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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에 투항한 왜인들 이야기(항왜에 대한 연구) 원문보기 글쓴이: 마인부우님
제1부 주제 3 임진란과 조.중 관계
한 명 기(명지대 교수)
한 명 기 (명지대 사학과)
머리말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 사이에 끼여 있다. 때문에 역사상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격변은 한반도 자체의 사건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늘 주변 국가들에게 커다란 여파를 미출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주변 국가들 내부나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격변의 여파는 또한 ‘끼여 있는’ 한반도로 밀려오곤 했다. 그와 관련하여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風臣秀吉] 가 ‘명 정복(明 征服)’을 공언하면서 한반도는 곧바로 일본의 침략 대상이 되었고, 한반도 방어를 통해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명군의 참전이 이루어지면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차원의 국제전(國際戰)이자 세계대전(世界大戰)으로 비화 되었다.
명이 대군(大軍)을 동원하여 조선에 참정, 원조했던 것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대사건이었다. 이후 조선은 명의 참전과 원조를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 [再造之恩]’로 숭앙하게 되었고, 명과 조선의 관계는 단순한 종번(宗蕃)의 단계를 넘어서는 ‘혈맹(血盟)’의 차원으로까지 인식되게 되었다. 나아가 조선후기에 이르러 창덕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고, 송시열(宋時烈) 등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이미 망해버린 명의 은혜를 추념(追念)하고자 했던 배경에도 기본적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명의 참전이 남긴 ‘은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아가 오늘날 중국이 임진왜란을 부르는 공식 명칭으로 ‘항왜원조(抗倭援朝)’를 운운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보인 존명(尊明), 존화의식(尊華意識)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조선 참전과 그들이 조선에서 보여주었던 활동은 과연 ‘재조지은’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는가? 잘 알려져 있듯이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일종의 비아냥이 터져 나오기도 했고, 명군 지휘관의 상징인 이여송의 경우 ’조선의 기맥(氣脈)을 끊기 위해 조선의 주요 산혈(山穴)에 말뚝을 박은 인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 필자는 이러한 사실 등을 염두에 두면서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조선에 참전하게 된 배경, 그들이 남긴 전황(戰況), 강화 협상에 몰입하게 된 배경, 강화 협상에 대한 조선의 반응과 협상의 파탄 과정 등을 살피고 그 과정에서 조선과 명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2)
1. 명군의 조선 참전 배경과 그 과정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 참전했다. 명은 이 ‘오랑캐끼리 벌인 전쟁‘에 왜 참전했을까? 명은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조선 조정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참전했다. 명은 ’책봉-조공 관계‘ 아래서 명의 충실한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의 위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고 보다 중요한 목적은 명 자체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동쪽 변방에 끼여 있어서 우리의 왼쪽 겨드랑이와 가깝습니다. 평양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인접하고, 진주는 직접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를 맞대고 있습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빼앗아 차지하여 요동을 엿본다면 1년도 안되어 북경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을 지켜야만 요동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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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재해. 1992 ⌜이여송 전설에 감무리된 민중의 역사인식⌟ ⌜민족설화의 논리와 의식⌝ (지식산업사)
2) 본고는 완전히 새로 쓴 논문이 아니라 필자가 이미 기존에 발표했던 글들을 중심으로, 다소의 자료들을 보충하여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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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하여 일본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명나라 인사들이 내세웠던 논지는 대개 위와 같은 것이었다.3)
명은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석강(淅江),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 동남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창궐했던 왜구(倭寇)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명 조정의 당국자들은 동방지역에 상륙한 왜구가 내륙을 가로질러 북경까지 도모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북경은 이들 지역으로부터 수천 키로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정규군이 조선을 차지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조선은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요동과 잇대어 있는 데다 조선에서 해로(海路)를 이용하면 바로 산동반도(山東半島)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요동이나 산동으로 진입할 경우, 북경이나 천진 등 명의 심장부가 바로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을 도발하면서 “조선에서 길을 빌려 요동으로 들어간다.(假道入遼)”고 공공연히 내세운 바 있었다.
