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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42. [역경의 열매] 조요셉 (1-15) ‘통일 맞이’ 탈북민 선교 위해 54세에 신학대
1995년 상담 부탁에 탈북민 첫 대면… 北선교 소명 깨닫고 물댄동산교회 개척
북한선교전략학교 교장인 조요셉 서울 물댄동산교회 목사는 북한선교 사역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조 목사가 지도에서 평양을 가리키며 북한선교의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경기도 군포 엘림직업훈련학교에 다니는 탈북민들을 관리하는 게 너무 힘드네요. 박사님께서 공산주의를 연구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분들을 좀 상담해주시겠어요?”
1995년 10월 경찰대학 연구관으로 일했던 나는 경기도 군포경찰서에서 일하는 한 형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형사는 탈북민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고 바로 군포경찰서로 달려갔는데 처음으로 탈북민을 봤다. 이 한 통의 전화가 내 인생을 바꿀 줄 몰랐다.
나는 평소 주일에 출석하던 경기도 안양시 새중앙교회로 그들을 인도했다. 교회에서 탈북민을 섬기는 ‘북한선교회’를 만드는 등 북한선교 사역에 참여하면서 탈북민과 교제했다. 2001년 4월 캐나다에서 북한연구학교(North Korea Study School)를 운영하는 한국예수전도단(YWAM) 설립자 오대원(David E Ross) 목사님으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았다. 강의를 하기 위해 캐나다로 가는데 비행기 안에서 북한선교에 대한 깊은 감동이 밀려와 이에 헌신하기로 순종했다. 나는 캐나다에 다녀온 후 그해 12월 예수전도단 소속 기관인 북한선교연구원을 설립했다. 북한선교연구원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북한선교 전문가와 탈북민을 만나고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활동을 했다. 본격적인 북한선교가 시작된 셈이다.
하나님은 북한선교를 통해 내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길까지 열어주셨다. 나는 목회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54세였던 2006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많은 분들의 기도와 지원으로 2007년 7월 17일 탈북민을 섬기며 통일을 준비하는 ‘물댄동산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물댄동산교회에서는 탈북민과 남한 청년들이 함께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또 북한선교전략학교 교장으로서 북한선교에 꿈을 품은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통일을 준비하고 있다.
20년 동안 수많은 탈북민을 만나면서 그들의 아픈 얘기를 들으며 함께 많이 울었다. 힘든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북한과 아무 연고도 없는 내가 왜 이 사역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로 물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백성인 고아와 과부 등을 거둬줘 너무 고맙다”고 위로해주셨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탈북민들이 복음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탈북민 사역은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이었다. 예수가 내 삶의 주인이 되니 그들을 넉넉하게 품고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탈북민 사역이 녹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넘지 못할 사역은 아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북한 사역을 위해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정리=김아영 기자 cello08@kmib.co.kr
* [역경의 열매] 조요셉 (1) ‘통일 맞이’ 탈북민 선교 위해 54세에 신학대
* [역경의 열매] 조요셉 (2) 유년의 거짓 메시지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
* [역경의 열매] 조요셉 (3) 초등학교 2년 때 콜레라… 하나님 은혜로 살아나
* [역경의 열매] 조요셉 (4) 막노동으로 학원비 벌어 재수… 고대 중문과 합격
* [역경의 열매] 조요셉 (5) 잦은 신앙 갈등으로 한 번의 이별, 그리고 결혼
* [역경의 열매] 조요셉 (6) 미래 꿈꾸며 직장 내려놓고 정신문화연구원 입학
* [역경의 열매] 조요셉 (7) "탈북민 가르치려 말고 그들로부터 배워라"
* [역경의 열매] 조요셉 (8) 북송·인신매매… 위기의 탈북 동포 위해 기도를
* [역경의 열매] 조요셉 (9) 황장엽 선생에게 "예수 믿어야 천국 갑니다"
* [역경의 열매] 조요셉 (10) 뜻하지 않은 목사의 길… 버거웠던 신학 공부
* [역경의 열매] 조요셉 (11) 선교사 꿈꾸던 내게 "목회를 하라" 기도 응답이
* [역경의 열매] 조요셉 (12) "예배 처소 주세요" 기도에 소망교회서 3억원
* [역경의 열매] 조요셉 (13) 성도 90%가 청년… 모든 난관 '오직 기도'로 풀어
* [역경의 열매] 조요셉 (14) 예수 안에서 남북 형제들이 이룬 '믿음 공동체'
* [역경의 열매] 조요셉 (15·끝) "주님, 내 삶·통일 주인 되심에 감사드립니다"
◇약력=1953년 경남 함안 출생, 고려대 중문과 졸업, 한국학대학원 정치교육 석·박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 연구부장 역임, 북한선교전략학교 교장, ㈔새일아카데미 이사장, 서울 물댄동산교회 담임목사
***[역경의 열매] 조요셉 (2) 유년의 거짓 메시지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
교회도 없는 시골 소작농 장남으로 출생 가난 속에도 가족들의 사랑 받으며 성장
조요셉 목사(앞줄 왼쪽)는 가난한 환경이었지만 가족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나는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경남 함안군 산인면이란 작은 동네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남인 아버지는 13세부터 동생 세 명과 할머니를 부양하셨다. 아버지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함경북도 중강진과 중국 만주까지 올라가셨다. 그곳에서 아버지 가족이 너무 궁핍하게 사는 것을 본 이웃 사람이 보다 못해 아버지에게 아이가 없는 일본인에게 막내 삼촌을 양자로 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혈육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 거절하셨다. 막내 삼촌은 지금도 그것에 대해 아버지께 고마워하신다.
