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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언약궤 운반(2)
삼하 6:12-23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 설 교 >
최선을 다하면 기쁨을 거둔다
삼하 6장 12~19절 / 이근수목사
서 론
과거 김병현의 전력투구
미국 아리조나 다이아 몬드 백스 야구팀에 한국인 투수 김병현 선수가 있습니다. 선발 투수 랜디 죤슨등과 힘을 합하여 8회 9회에 등판하여 경기를 마무리하는 투수로 지난해에 팀 승리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토드 S 마이어는 “신이 22세의 어린 그에게 그런 투구 능력을 내리다니 믿기지 않는다”감독- “BK는 우리 팀의 확실한 마무리다” 결국 다이아몬드 백스는 2001년 미국 메이저 리그 챔피언이 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뉴욕 양키스 팀과의 챔피언 결정전 때 9회에 나와 그는 평소 자기 힘의 80%를 던지다 홈런을 맞고 패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 할때 기쁨을 얻습니다.
각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협력의 효과-시너지 효과-를 얻어 보람과 기쁨을 얻습니다.
본 론
슬픔을 당한 이스라엘[삼상4:]
사무엘상 4장 2절을 보면, 주전 1050년경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여 참패를 당하고 4000 여명이 전사하는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불레셋을 이기려면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군은 벱궤를 전쟁터로 옮겨왔습니다. 법궤 곁에는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4]
불레셋 군도 이스라엘 진영에 법궤가 도착했다는 정보를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애굽을 물리친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불레셋 지휘관들은 군인들에게 “전군은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한 군인이 되라”-고 군인들을 독려하고 사기를 진작시켰습니다.[9] 이 말을 들은 불레셋 군인들은 사기가 충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법궤를 앞세우고 불레셋과 대대적인 전쟁을 하였습니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또 다시 패하여 3만 여명이 전사를 하였고[삼상4:10] 법궤를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또한 엘리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참패했고 두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98세의 노 제사장 엘리는 충격을 받고 의자에 앉아있다가 그 자리에서 쓸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18] 3 부자가 한 날에 죽었습니다.
그때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3만 여명이나 죽고, 법궤를 빼앗기고, 남편이 전사하고, 시아버지가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그녀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에서 아기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날은 이스라엘에게는 역사적으로 치욕적인 날이요 엘리 제사장의 집이 망한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패배했습니까?
엘리가 그렇게 훌륭한 제사장이었지만 그는 자식들을 믿음으로 힘써 가르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또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제사장의 아들들은
1) 불량자들이었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 삼상2: 12]
2) 성적으로 타락하여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까 지 했습니다. [ 22절]
3) 아버지가 아들들을 징계하지 않았습니다.[24절]
4)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불순종하였습니다. [25절]
5)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습니다.[25절]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서서 적과 싸워 주시고 이스라엘은 다만 전과만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승리의 승리를 거듭하여 가나안 땅을 모두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금번의 전투에서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을 패하게 하셨습니다. 믿음없고 불순종하는 그들을 패하게 하셨습니다
불레셋의 신을 파괴하신 능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패하게 내버려 두신 하나님은 이번에는 법궤를 뺏아간 불레셋을 심판하셨습니다.[5장] 불레셋은 하나님의 법궤를 전리품으로 여겨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신당 안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신당으로 들어가 보니 다곤의 목과 두 손목이 끊어져 땅에 나딩굴고 있었습니다.[삼상5:4] 불레셋의 신이 산산 조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파괴하신 것이었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 몸에 독종이 생겼습니다.[6] 독종이 너무 심해 백상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삼상5:12]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 보내진 법궤
불레셋은 더 이상 법궤를 자기 땅에 둘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7개 월 후에[삼상6:1]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법궤를 마차에 실어 돌려 보냈습니다[삼상6:13]
호기심에서 함부로 하나님의 법궤를 들여다 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오만] 칠십명이 죽었습니다.[삼상6:19]
방치된 법궤
법궤는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두었습니다. 20년 동안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법궤를 지켰습니다.[삼상7:1]
이때[1030년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모하였습니다.그동안 이스라엘에는 성막도 파괴되어 없어지고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2]
그러나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된 하나님의 법궤를 건사하고 성막에 안치하고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불상사가 일어나다
법궤를 뺏기고 약 45 여년이 지난 뒤 사울 왕을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된 다윗[주전 1005]은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주전 1000년] 다윗이 그처럼 사모하던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습니다. 이날 다윗은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나곤의 타작 마당을 지날때에 갑자기 소가 놀라 뛰자 웃사가 급히 손으로 법궤를 붙들었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법궤를 3개 월간 모셔 두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오벳에돔과 온 집에 큰 복을 주셨습니다.[삼하6:11]
법궤를 다시 모셔오는 다윗 왕
오벳에돔의 집이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날 너무 기뻐서 춤을 추되 "힘을 다하여"(삼하6:14) 춤을 추었습니다. David danced before the LORD with all his might ;
최선을 다하여 춤을 춘 다윗
다윗 왕은 법궤를 모셔오는 감사와 기쁨을 춤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시게 된 일에 감격하며 자기가 할수 있는 것을 다 기울여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는 경사스러운 날에는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5, 15절)
믿음이 없는 사람이 볼 때에는 한 나라의 왕이 경솔하게 춤을 추어야 하는가 하겠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는 그 기쁨 때문에, 춤을 추되 힘을 다하여 - 최선의 춤을 추었습니다.
베 에봇을 입었더라 - 베 에봇(linen ephod)은 본래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입던 일종의 겉옷입니다.
1) 법궤를 운반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세마포 겉옷이나 베 에봇을 입었습니다(대상15:27).
2) 어린 사무엘도 세마포 에봇을 입었습니다. (삼상 2:18).
다윗의 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기뻐서 춤을 추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뻐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하나님을 사랑해서 춤을 춘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윗과 같은 기쁨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십니다.
시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사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 하라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오늘도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십니다.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불심이 좋은 사람-
사업이 잘하는 부자가 절을 3 개나 지어 바쳤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데 그의 집이 불이나서 다 타버렸습니다. 그런데 불교인이나 절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답니다. “그것은 네 업보다” 하고는 무관심했습니다.
그가 상심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 얼마나 상심이 되느냐? 식사는 했느냐 하면서 밥도 사주고 목욕도 시켜주었습니다. 당신은 누군데 내게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나는 이웃에 사는 @@교회 장로인데 큰 화재로 피해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주님의 위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큰 감명을 받고 내가 이제까지 헛것에 힘을 썼지만 이제부터는 참된 것에 열심을 내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다윗 왕
예루살렘에 법궤를 모신 다윗 왕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헌신을 다잠하는 제사이고 (레 1:3-17), 화목제는 그동안 소원(疎遠)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친밀하게 하겠다는 결심의 제사입니다. (레 3:1-17).
다윗은 백성을 축복했습니다. [18]
다윗은 제사를 드린후 백성들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마음껏 축복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은 백성을 사랑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다윗은 화목 제물을 백성들과 나누어 먹었음 [19절]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떡 한개와 고기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을 나눠주어 먹게했습니다.[ 19절]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목의 애찬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완전한 통일 왕국을 이루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을 무시하는 미갈[17,20]
다윗왕은 백성을 축복해서 보내고 이제는 자기 가족을
축복하려고 집으로 들어가자 아내 미갈이 다윗을 무시하며 비난했습니다.
다윗 왕이 힘을 다함이 그의 아내인 미갈이 볼 때에도 너무 지나쳐 민망스러울 정도(삼하6:20)였고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 체통이 깎이도록 춤을 춘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의 행동이 어리석기 짝이 없고, 품위를 잃은 짓이었다고 공격 하였습니다. 이는 다윗과 미갈의 영적 수준의 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이가 너무 큰 것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부부간에 신앙의 차이가 나면 싸웁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신앙의 수준이 같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미갈은 1) 하나님을 무시하였고 2) 법궤를 무시하였고
3) 왕이자 남편인 다윗을 무시하였습니다.
