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동 속에 하루가
한 해가 저무는 마지막 주중 목요일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이 간밤 관리 규약 개정안 동의 여부 투표해주십사고 집을 다녀갔다기에 아침 식후 관리사무소를 방문했다. 휴대폰 카톡으로 실시한다는데 나는 익숙하지 않아 대면 투표했다. 관리사무소는 생각보다 다수 직원이 근무했는데 입주민에 대한 친절도는 낮아 보여도 갑을의 관계를 떠나 아무런 소리 않고 그냥 나왔다.
나이가 들면 되도록 말수는 줄이고 인내심은 더 발휘해 참음이 상책이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용지호수로 가려고 차도 횡단보도 녹색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차선을 따라 운전해 가던 한 운전자는 전방이 돌발 상황이 아님에도 경음기를 크게 울려 까무라질 뻔했다. 나만이 아니고 한 할머니와 아이들도 같이 놀랐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자동차 경음기 소리가 크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길 건너편 아파트단지와 인접한 초등학교 앞으로 가니 등교가 마무리되어 배움터 지킴이는 자리를 떴다. 교문 담벼락과 맞닿는 꽃밭에 늦게까지 시들지 않던 옥국이 노란 꽃잎을 달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요새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꽃이 드문 때라 휴대폰을 펼쳐 갤러리에 담았다. 용지호수로 가니 어울림 도서관에는 문을 여는 시각이 일러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걸었다.
올해는 겨울 들머리 날씨가 따뜻했던 관계로 예년이면 11월 하순 용지호수를 찾아온 고니 가족이 동지를 앞둔 무렵 강추위에 뒤늦게 날아왔다. 어제 늦은 오후 같은 아파트단지 꽃대감 친구와 용지호수로 산책을 나갔다가 보안등이 켜지던 수면에 자유롭게 헤엄쳐 다녀 반가웠다. 작년에는 다섯 마리였는데 올해는 네 마리였다. 겨우내 용지호수에 잘 놀다가 봄 어느 날 떠나지 싶다.
호숫가를 한 바퀴 걸으면서 고니 가족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밤에는 빙판 위에 웅크리고 잠을 자고는 날이 밝아오자 얼음이 녹은 수면에서 헤엄쳐 다녔다. 깃이 새카만 물닭은 여러 마리가 무리를 지어 세를 과시했다. 산책로에서 잔디밭 구석에 자리한 도서관을 찾으니 사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열람대에 며칠 밀려 쌓인 지방지를 펼쳐 활자가 전하는 지역의 세상 이야기들을 접했다.
신문을 열람한 후 서가에서 신간이면서 이전 눈에 띄지 않아 놓쳤던 책이 한 권 보였다. 세계적 수학자 안재구 박사와 그의 딸이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이었다. 경북대와 숙명여대 교수였던 안 박사는 70년대 후반 남민전 사건에 연루 사형을 선고받은 후 무기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다 서울올림픽 직전 가석방되었다. 옥중의 아버지와 4남매에서 한 딸이 나눈 편지글 모음이었다.
안재구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와 보낸 유년기를 회상한 ‘할배, 왜놈소랑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나는 오래전 감명 깊게 읽었다. 분단이 낳은 아픔은 동향 밀양인으로 통일혁명당 사건 무기수 신영복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명석한 두 분은 수학과 경제학에서 더 이상 연구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차가운 감옥에서 가족과 오래 떨어져 보냈다.
안 박사 딸이 부친 사후 가족과 나눈 편지글을 묶은 ‘봄을 기다리는 날들’을 대출받아 도서관을 나왔다. 일월 초 가족 행사에 쓰일 표창 서식을 구하려니 동네는 문구점이 사라져 마련하지 못해 상남동으로 갔더니 해결되었다. 그 내용을 채울 액자도 같이 구해 놓고 재래시장 대끼리 장터 보리밥으로 점심을 한 끼 때웠다. 오후는 불편을 느끼는 무릎 진료가 예약된 병원을 찾았다.
상급 병원을 찾아 집 근처 외과에서 다닌 진료 의뢰서를 건넸다. 절차에 따라 정형외과 전문의를 만나 영상의학과에서 엑스레이 사진을 여러 장 찍게 한 후 별다른 이상 징후나 소견이 나오지 않았다. 의사는 처방전에 따른 약을 몇 차례 복용한 후 증세 호전 여부를 지켜본 후 MRI든가 다른 치료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병상에 눕지 않고 아직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을 감사하게 느꼈다. 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