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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윤성일은 한동안 눈을 껌벅여야만 했다. 눈앞에 뿌옇게 흐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눈동자의 초점을 잡은 윤성일의 시선이 방안을 훑었다. 벽시계가 오전 6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수술을 마치고 하루 동안 중환자실에 있다가 어제 오후에 이곳 특실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고가 난 지 사흘이 지났다. 특실은 넓다. 왼쪽 창가의 간병인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누나 윤은지다. 머리를 조금 들었던 윤성일은 수술한 부위의 고통 때문에 이를 악물고 다시 눕혔다. 온몸이 붕대로 감겨져 있어서 마치 미라 같다. 머리와 가슴, 한쪽 팔과 다리가 감각이 없다. 어제 오후에 담당의가 1개월이 지나야 붕대를 푼다고 했다. 1개월은 또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병실 안은 조용하다. 어제 저녁에는 아버지만 빼고 전 가족이 다 모였다. 아버지는 수술하기 전에 한번 얼굴을 보이고 나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너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은 것이라고 작은형 윤수일이 말했다. 가족 위문단 속에는 강희나가 끼어있었다. 강희나는 오명화의 친척이니 가족 범주에 포함이 된다. 전세희의 옆에 붙어선 강희나는 시선만 주었지만 그 속에 수십 개의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윤성일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김가영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떠올랐다. 웃는 얼굴이다.
“형, 뭐해?”
맑은 목소리로 김가영이 물었다.
“보다시피.”
윤성일이 어깨를 치켜 올리는 시늉을 했다가 어금니를 물었다.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윤성일이 잇사이로 말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
“나 때문에? 왜?”
눈을 크게 뜬 김가영이 놀란 얼굴로 윤성일을 보았다.
“어머, 다쳤네. 어쩌다가...”
“네 생각이 나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거든. 그러다가 사고가 난 거야.”
“어디서?”
“갓길에서. 내가 갓길에 그냥 있기만 했어도 트럭이 받지 않았을 텐데...”
윤성일은 말끝을 흐리다가 멈췄다. 물론 핑계지만 그냥 차 안에서 비상라이트를 켠 채 최희명과 섹스를 했다면 트럭에 받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억지다. 그러자 김가영이 물었다.
“근데 왜 연락을 안 해?”
그 순간 윤성일이 눈을 떴다. 핸드폰, 내 핸드폰이 어디 있지?
사흘 동안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것은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다. 그 ‘무슨 일’이 무엇일까? 이틀 전부터 알바를 시작한 김가영은 끊임없이 그 ‘무슨 일’을 생각하면서 지낸다. 가장 끔찍한 예는 ‘사고’로 핸드폰이 없어지는 경우. 가장 생각하기 싫은 예는 윤성일이 자신을 잊으려고 그러는 경우. 핸드폰을 잊어버렸을 때는 다른 전화로 할 수 있을 것이며 손을 다쳤더라도 입으로. 입을 다쳤다면 문자로. 경찰에 체포되었을 경우를 알바집 주인한테 물었더니 경찰서 안에서도 전화를 할 수 있단다. 아침에 연락한다고 문자까지 보낸 남자가 사흘 동안 소식이 없으니 이상할 만 했다. 하지만 아는 건 핸드폰 번호 하나였고 한국대 3년 휴학생인 것은 알았지만 학교에다 알아보지는 못했다. 며칠 더 있다가 학교에 찾아가 보던지 할 작정이다. 도대체 왜 이럴까? 만날 그 생각이니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다. 오만 원 권을 오천 원 권으로 착각했다가 손님한테 핀잔을 받은 적도 있고 집에서는 어머니하고 윤영이가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자꾸 묻는다. 편의점 알바를 마쳤을 때는 오전 7시 반. 밤 11시부터 7시까지 8시간을 근무한터라 온몸이 찌뿌둥하다.
“수고했다.”
대형 편의점이었고 야간 당번은 둘이었는데 하나는 남자다. 주인아저씨는 예비역 장군이라는데 장사도 잘 되었지만 알바한테 잘해준다. 주인이 일당 4만원씩을 주더니 기간이 지난 식품박스 두 개를 그들 앞에 내놓았다.
“집에 가져가. 한 박스는 내가 가져가 먹으려고 남겨놓았다.”
“고맙습니다.” 하면서 남자 알바는 박스를 번쩍 들어 어깨에 올렸지만 김가영은 두 손으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무거웠기 때문이다.
“이런. 넌 박군처럼 안 되겠다. 배낭에 넣어가든지 해야겠다.”