결 론 :
다윗이 힘을 다해 춘 춤은
1)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모신 기쁨의 표현 2)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요
3) 온 백성의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기쁨 을 표시한 것이었습니다
고기현 "부상 투혼 금메달 기쁨
목일중학교 3학년 16세 소녀, 금번 미국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한국 선수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2001년 1월 세계 주니어선수권 10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딴후 연습을 하던중 2001년 11월 말 넘어져 오른쪽 팔꿈치가 깨져 뼛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두달 앞으로 다가온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려고 팔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는 힘을 다하여 연습의 연습을 했습니다. 결국 고기현 선수는 올림픽 쇼트트랙 1,500m 결승전에서 한국선수로는 첫 번째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본인도 기뻤고, 부모도 기뻤고, 온 국민이 기뻐했습니다. 어린 선수가 부상을 이기고 거둔 승리여서 더 기특하고 대견했니다.
다윗이 받은 복
최선의 힘을 다해 법궤를 옮겨온 다윗에게 하나님은 그를 높혀주셨고, 그의 위를 장구하게 해주셨고[삼하7:8,] 나라가 부강하고 평안하게 해주셨고[삼하7:11] 메시야가 그의 후손에서 나게 하는 복을 주셨습니다.[삼하7:16]
인간의 만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으로써만 얻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참된 기쁨을 얻습니다. [C.S 루이스]
오늘도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일을 감당함으로 참된 기쁨을 얻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힘을 다하여!
삼하 6장 12~23절 / 오정호목사
최근 미국 갤럽 여론 조사소에서 예수 믿는 사람 1,000명을 대상으로 12단계의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사람들이 가정도 행복하고 신앙생활의 만족이 있었습니다. 봉사에는 기회가 있어서 봉사할 기회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건강과 시간과 물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 닳아서 없어지는 하나님 앞에서 후회 없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된 봉사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 힘을 다하여 봉사합니다.<14절>
본문에서 춤을 추는 당사자인 다윗은 왕이지만 주님이 너무 좋고 주님의 말씀이 너무 좋기 때문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찬송하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나도 내 속에서 역사 하는 능력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 처럼 땀이 나도록 심혈(心血)을 기울여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모든 사람에게 진보를 나타내어 본이 되라”고 권면 했습니다.
[승자와 패자]라는 글에 보면, “승자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쉰다. 그러나 패자는 허겁지겁 일하고 빈둥빈둥 놀고 흐지부지 쉰다. 승자는 문제 속에 뛰어든다. 그러나 패자는 문제의 변두리에서 맴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우연이 아니라 피가 있고, 눈물이 있고, 땀이 있었기에 오늘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새로남교회가 바로 서서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무엇을 어떻게 뿌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복음으로 중부권을 깨우는 것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는 우리의 실제적이고 마땅한 헌신으로 가능합니다.
예레미야48:10은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주의 일을 하는 자답게 힘을 다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봉사합니다.<13절>
이 말씀의 시대적인 배경은, 다윗이 사울 시대에 잊혀졌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시려고 준비를 다해 시도했지만 1차는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여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신 것입니다.
13절의 “궤를 멘 사람들”이라 했는데, 6:1에 보면 처음에 법궤를 옮기려고 할 때는 삼만 명의 정예군사를 뽑아 도열하여 열병과 분열을 하며 행진합니다.
다윗은 수레도 아무도 타보지 않고, 어떤 짐도 실어 보지 않은 새것으로 마련하였고<6:3>, 또한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演奏)했습니다.<6:5> 그러나 법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가 뛰므로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들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6,7절>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겠지?’하며 스스로 판단해서 내 방식대로 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봉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지만 결국은 자기 만족을 위하여 하는 봉사일 뿐입니다. 우리의 봉사는 주님의 방법과 주님의 뜻대로 섬겨야 합니다. 동기와 과정과 목적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한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실패를 통해 다윗은 자기가 비록 왕이지만 자기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3. 장애물들을 극복하며 봉사합니다.
다윗에게는 첫째로 비난과 오해와 질시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첫 번째의 실패 원인을 분석, 연구하여 두 번째는 법궤를 수레에 싣지 않고 율법대로 제사장들이 직접 메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힘을 다하여 메며 즐거이 나팔을 불며 법궤를 옮겨오는데 다윗의 집 앞에서 다윗의 딸 미갈이 춤추는 자기 아버지를 보고 마음으로 업신여겼습니다.<16절> 다윗은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주의 일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둘째로 다윗에게는 내면적으로 상처(傷處)가 있었습니다. 웃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을 때, 출발은 화려하고 웅장했는데 비극적으로 끝나니까 다윗에게는 왕으로서 부하들과 백성들 앞에서 망신이었습니다.
다윗은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주의 일을 하는데 장애물로 남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오해하고 비방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봉사했습니다.<14, 17, 18, 21절> 봉사의 변방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봉사에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다른 사람들과 함께 봉사합니다.<19절>
다윗은 왕으로서 너무 기뻤기 때문에 이 기쁨을 독점하지 않고 백성들과 공유하기 위해 물질적인 봉사를 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이 귀한 사역을 통해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법궤가 왔기 때문에 역사의 정통성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심지어 바벨론 포로기간에도 귀환(歸還)을 소망하며 법궤가 있는 예루살렘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앗수르에 의해 짓밟힌 북쪽 이스라엘은 그들의 심령이 의지할 마음의 고향을 상실하여 다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봉사도 간헐적(間歇的)인 일시적 봉사가 아니라 우리의 정통성을 세우고 역사를 세우고 민족에 공헌하는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웃사처럼 열정만 있고 지혜가 없는 봉사자나, 미갈 처럼 냉소주의자가 되어 팔장 끼고 있는 양 극단을 피해애 합니다. 다윗처럼 연구하는 중에 주님 앞에서 열정과 경륜을 가진 지혜와 뜨거움을 가진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됩니다.
에베소서 2:10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봉사는 선택의 여지(餘地)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를 미루지 말고 쓰임 받는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글에 보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지금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주를 위해 하는 일이다”고 했습니다.
‘지금’이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요 조건입니다.