아버지는 중강진과 만주로 이주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결국 타향살이를 끝내고 귀향하셨다. 그리고 6·25전쟁이 끝날 무렵 중매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해 나를 낳으셨다. 나는 한동안 아기가 없던 가정에 태어나 할머니와 삼촌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릴 적 동네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서 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했다. 방과 부엌이 한 칸씩 있는 좁은 초가집에서 할머니와 세 명의 삼촌, 나, 부모님 모두 일곱 식구가 살았다. 부모님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자로 나중에 동네 야학을 통해 겨우 한글을 배우셨다.
우리 소유의 땅이 없었던 부모님은 소작농을 하시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보리밥을 먹었다. 쌀밥은 명절이나 제삿날에나 먹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보리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 밖에서 놀다가 집에 오면 먹을 것이 없어 마루 선반에 얹어 놓은 보리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태어난 곳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가족 중 신앙을 가진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특히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과 손주들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셨다. 할머니는 동네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빌어주시던 반무당과 같은 분이셨다.
그런데 어느 날 자녀가 없었던 한 친척이 울산에 사는 어느 청년을 양자로 입양했다. 나중에 그분이 기독교인으로 알려지자 집안에서 '예수쟁이가 우리 집안에 들어왔다'며 난리가 났다. 당시 우리는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실제 예수쟁이가 양자로 들어왔으니 큰일 났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어릴 적부터 들었던 '예수 믿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거짓 메시지가 나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나는 아내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던 20대까지 아예 예수를 믿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우리 집이 이미 완전히 망해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었는데 말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는 고향에서 친구들과 산과 들에서 마음껏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학교 가는 것을 보고 따라 가겠다고 해서 7세에 입학했다. 아버지께서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다가 미장일을 배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가족과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3) 초등학교 2년 때 콜레라… 하나님 은혜로 살아나
전염병으로 1년 휴학 사망자 줄이어… 서울 이사 후에도 교회는 엄두도 못내
서울공고 시절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조요셉 목사(뒷줄 오른쪽).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신 부모님은 판자촌에 세 들어 사셨다. 부모님은 이곳에서 막내 동생을 낳고 시골에 있던 나와 두 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이 넷이나 돼서 비좁아 이사를 가야 하는데 부산에서 방을 얻기가 힘들었다. 부모님은 부산에 온 지 몇 년이 지난 뒤 빚을 얻어 언덕 위에 있는 슬레이트집을 샀다. 부산은 원래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다. 바람이 불면 지붕이 들썩들썩하고 널빤지로 만든 담은 쓰러지곤 했다. 어머니는 늘 나와 동생들에게 “바람 안 부는 집에서 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부산에 왔다고 해서 우리 집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림살이에 더 보탬이 되고자 반찬 가게를 여셨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먹고 싶은 과자를 마음껏 먹지 못했던 나는 어느 날 카스테라가 너무 먹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 몰래 가게에서 돈을 훔쳐 그 돈으로 카스테라를 사 먹었다. 빵을 다 먹고 나자 ‘어머니한테 들키면 맞을 텐데’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결국 어머니한테 들통 나서 죽도록 맞았다. 그때 어린 마음에 ‘죄 짓고는 못 사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재일교포였던 당숙께서 고향이었던 경남 함안에 ‘동광사’라는 큰 절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그 공사를 맡으셨고 어머니는 인부들에게 밥을 해주려고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부산 삼촌 집에 있던 나는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렸다. 거의 1년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누워 지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나는 다행히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 콜레라 덕분에 초등학교 2학년 과정에 1년 더 다녔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교육을 받지 못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다며 나와 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또 집안 어른들은 평소 나에게 “용관(개명 전 이름)이가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가족은 당숙의 권유를 받아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 생활은 부산보다 더 힘들었다. 집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수도도 없었다. 시골에서 살 때처럼 호롱불을 켜야 했고 개천 옆에 있는 샘을 파서 마셔야 했다.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면 사람들이 “서울 수돗물을 먹어서 그런지 용관이의 얼굴이 희다”고 칭찬했다. 나는 대답도 못하고 그냥 웃고 넘겼던 기억이 난다.
나는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있는 문창초등학교로 전학했으나 친구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놀렸다. 그러던 와중에 초등학교를 3번이나 옮겨 공부에 대한 의욕도 상실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를 도와 논밭에서 농사를 지었다. 우리 집은 여름만 되면 집 옆 개천의 둑이 터져 물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장마철마다 어머니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쌀을 담는 부대를 얻어 터진 둑을 막아야 했다.
서울에 온 후 크리스마스 때 친구 따라 교회에 한 번 간 적이 있으나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여전히 교회에 다닐 생각을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원하는 중학교의 입학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결국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에 다녀야 했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4) 막노동으로 학원비 벌어 재수… 고대 중문과 합격
고시 공부 중 부친 교통사고로 입원… 병원서 간호사인 믿음의 아내 만나
1979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병원에서 아내인 박옥희 사모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아내와 데이트하던 시절의 사진.
부모님은 언제나 나와 동생들에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내성적이셨던 아버지와 사교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어머니는 우리에게 근면과 성실함을 삶으로 알려주셨다. 그래서 우리 가정은 가난했지만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공고에 입학했다. 집안 형편상 대학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인문계 진학을 포기했다. 서울공고에 다니면서 ‘이과’가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고려대 시험을 쳤으나 떨어져서 재수를 했다. 친구들은 대입 종합반을 다녔지만 나는 아버지를 따라 막노동을 하면서 학원비를 모으며 공부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1973년 고려대 중문과에 입학했다.
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왔으나 대학생활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나는 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또 점심 먹을 돈이 없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나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대변해주는 리더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고시공부를 하던 1979년 1월 19일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서울 종로구 혜화동 고려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수박색 스웨터를 입은 간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내 아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간호사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 몰랐다. 그녀는 지금의 아내인 박옥희다. 첫눈에 마음에 들어서 그녀가 밤에 근무할 때 커피를 한 잔 뽑아 줬다. 그랬더니 그녀는 “환자 보호자가 이렇게 하시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하루는 일부러 아내가 퇴근하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버스 정류장에 나가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갔다. 돌아오는 주말에 시간이 되면 차나 한 잔 하자며 데이트 신청을 했다.