주인이 말하자 박군이 김가영한테 물었다.
“누나, 내가 택시 정류장까지 옮겨줄까?”
“바보야, 택시비가 2만원 나오는데 일당 반이나 주란 말야?”
“그렇구나.”
“배낭 가져와서 내일 아침에 가져갈게요. 오늘은 비닐백에 덜어가져가구요.”
“그렇지.”
주인이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과연 머리가 좋아.”
“그런데 새벽에 손님이 낸 5만 원 권을 5천 원짜리로 받았답니다.”
박군이 흉을 보았다. 착한 남자다. 스무 살짜리로 대학 1학년인데 열심히 산다. 주변에는 착하고 열심이고 성실하며 끈질긴 사람들이 많다.
“네 핸드폰은 없어. 사고날 때 없어진 모양이야.”
윤은지가 커피 잔을 쥔 채 말했다. 오전 8시, 윤은지는 지금 자신이 근무하는 근대병원으로 출근을 하려는 참이다. 이곳 윤성일의 특실은 가족까지 머물 수 있는 아파트식 구조였기 때문에 윤은지는 옷까지 가져와 밤에는 이곳에서 잔다. 윤은지가 커피 잔을 내려놓더니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자, 새 핸드폰 사서 가져올게. 신청서류 양식 적자. 번호는 같은 번호로 해야겠지?”
“빨리 가져와.”
윤성일이 입술만 달싹이고 말했다.
“연락할 데가 있어서 그래.”
“불러. 이 자식아.”
그래놓고 적는 중인데 벨소리가 났다. 간병인이 나가 문을 열자 곧 오명화와 뒤를 따라 전세희가 들어섰다.
“응, 출근하려고?”
윤은지의 옷차림을 본 오명화가 밝은 표정으로 묻는다.
“네, 어서오세요.”
예의바르게 오명화를 맞은 윤은지가 전세희에게도 아는 체를 한다.
“응, 세희 왔니?”
“안녕하세요?”
전세희도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윤성일이나 만만하게 대했지 윤은지는 공포의 대상이다. 전세희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인간일 것이다. 왜냐하면 윤은지가 고등학교 7년 선배인데다 같은 서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제대로 걸린 셈인데 윤은지는 그래서인지 전세희를 예뻐했다.
“뭐 적어?”
다가선 오명화가 묻자 윤은지가 수첩을 접으며 말했다.
“사고로 핸드폰이 없어져서 다시 신청해서 만들어 주려구요.”
“이런. 바쁜 사람이.”
이맛살을 찌푸린 오명화가 손부터 내밀었다.
“이리 줘. 내가 할 테니까. 사람 시키면 돼.”
“아, 그래주시겠어요?”
“그럼, 당연히.”
윤은지가 찢어 내민 쪽지를 받으며 오명화가 가늘게 숨을 뱉었다.
“아버지가 걱정 많이 하셨어. 어젯밤에도 잘 주무시지 못했어.”
윤은지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지어낸 말일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와 한 침대에서 자는 사람의 전언인 것이다. 지금은 혈연의 자식보다 오명화의 위세가 더 크다. 그것은 윤정수의 권위가 그만큼 크다는 증거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 권위는 아직도 재산 장악에서 비롯된다.
윤수일은 변호사이며 구의원이다. 세 살 위인 윤태일이 25살에 사법고시에 패스했지만 윤수일은 24살에 패스했다. 그래서 기수 차이는 2년이 된다. 그만큼 머리가 좋다는 말도 되었는데 집안 대소사(大小事)는 윤수일이 챙겼다. 형 윤태일이 서울지검 소속 부장검사여서 나설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수일의 변호사 사무실은 항상 고객들로 붐볐다. 그것은 구(區) 주민들이 구의원 윤수일에게 민원을 부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서류값만 받는 터라 변호사 사무실은 적자 운영이다. 오전 10시 반, 오늘도 사무실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소음으로 떠들썩한 바깥 사무실과는 달리 안쪽 상담실은 조용하다. 상담실 소파에 둘러앉은 사람은 다섯.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와 일행인 40대 사내. 그리고 이쪽은 윤수일과 백영만이다. 백영만은 경찰간부 출신으로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다. 40대 사내가 입을 열었다.
“트럭 운전사는 보험도 들지 않았고 트럭도 임대차올시다. 그러니 윤성일 씨가 책임을 져주시란 말씀입니다.”
