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 3시 반, 침대에 누워있던 오명화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옆에 누운 윤정수의 코고는 소리가 뚝 그친 것은 그쪽도 잠이 깨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집 전화다. 요즘은 제 집 전화번호도 잊어먹을 정도로 핸드폰이 분신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집 전화가 없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집이 있으면 당연히 집 전화가 있는 것이다.
“뭐야? 받아봐.”
오명화가 잠깐 망설였더니 윤정수가 눈을 감 은채 재촉했다. 전화벨은 여덟 번째 울리고 있다. 오명화가 손을 뻗어 흰색 전화기를 쥐었다. 가끔 이 전화로 윤정수에게 전화가 왔지만 이 시간에는 처음이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오명화가 응답했다.
“여보세요.”
“사모님, 저 박상호입니다.”
공손한 사내 목소리가 들렸을 때 오명화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를 귀에서 떼며 대답했다.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윤정수의 심복 박상호 전무다. 그만이 이 시간에 집 전화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박전무예요.”
전화기를 건네주며 말했더니 윤정수가 일어나 앉으며 받는다. 이미 깨어있었던 터라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덮여졌다.
“응, 무슨 일이냐?”
전화기를 귀에 붙인 윤정수가 대뜸 묻자 박상호가 말했다.
“회장님,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박상호가 바로 말을 잇는다.
“성일이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
“중상입니다. 지금 원주병원에 입원해있습니다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회장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먼저 말하고 난 박상호의 보고 속도가 잠깐 느려졌다.
“갓길에서 나오다가 뒤에서 달려오던 트럭이 들이받은 것입니다. 12시경에 사고가 났는데 신원 확인에 시간이 걸려서 조금 전에야 연락을 받았습니다, 회장님.”
“....”
“제가 지금 원주로 가는 중입니다. 회장님,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알았다.”
마침내 윤정수가 한마디 하고 전화기를 오명화에게 건네주었다.
오전 3시 45분, 서울지검 부장검사 윤태일이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을 쥐었다. 진동으로 떨던 핸드폰이 손 안에서 산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옆에 누운 아내 김미정은 세상 모르고 잔다. 잠이 많아서 미인이라고 제 입으로 말하는 인간이라 이상하지도 않다. 핸드폰을 귀에 붙이면서 윤태일은 이번에 맡은 대형 사기사건의 중요한 정보가 터졌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여보세요.”
응답했더니 대뜸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오빠?”
이 시간에 오빠라고 부르며 전화할 여자는 윤은지 뿐이다.
“어? 너 웬일이냐? 이 시간에?”
“오빠, 큰일 났어.” 해놓고 윤은지가 징징 울었으므로 윤태일은 몸을 솟구쳐 일어나 앉았다. 그럼 아버지가?
“무슨 일이야?”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을 때 윤은지가 훌쩍이며 소리쳤다.
“성일이가 교통사고, 지금 원주병원에, 고속도로에서.”
아버지가 아니었다. 심호흡을 하고난 윤태일의 이마가 찌푸려졌다가 윤은지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어금니가 물
려졌다. 오랜만에 막내 동생 윤성일의 이름을 듣는 터라 생소했고 남의 일 같았다. 그래서 윤은지의 반응이 조금 어색했다. 윤은지의 말이 다 끝났을 때까지 윤태일은 듣기만 했고 김미정은 깨어나지 않았다.
오전 4시 15분,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박상호가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말한다.
“예, 사모님. 성일이하고 동승한 여자는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이건 사망 사고여서 벌써 취재 기자가 다녀갔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에 보도가 될 것 같은데요.”
뒷좌석에 등을 붙인 박상호가 말을 잇는다.
“성일이 상태를 봐서 곧 서울 중앙병원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그래서 중앙병원 응급 팀하고 엠블런스가 지금 원주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어쨌든 나도 지금 출발 할 테니까요. 계속 연락을 해주세요.”
오명화가 말하자 박상호는 걱정스러운 말투가 되었다.
“사모님,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중앙병원으로 오셔도 될 텐데요.”
“아뇨. 그럴 수 없죠. 그런데.”
오명화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묻는다.
“그 사망했다는 여자. 누군가요?”
“예, 조금 전 성일이하고 함께 강릉으로 내려가던 친구하고 통화가 되었는데요. 만난 지 몇 시간밖에 안 되는 여자라고 했습니다. 성일이 친구의 여자친구가 데리고 온 아인데 22세, 전문대 휴학생이라고 합니다.”
