져서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법궤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19입니다.
“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
사도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법궤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성전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금으로 싼 법궤가 지금 현재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3. 오늘 사무엘하 6장을 읽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기럇여아림이란 곳에서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어 7년 6개월을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후 제일먼저 한 일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는 것이지요.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30,000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과 함께 기럇여아림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출발했습니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끕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서 하나님의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웃사가 잘못함을 인해서 웃사를 치셨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 운반식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오벧에돔이란 사람의 집으로 옯겨졌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동안 복을 주셨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기를 시도했는데 결국 성공했습니다.
4. 이것이 오늘 본문, 법궤 운반식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하나인데 사실은 두 이야기입니다. 1절로부터 11절까지는 실패한 법궤 운반식 이야기이고, 12절로부터 15절까지는 성공한 법궤 운반식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왜 법궤 1차 운반식은 실패했는가, 그리고 왜 법궤 2차 운반식은 성공했는가. 법궤 1차운반식과 법궤 2차 운반식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차이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이런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첫째, 법궤 운반식에 동원된 인원수의 변화가 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운반하는 식에 동원한 인원은 1차는 30,000명입니다. 2차는 사무엘하 6장에는 없지만 역대상 15장에는 862명이 동원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둘째, 법궤운반방식입니다.
1차 때는 새수레에 법궤를 싣고 소가 끌었습니다. 그러나 2차 운반식에는 제사장중 고핫 자손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을 했습니다.
3) 세 번째는 다윗왕이 입은 옷의 변화입니다.
다윗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법궤 1차 운반식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2차 운반식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윗은 법궤 2차 운반식에서 베 에봇 옷을 입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법궤 1차 운반식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법궤 2차 운반식은 성공했습니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차 운반식 2차 운반식
1) 동원 인원 30,000명(v1) 862명(대상15장)
2)법궤 운반방식 새수레에 싣고(v3) 제사장 어깨에 메고(v13)
3)다윗왕의 옷 - 베 에봇(v14)
결과 실패 성공
5. 다윗의 법궤 1차 운반식은 왜 실패했는가.
근본적으로 법궤를 운반하는 방법이 잘못됐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수레에 실어서 운반하면 안 됩니다. 법궤는 레위 사람들, 그 중에서도 고핫자손이 그 어깨에 메고 운반했습니다. 무엇보다 법궤는 사람이 손을 대거나 호기심으로 들여다 보아도 안 됩니다. 그래서 법궤 위를 보로 덮고, 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법궤 바닥쪽에 긴 채를 꿰서 운반했습니다. 더욱이 그 채를 법궤에서 빼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하려 그러는거죠. 그런데 법궤 1차 운반식은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소가 이끄는 수레에 법궤를 실었고, 소가 뛰므로 법궤가 흔들렸고, 흔들리는 법궤를 막아보려고 웃사는 법궤에 손을 대었습니다. 웃사의 노력은 귀했지만 법궤를 손으로 만져서 웃사는 죽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2차 운반식 에서는 제사장을 8명을 뽑아서 법궤를 그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 열심만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좇아 섬겨야 할 것입니다.
6. 그러나 법궤를 운반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잘못 외에도 법궤 1차 운반과 2차 운반 사이에서 다윗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차 운반식과 2차 운반식 사이에 다윗에게 일어난 몇 가지 변화를 봅니다.
1) 첫 번째는 법궤 운반식에 동원된 사람 수의 변화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운반해 오는데 30,000명씩이나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2차 운반에서는 862명(역대상15장)만 동원했습니다.
물론 법궤가 중요하긴 하지만 30,000명씩이나 움직여서 동원할 만큼 법궤가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30,000명 씩이나 되는 많은 인원을 동원했을까? 다윗의 의도는 무엇인가?
역대상 13장을 읽어보면 1) 그 30,000명이 이스라엘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2) 그리고 온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서 골고루 불러 모았습니다.
그렇다면 법궤운반식은 법궤를 단순히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위치이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어떤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 이스라엘의 관심을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 집중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신앙을 예루살렘에 집중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다윗의 왕권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목적입니다.
2) 두 번 째는 다윗이 입은 옷에서의 변화입니다.
법궤 1차 운반식에서 다윗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궤 2차 운반식에서는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베 에봇 옷을 입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인데 당시 법궤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모두 베 에봇을 입었습니다. 다윗도 그들과 같이 베 에봇을 입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기 있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뜻이죠. 그렇다면 법궤 1차 운반식 때에는 다윗은 어떤 옷을 입었겠습니까? 별다른 옷을 입지 않았다면 상식적으로 다윗은 왕복을 입었을 것입니다.
7. 정리하겠습니다.
물론 법궤운반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도 있었지만 법궤 1차 운반식과 법궤 2차 운반식 사이에서 나타나는 다윗의 태도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신앙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궤를 이용해서 자기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법궤 운반 1차에서 실패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두 번째에는 팍삭 낮아져서 왕복도 벗어 던지고, 왕의 권위도 벗어 던지고, 종처럼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면서 법궤 2차 운반식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왕으로 높이는 모습을 좋아하셨습니다. 법궤 2차 운반식은 성공했습니다.
법궤 2차 운반식에서 나타난 다윗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는 모습입니다.
8. 나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적 삼고 섬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목적이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그냥 즐거워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느새 내 마음의 소원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정용섭목사 / 삼하 6:1-5
법궤의 정치-종교사적 의미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6개월 머물다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 도읍지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일종의 천도입니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은 뒤에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거와 비슷합니다. 예루살렘은 지정학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중요했습니다. 하나는 천혜의 요새라서 웬만한 공격에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의 중간 위치이기에 이스라엘의 남 지파와 북 지파를 통치하게 안성맞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다윗 왕조가 점점 힘을 받아가는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정책은 예루살렘을 종교 성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북이스라엘의 아킬레스건은 자신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의 성지순례를 위해서 남쪽의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형상 두 개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웠습니다. 다윗 왕조의 확립을 위해서 필요한 정책이 예루살렘을 종교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다윗은 국가적인 차원의 큰 행사를 추진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인 삼하 6장에 나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프로젝트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구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법궤, 언약궤, 증거궤 등등입니다. 우리는 법궤로 통일해서 부르겠습니다. 법궤는 가로 114센티미터, 세로 68센티미터, 높이 68센티미터인 장방형 상자입니다.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위에는 순금 판이 씌어 있고, 양쪽 끝에는 날개 달린 천사 조각상(그룹)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강단에 놓인 제단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모세의 형인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광야 40년 시절에 제작된 이 법궤는 훗날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보관되다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기원전 587년 이후에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불살라지지 않았겠습니까.
삼하 6:1절에 따르면 다윗은 법궤를 이전하려고 삼만 명의 사람을 모았습니다. 북 지파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전체 백성들의 내부 결속을 위한 정책으로 보입니다. 내부 결속을 위해서는 이런 대규모 행사가 가장 효과적입니다. 오늘날 월드컵 축구대회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북한의 아리랑 축전도 비슷한 효과를 거둡니다. 열광적이고 드라마틱한 대규모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사람들은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면서 참여한 사람들끼리의 연대감이 깊어집니다. 이런 퍼포먼스 자체를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좋게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그걸 가장 나쁘게 사용한 사람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대중집회를 통해서 독일 민족이 유대인을 제압하고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법궤 이전 프로젝트에 동원된 3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대한 퍼레이드를 펼쳤습니다. 5절에 따르면 그들은 여러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길거리 연주를 했습니다. 길거리에서는 더 많은 군중들이 나와서 환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법궤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거룩한 기물이었기에 경외심으로 대했습니다. 그들은 법궤에 복과 재앙이라는 특별한 능력이 담지 되었다고 믿은 것입니다. 전쟁에도 종종 법궤를 들고나갔습니다. 법궤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멀리는 여호수아가 40년 광야시절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요단강 앞에서 법궤를 멘 사람들이 먼저 요단강에 발을 딛게 했고, 철벽 요새인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도 법궤를 멘 사람들이 매일 성을 돌게 했습니다. 법궤를 강탈했던 블레셋 사람들은 큰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그야말로 하나님을 대하듯이 했습니다.
이에 관한 하나의 에피소드가 다윗의 법궤 이전 이야기 중간에 나옵니다. 삼하 6:6절 이하입니다. 법궤 행렬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습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들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날뛰었습니다. 소몰이를 책임진 두 형제 중의 하나인 웃사가 손을 들어서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기자는 웃사의 행동으로 인해서 진노하신 하나님이 웃사를 쳐서 그 자리에서 죽게 했다고 보도합니다. 이런 성서기자의 보도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웃사가 소들이 날뛰는 순간에 충격을 받아 심장 정지에 이른 것인지 모릅니다. 그만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를 특별한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 됩니다. 어쨌든지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진행되는 중간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자 심히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다윗은 법궤 이전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몇 달 후에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이 내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다시 생각을 바꿔서 법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이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에봇을 입고 춤추는 다윗
다윗은 이번에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13,14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앞서 수레를 끄는 소로 인한 소동을 아는 터라 이번에는 사람들이 직접 법궤를 멨다고 합니다. 상여가 나가는 모습입니다. 중간에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고, 다윗은 앞장서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가 입은 베 에봇은 제사장 복장입니다. 그의 춤은 일종의 종교 의식으로 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환호하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의 성소에 설치하고, 다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다음에 모든 백성들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삼하 6:19절에 따르면 남녀 불문하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간 품목은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가 들어간 떡 한 덩이입니다. 이제 법궤 이전의 모든 행사가 완전히 끝난 겁니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중간에 간략하게 작은 풍경을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미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삼하 6:16절에 따르면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첫 번째 부인인 미갈이 왕궁의 창문에 기댄 채 법궤가 들어오는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다윗 성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던 순간이니 미갈도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았겠습니까. 미갈은 못 볼 걸 보았습니다. 다윗 왕이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미갈이 마음속으로 다윗을 업신여겼다고 기록했습니다. 성경기자의 평가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개연성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삼하 6:20절에서 미갈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과 미갈의 관계는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합니다. 성경기자는 그런 남녀관계의 복잡한 심리를 설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미갈은 사울 왕가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사울 왕가의 입장에서 볼 때 목동 출신인 다윗은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교양이 없는 사람입니다. 왕으로서의 체면을 차릴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법궤 행렬 앞에서 다윗이 옷이 찢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황홀경에 빠져서 춤을 춘 것은 예루살렘 원주민들의 종교의식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왕족 미갈의 눈에는 목동 출신 다윗의 행동거지가 품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교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금요 심야집회에서 열광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기독교인들의 행태가 저의 눈에 이상하게 비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윗은 미갈에게 이렇게 대꾸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아버지와 가족을 버리고 나를 왕이 되게 하셨으니까 춤추고 즐거워하는 게 마땅하지 않는가. 당신은 나를 우습게볼지 모르나 당신이 거론한 계집종들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는다는 걸 알아두라.’ 성경기자는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코멘트를 23절에 달아둡니다. 만약 미갈이 아들을 낳았다면 그의 아들이 다윗의 뒤를 이었을 겁니다. 이후로 사울 왕가는 이스라엘에서 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떨어지고 다윗 왕조는 더 굳건해졌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상징물입니다. 법궤만 있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걸 제작하게 했습니다. 다윗이 대대적인 행사를 통해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미갈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춤을 춘 이유는 법궤가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런 상징물들이 있습니다. 독수리 형상이나 송아지 형상이 그런 것들입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가 일종의 법궤와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태극기를 품에 품고 다녔습니다. 삼일운동 당시에도 태극기가 물결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태극기만 보면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요즘에는 소위 ‘태극기부대’가 태극기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태극기만 앞세우는 게 아니라 성조기를 함께 듭니다. 어떤 경우는 이스라엘 깃발도 들고 나옵니다. 그들은 태극기를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이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애국시민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기독교 신앙의 상징물은 십자가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지역에 따라서 물고기 문양이나 닭 문양이 사용되었지만 대표적으로는 십자가입니다. 대다수 교회당에는 정면에 십자가상이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는 법궤 개념과 대립됩니다. 다윗의 법궤는 하나님을 복과 재앙의 관점으로 본 상징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런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 훗날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는 하나님을 부와 다산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상징물입니다. 이런 태도는 전형적으로 종교적인 것입니다. 세계 모든 종교가 이런 것을 목표로 합니다. 조금 더 세련된 종교는 마음공부를 목표로 합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이런 것들과 전혀 다른 상징입니다. 복 받고 오래 살고, 우아한 정신을 함양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죽음! 십자가는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끔찍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분명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반역자들에게 가장 처참한 처형방식인 십자가형을 내리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이제는 하나님을 전지전능, 무소불위의 존재가 아니라 가장 무기력하게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아는 이들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놓고 하나님 죽음 운운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마저 알라딘의 요술램프쯤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만 믿으면, 십자가 성호를 긋기만 한다면, 십자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찬송가를 열정적으로 부르면 저절로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운명 마지막을 장식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무기력한 자리, 즉 하나님이 죽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리를 가능한 피하려고 합니다. 십자가와 반대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과는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저주라고 여겼던,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그 사실에 근거해서 법궤와는 전혀 다른 구원의 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냐?’라고 저에게 질문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실제로 그런 상황에 떨어져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자가에 달렸던 분을 내가 그리스도로 믿기에 하나님이 없는 거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진다고 해도 결국 극복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런 태도로 살아가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는 죽음의 선취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일반 신자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즉 구원자로 믿습니다. 구원은 해방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해방과는 거리가 멉니다. 평생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이 어느 정도 주어졌어도 더 벌어야 하고, 인생이 안 풀려도 문제이고, 잘 풀려도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성함으로써 구원을 받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율법 완성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이들과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완전한 해방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이런 영적 실존을 알고 있는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2:20)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도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이게 죽음의 선취입니다. 이것을 가벼운 언어유희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수와 하나 됨으로써 우리는 실질적으로 예수와 함께 이미 죽은 것입니다. 현실에서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이 유보된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가장 역설적인 방식으로 현재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확실해질 때 우리는 부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법궤를 다윗 성에 안치하는 일은 고대 이스라엘의 토대를 다지는 것을 자기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았던 다윗 왕으로서 최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법궤가 가리키고 있는 복에 대한 미련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분노
삼하 6장 1~11절 / 배 혁목사(샌안토니오교회)
한국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속, 그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든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사람의 마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잘 해하려서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고 인정함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3:22, “…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다윗이 먼저 하나님을 그 마음에 품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늘 관심했습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을 했을 때에,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보이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물멧돌을 돌리며 골리앗으로 갈 때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리고 물멧돌을 돌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달려가서 골리앗이 찬 칼을 빼어 그를 죽입니다.
