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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집(陶隱集)》 해제(解題)
도은집(陶隱集)
도은집(陶隱集)》 해제(解題)
유호진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강사
1. 머리말
《도은집(陶隱集)》은 여말(麗末)의 문인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시문집이다. 도은의 시문은 이미 그 당대부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장과 병칭될 정도로 높이 평가되었다. 이색은 “우리 동방의 문사 가운데 도은에 비견할 만한 이가 드물다.”라고 칭찬하였고 정몽주(鄭夢周)는 “목은을 이어 홀로 문장을 천단하니, 찬연한 별들이 가슴속에 벌여 있는 듯하다.”라고 찬상하였으며, 권근(權近) 역시 “고려의 문헌 가운데 세상에 이름난 것으로 목은의 성대한 시문과 도은의 우아한 시문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특히 후대의 최립(崔岦)은 “목은의 문과 도은의 시가 우리 동방의 시문 가운데 으뜸이다.”라고 하여 도은 시의 가치를 한층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도은은 문장가, 특히 시인으로서 후세에 알려졌다.
그러나 《도은집》을 살펴보면 도은이 여말에 문장가로서만이 아니라 정치가, 사상가, 교육가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도은이 정계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원(元) 왕조가 명(明) 왕조로 교체되는 때였고, 이에 따라 고려 조정에서도 친명파(親明派)와 친원파(親元派)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때였다. 또한 친명파가 득세한 이후로는 고려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온건 개혁파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급진 개혁파가 정권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을 수용한 신흥 사대부들이 불교의 폐단을 공론화하면서 점차 성리 학풍을 확장하고 있었지만, 불교 사상과 불교의 유습 또한 지식인 사회에 온존(溫存)해 있었다. 도은은 이러한 정치적ㆍ사회적 격랑의 한복판에서 고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였고 정치ㆍ사상ㆍ문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또한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상황에서 양국의 우의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글은 《도은집》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쓴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도은의 학문 활동과 정치 활동을 중심으로 그의 삶을 조명하고 다음으로 시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도은의 문학과 사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은집》의 출간 경위와 이본(異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2. 도은의 삶 - 정계 활동을 중심으로 -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자(字)가 자안(子安)이고, 도은(陶隱)은 그의 자호(自號)이다. 증조 이백년(李百年)은 종2품 밀직사사(密直司事)에 오른 인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이조년(李兆年)의 맏형이다. 조부 이인기(李麟起)는 평양 부윤(平壤府尹)을 지냈으며 부친 이원구(李元具)는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공신 칭호를 받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도은의 모친은 세족 가문이었던 언양 김씨(彦陽金氏)로 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 김경덕(金敬德)의 딸이다. 부친 이원구와 모친 언양 김씨 사이에는 도은 외에도 아들 이숭문(李崇文)과 세 딸이 있었는데, 이숭문은 뒤에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딸들은 모두 명문세족들에게 시집을 갔다. 이처럼 도은의 부친 대에 이르러 그의 가문은 세족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조년이 절조로서 이름을 떨친 후 그의 손자인 이인복(李仁復), 이인임(李仁任)이 고위 관료로 입신하게 되자 도은의 가문은 명문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도은은 1347년(충목왕3)에 성산부(星山府) 용산리(龍山里)에서 태어났다. 도은이 〈자송(自訟)〉에서 “나는 강보(襁褓)에서 벗어난 뒤로 경적(經籍)을 공부하는 일에 급급하였다.”라고 회고하였듯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가 학업에 열중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가르침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그에게 음식과 의복의 사치를 금하고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이후 그는 뛰어난 천품과 탁월한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14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고, 16세에는 당시 최연소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과거를 주관했던 시관(試官)은 사류(士類)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던 홍언박(洪彦博)과 유숙(柳淑)이었다. 이색의 〈도은재기(陶隱齋記)〉에 의하면, 같이 합격한 동료들이 그가 어리기 때문에 경시하였다가 그의 학문과 문장이 날로 진보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질정받기를 원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도은의 10대는 학문적 역량이 축적되고 문장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0대에 들어 도은은 본격적으로 벼슬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히 그는 21세 되던 해에 성균관 교관(敎官)으로 임명되어 사대부 계층에 성리 학풍을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몽주는 박사(博士)로 제수되었으며, 도은과 문익점(文益漸), 박상충(朴尙衷), 김구용(金九容) 등은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매일 경전을 나누어 수업하고 정주(程朱)의 글을 강론하였는데 학생들이 날로 늘어나 강당이 이들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23세에는 이색과 함께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유백유(柳伯濡) 등 33인을 뽑았다. 24세에는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향시(鄕試)에서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리고 공민왕이 그를 아껴 명나라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 27세에는 공민왕이 도은에게 왕자의 학문을 가르치도록 청하였다가 대비(大妃)의 저지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이처럼 그가 20대 초반에 사류를 육성하는 지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아 젊은 날부터 학문과 문장으로 주목받는 인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은이 문장가로서 인정받았다는 점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가 20대 초반부터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는 사실이다. 23세에 그는 명 태조의 등극을 축하하는 표문을 작성하여 황제로부터 글이 진실되고 간절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후 26세에는 명나라가 촉(蜀)을 평정한 일을 하례하는 표문을 지었고, 29세에는 공민왕을 이어 우왕(禑王)이 왕위를 잇도록 허락해 주기를 요구하는 〈청승습표(請承襲表)〉를 지었다. 이처럼 도은은 20대부터 고려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했던 것이다. 도은이 26세에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일찍부터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음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단서이다. 여말 선초에 예문관 응교 직책은 뒷날 문형(文衡)이 될 만한 젊은 인재에게 제수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대에 해당하는 도은의 20대는 그의 10대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서서 공민왕의 지우를 받았고, 유숙과 이색을 비롯하여 정몽주, 전녹생(田祿生), 김구용, 박상충, 정도전(鄭道傳), 문익점 등과 같은 많은 사우(師友)들과 교제하며 성리학을 연찬하였다. 특히 당대 명문가 출신인 그가 신흥 사대부들과 우의를 다지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개혁적인 세족 일부와 신흥 사대부들이 연대하여 정계의 개혁에 분투하였던 당대의 정황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단서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장과 학문으로 조정 신료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조정에서 주목받는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다. 도은이 〈송악에 오르다〔登松嶽〕〉에서 “소년의 다리 힘에 진실로 의지할 만하니, 위태로운 산꼭대기를 일순간에 날아오른다.”라고 읊조렸던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그의 자신감을 여실히 보여 준다.
