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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3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호세 14,2-10
복 음 : 마태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항구한 기다림의 인내가 답이다
-인내의 믿음과 희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요즘도 계속 피고 지는 꽃들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오랜 전 써놓은 자작시입니다.
-“꽃 같은 만남보다 더 좋은 만남 있으랴
꼬박 일년 기다려 피어 난 꽃이다
꼭 일 년만의 만남이다
능소화, 백합,--- 모든 꽃이 그렇다
꽃 같은 반가운 만남 되려면 일 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7
항구한 기다림의 인내가 답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구원의 승리입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희망, 인내의 사랑입니다.
인내의 뿌리에는 신망애, 믿음, 희망,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지혜이자 믿음입니다.
봄꽃이 폈다하여 먹는 열매가 아니라 가을의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익어 따 먹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들의 정주 서원 역시 항구한 인내의 믿음을 뜻합니다.
은총의 깨달음 역시 부단한 인내의 열매입니다.
며칠 전 읽은 분도회 어느 고승과의 마지막 인터뷰 내용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혹시 당신은 베네딕도 규칙에서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지,
혹시 모토로 삼고 있는 구절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성규72,5),
바로 이 구절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이래야 평화 공존의 공동생활입니다.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했지 교정하라 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 스스로 깨달아 개선할 때까지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이 믿음이자 지혜입니다.
참으로 넉넉하고 헐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끝가지 인내하며 기다리면 언젠가 때가 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아니 문제의 해결解決이기 보다는 문제의 해소解消입니다.
무엇이든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지극히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필수입니다.
고백성사 때 용서가 안된다는 점을 호소할 때는 다음과 같은 충고도 드립니다.
“우선 용서하려는 지향으로 충분합니다.
시험 볼 때도 어려운 문제는 제쳐놓고 쉬운 문제부터 풀어가지 않습니까?
우선 쉬운 것부터 용서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면 언젠가 때가 되면
힘든 문제도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요셉수도원 초창기 분원장 직을 맡았던 선배 수도형제와 주고받은 문답도 생각납니다.
-“수사님은 수도생활에서 어느 덕이 가장 필요하다 생각하십니까?”
제가 ‘사랑’이라 말하자 선배 수도형제는 ‘인내’라 대답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항구한 인내가 답입니다.
주님은 온갖 힘든 상황 중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구절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ㄴ).
참으로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을 지닌 자에게 주님은 슬기로움과 순박함의 은총도 주시어,
이리 떼 세상 가운데서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럼으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들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슬기로움과 순박함은 하나입니다.
실로 초연한 믿음의 순박한 무사無邪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슬기로움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하느님께서는 때에 맞게 적절히 말함으로 위기를 통과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니 영원토록 하느님 아버지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막연한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라 적극적인 인내에 희망은 필수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지극한 인내의 믿음도 가능합니다. 다음 시편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시편131,3).
바로 제1독서 희망의 예언자 호세아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해피엔드로 끝나는 호세아서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호세아의 감동적인 강론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부단한 회개로 당신께 돌아 온 인내의 믿음을 지닌
겸손한 자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내가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말씀이 시처럼 참 아름답습니다. 희망뿐 아니라 사랑의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자 시인인 호세아입니다.
항구한 인내의 믿음이 얼마나 내적으로 역동적인지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내적 회개와 겸손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둔 슬기롭고 순박한 영혼들만이
바로 지극한 인내의 믿음을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지닌 이들이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의인들입니다.
호세아의 결론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인내의 믿음을 지닌 지혜롭고 분별 있는 의인들만이 주님의 올곧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희망을 둔 우리 모두에게 항구한 인내의 믿음과 더불어
슬기롭고 순박한 마음을 선물하시어 주님의 올곧은 길을 잘 걸어 가게 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많은 국내의 문제들과 국제 문제들이 있습니다.
종교, 경제, 인권, 평화의 문제뿐만 아니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을 갖는 것
역시 이 세상 안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정치를 한다는 정치인들이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구내식당의 식사 메뉴를 가지고 서로 싸운다면 어떨까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는다면서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들 개개인을 보면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일에 참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집에서 다투었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반찬투정으로 싸우는 경우도 참 많다고 하더군요.
옷 문제, 청소 문제 등등의 별 것도 아닌 문제들 안에서 생기는 갈등으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라는 말도 서슴지 않게 말하기도 합니다.
크고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우리는 작은 것에 연연하고 걱정하면서 쓸데없는 힘을 쏟고 있습니다.
넓은 마음, 그리고 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 시선을 얻기 위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나오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갈등과 다툼을 줄여나가면서 아픔과 상처를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제자들이지요.
그런데 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니 너무나 걱정이 많아 보였나 봅니다.