사울왕에게 억울하게 쫓길 때에도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해서 차라리 죽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옳은 자가 되길 원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를 잘드리기 위해 레위인들을 훈련시켜 성가대를 조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받치려고도 했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 편에서 생각했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라고 하시면서, 그러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겠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관심해야 할 마음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보다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내 마음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따라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관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늘 마음에 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받았던 다윗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했던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그러한 처사에 대해서 화를 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 하던 일을 중단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어떠한 점들을 경계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자 했던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가지고 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그 마음에 품고 사는 다윗에게 한가지 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언약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에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변두리 지역인, 바알레 유다라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자신은 좋은 궁정에서 지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그 외진 곳에 20여년 동안 방치되어있었기에 다윗은 이러한 사실 늘 마음에 쓰였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변방지역에 오랜 동안 방치된 이유가 있습니다. 엘리제사장 시절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기겠다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메고 갔다가,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빼앗은 후, 처음에는 의기양양했었지만, 언약궤를 통하여 그곳에 재앙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심한 질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죽기까지 합니다. 그 언약궤로 인해서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인 다곤신이 부서지기도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더 이상 언약궤를 자신들 사이에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블레셋 진영 밖인 벧세메스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언약궤는 기럇여아림, 바알레유다라는 곳으로 옮겨져서 다윗왕 전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이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게바에서 게셀까지 그들을 물리쳤고 이제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할 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아주 벅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언약궤를 옮기고자 삼만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서 갔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메어 정성스럽게 준비한 새 수레에 실었습니다.
드디어 언약궤가 머물러 있었던 아비나답의 집을 나옵니다. 다윗과 삼만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행렬을 환호합니다.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일들이 다윗이 원했던 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너무 기쁘고 감격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수레를 끌던 소들이 갑자기 뛰고 수레가 움직이면서 언약궤가 흔들렸습니다. 이에 수레를 끌던 웃사라는 사람이 다급한 마음에 손을 들어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궤를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건드리는 일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웃사를 그 자리에서 치셔서 죽이셨습니다.
다윗은 어쩔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이 모든 것을 준비했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다윗에게는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그 자리에서 웃사를 치셔서 죽이신 일에 대해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으면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그곳의 이름을 베레스웃사, 곧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셨다”는 뜻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고 기뻐하던 다윗의 마음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다윗 성에 가져가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들여 옮겨 놓습니다.
때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아가려고 하던 사람들은 당황하게 되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럴때 돌아봐야 할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위에, 하나님의 방법을 구하는 삶을 더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겼는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자 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진짜 왕은 하나님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옮길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면서 한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원하시는지 간과했던 것입니다.
언약궤를 옮길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수레에 실어서 편하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는 경건한 제사장이 언약궤에 이미 꿰어져 있는 채를 메고서 이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모세 때에는 광야 40년을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이사야 55: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사람과 다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과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을 구하고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그러기에, 우리가 세상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옮길 때에, 꼭 제사장이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옮길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다윗도 그러한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수레에 실을 때에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서 수레에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언약궤를 수레에 올려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수레로 옮기는 방법은 이방사람인 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다곤신을 섬기는 블레셋사람이 언약궤 때문에 재앙을 받으니까 자기 땅 진영밖으로 옮기기 위해서 그들이 썼던 방법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을 다윗이 이방사람의 전례를 따라 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연합감리교회의 법에 보면, 자선을 위한 모금을 하기 위해서 복권이나 도박 등을 통해서 얻어진 수입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구제하는 것은 좋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도박을 통한 방법은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2. 그리고, 때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기 위해서, 고난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했습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 그것처럼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것은 없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빨리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될 때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힘들고 지루한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기도 하십니다. 도리어 힘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함이 더 드러나곤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때로 어깨에 언약궤를 메고 가야 하는 것과 같이 오랜 동안 힘든 시간을 각오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힘든 일들이 지루하게 진행된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도 속단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신앙의 위인들은 빠르고 효율적인 길보다는, 오랜 고통의 시간들을 믿음으로 통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마음에 합당한 자에게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셔서 다윗의 뜻을 꺾으신 것은 그를 벌하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더 큰 복을 주시고자 원하심입니다.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데 실패한 다윗은, 언약궤를 베레스웃사 근처에 있는 오벳에돔의 집에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납니다.
그 후에 언약궤가 놓여있는 오벳에돔의 집에 관한 소문이 들려 옵니다. 언약궤가 그곳에서 석달을 있었는데 그 온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는 것만으로도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과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은 복주시고자 원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하나님을 그 가정의 중심에 모심으로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가정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다윗이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용기를 냅니다.
이제는 자신의 방법에 근거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에 근거한 열심을 냅니다.
하나님의 궤를 제사장들을 동원해서 어깨에 메고 옮깁니다. 절대로 수레에 옮겨 싣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니까, 시간이 늦어지고, 레위 제사장들이 좀 힘들어 보여도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내 감정과 내 습관보더 앞서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으면 나를 죽여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의 도구로 온전히 쓰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가장 자리잡고 있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늘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고 그 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나의 뜨거운 마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도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그 계명, 말씀을 알아가고 실천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려고 하니, 소가 끄는 쉬운 수레는 버리고, 어깨에 무거운 언약궤를 메고 가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내가 고집했던 방법들을 버리고 나를 죽이며,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방법대로 살아가는 이들을 불편하게 하시거나 화를 당하게 하시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도리어 더욱 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더 큰 복을 받는 자로 삼으시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나님의 참된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베레스 웃사
김기석목사 / 삼하 6:1-8
∙ 혼돈의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민망한 시절입니다. 또 다시 우리는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같은 상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니 지친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은 참 우리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바이러스에게 염치도 없냐고 책망할 수도 없습니다. 어려운 여건이지만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모두 부정적인 생각을 거두고 용기를 내 다시 한번 희망을 향해 몸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서울대 청소노동자 한 분이 과도한 업무를 수행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청소 노동자들이 처한 비참한 실태를 알게 되었습니다. 직장 내 갑질 이야기는 이미 다양하게 언급된 바 있습니다만, 서울대에서는 직무에 불필요한 시험까지 치르게 하고, 그 시험 성적까지 공개했다고 합니다. 건물 이름을 한자와 영어로 쓰는 게 그분들의 직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종의 길들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평가하는 이들의 시선 앞에서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까? 한자나 영어로 건물 이름을 쓰지 못한다고 하여 굴욕감을 느껴야 합니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중 혹은 배려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됨으로 성숙하게 된다지 않습니까?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적 성숙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세상은 차가운 곳으로 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를 합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조금씩 발전합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사람은 화석처럼 굳어버립니다. 고난의 풀무질을 거쳐 점점 맑고 깨끗하게 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워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범처럼 여겨지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같은 분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면서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을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은 다윗 왕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려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 맞섰던 길보아 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헤브론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바로 2대 임금이 되어 다스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조금 복잡합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근거지를 마하나임으로 이주한 후에 왕이 되어 두 해를 다스렸습니다. 한 동안 두 임금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세력을 다투는 내전이 벌어졌고 전쟁의 시기였기에 장군들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권력 다툼, 배신과 음모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의 휘하에 있던 아브넬 장군은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위세를 부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왕이 자기를 경원시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투항합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섬기는 장군 요압은 전투 중에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였던 아브넬을 유인하여 살해하고 맙니다. 겉보기에는 개인적 복수였지만, 실은 자신과 세력을 다툴 수 있는 정적을 제거한 셈입니다. 혼란의 시간은 있었지만 민심이 점점 다윗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레갑과 바아나가 모반을 일으켜 이스보셋을 살해하고, 그 수급을 베어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비록 적수였다고는 하지만 모셨던 이를 배신한 사람을 징계함으로 다윗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 민심을 얻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내전이 끝났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온 지파가 헤브론으로 가 다윗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네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며, 네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바로 임금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삼하5:2)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들이 다윗을 왕으로 모시려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ra‘a)’,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표현은 정중하지만 이 속에는 왕권이 무소불위하게 작동해서는 안 된다는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제 역할을 방기한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겔34:4)
지도자로 부름받은 이들이 양 떼를 잡아서 자기들의 배만 채우고 양 떼는 굶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에게 양 떼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는 목자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라고 번역된 ‘나기드’(nagid)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제왕적 권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임해주신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바람이야 어쨌든 다윗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기름 부름을 받은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자기 세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시온 산성을 점령하고 그곳을 다윗 성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입니다. 두로 왕 히람은 다윗과 친선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 궁궐을 짓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많은 아내와 후궁들을 맞이하였고 자녀들을 얻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어 하나님이 세우신 왕임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이제 외적인 것은 거의 갖춰진 셈입니다.
