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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수시로 비가 내렸다.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는 줄이 길었다. 그가 20대를 처음 시작했던 혜화동 시절의 서울대학교의 마지막 흔적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그는 90년대 학전소극장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으로 조문객들과 인사했다. 내 앞에는 송창식, 윤형주 선생이 보였다. 뒤에는 이해찬 전총리도 보였다. 그의 장례식 첫 날은 정치와 문화를 막론한 한국현대사 인물들로 가득했다. 누가 먼저 빈소에 들어가는 것 없이, 시민들과 한 줄에 서서 고인에게 인사했다.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 공부하면 알수록, 김민기라는 인물은 무겁고 신비하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의 첫문장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이어진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의 한국 현대사를 마르크스가 관찰했다면 주어에 김민기를, 목적어에 한국을 넣었을 것이다. 자본가들의 공포가 19세기 공산주의를 키웠듯, 한국의 독재권력은 20년 가까이 김민기라는 이름을 금기시했다. 그 결과, 미대생이자 젊은 포크 가수는 역으로 한국 사회의 상징이자 신화같은 존재가 됐다.
1975년, 유신정권이 ‘아침이슬'을 금지곡으로 묶기 전부터 권력은 김민기를 불경한 존재로 여겼다. 서울대 신입생 환영행사에서 자신의 노래와 미국 프로테스턴트 포크를 불렀다는 이유로 연행됐고 그 때 부른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불과 몇 달 전 나온 데뷔 앨범은 전량 회수됐다. ‘아침이슬'은 양희은의 목소리로 살아남아 1973년 당국에 의해 건전가요로 지정되기까지 했지만 유신의 폭주가 시작된 1975년 결국 대표적 금지곡이 됐다.김민기라는 이름은 사라졌고 그의 노래는 대학가와 공장에서 암암리에 부르는 구전가요가 됐다. 트는 것도,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권력은 그의 음악이 가진 힘을 잘 알았기에 두려워했다. 어떤 메시지도 담기지 않은 그의 노래는 곧 모든 메시지로 읽힐 수 있음을 인지했다. 그 정도 억압에도 체포나 구금당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공권력을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순간 생길 반작용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회유하려 했다. 중앙정보부는 입대한 김민기를 찾아가 대중적 건전가요를 만들라 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김민기는 “군인 가신 오빠는 몸 성하신지/아빠는 씻다 말고 먼 산만 바라보시네"라는 가사가 담긴 ‘식구 생각'이라는 노래를 건넸다. 중정 요원은 고개를 젓고 돌아갔다. 소작농 생활을 하던 1981년, 신군부는 관제행사 ‘국풍81’에 그를 동원하려 했다. 김민기는 “농사짓느라 바쁘다”며 거절했다.
따라서 권력은 계속 그를 지워 냈다. 없는 이로 만들었다. 1978년, ‘상록수'가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란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이 노래의 작사/작곡에는 김아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김광석의 목소리가 처음 우리를 찾아온 1984년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 기획자 이름은 김민기가 아닌 ‘민기형'이었다. LA올림픽에서 탈락한 선수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주제곡 ‘봉우리'는 만든 이의 이름없이 방송됐고, 양희은의 앨범에선 양희은 작사/작곡으로 표기됐다. 그 즈음 서울로 올라와 어린이극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도 이름을 내걸 수 없었다.
1975년부터 10년이상 김민기는 그렇게 유령으로 머물렀다. 1978년 4월, 촉망받는 가수이자 MC였던 이수만이 밤무대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가 한국연예협회의 징계 대상에 오를 정도였다. 억누를수록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었다. 남아있던 음반을 테이프로 복사하여 친구들에게 전했다. 기타를 치며 후배들에게 알려줬다. 손에서 손으로, 입에서 입으로 노래는 은밀히 퍼지고 이어졌다. 그럴수록 스무살 청년의 경험을 그린 노래엔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주술적 힘이 스며들었다.