“하나님! 봉사할 수 있는 시간과 건강과 물질과 기회와 은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총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봉사에의 결단이 있게 하시고, 더욱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게 하소서!”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한 사람
삼하 6장 12~23절 / 홍문수목사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지금까지 일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겁니다. 시험에 합격했을 때 ... 취직이 되었을 때 ... 결혼했을 때 ... 돈을 많이 벌었을 때 ... 승진했을 때 ... 학위를 받았을 때 ... (운동 선수 같으면) 금메달 땄을 때 ... 여러분은 언제였습니까?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경우는 과연 어떨까요? 그에게 직접 질문해 볼 수는 없지만 한번 상상 속에서 그에게 인터뷰를 해 보십시오. “미스터 다윗! 당신은 평생을 살면서 언제 가장 기뻤습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정확히 알 수야 없겠지만,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때였을까요? 골리앗을 때려눕혔을 때 ... ? 전쟁에서 승승장구함으로 군대장관에 등용됐을 때 ... ? 왕의 사위가 됐을 때 ... ?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됐을 때 ... ? 이런 경우들을 생각해 보면, 그 하나하나가 정말 큰 기쁨의 순간들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연구해 보면 이보다 훨씬 더 크게 기뻐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왕으로 즉위했을 때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보다 더 기뻐한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언제였을까요? 벌써 힌트가 나왔죠. 본문에 기록된 대로 법궤를 다윗 성 즉 예루살렘 성으로 운반 안치했던 그때였습니다. 법궤는 성전이 건축되기 전 성막의 지성소에 두던 궤짝입니다. 성막은 간이 성전으로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입니다. 특히 법궤의 뚜껑 부분인 속죄소는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법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그래서 법궤를 언약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훨씬 후의 일입니다만, 역대상 29장을 보면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였습니다. 대상29:9 보면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자재(금은보화, 목재 등)를 준비해 놓고 몹시 기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이상하죠? 대개 세상에서는 뭐가 생겨야 기뻐하는 법인데, 물질을 잔뜩 바치고도 좋아하다니! 이것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할 때 다윗이 훨씬 더 기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조건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이것이 곧 다윗이 일평생, 모든 형편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그 기쁨을 함께 살펴보시고,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으로 인한 그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의 기쁨 :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한 기쁨
다윗이 왕으로 즉위할 때까지도 법궤가 잘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상징하는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엘리 제사장 당시 전쟁터에 갖고 나갔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맙니다.(사무엘 上 5장~7장 참조) 그 후 다시 돌려받았지만 챙기는 사람이 없어서 오랫동안 기럇여아림(삼하6:2 바알레유다의 원래 지명) 아비나답의 집에 무려 7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하나님도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 계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자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다잡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방치된 법궤를 수도로 옮겨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하6:1~11 보니까, 처음 운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게 하다가(민4:15 규정에 보면, 법궤는 절대 손대면 안 되고, 레위인 고핫 자손들이 채로 꿰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되는데 법궤를 싣고 운반하다 튀니까 손으로 붙잡음) 그만 웃사(아비나답의 아들)가 즉사하고 맙니다. 두려움에 질린 다윗은 법궤 운반을 중지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임시 보관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소식을 들으니까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하셨다는 겁니다.(12절)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가셨구나 안심하고 법궤 운반을 다시 시도합니다. 이번엔 하나님의 법대로 조심조심 운반합니다.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다윗은 매우 기뻤습니다. 그 모습을 마음 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 12절 → “ ... 기쁨으로 메고 ... ” 다윗은 기쁨으로 법궤를 운반하고 있습니다.
* 13절 → “ ...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하고 ... ” 기쁨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 14절 → “ ...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 ” 너무 기뻐서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는 겁니다. 20절 보면, 심지어 몸을 드러냈다고 했습니다. 배꼽이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상생활 중에 혹은 예배 중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또 다른 경우입니다. 국가 경축 행사의 경우 백성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는데, 맨 앞에 광대를 세워 춤을 추게 했다고 합니다. 이때 광대는 옷이 반쯤 벗어질 정도로 우스운 몸짓으로 덩실 덩실 춤을 추면서 행진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광대의 입장에서 춤을 춘 겁니다. 왕이지만 체면불구하고 덩실 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옷도 ‘베 에봇’을 입었다고 했는데 왕복을 벗어던지고 예식에 참여할 때 입는 평복을 입은 겁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한 어린 아이처럼 기뻐했던 것입니다.
* 15절 →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 ”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는 겁니다.
* 16절 → “ ...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 ”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하는 다윗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 18절 → “다윗이 ...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 ” 다윗은 그 큰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백성과 기쁨을 나누며 축복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크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어떤 세상적인 물질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오랜 세월의 시련에서 벗어나 왕이 된 것도 기쁘지만, 이때 다윗의 기쁨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령한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비교해서 살펴보죠.
① 세상이 주는 기쁨 :
세상이 주는 기쁨은 무엇이 생겨서 기쁜 것입니다. 돈이 생겼다든지, 권세가 생겼다든지, 재밋거리가 생겼다든지 ... 그럴 때 기분이 좋은 겁니다. 이런 것들은 다분히 조건적이며 상대적입니다. 일시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 무엇이 없어지면 기쁨도 안개처럼 쉬이 사라집니다. 혹시 그 무엇이 그대로 있다 해도 금세 더 큰 욕심이 생기므로 마음속에 불만이 치올라옵니다. 가지면 더 갖고 싶고, 되면 더 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메운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한강투석(漢江投石)이란 말도 있죠. 한강에 돌을 아무리 많이 던진다 해도 어느 세월에 메우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욕심은 무한합니다. 솔로몬은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전 1:7~8)
그렇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을 따라가다 보며 반드시 실망할 때가 옵니다. 채울 수 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②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
무한한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죄로 인해 ‘밑 빠진 독’과 같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 채우고 또 채워도 항상 공허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은총으로 죄에서 구원받은 영혼은 하나님으로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기쁨의 원천입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깨닫고 시편의 구구절절 그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그 구절들을 몇 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시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극락(極樂)이란 불교도들이 말하는 극락이 아니고, 최상의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최상의 기쁨이 되신다는 겁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기쁨이 충만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런 무지한 말을 합니다.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자기들 생각에는 정말 재미없죠. 술을 마시나 담배를 피우나, 그렇다고 이런 저런 짓을 하나 ...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면 재미있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예배드리는 게 재미있고, 찬양하는 게 재미있고, 봉사하는 게 재미있고, 전도하는 게 재미있고, 선교하는 게 재미있고, 성도 간에 교제 하는 게 재미있고 ... 모든 생활이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조건으로 잠시 기분이 좋은 것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것보다 엄청 더 풍성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농부에게 가장 기쁜 순간이 언제입니까? 당연히 수확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때의 기쁨보다 더 크다는 겁니다.
요즘 올림픽 경기 중계방송을 시청하면 흥미로운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메달을 따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메달을 획득하는 순간 선수들의 표정입니다. 그 기쁨 얼마나 큰지 ... 특히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의 얼굴을 보면 환희 그 자체입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펄쩍 펄쩍 뜁니다. 그동안 얼마나 오랜 시간 피땀을 흘렸을까요? 그 결실을 보는 순간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러나 ... 김 빼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갈까 ... ? 세상의 기쁨은 안개와 같습니다. 어느 새 사라지고 맙니다.
올림픽 경기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선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그 단체가 내거는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More Than Gold ! 금메달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기분이 주시는 기쁨은 금메달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변치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설사 세상의 조건들이 결핍되어도, 상실되어도 ... 게다가 시련과 고난까지 몰아닥쳐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누릴 수 있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바로 그겁니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즉 신령한 기쁨 때문입니다. 고후1:5,9~10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 ... )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얼마나 큰 고통이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말합니까?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는 건데 ...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이 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기쁨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러기에 다윗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그의 짤막한 고백에 그의 기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구절을 북한 성경으로 보면 색다른 맛이 납니다. (작년 북한 방문 시 한 권 얻은 것인데, 이따금 우리 성경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흥미롭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아쉬울 것 없어라” 그렇습니다. 내게 하나님 한 분만 함께 해 주시면 정말 아쉬울 게 없어집니다. 다윗은 그 놀라운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올 때 하나님을 모시는 심정으로 그처럼 기뻐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삭개오의 기쁨이 나옵니다. 그는 여리고의 세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식민치하에서 친 로마 행위로 돈을 많이 벌었던 관계로 부자이기는 한데 늘 마음 한 구석에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신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인산인해였습니다. 그는 키가 작아 예수님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궁리 끝에 뽕나무에 올라가서 봅니다. 그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눅19:5~6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 예수님이 삭개오의ㅡ 집에 가시면서 선물 보따리 갖고 간 게 아닙니다. 오히려 대접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것 자체가 기쁨이기에 삭개오는 너무 좋았던 겁니다. 주님을 모신 기쁨!