만나기로 한 날 서울 광화문 다방에서 2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자기가 무슨 대단한 여자라고 나를 바람맞히나.’ 나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이젠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녀가 근무하는 병원에 자주 갔다. 환자 보호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아내는 고려대 1년 후배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됐다.
만난 지 몇 개월 지난 후 우리는 강화도 전등사로 놀러갔다. 가는 길에 그녀에게 결혼 배우자로 어떤 사람을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교회 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예수 믿으면 집안 망하는데 이 여자하고 결혼하면 집안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그녀에게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 데 종교가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럼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마음에 갈등이 있었지만 결혼할 생각으로 그녀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내 삶이 곤고하고 죽음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나는데, 장가갈 마음으로 교회에 나가니 목사님 말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5) 잦은 신앙 갈등으로 한 번의 이별, 그리고 결혼
실망해 사우디로 간 미래의 아내에게 ‘내가 주인 된 삶’ 깨고 청혼 편지 보내
조요셉 목사는 우여곡절 끝에 신앙을 갖게 됐고 1983년 1월 믿음 좋은 아내와 결혼했다.나와 아내는 연애시절에 툭하면 싸웠다. 4형제 중 장남이었던 나는 모든 여자가 우리 어머니 같은 줄 알았다. 외동딸이었던 아내는 모든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같은 줄 알았다. 그러니 우리는 부딪치는 게 많았다. 그때 아내는 하나님께 “이 사람이 나의 배우자가 맞습니까”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다”라는 응답을 주지 않아서 계속 만났다고 했다.
아내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나를 전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자기가 다니던 죠이선교회 선배 집으로 나를 두 번이나 데리고 갔다. 주변에서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내가 주인이 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아내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이 이동원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서울 침례교회이다. 그곳에서는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어왔다. 1980년 겨울 이동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마지막 즈음에 “오늘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분은 일어나라”고 했다. 나는 그날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갔지만 여전히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교제를 하면서도 믿음 등으로 자주 부딪쳤고 결국 1981년 봄에 헤어졌다. 나는 아내와 싸우면서 공부가 되지 않았고 아내는 변화되지 않은 나를 보고 절망감에 빠져 헤어진 것이다.
아내와 헤어진 후 나는 고시공부에 더욱 집중했다. 마침 국회에 입법고시 공고가 나서 시험을 봤는데 1차에 합격했지만 2차에서 떨어졌다. 동생들도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직업 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해 국영기업체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들어간 곳이 포항제철(포스코)이다. 합격소식을 듣고 아내를 만나러 서울 침례교회로 갔다. 그런데 교회에서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 친구에게 그녀의 소식을 물어 보니 돈을 벌기 위해 간호사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고 했다.
나는 아내 집으로 찾아가 그녀의 부모님께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모아둔 돈은 없지만 열심히 살겠다며 결혼 허락을 받았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다 잘못했으니 사우디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했다. 당시 아내는 내 편지를 받고 이전보다 신앙이 좋아진 것 같아서 다시 나와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83년 1월 8일 추운 겨울날 우리는 서울 중구 한국YWCA에서 결혼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모은 돈이 없어 경북 포항 대도동에 3만5000원으로 월세를 얻었다. 방 하나 부엌 한 칸인 작은 집이었고 살림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나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포항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정치인이 되려면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하고 바위에 올라가 하나님께 공부할 기회를 달라고 목이 쉬도록 기도했다.
83년 10월 12일 우리 집에 사랑스러운 딸 은혜가 태어났다. 은혜가 태어난 즈음 우연히 신문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학생 모집 공고를 보았다. 모든 것이 국비장학생이어서 나에게 딱 맞는 대학원이었다. 시험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시험을 봤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6) 미래 꿈꾸며 직장 내려놓고 정신문화연구원 입학
대학원서 좋은 교수·학우들과 교제… 경찰대 연구관 특채 후 박사학위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조요셉 목사(뒷줄 오른쪽). 조 목사는 이곳에서 좋은 학우들과 의미 있는 대학원 생활을 보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이번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년에 또 도전하겠다”고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산후 몸조리를 위해 친정으로 간 아내가 얼마 후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포항 집으로 내려왔다. 딸이 없던 집에서 자란 나는 은혜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포항에서 3년이 채 안 되는 직장생활을 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사표를 내려고 회사 인력관리실에 갔더니 곧 홍콩지점이 생기니 홍콩으로 보내주겠다면서 사표를 내지 말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직장에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처갓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공부를 했고 일주일에 한번 집에 왔다. 나는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해서 좋았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생활해야 했던 아내는 가정을 꾸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무뚝뚝한 나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퇴직금이 떨어질 무렵 아내는 다시 간호사 생활을 했다. 그때 우리는 서울침례교회 교육목사로 계시던 김용호 목사님이 개척한 늘푸른교회에 출석했다.
감사하게도 대학원에서 좋은 교수님과 학우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지도 교수님이셨던 박용헌 교수님은 예수를 믿지 않았으나 정말 인격이 훌륭한 분이셨다. 석사학위 논문 통과 후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서울 관악구 봉천로사거리 기사식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돈이 넉넉하지 못한 제자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기사식당으로 가신 것이다.