“....”
“그 가족한테도 연락이 되었다는데요. 트럭의 과실로 사고가 난 것이니만치 우리 측에서 책임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
“우리 신분을 알면 물고 늘어질 가능성이 있으니만치 사모님께서는 접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주에 오시면 주위에 직원들을 배치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사모님께서 고생하십니다.”
통화가 끊겼으므로 핸드폰을 귀에서 뗀 박상호가 앞쪽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사내에게 지시했다.
“그 여자애 가족은 철저히 차단시켜. 성일이 배경을 알면 손을 벌릴지 모르니까 말야.”
“예, 전무님.”
“회장님은 오시지 않는 것 같다.”
좌석에 등을 붙인 박상호가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말을 잇는다.
“그자식이 계속 말썽이구만.”
핸드폰을 쥔 김가영이 다시 위쪽의 시간을 보았다. 오전 6시 10분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다는 것은 약간 미쳤거나 급한 스케줄 변경 따위의 이유가 있는 인간들일 것이었다. 소리죽여 숨을 뱉은 김가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두 시간만 더 자자. 8시 반쯤 되었을 때 차분하게 연락을 하는 것이다. 그때는 핸드폰을 켜놓았겠지. 지금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내는 것도 속 보이는 것이다. 김가영은 길게 숨을 뱉었다. 늦게까지 공부를 한 김윤영이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다. 집만은 조용하다. 김가영이 손바닥을 심장위에 얹어 놓았다.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이 가슴의 박동이 그 사람, 윤성일 때문에 뛰는가?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윤성일의 입술이 젖꼭지를 물었던 쾌감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내 몸을 처음으로 가진 남자. 그 아픔, 그 뜨거운 숨결, 그 쾌락 그리고 그때의 내 신음까지.
눈을 뜬 윤성일은 환한 빛살에 이맛살부터 찌푸렸다. 그 순간 외침소리가 귀를 울렸다.
“성일아! 나 누나야!”
윤은지다. 곧 손에 따뜻한 촉감이 잡혀지더니 흐린 눈앞에 영상이 떠올랐다.
“성일아! 정신 차렸어!”
그러고 보니 누나 목소리가 엄마 닮았다. 그 순간 윤성일의 치켜뜬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반듯이 누운 상태여서 눈물은 눈 끝에서 귀 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아이구, 이 자식아!”
눈물을 본 윤은지의 목소리에도 울음이 섞여졌다. 그때 형의 목소리가 울렸다.
“성일아, 나다! 형이야!”
큰형이다. 바쁜 큰형이 나왔네. 근데 여긴 어디지? 아직 눈앞에 흐려서 윤성일은 검은 형체만 볼 뿐이다.
“아이구, 막내삼촌!”
이것은 둘째형수, 둘째형대신 형수가 나온 것 같다. 그때서야 흐린 영상이 선명해졌으므로 윤성일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온몸에서 고통이 전해졌다.
오명화는 눈물겨운 가족 상봉의 현장에는 빠졌다. 대신 응급실 앞에서 박상호 전무, 원주병원장 고박사, 그리고 원주로 달려온 서울 중앙병원의 응급처치 팀장 장박사, 외과 과장 유박사와 함께 둘러 서있다.
“그럼 지금 깨어난 것 같으니까 엠블런스로 옮기겠습니다.”
중앙병원 장박사가 말하자 유박사가 머리를 끄덕였다.
“헬기는 장비가 부족해서 그냥 보냈습니다. 엠블런스로 가도 됩니다.”
중앙병원 원장 최박사의 지시에 의하여 응급 헬기가 10분 전에 떴다가 되돌아간 것이다. 빨리 도착할 수는 있어도 장비가 부족하고 옮겨 싣는데 거추장스럽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차로 내려온 두 박사팀이 헬기가 가버리면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중앙병원은 엠블런스 3대, 의사 4명, 간호사 3명에 보조 장비까지 가득 싣고 온 것이다. 머리를 끄덕인 오명화가 둘러선 박사들을 보았다. 오명화가 현장 지휘관인 것이다.
“신세 잊지 않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둘러선 박사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윤성일의 상처는 대단했다. 갈비뼈 6대가 부러졌고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골절 되었으며 뇌출혈, 머리 왼쪽에 10여개의 쇠, 유리 파편이 박혔다. 그러나 치명상은 넘겼다는 것이다.
“엄마, 어떡해?”