이 기쁨이 있으면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찬송 시인 화니 크로스비를 기억하시죠. 그가 작시한 찬송이 많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여러 곡 있죠. 그의 대표적인 찬송시가 바로 43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 입니다. 주님을 모신 사람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시술하던 의사의 실수로 눈이 멀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릴 일이죠.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하나님께서 내 영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살아가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있는 사람은 다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2] 미갈의 비극 :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
다윗은 하나님 한분으로 기뻐하는 사람이었는데, 반면 미갈은 부부라도 전혀 달랐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운반 안치하고 너무 기뻐하면서 귀가합니다. 식구들에게 축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미갈이 다윗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삼하6:20(하) “ ...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왕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춤을 추고 난리를 피웠다고 빈정거리며 비난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삼하6:21~22 “ ...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 ”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어린 아이같이 얼마든지 뛰놀겠다고 말합니다. 더 낮아져도 좋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 아이와 같습니다. 세상의 조건, 소유, 계급장, ... 다 별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계급장도 다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으로 인한 신령한 기쁨을 맛본 사람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합니다. 세상 것들이 별 게 아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갈은 그 기쁨을 체험해보지 못했기에 큰 실수를 범한 겁니다. 그것은 다윗 일개인만 무시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입니다. 참 답답하죠? 부부라도, 부모 자식 간이라도, 가족, 친구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직접 체험하고 맛보기 전까지는 도대체 모르는 겁니다. 신앙은 맛을 봐야 아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34: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한번 맛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안 되면 정말 답답합니다. 설명해도 안 되고 ... 제가 대학생 시절 예수를 믿고 나니까 정말 너무 좋았습니다. 기 기쁨을 말하고 싶어서 만나는 친구마다 간증하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잘 모르는 거예요. 이상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슬금슬금 피하는 친구도 있고 ... 그런데 아주 친한 친구 하나가 마침 군에 입대해 있었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됐는데, 군대에도 교회가 있다 하니 꼭 가서 예수 믿으라고 ... 그랬더니 얼마 후 답장이 왔습니다. 장문의 편지인 듯 봉투가 두툼했습니다. 기대를 갖고 열어보니 빈정거림과 욕지거리였습니다. 군대에서도 보니까 예수 환자 많던데, 너도 예수 환자 됐구나 ...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 그렇게 마음과 생각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였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때는 화가 났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당연해요. 맛을 보지 못했는데 그룰 수밖에 없죠. 맛을 봐야 맛을 알지 ... 그러니까 우리는 전해 주고,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을 열도록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그 수밖에 없습니다.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맛보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겁니다. 특별히 신령한 것을 조롱하고 무시한 사람은 축복 대신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미갈이 그 후 어떻게 됩니까? 삼하6: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요즘이야 자식을 일부러 안 낳는 사람들도 많아서 오히려 문제지만 당시는 자식이 없는 게 저주였습니다. 미갈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 없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기뻐합니까? 세상 것들로 기뻐하나요? 물론 세상의 조건이나 환경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기뻐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실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늘 환경과 조건을 따라 흐렸다 갰다 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안개와 같이 쉬이 사라지는 겁니다. 우리는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적시는 신령한 생수를 맛보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그분만을 찬양하며 그 기쁨으로 어떤 형편 가운데서라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구에게 집중하고 있습니까
삼하 6장 14~23절 / 조상호목사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셔서 한국에서의 일정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11일 정도 체류하던 예년과 달리 이번에는 15일 동안 한국에 체류하였는데, 오히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바빴던 것 같습니다. <선교사 수련회>와 <36회 순복음선교대회>에 참석하고,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에 다시 한 번 성령의 역사를 일어나게 하자는 목적으로 진행된 <2010천만인 성령대성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외에 주보에 언급된 대로 원주와 인천과 구미 그리고 출국하는 날 새벽에는 대학연합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성령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사용해주셨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저의 간증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을 하고, 어떤 곳에서는 1명을 제외하고 모든 분들이 성령침례를 받고, 어떤 곳에서는 많은 환자들이 고침을 받는 등,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셨습니다. 또 많은 사랑과 섬김을 통해 위로받았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던 일도 경험했습니다. 저는 어디 가서 장기자랑대회에 나가본 적도 없고, 행운권 당첨이 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얼떨결에 장기자랑에 나갔다가 20만이라 되는 상금도 받고, 행운권에 당첨이 되어 설교와 찬양 겸용 Made in Japan 고급 마이크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가장 감사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1년 내내 말씀을 전하다보면 고갈되기 쉬운 목사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충전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수련회나 컨퍼런스에 참석해오고 있지만, 이번에는 예년보다 말씀을 더욱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수련회와 선교대회 기간 동안 진행되는 모든 시간에 단 1분도 늦지 않고 미리부터 자리에 앉아서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그랬더니 시간시간 성령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많은 강사님들을 통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선교대회 둘째날 오전 세미나 시간에 대학연합교회의 김형민목사님을 통해 들은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2008년도 1월에 우리 교회 <신년부흥성회> 강사로 오셨고, 같은 해 7월에 <크라이스트처치 청소년.청년 부흥축제> 강사로 오신 적이 있기 때문에 김형민목사님을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목사님께서는 시작하기 전에 꼭 찬양을 하십니다. 그날도 거의 10분 정도 찬양과 기도를 하시고, 그 다음 당신을 소개하는데 10여 분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50분 동안 세미나 시간 중 말씀을 전할 시간은 30여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짧은 시간에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알기로는 그곳에 모인 6~700여명의 선교사와 사모님 대부분이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기도하고 결단할 만큼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때 김형민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물론 그 때 김목사님은 시편 103편 1절부터 7절과 함께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말씀하셨지만, 성령께서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오늘 그 말씀을 “누구에게 집중하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나눌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언약궤를 만든 후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항상 언약궤를 따라갔습니다. 언약궤가 멈추면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쉬었습니다. 언약궤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 그리고 앞장서서 나아갔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들어가자 요단강이 갈라지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공략할 때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할 만큼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자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났고, 그 결과 이 언약궤는 적군인 블레셋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이 언약궤가 블레셋의 손에서 다시 돌아왔지만, 어느 누구도 언약궤를 돌아보지 않아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에 무려 7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곳에 성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왕궁에 앉아 있는 이 다윗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아직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겼는데, 그 장면이 사무엘하 6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다윗은 청년 서너 명만 보내도 메고 올 수 있는 책상 크기 만한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 무려 3만 명이나 동원했습니다. 만약 오늘날 3만 명이 아니라, 3,000명, 아니 300명을 동원해서 책상하나만한 언약궤를 옮긴다면 아마 여기저기에서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조그만 것 하나 옮기는데, 이렇게 전교인을 동원할 필요가 있느냐, 또 성가대를 동원하고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이유가 뭐냐, 청년들 몇 명 동원하면 될 텐데, 꼭 이렇게 해야 하느냐‘ 등의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그마한 언약궤 하나 옮기는데, 무려 3만 명이나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야훼 앞에서 연주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던 날,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물론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운반하던 도중 운반 책임자였던 웃사가 실수를 저질러 죽는 사건이 발생하여 3개월이 지체되었지만, 다윗은 재차 율법의 절차를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오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지자, 다윗은 너무 기뻤습니다. 다같이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야훼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야훼의 궤를 메어오니라.” 에봇은 원래 제사장들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입던 옷으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소매가 없는 일종의 겉옷입니다. 다윗은 제사장은 아니었지만, 언약궤를 운반하는 사람들처럼 에봇을 입고 언약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언약궤를 맨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오자, 다윗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백성들과 함께 크게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덩실 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20절에 의하면 에봇이 벗겨져서 속살이 드러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과 이스라엘 온 백성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언약궤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분위기 속에 어찌된 일인지 미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16절에 의하면 그녀는 혼자 왕궁에 남아 있다가 창문을 통해 다윗이 얘들처럼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다윗 왕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기뻐하며 집에 돌아왔을 때, 다윗을 조롱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부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영적으로 남편과 하나되지 못한 미갈에 대해서 살펴볼 수도 있고, ‘예배자의 자세’에 초점을 맞추어 몸 찬양의 원조 다윗에 대해서 살펴볼 수도 있고, ‘봉사자의 자세’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성물을 소중하게 다룬 다윗에 대해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다윗과 미갈 두 사람이 정반대로 행동한 그 이유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자, 남편 다윗은 감격하며 춤을 추며 기뻐한 반면, 아내 미갈은 남편의 행동을 오히려 비난하며 조롱까지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과 미갈이 정반대로 행동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집중의 차이, 영어로 Concentration 차이였습니다. 다윗이 집중한 대상과 미갈이 집중한 대상이 달랐습니다.