또 대학원 학우였던 이재석 인천대 교수, 표양호 전 청와대비서관, 신원봉 영산대 교수, 전종훈 전 중구시설관리공단 이사장, 한형조·이완우 한국학대학원 교수,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아산서원부원장 등과 더불어 재미있는 대학원 생활을 보냈다. 당시 대학원 신우회 회장을 맡아 연세대에서 파견 나오신 오인탁 교수님을 신우회 지도교수로 모시고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어 박사과정에 진학해 김태환 교수님의 배려로 1987년 충남대에 출강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나는 89년 4급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경찰대학 연구관으로 4년 동안 근무하면서 9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으면 일반 대학의 길이 열려 교수생활을 하게 될 줄 알았다. ‘일반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야 공무원 신분에서 벗어나고 정치활동의 길도 열릴 텐데….’ 나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 길이 막혀 버렸다. 이를 위해 작정기도도 많이 했지만 소용없었다.
낙담하던 차에 교회 집사님이 아내에게 문병현 장로님과 오대원 목사님이 세운 예수전도단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BEDTS)를 소개했다. 아내는 나에게 함께 훈련을 받자고 했다. 나는 “기도 응답도 안 되는데 피곤하게 무슨 교육이냐. 당신이 먼저 받고 변하면 나도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98년 혼자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 훈련을 받았다. 아내는 학교훈련을 받은 날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 아내는 너무 은혜로워서 마치 구름 위에 떠다니는 기분이라며 붙들어 달라고 했다.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얼마나 가나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아내를 관망했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7) “탈북민 가르치려 말고 그들로부터 배워라”
北선교 기도 중 하나님께서 응답 주셔 탈북민에게 마음 열고 경청하며 교제
1997년 새중앙교회 북한선교회에서 평신도 사역을 하던 시절 조요셉 목사(셋째 줄 오른쪽 열한 번째)가 탈북민과 함께 축구 경기를 한 후 찍은 모습.나는 학부 때부터 박사과정까지 중국과 관련된 공부를 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이 어떻게 공산화 되었는가’라는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중국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교회에서 중국선교 활동을 했다. 하나님이 나의 관심을 중국선교에서 북한선교로 사역의 지경을 넓혀주신 것은 1995년 8월 즈음이다. 역경의 열매 1회(5월 13일자) 때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경기도 군포경찰서에서 일하는 어떤 형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고 처음으로 두 명의 탈북민을 만났다. 두 사람이 교회에 나오게 되자 나는 교회 안에 북한선교회를 만들었다.
나는 새중앙교회에서 시작한 북한선교 사역을 통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많이 경험했다. 솔직히 북한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마음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탈북민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탈북민을 가르치지 말고 그들로부터 배우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들의 말을 경청하면서 교제를 하려고 했다. 96년 9월 교회 봉사자, 탈북민과 함께 경기도 화성에 있는 궁평리로 놀러갔다. 도착할 때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집사님 한 분이 비를 피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가게로 가서 “탈북민들과 함께 놀러왔는데 텐트를 좀 빌려도 됩니까”라고 물었다가 가게 주인으로부터 “잠수함 보낸 놈들이 무엇이 예뻐서 텐트를 빌려주냐”는 면박을 받았다.
당시 강원도 강릉에서 북한의 무장공비가 잠수함을 타고 와 좌초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탈북민들이 가게 주인의 말을 듣고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따지고 보면 탈북민들이 잠수함을 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김일성 일가가 지배하는 북한의 체제가 싫어서 남한으로 온 것이다. 탈북민이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탈북민과 함께 스포츠 교제를 하면서 더욱 친해졌다. 경기가 끝나면 남자 탈북민과 함께 사우나에 가서 목욕하고 식사도 같이 하곤 했다. 이렇게 친해지니 그들이 마음속 깊은 얘기도 털어놨다.
한 번은 새벽 1시가 넘어 한 탈북민 형제한테서 “집사님 주무세요?”라며 전화가 왔다. 그는 “지방에 안보 관련 강의를 하러 갔다가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백화점에 납품하는 횟감 두 박스를 샀어요. 집사님께 드리려고요. 교회 숙소에 냉장고가 없어 상할까봐 지금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벽 2시가 넘어서 그가 우리 집에 왔다. 그가 저녁을 안 먹었다고 해서 저녁상을 차려줬다. 그 형제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나 때문에 늦은 밤 생선 횟감을 가져왔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형제는 다른 탈북민과 달리 무엇이든지 있으면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당신도 어려운데 왜 나눠주냐”고 물으면 그 청년은 언제나 “저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줘야지요”라고 답했다. 그는 목사가 된 지금도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8) 북송·인신매매… 위기의 탈북 동포 위해 기도를
中에 팔려온 北여성 자녀 최대 6만명… 고아원 등서 인간 대접 못 받으며 성장
1999년 새중앙교회 북한선교회에서 봉사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조요셉 목사(뒷줄 왼쪽 두 번째). 조 목사는 탈북민 사역을 하면서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탈북민들을 많이 만났다.1998년 어느 날 경기도 안양 새중앙교회 북한선교회 간사인 탈북민 조철호(가명) 형제가 집으로 찾아와 “제가 큰일을 한 건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그가 탈북민 김용화(현 탈북난민인권연합회장) 형제를 일본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나는 97년 겨울 경기도 시흥에 있는 농민교육원에서 용화 형제를 처음 만났다. 그는 북한 함흥 지역에서 철도국 지도원으로 일하다가 열차 탈선 전복사고가 발생하자 총살당할 위험을 감지하고 88년 탈북을 했다. 그는 북한을 떠나 중국 각지를 떠돌다 베트남 라오스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로부터 30만원을 받아 쪽배를 산 후 95년 충남 태안군 안면도로 입국했다. 오자마자 한국 경찰서에 자수했는데 법무부에서는 당시 그가 중국공민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탈북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중국동포로 간주해 중국으로 추방하려고 했다. 용화 형제가 중국에 가면 분명 북송될 것이고 북한에서 죽는다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사정이 딱했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어 간절히 기도해줬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철호 형제에게 일본에 갈 수 있도록 보트를 하나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전남 진도 지역으로 간증집회를 간 철호 형제가 그곳에 있는 한 집사에게 부탁해 300만원을 주고 보트를 샀다. 철호 형제는 용화 형제가 무사히 일본으로 갈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하고 보냈다고 했다. 내가 철호 형제에게 “그 일은 불법이니 경찰서에 가서 자진 신고하라”고 했다.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러 왔다가 자수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철호 형제는 내 말을 듣고 순순히 전남 목포해양경찰서에 가서 자수했고 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서 탄원서를 받아 얼마 안 있어 풀려났다.