명의 조선 참전은 바로 조선을 지킴으로써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에게 요동이 ‘이(齒)’라면 조선은 ‘입술(脣)’이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다. 명이 조선에 참전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순망치한론(脣亡齒寒論)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욱이 요동은 대부분이 평원지대인데 비해 조선은 산악 지역이 많아 방어에 훨씬 유리했다. 병력이 적으면 자연히 전비(戰費)의 지출 규모도 줄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한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에 은혜를 베푼 존재[施惠者]’로서 자임할 수 있고, 조선에 대해 필요한 군수물자를 공급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어차피 일본군을 막아야 할 것이라면 조선에 나아가 싸우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요컨대 명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전략적인 차원에서 조선에 참전했거니와 그 과정에서는 지형적 조건, 경제적 이해관계까지 세심하게 고려했던 것이다.4)
명군의 임진왜란 참전이 요동(遼東)을 보호하여 북경(北京)의 안전을 지켜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자국(自國)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차원에서 단행된 조치였다는 것은 1620년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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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서울, 역사비평사), 32쪽
4) 한명기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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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료 이징의(李徵儀)가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5) 나아가 조선 신료들 또한 북경(北京)에서 산해관(山海關)으로 이어지는 연산(燕山) 일대가 조선과 잇닿아 있는 현실, 조선을 보전하는 것이 명의 보전을 위해 중요한 현실 때문에 명군의 참전이 이루어졌다고 인식하고 있었다.6)
1) 조승훈(祖承訓) 원군(援軍)의 패전과 심유경(沈惟敬)의 등용
명군의 조선 참전이 자국의 불가피한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명군이 조선에 실제로 투입되기 까지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군의 침략소식이 알려진 직후 명이 처한 안팎의 상황 때문이었다. 1592년 5월,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보고 받았을 때 명 조정은 우선 자국의 해방(海防) 태세부터 강화했다. 5월 10일 신종(神宗)은 조칙(詔勅)을 내려 요동(遼東), 산동(山東) 연해지역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계요총독(薊遼總督) 건달(蹇達)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좌(遼左) 방어를 위해 보정총병(保定總兵) 예상충(倪尙忠)을 천진(天津)으로 파견했다. 일찍이 왜구(倭寇)의 극심한 발호 때문에 피해를 보았던 명의 입장에서 본토의 해방(海防)을 확실히 하는 것은 시급한 현안이었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있고 북경(北京)에서 가까운 천진(天津), 등래(登萊) 등지가 우선 점검해야 할 대상 지역으로 떠올랐다.
“생각컨대 천진(天津)과 등래(登萊) 일대는 조선과 마주보고 있어서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더욱 긴요한 곳입니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왜군이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설치된 병력을 철수하려는 논의가 있습니다. 근래 요동의 보고에 따르면 왜군의 선박은 1천이나 되고 양곡을 약탈하여 싣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산동과 내주를 창살(搶殺)하려 하여 만에 하나라도 돛을 띄워 침범해 온다면 막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죄를 장차 누구에게 물을 것입니까?”7)
이렇게 왜란 소식을 들은 직후 자국의 해방(海防)을 확보하는데 골몰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수군을 조선에 투입하지 않았다.8)
자국의 해방을 강화하는 현안과 함께 명군의 즉각적인 조선 투입을 꺼리게 만든 요인이 더 있었다. 명은 당시 내란(內亂)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명에서는 이른바 ‘보바이[발배(哱拜)]의 난’, 곧 ‘영하(寧夏)의 변(變)’이 발생하여 1592년 9월까지 이여송 등이 그것을 진압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임진왜란까지 일어나자 명에서는 두 개의 전쟁에 따른 위기의식이 고조 되었다.9)
뿐만 아니라 당시 요동을 중심으로 “조선이 일본군을 끌어들여 요동을 도모하려 한다”는 유언비어까지 창궐하여 명은 의구심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일찍이 1591년 무렵, 일본에 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 허의후(許儀後)와 송균왕(宋均旺) 등이 “조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명 공격을 채근했다”는 헛소문을 전파했던 것과 맞물려 ‘려왜공모설(麗倭共謀設)’은 명 내부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다. 명군 지휘부는 풍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선에 정탐꾼을 들여보내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10)