사람에게 집중한 미갈
여러분, 미갈이 누구에게 집중한 줄 아십니까? 사람들에게 집중을 했습니다. 다같이 20절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 신하들의 아내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사오니, 임금님의 체통이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은 ‘신하들의 아내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라는 부분입니다. 미갈은 남편 다윗이 신하들의 아내와 백성들 앞에서 속살을 드러낸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뻐하며 춤을 춘 다윗의 모습이 미갈에게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향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왕이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행동을 한다고 백성들이 욕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미갈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너무 의식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사람에게 너무 집중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한 다윗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사람에게 집중하는 미갈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께만 집중했습니다. 다같이 21절과 22절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야훼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야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야훼 앞에서 뛰놀리라.”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내가 주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를 찬양할 수밖에 없소. 그래서 나는 언제라도 주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출 것이오. 내가 스스로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더욱 존경할 것이오.”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말씀은 ‘야훼 앞에서’ ‘주 앞에서’라는 부분입니다. 미갈로부터 비난을 받은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오직 야훼 하나님 앞에서 행동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야훼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며 춤을 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던 미갈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집중했던 미갈과 달리, 그는 하나님께 더 집중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크게 보면 미갈과 같이 주위사람에게 집중하는 사람과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미갈과 같은 사람과,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누구에게 집중하고 있나?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에게 집중하고 있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까? 혹시 미갈처럼 사람에게 더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미갈처럼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사치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다보면, 시기하게 되고 질투하게 되어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이솝의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숲속의 왕이라고 불리 우는 사자가 큰 잔치를 벌이면서 숲속에 있는 동물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까마귀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까마귀는 온갖 새들의 형형색색의 깃털들을 모아 자신의 몸에 꽂기 시작했습니다. 앵무새 깃털도 꽂고, 공작의 깃털도 꽂고, 하얀 비둘기의 깃털도 꽂고, 이쁜 새의 깃털들은 다 꽂고, 잔치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숲속의 모든 동물들은 까마귀의 화려한 깃털을 보고서는 저마다 감탄의 소리를 연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면서 까마귀가 꽂았던 깃털들이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까마귀는 아름다웠던 한 마리 이름 모를 이쁜 새가 까마귀였다는 사실을 안 다른 동물들로부터 꾸중을 들은 후 좇겨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는 남을 의식해야 하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다보면, ‘방 두 개 짜리 조그만 집에 산다고 이웃 교민이 나를 무시하지는 않을까, 우리 딸이 대학에 떨어졌다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 것은 아닐까, 20년도 넘은 중고차를 타고 다닌다고 나를 무시하지는 앓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중요한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와 의사에 따라 결정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큰길가에 따로 서서 손을 들고 큰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눅 18:11~12).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의롭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자기 자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더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나치게 주위사람을 의식한 사람들을 싫어하신 반면, 당신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시고 복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의 눈치를 살폈던 요셉과 다니엘과 모르드개는 남의 나라에서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본문 이후에 전개되는 다윗의 인생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은 밧세바와 잠자리를 같이 함으로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아까지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잘못을 저지른 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레이더는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 집중되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게 하셨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축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별이 새겨져 있을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인물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다윗처럼 사람보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축복된 인생을 사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끝으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24살의 한 청년이 새벽기도를 끝내고 교회에서 나가다가 목사님한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윗주머니에 들어 있던 담뱃갑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담배를 당장에 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담배가 생각날 때마다 은단을 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금연에 성공하자,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사업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은단사업이었습니다. 은단 사업을 하면, 국민 건강에 기여할 수 있고 담배 소비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1943년 거금 50원을 주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은단 공장 하나를 인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은단 제조가 허용되지 않아서, 돈만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기도가 헛되지 않아 그는 해방이 되던 이듬해에 개성에다 은단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은단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이 성장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해 그의 은단 사업은 또 다시 무참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억새풀처럼 다시 일어나서 1955년 서울 제기동에다 ‘고려은단제약회사’를 세웠습니다. 그 분이 바로 고려은단의 조규철 회장님입니다. 지금은 8순을 넘은 그를 뒤이어 그의 아들 조창현 사장님이 그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소망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는 조창현 사장님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회사가 민족 복음화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고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수년 전부터 시작한 것이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옥외광고였습니다. 고려은단은 “Jesus loves you”라는 대형 광고간판을 고속도로 곳곳에 설치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의식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창현 사장님은 주위사람들보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부, 중부, 호남, 남해고속도로는 물론 올림픽대로에도 설치했습니다. 종종 신문에도 “Jesus loves you”라는 큰 광고를 내고 있습니다. 고려은단은 이런 광고 외에도 소리 없이 북한 등지에 의약품을 무상지원 하는 일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위사람들을 의식하기보다 당신만을 의식하는 조창현 사장님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복을 주신 줄 아십니까? 고려은단과 전혀 관계가 없는 서울대학교 해부학과 이왕재 교수님이 TV방송에 자주 나와서 ‘비타민 C를 많이 먹어야 건강에 좋다‘고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고려은단이 생산하는 비타민 C가 불티나게 팔려- 엄청난 매상을 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니까, 하나님께서 고려은단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사람의 눈치보다 먼저 하나님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선교대회 기간 중 성령님께서는 김형민목사님을 통해 바로 이 부분을 말씀하셨습니다. 김목사님은 “때로 목사인 우리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예배관리자가 되어 있습니다. 누가 왔나?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성도의 눈치를 보며 당회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갈의 영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미갈의 영을 좇아내고 다윗의 영을 따르십시오! 사역자로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목회의 방법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께 집중하면 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높이는데 올인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회를 책임져 주십니다.”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얼마나 눈물이 나오던지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좋은 설교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만 드러내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로 “알겠습니다. 세상 어떠한 것보다 하나님 당신께만 집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목사 뿐 아니라, 평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다보면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미갈처럼 다른 사람을 의식하다보면 마음껏 소리를 내어 기도할 수도 없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다보면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주위사람들을 신경 쓰다보면 시험에 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처럼 주위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집중한다면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미갈처럼 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미갈처럼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다윗처럼,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모르드개처럼 하나님께 집중하여 승리하는 복된 사람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 조상호목사)
입으로 망한 여인 미갈
김영수목사(늘찬양교회) / 삼하 6:16-23,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촌이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논과 밭을 샀으면 당연히 기뻐하고 축하 해줄 일이지 그것이 어찌 배가 아플 일이 되겠습니까? “나는 못해도 사촌이라도 했으니 참으로 장하구먼! 참으로 장해!”하며 축하해도 시원찮은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심성 속에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보는 성격"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정말 버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못해도 남이 그것을 잘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함께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면 기쁨은 배가되고 슬픔은 반으로 절감되어 너무나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제 2대 다윗 왕이 여호와의 법궤가 다윗 성으로 돌아올 때에 너무나도 기쁘고 좋아서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며 뛰었습니다. 얼마나 신나고 좋았으면 왕이 자신의 체면을 불구하고 그렇게 신나게 춤을 추며 뛰었을까요?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다윗 왕의 첫째 아내이자, 사울 왕의 딸이었던 미갈이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 지 방탕(放蕩)한 자가 염치(廉恥)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臣僕)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요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건만 어떻게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적대적인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미갈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는 날까지 자식 없는 불행한 여인으로 그녀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입으로 망한 여인 미갈”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Ⅰ. 다윗 성으로 돌아온 여호와의 법궤
사무엘상 4장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번번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면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불러서 그 언약궤를 모시게 하였지만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언약궤인 하나님의 법궤마저 블레셋 나라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빼앗은 이 언약궤를 7개월 동안 그들의 신인 다곤의 신과 함께 보관을 하였는데 이때 다곤의 신상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등 너무나도 많은 문제가 발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모든 재앙이 이스라엘 신의 궤로 인한 것을 깨닫고 이스라엘 땅으로 언약궤를 돌려보내므로 저주와 질병을 없애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유명한 "벳세메스의 소"가 출현하게 됩니다.