일본으로 보트를 타고 나간 용화 형제는 일본 나가사키현 오오무라시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보석으로 가석방된 후 2001년 일본 천주교 단체와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재입국 후 자기와 같은 탈북민을 구출하기 위해 탈북난민인권연합을 만들어 6000명이 넘은 탈북민을 중국 등에서 데리고 왔다. 탈북민은 이처럼 한국에 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눈물 없이 듣기 힘든 사연이 많다.
현재 물댄동산교회 교인인 황선미(가명) 자매는 아버지가 일본인, 어머니는 북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 지인이 선미 자매를 비롯해 3남매를 중국 고아원에 보냈다. 선미 자매는 형제들과 중국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그곳에는 중국에 팔려온 북한 여성의 아이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선미는 지난해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자기가 있었던 고아원에 간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헌금을 해 선미 자매편으로 보냈다. 선미 자매는 교회에서 준 돈으로 운동화를 사서 중국에 있는 고아원 동생들에게 나눠주니 그들이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언니 언제 또 오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내년에 오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중국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으로 팔려온 북한 여성과 중국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무려 2만∼6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조선의 딸들이 단지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왜 돈 몇 푼에 팔려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딸들이 이러한 고초를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또 그들의 자녀들이 국적 없는 난민이 되는 것도 너무 안타까운 비극이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9) 황장엽 선생에게 “예수 믿어야 천국 갑니다”
“안 믿으면 김정일과 함께 지옥에” 내 말 듣고 황 선생 표정 심각해져
2001년 12월 북한선교연구원 창립예배 때 봉사자들과 함께 한 조요셉 목사(뒷줄 왼쪽 네 번째).아내는 예수전도단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BEDTS)에 참여하면서 많이 변화됐다. 나와 아이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나는 1999년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 분당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열심히 훈련받았다. 그해 10월 말 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이곳에서 간사로 섬겼다. 나는 이곳에서 배운 것을 직장 동료들과 나눴다. 또 지인들에게 알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놀라운 삶의 변화를 체험했다.
2000년 한국예수전도단(YWAM) 설립자 오대원(David E Ross) 목사님이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 분당학교에 강의하러 오셨다. 나는 당시 학회에서 발표한 ‘탈북자들의 남한사회 부적응의 원인과 대책’이라는 논문을 오 목사님께 드렸다. 논문을 보신 오 목사님이 내게 “내년에 강의하러 오세요”라고 말씀하셨다. 2001년 4월 오 목사님은 캐나다 오카나간에서 하는 북한연구학교(NKSS) 강사로 나를 초청하셨다. 나는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북한선교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해 12월 오 목사님과 상의해 예수전도단 소속기관으로 ‘북한선교연구원’을 만들었다. 부원장을 맡은 나는 격주로 북한 전문가들과 탈북민을 초청해 강의를 들었다. 1년에 한 번씩 북한선교에 대한 세미나도 열었다.
우리 부부는 2000년부터 서울 온누리교회로 출석했다. 2001년 10월 오 목사님의 아내인 엘렌 사모님, 하용조(2011년 별세)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식사 자리에서 탈북자동지회 홍순경(전 북한외교관) 회장과 주선애 교수를 만났다. 식사를 계기로 친분을 쌓게 돼 매주 홍 회장, 주 교수와 교제를 했다.
그 즈음 주 교수를 따라 탈북자동지회관에 갔다가 황장엽(2010년 별세) 선생을 만났다. 한 번은 주 교수가 황 선생께 “황 선생님 예수 믿어야 천국에 가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김정일과 함께 (지옥에) 있어야 됩니다”라고 전도했다. 그 말을 듣고 황 선생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을 봤다. 어느 날 하 목사님과 홍 회장, 황 선생, 주 교수와 함께 서울 남한산성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하 목사님께 “황 선생님을 전주대학으로 모셔 전주대학을 북한선교 특화대학으로 만들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하 목사님과 황 선생은 즉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2003년 황 선생은 전주대 석좌교수로 가셨다. 그는 구소련 등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보고 곧 북한이 무너질 것으로 판단해 남한으로 오셨다. 안타깝게도 그 가족들과 친지들은 모두 숙청당했다. 우리 마음도 이렇게 아픈데 본인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지 짐작이 간다.
