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야 어김없이 제 길을 순환하지만,
사람이 느끼고 알아차리는 데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봄날에는 흔히 터져나는 꽃송이에 눈이 이끌리고,
부르짖는 새 소리에 귀가 이끌리어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봄 속으로 들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는 산뜩한 기운을 느끼고
차분해지는 마음으로 사방을 살피다가
어느새 색이 바래고 숱이 옅어진 초목에서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는 조락해 가는 모든 것을 아끼고
눈길이 점점 먼 곳을 향한다.
빈 마음으로 멀리 눈길을 돌리다 보면
저절로 밝은 달을 만난다.
아무래도 달은 가을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예로부터 ‘봄 바람 가을 달(春風秋月)’이라 했던가 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달을 노래하면서 더러는 애잔한 감상을,
더러는 북받치는 낭만을, 더러는 침울한 고독을 드러내었지만,
어떤 이는 삶의 지혜를 발견하고 굳건한 믿음을 다지기도 하였다
중국 송대(宋代)의 대문호 소식(蘇軾)은
적벽부(赤壁賦)라는 천하의 명문장에서 이렇게 읊었다.
그는 유학과 불교를 넘나든 당대의 거물이다.
‘그대는 또 물과 달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토록 끊임없이 흐르지만 말라버리지는 않으며,
저토록 커졌다 작아졌다 하지만 끝내 사라지지는 않는다네.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온 천지가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만물도 내 생명도 다함이 없다네.
그렇거늘 부러워할 게 뭐 있겠나?
자, 천지간에 만물은 제각기 주인이 있는 법이니,
진실로 내 것이 아닐진대 털끝 하나라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네.
오직 강 위에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산 위에 떠오르는 밝은 달만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모습이 된다네.
아무리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아무리 받아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것만은 조물주가 무진장 마련해 두어서 우리가 함께 즐길 만한 것이로세.‘
가을날 달밤, 적벽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고
물빛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깨달은 삶의 지혜를 이렇게 읊었다.
강물은 흘러감으로써 채워지는 것이고,
달은 이지러짐으로써 둥글어지는 것.
끊임없이 변하되, 변한다는 원리는 변하지 않는 것.
바라보면 나의 것이로되 나만의 것일 수는 없는 것.
소유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유임을
달을 통해 깨닫고 깨우쳐 주는 글이다.
이런 지혜를 중국인만이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땅에는 더 깊은 혜안으로 달을 바라본 이가 많다.
‘달이여, 이제 서방(西方)까지 가시겠구려.
무량수(無量壽) 부처님 앞에 아뢰어 주소서.
다짐 깊으신 존전(尊奠) 우러러 두손 모아 빌면서
원왕생(願往生) 원왕생 그리는 사람 있다고.
아아, 이 몸 예토(穢土)에 두고서야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을 이루실 수 있으랴!’
신라의 광덕(廣德)이라는 출가 행자가 십 년 수행 중에 부른 노래이다.
깊은 신심의 눈으로 바라본 달은 그냥 희멀건 물체가 아니라
서방 극락정토 아미타 부처님께로 가는 불국토의 사자이다.
그 머나먼 서방 정토에 이르거든, 저 동방 어느 곳에
왕생 극락을 지성으로 염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뢰어 달란다.
아미타 부처님은 이미 법장비구(法藏比丘) 시절에
일체 중생을 극락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서원을 세우셨으니
나를 버려두고서 그 서원을 어찌 이루겠느냐고
짐짓 떼까지 써 보는 것이 그 내용이다.
깊은 선정에 든 수행자는 자신의 왕생극락을 믿고,
아미타불의 다짐을 믿고, 그 다짐의 성취를 믿고,
마침내 한 차례 어김도 없이 억만년 서방으로 떠가는 달을 믿는다.
일체의 것이 나 밖에 있지 않고, 나 또한 일체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예토(穢土)에서 정토(淨土)로 가는 길이 열린다.
달은 그 길을 밝히고 이끌어주는 또렷한 등불이다.
서늘한 기운이 문득문득 스치는 가을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가을이 들어서지도 못하고
떠밀려 스쳐 지나가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와글거리는 비명 같은 낱말들은 이렇다.
선거, 부적격, 거짓, 갈등, 부적절, 금품수수, 강제기부,
가짜, 외압, 독설, 스캔들, 뇌물, 알선, 구속, 불구속,
시치미, 오리발 등등 열기와 악취에 가을은 정작 실종될 지경이다.
학문과 예술과 종교와 정치와 경제 같은 고급 재료들이
돈과 권력이라는 누룩 속에 버무려져 검붉은 거품을 내면서
한 통 속에서 부글거리며 익어간다.
진짜 통합이고 단일화이고 통일이고 해탈이다.
자연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세계’이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자정력’이다.
눈을 찌르고 귀를 찢는 오탁(汚濁)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살지라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에 하늘의 달이라도 한번 쳐다볼 일이다.
조물주가 마련해 준 다함없는 달빛을 가슴 가득 들여놓아도 보고,
서방 극락으로 떠가는 달덩이에 한숨 한 모금이라도 실어 보내 볼 일이다.
오늘도 나 스스로 저 돈과 권력의 오락장에
비싼 단체 관람권을 구입하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볼 일이다.
첫댓글 비싼 단체관람권........^^^^^^합장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