그런데 벧세메스로 보내진 소가 무사히 여호수아라는 사람의 밭머리에 멈추어 서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를 잡고서 번제를 드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궁금하여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70명이 죽고 말았습니다(삼상 6:19). 이 일로 덜컥 겁이 난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랏여아림이라는 동네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가라”(21절)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랏여아림 사람들이 언약궤를 찾아와서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고 그로 하여금 관리하게 한 뒤 자그마치 20년 동안이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7:1-2). 그런데 그 연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블레셋과 전투 후 20년과 사울 왕위에 40년을 있었고 그 다음에 다윗이 임금이 되어 모셔오기 까지 10년 정도 그러면 대략 기랏여아림에 언약괘가 있은 지는 대략 70년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오랜 세월 동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온 정성을 다하여 언약궤를 보살폈기에 하나님께서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이 풍성한 은혜를 받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언약궤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이 그의 성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소들이 나곤의 타작의 마당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레에 실은 언약궤가 떨어질 위기를 맞은지라 이 광경을 웃사라는 사람이 목격하고 언약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아닌 일반인이 언약궤를 만지는 것을 기쁘게 보시지 않으므로 웃사가 이 일로 죽음을 맞았습니다(삼하 6:7). 언약궤의 운송을 포기하고 임시방편으로 오벳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을 더 보관하였습니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언약궤가 머물러 있던 오벳에돔의 집이 다시 큰 복을 받았습니다(11절).
그래서 다윗이 이번에는 제사장을 보내어 성스럽게 언약궤를 메게 하여 재차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 들여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사히 다윗 성으로 언약궤가 들어오니 이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까요? 아무리 존귀하고 위엄 있는 임금이라 할지라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전쟁에서 단련된 군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 괘가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데 어찌 아니 행복하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상징하는 "언약궤" 이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법궤“, 또는 ”하나님의 궤" "증거궤"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언약궤는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로"(17절) 안전하게 인도되어, 영화롭게 안치되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쳤던 장막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브온에 있기 때문입니다(대하 1:13). 게다가 그것은 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낡아졌기 때문에 이동하여 다니기에는 부적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궤를 맞이하기 위해서 새로운 장막을 마련했습니다. 다윗은 궤를 자기의 사저나 궁궐로 가져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필경 다윗이 지나치게 그것을 독점하는 것이 되고 또 백성들이 그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나아올 때 출입이 부자유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당분간 모세의 회막을 본떠서 만든 장막 속에 넣어 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17절).
언약궤가 다윗 성에 안착되자마자 다윗은 번제(燔祭)와 화목제(和睦祭)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무 실수와 이상도 없이 언약궤를 맞이하게 된데 대한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오,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셨던 은혜와 축복을 계속하여 이 백성들에게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비는 간구의 뜻이 담겨 있는 제사이었습니다(17절). 우리도 기쁨이 있을 때는 언제나 찬미와 기도의 제사를 수행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서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참여한 모든 백성에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더욱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언약궤가 돌아온 영광의 축제, 기쁨의 축제를 드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Ⅱ. 다윗을 비난하며 조롱하는 미갈
다윗은 백성들을 축복하고 선물을 주어 돌려보낸 후 "자기의 가족을 축복하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20절). 즉 집안 식구들과 같이, 이 국가적 축복을 맞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영적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사역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큰 행사를 치르고 난 후에는 이를 위하여 수고한 가족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함께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휴식의 시간을 목회자들이 꼭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저는 가족이니까 다 이해하겠지 하고 슬쩍 넘어갔는데 이런 것이 자녀와 아내 그리고 부모님들을 슬프게 할 수 있는 시험거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교인들에게 하듯 가족들과 아내 그리고 부모님들에게도 격려와 위로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축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버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큰 도전을 받은 것이 자녀들과 아내에게 자주 허깅을 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고 축복의 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목사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 집 식구들을 위로하며 축복할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손을 맞잡고 기도하며 축복하며 자주 허깅을 나누는 가정이 어찌 행복함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남편(아내)과 자녀들에게 손을 잡고 자주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다윗은 아내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집 앞에 다다랐을 그때 느닷없이 아내 미갈이 뛰어나와서 하는 말이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 지 방탕(放蕩)한 자가 염치(廉恥)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臣僕)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독설(毒舌)을 퍼부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이 언약궤와 사람들 앞에서 망나니처럼 춤을 춘 것이 왕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의 체면과 존귀함에도 심한 손상을 미친 것으로 여기고 남편을 흉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갈 혼자만의 생각이고 미갈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생긴 일이지 결코 다윗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 증거가 16절에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며 길거리에 있는 것을 미갈이 보았을 때, “심중(心中)에 저를 업신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심이 지나쳐서 미친 게로군."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갈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에 남편 다윗 왕과 함께 나가서 언약궤를 맞이하며 남편의 옷차림과 행동을 주의해보며 코치해 주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함께 나가지 않고 궁궐 안에서 창밖으로 그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감시자의 눈으로 또는 그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등 구경자의 모습으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할 때 매사의 일이 목사와 사모 더 나아가 가족과 성도가 다 공감하며 뜻을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행 하다보면 의견이 엇갈리고 맘에 맞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경자의 눈으로 감시자의 눈으로 그 일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부와 성도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처음부터 다윗의 행동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언약궤를 중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버지 사울 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대상 13:3)
사무엘상 18장 5절 이하에 보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千千)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萬萬)이로다."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를 할 때에 사울은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는 다윗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다윗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자신의 딸 미갈과 결혼을 시킵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자신 곁에 두고서 감시도 할 겸, 죽일 기회를 엿보기 위하여 사위라는 이름으로 곁에 둡니다. 그 뒤 21절에 보면 사울이 "스스로에게 이르되 내 딸을 주어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이 그를 치게 하리라"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참으로 악한 사울 왕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미갈은 이렇듯 아버지의 사악한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다윗의 모든 면이 좋지 않게만 보였습니다. 더욱이 자신은 왕의 딸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라난 반면 남편 다윗은 천한 목동 출신이라고 무시하며 멸시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며 서로를 신뢰하고 존경치 못하는 냉담한 부부와 신앙인 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뜨거운 신앙 체험이 없을 때, 십자가의 사랑의 흔적이 없을 때, 그 신앙과 가정은 이성적이고 차갑습니다. 다윗과 같은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의 열정이 없을 때 상대방을 무시하며 감격과 기쁨이 없는 냉랭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찬바람 부는 겨울 들판과 같아서, 아무런 신앙의 열매, 감사의 열매가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Ⅲ. 미갈을 설득하는 다윗
미갈이 이렇게 남편인 다윗 왕을 무시하며 냉대한 반면 다윗 왕은 미갈을 사랑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3절에서 다윗은 미갈을 데려오기까지는 어떤 약속이나 왕관도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귀한 날에 사랑하는 가족과 아내를 찾아 자신의 집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오는 다윗의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미갈은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아내의 느닷없는 독설과 비난을 받으며 처음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아내 미갈을 설득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뛰놀며 춤춘 것은 여자를 유혹하거나 신복들에게 마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 것이로다."(21절)며 강하게 어필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가? 를 잊었는가, 내가 미천한 목동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귀히 여겨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을 부으시고 능력으로 함께 하사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장인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게 하시고 통일 이스라엘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아니하셨는가? ……”