2002년 여름 북한을 약 60차례 넘나들면서 고아원 등을 섬겼던 킨슬러 사모님(한국명 신영순)이 마동혁(가명) 김광호(가명) 등 탈북민 몇 명을 데리고 온누리교회로 오셨다. 이들과 주 교수, 홍 회장 부부와 함께 하 목사님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우리는 2003년 6월 29일 하나공동체를 세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디를 가든지 북한선교로 이끌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탈북민 사역과 북한선교가 나의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10) 뜻하지 않은 목사의 길… 버거웠던 신학 공부
박사학위 특별전형으로 신대원 입학… 히브리어 어려워 시험보면 백지 제출
2008년 횃불트리니트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조요셉 목사(앞줄 오른쪽 두 번째).나는 직장에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라는 별명을 가졌다. 어느 날 경찰청 박모 국장 초청으로 회식을 했다. 박 국장이 폭탄주를 돌리다가 나에게 잔을 주려고 하는데 직장 상사가 “박 국장, 그 사람은 목사야”라고 말했다. 폭탄주를 돌리던 박 국장이 그 말을 듣고 “차마 목사한테 폭탄주를 줄 수 없지”하고 넘어갔다. 박 국장이 회식이 끝난 후 헤어지면서 나에게 “정말 목사입니까”라고 물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간혹 식당에 가면 식당 직원이 나에게 “목사님이죠”라고 묻곤 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처음 온 사람이 나에게 “목사님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한 말을 여기저기서 들을 때마다 나는 ‘혹시 목사가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안 좋았다. 성직자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데 나처럼 모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목사가 되나 걱정이 앞섰다. 또 목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정치인이 되어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데 목사라니!’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목회자의 길을 가도록 하셨다. 온누리교회에서 탈북민 사역을 하던 하나공동체가 한창 잘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 내가 그 교회를 떠나게 하셨다. 그때 마음이 무척 힘들었다. 그즈음 주위 분들은 나에게 신학공부를 권면했다. 일반대학 교수로 가는 길도 막히고 탈북민 사역도 어렵던 차에 나는 신학을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5년 가을 북한연구학교(NKSS) 강의를 하러 미국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만약 미국에 있을 때 누가 나를 ‘목사’라고 부르면 하나님 뜻으로 알고 신학교에 가겠습니다.” 시애틀에서 강의를 마치고 오대원 목사님께 고민을 털어놨다.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물었다. 오 목사님은 나에게 “신학을 배우면 오히려 신앙심이 약해진다”며 반대하셨다. 나는 속으로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시애틀에서 강의가 끝나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북한중보학교로 강의를 하러 갔다. 강의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는데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형제 두 분이 와서 나에게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니 하나님은 내가 절대로 받을 수 없는 돈 300만원을 강권적으로 받게 하셨다. 신학대학원 입학금이었다. 하나님께서 신학을 하라는 사인을 여러 가지로 보여주신 것이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왜 접니까?”라고 외쳤으나 하나님은 내 기도에 침묵하셨다.
하나님 뜻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어 간 곳이 횃불트리니트신학대학원대학교(Torch Trinity Graduate University)였다. 2006년 박사학위 소지자로서 특별전형으로 입학했다. 신대원에 온 다른 학생들은 본인이 원해서 왔기 때문에 재미있게 공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 온 곳이었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반대학 강의도 나가고 신대원 수업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특히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수업이었다. 50대 중반인 나이에 외국어를 배우다 보니 도무지 외워지지 않았다. 히브리어 쪽지 시험에 몇 번이나 백지를 낸 기억이 난다. 내 인생에서 시험지를 백지를 낸 것은 신대원 다닐 때가 유일했다. 나는 이렇게 원하지 않은 신학 공부를 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11) 선교사 꿈꾸던 내게 “목회를 하라” 기도 응답이
‘물댄동산교회’ 창립 후 목회자 공석… 탈북 청년들 “전도사님이 직접 사역을”
조요셉 목사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2006년 물댄동산교회를 개척했다. 2007년 물댄동산교회 창립예배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조요셉 목사(왼쪽 다섯 번째).신대원에 입학하기 전부터 평신도 사역으로 북한선교를 해왔던 나는 횃불트리니트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입학한 후 ‘선교전공’을 공부했다. 선교사는 되어도 목회자가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 방향을 선교전공으로 정한 것이다.
그즈음 나는 출석할 교회를 찾다가 기도 중에 서울 양천구 평화통일교회(현재 새터교회)로 가라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었다. 평화통일교회는 감신대를 졸업한 탈북민 출신 강철호 목사(당시 전도사)가 세운 교회로, 성도의 대부분이 탈북민 출신이었다. 탈북민 형편상 교회 재정이 어려웠고 목회자 사례비를 제대로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2006년 7월 북한선교연구원에 강의하러 온 임헌만 교수(현 백석대 교수)가 강의 말미에 교수 사역보다 목회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교수님이 목회를 하시면 나도 동참하겠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임 교수는 출석교회를 찾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둘 다 건물을 얻을 돈이 없었다. 두 사람이 저축한 것을 다 모았더니 420만원이 나왔다. 마침 최경환 박사의 소개로 예수전도단 독수리예수제자훈련학교(BEDTS) 분당학교 최인기 간사를 소개받아 분당에 있는 그분의 오피스텔을 빌렸다. 2006년 9월 말 두 부부가 모여 예배를 드렸다. 내가 이사야 58장 11∼12절 말씀에 근거하여 ‘물댄동산교회’로 교회 이름을 지었다. 그해 12월 중순 우리는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님의 배려로 하이패밀리 빌딩 지하로 교회를 옮겼다. 아무런 보증금이나 월세도 내지 않고 그곳에서 6개월 동안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2007년 5월 임 교수가 나에게 인천에서 장인이 시무하는 교회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임 교수를 극구 말렸으나 임 교수가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임 교수가 물댄동산교회에서 시무할 수 있는 목회자들을 알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내가 교회로 데리고 온 탈북민 청년 몇 명에게 이전에 출석했던 교회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박사님이 신학생이면 전도사인데 교회에서 사역하시면 되지 왜 우리보고 돌아가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듣고 보니 말이 되는 얘기였으나 나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목사가 아닌 선교사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서울 청계산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했다. 기도를 하다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라는 말씀을 응답으로 받았다. 목회자의 길을 이리저리 피하던 나에게 하나님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교회를 개척하게 하신 것이다.
