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5일 오산 독산성 근처 콩맛집에서 점심을 하고
독산성과 세마대 둘러보러 올라갔다.
날씨는 쌀쌀하고 바람이 있었으나
미세먼지,초미세먼지 좋고 시야도 좋은날이다.
코스:세마대 주차장[1.3km]→산림욕장[0.5km]→제2주차장[0.8km]→보적사[1.2km]→독산성둘레길[1.1km]→세마대주차장
시간:2시간30분
독산성과 세마대에 대하여 알아 본다.
독산성은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의 총 연장은 1,100m이며 내성은 350m이 달하는 아담한 산성이다. 독산성의 처음 축조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독산성의 위치적 특성이 용인, 양지 간에 있는 고성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전략상의 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은 고성이었고, 신라통일기나 고려시대에서도 군사상 요지로 되어 왔다. 독산은 본래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왔으나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전략에 연유해 지금은『세마산』또는『세마대』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정상에는 이승만 대통령 친필의 세마대라는 현판이 붙은 누각 건물이 있다.
독산성은 군사기지로서의 주요 위치에 놓여있긴 하지만, 샘물의 부족이 흠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때문에 1593년(선조26) 명나라 원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하함에 전라도 순변사이던 권율장군이 명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자 2만 명의 군사로 이곳에 진을 치고 대군과 대치한 독산성 전투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군은 이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탐정군사에게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권율장군은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백마를 산 위에 끌어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말을 씻는 시늉을 하게 하였다. 이것을 본 왜군은 성내에 물이 많은 것으로 알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샘물의 부족한 단점을 권율장군이 슬기롭게 극복한 세마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1957년에 복원되었다.
※ 1977년 간행된 전국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독산성 및 세마대지」의 연혁에 대해 백제때 축성된 고성이었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요지로 되어 왔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주둔했고 변이중으로 하여금 화포를 발명, 제작케 하여 행주대첩에서 승전케 하였다. 또한, 임란후 조정에서 독산성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으며 정조16년(1792년)에 독산성과 세마대를 중수하였다.
세마대 주차장
벚나무길
잣나무길
산림욕장가는길, 치톤치드가 많이 나오는 잣나무가 ....
세마대 제2주차장
보적사 올라가는 길 입구
보적사 가는길에 나무사이로 화성 통탄모습을...
보적사 오르는 길이 ...
보적사 유래
보적사란 이름이 지어진 것은 백제시대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겨우 쌀 두되만이 남아 있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한 후,
공양후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기적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열심히 공양하여 보화가 쌓인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 명명 되었다고 한다.
1988년 7월 27일 전통사찰 제34호 지정되었다.
동문
동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각각 두개씩 남아 있다.
동문은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가 있다.
양산봉 뒤로 수원시대가...
보적사 모습
대웅전과 오층석탑 사이로 권율장군이 말을 쌀로 씻겨,일본군을 속였다는 세마대가..
보적사
용주사 본말사지에 의하면 보적사는 창건당시 이 세계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수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정전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으나,
1990년 도광정운(道光正云)스님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적사는 백제의 고성인 독산성 정상하단 동문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적사 올라오는 길이....
독산성을 따라 한바퀴...
독산성
독산성은 사적 제 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의 총연장은1,100m이며, 내성은 350m이 달하는 아담한 산성이다.
독산성의 처음 축조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독산성의 위치적 특성이 용인,양지 간에 있는 고성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전략상의 이점이 있는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은 고성이었고, 신라통일기나 고려시대에서도 군사상 요지로 돼 왔다.
독산은 본래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왔으나,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 전략에 연유해 지금은『세마산』 또는『세마대』라고도 부르고 있다.
독산성을 걸으면서...
화성 동탄 모습
오산쪽 모습
독산성을 걸으며 뒤돌아 보니 .....
남문
남문은 독산성으 정문으로 진남루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의 규모는 6칸 이었으며 남문을 영조,정조,순조때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수 있었으며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학석 2개가 남아 있다
독산성과 세마대지를 발굴조사중 이다.
2018년 조사결과
- 조선시대 후기까지 생활한 흔적 확인
-협소한성에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축대로 여러단을 마련한 후
건물을 지음
-독산성 운영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건물지로 판단됨
-조선시대층 하부에서 통일 신란시대 층이 확인되어 선대문화층의 존재를 확인
암문
암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학석 2개가 남아 있다.
이문은 순조 4년 1804년에 현릉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는 대신 새로 지은 성문이다.
1985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고 이후 2010년에 개거식 성문이 평거식 성문으로 복원 되었다.
수로및 수구
수로및 수구는 성안의 물을 빼고 생활하수를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바작에는 널돌이 깔려 있다.
서문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정조14년 1790년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이문은 순조 4년 1804년 현릉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파손 되어 있던 것을 1983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으며, 바닥에 성문 고정시켰던 문확돌 2개가 남아 있다.
북문
북문은 평거식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2개씩 남아 있다.
[화성지] 기록에 따르면 문루와 이름이 없고 사람만 다니던 문이다
1982년 정비하였고 2019년 이번에 발굴보수 중이다.
수원시내 모습
봉담쪽 모습
향남쪽 모습
독산성을 내려오며....
날씨는 쌀쌀하고 바람불지만
쾌청한 날에 독산성 둘레길을 돌아보고 나니
즐겁고 행복한 하루여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