이어서 다윗은 22절에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서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신앙심의 발로가 당신 아버지의 뜰에서는 천박한 일 이였을지 모르나, 나는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그리하여 그 같은 발로는 훌륭한 일임을 알리려 하노라. 또 비록 이 일이 천하다면(22절), 나는 더욱 천해지기를 원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숱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신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의 손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신앙은 체험적 신앙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신앙은 뜨거웠고 살아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역동적인 신앙이었기에, 언약궤 앞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어린애처럼, 언약궤 앞에서 신나게 뛰놀며 춤추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의 춤이요, 신앙적 기쁨의 춤이며, 감격의 춤이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뛰논 신앙 고백의 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가 그 부모 앞에서 뛰논다는 것은 당연하며 또 으레 그래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 앞에서 다윗은 더 이상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모의 사랑과 그 은혜에 감격한 어린아이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다윗의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을 귀하게 여기고, 미갈의
말과는 달리 다윗을 끝까지 붙드사 그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해주셨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신앙모습은 어떠합니까? 구원의 감격과 은혜의 체험을 누리고 사는 뜨겁고 순수한 다윗 같은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그저 교회 공동체의 대사(大事)를 남의 일인 양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감각한 미갈과 같은 신앙인의 모습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미갈처럼 냉담하고 차가운 신앙 속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자라지 않습니다. 가정의 화목 또한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과 인격의 토대 위에서는 불평불만의 잡초와 다툼과 분쟁의 잡초만 자라날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뜨겁고 순수한 신앙 속에서는 각종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날이 새롭게 역사 합니다. 감사와 기쁨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감사와 기쁨의 감격이 없습니까? 왜 불평 불만과 시기와 다툼의 문제만 늘어납니까? 먼저 뜨거운 회개의 눈물과 함께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며 인도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표상 해보십시오. 더 나아가 부부가 하나 되어 보십시오! 그리고 자녀와 하나 되어 보십시오! 그러면 온 가족이 주님 안에서 기쁨과 감격으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춤추며 뛰놀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삶이 기쁘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삶 흥미로운 삶으로 전개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와 축복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과 교회 속에 충만한 능력으로 열매 맺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낮아져서 천하게 보일지라도
김정호목사(번동교회) / 삼하 6:16~23
현역 대위하고 결혼한 부부가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갔습니다. 남편이 말타기를 했는데 그만 말이 사나워서 크게 뛰는 바람에 남편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훌륭하게도 인자한 표정으로 말에게 “한 번”하고 말을 다시 탔습니다. 그러다 말이 또 다시 크게 뛰는 바람에 또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남편이 훌륭하게도 인자한 표정으로 “두 번”하고 말을 다시 탔습니다. ‘내 남편 참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말이 뛰면서 남편이 다시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때 남편이 권총으로 말을 쏘아 죽이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여보 그렇다고 말을 쏘아 죽이기까지 하면 어떻게 해요!” 이때 남편이 아내를 정면으로 보면서 “한 번!”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그렇게도 원하였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면서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 춤을 춘 사건입니다. 춤을 추고 있는 다윗을 창에서 내려다 본 사울의 딸이며 다윗의 부인인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기고 경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춤을 추겠다고 다윗은 고백하였습니다. 체면이나 사람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기뻐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순간 혹은 평생 본인이 모든 것을 선택하고 판단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인생과 신앙에 있어서 미갈이 아닌 다윗의 인생과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믿음의 사람입니다
본문 16절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춤을 춘 것은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그들 신정 국가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미갈이 법궤 앞에서 춤을 추는 다윗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업신여기게 된 까닭은 법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울 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울과 미갈은 믿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 법궤를 소중히 여기며 생명을 바쳐서 사랑합니다. 법궤가 다윗 성에 들어오기까지 웃사가 죽는 파란만장한 상황들이 있었기에 더욱 귀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정치를 내 마음과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 말씀과 뜻대로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였고 큰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최고의 칭찬과 축복을 하셨습니다. 오로지 믿음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간의 이해득실로 얽힌 세상에서 손해보다는 이익을 실(失)보다는 득(得)만을 취하면서 살다보니 노년이 되었을 때에 주위에 남은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라고는 사과 궤짝에 넣어 놓은 돈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 자기를 위해 쓰고 말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순금으로 만든 관을 구입하여 그 속에서 죽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금관 속에서 죽은 뒤 금관에 누운 채로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밤에 그의 시체는 금관을 탐낸 무리들에 의해 무덤 밖에 내팽개쳐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굶주린 들쥐에게는 기회였습니다. 모든 것을 계산과 이해득실의 원리로만 살면 결국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보다 내게 힘이 있을 때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웃음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사용합니다. 믿는 믿음이 중요하고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을 찾으셨고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필수이고 절대적입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믿음을 버리거나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다윗처럼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섬김의 사람입니다
본문 17-19절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이 제사장들을 명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은 법궤를 모실 장소를 성별하기 위한 봉헌식이었습니다.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의미를 가지며 화목제는 그동안 멀어졌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가 하나 되게 해달라는 간구의 의미를 지닙니다. 다윗이 제사장들을 통하여 백성을 축복하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기 언급된 음식물들은 모두 제사용 음식입니다. 이처럼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그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은 화복제물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연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 된 통일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번제와 화목제로 섬기었고 백성들을 음식으로 섬기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 권리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해를 받지 않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오직 법과 질서에 순복하셨습니다. 주님은 권세를 누리러 오지 아니하셨고 오직 의무를 다하고 순복하며 대가를 지불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낮아짐이며 희생하는 것이며 굴욕을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교만과 불순종 때문에, 그리고 우리 교만과 자존심 대문에 주님은 굴욕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 사역의 핵심이며 굴욕의 극치입니다. 십자가, 채찍에 맞음, 온갖 모독과 굴욕과 수치를 당하는 것…….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비참합니다. 그것은 실패한 사역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가 아니고 진정한 성공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굴욕 당함과 죽음으로 인하여 마귀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감추어진 비밀이었으므로 많은 이들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실패와 수치로 보았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많은 믿는 이들도 십자가와 낮아짐의 비밀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지 뮬러 목사는 시편 68편 5절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라는 말씀을 읽다가 고아를 돌보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행위와 섬김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뮬러의 가장 강력한 기도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행동하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평생 하나님과 백성들을 섬긴 것 같이 우리들도 섬김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그리고 모든 이들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하고 시험을 이기고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항존직일수록 더욱 섬겨야 합니다. 섬겨야 은혜 받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특별히 우리 교회에는 목숨 걸고 섬기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더 낮아져서 천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담대한 사람입니다