1987년 6월 항쟁, 서울시청앞에 모인 100만 인파가 ‘아침이슬'을 합창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인파의 한 명이던 김민기가 이를 듣고 ‘아침이슬'이 더 이상 자기 노래가 아니라 생각했다는 일화도 그렇다. 내가 정말 소름끼치는 점은 이를 주도한 세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름모를 누군가가 부르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노래의 불길이 피어났다는 얘기 아닌가. 유신과 5공화국내내 금지됐던 노래가 대중의 집단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가 연쇄발화했다는 것 아닌가.
6공화국이 출범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지난 시대의 금지곡 해제였다. 1975년과 마찬가지로 ‘아침이슬'은 이 리스트의 가장 위에 있었다. 시민은, 대중은, 국민은 김민기에게 이름을 찾아줬다. 다같이 노래함으로써 상징을 부여했다. 하지만 권력은, 시스템은 여전히 김민기를 두려워했다. 6월 항쟁과 민주화 과정에서 김민기가 ‘‘아침이슬'을 등에 업고 뭘 하려한 것도 아니다. 그저 농사일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 후 만들었던 아동용 뮤지컬을 음반화하려고 했을 뿐이다. 검열은 소박함마저도 불허했다. 탄광촌 아이들이 화자인 <아빠 얼굴 예쁘네요>는 난도질당해 대본과 다른 모습이 됐다. <개똥이>도 그랬다. 1975년 탄생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는 1996년 위헌판결을 받았다. 악습의 마지막 해, 김민기는 1991년부터 학전소극장에서 공연했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음반으로 내려했다. 1996년 상반기였다. 김민기에게 ‘흥행'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안겨준 이 작품은 절반 이상이 잘려 나갔다. 3년전 그의 4장짜리 전집이 발매되며 구전가요로 전해지던 음악들이 비로소 주인을 찾게 됐음에도, 검열이라는 사슬은 그를 묶어두고 싶어했다. <지하철 1호선>발매 후 두달이 채 지나지 않은 6월 7일 음반사전심의제도는 철폐됐다. 직후 서 태 지와 아이들이 ‘시대유감'을 온전한 모습으로 냈고, 그 해 하반기 크라잉 넛이 ‘말달리자'에서 “닥치고 내 말들어"라 외쳤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할 뿐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와 김영삼까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음반사전심의제도의 역사가 김민기로 시작해 김민기로 끝났다.
민주화 이후 ‘아침이슬'은 광장의 국가였고 ‘상록수'는 IMF극복의 송가였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호국영령 행사곡이 됐다. 유령으로 떠돌던 그의 작품은 한국 현대사 몇몇 중요 챕터의 표제에 자리잡았다. 시민과 국가, 진보와 보수 모두 김민기를 원했다. 그의 이름을 활용하고 싶어했다. 김민기는 피했다. 냉전이 끝난 1990년 이후 운동권 출신중 적잖은 이들이 대중문화계에 들어왔다. 조직과 담론을 생성했다. 미디어와 콘텐츠 사업을 벌였다. 누군가는 부와 명예를 이뤘다. 새로운 기득권이 됐다. 처음에는 386이라, 지금은 586이라 불리는 세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김민기는 그 어떤 곳에도 있지 않다. 군부의 회유를 거부했듯 새로운 권력에도 그랬다. 그에게 자신의 작품과 상징성은 과거완료일 뿐이다. 작품이 낳은 명예와 이익을 김민기는 늘 거부해왔다. 노무현 정권 시절 그를 문화부장관으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의 성정을 알기에 제안도 못하고 포기했다 전해진다. 오랜 세월 유령으로 머문 김민기가 이름을 찾은 후 가진 건 딱 하나다. 학전소극장.