조선에 대한 의심이 풀리고, 조선이 원병 파견을 계속 호소했던 상황에서 일본군이 요동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이어지자 명은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요동병(遼東兵) 3천여 명을 최초로 파견했다. 하지만 조승훈 군은 일본군에 비해 병력의 수도 현저히 적었던 데다 무기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참패했다. 조승훈은 요동으로 도주하면서 패전의 책임을 조선 측에 전가했다.11) 조승훈 군의 참패는 명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명은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 그들을 제압하려면 강남(江南) 등지에서 포병(砲兵)과 화기수(火器手)를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절감했다. 그런데 문제는 강남의 포병 등을 징발하여 요동을 거쳐 조선까지 이동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결단을 내렸다. 패전 직후인 1592년 8월, 무뢰배 출신의 책사(策士) 심유경(沈惟敬)을 기용하여 그에게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직함을 주고 조선에 보내 일본군과 협상을 벌리기로 결정했다. 심유경의 측근인 심가왕(沈嘉旺)이란 자는 왜구(倭寇)에게 잡혀 갔다가 탈출한 경력이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에 대해 공(貢)을 구하는데 조선이 막고 있어서 거병(擧兵)했다“고 운운하면서 침략의 원인을 조선 측에 전가했던 경험이 있었다. 바야흐로 명 조정의 당국자들은 조승훈의 패전으로 야기된 ‘위기 상황’을 심유경을 통해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실제 심유경은 조선에 들어와 1592년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강화회담을 벌렸다. 그 결과 9월 1일부터 10월 20일까지 잠정적 휴전(休戰)을 결정하고 평양과 순안(順安)의 중간 위치한 부산원(斧山院)을 양국 군대의 경계선으로 설정했다. 이 같은 결정 이후 석성은 심유경을 조선으로 다시 들여보냈는데, 심유경은 고니시와 두 번째 협상을 벌여 기존의 휴전 기간을 1593년 1월 15일까지로 50일 연장했다.12)
석성이 심유경을 활용하여 일본군과 협상을 벌인 것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명은 휴전 기간을 통해 일본군의 요동 진입을 막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592년 8월, 명은 송응창(宋應昌)을 보계요동등처경략비위사의(保薊遼東等處經略備倭事宜)로 임명하여 조선에 파견할 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 직후 일본군이 의주를 향해 진격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석성(石星)은 자신이 요동으로 가서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과 함께 방어를 직접 책임지겠다고 상진(上秦)하고, 오유충(吳惟忠) 휘하의 남병(南兵) 등 39,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자고 건의했다.
2) 명군의 본격적인 참전과 평양전투 승리
심유경의 화평 공작을 통해 일본군을 평양에 묶어놓은 상황에서도 명이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으로 들여보내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병력을 요동으로 모으고 군수물자를 징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략(經略) 송응창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 보자.
“지금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둘 다 어렵습니다. 왜군을 정벌할(征倭) 계책을 세우려 하지만 병력은 모이지 않았고, 군수물자도 준비되지 않아 (병력을) 보내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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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인한(徐仁漢), 1987 ‘임진왜란사(壬辰倭亂史)’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8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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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왜군의 계책을 알 수 없으니 조승훈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나아가 취하는 것의 어려움입니다. 스스로 굳게 지킬(自固) 계책을 세우려 하지만 (황제의) 엄한 명령이 수차 내렸고, 조선은 급하다고 알려 왔습니다. 순식간에 명년 봄이 돼면 왜군은 장차 뜻을 얻게 되니 다시 섬 오랑캐를 이롭게 할 것입니다. (왜군이) 병력을 나누어 사방으로 나서서 혹은 요양(遼陽)을 침범하고, 혹은 천진(天津)을 침범하고, 혹은 등래(登萊)를 침범한다면 복건(福建)·광동(廣東)·석강(淅江)·직예(直隸) 또한 편안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근심거리를 기르는 것이니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이것이 나아가지 않는 것의 어려움입니다.13)
‘조선으로 즉시 나아가기도 나아가지 않기도 어려운’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서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1592년 11월, 영하의 반란을 평정했다. 이윽고 요양(遼陽)으로 달려온 이여송은 조선 사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군을 쓸어버리겠다고 장담했다.14) 1592년 12월, 이여송은 5만 1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1593년 1월 6일부터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이여송 휘하의 명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병력의 수적 우위를 확보한 위에서 불랑기포(佛狼機砲), 호준포(虎蹲砲) 멸로포(滅虜砲) 등 각종 화포(火砲)를 활용하여 평양성을 공략했다. 명군의 화력에 밀린 일본군은 조총을 쏘며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대동강을 건너 도주했다. 명군은 이 전투에서 1,200여명의 목을 베고, 전마 2,900여 필을 노획했으며 포로가 된 조선인 1,20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다.15)