2007년 7월 17일 한국예수전도단(YWAM) 설립자 오대원 목사,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상임위원장 이상숙 권사, 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이정숙 학장, 경찰대 교목 박성만 목사 등 많은 분을 모시고 물댄동산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나는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12) “예배 처소 주세요” 기도에 소망교회서 3억원
2600여 권사들이 모은 통일 기금 사례비 안받는 내게 선뜻 기부해줘
2005년 강원도 태백 예수원에서 예수원 대표인 미국 벤토레이 신부(뒷줄 왼쪽 세 번째), 북한선교연구원 회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조요셉 목사(뒷줄 오른쪽 두 번째).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교회 개척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교회로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존심도 상했고 구걸하면서 목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교회에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최기문 장로와 임복란 권사 내외, 대학 후배인 주윤근 집사였다. 개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대학원 후배, 탈북민 등을 교회로 인도했다.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는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가 됐다. 1년이 조금 지나자 출석인원이 24명으로 증가했다.
2008년 11월 말 하이패밀리와 계약이 끝나 지하 예배실 건물을 비워줘야 했다. 2년 동안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의 배려로 예배장소를 무료로 사용했는데 돈 한 푼 없이 나가야 해 난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정이 마련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교회 청년들을 데리고 서울 청계산기도원으로 올라가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신학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시켜서 했는데 교회 장소를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교회 처소를 주시지 않으면 목회 안 할 것입니다.”
교회 장소를 비워줘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도를 할수록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느 날 청계산기도원에서 기도하는 데 예수전도단 월요중보기도학교장인 이성숙 권사가 생각났다. 즉시 이 권사에게 전화했다. “권사님 우리 교회 장소 좀 구해주세요. 교회 사정을 아시죠.” 이 권사는 “아마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며칠 뒤 이 권사로부터 “이화여대 앞에 지하 건물이 있는데 함께 가 보실래요”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 권사와 함께 그 건물을 찾아갔다. 지하 1층부터 지상 6층까지 있는 건물이었다. 지하에는 단란주점이 있었다. 건물주 김용신 집사는 은행지점장 출신으로 노후를 위해 건물을 매입했다. 지하건물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었으나 그동안 매출이 좋았던 단란주점이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 장소를 찾고 있을 그 시점에 단란주점이 나간 것이었다. 김 집사는 우리 교회가 남북한 사람들이 모여 통일을 준비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무료로 사용하라고 했다. 우리는 그동안 모아놓은 1500만원으로 술집을 교회로 만들었다. 창문도 없는 지하실이라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우리에게는 좋은 예배 처소였다.
2010년 봄 소망교회 성민숙 권사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성 권사는 나에게 “소망교회 2600명 권사들이 통일이 되면 북한에 교회를 세우려고 3억원을 모았다”면서 “통일이 언제 될지 모르고 현재 통일을 준비하는 교회에 헌금하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뒤 소망교회 권사회 회장단이었던 김양자 김주영 박정희 박정자 성민숙 권사가 경찰대학에서 근무하던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일종의 면접을 본 셈이었다.
한 달 뒤 소망교회 권사 몇 분이 성경책을 한 박스에 잔뜩 담아 교회로 방문했다. 후에 내가 북한선교 전문가이고 사역하는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일절 받지 않기 때문에 지원 교회로 선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소망교회 권사회로부터 3억원을 받았다. 내가 목회를 하기로 결심한 이후 늘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조요셉 (13) 성도 90%가 청년… 모든 난관 ‘오직 기도’로 풀어
청년 성도 절반 정도가 탈북민으로 늘 재정 부족했지만 주님이 채워주셔
올해 1월 물댄동산교회 청년들과 함께 강원도 춘천 소양강댐을 방문한 조요셉 목사(뒷줄 왼쪽 세 번째).소망교회 권사들로부터 3억원이라는 예상치 못한 큰돈을 받고 교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소망교회 권사들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말씀처럼 조용히 섬겼고 한 번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낮에 직장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가 주로 교회건물을 보러 다녔다. 아내가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들어가 교회로 사용할 만한 곳이 있냐고 물었다. 그곳에서 만난 박진신 집사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 건물로 들어오라고 추천했다. 그 교회는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목회자가 8개월 전 개척한 곳이었는데 월세가 부담돼서 건물을 비우려던 참이었다. 그 교회 목사를 만났더니 꼭 이곳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마침 건물주가 세금 관계 때문에 현금이 필요해 월세였던 건물을 전세 6억원에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세 6억원은 과중한 부담이었다. 나는 5억원 정도면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결국 전세 5억원으로 합의를 봤다. 그래도 수중에 2억원이 부족했다. 우리 교회는 교인 90% 이상이 청년들인데 어디서 2억원을 구할 것인가.
지금까지 나는 목회하면서 한 번도 사람에게 돈 때문에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오직 주님께 기도만 했다. 부족한 재정을 두고 기도하는 데 이상숙 권사가 생각났다. 주님이 이 권사에게 연락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연락해 교회 이전비용 2억원이 부족하다고 얘기했다. 얼마 뒤 이 권사와 만났다. 이 권사를 만나기 전 많은 중보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했다.
서울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이 권사를 만났는데 1억원을 주셨다. 이 권사는 돈을 얻으려는 사람이 환한 얼굴로 당당하게 오는 것을 처음 봤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 권사는 일찍부터 하던 사업을 접고 팔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북한선교에만 올인하고 있다. 북한선교를 하는 많은 단체들이 이 권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또 한 분을 잊을 수 없다. 가끔 우리 교회에 나오던 이강의 집사다. 교회 이전 소식을 듣고 딸의 축의금 전액인 3000만원을 헌금했다.