도은의 나이 29세부터 41세에 이르는 기간, 즉 대략 30대에 해당하는 시기인 우왕 대는 도은의 삶에 정치적 시련이 시작되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공민왕 때만큼 벼슬길이 순탄하고 자신감이 충만했던 때가 아니었다. 그러한 변화의 징후는 개혁적인 공민왕이 시해되고 이인임을 비롯한 친원파 대신들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데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 일파가 공민왕의 친명 외교정책을 철회하려 했던 일을 들 수 있다. 외교정책의 변화 과정에서 도은은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원나라 사신의 입국을 막으려 했다. 이 일로 그는 집권자의 미움을 받아 경산부(京山府)로 유배되고 만다. 이때 그가 창작한 〈애추석사(哀秋夕辭)〉에는 간교한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와 견결한 지사로서 느끼는 비탄의 정서가 심각한 어조로 표출되어 있다.
도은은 고향에 유배된 지 약 2년 뒤, 31세의 나이로 조정에 소환되어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성균관에서조차 성리 학풍이 쇠퇴하고 사장(詞章)이 날로 성해져 유생들은 시부(詩賦)의 공교로움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성균관 중건을 계기로 세력을 확장해 가던 신흥 사대부들의 정치적 기반이 차츰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발 물러서 있던 권문세족과 무장(武將) 세력이, 이인임이 집권한 뒤부터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개혁을 추진해 가던 신흥 사대부 세력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자리를 옮긴 도은은 천재(天災)가 일어난 것을 계기로 임금에게 서연(書筵)을 열고 친정(親政)을 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인사ㆍ군사ㆍ재정 문제 등 시국의 현안에 대해 간언하였다. 이인임 세력에 의해 문란해진 정치 기강을 바로 세우려 한 것이다. 37세에는 상호군(上護軍)으로 과거를 주관하여 이방원(李芳遠)을 비롯한 99인의 선비를 선발하였고, 41세에는 중국의 제도를 상고하여 조정 백관의 관복(冠服)과 사대부 묘제(廟祭) 의절(儀節)을 정하였다.
개혁 세력이 위축되어 가는 상황에서 도은이 그나마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 집권자였던 이인임과 한집안 사람이라는 점이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차츰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중시되던 상황에서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36세에 공민왕의 시호를 청하는 〈청시표(請諡表)〉를 작성하여 정몽주를 통해 명나라에 보냈으며, 37세에는 명나라의 오해를 풀기 위해 표문을 작성하였다. 특히 후자의 표문은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가 험악해진 상황에서 외교상의 난맥들을 풀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공민왕 시해 사건, 고려인 김의(金義)가 명나라의 사신 채빈(蔡斌)을 죽인 일, 명나라의 사신 손 내사(孫內史)가 자살한 일, 경절(慶節)을 축하하러 오는 고려 사신들이 늦게 입조한 일, 그리고 명나라가 정한 많은 조공을 고려가 5년 동안 바치지 않은 일에 대해 날카롭게 추궁하고 있었다. 이에 도은이 〈진정표(陳情表)〉와 〈하절일표(賀節日表)〉를 작성하고 뒤에 정몽주가 가서 해명하자 명 황제는 고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뒷날 도은이 정치적으로 탄핵을 받았을 때 권근이 ‘명나라에 보내야 할 수많은 금과 은, 말, 베 등을 면제받게 된 것은 오로지 도은의 문장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변호하였던 일은 당시 일의 경과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39세에는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책봉을 명나라가 허락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은표(謝恩表)〉를 지었고, 40세에는 직접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가서 〈청의관표(請衣冠表)〉를 전하였다. 우왕 대에 정몽주는 주로 사신의 임무를 맡고 도은은 표문을 작성하여 명나라를 설득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존재했던 심각한 알력을 원만하게 해결했던 것이다. 《태조실록》의 도은 졸기(卒記)에서 “직강(直講)에서 판서(判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교(製敎)를 겸무(兼務)하여, 이색이 병들고 난 뒤에는 중국과의 외교에 관계되는 문자(文字)는 모두 그 손에서 만들어졌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실상을 전한다.
결국 우왕 대는 공민왕 대의 개혁 세력이 위축되는 시기였지만 도은은 이전 시기보다 정치 일선에 보다 깊이 개입하였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유배를 경험하기도 하였지만 개혁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시국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고 제도를 고쳐 나갔으며 인재를 선발하였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표문을 작성하여 외교 관계를 회복한 일은 주목할 만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권문들의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그가 주로 문한(文翰)의 직책에 머물며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이 점을 암시한다.