하긴 이 제자들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언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세상의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여기에 주님께 대한 굳고 완벽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부족함 그 자체였고 제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불안의 마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자신의 부족함은 사실 주님 앞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우리들의 부족함을 거뜬하게 채우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신경을 쓰고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걱정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사랑을 전하면 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계속됩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걱정하는 우리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한탄을 하고 힘들어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저 믿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주님의 크심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 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에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 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 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 12)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러시아 월드컵을 보면서 늦게 잠이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주로 생방송을 보지 않고 하이라이트를 보는 편입니다.
주로 골을 넣는 장면을 보여 주기도 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늦은 시간이라도 생방송으로 볼 것입니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공부하기보다는 요점정리가 된 것들을 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절약되기도 하고, 다른 것들에 시간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볼 것입니다.
그래야만 전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영광의 모습인 예수님을 제단에 모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의 예수님을 제단에 모실까요?
그 질문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적대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인간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은 요점정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은 죽는 고통을 겪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만 아이는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가는 길에 고통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때로 박해와 죽음도 있을 것이다.
가족과 헤어질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결혼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해도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이제 배우자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을 구해도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승진도 해야 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야 하고, 주어지는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은 계속해서 급여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어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는 가정의 희망이고, 미래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오직 하느님께 의탁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참된 행복에 이르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슴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몰래 저에게 지혜를 주시나이다.
우슬초로 정화수를 뿌리소서. 제가 깨끗하여 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다.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이제 다음 달이면 교구의 인사이동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신부님이 새로운 곳을 향해서 떠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박해의 시기를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떠나야 하는 곳에서는 박수를 치면서 잘 가시라고 인사를 합니다.
도착해야 하는 곳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새로이 오시는 신부님을 환영할 것입니다.
사제의 인사이동이 기쁨과 박수를 받는 축제의 자리일 수도 있지만,
사제의 인사이동은 조금은 더 절박한 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다짐으로, 주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먹이를 삼키는 뱀처럼
말씀을 받아
삼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이
벗어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바닥을 기듯이
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
회개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구멍을 빠져 나오듯
악습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허물을 벗듯
거듭 나는 것이
지혜입니다.
목숨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지혜입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듯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순박한 기도의 삶이
자연스러운 지혜입니다.
순박한
집중 사이로 기어가는
겸손한 마음이 있습니다.
기도는 슬기롭고
기도는 순박합니다.
제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
‘어바웃 타임’(2013)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하는가를 그려낸 영화입니다.
‘팀’은 성인이 되는 날 아버지 ‘빌’로부터 그 집안은
대대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말해줍니다.
실제로 그 방법대로 해 보니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이후로 팀은 실수하거나 놓친 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실수를 바로잡고
사랑하는 여인과도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릴 수는 없습니다.
팀이 과거로 돌아가 남의 여자를 가로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면서 시간을 되돌려 무언가를 얻게 되면 대신 잃게 되는 것도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건, 저렇게 하건 시간이 지나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것을 깨달아갈 때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깨달은 시간을 돌리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일상을 한 번 더 살아보는 것입니다.
팀은 변호사인데 재판이 있는 날은 긴장하여 출근하고
재판에 간신히 이겨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집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루를 한 번 더 살아보니 처음 살 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건을 살 때 친절하게 인사하는 점원의 얼굴에 자신도 미소가 띄워지고
법원 건물이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몰랐다며 감탄해하고 재판 때에도 동료와 장난을 칠 정도입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돌아오니 아내까지도 고생한 남편을 기쁘게 맞아줍니다.
같은 하루인데도 마음가짐에 따라 피곤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깨닫습니다. 시간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매 순간을 이미 살아본 것처럼 현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걱정 근심 속에 똑 같은 하루를 힘들게 살지만
어떤 사람은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현재를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시간여행으로 얻은 교훈은 어차피 내가 노력해봐야 바뀌는 게 없기 때문에
현재를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지배해보고 나서 깨닫는 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예고하십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재판정에 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이란 그냥 현재를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받을 박해를 피하려고도 하지 말고 어차피 주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
대신 말해 줄 것이니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담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옷매무새부터 시작하여 온갖 잡다한 것에 신경을 쓰고
만나서는 끊임없이 무슨 말로 이어가야하나 부담을 갖습니다.
만남이 끝나고 나면 실제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처럼 허무함을 느낍니다.
박해가 오면 받고 할 말은 주님이 해 주실 테니 아무 생각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이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내가 해서 더 잘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고 그 결과는 그것이 어떻든 받아들이기만 할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다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안 좋은 일은 내가 현재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자가 큰 스님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도 없자 스님에게 따졌습니다.
스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미 다 알려주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따지냐고 말합니다.
밥 차려주면 먹어주었고 인사하면 받아주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그때 동자스님이 골똘한 생각에 빠지자 주지스님은 크게 노하며,
“이놈아, 생각을 하면 어떡해. 그럼 다 망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동자는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 빠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불법(佛法)이고 도(道)라는 것을.
마찬가지입니다. 걱정하고 계획하는 것은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놈이 좋은 결과를 내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 하루를 망치게 합니다.
생각을 하지 말고 주님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참다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