평양전투 승리를 계기로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몰리던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었다. 고시니 휘하의 일본군은 서울 쪽으로 물러나고 함경도로 올라간 가또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대는 고립의 위기에 처했다. 조선 조정은 평양 승전 소식에 감격했다. 선조는 소식을 들은 직후 북경의 황궁을 향해 다섯 번 큰 절을 올렸고, 송응창의 참모인 유황상(劉黃裳)과 원황(袁黃)에게도 두 번 절했다.16) 조선 신료들은 이여송에게 ‘조선이 다시 일어서고 신민(臣民)들이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장군이 하사한 것이므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고 찬양했다.17) 일각에서는 살아 있는 이여송의 전공(戰功)을 기리는 생사당(生祠堂)을 건립하자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바야흐로 평양전투 승리를 계기로 이여송과 명군은 ’조선을 다시 살려준 재조(再造)의 은인(恩人)‘이자 ’영웅‘으로 떠올랐다.18)
평양전투 승리를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이 일본군에 대한 공격 작전을 주도하면서 조선군은 명군 지휘부에 일방적으로 휘둘리게 되었다. 평양전투 시작 직전, 유성룡(柳成龍)은 일본군의 패퇴를 예상하고 그들이 도주하는 길목에 복병을 배치하여 요격하려 시도했지만, 퇴로를 열어 주라는 명군 지휘부의 지시에 밀려 일본군을 공격할 수 없었다.19)
또 북병(北兵) 출신의 현장 지휘관인 제독 이여송과 남병(南兵) 출신의 총사령관인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경쟁의식과 알력이 빚어지면서 무고한 조선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일찍부터 명 내부에서는 이여송과 송응창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승전 직후 논공(論功) 과정에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여송이 평양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는 오로지 남병만 앞세우다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는 북병을 위에 두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인심이 어그러졌다’던가 ‘북병은 다만 성문이 열린 뒤 들어가 죽은 일본군의 목을 베었을 뿐이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었다. 남방 지휘관들은 북병이 얻었다는 일본군의 수급(首級)을 조선인의 머리라고 의구심을 표시했다.20) 급기야 평양전투가 끝난 뒤 명의 산동도어사(山東都御史) 주유한(周惟翰) 등은 이여송이 획득했다는 일본군의 수급 가운데 절반은 조선 사람의 것이고, 전투 과정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대부분 조선 사람이라고 이여송을 탄핵했다.21) 주유한의 주장을 계기로 명 조정은 ‘수급사건’의 진상을 살피기 위해 조사관들을 파견했다. 그들은 머리에 망건을 썼던 자국이 있는 조선인의 머리와 머리칼을 빡빡 밀어버린 일본군의 수급을 대조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22) 실제 명군이 일본군의 수급을 확보하여 전공(戰功)을 부풀리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수 조선인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북병(北兵) 가운데는 달자(㺚子)라 불리는 몽골, 여진 출신 병사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조선 사람들을 베어 죽이고 머리칼을 깎았다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23)
평양전투 승리의 논공 과정에서 송응창과 갈등을 겪었던 이여송은 일본군을 추격하여 1월 26일에는 파주까지 내려왔다. 평양의 승리에 도취하여 일본군을 경시했던 이여송은 1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벽제(碧蹄)의 혜음령(蕙陰嶺) 부근까지 진격했다. 그런데 당시 이여송은 일본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포병을 대동하지 않았다. 아마도 남병 출신의 송응창과 갈등을 벌였던 터라 ‘남병의 화포(火砲) 지원이 없이 북병의 기마병만으로도 일본군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후퇴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 말고도 서울 주변에 대군을 집경시키고 있던 일본군의 입장에서 포병이 없는 명군이란 결코 겁낼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벽제 부근에서 일본군은 명군에 대한 요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 이여송 진영의 정면으로 몰려들었다. 명군은 신기전(神機箭)을 발사하여 공격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수세에 처한 명군이 맨손으로 육박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남병이 도착하여 겨우 구원했다. 이여송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가정(家丁)[-일종의 사병(私兵)이지만 친위대]을 비롯한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그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개성 쪽으로 물러났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평양전투 승리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벽제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던 것이다.24)
2. 명군 지휘부의 강화(講和) 추진과 조선의 대응
1) 강화(講和) 추진의 배경
명 조정이 일본과의 강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은 1593년 1월 벽제전투(碧蹄戰鬪)에서 일본군에게 패했던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평양전투 승리를 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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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선조실록(宣祖實錄)] 권35 선조 26년 2월 乙巳
