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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죽은 나라에서는 정의나 진실에 대한 판단력도 사라지고 국민의 정체성도 사라지고 생존경쟁과 민족적 삶의 일탈만이 남게됩니다.
과거 125년간의 몽고지배와 50년간의 일제지배에 의해 우리민족의 수 많은 역사기록들과 수십만의 백성과 문화와 언어와 사상과 민족정신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서팡 여러분들의 관심과 가치관이 정치현실뿐 아니라 과거 선혈들이 남겨준 역사의식으로도 튼튼해 지기를 바랍니다.
윤봉길 (尹奉吉 ; 1908~1932.12.19)
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
농민은 못난 사람이 아니다.
못난 사람은 농민이 아니다.
못난 사람이 아닌 농민이다.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과거 4천여 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느 때에 비록 하루라도 농업을 아니하고 살아 본 적은 없었습니다. 역사의 첫머리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혀 농민의 나라인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현대를 살펴볼 때 전 조선 인구의 10분의 8이 논에 밭에 산에 나서고 있으니, 온 세계를 통틀어 본다 하더라도 우리 조선과 같이 철저한 농업국은 다시 없습니다.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 총생산 18억 원 가운데서 농산물이 13억 원을 차지하고 있어 이것 때문에 우리의 목숨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느 것 하나 농민의 손과 발이 가지 아니하고 되는 것이 없습니다. 2천5백만 인구가 논에서 밭에서 산에서 귀중한 땀을 철철 흘리면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조선에서 주인공인 농민은 이때까지 주인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까짓 농군놈들, 촌놈들이라고 학대하고 멸시함이 정말 혹독하였습니다. 온 세상이 다 농민을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여 조금도 돌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주인인 농민은 도리어 헐벗고 굶주리고 불쌍한 가난뱅이가 되었습니다. 주인이 못살면 다른 사람도 따라서 못사는 법입니다. 우리 조선에서 농민이 이처럼 가난하다는 것은 전 조선이 못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농민에게 돌려야 합니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 사람이 먹고사는 식량품을 비롯하여 의복, 주옥의 재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공업의 원료까지 하나도 농업생산에 기대지 않는 것이 없느니만큼 농민은 세상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의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은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농민의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어떤 사회나 국가나 민족이나 한 덩어리로 이루어질 때는 반드시 그 가운데에 절대 다수를 차지한 계급이 그 사회나 국가나 민족의 주춧돌이 되며 기둥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볼 때에 조선의 장래는 농민의 것이 안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농민의 손으로써 농민을 본위로 한 정치와 경제와 문학과 예술과 교육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농민독본중>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매헌(梅軒), 본명은 우의(禹儀)로 충남 예산(禮山)사람이다. 아버지는 황(璜)이고, 어머니는 김원상(金元祥)이다. 집안은 몰락양반가로 전형적인 농가였다. 1913년부터 큰아버지 경(坰)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德山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인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비운을 일제(日帝)의 식민지교육을 배척하여 느끼고 자퇴,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사설서당 오치서숙(烏致書塾)에 들어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이때부터 그의 학업은 일취월장하였고 특히 시(詩)에는 발군이었다. 1922년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했다.
1926년 오치서숙 동학들과 농촌계몽의 첫 시도로 문맹퇴치운동을 생각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이곳에서 한글·역사·산술·과학·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 〈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 있는데, 〈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 인간수업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적으로 일깨워주고 있으며, 〈농민의 앞길〉은 농민과 근로자 중심의 이상국가건설,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등 농민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1928년에는 증산운동·구매조합조직·토산품애용·부업장려·생활개선을 통해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운동단체인 부흥원을 조직했다. 또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계몽강연회와 토론회도 개최했으며,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설립해 운영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심신을 단련시켰다. 또, 대한독립군단의 상하이 의거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서 활동중이던 이흑룡(李黑龍)으로부터 국외의 독립운동전선의 형세를 전해듣는 한편,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충격을 받는다.