∙ 정통성 문제
하지만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어떤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상징 말입니다. 얼핏 다윗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는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임시로 모셔져 있는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윗은 정병 삼만 명을 징집하여 유다의 바알라로 올라갔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스펙타클한 장면을 연출하여 온 백성의 시선을 한 데 모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무언의 메시지였습니다. ‘봐라, 하나님의 궤가 다윗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다윗왕의 출신이나 경력을 문제 삼아 왕으로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라.‘
그들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로 만든 수레에 싣고 출발했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요가 그 수레를 몰았습니다. 온갖 악기가 다 동원되어 장엄함을 더했습니다. 백성들도 그 압도적인 행렬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런 들뜬 흥분은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수레가 나곤의 타작 마당을 지날 때 갑자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 이야기에서는 그를 태운 나귀가 칼을 든 천사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그런 암시조차 없습니다. 그 소들이 왜 날뛰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레에 실려 있던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려 하자 웃사는 얼른 그것을 꼭 붙들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셔서 그를 치자 그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베레스 웃사‘. ‘웃사를 치심’. 갑자기 그 평화롭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분노를 상기시키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화가 나신 것일까요?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모시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죄란 사용해야 할 것을 섬기고, 섬겨야 할 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이든 지위든 물건이든 잘 사용해야지 섬기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섬겨야 하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 한 것은 납치되는 것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몸짓이자 경고입니다. 웃사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자기에게 부족한 신뢰를 채우기 위해 유력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같이 찍은 사진을 마치 친밀한 관계인양 포장하여 사람들을 호도하는 이들 말입니다. 최근에 뇌물 공여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어느 수산업자의 경우도 그 한 예입니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이름이나 이미지 혹은 글을 도용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상당히 불쾌합니다. 자기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비일비재입니다. 종교적 언어가 특권이 될 때 그릇된 권위주의가 고개를 듭니다.
∙신앙의 회복
사람들에게 스펙타클한 볼 거리를 제공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과시하려던 다윗의 의도는 좌절되었습니다.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실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실어 가게 했습니다. 궤는 그 집에서 석 달을 머물렀는데, 주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베푸셨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다윗은 다시 그 궤를 모시기로 작정합니다. 이번에는 군사 퍼레이드 같은 과시적 절차를 다 포기했습니다. 그는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만 걸친 채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고, 주님의 궤는 수레가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옮겨졌습니다.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행렬을 멈추고, 소와 살진 양을 잡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겁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지식은 호기심으로 자라고 지혜는 두려워함으로 자란다. 두려워함이 신앙을 선행한다. 그것은 신앙의 뿌리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번역, 종로서적, p.84)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이익과 손해에 대한 계산만 남은 장터로 변하고 맙니다. 다윗은 무서운 경험을 한 셈입니다.
태생이 어리석은 인간은 늘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데 실패합니다. 실패를 통해 귀중한 교훈을 얻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답답한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왜 내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대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내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냐고 책망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최영철 시인의 ‘쑥국’이라는 시는 ‘아내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는 염치 없는 소망인 줄 알면서도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아내를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역할을 바꿔서 자기가 그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최영철, <찔러본다>, 문학과 지성사, p.82)
가족들을 위해 애를 태우던 아내를 위해 쑥국을 끓이고, 자신이 쑥국이 되어 아내의 속을 풀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요? 우리가 정녕 철든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사용하는 일에 몰두한 것은 아닌지요? 이제는 폭력과 부패가 넘치는 세상을 보고 애를 끓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속되는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문득 ‘베레스 웃사’ 즉 ‘웃사를 치심’이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겸허히 하나님의 뜻을 받들 때입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아끼고, 존중하고,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풍요로움과 권력과 인기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어이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려고 애쓸 때 우리 영혼은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삶 속에 거룩함의 열매가 많이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다윗, 웃사, 미갈-예배의 회복
곽창대목사 / 삼하 6:1-23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중심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다윗, 웃사, 미갈입니다. 세 인물 가운데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언덕에 있는 예루살렘 도성이 천혜의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남쪽에 치우친 헤브론보다는 전국을 관할하기에 보다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비어있는 성이 아니었습니다. 여부스 족속들이 산성을 건설하고 철통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치밀한 작전으로 난공불락의 성을 점령하고 그곳을 수도로 정합니다. 이름도 다윗 성이라 명명했고 왕궁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명실상부 수도의 구실을 하려면 또 하나의 요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으로 다윗은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옴으로써 예루살렘을 중앙 성소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의 옛지명)의 아비나답 집에 있었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들인 엘리아살과 웃사와 아효가 언약궤를 지키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해서 장로들이나 제사장들이 언약궤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언약궤가 만들어졌던 때와 장소는 출애굽 직후 시내광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제작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의 주재료는 아카시아 나무로 크기와 모양은 122cm X 76cm X 76cm의 직육면체 나무상자였습니다. 안팎으로 금도금을 입혔으며 금 고리 두 개씩을 양 옆면에 부착하고 그 고리에 긴 막대기 두 개를 양편에 끼워 빼지 못하게 했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불렀는데 그 속죄소에는 날개를 편 채 마주보고 있는 두 그룹(천사)의 형상을 조각하여 부착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 두 돌판을 넣었고 나중에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도 넣어두었습니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귀중한 성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느끼고 확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에 입성하는 모든 순간에 언약궤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입성하여 정착한 다음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별 중요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된 후 거의 6-70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향한 백성들의 믿음도 점차 약화되어갔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임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백성들의 신앙 회복을 위해 언약궤를 수도로 옮기는 일부터 착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왕 그렇게 하려면 국민들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대규모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 백부장들과 각 지파 장로들을 소집하여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일을 의논했습니다(대상 13장 참조). 모두 찬성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일을 주관할 자들을 선정했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가 언약궤를 운반하는 일에 중책을 맡았습니다.
드디어 언약궤를 운반하던 날, 조그만 도시 바알레유다에는 3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1절).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는 소들이 끌도록 했습니다. 아효는 수레 앞에서 행진했고 웃사는 수레 뒤를 따랐습니다. 악사들이 각종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백성들은 길가에 도열하여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었습니다(6절). 수레가 흔들리면서 언약궤가 수레 밖으로 떨어지려고 할 때에 수레 뒤를 따르던 웃사가 급히 손을 내밀어 언약궤를 붙잡았습니다(7절). 그러자 웃사가 급사했습니다(8절). 그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언약궤 운반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언약궤는 다윗 성으로 가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9-10절).
그런 후 석 달이 지나는 동안에 언약궤를 모신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큰 복이 임했습니다(11절).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용기를 내어 언약궤 옮기는 일을 다시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성공했습니다(12절).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에 다윗이 너무 좋아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는데 겉옷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 것도 몰랐습니다(14, 20절).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얘기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언약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모셔 올리는 것이 다윗에게 왜 그렇게 중요했던가 하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수도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좌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이며 다윗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제 왕이신 하나님의 뜻만을 펼치는데 전념하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자기에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드십(주되심)의 회복입니다.
여러분, 로드십의 회복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제 삶의 주인이십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 중심에 좌정하셔서 저를 다스려주옵소서!
주님이 제 가정의 주인이십니다. 주님께서 제 가정의 가장이 되셔서 제 가족들을 다스려주옵소서!
주님이 제 직장의 주인이십니다. 제 직장도 주님께서 다스려주옵소서!
주님이 대한민국과 세계를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우리나라와 온 세계를 다스려주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삶을 다스려주옵소서!
그런데 “로드십의 회복”이라는 선한 뜻으로 시작한 언약궤 운반이 도중에 웃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습니다. 다윗은 웃사가 급사한 것이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웃사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웃사를 급사시킬 정도로 웃사에게 큰 잘못이 있었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웃사에게만 벌을 내리신 것은 은혜로운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비롯하여 거기에 운집한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이 사건을 통해 경고하신 것입니다. 무슨 경고입니까? 그들의 마음자세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백성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온 마음, 온 뜻, 온 성품,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거국적인 행사를 하면서 다윗을 비롯하여 온 백성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 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행사를 멋있게 치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반을 책임진 자들이 의논하여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세밀하게 운반 절차를 정하고 행사 진행 요원들을 질서 있게 배치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언약궤 운반에 책임을 맡은 웃사는 수십 년 동안 자기 집에서 언약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보다 언약궤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궤 운반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약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존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웃사만 아니라 다윗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다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언약궤는 항상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개의 막대기가 고리에 끼워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만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언약궤를 다룰 때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백성들이 그 같은 마음으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언약궤를 운반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 책을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사에게만 벌을 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처사였습니다.
언약궤를 모신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임한 것은 그 가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언약궤를 모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을 가장으로 모셔야 합니다. 가족들 모두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해집니다.
석 달 동안 다윗은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정결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언약궤 운반을 계획했습니다. 율법의 규례대로 철저히 준비하게 했습니다. 언약궤를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게 했습니다. 악사들로 각종 악기를 힘차게 연주하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행차를 전심으로 환영하게 했습니다. 자신도 그 예식의 집행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차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참된 예배자로 자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의 마음에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 기쁨이 춤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순서 마지막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든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해산하는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미갈은 언약궤를 안치하는 장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집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남편 다윗의 춤추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꼴불견이었습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귀가한 남편에게 그녀는 경멸하는 말로 핀잔했습니다(20절). “왕의 체통으로 그게 할 짓입니까? 백성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래 가지고 백성들 앞에서 왕의 권위가 제대로 서겠습니까?”
다윗이 무엇이라고 미갈에게 응답했습니까?
(삼하 6:21-22)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오늘 본문은 덧붙이고 있습니다. 미갈이 그 이후로 불임여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23절). 그 당시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징계를 내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석으로 시 24편을 들 수 있습니다.
(시 24:1-10) 『[1] [다윗의 시]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1-2절: 온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7-10절: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 (언약궤가 입성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의 성들은 문이 위아래로 열리고 닫혔습니다.)
3-4절: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려면 우선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5-6절: 그러한 자에게 왕이신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로드십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부제를 “예배의 회복”이라고 붙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주일의 공동예배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일의 공동예배 시에 세 부류의 예배자가 있습니다.
웃사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웃사는 언약궤를 운반하는 중요한 직분을 맡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웃사는 예배를 주관하는 자였습니다. 예배 기획자요 예배 봉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언약궤를 운반하면서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행사가 무사하게 치러지기만을 바랐습니다.
우리도 웃사처럼 하나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배드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딴 곳으로 가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보다는 그저 시간을 때우기가 일쑤입니다.
저는 웃사를 보면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중요한 일을 맡은 제가 실제로 주님을 예배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잘 인도하고 멋진 설교를 하는 것이 제가 맡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배 봉사자들도 어떻게 하면 예배가 폼 나게 드려질까, 얼마나 예배가 질서정연하게 드려지고 있는가, 얼마나 회중들이 은혜를 받고 있는가에 관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의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모두 제사장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신 제사장이지만 주님을 모신 자답게 살지 않는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는다면, 예배당에 왔지만 주님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간다면 거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날의 웃사가 아닌지 자신을 면밀하게 조사해야 합니다.
미갈과 같은 자들도 있습니다.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 구경꾼들이요 비판자들입니다. “꼭 그렇게 예배해야 하는가? 기도는 왜 그렇게 하지, 설교는 왜 그래, 찬양은 꼭 그렇게 시끄러워야 하는가? 춤은 왜 추는 거지? 적어도 격식과 체통은 차려야지 않은가? 이전에는 그렇게 예배하지 않았는데 예배 전통이 다 무너지고 있어! 아,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예배하지!” 등등 예배를 평가하고 불평합니다. 예배 봉사자들의 미흡한 준비 때문에, 예배 환경의 어수선함 때문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가 않습니다. 짜증이 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다윗과 같은 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친히 다스릴 것이므로 나라와 백성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마음속의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평안의 물결이 흘러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그 마음이 격앙되었고 몸과 마음이 기쁨으로 뛰놀았습니다. 이것이 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감격적인 예배를 드렸는지, 그때를 회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때 부끄러움이 있었습니까? 눈물콧물 범벅이 되었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손뼉을 치며 힘을 다해 찬송하고, 목이 터져라 기도했습니다. 목은 다 쉬었어도 마음은 정말 시원하고 기쁨으로 충만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조용히 예배드려도 얼마든지 은혜에 잠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처럼 예배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여야 합니다. 공동예배 때만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 같은 경험을 한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웃사와 미갈과 다윗 가운데 누구에게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배에 은혜 받도록 봉사하는 자로만 머물고 있습니까? 예배 구경꾼이든지 예배 비판자입니까? 아니면 예배 때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께 집중합니까?