24) [선조실록(宣祖實錄)] 권35 선조 26년 2월 경인(庚寅): 한명기. 2010 ‘이여송과 모문룡’ [역사비평]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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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되고 있던 송응창(宋應昌)과 이여송(李如松) 등 명군 지휘부에게 벽제전투의 패전은 커다란 충격이자, 전의(戰意)를 상실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일본과의 결전(決戰)이 아닌 강화협상을 통해 전투를 끝내려고 시도했다.25)
그런데 당시 명군 지휘부가 강화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데에는 다른 배경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당시 명에 처해 있던 만만찮은 내외 현실과 그에 따른 전략(戰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소를 올려 봉왜(封倭)할 것을 청하다..... 대개 봉(封)이 이루어진다면 조선은 3년이나 5년 정도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들은 그것을 기회로 전수(戰守)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또한 스스로 준비를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또다시 이루어지기 어려운 약속을 한다면 화가 조선에 미쳐 필시 전라도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요좌(遼左)가 잔파(殘破)된 데에 더하여 오랑캐가 안에서 그 틈을 엿보고, 왜(倭)가 밖에서 공격할 것이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중국 안에서도 병단(兵端)이 거듭되어 근심스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병졸은 지치고 군량은 고갈되어 믿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을 위하지 않고 속국(屬國)을 위한다면 그것은 복심(腹心)을 버리고 사지(四肢)를 구하는 격이 될 것입니다. 26)
위의 이야기를 검토하면 명이 결전을 회피하고, 강화를 추진하게 된 원인은 보다 명확해 진다. 그것은 임진왜란의 장기화로 인해 야기된 요동(遼東) 등 명 내부의 사회 경제적 피폐, 그와 맞물린 외우(外虞)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와 관련하여 당시 명의 속사정을 좀 더 부연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명군(明軍) 전력(戰力)의 약세(弱勢)
임진왜란 당시 명군 지휘부가 결전(決戰)이 아닌 강화(講和) 협상을 통해 ‘조선 문제’에 접근하려 했던 것은 비단 1593년 1월 벽제전투 패전 이후의 일이 아니었다. 명군 지휘
부는 사실 전란 발생 직후부터 그 같은 태도를 보인 바 있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1592년 7월, 조승훈(祖承訓)이 이끌었던 명의 1차 원군이 평양전투에서 참패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일본군에 비해 현격히 적은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한 데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은 이후 명에 대해 훨씬 많은 병력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27)
벽제전투 이후, 명군 지휘부가 다시 강화협상으로 회귀한 것은 이 같은 전례를 답습한 것이다. 실제로 벽제전투 패전 무렵 명군이 처해 있던 상황은 열악했다. 명군의 병력은 부족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어 있었다. 병역 충원과 물자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상당수 병사들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대부분은 모병(募兵)에 응모했던 자들이었다.
송응창(宋應昌)은 이미 출전부터 병력 가운데 약자가 태반인데다 품팔이 [용판지도(傭販之徒)] 출신이 많다는 것을 이유로 명군의 전투력에 의문을 표시한 바 있었다.28) 생계를 위해 출전한 그들은 조선에 들어와 풍토가 맞지 않아 질병에 걸리거나, 약속된 급료를 받지 못해서 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경우도 있었다.29) 전반적인 사기의 저하 현상 때문에 도망병이 상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고,30) 그들의 불평과 불만은 조선 민중에게 그대로 민폐(民弊)로 전가 되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예상 밖의 일’이라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 학계에서는, 1593년 1월 이여송이 평양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심유경이 화평공작(和平工作)을 진행하고 있던 와중에 일본군을 기습을 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31) 이처럼 명군(明軍)이 일본군에 비해 열세(劣勢)이기 때문에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식은 조선의 신료들 사이에서도 나타
나고 있었다. 한 예로 성혼(成渾)은 “송응창(宋應昌)이 화의에 집착하는 것은 일본군의 세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간파한 바 있었다.32)
(2) 참전(參戰)과 전략(戰略) 목표의 달성
벽제전투 패전과 명군의 피폐한 상황이 명군 지휘부로 하여금 강화협상을 통한 ‘전쟁 종식’이라는 입장을 이끌어 내는 데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강화협상으로의 방향 전환이 당시 조선에 대한 명의 전략적 고려 속에서 근원적으로 배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명의 조선 참전은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이자, 조선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공세적(攻勢的)인 방어(防禦)’ 차원에서 단행된 것이었다. 이처럼 자위(自衛) 차원에서 참전함에 따라, 명군은 조선에서 일본군과 직접 맞닥뜨렸을 때-조선의 의사나 민족적 감정은 고려하지 않고-전황(戰況)에 따라, 혹은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진퇴(進退)를 조절하게 되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명군은 애초부터 조선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벌이겠다는 의지가 없었고,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하려 했던 것이다.