1929년 2월에는 부흥원 낙성식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야학아동 학예회에서 여우 같은 일본제국주의 당국을 규탄하는 풍자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여, 공연 다음날 덕산주재소에 호출당했다. 1929년 상부상조를 목표로 한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했으며, 4월 23일 자작자급으로 힘을 길러 갱생하자는 취지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발족 당시 회원은 38명이었으며, 매월 10전씩을 회비로 거두어 야학회·강연회 개최, 농가부업 장려, 소비조합 창설, 위생보건사업 추진 및 청소년체육발전 도모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棺)속에 들어가면 무소용(無所用)이다.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 였다.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 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유서 中에서>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도중 선천에서 체포되어 달포 가량 옥고를 치른 뒤 만주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의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과 함께 남만주·북만주를 돌아다니며 독립군의 근거지를 두루 살펴보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다. 이때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참담한 생활을 본 뒤 각지에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했다.
1930년 12월 칭다오[靑島]로 근거를 옮기고 다음해 여름까지 머물렀다. 낮에는 교포 세탁소의 회계원으로, 밤에는 야간노동강습회에 나가 활동을 하며 상하이로 갈 준비를 하던 중 1931년 7월 만주사변을 촉발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맞았다. 그는 이 사건이 민족차별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했으며, 여기서 민족혁명의 의기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1931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교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말총모자 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을 하는 한편,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면서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1932년 1월 8일 김구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의혈투쟁을 계획하고 임시정부의 별동대인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왕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한다. 이때 공장을 나와 공동조계 내 일본인 거리에서 야채상으로 적정(敵情)을 파악하며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던 윤봉길 의사는 그해 봄 박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교포단장(韓人僑胞團長)인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밝힌다.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그는 의거 4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단원자격으로 김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준비를 한다.
1932년 상하이 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는 등 사태가 급격하게 진전되자, 김구는 급격하게 침체에 빠진 항일투쟁의 새로운 활로를 타개하는 한편,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한국·중국 양국민의 민족감정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상하이에 있는 일제의 군기창고 폭파계획을 진행시켰는데, 이때 윤봉길 등 6명이 하역인부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상하이 병공창[上海兵工廠] 주임 김홍일(金弘壹)이 맡은 시한폭탄 제조가 지연되어 거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전(停戰)이 됨에 따라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뒤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탐지하고 폭탄투척거사를 준비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사적관 윤 의사 사적전시관
4월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고, 특히 28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곳에 머물러 준비하는 축하식장의 팻말을 보고 도륙의 대상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과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설 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파악하였다.
4월 29일 김구는 일본의 검문을 피하고자 고급 손목시계와 말쑥한 양복 차림을 하게 하고 일찍 한 교포 집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윤봉길 의사는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고 손에 들었다. 이 폭탄은 중국 상해 병공창(兵工廠)창장 송식표가 기사(技師) 왕백수(王伯修)를 시켜 비밀리에 제조한 것으로, 병공창의 병기주임(兵器主任)이었던 김홍일(金弘壹)장군의 주선으로 김구-윤봉길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새 시계를 김구 단장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투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식단(式壇)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는 일본 관민이 정연히 도열하였고, 그 앞에 일본 학생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 그 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식단 위에는 표적물인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자리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주중공사(駐中公使) 시게미쓰(重光葵)·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貞次), 주중(駐中)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민단 간부 도모노(友野盛) 등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착석해 있었다. 그는 미리 보아두었던 뒤편의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기념식의 첫 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서 두 번째 순서인 축하식 순으로 접어들어 일본 국가가 제창되었고, 그것이 거의 끝날 무렵이 되었다.
드디어 11시 40분경, 운명의 시각이 되자 그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걸매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그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가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 처의 파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였고, 제9사단장 육군총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실명하였다. 또한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이며 상해 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 간부인 도모노(友野盛)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그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피체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그해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교외에 있는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그의 순국은 그의 뜻대로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민족의 마음속에 살신구국의 높은 정신을 영원히 기리게 하였다.
'훙커우(虹口) 의거'를 앞두고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남긴
200자가량의(보물 568호) 유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하지만 윤 의사의 마지막 당부는 당시 두 아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광복 직후 해외에 유출됐다가 1970년대 초에야 국내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생가(충남 예산)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유서 中에서>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이 유서는 윤 의사가 의거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 공원을 답사한 뒤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서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흘려 쓴 필체와 고친 자국 등은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김구 선생이 보관했던 이 유서는 광복 직후 프랑스 등으로 유출됐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 중이다.