저와 여러분이 다윗처럼 올바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마음 자세와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한데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마음이 순전해야 합니다.
순전한 마음이란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정결하고 겸손한 마음을 뜻합니다. 예배할 때마다 자신의 마음에 숨어있는 죄를 내놓고 솔직하게 회개하는 것도 정말 필요합니다.
2) 주님의 임재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 최고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시와 노래와 춤으로, 목소리로 몸으로 악기로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때로는 손뼉도 치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즐겁게 웃고, 눈물도 흘리고, 소풍이나 놀이동산에 온 어린아이처럼 춤도 추고 뛰놀아야 합니다. 예배는 최고의 축제여야 합니다.
3) 함께 예배하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배 때, 환경과 회중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우리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예배 중에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소원은 예배의 자리에 나온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흡족하게 은혜 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할 때, 나 자신만 아니라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주님의 크신 은혜에 잠기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소리 높여 기도하는 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자들, 예배를 소란하게 하는 자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들도 바르게 예배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하며 축복해야 합니다.
4) 예배를 미리 잘 준비해야 합니다.
공동예배를 정말 귀중하게 여긴다면 다윗처럼 미리 잘 준비해야 합니다. 토요일 저녁이 주일예배의 성공여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일의 예배를 위해 기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시간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예배가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이기를 소망합니다. 주일의 공동예배가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일에 모이는 목장모임에서도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주말에 가족들이 모여 드리는 가정예배도 참된 예배가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회복이야말로 로드십의 회복과 승리하는 삶의 근간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당분간 집에서 영상을 보며 예배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마음과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경건하면서도 즐겁게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하여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집에서 비대면으로 예배할 때 제대로 하나님께 마음과 몸이 드려지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면 교회당에 와야 합니다. 성도들과 함께 대면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하고 생동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하지 않으면서 일상을 건실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습니다. 그런 사람을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신자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입니다. 이름 하여 실천적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 매순간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자는 다윗처럼 영적 환희와 복을 누립니다. 주님께서 그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끝) 찬송가 9장
요약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깁니다. 이후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옴으로써 예루살렘을 중앙 성소가 되게 하려 합니다. 당시 언약궤는 아비나답 집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언약궤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백성들이 언약궤를 중요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언약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된 상태로 6-70년의 세월이 흘렀고, 여호와를 향한 백성들의 믿음도 점차 약화되어갔습니다. 이를 문제라 여긴 다윗은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에게 언약궤를 운반하는 중책을 맡깁니다. 언약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어 언약궤가 수레 밖으로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손을 내밀어 언약궤를 붙잡았다가 급사합니다(6~8절). 이 일로 인해 운반이 중단되어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집니다(9~10절). 그 후 석 달이 지나는 동안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11절).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언약궤를 다시 성으로 옮깁니다(12절). 그 과정에 다윗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추었는데 겉옷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 것도 몰랐습니다(14, 20절).
언약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것이 다윗에게 왜 그렇게 중요했던 걸까요? 언약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며 다윗이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드십(주되심)의 회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쓰러지려 하는 언약궤를 만진 웃사에게 벌을 내리셨을까요? 율법에 따르면 언약궤는 항상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만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언약궤를 다룰 때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백성들이 그 같은 마음으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정결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율법을 따라 다시 언약궤를 운반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행차를 환영하는 참된 예배자로 자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의 마음에 기쁨이 흘러 넘쳐서 그 기쁨이 춤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순서 마지막에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든 백성들을 축복하며 해산하는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 창문으로 다윗의 춤추는 모습을 본 아내 미갈이 귀가한 남편에게 경멸하는 말로 핀잔했습니다(20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불임여성이 되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23절).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로드십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의 회복이 있어야 하는데, 주일의 공동예배 시에 세 부류의 예배자가 있습니다.
첫째, 웃사와 같은 자들입니다. 웃사는 언약궤를 운반하면서 하나님께 집중하여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드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는다면 거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둘째, 미갈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 구경꾼들, 비판자들입니다. 예배 봉사자들의 미흡한 준비 때문에, 예배 환경의 어수선함 때문에 불편해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셋째, 다윗과 같은 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에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이것이 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웃사와 미갈과 다윗 가운데 누구에게 가깝습니까? 다윗처럼 올바른 예배자가 되려면, 먼저 마음이 순전해야 합니다.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정결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할 때마다 죄를 내놓고 솔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 최고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시와 노래와 춤으로, 목소리로 몸으로 악기로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또한 함께 예배하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져야 합니다. 나 자신만 아니라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소리 높여 기도하는 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배를 소란하게 하는 자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들도 바르게 예배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하며 축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미리 잘 준비해야 합니다. 토요일 저녁이 주일예배의 성공여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일의 예배를 위해 기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시간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교회의 예배가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이기를 소망합니다. 목장과 가정에서 참된 예배가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집에서 영상을 보며 예배할 수는 있습니다. 비대면으로 예배할 때 집중이 안 되면 교회당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하지 않으면서 일상을 건실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습니다. 겉으로는 신자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매순간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자는 다윗처럼 영적 환희와 복을 누립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겨올 때 일어난 일
이준원목사 / 삼하 6장 1~23절
옛날 역사를 읽어 보면 왕들이 자기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수도를 옮기거나 왕궁을 짓는 일을 한 적이 많습니다. 한국도 조선말에 귀족들 때문에 왕권이 많이 약해졌을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했습니다. 그것은 궁을 짓는 일을 통해 무너진 왕권을 다시 세우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국도 지난 2004년 행정 수도를 서울에서 충청권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었습니다. 그때 국회에서도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그해 가을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이 나와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수도 이전 계획이 없어졌는데, 그 대신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안으로 변경되어 세종시가 생겼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행정 수도를 이전하겠다고 한 의도는, 지금까지의 기득권층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층을 구성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왕궁을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법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법궤가 자기 나라의 한가운데 들어와야 하겠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거기에는 다윗의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되면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데 큰 힘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법궤가 있는 곳으로 순례를 가서 제사드려야 했는데,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 법궤가 있어서 그리로 순례를 오게 되면 그만큼 통치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궤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다윗은 이제 그것을 자기가 있는 다윗성(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 합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맙니다. 그 후 다윗은 법궤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시도를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이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 다시 옮겨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해 보면, 다윗이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길들이며 움직이려고 하다가, 반대로 자기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길들여지고 움직여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앞부분(1-11)에서는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한 1차 시도가 있고 거기에 그로 인한 재앙적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리고 뒷부분(12-23)에서는 법궤 운반을 위한 2차 시도가 있고, 또 그로 인한 재앙적 결과가 따라옵니다.
1. 하나님의 궤 운반을 위한 1차 시도 (1~11절)
1) 법궤 운반 시작 (1-5)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1절)
블레셋 정벌(5장)을 무사히 마친 다윗은 이제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나라를 새롭게 할 선한 목적을 가지고 3만 명의 사람들을 모아서 보냅니다. 사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데 있어서 이렇게 3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동원할 필요는 없는데, 이것은 궤를 옮기는 것을 전 국가적 행사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어서 처음에는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7년 반 동안 헤브론에서 다스렸습니다. 그러다 그 후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국에서 사람들을 뽑아 거룩한 법궤를 옮기는 일에 참여시킴으로써 이 기회를 통해 통일 왕국의 왕으로서 전 이스라엘을 통합하고 결속시키는 목적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궤를 옮겨온다는 것이 아주 영적인 일이고 훌륭한 일인데, 사실은 이것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2절)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사무엘이 어릴 때 제사장이 엘리였는데, 그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에게 궤를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가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는데 그대로 패하고 빼앗겼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궤를 보관하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의 성에 재앙을 내리시니까, 그들이 두려워하며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약 20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습니다(삼상 7:1-2).
여기 ‘바알레유다’라는 곳은 아비나답의 집이 있는 기럇여아림의 옛날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0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블레셋 국경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궤를 돌려받아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의 궤를 가리켜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고 지극히 거룩한 것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법궤를 예루살렘(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앞의 5장에서는 정치, 군사, 외교, 집안 등 모든 분야에서 다윗이 번성했다고 보여주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종교적인 번영의 증거로도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눈으로도 보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윗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자기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줍니까? 사람에게.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번영의 상징으로 보여주고, 영적 상징을 통해서 오히려 정치적으로 온 이스라엘을 자기 밑에서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궤를 옮겨오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이 아직 열한 지파에게는 약하니까 이것을 통해 온 이스라엘을 확 잡으려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거룩한 궤를 모셔 오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기준에서의 최선인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3-5절)
다윗은 궤 하나를 옮기는 데 있어 3만 명이나 되는 신실한 사람들을 이스라엘에서 뽑아서 엄선하여 동원했습니다. 그것을 옮길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게 합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지키라고 했다고 되어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서는 아비나답이 웃사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고, 다른 학자들은 시대를 계산해볼 때 웃사와 아효가 아들이 아니라 아비나답의 손자라고도 봅니다. 어쨌든 그 집안사람인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도록 한 겁니다.
또한 여기 보면 악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 가지 아름다운 악기들을 동원하여 궤 앞에서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 있고, 그 외에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즉 요즘 말로는 엄청난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고, 또 찬양대가 있습니다. 엄청난 모습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도 웅장한 장면입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의 율법을 통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만 채로 어깨에 메서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레위 후손들 중에도 고핫 자손들만이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도록 정하셨습니다(민 4:15).
하나님의 궤는 오래 전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하나님이 블레셋을 재앙을 내리시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게 되었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이 오랫동안 지켜왔습니다. 웃사와 아효는 아비나답의 아들들(혹은 손자들)인데, 이들은 레위인이었지만 수레를 메고 가도록 정해진 고핫 자손은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다윗과 신하들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서 새 수레를 사용합니다. 굉장한 노력을 한 것입니다. 새로 만들어 온 겁니다.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습니까?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찬양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법대로 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훌륭했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하지 않은 겁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도 감동하시겠지.’라고 생각한 겁니다. 항상 이런 ‘자기 나름대로의 최선’,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의 최선’이 항상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순종하려면 철저히 순종해야지, 내 생각에 이럴 것이라고 할 때 항상 문제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또 이렇게 아무리 엄청난 찬양밴드가 찬양집회를 인도하거나, 장비가 엄청나게 비싼 것을 사용하거나, 몇 백 명이나 되는 성가대와 엄청난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어서 찬양을 부르더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벌써 7년 전인데 제가 한국에 안식월로 갔을 때 제가 잘 아는 선배가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였습니다. 사실 가장 큰 초대형교회 중 하나였는데, 그때 저에게 낮에 드리는 수요예배에 와서 설교하라고 해서 갔습니다. 그 전에 다른 대형교회에서도 인턴을 했었지만, 그런 교회들을 보면 예배 코디네이터가 있습니다. 분 단위로 예배 시간을 잘라서 관리합니다. 몇 분부터 몇 분까지는 뭘 한다는 게 정해져서, 그 시간이 넘어가면 사인을 줍니다. 저도 30분 정도 설교하라고 했는데 그게 넘어가니까 사인을 보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다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다 보면 자칫 잘못될 때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고 시간 따지는 것과 자기들이 하는 일로 맞춰질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야 하는데, 몇 분에 끝나야 하고 몇 분부터 몇 분까지 뭘 해야 하고 그다음 팀이 준비하고 있다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 등에 신경을 쓰다 보면 어떻게 예배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가 하나의 쇼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 데 대해 안타까움이 있는데,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겉으로는 굉장히 은혜롭습니다. 찬양팀이 얼마나 수준이 높습니까? 찬양대나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얼마나 높습니까?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이 빠져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위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큰 교회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고, 겉으로는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설교 듣고 다 하는데, 그 초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데에 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해야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특히 ‘영적’이라고 하는 일에 있어서, 내 눈에 아름다운가,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가를 항상 잘 기억하며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사람 눈에 잘 보일 것인지,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재앙적 결과: 웃사의 죽음 (6-11)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6-7절)
소들이 뛰어서 하나님의 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니까 웃사가 무의식적으로 궤를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궤를 보거나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율법)을 어긴 것입니다(민 4:15).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만진 웃사를 치시니까 그가 바로 죽습니다. 웃사는 자신의 잘못으로 죽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웃사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절대적인 주권이 있음을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생하게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보면 잘못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궤를 만졌다고 웃사라는 사람을 거기서 그냥 죽이냐? 하나님이 너무 하시다. 아니, 사실 다윗이 하라고 해서 그랬으니 그가 잘못한 것인데, 왜 다윗은 멀쩡하고 웃사가 죽나?’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왜 그랬는지 우리는 정확히 100%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웃사가 잘못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왜 이러시나?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게 아닌가?’가 아니라 ‘나는 왜 안 죽나?’입니다.