좌승지(左承旨) 홍진(洪進)이 의주(義州)에서 돌아와서 아뢰었다......“경략(經f略)에 왜노(倭奴)가 그대 나라에는 진실로 백세(百世)의 원수(怨讐)지만 중국에는 다만 벌레같은 존재에 불과한데 이제 저들이 항복을 빌고 죄를 인정했으니 내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조정의 뜻이 어떤지를 모르겠다. 그대 나라가 원병을 요청했던 초기에는 조정의 의논이 분분해서 대부분 압록강을 지키는 것을 상책이라고 했다. 평양(平壤)까지 내려오자 평양만을 지키려 했고, 개성(開城)까지 내려오자 개성만을 지키려 하면서 ‘이미 속국을 구원하여 태반을 평정하여 회복했으니 바로 철병하는 것이 옳다’고 했으나 나와 석상서(石尙書)의 의견은 그렇지 않아서 적들을 깨끗이 소탕하기로 기약했다”33)
위의 송응창의 고백은, 조선이 일찍부터 품고 있던 “명군이 과연 일본군과 끝까지 결전(決戰)을 벌여 전토(全土)를 수복하려 할 것인가” 라는 의구심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준다.
즉 참전 이후 명군은 철저하게 전황에 따라 임기응변하고자 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명군의 전선(戰線)은 예기치 않은 ‘전황(戰況)의 호조’, 즉 평양전투 승리에 따라 압록강→ 평양→ 개성 등으로 계속 확대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평양전투의 승리는 명으로 하여금 애초의 전략과는 달리 명군이 조선 내지(內地)로 깊숙이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실제 평양전투 승리 이후 병부(兵部)는 신종(神宗)에게 올린 제본(製本)에서 “중국의 위세가 이미 크게 펼쳤으니 방수(防守)를 엄격히 하면서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34) 또 일부 신료들은 “평양전투 승리를 통해 명의 위력을 이미 과시했기 때문에 조선 내지로 깊이 들어가지 말고 일찍 철수함으로써 전비(戰費)를 절약하자”고 주장했다.35) 평양전투를 계기로 향후 명군의 대응이 매우 소극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조짐이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백제전투의 패전은 명군 지휘부에게-평양전투의 승리에 도취해서 잠시나마 ‘망각’했던-명의 ‘근원적인 참전 목적’에 대한 주의를 다시 환기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명은 벽제전투의 패전을 계기로 자신들의 참전이 ‘자위(自衛)’를 위해 이루어졌다는 것, 따라서 자신들은 이미 ‘조선에 할 만큼 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명군은 이제 ‘남의 나라 전투’에 참전하여 굳이 일본군과 피를 흘리며 결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1593년 6월, 명의 병과급사중(兵科給事中) 후경원(侯慶遠)은, 평양과 개성을 수복시켜준 것만으로도 ‘명은 조선에게 해줄 만큼 해 주었다’는 인식 아래 일본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여 전쟁을 끝내자고 주장했다. 즉 그는 약간의 정예 병력을 조선에 남겨두어 그들을 성원(聲援)하되, 명군 지휘부가 전공(戰功)을 탐내 무리하게 일본군과 결전(決戰)을 벌이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36)
이 같은 분위기에 대한 반론(反論)도 없지 않았지만, 1593년 7월 명 병부는 명군 주력 부대의 철수 방안을 제시했다. 즉 유정(劉綎), 오유충(吳惟忠), 낙상지(駱尙志) 등이 지휘하는 남병(南兵)을 대구(大丘)·조령(鳥嶺)·옥경(玉京) 등 요충지에 배치하고, 조선과 연결되는 요동(遼東)에 정병 2,000을 남겨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되 나머지 각진(各鎭)의 병마(兵馬)는 전부 철수시키자고 청했다. 특히 계진(薊鎭)·선부(宣府)·대동(大同) 출신의 병사 가운데 질병이 우려되는 자들부터 시작하여 산서(山西)·보정(保定) 출신 등으로 철수를 시작하자고 청했다.37) 같은 해 9월에는 향후 조선의 복국(復國) 계획을 담은 ‘조선선후사의(朝鮮善後事宜)’를 올리고 신종은 급기야 명군에 대해 철수 명령을 내렸다.