도은의 나이 42세에서 46세 이르는 시기인 창왕(昌王) 대는 그가 정치적 격랑에 휩쓸려 희생당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5년에 불과했지만 그에게 다가온 정치적 시련들은 심각했고 그는 여기에 저항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그 기점은 최영(崔瑩)이 이인임을 이어 권력을 차지한 임견미(林堅味) 세력을 물리친 때이다. 이성계(李成桂)의 협조를 얻어 정권을 장악한 최영이 요동 정벌을 내세우며 한참 세력을 떨칠 무렵, 최영의 문객인 정승가(鄭承可)는 도은이 이인임의 인척임을 빌미로 탄핵하여 통주(通州)로 유배를 보냈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 일어나고 최영이 실각한 뒤 그는 다시 밀직사사에 제수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그러나 도은은 더욱 커다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그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급진적인 개혁파 인사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통주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때는 이성계의 세력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뒤였다. 도은은 이성계 세력이 손을 쓰기 전에 조민수(曺敏修)ㆍ이색과 의논하여 창왕을 옹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정국은 이성계 일파와 조민수ㆍ이색을 중심으로 한 일파로 양분되어 주도권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조민수가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유배됨으로써 창왕의 위치마저 불안해지자, 도은은 이색 및 우현보(禹玄寶)와 밀의(密議)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려 이성계 일파를 제압하고자 하였다. 창왕 즉위년인 42세에 그는 이색과 함께 하정사(賀正使)를 자청하여 중국에 들어간 뒤, 명나라의 관리가 고려의 일을 감독하도록 하는 조처를 내려 줄 것을 황제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 황제가 여기에 관여하지 않으려 해서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이성계 일파는 이색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파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도은은 수차례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43세에 그는 영흥군(永興君) 사건에 연루된 것을 계기로 탄핵을 받아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되었다. 권근이 도은을 힘껏 변론하였으나 결국 구원하지 못하고 함께 유배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창왕이 폐위된 시기였기에 창왕을 도우려 한다는 죄목이 그에게 덧씌워졌다. 이색과 조민수 역시 동일한 죄목으로 각각 장단(長湍)과 삼척(三陟)으로 유배되었다. 44세에는 명나라와 고려를 이간질한 사건인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난이 일어나자 여기에 다시 연루되어 이색ㆍ권근 등과 함께 청주옥(淸州獄)에 갇혔으나 갑자기 일어난 수재로 인해 방면되었다. 도은은 이해에 지은 〈충원 판관 이군 급의 자설〔忠原判官李君及字說〕〉에서 군자의 의(義)와 소인의 이(利)를 역설하여 자신의 견정(堅貞)한 정신을 드러내었다.
도은은 45세인 1391년(공양왕3) 11월에 조정에 소환되어 이색ㆍ정몽주와 함께 국조실록(國朝實錄)을 수찬하고, 1392년(태조1) 1월에 밀직사사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 도은과 정몽주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는 이성계 일파의 동향을 감지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때마침 낙마(落馬)하자 도은과 의논하여 김진양(金震陽)을 비롯한 간관들을 움직여 이성계 일파인 조준ㆍ정도전ㆍ남은(南誾)ㆍ윤소종(尹紹宗) 등을 유배 보냈다. 그러나 이해 4월 다급해진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하고 도은과 김진양 등을 옥에 가두자 상황은 역전되고 말았다. 곧이어 도은은 포은의 당(黨)으로 지목되어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다가 정도전과 남은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黃居正)에게 장살당하였다. 도은이 죽은 지 14년 뒤인 1406년(태종6)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태종의 명에 의해 변계량(卞季良)이 그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은은 40대 이후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벌였다. 이는 문한(文翰)의 직책을 맡아 주로 외교문서를 짓는 데 치중했던 30대의 삶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는 고려를 지키려는 온건 개혁파인 이색ㆍ정몽주와 협력하여 조정에서 이성계의 일파를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정치 활동은 이성계 일파로서는 용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던 무렵에 그가 정몽주ㆍ이색과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도은이 교유한 인물 가운데는 고려 말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명사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우선 도은이 문과 급제할 때 지공거의 직책을 맡았던 홍언박과 유숙을 들 수 있다. 홍언박은 친원파인 기철(奇轍) 일당을 몰아낸 저명한 재상으로 그의 손녀가 바로 도은의 부인이다. 또한 유숙은 신돈(辛旽)을 비판하다가 그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도은이 유숙에 대해 ‘급류(急流)에서 바야흐로 진정(眞情)을 볼 수 있는’ 인물로 묘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평생 유숙을 존경하였다. 집안 어른인 이인복 또한 공민왕 때 재상을 지낸 이로 도은을 깊이 신뢰하고 후원해 주었던 인물이다. 이 밖에도 〈담암 선생의 고택을 지나며〔過淡菴先生故宅〕〉에는 그가 백문보(白文寶)에게 《춘추(春秋)》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고, 《양촌집(陽村集)》에는 그가 한수(韓脩)에게 자주 가서 저술을 질정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도은에게 보다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는 목은 이색을 빼놓을 수 없다. 목은이 〈도은재기〉에서 분명하게 밝혀 놓았듯이 두 사람은 모두 홍언박의 문인(門人)이자 성균관에서 사류를 육성하던 동료였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선후배의 관계였던 것이다. 목은은 도은의 문장과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후배들 중에서도 그를 특히 아꼈다. 도은은 이러한 목은을 평생토록 추종하며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고 쇠약해진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또한 도은의 문집에는 그가 평소 친하게 지냈던 인물들에게 보낸 시나 그들을 묘사한 기록들이 실려 있어 그의 교우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도은은 성균관에서 동료로 지냈던 정몽주ㆍ김구용ㆍ정도전ㆍ박상충ㆍ박의중(朴宜中) 등과 친밀하게 지냈고, 이집(李集)ㆍ권근ㆍ염정수(廉廷秀)ㆍ하륜(河崙)ㆍ김진양ㆍ김제안(金齊顔) 등과도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字)가 민망(民望)인 염정수는 도은의 매부로서 《도은집》에는 그에게 보낸 시가 특히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도은은 은봉 선사(隱峯禪師)ㆍ식곡 상인(息谷上人)ㆍ총선사(聰禪師)ㆍ희암(熙菴)ㆍ귀곡 선사(龜谷禪師)ㆍ환암(幻菴)ㆍ침선사(琛禪師)ㆍ근공 선사(近公禪師)ㆍ우천봉 상인(雨千峯上人) 등 불교계의 저명한 인사들과도 교류하였다. 도은의 문인으로는 태종 이방원을 비롯하여 변계량(卞季良)ㆍ이승상(李升商)ㆍ김시용(金時容)ㆍ한유문(韓有文)ㆍ김가행(金可行)ㆍ유백유(柳伯濡) 등이 있다.