솔직히 웃사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얼마나 형편없이 신앙생활을 하며 예배를 드립니까? 그런데도 멀쩡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생각해야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은 사실 다윗을 향한 경고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사용하는 방법은 놀랍게도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이 수레에 궤를 실어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 사용한 방법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오래전 이방인인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취급했던 방법을,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따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이방인의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올바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선한 목적을 이루려면 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방법은 우리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큰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가,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도 이것은 좋은 일이니까 하자고 할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고 이웃과의 관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리고 방법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기업들도 몇 년 전까지는 일을 바르게 하는 것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른 일을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어떤 일을 바르고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른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바른 일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8절)
‘베레스웃사’는 ‘웃사를 치다’라는 뜻인데,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분이 났습니다. 다윗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겁니까? 법궤를 괜히 잡았다가 죽은 웃사에게 화가 났습니까? 아니면 웃사를 치신 하나님께 화가 났습니까? 이것은 웃사를 치신 하나님께 화가 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분노입니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데서 온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면서 무엇을 원했습니까?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이제 내가 이렇게 영적으로도 훌륭한 왕이며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하시며 함께하시는 왕이다.’ 하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좌절된 겁니다. 그러니까 화가 난 겁니다. 자기 계획이 좌절되니까 화가 난 겁니다. 종교적 성공의 증거를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화가 난 적이 있으십니까? 마구 분노한 것은 아니더라도 서운한 것, 섭섭한 것, 실망한 것 등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실망하면 일단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도 안 읽습니다. 읽고 싶지도 않고 또 기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왜 화가 나나? 왜 서운한가? 왜 실망이 되나? 그것이 정당한 분노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내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으셨다.’라고 실망할 때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정말로 옳은 기도 제목이었는가?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자기만족이나 성공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아닌가?’ 그게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가끔 대학 입학시험에 만점 받았다거나 1등을 한 학생들이 인터뷰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잠을 충분히 자고 학교공부만 충실히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만약 교회에 다니는 학생이 그렇게 일등을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엄청 띄워 줍니다. ‘신앙으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 OOO 학생!’ 그러면서 간증집회에 불려 다닙니다.
그런데 일등을 하면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높아지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높아져서 타락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일이 잘 풀리니까 그냥 타락해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버린 사람이 대다수라는 겁니다. 그럼 그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을까?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안 해주셔도 실망할 것도 없고 화가 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더 잘 아시니까 더 좋은 것을 주실 게 분명하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만한 것을 해달라고 구해놓고는 안 주시니까 화가 난다면 그게 누구의 잘못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 제목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물론 잘못된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그것을 다른 기도로 바꿔주십니다. 그런데 내가 고집하는 것을 계속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의 기도 제목은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한 예로, 우리는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특히 부모님과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까? 조금 젊은 분들도 질병이 생기면 회복을 위해서 같이 기도합니다.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괜찮지만, 왜 건강하려고 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정말 회복되었는데, 그 후에 이상한 짓을 하며 돌아다닌다면 그 건강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왜 원하는지 잘 생각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9절)
여기에 다윗의 위대한 점이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께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올바로 경배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겁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때까지는 무서워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직접 경험하게 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있을 때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참 좋은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0-11절)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으로 궤를 옮겨오기를 중단하고 일단 법궤를 오밷에돔의 집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잘못 해석한 겁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하면 안 되나 보다.’ 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궤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올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할 때 올바른 방법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궤는 축복의 상징이지 벌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런데 웃사의 죽음 때문에 두려워서 잘못 이해하여 궤를 다른 곳에 두게 됩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5장에서 다윗은 정치, 외교, 가문,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궤만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면 종교적으로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눈으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뜻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것을 원하실 것이다.’ 하고 간주해 버렸고, 그래서 무엇이 빠져 버렸습니까? 5장만 해도 블레셋과 싸울 때 다윗이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항상 여쭤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쭤봤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당연히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들이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겠지.’라고 자기 짐작으로 추진했습니다. 율법도 소홀히 하며 자기 생각대로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사건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동원해서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잘못을 범합니다. 하나님을 그저 내가 필요할 때 불러서 부리는 종과 같은 분, 아니면 산타클로스처럼 선물 꾸러미를 들고 와서 내가 원하는 선물을 척척 내주시는 분, 또는 알라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척척 해주는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진짜 아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궤 운반을 위한 2차 시도 (12~23절)
1) 법궤 운반 재개 (12-19)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2절)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푸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용기를 얻고 다시 하나님의 궤를 옮기게 됩니다.
이번에는 다윗과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준비하고 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합니다(대상 15:2-3). 율법에 나온 그대로 합니다. 그전에도 알았을 텐데 ‘괜찮겠지’ 하고 흥분해서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율법에 나온 대로 합니다.
오늘 사무엘하 6장 본문에는 레위 사람들이 메고 갔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상 15장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제는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영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이 정말 자기들과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3-15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먼저 여섯 걸음을 시험적으로 걷게 합니다. 여섯 걸음을 걸은 다음 제사를 드리는데, 그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웃사가 궤를 만지다 죽는 것을 자기 눈으로 봤는데 얼마나 무섭습니까?
‘혹시 오늘도 잘못되어 누가 죽는 게 아닌가?’ 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여섯 걸음 걷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식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면서 소와 숫양을 각각 일곱 마리씩 제물로 드리는데(대상 15:26), 하나님이 법궤를 옮길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 감사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역시 하나님 말씀 그대로 하니까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한 다윗은, 그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를 가까이 누리게 된 사실 때문에 너무나 기뻐합니다. 이렇게 한 결과는 환호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통적인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이뤄졌을 때 기뻐하는 것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6절)
온 이스라엘 백성, 특히 예루살렘 백성이 다 나와서 환호하고 찬양하고 나팔 불고 즐겁게 뛰놀고 있는데, 미갈은 그것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다들 기뻐할 때 전혀 기뻐하지 않는 한 사람, 그게 바로 미갈입니다. 미갈은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 다윗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마음에 업신여깁니다. 미갈의 이러한 반응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6절에서 미갈을 뭐라고 부릅니까?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합니다. 미갈이 다윗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유는, 그녀가 사울 집안을 대표하고 사울의 관점에서 이 일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눈이 아니라 불순종의 눈으로, 세속적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울도 생전에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법궤를 자신의 수도 기브아로 옮겨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럇여아림에 그대로 방치해 둔 겁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궤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잘될까, 어떻게 하면 왕권을 유지할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미갈이 바로 그러한 자기 아버지 사울의 시각으로 보니까 다윗이 못마땅하게 보이는 겁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있는 다윗을 볼 때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꼭 저렇게 해야 되나?’
혹시 그런 마음이 든 적 있으십니까? 열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 그런 마음이 들었느냐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진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어야지 자기 기분에 취해서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정말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경배하고 뜨겁게 기도하는데 ‘믿어도 꼭 저렇게 믿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게 곧 미갈과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을 향해서 ‘꼭 저렇게 해야 되나?’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미갈의 이러한 업신여김을 알지 못하는 다윗은 자신이 정성을 다해 마련한 여호와의 장막 안, 지성소에 그 궤를 넣어두고 여호와를 향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17-19절)
이것은 다윗 자신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의 하나님이시며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으로서, 손을 들어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그들에게 은혜로운 선물까지 나눠줍니다.
2) 재앙적 결과: 미갈의 불임 (20-23)
이렇게 다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리, 무리가 남녀를 막론하고 전부 모여 기뻐하는 이 자리에 빠진 한 사람이 미갈입니다. 재앙적 결과가 그런 그녀에게 임합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0절)
구약성경은 단어 하나하나를 허투루 쓰는 적이 없습니다. 신약도 그렇지만 특히 구약은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왜 반복해서 ‘사울의 딸 미갈’이라고 하겠습니까? 여기에 의미를 주는 겁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백성을 축복하는 것만 책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가정의 머리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축복하려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윗이 기쁨과 기대함으로 돌아온 그 가정은,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미갈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사랑했던 아내 미갈은 큰 기쁨은커녕 다윗을 향한 조롱을 퍼붓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라고 한 말은 다윗이 춤을 춘 행동이 ‘아주 영광스러우셨습니다!’라고 반어적으로 비꼬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꼴 보기 싫은 행동을 하면 ‘정말 대단하십니다.’라고 하는데, 정말 그러는 게 아니라 비꼬는 말입니다.