중국 상해 '홍커우' 공원
1932년 4월 29일, 일본의 천장절과 승전기념일 행사에 폭탄을 투척.
1932년 7월 일본 내무성이 작성한 '상하이 윤봉길 폭탄사건 전'에는 물통 폭탄은 성인 남성의 손바닥만한 크기로 타원형에 가죽끈이 달려 있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돼 있다. 하얀 헝겊으로 폭탄의 전체 표면을 덮어 물통과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병마개를 손으로 돌려 열고 안에 있는 끈을 잡아당겨 던지면 바로 폭발한다고 기록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윤의사는 거사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로,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32년 7월 일본 내무성 보안과가 헌병대의 조서를 바탕으로 재작성한 문서에서 훙커우 공원 사건의 배경과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의거 동기를 묻는 수사관의 질문에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 항거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고 그때야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각 민족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또 “현재의 군사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시민운동가 야마구치 다카시가 1994년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란 책에 의하면 일본군이 윤 의사를 당초 폭탄 투척 현장인 훙커우공원에서 공개 처형하려다가 '인류평화 수호를 위해 침략군을 응징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점과 국제 여론의 악화를 우려해 일본 육군 9사단 주둔지인 가나자와로 데려가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최후 순국 장면
윤봉길 의사 매장 장면
1967년 윤봉길 의사 유족들에게 전달해준 장제스 대만 전 총통의 친필
윤 의사 의거를 계기로 독립군은 당시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군대가 못한 것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 냈다."고 극찬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거사는 침체에 빠진 항일투쟁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의 독립열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으며, 임시정부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정부의 후원 아래 항일연합전선을 펼쳐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안타깝게도 매헌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엔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동상이...
기념석
25세의 나이로 이국(異國) 땅에서 순국한 그의 유해는 1946년 일본에서 박열(朴烈)·이강훈(李康勳)의 주선으로 본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46년 6월 30일 해방 후 첫 국민장이 엄수되었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소(효창공원)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저서로 시문집 〈명추 鳴椎〉·〈옥타 玉唾〉·〈기사일기 己巳日記〉·〈농민독본〉등이 있다.
회원님들 뭐 가슴 저끝에서
시리도록 울리는거 없나여!!!!
불과 25살의 나이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쳤던 의사 윤봉길.....
존경을 안할래야
안할수 없는
그.....
사나이 윤봉길...
마지막 순국장면....
울나라 최초의 국민장
대통령이 아니어도
어르신이 아니어도
국민장은 치룰수가 있었습니다.
저렇게 사는것이 장부의길 아니것습니까.....
아웅다웅......
하지마시고
내지금 비록 대리이나.
웅장한 꿈을 항상 간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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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태자님 귀한 글 감사합니다. 배움이 큽니다. 매헌 윤봉길님과 같은 의인들이 계셨기에 암흑의 세상에 광복과 대한민국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세상도 새로운 의인들을 요구하는 듯 합니다. 힘을 내어야겠습니다. 건강, 행복을 기원합니다.
이분을 생각하면..... 글로써 아웅다웅 하는 나는......항상 생각하고 새겨야 되것습니다..
좋을글 읽고 갑니다
다시한번우리는 편히살고있다는걸느낍니다..항상감사해야할것이많습니다..
덕산면 시량리 울아버지 묘에서 내려보면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보입니다.자신의 한몸을 던져 민족을 구원한 깨어있는 선각자 덕에 우리가 지금의 자유를 만끽할수 있죠.참 그리고 제목에 (부) 자가 빠진거 아닌가요?
예산군 삽교읍 제고향입니다.... 저는 고향에 갈때마다 윤봉길의사 사당에 다녀오곤하죠...덕산온천에서 온천도하고 맛난 밴댕이찌개도 먹고....암튼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한번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들을 생각하는 하루들 되시길/////
좋은 글 올려 주셔서 잘 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