사내는 죽은 최희명의 외삼촌이다. 친척 중 가장 똑똑한 인물을 골라 온것 같다. 눈을 치켜뜬 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도 다 알아보고 왔습니다. 윤성일 씨 집안이 억만장자라고 하더만요. 죽은 우리 조카한테 위자료도 내놓지 못한단 말입니까? 아니, 누구 때문에 거기 있었는데요?”
윤수일과 백영만은 시선만 주었고 사내의 기는 더욱 살아났다.
“우리는 윤성일 씨 부친의 빌딩 앞이나 큰형이 근무하는 서울지검 또는 여기 사무실 앞에서라도 단식 농성을 할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언론사에다도 알려서 TV로 내놓도록 하지요. 그럼 어떻게 되나 보십시다.”
여전히 둘이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사내는 이제 주먹으로 탁자까지 내려쳤다.
“우리 희명이는 모델로 곧 계약금을 받을 예정이었단 말이요! 그 애가 벌어들일 돈이 1억, 2억인 줄 아시오? 50억도 넘을 겁니다!”
“....”
“50억을 내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당신들한테 매달릴 겁니다!”
그때 백영만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수일도 잠자코 일어나 먼저 방을 나갔고 뒤따라 나간 백영만이 잠시 후에 돌아와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이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앉아있는 셋을 둘러보며 말했다.
“조금 전 당신이 말한 내용을 법정에 제출할겁니다. 소환장이 올 테니까 그때 다시 뵙시다.”
그리고는 백영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녹음기가 돌아가지 않으니까 한마디 하지. 너.”
백영만이 손을 권총처럼 만들어 외삼촌을 가리켰다.
“고필수, 너 강도, 사기, 폭행으로 전과 3범이지? 너 잘 걸렸어. 5년은 살게 해주마.”
다가선 강희나가 윤성일을 내려다 보았다. 오전 11시 반, 조금 전에 둘째 형수가 다녀갔고 방안에는 간병인 한명뿐이다. 윤성일의 시선을 받은 강희나가 물었다.
“나 오는 게 싫어?”
강희나는 지금까지 다섯 번 병원에 왔다. 첫 번째는 혼자 와서 먼 곳에 서서 보기만 하다가 돌아갔고, 두 번째는 오명화와 함께, 세 번째는 전세희하고, 네 번째는 혼자 그리고 지금도 혼자 왔는데 방안에 간병인 하나뿐이다. 그전에는 방안에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도 못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 ‘나 오는 게 싫어?’가 되었다. 그때 윤성일이 물었다.
“너 이번까지 병원에 다섯 번 왔지?”
“어떻게 알아?”
놀라 강희나가 묻자 윤성일이 입술끝을 비틀고 웃었다.
“내가 번데기가 되어있지만 눈은 멀쩡하거든.”
“미쳐. 입도 멀쩡하네.”
긴장이 풀린 강희나가 침대에 바짝 붙어 섰다.
“안 아파?”
“죽은 애한테 미안해. 가슴이 아파.”
어느덧 정색한 윤성일이 말을 잇는다.
“걘 죄가 없는데 불쌍해.”
“누군 죄 있나?”
그러자 힐끗 시선을 주었던 윤성일이 외면했다. 방안에 잠깐 정적이 덮여지고 있다가 강희나가 깨뜨렸다.
“좋아했던 여자야?”
“아니.”
강희나에게 시선은 주었지만 윤성일의 눈동자는 초점이 멀다. 그 시선으로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그날 밤 처음 만난 여자였어.”
“....”
“데리고 강릉을 가다가 사고가 난거야. 가는 게 아니였는데. 그래서 미안해.”
“....”
“도중에 돌아오려고 했어. 그랬다가...”
“그만.”
손바닥을 펴보인 강희나가 똑바로 윤성일을 보아다.
“내가 기다려줄게.”
이번에는 윤성일이 입을 다물었고 강희나가 말을 잇는다.
“그게 언제까지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기억해둬.”
“....”
“그걸 부담으로 느끼지 않을 인간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그리고는 손을 뻗어 붕대 밖으로 삐져나온 윤성일의 볼과 콧등 그리고 입술까지를 부드럽게 쓸었다.
“나 갈게, 번데기.”
그러자 윤성일이 초점을 잡은 눈으로 강희나를 보았다.
“야 나한테는 네가 과분해.”
“내 맘이야. 이 번데기 자식아.”
목소리가 또랑또랑해서 간병부 아줌마가 놀라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첫댓글 즐감요
감사합니다
^^
굿,,즐감,,,
즐감요~
감사히 잘봤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
감사
번데기가 딱이네,,,거시기가,,
잘 읽고 갑니다 감사
모두 만만치가 않구나
잘읽었습니다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