미갈은 다윗이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방탕한 자 같다고 지적합니다. 심지어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자 종들 앞에서 몸을 드러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미천한 자들 앞에서 그렇게 했다고 비난하는 겁니다. 체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미갈이 신경 쓰는 건 뭡니까? 왕으로서의 명성(reputation)과 체통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왕답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명성이 흉잡힐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기쁨의 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다 같이 기뻐하는 것은 안중에 없고, 그냥 다윗이 잘못했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미갈의 시각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1-22절)
미갈의 말에 대한 다윗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미갈의 동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기쁨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이것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미갈의 아비 사울을 버리시고 자신을 택하시고 높이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인한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다윗과 미갈 사이의 개인적 대화가 아니라, 이 대화를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 때문에 사울의 집안은 망하고 무엇 때문에 다윗의 집안은 흥할 수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더 천하게 낮아져야 하지만, 자신의 그 같은 낮아짐에 대해 ‘그래도 네가 걱정하는 계집종에게서는 높임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며 더 높아질 것을 언급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뛰놀면 하나님이 알아서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계속 사람의 눈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23절)
이것 때문에 다윗이 미갈과 관계가 나빠져서 다시는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아 자식이 없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여자에게 자녀는 하나님의 복으로 약속된 것이었기 때문에(신 28:1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쓴 다윗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미갈이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법에 따라 저주를 받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갈은 이스라엘의 공주로 태어났습니다. 사울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다른 부인들보다 얼마나 더 높은 여자입니까? 게다가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과 제일 처음 결혼했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미갈보다 더 높고 화려한 지위를 가진 여자는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다윗의 아내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을 뿐 아니라 다윗의 사랑도 빼앗기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첫째로는, 미갈이 우상 숭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9장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보내니까 미갈이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해줍니다. 다윗은 도망가게 하고 침상에 사람 모양의 우상을 취해서 눕혀 놓고 그것이 다윗인 것처럼 꾸미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 크기나 되는 우상을 집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아니고 우상 숭배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미갈은 하나님의 임재가 다윗과 예루살렘에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만일 미갈이 그 중요성을 알았더라면 백성들과 함께 궤가 들어올 때 나가서 함께 참여해서 찬양하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만 빠졌습니다. ‘나는 저런 거 싫다.’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셋째로, 미갈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며 춤춘 다윗을 비난하며 업신여겼는데, 그것은 사람의 시선만 중요하게 여겼지 하나님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높아져야 자기도 높아지는데 사람들이 다윗을 이상하다고 보면 자기도 이상하게 되는 거니까, 사람들의 눈만을 너무 의식했고 하나님의 눈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미갈처럼 좋은 환경과 조건 가운데 태어나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을 가졌더라도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면 저주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미갈이나 다윗이나 사실은 다 죄인입니다. 다 실수를 범했습니다. 다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가 죄를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이켰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존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다윗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 실패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궤를 옮길 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행동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이 결코 완벽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다윗도 우리와 똑같이 실수하고 죄를 짓고 끔찍한 일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즉시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바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실수하고, 죄도 범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시지 않는 것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갈과 같은 길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길로 갈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다윗처럼 즉시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목적은 결코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목적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에 있었다면, 구원받고 바로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다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목적은 이 땅에서 주님이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살 때 그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으면 그 인생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부르면서도 내 생각을 좇아 이익만 따라 살고 있다면, 실제로는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는 악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깨닫고 늘 주님 앞에 계속 돌아오며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사람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비나답의 집 오벧에돔의 집
홍문수목사 / 삼하 6:1~15
오늘은 공교롭게도 주일과 설날이 딱 겹쳤습니다. 이번 설은 코로나 펜데믹 이후 거리두기 해제 후 맞는 거라 그런지 설 연휴 귀성객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추산됩니다. 2천 6백 만 명 정도가 이동한다고 하니까 전 국민의 절반 정도가 움직이는 셈입니다. 작년에는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서 고향 마을에 오지 말라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게다가 해외여행도 급증해서 공항마다 여행객으로 붐비고 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주일 지키는 게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현장예배와 온라인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에게 주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다윗 시대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고질적인 대적 블레셋을 무찌르고 나라가 안정됐습니다.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다윗성을 조성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지 10여 년 흘렀을 때입니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정국가로 굳게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법궤를 다윗 성에 안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법궤(=언약궤)는 광야 시대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던 성물인데 블레셋에 탈취 당했다가 반환 받은 후 변방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법궤를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옮겨 안치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 법궤는 바알레유다에 있었습니다(삼하6:2).
바알레유다는 기럇여아림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곳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삼상7:1). 처음 보관한 지 어언 70여년이 흘렀습니다. 사무엘 시대 20년, 사울 왕 시대 40년, 그리고 다윗 왕 시대 10년 도합 70년입니다.
[1] 아비나답의 집 vs 오벧에돔의 집 : 동일한 법궤를 통해 저주와 축복으로 갈라짐
다윗은 이처럼 7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겨 성막에 안치하고자 한 겁니다. 정말 귀한 일이죠.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법궤를 운반하던 아비나답의 자손이 즉사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당황해서 중지시켰고 임시로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놓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오벧에돔의 집은 큰 축복을 받습니다. 동일한 법궤인데 그것 때문에 아비나답의 집은 저주를 받고 오벧에돔의 집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① 아비나답의 집 :
다윗은 법궤 운반 행사를 국가적인 대사로 치르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대표 3만 명을 동원하고 근사한 악단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운반해 오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삼하6: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웃사와 아효는 아마 아비나답의 손자 아니면 증손자였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조상을 아버지, 후손을 아들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은 엘리아살입니다(삼상7:1). 여기서 새 수레에 운반한 게 탈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새 수레에 운반하면 근사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규정에 어긋납니다. 법궤를 운반할 때는 막대기에 꿰어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민4:15). 그 과정에서 절대로 법궤에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노터치 즉 촉수금지입니다. 이 규정을 어긴 결과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삼하6:6~7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타작 마당을 지나갈 때 수레를 끄는 소들이 돌에 걸렸는지 뛰다가 수레가 흔들려 떨어지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웃사가 엉겁결에 법궤를 손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셨고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베레스웃사’라고 부르게 되는데, ‘웃사’를 쳤다(Outbreak against Uzzah)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웃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법궤를 운반하다 죽다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 그런 비극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자 다윗이 당황해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법궤 운반을 중단시킵니다. 그리고 임시로 보관할 장소를 찾다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깁니다.
② 오벧에돔의 집 :
오벧에돔은 레위 지파 사람으로 법궤는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법궤를 운반해서 예루살렘 다윗성에 안치할 때까지 그 집에 석 달 정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삼하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하나님께서 오벧에돔과 그 집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온 가족이 화목하고 평안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축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됐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100?)에 의하면, 그 집이 본래는 몹시 가난했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큰 부자가 됐다고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연구해 보면, 오벧에돔의 집안 모든 사람들, 형제들, 아들들, 후손들이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 집안사람들이 대대로 법궤를 지키는 문지기직을 맡았습니다. 아주 중요하고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대상26:8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다윗 당대에 그의 집안에서 62명의 문지기가 나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놀라운 축복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비나답의 집은 70년 동안 법궤를 모셨는데, 그 반면 오벧에돔의 집은 겨우 3개월 동안 모시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무려 280배 차이가 나는데 역전 현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벧에돔의 집이야 감사할 것밖에 없었겠지만 아비나답의 집으로서는 너무 황당하고 섭섭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어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운 원칙에 따라 각각 축복하고 저주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보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바르게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의 ‘길이’보다 신앙생활의 ‘질’이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의 연수보다 신앙의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아비나답의 집은 오랜 세월 법궤를 집에 모셨지만 아마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반면 오벧에돔의 집은 법궤를 모셔놓고 마치 하나님 자신을 모신 것처럼 온 집안 식구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오벧에돔의 집을 기뻐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죠. 당연히 오벧에돔의 집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벧에돔의 집 사람들이 어떻게 법궤를 모셨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법궤만 모신 게 아닙니다. 법궤가 상징하는 바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2] 하나님을 모신 오벧에돔의 집 : 하나님 경외, 말씀 순종, 하나님 위한 헌신
여러분, 그 당시 상황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궤를 그렇게 오래 모셨던 아비나답의 집에 자손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로 그 법궤를 자기 집으로 선뜻 모실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벧에돔의 집에서 기꺼이 모시기로 한 겁니다. 그 집 사람들은 법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비나답 집 사람들이 저주를 받은 것은 필시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을 모신다는 믿음으로 법궤를 집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이 크게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① 하나님 경외 :
오벧에돔의 집은 온 가족이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이 그 집에 와 계신 것으로 믿고 경외했습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존중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집의 주인은 가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양반이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안방에 어르신을 모셔놓은 것처럼, 그리고 수시로 문안 인사드리는 것처럼, 어르신 때문에 조심하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 경외가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나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예배에서는 모든 순서를 통해 나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도 무엇을 하든지 나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약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리고 삼상2:30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구약성경 원어 히브리어로 축복한다는 말은 ‘바라크’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무릎을 꿇는다, 송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축복한다는 뜻이 포함됐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화 보신 적 있으시죠.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오 ... ” 많은 가정에서 액자에 끼워 벽에 걸어 놓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화가 아니라 사진입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쯤에 눈 덮인 중국의 시골 길을 한 남자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진 작가였는데 신앙의 회의 가운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오, 주여! 당신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면 제가 확실히 믿겠습니다.” 그때 마음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라!”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해서 이곳저곳에 검은 땅이 나타나서 보이게 흉한 들판이었습니다. “이런 걸 왜?” 하며 반문이 생겼지만 그는 마음에 들려오는 강력한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말에서 내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그 필름을 현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후에 이 사진과 간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사진 아래 적힌 글처럼 정말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집에 모시고 주인으로 존중하고 따라면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어떤 글이죠?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아마 오벧에돔의 집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야, 우리 집의 주인이야, 늘 임재하심으로 우리를 도와주셔!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② 말씀 순종 :
오벧에돔 집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아비나답 집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나요? 물론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도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1차적인 책임은 오랜 세월 법궤를 관리했던 아비나답 집에 있습니다. 법궤를 운반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 내용을 확인해야 됐는데 무조건 잘 해보려는 열심만 있었습니다.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게 큰 실책이었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제일 좋은 것, 화려한 것, ... 이런 것으로 운반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건 자기들 생각이죠. 아니, 이방인들이 그렇게 하니까 좋아보여서 따라 한 겁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 풍조가 변해도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벧에돔 집이 축복을 받은 소식을 들은 다윗이 이제 깨달은 대로 제사장들에게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조치합니다. 이번에는 아무 탈 없이 예루살렘에 안치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여러분,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 prime meridian)을 아시죠. 북극에서 남극으로 수직선을 그은 것으로 지구의 경도와 시간대의 기준이 되는 자오선입니다. 국제 공통으로 사용하는 기준 자오선은 그리니치 자오선입니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경도를 정하고 각 지역의 시간대를 환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기준이 중요합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표준이비다. 그래서 성경 66권을 정경(正經, Canon)이라고 부릅니다. 영어 단어 Canon은 본래 갈대(reed)를 의미하는 헬라어 ‘카논’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표준 자가 나오기 전 고대에 갈대를 꺾어 길이를 측정했는데 그게 표준이란 단어가 된 겁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을 표준으로 기존으로 삼고 살면 탈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보증합니다. 매년 1월에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 있죠. 신명기 28장입니다. ‘축복의 장’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축복과 저주의 장’입니다. 68절까지 있는데, 1절~14절은 축복의 메시지이고 15절~68절은 저주의 메시지입니다. 축복의 메시지의 거의 4배 가까이 되는 분량이 저주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경계하시기 위해 강조하시느라 그런 겁니다. 말씀대로 사는 게 그만큼 중요합니다. 신28:1~2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And all these blessings shall come on thee, and overtake thee-KJV)” 순종하면 반드시 축복하신다는 겁니다. 아예 축복이 뒤에서 따라잡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영어성경에서 사용한 ‘overtake’ 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반대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가 그렇게 따라붙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게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생각에는 그게 아닌데 ... ”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혹은 “세상 사람들이 다르게 말하는데 ... ”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이 탈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나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어디 비교합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있는 말씀이 주어지면 무조건 순종하면 되는데 인간 생각을 내세우니 그것이야 말로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자꾸 세상 풍조와 섞는 것은 혼합주의(混合主義, syncretism)라고 말합니다. 양다리 걸치는 신앙 행태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도 좋다 바알도 좋다 그러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우리 집 사람들도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나요?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천 대’는 산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수사법 즉 강조법입니다. 말씀 순종의 신앙을 잘 계승하면 오래오래 자자손손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산다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꾸 우리를 미혹합니다. 세상의 말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분별력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선한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승리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아무쪼록 오벧에돔의 집 사람들처럼 하나님만 섬기고 오직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③ 하나님을 위한 헌신 :
그리고 오벧에돔 집 사람들은 큰 헌신을 했습니다. 아비나답 집 사람들이 불행한 사태를 보고 감히 누가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용감한 장군 출신 다윗 왕조차 두려워서 법궤 운반을 중단시킬 정도로 엄중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선뜻 나선 게 바로 오벧에돔 집 사람들이어습니다. 혹시라도 희생이 있다면 감당하겠다고 결단한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법궤를 관리하는 것은 아주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감수한 겁니다. 그것은 성숙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자청하는 게 진짜 하나님을 잘 모시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므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웃사가 법궤를 운반하다 현장에서 즉사했을 때 자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살벌하고 소름이 돋았을 겁니다. 용맹스런 장군 출신인 다윗 왕조차 두려워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오벧에돔과 그의 집이 법궤를 흔쾌히 영접했습니다. 큰 헌신이었습니다. 삼하6:9~10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하늘의 영광과 보화를 얻게 될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한 고난도 자청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과 영광이 될 겁니다. 롬8:17~18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자 모신 개인과 집안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저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년 설 연휴가 되면 생각나는 집안이 있습니다. 영파선교회를 조직한 박용묵 목사(1918∼1991)의 집안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호 ‘영파(靈波)’를 를 따서 후손들이 만든 선교회로
매년 설 연휴에 인도 로수길 선교사 선교지에 가서 의료선교와 노방전도를 실시합니다. 최근에는 차남 박재형 장로가 의대 교수직을 은퇴하고 선교지로 가서 그곳에서 단기선교를 한다고 합니다. 7남매가 신앙 안에서 사회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선교적 삶을 살아갑니다. 목사, 의사, 교수, 사업가 등. 이제 3~4대까지 내려갔습니다. 여섯째인 박상은 장로(안양샘병원 워장 역임, 효산의료재단 이사장)는 오래 전 우리교회에 와서 말씀과 간증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안의 이야기가 막내 박상진 교수(장신대 기독교교육학)가 펴낸 책 「천대의 복을 누리는 은혜 가문 세우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박용묵 목사는 개척교회 목사로서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느라 늘 바빴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말씀을 잘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는 늘 기도하며 자녀들을 양육했습니다. 그 덕분에 믿음 안에서 성장한 자녀들이 각자의 가정을 이루고 자손들이 영육 간에 번성하게 된 겁니다. 특별히 아버지의 복음 사역을 계승하는 의미로 영파선교회를 조직하고 단기선교도 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과 같은 아름다운 집안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그런다 가만히 보면 우리교회에도 그런 집안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한 집안만 그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느 집안이든 가능합니다.