3. 《도은집》의 내용과 문헌학적 가치
1) 《도은집》의 구성
먼저 이 책의 저본(底本)이 된 《도은집》의 체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본 문집은 변계량이 저자의 자편고(自編稿)를 바탕으로 만든 1406년의 목판 초간본을 임란 이전에 다시 목판으로 간행한 중간본(重刊本)이다. 이 판본은 시집 3권과 문집 2권, 도합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95판이다.
권수(卷首)에는 이색ㆍ장부(張溥)ㆍ고손지(高巽志)의 발문과 주탁(周倬)ㆍ정도전ㆍ권근의 서문이 붙어 있다. 서문과 발문 가운데 초간본에 실려 있는 권근의 서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은이 생전에 당대 명사로부터 받은 글이다.
그 뒤에 놓인 권1~3은 시집으로, 시체별(詩體別)로 시를 배열하였다. 권1에는 사(辭) 1편, 고시(古詩) 30제, 권2에는 율시(律詩) 154제, 권3에는 절구(絶句) 151제가 배열되어 있어 총 440여 수의 시 작품들이 실려 있다. 이 시들은 창작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작품들이 많고 또 앞서 창작된 작품이 뒤에 창작된 작품보다 후면에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많아, 작품 배열에 있어 창작 시기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송(傳誦)되어 왔던 시들을 수집하여 제목 없이 실은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제목을 써야 할 행(行)을 비워 두었다. 그의 시 가운데는 송별시나 지인들에게 준 시, 스님의 시권(詩卷)에 부친 시가 많은 편이고 두 차례 명나라에 오가면서 지은 사행시도 상당하다.
권4와 권5는 도은의 산문을 모아 놓은 문집이다. 권4에는 기(記) 7편, 서(序) 12편, 지(誌) 1편 등 총 20편이 실려 있고, 권5에는 전(傳) 2편, 제후(題後) 3편, 의(議) 1편, 행장 1편, 찬(讚) 1편, 자설(字說) 1편과 표(表) 17편, 전(箋) 5편 등 총 31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송서(送序)와 시서(詩序)가 많이 실려 있고, 권5에는 경산(京山)의 열녀에 대한 〈배열부전(裵烈婦傳)〉과 어머니의 삶을 기록한 〈선대부인의 행장〔先大夫人行狀〕〉, 그리고 명나라 조정에 보낸 표전(表箋)들이 이채롭다. 특히 명나라에 보낸 표전들은 고려 조정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중요한 문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 문집의 내용과 문헌학적 가치
이색과 하륜, 그리고 명나라 고손지(高巽志)의 언급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도은 이숭인은 생존 당시에 이미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여말(麗末)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따라서 《도은집》은 여말의 사상사, 예술사, 지식인들의 풍모과 동향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긴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문집이다. 먼저 《도은집》에 드러난 도은의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앞에서 도은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서술하면서 그의 견결한 인생 태도를 살펴본 바 있다. 도은이 자신의 초상화에 부친 글은 이러한 인생 태도의 소종래(所從來)에 대하여 설명한다.
생김새는 유순해서 / 狀貌卑柔
부인네 영락없고 / 婦人之儔
장구나 아로새기니 / 章句雕刻
아이들의 유치한 공부로다 / 童子之學
나를 달가(達可 정몽주)의 탁월함과 / 若擬諸達可之卓越
자허(子虛 박의중)의 치밀함과 / 子虛之縝密
천민(天民 설장수)의 정민함과 / 天民之精敏
중림(仲臨 하륜)의 준일함과 / 仲臨之俊逸
가원(可遠 권근)의 온아함과 / 可遠之溫雅
종지(宗之 정도전)의 해박함에 견준다면 / 宗之之諧博
이른바 반질반질한 돌이 아름다운 옥들과 섞여 있는 경우라 하리라 / 所謂碔砆之與美玉也
비록 그렇지만 동국에 붙어살면서도 / 雖然托迹於東國
중국에 대해 담론하기를 좋아하고 / 喜談於中原
혹 장기 서린 바닷가에 쫓겨나도 / 或擯瘴海之濱
슬퍼하지 않고 / 而無所加慼
혹 조정에서 노닐게 되더라도 / 或游岩廊之上
기뻐하지 않는다 / 而無所加欣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닦아 / 惟其惕然而自修
거의 마음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 庶幾不欺於心君乎
〈향승 지암이 나의 초상화를 그렸기에 찬을 짓다〔鄕僧止菴寫余陋眞因作讚〕〉
도은이 40대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창작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한 자세와 변하지 않는 마음에 대한 자부를 읽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견결한 인생 태도가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으려는 마음 수양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의 삶을 지탱했던 중심축이 성리학의 인격 수양에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도은이 성리학에 침잠하였다는 사실은 〈추야 감회(秋夜感懷)〉 10수를 통해서 보다 분명히 간취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이단 배척, 주희 존숭, 명덕(明德) 발현 등의 주제를 제시하였다. 성리학자로서의 관점이 시를 통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성리학에 대한 논리적인 사색은 산문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주역의 복괘(復卦)를 천지(天地)의 복(復), 성인(聖人)의 복, 중인(衆人)의 복 세 가지로 나누고 인심(人心)의 수양을 강조한 〈복재기(復齋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원래 천지의 기(氣)가 사람이 태어날 때 몸에 들어온 것으로, 이를 잘 기르면 심광체반(心廣體胖)의 상태에 이르고 어떤 것도 꺾을 수 없는 대장부(大丈夫)의 정신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 〈이호연이 합포의 막료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한 서문〔送李浩然赴合浦幕序〕〉, 그리고 의(義)와 이(利)를 변별하면서 남헌 장씨(南軒張氏)의 설을 부각시킨 〈충원 판관 이군 급의 자설〔忠原判官李君及字說〕〉과 사대부의 묘제(廟制)를 서술하며 자신의 창견을 제시한 〈대부사묘제의(大夫士廟祭議)〉 등은 그가 성리학을 정밀하게 연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작품들이다. 