강희나가 이렇게 비명 같은 외침을 뱉은 것은 오전 8시 반이다. 지금 윤성일의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물
론 제보자는 전세희. 세상 모르고 자다가 조금 전에 어머니가 원주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서야 진상을 알았다. 물론 오명화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진상은 정확하게 파악되었다.
“중상이라구?”
다시 소리쳐 물었더니 전세희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응, 생명에는 지장이 없대. 병신도 안 되고. 지금 서울 중앙병원으로 이송 중.”
“....”
“곧 뇌출혈 수술, 전치 2개월. 그것은 병원에 2개월 동안 자빠져 있어야 된다는 말씀.”
“얘!"
이제는 강희나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너 그따위 말버릇 못 고쳐?”
“위대하신 윤성일 씨가 누구하고 사고를 낸 줄 알아?”
여전히 기세등등한 전세희의 말이 이어졌고 강희나는 숨을 죽였다.
“여자 하나가 옆자리에 타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사망이야. 지금 시체는 원주에 있어.”
“....”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또 여자 꼬여서 술 마시고 강릉으로 달리다가 사고가 난 거라구.”
“지금 중앙병원으로 오는 중이야?”
전세희의 말을 자른 강희나가 묻더니 거칠게 통화를 끊었다.
아직도 전원이 꺼져 있었으므로 김가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전 8시 50분, 집 안에는 김가영 혼자뿐이다. 어머니는 빌딩 청소로, 김윤영은 학교에 갔기 때문이다.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던 김가영이 메시지 창을 펼쳤다. 곧 윤성일의 어젯밤 메시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도 피곤해서 자고 있었거든. 그래서 지금 깨어나서 읽고 문자 보낸다.”
그 밑에 또 있다.
“자고 있을 것 같아서 문자 보내. 니 전화 못 받아서 미안.”
11시 30분, 11시 28분이다.
“지금도 자나?”
혼잣소리로 말한 김가영이 문자 버튼을 눌렀다. 윤성일에게 문자를 보내려는 것이다. 전원을 켜면 바로 읽겠지.
오전 11시 반, 중앙병원 특실은 대형 의료장비로 가득차 있다. 의사 대여섯 명과 간호사 칠팔 명이 지금 윤성일의 몸을 병상에 올려놓고 수술준비를 하는 중이다. 곧 이 대부대가 14층 수술실로 내려가려는 것이다. 병상 주위에는 가족들도 몰려서 있어서 1백 평 가까운 특실도 좁게 보인다. 아버지 윤정수가 다가와 섰으므로 윤성일은 시선만 주었다.
“걱정 말고 수술 받아라.”
윤정수는 조금 전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윤성일에게 처음 말하는 셈이다. 윤정수의 시선을 받은 윤성일의 눈썹이 조금 흔들렸다.
“아버지.”
그러나 표정 없는 얼굴로 윤성일이 그렇게 부른 순간이다. 옆에 서있던 오명화는 윤정수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뱉어진 말은 냉담했다.
“나쁜 놈 같으니.”
중앙병원의 윤성일 일행 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인간을 꼽으라면 박기춘이다. 그러나 박기춘은 경찰 측에서 보았을 때는 가장 중요한 증인이어서 원주에서 중앙병원으로 옮겨올 때도 원주 형사가 둘이나 따라붙었다.
“이것 봐. 그 최희명이라는 여자. 만난지 얼마 안 된단 말이지? 틀림없어?”
복도에 선 형사 하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묻자 박기춘이 눈을 치켜떴다.
“제 파트너가 증언 했잖아요? 왜 자꾸 물어보시는 겁니까?”
“이봐, 자네도 생각 좀 해봐라.”
다른 형사가 바짝 다가붙더니 지그시 박기춘을 보았다.
“같이 타고 가다가 죽었는데. 여자 쪽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겠느냔 말야. 더구나 윤성일이가 이런 억만장자 자식이란 걸 알면 말야.”
“억만장자 할애비라도 잘 안될 걸요?”
분이 난 박기춘이 형사들을 노려보았다.
“성일이 잘못입니까? 졸던 트럭 운전사 놈이 받은 거 아닙니까? 돈 좀 있다고 다 덤탱이 쓰는 겁니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사들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우들이다. 둘은 제각기 외면했다.
첫댓글 즐감요
감사합니다
굿..즐감,,
^^
즐감요~
감사히 잘봤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
감사~
덤태기,,,
어떻게 수습이 될까
잘읽었습니다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