아비나답의 집과 오벧에돕의 집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그 차이가 무엇인지! 신앙의 자세 차이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지만 신앙은 차별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른 신앙을 축복하십니다. 그릇된 신앙에는 결코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은 형식적인 신앙에 불과했습니다. 오벧에돔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신 신앙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했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오벧에돔과 그의 집처럼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섬기고 순종과 헌신으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축복과 영광을 천 대까지 누리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자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길렀기에?
삼하 6장 1~11절 / 강문호목사
어린이 주일입니다. 박 정희 대통령은 아들 지만이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 마약 복용을 하다가 또 체포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훌륭하였는 데 아들 하나는 인생을 늘 마약으로 체포, 구금 그리고 석방의 반복으로 폐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길렀기에?> 반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지방에 한 교회가 있습니다. 교인이 10명도 안 됩니다. 지하실 교회입니다. 목회만 생각하면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이번에 최연소 판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길렀기에?>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오벧에돔은 아들을 62명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능력이 있어서 직무를 잘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62명 아들을 낳았으면 그 중에 한 명쯤은 백치 아다다가 나올 수도 있고, 62명이면 옥에도 티가 있다고 삐뚜로 나간 아들이 한 두 명 정도 있을 만 한데 한결같이 다 능력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손자들 중에는 민족을 움직이는 용사도 나왔습니다. <문지기의 반차가 이러하니라 고라 족속 아삽의 자손 중에 고레의 아들 므셀레먀와 므셀레먀의 아들들 맏아들 스가랴와 둘째 여디야엘과 세째 스바댜와 네째 야드니엘과 다섯째 엘람과 여섯째 여호하난과 일곱째 엘여호에내며 오벧에돔의 아들들 맏아들 스마야와 둘 째 여호사밧과 세째 요아와 네째 사갈과 다섯째 느다넬과 여섯째 암미엘과 일곱째 잇사갈과 여덟째 브울래대니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며 그 아들 스마야도 두어 아 들을 낳았으니 저희의 족속을 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 스마야의 아들들은 오드니와 르바엘과 오벳과 엘사밧이며 엘사밧의 형제 엘리후와 스마갸 갸는 능력이 있는 자니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저희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 이명이며>(대상26;1-8) <어떻게 길렀기에?> <어떻게 길렀기에?> 자녀를 잘 기르는 비결을 오벧에돔을 통하여 찾아 보려고 합니다. 오벧에돔이 자녀들을 한결같이 그렇게 잘 기른 비결을 본문에서 찾아 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아무리 드려다 보아도 자녀를 어떻게 길렀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다만 오벧에돔이 어떻게 살았는 지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어떻게 길렀지는 몰라도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 지는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벧에돔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1. 십자가를 맡길 수 있는 그 사람.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애급에서 나와 하나님의 집 성막을 지었습니다. 성막의 중심은 지성소고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였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행진할 때마다 법궤를 맨 앞에 세우고 따라 갔습니다. 40년 동안 늘 그랬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 온 후 성막은 실로에 세워졌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이 치열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블레셋에 졌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여 주실 것같았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지고 나가서 전쟁하였지만 법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법궤 때문에 오히려 많은 피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법궤를 보관하기란 부담스러워서 법궤를 도로 이스라엘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7개월 만에 일이었습니다. 법궤는 기럇여아림 아비나답 집에 보관되었습니다. 사울왕은 믿음이 없던 왕이라 법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울 뒤를 이어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성전을 짓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3만명을 동원시켜서 법궤를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수레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실었습니다. 아효가 수레를 끌었습니다. 웃사가 수레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 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왔을 때 수레를 끌던 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에 있던 웃사는 법궤가 떨어질가 두려워 법궤를 손으로 잡았습니다. 순간 웃사는 죽고 말았습니다.하나님의 법궤는 손을 댈 수 없는 신비한 성물이었습니다. 법궤를 기쁨으로 나르던 3만명은 슬픔에 쌓여 장례식을 웃사 장례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려던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갖다 맡겼습니다. 여기서부터 오벧에돔 집에 축복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오벧에돔의 집에 맡기자는 다윗이 생각하였을 때가 그 집에 축복의 시작이란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9-10) 하나님께서 어려우실 때 생각나는 그 사람, 교회가 어려울 때 생각나는 그 사람, 나라가 어지러울 때 생각나는 그 사람, 그 때가 축복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어느 부모가 아들을 잘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와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를 시험하여 보기로 하였습니다. 밤중에 죽은 돼지 한 마리를 가마니로 둘둘 말아서 가지고 아들 친구를 아들과 함께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말하게 하였습니다. "친구아I 내가 실수하여 사람을 하나 죽였어. 도와 줘! 같이 파묻고 싶어" 그러나 그 친구는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공범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아버지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친구가 말했습니다. "친구야! 어쩌다가 그렇게 실수하였니? 할 수 없지. 의리를 저버릴 수 없지. 같이 가자" 아들은 아버지 친구를 보면서 자기 친구를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어려움을 같이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정말 친구입니다. 2. 부모의 기대대로 사는 그 사람. 오벧에돔의 부모는 그 아들을 낳고 오벧에돔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름에는 이름을 붙이는 이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오벧이라는 말은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에돔은 땅 이름입니다. 오벧에돔은 에돔의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부모는 아들을 낳고 섬기는 자가 되었으면 하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습니다. 아들을 향한 바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법궤를 섬기려는 자가 없을 때 오벧에돔은 혼자서 법궤를 자기 집에서 섬겼습니다. 석 달만에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이 자손만대에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벧에돔의 자녀 62명은 아버지 오벧에돔이 할아버지 기대대로 살아가는 것을 몸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아버지 기대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기대를 가지고 길러야 합니다. 깊은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면 자녀들은 긍정적인 부담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영국 부스 여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르는 것은 세계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나는 언제나 사탄보다 한 발 앞서서 내 아들을 인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이 땅에 세우신 것은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제일 먼저 파괴시킨 것도 사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사탄이 침범하지 못 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의 자료를 모두 컴퓨터에 넣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5명이 앞으로 큰 사람이 될 것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정말 5명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인 분석이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그렇게 분석하여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컴퓨터가 그렇게 분석하고 나니까 온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부모들이 기대를 걸고 길러야 합니다. 오벧에돔은 부모가 섬기는 자가 되라고 관심을 가지고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축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모범적으로 공부 잘 하는 학생 10명을 조사하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늘 아침 등교길에 부모님께서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어요. 그리고 어젯밤 침대에 누워 자려고 하는 데 어머님이 오시더니 저를 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어요> 10명의 공통점이었습니다. 사랑하여 주면 자신감에 차서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9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식물학 교수 윌리암 클락크(William Clark) 교수가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북해도에 있는 삿보르 제국 대학에 교환 교수로 부임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윌리암 클락크는 성경 책을 여러 권 배에 실고 있었습니다. 식물학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문무성에서 나온 장학관이 성경책을 가르치면서 무엇을 할 것이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가리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장학관은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윌리암 클락크도 그러면 나는 그 학교에 교환 교수로 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할 수 없이 장학관은 허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필수가 아니라 선택과목으로 성경을 가르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8개월 간 클락크 교수는 성경을 가르치고 본국의 소환을 받아서 돌아 갔습니다. 그 때 교문을 나서면서 한 마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청년들이여! 대망을 품으십시오> 그 후 클락크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그 유명한 우찌무라 간조입니다. 한 사람을 잘 기르니까 나라가 바뀌었습니다. 관심있는 교육은 자녀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 교수가 기대감을 가지고 길렀던 결과였습니다. 3. 변치 않는 그 사람. 오벧에돔이 법궤를 잘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3개월만에 큰 복을 주셨습니다. 오벧에돔은 축복의 비결을 찾은 것입니다. 다윗이 마음을 회복하고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 때 오벧에돔은 자녀들을 모두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손 대대에 법궤가 있는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 반차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궁중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주의 성전에 문지기로 하루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오벧에돔은 변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동지 영원한 동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오벧에돔이 3개월 법궤를 잘 모셨다고 하나님이 그런 축복을 주신 것만은 아닙니다. 평생 모실 마음을 하나님은 이미 보셨습니다. 변치 않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너무나 진실하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그리고 변함없이 한결같이 사는 자매 한 분이 있었습니다. 말도 없이 자기 할 일에 언제나 충성하는 모습에 모든 교인들은 그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그렇게 말없이 충성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매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사연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저희 집은 도저히 나를 기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광주리에 담아서 근처에서 가정 부잣집 대문앞에 나를 버렸습니다. 부잣집에서 나를 보지 못 하고 지나 가던 사람 하나가 나를 데려다가 길렀습니다. 그 때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술고래였습니다. 알콜중독자였습니다. 집안이 술로 기우러 버렸습니다. 내가 14살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창녀굴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또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더욱 더 심한 알콜 중독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나도 뭇 남자들에게 시달리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사창가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걸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착하고 좋은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오랫만에 맛보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 데 길가에 있는 교회로부터 찬송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예수 에수 내 주여 섭섭하여 울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 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나는 나도 모르게 교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섰을 때 3절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도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어느 덧 내 몸은 교회 뒷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설교를 들었습니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내게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만이 나의 위로가 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내 무거운 짐을 덜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증오와 미움이 이글거리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참으로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내 마음에 다시 모셨습니다. 평화가 깃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신 후로 내 마음은 늘 기쁘고 안정되고 축복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말없이 충성하기로 하였습니다.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예수님과 교회를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벧에돔은 자녀를 어떻게 길렀다는 말씀은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자세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고 봅니다. 1. 십자가를 맡길 수 있는 그 사람. 2. 부모의 기대대로 사는 그 사람. 3. 변치 않는 그 사람. 미국의 어느 교육자는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원의 식물들을 가꾸는 관심 이상으로 자녀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 자녀들은 잡초가 우거진 장글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벧에돔처럼 자녀를 길러야 할 것입니다.