목은이 도은의 학문과 문장에 대해 “공자ㆍ주공의 사상과 감정이 층층이 드러나고 겹겹이 나온다.”라고 칭찬한 것이나 권근이 “학문이 정심(精深)하되 염락성리(濂洛性理)의 설에 근본을 두었다.”라고 규정한 것은 도은의 학문에 대한 올바른 지적인 셈이다. 결국 《도은집》은 이색의 《목은집》, 정몽주의 《포은집》, 정도전의 《삼봉집》과 함께 여말 지식인들의 성리학 연구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도은의 학문은 성리학에 근원을 두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불교를 철저하게 배척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도 젊은 시절 성리학에 몰두할 때에는 불교를 이단시하며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전투적인 자세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도은집》을 통해 유추해 볼 때 그는 불가 사상에 대해 비교적 포용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는 “학문에 사우 연원(師友淵源)의 바름이 있다면 전할 만한 것이니, 불가도 그러하다.”라고 하였고, “지혜로운 임금이나 충의(忠義)의 신하가 사찰을 지어 불가의 가르침을 확장하는 것은 대개 나라와 가정을 위해 복리(福利)를 구하는 일이니 이 역시 군자가 마음을 두텁게 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도은의 시 가운데는 불가의 사상을 끌어들여 초월의 순간을 노래한 시도 있다. 이러한 관점은 불가 사상에 대해 탄력적인 태도를 취했던 목은의 시각과 유사하고 강력한 배불론(排佛論)을 폈던 정도전의 시각과는 다르다.
불가에 대한 도은의 포용적인 태도는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선대부인의 행장〉에 의하면, 자식 교육에 엄격하고 집안일에 부지런했던 도은의 어머니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한 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과 《화엄경(華嚴經)》 〈행원품(行願品)〉을 외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도 그녀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인해 그는 불가에 좀 더 너그러울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어지럽고 위태로운 벼슬길에서 인심의 변화무쌍함을 경험하면서 차츰 속세를 떠난 고결한 삶을 꿈꾸게 된다. 그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사찰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승려들의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 몇몇 승려들의 고상한 인격에 매료되어 그들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천봉의 시고 뒤에 제하다〔題千峯詩稿後〕〉에서 “내가 방축되어 방랑하게 된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대개 팔을 내젓고 떠나며 서로 나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경계하였는데, 스님들 중에는 왕왕 찾아오는 이도 있고 편지로 문안하는 이도 있었다.”라고 한 것이나, “이들은 모두 명성과 이익을 버리고 공허(空虛)로 도피한 이들이다.”라고 서술한 것은 이러한 저간의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도은이 불교에 대해 포용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해서 그가 불가 사상에 심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나는 불가에 입문할 겨를이 없었으니 어찌 말할 바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또 “나는 태고(太古 보우(普愚))의 학문에 대해 감히 알지 못하는 데다 조금도 그 의미를 연구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하여 자신이 불가 경전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일생 동안 유자(儒者)의 길을 걸었다. 다만 당대 사회와 가정의 종교적 분위기로 인하여 불가 사상에 대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을 뿐이다. 도은의 이러한 사상은 결국 여말 지식인들의 성리학과 불교에 대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도은집》에 나타난 도은의 문학, 특히 그의 시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도은의 시론(詩論)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어의 조탁에 대한 부정이다. 그가 〈추야 감회(秋夜感懷)〉 제7수에서 “어찌하여 종이를 마주한 이들은, 글을 아로새기느라 마음을 고달프게 하는가. ‘산기운 어린 꽃’과 ‘안개 속의 새’의 대구에나 마음을 쓴다면, 그 보잘것없는 소리가 깊은 가을 귀뚜라미 소리와 같을 걸세.”라고 읊조린 것은 이를 드러낸다. 그가 이처럼 시어를 조탁하는 일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시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형식미만을 추구하는 당대 문인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시경》을 시가(詩家)의 조종(祖宗)으로 여기고 공자가 지적한 《시경》의 시 정신인 ‘사무사(思無邪)’를 시를 논하는 지극한 준거로 보았다. 따라서 세교(世敎)에 관련되지 않는 시, 다시 말해 인간의 성정(性情)에 근원하지 않은 시는 바르지 않은 시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시를 쓰는 것은 정신을 헛되이 소모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장구(章句)만을 아로새기는 산문 역시 진정한 학문과 멀어진다는 관점에서 비판하였다.
그러나 도은이 시 창작에서 세교와 관련된 내용만을 중시하고 표현이나 형식의 측면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회고하며 지은 〈은봉 선사에게 부치다〔寄隱峯禪師〕〉에서 “애써 지은 말은 자연의 비경을 열어젖히고, 입에서 나온 말은 매번 사람들을 놀라게 하네.”라고 기술하여 자신이 형식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고심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사실 도은 시의 흡인력 가운데 하나는 참신하고 기발한 시어들에 있다.
