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고보 상록회는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탄압이 더욱 극심해지던 시기인 1937년에 결성된 비밀 결사로 회원으로서 자기 완성·지도자로서 책임 완수·단결력 배양을 3대 강령으로 삼아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귀농운동 등을 전개하며 춘천농업학교 독서회 등 춘천 지역 각 학교와도 비밀리에 연락을 갖는 등 이 지역 항일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졸업한 후에도 계속 유기적인 연락을 가지고 후배들과 연계하여 활동하다가 1938년 일경에 탐지되어 관련자 137명이 체포되었으며 10여명이 심한 옥고를 치르다가 그 중 백흥기(10회), 이광훈(15회), 고웅주가 옥사하였다.
현재 춘천고등학교에는 전신인 춘천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1937년 3월에 결성한 상록회의 항일 민족 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상록탑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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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춘천에서는 3월 4일에 춘천 농업학교 학생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춘천농업학교는 근대교육이 실시된 후 강원도에 설치된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일제의 「실업학교령」에 따라 농업학교에 관한 칙령으로 설립된 춘천농업학교는 1910년 4월 29일에 1년제 학교로 개교하였다가 다시 1911년에 2년제로 개편되었는데, 당시 춘천농업학교는 근대 강원도 교육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나 확산되자,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춘천농업학교의 졸업생 김병환이 춘천에서도 만세시위 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춘천으로 잠입한 후 재학생들에게 궐기하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일본인 교장이 학생들에게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3월 7일 아침 조회시간에 만세를 부르며 교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일본군 수비대의 병력과 헌병 경찰 소방대까지 동원된 무장병력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계속 만세를 부르며 수업을 거부하였다. 수업이 중단된 상황에서 학생들은 기숙사 주변에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당국은 1주일간의 휴교조치를 단행하였고, 기숙사 문을 닫아 학생들이 귀향하도록 하였다. 이때 주동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교장의 중재로 하루 만에 풀려났다. 그리고 휴교조치는 1주일 후에 정상화되었다.
춘천농업학교의 만세운동은 춘천에서의 선구적인 항일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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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에 일제의 통치 방식이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뀌면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부분적으로나마 허용되면서 전국적으로 청년들이 청년회를 조직하였으며, 춘천에서도 1920년 초부터 수양과 계몽활동을 목적으로 한 춘천청년회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춘천지역에서 이루어진 청년들의 활동 가운데 주목해 볼 것이 춘천고등보통학교의 항일동맹휴학운동이다.
1922년 일제의 제2차 조선 교육령에 의하여 1924년 3월에 설립된 5년제 관립춘천고등보통학교는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인문계 중등학교였다. 춘천고보 학생들은 일부 일본인 교사가 민족적인 차별을 하여 불만에 차있던 차에 1926년 4월 순종의 장례에 즈음하여 상장(喪章)을 달아 저항을 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교사의 폭언과 강제해산 시도로 사태가 심각하게 되자, 일본인 교장은 상장 패용을 묵인하는 선에서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먼저 폭언을 했던 일본인 교사 모리의 위압적인 태도가 계속되자 학생들은 10월 4일에 2·3학년 학생 120명이 모리의 배척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 사건으로 4명의 주동자가 퇴학처분을 당했다.
이 운동은 일본인 교사의 배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그 해의 6·10 만세 운동과 연계시켜 볼 수 있는 학생들의 항일민족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이후에도 1929년 5월 10일에 1·2학년을 중심으로 조선역사와 조선어문법의 교수 등을 요구하며 2차 동맹 휴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 6명이 정학처분을 당했다. 1935년 7월 4일에 일어난 3차 동맹휴학은 3·4·5학년생 250여명이 일본인 교사 오카다의 배척을 요구하며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결국 오카다는 사직했으며 24명의 학생이 징계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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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춘천지역의 항일운동은 주로 청년회의 항일운동이나 춘천농업학교, 춘천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동맹휴학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자 학생들은 단체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그 결과 독서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하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춘천고보에서 상록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7년 3월 당시 춘천고보 5학년생이던 남궁 태, 이찬우, 문세현, 용환각, 백흥기, 조규석 등 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일환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에 뜻을 모았다. 이들은 모임에서 결사목적과 행동강령으로 회원으로서의 자기완성, 지도자로서의 책임완수, 단결력 배양과 파벌투쟁의 배척, 조선민족을 위하여 일신을 바칠 것을 결정하고, 남궁 태와 문세현이 협의 하여 회가(會歌)도 마련하였다.
상록회는 회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독서회를 조직 하였다. 이 독서회는 비밀조직인 상록회가 표면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독서회는 발족이후 매월 정기적으로 1회의 월례회를 개최하고 스스로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연설회를 갖거나 민족주의적 문헌의 독후감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독서회'를 통하여 조직이 활성화되고 회원 확보가 어느 정도 달성되자 독서회를 상록회로 명칭을 환원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교내에 국한되지 않고, 교외의 청년, 특히 졸업생들과도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상록회를 창설한 졸업생들 가운데 여러 명이 만주 등 국외로 나아가 그곳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한때 춘천농업학교·함흥고보·서울의 제1고보와 제휴하여 항일공동전선을 펴기도 하였으며,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천전수양단과 오정경로회에 참여하고 단체를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상록회를 조직하여 활동한지 거의 2년이 되었을 때인 1938년 12월에 상록회의 항일활동이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재학생과 졸업생을 포함하여 137명이 검거되어 춘천경찰서로 끌려갔다. 이 가운데 36명이 송치되었으며, 12명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선고를 받았다. 춘천고보의 상록회 운동은 춘천지방의 학생항일 비밀결사운동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지역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춘천중학교에서 전개된 독서회, 춘천농업학교의 독서회 운동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 주소 :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3가 149-1 |
현재 상태 : 멸실 / 춘천고등보통학교 자리에는 현재 그 후신인 춘천고등학교가 자리하여 위치에는 변함이 없으나, 6·25 전쟁 중에 건물들이 완전 소실된 후 현재는 새 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의 배척을 요구하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며 3차례에 걸쳐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1차 동맹휴학은 1926년 10월 4일에 2·3학년 학생 120명이 교무주임 모리[森廣美]의 배척을 요구하며 일어났는데, 이 사건으로 4명의 주동자가 퇴학처분을 당했다. 2차 동맹휴학은 1929년 5월 10일에 1·2학년을 중심으로 조선역사와 조선어문법의 교수 등을 요구하며 계획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 6명이 정학처분을 당했다. 1935년 7월 4일에 일어난 3차 동맹휴학은 3·4·5학년생 250여명이 일본인 교사 오카다[岡田]의 배척을 요구하며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결국 오카다는 사직했으며 24명의 학생이 징계를 당했다.
1937년 3월에는 비밀결사인 상록회가 결성되었다. 창립 당시 회장은 조규석, 부회장은 남궁태, 선전부장은 문세현, 조직부장은 이찬우, 서적부장은 백흥기, 회계는 용환각이 맡았다. 산하에 독서회를 두어 ‘회원으로서 자기완성’, ‘지도자로서 책임 완수’, ‘단결력 배양’을 3대 강령으로 삼아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귀농운동 등을 전개했다. 춘천농업학교 독서회 등 춘천 지역 각 학교와도 비밀리에 연락을 갖는 등 이 지역 항일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신북면 천전리에서는 농민단체인 수양단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 가을 발각되어 1939년까지 졸업생과 재학생 137명이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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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회원들의 기념사진이다. ‘우리들의 우정은 봉의성 상록 같이 푸르자’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