베레스웃사
삼하 6장 1~11절 / 홍문수목사
여러분, 혹시 이런 우화를 들어보셨습니까? 제목은 ‘소와 사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몹시 사랑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매일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매일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다투기 시작했고, 끝내 헤어집니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최선을 다했어! 난 잘못 없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안타깝지 않습니까? 소나 사자나 정말 잘해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 게 탈이었습니다. 상대방의 뜻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했습니다. 결국 열심히 한 모든 게 허사였습니다. 상대방을 실망시키고 자기도 실망했습니다. 부부 관계이든 부모 자식 관계이든 친구 관계이든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큰 비극이죠.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기는 열심을 다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섭섭해집니다. 원망하게 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거야?” 심지어는 하나님을 멀리 하고, 신앙생활을 접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섭섭하고 원망스런 경우가 없었습니까? 지금 혹시 그렇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도 어렵고 힘든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기간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겁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죄송하지만 신앙생활을 잘못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나는 잘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라면 속히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게 바로 이겁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런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사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다가 즉사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죽음입니까? 아니, 어떻게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단 말입니까? 본인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그렇고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부인할 수 사실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웃사가 신앙생활을 잘못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내 생각에 잘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잘 하는 신앙생활이 되면 좋겠습니다.
먼저 웃사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궤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궤(法櫃)는 성막(聖幕)의 지성소(至聖所) 안에 놓았던 궤로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물입니다. 성막은 광야 시대에 하나님의 지시로 건축된 것인데 천막이죠. 두 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안쪽에 있는 천막이 지성소입니다.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법궤 뚜껑 부분이 속죄소이고, 그 위에 황금으로 만든 그룹 천사 둘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이스라엘을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 성막과 법궤를 사용하신 겁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법궤의 의미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2절. “ ... 그 궤는 그룹들(cherubim)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법궤 안에 세 가지 물건이 들어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십계명 돌판, 그리고 만나가 든 항아리 등입니다. 하나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물들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가리켜 증거궤(The Ark of the Testimony) 혹은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 당시는 다윗 왕의 시대입니다. 본래 다윗은 목동 출신인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쳐부수고 일약 장수가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자 질투를 느낀 사울이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다윗은 망명을 합니다. 그러던 중 사울 왕이 전사했고, 마침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지만 사울 일파의 반발과 블레셋의 침략으로 나라가 계속 어수선합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이 모든 반대 세력을 격퇴하고 왕권을 견고히 세워갑니다. 그 후 왕권 수립의 기념으로 예루살렘(다윗 성)을 수도로 정합니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신정국가로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에 법궤를 옮겨올 생각을 합니다. 당시 법궤는 거의 방치되어 있었는데,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겨온다는 것은 정말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법궤 운반 사건 도중 웃사가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1] 바른 신앙의 중요성
본문의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법궤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삼상7:1~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엘리 제사장 시대인데,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겼다 도로 찾았을 때입니다. 기 ‘기럇여아림’(본문 2절의 ‘바알레유다’와 같은 곳)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하게 됩니다. 아바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관리 책임을 맡았는데, 그로부터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대충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이후 사무엘 시대 20년(삼상7:2 참조), 사울 왕 시대 40년,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된 후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무려 70년 동안 방치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법궤 운반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 광경이 대단했습니다. 백성들의 대표 3만 명이 동원되었고(1절), 각종 악기 연주자들도 동원되었습니다.(5절) 이때 법궤 운반을 맡은 사람들이 바로 웃사와 아효입니다. 3절 보면, 그들이 아비나답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70년 세월의 흐름을 감안하면 아들이 아니라 후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흔히 후손들을 통틀어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법궤를 성대한 모습으로 운반하는데, 도중에 어떻게 됩니까?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현장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그러자 누구보다 다윗이 당황합니다. 8절.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은 웃사가 즉사한 장소를 ‘베레스웃사’라 명명했습니다. ‘베레스’는 히브리어로 ‘치다’ ‘찢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레스웃사는 ‘웃사를 침’(Outbreak against Uzzah)이란 뜻입니다.
사태가 이쯤 되니까, 다윗도 백성들도 벌벌 떱니다. 결국 법궤 운반 행사가 중단됩니다.
그리고 법궤가 임시로 어디로 옮겨집니까? 오벧에돔의 집입니다. 11절.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보관되었는데, 신기하게 이번에는 오벧에돔이 복을 받았습니다. 아비나답(웃사)의 집안에 70년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석 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려 280배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합니다. 70년 법궤를 모셨던 집안의 웃사는 저주 받아 즉사하고, 3개월 모셨던 오벧에돔의 집은 큰 복을 받다니! 이건 정말 하나님이 너무 한 것 아닙니까? 너무 불공평한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법궤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동일한 법궤를 모셨는데 두 집안의 형편이 전혀 달라졌다면,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문제인 게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바른 신앙생활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믿었다고, 오래 봉사했다고 대수가 아닙니다. ‘오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죠. 눅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가? 그 ‘길이’보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잘 했는가?” 그 ‘질’이 중요합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신앙의 연조(年條)/연수(年數)보다 신앙의 태도(態度)/방식(方式)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연조를 무시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신앙의 연조가 기본적으로 중요하죠. 1년 믿은 사람보다 당연히 5년, 10년 믿은 사람이 낫죠. 요셉이나 사무엘처럼 모태 신앙으로 평생 바른 신앙생활을 하면 가장 좋은 것이죠. 하지만 신앙의 연수가 길다고 무조건 신앙이 좋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뒤늦게 믿어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일찍 믿었어도 항상 제자리걸음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저와 여러분은 오래 믿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바로 믿는 것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바른 신앙의 기준
그러면 바른 신앙의 기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것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① 말씀 :
바른 신앙의 기준은 무엇보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사느냐?” 이겁니다. 웃사가 죽임을 당한 게 황당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3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법궤를 어떻게 운반했나요? 수레에 실어서 운반했습니다. 이게 탈입니다. 원래 법궤는 사람이 어깨에 메어 운반하는 게 규칙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수레에, 그것도 좋은 새 수레에 운반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편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우상 신상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아마 별 생각 없이 그들이 쓰는 방법이 좋아보여서 그냥 따랐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수레로 운반하다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됐나요? 6절~7절 보시죠.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한참 가다가 도중에 길이 고르지 못했는지 수레를 끄는 소가 펄쩍 뜁니다. 법궤가 기우뚱 하면서 땅바닥에 떨어지려고 합니다. 웃사가 당황한 나머지 손으로 붙잡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그를 치셨고, 그는 즉사합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민4:15 보면 이런 규정이 있습니다. “ ...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법궤는 아무나 운반하는 게 아닙니다.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만 담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물인 법궤에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촉수 금지! 운반할 때도 조심스럽게 어깨에 메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법궤에 채가 달려 있는 겁니다. 웃사가 이 규정을 어기고 하나님께 불경죄를 범한 것입니다. 안타깝게 다윗도 백성들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웃사가 죽은 후에도 한참 동안 몰랐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르고 저지른 게 죄인가요? 무죄인가요? 무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죄입니다. 무지도 죄입니다! 예를 들어 교통 신호를 모르고 위반했다고 합시다. 죄인가요? 아닌가요? 죄입니다! 신호등을 못 보고 위반했을 때는 사고가 안 납니까? 알고 위반할 때만 사고 납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르고 한 경우 한번만 봐 달라고 말합니다. 인정이 많아서 서로 양해가 됩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절대 봐주지 않습니다. 냉혈 인간들 같지만 그게 맞는 겁니다.
재미 교포들이 다른 문화에 살면서 경험한 것을 빗대어 만든 이야기입니다. 운전하다 잘 모르고 신호를 위반했습니다. 교통순경에게 딱 걸렸습니다. 몰라서 그런 거라고 사정합니다. “Look at me only one time!”(한번만 봐 주세요!) 콩글리쉬입니다. 그러자 미국인 교통순경이 스티커를 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No soup!"(국물도 없습니다!) 이게 맞는 겁니다. 모르고 잘못해도 죄입니다. 국물도 없는 겁니다.
신앙생활 할 때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엉뚱합니다. 다윗도 백성들도, 특히 웃사가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했습니까?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자기 방식으로 하니까 오히려 화가 된 겁니다. 다윗도 그렇고 훌륭한 신앙 인물들조차 이따금 실수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동부터 옮길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해야죠! 그게 바른 신앙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한 겁니다. 그게 탈이죠! 바른 신앙이 아니라, 무지한 열심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덮어 놓고 믿으면 안 된다! 열어 놓고 믿어라! 무슨 말입니까? 성경책 덮어놓고 믿으면 곤란합니다.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듣고, 읽고, 알고 믿어야 합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신앙은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계속 들음으로 신앙이 성숙해집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읽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으면 10년 교회 다녀도 ‘황’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모르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는 다니는데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의 풍조와 유행을 따라갑니다. 그러면 웃사 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한 가지 원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간 겁니다.(민9:15~23)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열심, 자기 판단을 다 버리고 겸손히 따라갔습니다.
이게 바로 신정정치(Theocracy) 곧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신정정치의 기본 원칙은 ‘말씀의 통치’(Logocracy)입니다. 다윗이 신정국가를 이룬다고 하면서 이 원칙을 무시했으니 잘 될 리가 없죠. 하나님이 진노하신 겁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바른 신앙은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미신 믿듯이, 우상 종교 믿듯이 하지 마십시오! 은사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하고, 체험도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말씀에 어긋나면 모든 게 헛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말씀 중심의 바른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② 진심 :
두 번째 바른 신앙의 기준 ‘진심’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안이 70년 동안이나 법궤 모셨지만 건성으로 형식적으로 했습니다. 진심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벧에돔은 비록 짧은 기간을 모셨지만 진심으로 했습니다.
웃사가 죽임을 당했을 때 누가 감히 법궤 모시기를 자원했겠습니까? 다윗도 꺼려하던 판국에 말입니다. 한 마디로 당시 법궤는 기피대상이요, 애물단지 취급을 당했습니다. 사실으 복인데 무지해서 그랬던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벧에돔이 그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섬겼습니다. 9절~10절.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16:7 “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the heart)을 보느니라”
그래서 성경에 진심을 강조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신4:29 “ ...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등등 ... 주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셨습니까? 마음 속에 진심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마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말씀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되,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 바랍니다. 이게 바른 신앙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3] 바른 신앙의 축복
오벧에돔은 바른 신앙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실이 본문 11절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대상13:14 보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상13: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1세기 유대의 역사가)에 의하면, 오벧에돔은 본래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고 합니다. 그런데 석 달만에 온 동네가 부러워하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영적이 법칙이요 축복의 원리입니다. 바른 신앙이 정립되면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요삼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은 축복의 기원이지만 동시에 원리이기도 합니다. 또 잠22: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잠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이른바 3통(三通)의 원리입니다. “신통(神通) → 인통(人通) → 물통(物通)” 하나님과 잘 통하면(바른 신앙), 사람과 잘 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질과 잘 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통(神通)하면 인통(人通)하고, 인통(人通)하면 물통(物通)하게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오벧에돔 그 본인만 복을 받은 게 아닙니다. 형제들, 아들들, 후손들이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집안의 사람들은 대대로 법궤를 지키는 문지기직을 맡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대상26:8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다윗 당대에 그의 집안에서 62명의 문지기가 나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겁니다.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어제 밤 기분 좋은 일이 있었죠! 역도의 장미란 선수 이야기입니다. 올림픽 역도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경기를 마치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죠! 평소 신앙이 좋은 자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바쁜 훈련 일정 가운데서도 늘 말씀을 공부하고, 신앙훈련도 받고,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바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둔 승리라 더욱 기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바른 신앙생활의 승리를 거두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여러분! 이제 말씀이 마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믿는 것도 중요하고, 교회 열심히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신앙이다! 말씀대로 신앙생활 하고, 진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절대 웃사처럼 되지 않는다, 베레스웃사는 없다! 오벧에돔처럼 된다!” 이겁니다. 부디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바른 신앙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승리하는 인생,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