학은 쇠를 깎은 듯한 바위에 둥지를 틀었고 / 鶴巢巖削鐵
용은 기름이 도는 듯한 물에 누워 있네 / 龍臥水旋油
〈우음을 적어서 방외의 벗인 천봉에게 증정하다〔偶唫錄奉千峯方外契〕〉
바람이 뿔피리 소리에 불어오자 매화가 막 떨어지려는 듯 / 風吹畫角梅初落
햇빛이 붉은 깃발에 비치자 불이 타오르려는 듯 / 日映朱旗火欲燃
〈정료위(定遼衛)〉
청산은 어렴풋이 뱀과 용이 달리는 듯한데 / 靑山隱隱走蛇龍
사찰은 아스라한 운무 속에 있구나 / 寺在煙霞杳靄中
〈내가 대구에 도착하고 나서 아직 한 달이 안 됐는데……〔余到大丘未一月……〕〉
자유로운 상상과 단련된 시어가 인상적인 이 시구들은 도은이 자연 경물을 핍진하게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특히 이 시구들에 나타난 이미지와 이미지의 호응은 시를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는 시의 내용적인 측면과 형식적인 측면을 동시에 중시하는 시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정(性情)에 근본을 두면서도 표현 또한 절묘한 시는 어떤 방법을 통해 창작할 수 있을까? 도은은 〈맑게 갠 날〔新晴〕〉에서 “시가 이루어짐은 바로 무심(無心)한 곳에 있는데, 부질없이 옛날 책에서 애써 도움을 구한다.”라고 지적하였다. 시 창작에서 무심한 마음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선입견과 편견, 욕망과 격정이 없는 마음 상태에서 사물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도덕적으로 바르면서도 사물의 모습을 핍진하게 묘사한 시를 지을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결국 도은에게 있어 시 창작의 원천 역시 심성 수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관(詩觀)에 힘입어 도은은 회화적인 의경이 돋보이는 당시풍(唐詩風)의 작품을 즐겨 창작하였다. 물론 그는 당시 유행하던 소동파(蘇東坡) 시, 즉 송시풍(宋詩風)의 작품도 자주 창작하였다. 도은이 〈신해년 제야에 석상의 제공에게 증정하다〔辛亥除夜呈席上諸公〕〉 제1수에서 눈앞의 사물을 마주하여 동파시를 읽는다고 하였다가, 제2수에서 동료들과 소쇄한 성당시(盛唐詩)를 짓는다고 한 것은 그가 두 가지 시풍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도은집》을 살펴보면 고시를 실어 놓은 권1에는 현실의 문제를 강개한 어조로 서술한 송시풍의 작품이 많고, 율시와 절구의 작품을 실어 놓은 권2, 권3에서는 자연 경물을 묘사한 청신한 당시풍의 작품을 빈번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도은 시 가운데 특히 주목을 받았던 것은 당시풍의 작품들이다. 목은이 “도은 시 몇 편을 읽어 보니 구슬이 쟁반을 구르는 듯하고 얼음을 골짜기에서 꺼내 옥병(玉甁)에 담아 둔 듯하였다.”라고 한 것이나 명나라 사신 장부(張溥)가 “도은 시가 왕왕 당인(唐人)의 작품과 매우 흡사하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드러낸다. 도은은 당시 가운데서도 특히 성당시를 애호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지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더욱 농후해진 것으로 보인다. 매우 친밀하게 지냈던 이집이 “수 질의 성당시를 보내 주었다.”라고 진술한 것이나 방외우(方外友)인 빈 상인(贇上人)이 산속의 절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그의 보따리 속에는 성당시가 많으리라.”라고 서술한 것, 그리고 관청의 동료들과 함께 “소쇄한 성당시를 지었다.”라고 언급한 것에서 그 주변 인물들 역시 성당시를 애호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도은집》에 보이는 당시(唐詩) 관련 자료는 소동파 시의 영향이 매우 컸던 여말의 시단에 당시풍의 시를 선호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도은은 그러한 경향을 지닌 문인 집단의 중심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도은이 당시풍의 시를 통하여 전하고자 한 내용은 무엇일까. 그가 무심한 마음으로 주시하고 형상화한 사물들은 맑고 깨끗한 것들이다. 소위 청신한 시들을 창작했던 것이다. 도은은 이 소쇄한 분위기의 시를 통해 주로 자신의 생활 이상(生活理想)을 표출하였다. 쇠란의 시대,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는 조정에서 정적에 맞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그는 속세의 삶에 깊은 염증을 품고 이를 벗어난 고결한 삶을 희구한 것이다. 인구에 널리 회자된 다음 시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산 북쪽과 남쪽으로 오솔길 나뉘는 곳 / 山北山南細路分
송화 가루 빗방울 머금고 어지럽게 떨어지네 / 松花含雨落繽紛
스님이 우물물 길어 띠풀 집에 들어가더니 / 道人汲井歸茅舍
푸른 연기 한 줄기가 흰 구름 물들이네 / 一帶靑煙染白雲
〈승사에 제하다〔題僧舍〕〉
시인은 시 전반부에서 깊은 산속과 오솔길을 통해 유적(幽寂)한 공간을 드러내고 송화(松花) 가루, 빗방울 등의 이미지로 고요함을 더욱 강조하더니, 후반부에서는 스님, 우물물, 띠풀 집, 푸른 연기, 흰 구름 등의 청정(淸淨) 의상(意象)을 연쇄적으로 제시하여 맑고 깨끗한 삶의 공간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맑은 우물물이 푸른 연기로 전화되어 이것이 흰 구름을 물들이는 장면은 스님의 고결한 삶을 또렷이 드러낸다. 물론 이 고결한 삶에 대한 바람에는 고상한 인격, 맑은 마음에 대한 지향이 아울러 내포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인이 종종 자신의 마음을 비유한 ‘오래된 우물〔古井〕’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오래된 우물’은 고학(古學)을 추구하는 맑은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도은의 생활 이상이 그의 시에서 단지 고결한 삶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 그것은 풍류를 즐기는 흥겨운 삶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성 동쪽에 있는 금강 승사 / 金剛僧舍在城東
동백나무 한 그루로 인해 온 뜰에 붉은빛이 가득하구나 / 一樹山茶滿院紅
어느 날 또다시 꽃 아래 손님 되어 / 何日更爲花下客
취한 눈길로 향기로운 안개 뿌옇게 흩어지는 걸 볼까나 / 醉看香霧洒空濛
〈승사(僧舍)〉