나머지 부족한 금액은 교회에서 은행 대출을 받았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오피스텔에서 시작한 교회가 창립 3년 만에 서울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전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2010년 7월 11일 교회 이전 감사예배를 드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당동으로 이사한 지 4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주님께 빚 갚아달라고 진지하게 기도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 힘으로 빚을 갚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우리 교회는 이미 문을 닫았어야 했다. 100명이 안되는 교인 중 90%가 청년이고 청년 절반가량은 북한에서 온 탈북민이다. 그러니 헌금이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부족함 없이 채워 주셨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목회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14) 예수 안에서 남북 형제들이 이룬 ‘믿음 공동체’
6·25때 적군이었던 원수의 자식들… 통일시대 준비하는 주역으로 만나
지난해 7월 교인들과 함께 전도여행의 일환으로 경기도 파주 도라전망대를 방문한 조요셉 목사(오른쪽 세 번째).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가운데 서울 사당동으로 교회를 이전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걱정하는 시대인데 우리 교회에는 남북한 청년들이 계속 왔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사야 11장 6∼8절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공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물댄동산교회에서 사역하며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이고 우리 교회에 출석 중인 탈북 청년들의 할아버지는 모두 북한 괴뢰군이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원수의 자식들이 하나가 되어 ‘예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다. 출신 지역과 학력 등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에 물들어 살던 탈북민들이 복음 때문에 변화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우리 교회에서 회복된 남북한 청년들이 통일시대를 이끌어갈 주역으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으리라 기대한다.
우리 교회에서 탈북민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최기문 장로 내외를 비롯해 많은 헌신자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서울 내수동교회 북한선교부에서 매 학기마다 장학금을 보내주며 우리 교회 탈북 청년들의 사회적응을 돕고 있다. 서울 삼일교회에서도 절기마다 쌀과 헌금을 보내준다. 나는 이래저래 사랑에 빚진 자이다.
탈북 청년들은 대학에 쉽게 입학하지만 남한 학생과의 학력 차이 때문에 중도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4년 전 탈북 대학생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새일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이 학교 설립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이성숙 권사다. 새일아카데미는 우리 교회 청년뿐 아니라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들도 참여하고 있다. 가르치는 교사는 그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다. 영어를 가르치는 김유성 교사는 현재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의 서울지국 기자이고, 생물을 가르치는 이재학 교사는 서일대 교수다. 학생들은 믿음의 교사들을 통해 신앙을 가졌고 성적도 향상됐다. 이 학교는 비브라운 코리아 김해동 대표 등 많은 분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소망교회 여전도회에서도 매월 학생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기도해주고 있다. 이분들의 헌신과 기도, 후원으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통일 일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다가오는 통일에 구체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지난해 3월 북한선교전략학교를 만들었다. 5개월 과정으로 통일 및 북한선교 전문가 30여명을 모시고 집중적인 교육을 한다. 이 학교를 위해 20여명의 예수전도단 월요중보기도학교 간사들이 중보하며 헌신하고 있다. 지난해 1기 졸업생 중 한 분이 서울대 유근배 부총장이다. 그는 부총장으로 취임한 후 탈북 대학생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있다. 학교 졸업생들이 통일 후 각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쓰임 받을 것으로 믿는다. 현재 우리 교회 성전에는 사무실도 없고 새일아카데미 사역 등을 할 수 있는 공간도 협소하다. 북한선교전략센터와 카페, 남북한 소통을 위한 문화교실 등 더 많은 사역을 할 수 있는 교회성전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미자립교회가 이런 꿈을 꾼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응답하시리라 믿는다.
***[역경의 열매] 조요셉 (15·끝) “주님, 내 삶·통일 주인 되심에 감사드립니다”
북한선교 동역자 주시는 은혜 속에 예수님 믿어 구원받는 부활신앙 체험
지난해 초 강원도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가운데)와 함께 한 조요셉 목사(오른쪽 두 번째). 조 목사는 이곳에서 부활신앙을 다시 체험하며 북한선교의 사명을 재확인했다.“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철저히 막으셨다. 하지만 북한선교의 길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형통케 하셨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다 같은 사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르심이 다르다. 요셉의 사명은 애굽에서 70명의 부족으로 민족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모세는 애굽에서 나오는 것,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입성,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라는 사명을 받았다. 분단시대에 태어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통일과 북한선교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가난하지만 마음이 넉넉한 부모님을 주셨고 고시에 낙방해 겸손을 배우게 하셨다. 그분의 인도하심으로 예수 믿는 아내를 만났고 공산주의를 연구했으며 경찰대학에 재직해 탈북민들을 만났다. 교회를 개척한 것도 모두 북한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북한사역을 하는 동역자들을 많이 만나게 하셨다. 무엇보다 영적 스승인 한국예수전도단(YWAM) 설립자 오대원 목사로부터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배웠다. 문병헌 장로와 이상숙 이성숙 성민숙 권사는 내 사역의 든든한 후원자이다. 최기문 장로 내외를 비롯해 사랑하는 물댄동산교회 식구들은 소중한 지체들이다. 부모님과 사랑하는 동생들, 아내와 아들 헌이, 딸 은혜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코너 글을 읽은 독자들은 과연 우리 집이 예수 믿고 망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예수 믿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거짓 메시지에 속아 30여년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 집은 예수 믿고 큰 복을 받았다.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에서 두 명의 박사와 목사가 나왔으니 말이다. 가장 감사한 점은 우상 섬기는 우리 집이 하나님을 믿고 모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지난해 초 25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다. 금식기도 중에 춘천한마음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곳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성로 춘천한마음교회 목사는 설교에서 마태복음 12장 39절을 인용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온 분이 예수님이며 이분이 이 땅에 남긴 것은 부활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신앙은 아직도 부활이 아닌 십자가에 머물러 있다.” 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평소 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신앙생활을 하지만 왜 변화가 없을까’에 대한 의문점을 풀 수 있었다. 그것은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가 주인 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동안 어떻게 북한에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해왔다. 폐쇄된 억압체제 속에서 살아온 북한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초대교회의 ‘부활신앙’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통일 전에는 복음으로 남과 북이 하나되는 통일을 준비하고, 통일 후에는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부활의 주님을 만난 증인으로 살 것이다. 우상 섬기던 집에서 태어나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시고 부족한 나를 주의 종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