학전은 대학로에 있는 밭이다. 지금 대중문화의 적잖은 씨앗들이 학전의 밭에서 자랐다. 댄스 음악 혁명으로 노래할 곳을 잃은 이들이 관객과 만났다. ‘업소'와 ‘밤무대'의 날품팔이 행사가 아닌 오직 음악으로 한 시간 이상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는 음악 토크쇼의 시작이었다. ‘지하철 1호선'의 성공은 한국에 뮤지컬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들었다. 학전에서 탄생한 씨앗이 모종이 되어 한국 문화계 곳곳에 퍼졌다. 김광석, 동물원, 여행스케치, 윤도현,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같은 스타들이 이 곳에서 자랐다. 그 뿐인가. 학전에서 만든 작품들의 크레딧을 살피다보면 영화와 드라마에서 종종 마주치는 이들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2004년 <공장의 불빛>을 리메이크했던 정재일은 이후로도 음악감독으로 학전의 어린이극에 꾸준히 참여해왔다. ‘김광석 1000회 공연'의 업적은 이적, 루시드폴 같은 이들이 소극장 장기 공연을 할 때 학전을 택하는 모델이었다. 방송에선 채울 수 없는 현장의 숨결을, 음악가들은 학전에서 채우고자 했다. 세상을 떠난 유재하, 김광석을 추모하는 가요제와 다시 부르기 시리즈가 탄생한 곳도 학전이었고, 그들을 위한 장학재단도 김민기가 만들었다. 30여년전 학전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근대가 출발했다. ‘산업'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화와 예술의 근본적 가치를 타임캡슐처럼 보존했다. 김민기는많은 처음을 만들었고 많은 이들에게 처음을 안겨줬다.
김민기가 세속의 가치와 만날 때는 대부분 학전과 관련됐을 때 뿐이다.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넉 장의 앨범을 계약했다. 저작권 협회에 가입하고 노래방기기 업체와 민사 소송을 벌였다. 오직 학전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의 많지 않은 인터뷰는 주로 <지하철 1호선>을 비롯, 학전 작품을 홍보할 때 였다. 지인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독지가의 후원도 거절했다. 혼자 어떻게든 꾸려 왔다. 흥행하는 작품은 제법있었지만 운영은 만성 적자라는 기이한 구조로 30여년을 이끌어왔다. 인적 없는 새벽에 조용히 나무를 심었고 나무는 셀 수 없는 열매를 맺었다. 열매 하나 하나가 다시 나무가 됐다. 우리는 그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에서 산다. 김민기는 어떤 나무도, 어떤 열매도 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zakka.kim/posts/%ED%95%98%EB%A3%A8%EC%A2%85%EC%9D%BC-%EC%88%98%EC%8B%9C%EB%A1%9C-%EB%B9%84%EA%B0%80-%EB%82%B4%EB%A0%B8%EB%8B%A4-%EA%B3%A0%EC%9D%B8%EC%9D%98-%EB%A7%88%EC%A7%80%EB%A7%89%EC%9D%84-%EB%B0%B0%EC%9B%85%ED%95%98%EB%A0%A4%EB%8A%94-%EC%A4%84%EC%9D%B4-%EA%B8%B8%EC%97%88%EB%8B%A4-%EA%B7%B8%EA%B0%80-20%EB%8C%80%EB%A5%BC-%EC%B2%98%EC%9D%8C-%EC%8B%9C%EC%9E%91%ED%96%88%EB%8D%98-%ED%98%9C%ED%99%94%EB%8F%99-%EC%8B%9C%EC%A0%88%EC%9D%98-%EC%84%9C%EC%9A%B8%EB%8C%80%ED%95%99%EA%B5%90%EC%9D%98-%EB%A7%88%EC%A7%80%EB%A7%89-%ED%9D%94%EC%A0%81%EC%9D%B8-%EC%84%9C%EC%9A%B8%EB%8C%80/8278590515519645/
첫댓글 좋은 글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김작가와 아티스트 킬드런까지 알게 된 건 덤 이네요.
지난 달 서울 갔을 때 학전보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늘에서도 학전에서 좋은 공연 많이 하시길
지난 한주는 저에게 눈물과 슬픔의 한주 였습니다
너무 존경했던 김민기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