이 시에서는 ‘동백나무의 붉은 꽃’과 ‘취한 화자의 눈길’, 그리고 ‘꽃향기 어린 안개’가 서로 조응하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이를 즐기는 시인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충만한 기쁨은 꽃향기 어린 안개가 뿌옇게 흩어지는 몽환적인 광경과 이러한 놀이를 다시 기약하기 어렵다는 안타까움으로 인해 더욱 부각된다.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흥취를 즐기려는 시인의 태도에서 그가 풍류 넘치는 생활을 추구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사실 앞에서 말한 고결한 삶과 그다지 먼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 승사(金剛僧舍)’나 ‘동백나무 한 그루’와 같은 소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에도 속세의 더러움과 쟁투를 벗어난 삶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도은 시에서 시인의 생활 이상으로서의 고결한 삶이나 풍류 넘치는 생활이 빈번이 형상화 되었다는 점은 그의 시가 현실의 삶을 다루기보다는 초월적인 삶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도은의 생활 이상을 노래한 시들에 자유로운 삶에 대한 지향이 깔려 있는 것도 이러한 성향 때문이다. 정쟁(政爭)의 한복판에 있던 도은이 주로 고귀한 생활 이상을 아름답게 형상화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높은 정신세계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유념할 만하다.
《도은집》은 또한 도은의 개인적인 의식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여말 지식인들의 인격과 풍모, 그리고 그들의 동향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저서이다. 도은은 여느 문인들과는 다르게 당대 명사들의 모습을 곡진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그들의 풍모를 밝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명사들에 대한 평가는 물론 개인적인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예컨대 도은은 〈중구 감회(重九感懷)〉에서 중양절 모임에 참석했던 벗들의 신선 같은 자태를 묘사한다. 그에 의하면 정몽주의 큰 노랫소리는 하늘을 꿰뚫었고 김구용의 글씨는 구름과 안개가 가로지르는 듯했으며, 정도전의 취담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고 훤칠한 키의 염정수는 난새나 학과 같은 풍모였다고 한다. 당대 지식인의 개성적인 풍모가 또렷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특히 정몽주가 노래를 잘 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는 〈포은에게 부치다〔寄圃隱〕〉에서, 말 위에서 자신이 때때로 혼자 웃음 짓는 것은 포은이 비가(悲歌) 〈봉구황(鳳求凰)〉을 부르는 모습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포은의 낭만적인 기질은 확연히 드러난다. 또 〈정달가가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는 것을 전송한 시의 서문〔送鄭達可奉使日本詩序〕〉에서, 포은이 남들이 난색을 표하는 일본 사행의 임무를 맡게 되자 뛸 듯이 기뻐하며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포은의 비범하고 활달한 정신을 보여 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또 《도은집》에는 둔촌(遁村) 이집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특히 〈이호연이 합포의 막료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한 서문〉에는 이집이 당대의 사표인 이제현(李齊賢)과 안축(安軸), 그리고 이색의 특별한 존중을 받았다는 사실과 도은과 이집의 교제, 이집의 절의와 효성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시를 통해서는 이집의 강개하고 청신한 시풍을 지적하고 당시(唐詩)로써 서로 강마하였던 일을 서술하였다. 또 주목할 만한 것은 김광부(金光富 김광보(金光輔))에 대한 자료이다. 도은은 〈상주 풍영정에 제하다〔題尙州風詠亭〕〉에서, 상주에 풍영정을 지은 이가 김광부라고 명시하였고, 〈송 첨서에게 올린 시〔上宋簽書詩〕 병서(幷敍)〉에는 “목은이 전배(前輩)의 풍류를 논하면서 첫째도 남파 선생(南坡先生 김광부(金光富))이요 둘째도 남파 선생이라고 하면서 항상 손을 이마에 대고 흠모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이는 홍건적과 원(元)나라의 잔당을 격퇴하고 왜구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무신 김광부의 숨은 면모를 전하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당대 사대부 사회의 풍조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도은집》에는 또한 김광부의 무용(武勇)을 찬미하는 고시 〈오호가(嗚呼歌)〉가 실려 있는데, 사료로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또 〈상주 목사 정공을 전송한 시의 서문〔送尙州牧使鄭公詩序〕〉에는 안축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안축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방관을 자청한 효자이고 조정에서는 양신(良臣)이며 지방관으로서는 순리(循吏)여서 당대 사대부들에게 오래도록 존경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도은집》에는 유숙(柳淑)의 임절시(臨絶詩)와 그의 풍모를 기록한 시, 보우(普愚)의 행적을 기술한 〈태고 어록 서문〔太古語錄序〕〉, 김진양의 생애와 인품을 기록한 〈초옥자전(草屋子傳)〉, 그리고 정도전의 인품과 재능을 드러낸 〈삼봉을 생각하며〔憶三峯〕〉 등이 남아 있다. 여말 명사(名士)의 풍모에 대해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문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자료도 있다. 예컨대 〈이생에게 준 서문〔贈李生序〕〉은 공민왕 대에 성균관을 중건하고 이색ㆍ정몽주ㆍ이숭인 등이 유생들에게 경전을 열성적으로 가르쳤던 상황과 우왕 대에 사장(詞章)이 흥성하고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위축되면서 성균관이 퇴락해 버린 상황을 묘사하여 여말 지식인들의 동향을 상세히 보여 준다. 