요컨대 벽제전투 패전 이후 명군 지휘부가 강화협상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은, 당시 명이 한반도와 관련하여 지니고 있던 전략적 고려-명 내지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의 조선 출병-를 염두에 두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강화(講和)에 대한 조선의 반응과 강화(講和)의 파탄 과정
조선은 심유경이 조선에 처음 들어왔던 직후부터 명군이 결전(決戰)이 아닌 강화(講和)를 통해 전쟁을 이끌지 않을까 우려했다. 당시 전쟁은 사실상 지휘하고 있던 류성룡(柳成龍)은 특히 그러했다. 그는 우선 심유경이 평양성에서 고시니와 회담한 뒤, 일본 측이 했던 이야기의 내용을 조선에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즉 심유경의 밀실 협상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같은 조선을 무시하는 까닭을 조선의 국세(國勢)가 약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했다. 류성룡(柳成龍)은 심유경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그에 대한 영접과 탐문에 만전을 기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38) 1592년 8월 29일, 명 조정이 들여보낸 정보원 사용재(謝用梓)를 만났을 때 군사로써 무찌르는 것 이외에는 일본군을 물리칠 방법이 없다고 말하여39) 결전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벽제전투 패전 이후 일본과 본격적으로 강화협상을 시작했던 명군 지휘부는 조선의 반대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송응창(宋應昌)은 결전(決戰)을 호소하는 조선의 요청에 대해 “싸우려면 반드시 조선(朝鮮) 병마(兵馬)로 싸우라. 이기면 포상하겠지만 지면 처단한다”고 협박했다.40) 이어서 조선에 대해 교전(交戰) 중지령을 내렸다. 일본을 다독여 강화를 성공시키려면 조선을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1593년 4월 19일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할 때, 명군은 한강을 건너는 일본군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 위해 조선군의 요격을 중지시키고 감시하는 조치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남해안 일대로 철수한 일본군이 조선군의 유격전에 의해 희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종의 통행 증명서인 ‘심유경(沈惟敬) 표첩(票帖)’이라는 것을 일본군들에게 지급해 주기도 했다. ‘심유경 표첩’을 소지한 일본군을 공격할 경우, 조선 장졸들은 명군 지휘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조선을 완전히 배제한 채 밀실에서 이루어진 ‘야합’ 때문에 조선의 주권과 작전권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41)
강화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 명군(明軍)의 존재가 조선에게는 ‘빼도 박도 못하는 계조(鷄助)’가 된 것을 의미했다.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라는 궁벽진 곳으로 이주하여 조정의 명령과 행정체계가 거의 와해된 상황에서 명군에 의한 평양 탈환은 선조가 왕권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벽제전투(碧蹄戰鬪) 패배 이후 명군이 진격을 회피하면서 강화론(講和論)이 대두하고 그들이 장기간 전투를 벌이지 않고 주둔하는 상황이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당연히 명군에 의한 민폐(→군량 조달의 어려움, 그 과정에서의 민의 피폐, 명군의 조선인에 대한 직접적 횡포 등등)가 점차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조선의 민간인들 사이에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 빗”이라는 속요(俗謠)마저 나타나고 있는 형편이었다.42)
뿐만 아니라 1594년이 되어 명군 지휘부는 협상의 진행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명 조정의 비판자를 의식하여 조선에게도 강화협상에 찬성한다는 사실을 공식
적으로 밝히라고 강요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선도 명이 일본을 책봉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명 황재에게 상주(上奏)하라는 협박이었다. 고양겸(顧養謙) 등 명군 지휘부는 이 같은 내용을 강요하면서 조선이 거부할 경우 명군을 철수하여 더 이상 조선을 원조하지 않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조선 내부에서는 ‘원수’ 일본과의 강화를 강요하는 명군 지휘부에 대한 불만이 넘쳤지만, 명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결국 명의 강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43)
