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며 사실을 전달하는 매개이다. 인간은 사고를 바탕으로 언어를 창조하고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며, 나아가 언어의 힘을 빌려 사고를 발전시킨다고 한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라고 일컫는 성경도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되는 걸 보면 언어란 가히 창조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언어, 곧 말이 없다면 무엇으로 생각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며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실존하더라도 부르는 이름이 없으면 그것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나아가 그 사물, 현상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김춘수 님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했다. 의미 없는 몸짓이던 ‘그것’,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그’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되고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너’가 되어 나에게로 온다. 말의 힘이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 혜강(惠崗) 최한기는 『기측체의』에서 사물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체 기관을 비유로 들어 설명했다. 우리가 눈을 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해서 눈으로 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귀를 입이라 부른다고 해서 귀로 밥을 먹고 말을 하지는 않는다. 아예 눈, 귀, 입이라는 이름이 없다고 해도 그 기관의 기능과 작용이 달라질 건 없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고 분명하게 정의한 다음에는 그 기능과 역할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고 한 차원 높은 운용이 가능해진다고 혜강은 설명하고 있다. 역시 말의 힘이다.
그런데 말에는 이런 긍정적인 힘만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을 무기력 상태에 빠뜨리는 부정적인 힘도 있다. 말은 곧잘 진실을 은폐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수단이 되곤 한다. 아침 신문을 펴들 때마다 그날의 핫이슈가 된 사건들에 대한 수많은 말,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사건의 진위를 두고 벌이는 설전을 보면서 말이란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이 ‘꽃’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을 두고 다른 사람은 ‘꽃을 좀먹는 벌레’라고 반박하며,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는 증거를 내민다. 똑 같은 증거가 정반대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데 그들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희한하게도 양쪽의 주장이 모두 그럴싸하게 들리곤 한다. 묘한 건 어느 쪽이든 한쪽의 말만 들으면 그 말이 옳은 것 같은데 양쪽의 말을 다 듣고 나면 양쪽 모두를 믿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사실과 진실은 말 저 너머로 사라지고 남는 건 무력감과 불신뿐이다.
이럴 때 영민한 사람은 혜강이 말하는 ‘추측’을 한다. 많은 말 중에 정확히 확인된 말, 이치에 맞는 말을 가려내어 그것을 토대로 추론[推]하고 사고력을 최대한 발휘해 말 그 너머에 있는 사실과 진실을 헤아려[測] 낸다. 아니, 헤아려 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사실이며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헤아려 낸 그 결론을 둘러싸고 다시 진위를 다투는 설전이 반복되곤 한다.
자연과학에서는 이 ‘추측’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떨어지는 사과 한 알을 보고 만물에 작용하는 인력을 알아낸 뉴턴의 발견이 바로 이 추측의 빛나는 결과이다. 그러나 사회 사건에서는 추측이 필요한 말이 많아지면 ‘꽃’은 ‘벌레’로 왜곡되고 혀끝에서 전쟁[舌戰]이 생겨난다. 반대로 ‘꽃’이라는 이름을 듣고 곧이곧대로 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많아진다면 혀끝에서 꽃[舌花]이 필 것이다. 설전이 종식되고 설화가 피는 세상,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