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뜻하고 간략한, 어떤 정신성을 띤, 하지만 하고 있는 말이 시인이 감지하고 있는 것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읽는다.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는 순간에 문득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는 깨달음이 이는데, 두 사실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확연하게 서술된 것도 아니다. 이 간략함은 보이지 않는 심연 속의 '말'이 현실적인 제약을 벗어난 채 "무엇인가"와 "영원"을 만난 기억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전할 뿐이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저 인간에 대해 쓰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영원히 지나가버렸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고 있음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는 자에게 밥이란 고통을 연장시켜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때로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 쪽에서 오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또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밥을 먹어야 한다. "그저" 인간에 대해 쓰고 있듯이 "그저" 밥을 먹고 있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다. 인생이라는 영원할 수 없는 초라한 웅덩이에서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갸륵한 인생을 기다릴 수 있는 법이다.
〈황학주 시인 / 한라일보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202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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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알게 된다. 세계의 미세한 본질은 아무도 보지 못한 숲에 은닉됐다가 느닷없이 폭로되는 무엇이 아니란 것을. 사소하게 여겨질 법한 순간에도 삶의 처연한 진실은 발견된다.
볼에 떨어진 꽃잎 하나가 우주의 운행을 말해줄 때가 있고 아기의 옹알이에서 언어 이상의 절대가 발견되기도 한다. 한 공기 밥에서 인간의 불가역적인 영원성을 감각하는 시다. 중요한 건 삶의 반복성 속에서도 숟가락부터 드는 것이다. 그건 지친 삶을 견디는 방식이다.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시인) /
매일경제 '시가 있는 월요일' 20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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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에 한 번 정도 밥을 합니다. 압력솥을 쓸 때도 있고 조금 수월하게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을 때도 있습니다. 언제 한 번은 쌀을 씻다가 조금 먼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뜨물을 버릴 때마다 얼마간의 쌀알이 함께 쓸려나가는 것인데, 그러니 알이 작지 않고 커다란 쌀 품종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쌀알 한 톨이 참외만 하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밥 한 공기에 쌀 한 톨만 담으면 되니 참 편하겠다 하고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잘한 밥알을 씹을 때 입속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각은 사라지겠지요. 밥을 한 주걱 푸고 다시 한 주걱을 더 담는 마음도, 실수로 흘린 밥알을 주워 먹는 순간도 함께 사라지겠지요.
봄이 잘도 지나고 있습니다. 봄이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물론 이 봄에도 우리는 쌀을 씻어 밥을 빗고 저녁을 먹어야지요. 아침에는 아침을, 점심에는 점심을 먹고요. 영원할 때까지만 영원히.
〈박준 시인 / 문학광장 '시배달' 2022.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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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른 아침 당신은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죠. 그때 당신은 고개를 끄떡였죠. 무엇인가 영원히 다가오고 있다고, 지금도 영원히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당신은 밥을 먹었죠. 아침 햇살에 밤새 캄캄했던 모든 빛깔들이 깨어났죠. 지나가는 것의 아쉬움과 다가오는 것의 설렘 사이, 아침의 눈부심과 저녁의 어둑함 사이, 인생.
〈반칠환 시인 / 서울경제 '시로 여는 수요일' 201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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