〈또 11월 17일 밤에 공익이 부르는 신라의 처용가를 들었는데, 성조가 비장해서 사람을 감격시키는 바가 있었다〔十一月十七日夜聽功益新羅處容歌聲調悲壯令人有感〕〉에는 구보(舊譜)에 전하여 오는 신라 〈처용가〉의 비장한 가락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안남에 대해서 읊다〔詠安南〕〉와 〈유구에 대해서 읊다〔詠流求〕〉에서는 안남 사신과 유구 사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어 시선을 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은집》은 도은 이숭인이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정치ㆍ사상ㆍ문학 방면에서의 위상을 구체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문집이라 할 수 있다. 도은의 이러한 비중을 고려해 볼 때 《도은집》은 결국 여말 정계와 지식인들의 동향, 문학의 기풍, 그리고 사상의 경향을 반영한 역사적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4. 《도은집》의 간행과 이본
지금까지 간행된 《도은집》들을 살펴보면 도은의 문집은 최소한 10여 차례 이상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러 이본들 사이에 드러난 판본상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초간본에서 원집(原集) 5권 2책으로 간행된 이후 주로 이 원집의 내용이 다른 판본의 형태로 간행되곤 하였던 것이다. 달라진 내용을 검토해 보면 후대에 와서 목차와 부록 2권이 더 첨가된 정도임을 알 수 있다. 굳이 판본을 계열화한다면 권4에 실린 산문들의 배열 순서에 따라 서로 다른 두 종의 판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요한 판본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초간본 《도은집》은 1406년(태종6) 태종의 명에 의해 변계량이 편차하고 권근이 서문을 써서 시집 3권, 문집 2권으로 만들어졌다. 목판본으로 간행된 이 판본은 한 면이 11행 19자로 이루어졌으며, 전남대와 성암문고(誠庵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권수(卷首)에는 주탁(周倬)ㆍ정도전ㆍ권근의 서문이 있고, 권말(卷末)에는 이색ㆍ장부ㆍ고손지의 발문이 있다. 이후 중종~명종 연간에 간행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도은집》이 있다. 이는 고려대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된 책으로 시집 3권과 문집 2권, 총 5권 2책의 목판본인데, 권4의 산문 배열 순서가 초간본과 다르다. 한 면이 9행 15자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의 시를 2구 1연씩 판각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권수에 이색ㆍ장부ㆍ고손지의 발문과 주탁ㆍ정도전ㆍ권근의 서문이 한꺼번에 실려 있다. 그 후 최립(崔岦)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던 1589년경, 즉 임진왜란 직전에 《자치통감강목》의 활자로 《도은시집》 몇 질을 인행하였다. 많이 찍지 않아서인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임란 이후 판본으로는 효종~숙종 연간에 간행한 5권 2책의 목판본 《도은집》이 있다. 한 면이 12행 22자로 되어 있으며, 판본의 체제는 초간본과 같다. 다시 말해 권4 산문의 배열 순서에 있어 초간본과 해당 판본은 고려대 만송문고본과 다소 다르다. 국립중앙도서관, 미국 의회도서관, 고려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또 1863년(철종14)에는 후손 이준길(李俊浩)ㆍ이도복(李道復) 등이 부록을 덧붙여 《도은집》을 간행했다. 연보와 행장을 짓고 다른 문인들의 시문 가운데 도은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해 부록 2권을 만든 후 원집 뒤에 붙여 7권 3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권수에 주탁과 정도전의 서문이 빠지고 권근의 서문과 오진영(吳震泳)의 서문이 붙었으며, 권말에 이색ㆍ장부ㆍ고손지의 발문이 빠지고 박의동(朴儀東)ㆍ이준호(李俊浩)ㆍ민치량(閔致亮)의 발문이 새로 붙었다. 원집은 12행 22자의 국립중앙도서관본을 그대로 사용하고, 부록은 11행 20자의 목판으로 판각하여 합편하였다. 현재 전남대, 성균관대, 고려대 만송문고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61년에 후손 이규형(李圭衡)이 여러 사서(史書)와 문집을 수집하여 연보를 다시 만들고, 도은의 유문(遺文) 및 제현창수서술제편(諸賢唱酬敍述諸篇), 문헌에 산견되는 도은의 사행(事行)을 모아 부록으로 속집(續集) 2권을 만들었다. 아울러 초간본 원집을 바탕으로 시체ㆍ문체별로 편찬하여 경북 성주에서 간행하였다. 7권 2책의 목판본인 이 판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이화여대, 동국대, 성균관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도은집》이 최소 10여 차례 이상 간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도은이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정치적ㆍ사상적ㆍ문학적 위상이 높았다는 점을 암시한다. 또한 임란 이전의 희귀 판본만도 4종 이상이 남아 있어 문헌학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서의 저본(底本)은 중종~명종 연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대 만송문고본이다.
2008년 12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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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언, 〈이숭인의 정치 활동에 대한 일고찰〉, 《전주사학》 4집,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1996.
양진조, 〈도은 이숭인의 시세계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논문, 2001.
유호진, 〈도은 시에 나타난 인격미 및 생활 이상〉, 《한국한시의 인생 이상》, 태학사, 2006.
[출처] 도은집(陶隱集)》 해제(解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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