하지만 명과 일본사이의 강화 조건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했다. 명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준다’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1594년 9월 히데요시가 제시한 일본 측 조건은 다음과 같이 대략 7가지나 되었다.44)
(1) 대명황제(大明皇帝)의 황여(皇女)를 일본(日本)의 후비(后妃)로 삼고,
(2) 폐지된 감합무역(勘合貿易)을 복구하여 관선(官船)과 상선(商船)을 상호 왕래시키며,
(3) 명과 일본의 통호(通好)를 담보하기 위해 양국의 대신들에게 서로 맹세하게 하고,
(4) 조선을 분할하여 4도(道)는 조선 국왕에게 주고 나머지는 석전삼성(石田三成),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에게 주며,
(5) 조선왕자(朝鮮王子)와 대신(大臣)들을 인질로 일본에 보낼 것
(6) 4인이 건너온 다음 심유경이 돌아가게 할 것,
(7) 영원히 맹약(盟約)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하기 위해 조선의 권신(權臣)과 맹세할 것
1594년 8월 복건순안어사(福建巡按御使) 유방예(劉芳譽)는 (1)의 사실을 폭로 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는 신종(神宗)이 석성(石星) 등을 신뢰하여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석성 등은 심유경을 신뢰하고
명 조정에서 이견(異見)이 제시되는 것을 막으려 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일본측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라고 강요했다.
이어 1595년 1월, 명 예부(禮部)가 히데요시를 책봉(冊封)하라고 요청했던 상소를 계기로 책봉사(冊封使) 이종성(李宗城), 부사 양방형(楊方亨) 등이 북경을 출발, 10월 부산 왜영(倭營)에 도착, 11월 이종성(李宗城) 도망 사건이 발생했다. 강화(講和)가 파탄하고 강화를 주도했던 석성(石星) 등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595년 11월까지 일본군이 남해안(南海岸)에서 부분적으로 철수를 단행했던 가운데 1596년 9월, 부사 양방형(楊方亨)이 히데요시에 대한 책봉을 완료하기 위해 도일(渡日)했다. 양방형(楊方亨)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집요한 공작에 의해 조선도 정사 황신(黃愼)을 파견했는데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유천조신(柳川調信)에게 조선 왕자가 오지 않은 이유를 힐문했다. 심유경은 ‘왕자 건(件)’은 숨긴 채 황신(黃愼)에게 ‘임해군(臨海君)의 사은(謝恩)이 없는 것과 사절 방일(訪日)의 지연이 수길(秀吉)이 성을 내는 원인’이라고 책임을 전가했고, 풍신수길(豊臣秀吉)은 황신(黃愼)을 만나주지 않았다. 일본군의 완전한 철수를 위해서는 조선이 통신사를 보내야 한다는 일본의 주장과, 가능하면 일본의 요구를 들어 줌으로써 강화협상을 매듬지으려 급급했던 명의 강화론자들 사이에서 조선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통신사를 보내고 나면 일본이 또 다른 새로운 요구를 해올 것을 망고 있었지만 명의 압력 때문에 별다른 방책이 없었다. 강화협상이 진행되는 기간 내내 조선의 소외와 피해는 심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일본군의 완전 철병’을 요구하는 심유경의 서한 내용에 격노하고 강화의 파탄을 선언함과 동시에 다시 조선을 침략하게 되면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시작 되었던 것이다.45)
***
45) 중촌영효(中村榮孝), 앞의 책(1965), 163~211쪽.
첫댓글 절강을 석강으로 쓴것만 빼면 좋은글이군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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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의 친철을 배푸신것만도 감사할뿐입니다.^^
넷상의 고수라는 어떤 것들은 남의 글이나 의견, 주장들을 마치 지가 한것처럼 떠벌리고 있으니까요 ㅡ,.ㅡ
인터넷에 올리는 정도라면 학문이라고 할 게 없지 않나 싶은데요. 동호회 활동에까지 학문적 프로세스를 끌어올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근거를 내놓지 않아 불리한 처지에 놓이는 정도는 감수해야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