본문 22절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다윗은 미갈의 업신여김과 경멸에도 불구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들을 축복하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주신 일을 기억하며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지극히 겸손한 행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자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봉직되었다는 철저한 소명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행위가 미갈의 말처럼 저질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낮아진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또 다시 있어도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낮아져서 천하게 보인다고 할지라고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겠다는 것입니다. 미갈은 하나님의 법궤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자기의 입술을 가볍게 놀린 결과로 그의 후대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고 교만하고 자기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가을이 짙어 갑니다. 우리 한국의 가을은 참 아름답습니다. 하늘은 높고 오곡백과가 풍성합니다. 교회 뒷산에는 마치 불에 타는 듯 한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잎들이 뒹굴고 있습니다. 가을의 추억 중 하나는 유년시절 가을 운동회입니다. 손꼽아 기다리던 운동회 날에 학교에 가는 길은 가방에 담긴 김밥, 계란, 사이다 때문에 마음은 넉넉했습니다. 학교를 펄럭이는 만국기, 달리기를 하고 나면 손목에는 1등이니 2등이니 하는 도장이 퍼렇게 찍혀 있었습니다. 겨우 공책 몇 권과 연필 몇 자루에 입은 벌어지고 행여 도장이 지워질까 손도 마음껏 씻지 못했던 그 시절, 동심의 옷을 입고 한껏 유치해도 아이다움으로 이해되던 그 시절, 꿈으로 숨쉬며 살던 그 날들이 지금은 지나가고 또 다른 가을에 서 있습니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길목에서 인생의 단풍이 들어 낙엽이 되기 전에 갖는 소원이 있습니다. 1945년 독재자 히틀러에게 잡혀서 감옥에 들어간 독일의 젊은 목사 본 회퍼의 기도입니다. “슬픔으로 넘친 잔에 고통의 마지막 찌꺼기라도 마셔 버려야 하는 것이 정녕 당신의 뜻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아 마시렵니다. 그러나 주여 당신이 다시 한 번 나를 쇠사슬에서 풀어 주시어 삶을 즐기고 삶의 선한 햇빛을 받을 수 있게 하시면 그때에는 오랫동안 이 고통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더 강하게 생의 전부를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 살겠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의 운동장에서 인생의 달리기 마치는 날에 눈물 나게 그리운 초등학교 운동회의 가슴 설렘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최고의 계절 가을입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도 가을입니다. 하나님께 열매를 드려야 할 가을입니다. 사람이나 상황이나 감정이나 물질이나 그 무엇에 의해서 흔들리거나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여기저기 기웃거리거나 방황할 시기나 나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을 낭비해서도 안 됩니다. 이제는 십자가만 바라보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생명과 의의 면류관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 한 것처럼 남은 인생 더욱 잘 해야 합니다. 모두 힘을 내어 무엇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더욱 강하고 담대합시다. 이제는 그 무엇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낮아져서 천하게 보일지라도 이 시대의 다윗처럼 담대하게 하나님만 섬깁시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수 없는 영적 미갈이 여러분을 조롱하고 경멸하여도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섬깁시다. 다윗처럼 믿음과 섬김과 담대한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 때문에 더 낮아져서 천하게 보일지라도 다윗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행복한 부부, 행복하지 못한 부부
삼하 6장 16~23절 / 김영준목사
미국에 T. D. Jakes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 최고의 흑인 설교가요 가히 미국 최고의 설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집회를 열면 전국에서 수만 명씩 참석해서 일주일동안 그의 설교를 듣습니다. 특별히 T. D. Jakes 목사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컨퍼런스로 유명합니다.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에 대한 컨퍼런스에서 남자가 설교한다는 것이 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여성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설교를 시작하는 초미에 자기의 아내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흑인교회의 문화인데 사모를 first lady - 영부인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자기 아내를 청중 앞에서 일으켜 세우고 ‘나의 아내, 나의 베스트 프렌드요, 나의 연인이요 나의 여자 친구요, 나의 반려자입니다.’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텐데 미국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좋아합니다. 저는 사람 앞에서 자기 아내를 그렇게 추켜세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드리는 김에 또 다른 사례를 말씀드리면 Kenneth Copeland라는 미국의 부흥사가 있습니다. 그는 소위 번영의 신학을 대중화시킨 인물입니다. 그의 부인 Gloria Copeland도 부흥사입니다. 그래서 집회를 열면 낮에는 부인이 설교하고 저녁에는 남편이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Kenneth Copeland가 자기 아내를 소개하기 전에 이런 일화를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총각이었을 때 미국 아칸소 주의 어느 호텔 바에서 아주 술에 취한 중년 남자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중년 남자가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하는 말이 ‘내 딸은 아칸소에서 가장 미인이다.’ 그러더래요. 술 취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곧이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 그러세요.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고 무시했는데 그 딸이 술 취한 아버지를 모시러 호텔 바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아버지 말이 맞더래요. 정말로 아칸소 주에서 가장 미인이더래요. 그게 바로 지금의 나의 아내라면서 자기 아내를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와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되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뭔가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자랑하면 뭐라고 합니까? 팔불출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내를 깎아내려야 되는 것처럼 인식이 돼 있지만 사실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앞서 말씀드린 T. D. 제익스 목사가 정말로 자기 아내를 베스트 프렌드이고 연인이고 여자 친구이고 반려자라고 생각하면서 산다면 그는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여자들을 위한 컨퍼런스에서 강사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남자들을 위한 컨퍼런스를 하더라도 참석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행복한 부부를 꼽으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아브라함과 사라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행복한 커플이라고 생각하는 첫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아리따운 여인이라’ 이건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산 것 같습니다. 자기 아내가 그 당시에 자기 아내가 60, 70 정도 되었는데 그래도 남편의 눈에는 아내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였다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두 번째는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으니라’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씀을 듣지 않고 어떻게 생존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삼천년 전에 아브라함이 아내의 말을 존중하고 아내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뭔가 그들의 결혼생활의 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슬퍼하며 애통해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닉슨 대통령의 영부인 베티 여사의 장례식 장면을 TV로 잠깐 본 적이 있는데 닉슨 대통령이 얼마나 우는지 그걸 보니까 정말 가슴이 찡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기 아내의 장례식에서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그건 뭔가 그들의 인생의 반려자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물론 재혼을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자기의 아내의 장례식에서 애통하고 슬퍼했다, 그 장례식 장면이 창세기에서 한 장을 차지합니다. 한 장을 할애했습니다. 그만큼 거기 비중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네 번째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십 오년을 기다려서 아들 이삭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시고 인내를 가르치시고 여러 가지 영적인 교훈도 담겨져 있지만 그들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이십 오년을 기다리게 하셨다는 말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서로 열심히 사랑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약속이 그들의 삶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과정에서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삶에 트러블이 없었느냐? 천만의 말씀. 트러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고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성경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부부는 누가 있었을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과 미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의 부부싸움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느 부부도 부부싸움 한 번 하고 갈라서지 않습니다. 권투시합과 같습니다. 권투선수가 KO 당하는 것은 강펀치 한 방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고 시합 도중에 맞는 모든 펀치가 누적되어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과 미갈도 여기에 기록된 이 부부싸움 이전에도 다투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동안 누적되었는데 오늘 이 갈등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파경을 맞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들이 파경을 맞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23절에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왜 자식이 없습니까? 서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부의 관계가 더 이상 성립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부부가 꼭 이혼을 해야만 파경을 맞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가 장부상으로는 파산을 하지 않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파산 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서류상으로 이혼을 안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파경을 맞은 부부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재능이 많은 위대한 인물이에요. 요즘말로 하면 잘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용맹이 있고 예술적 감각이 있고 사람들에게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에게도 집안일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집안일로 인해서 많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자식들끼리 서로 죽이지를 않나, 또 이복누이를 겁탈하지를 않나,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지를 않나, 집안에 풍파가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최고의 임금이면서도 시편에서 그의 아픔, 하나님에게 그의 하소연을 볼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갈은 또 누구입니까? 제가 한번은 어느 미술 갤러리에 심방을 간 적이 있는데 갤러리의 이름이 ‘미갈’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이름을 따왔나 보다 그랬더니 알고 보니 그게 아니고 아름다울 美자, 아름다움을 갈망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미갈이라고 지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미갈은 그런 미갈이 아니고 오리지널 미갈입니다. 사울왕의 딸입니다. 공주에요.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다는 구절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결혼은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입니다. 적어도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결혼이 파경을 맞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윗과 미갈은 그야말로 선남선녀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최고의 신랑감, 미갈은 공주, 엘리트 중의 엘리트끼리 만나서 결혼했는데 그리고 처음에는 애정이 있었습니다. 잘 살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혼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상류층으로 올라갈수록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면 배경, 학벌, 가문, 이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될 사실은 그것이 결혼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주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결혼을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는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봤더니 재미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많고 또 이혼을 쉽게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친구들 중에 부모님이 헤어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더라고요. 왜 이렇게 부모가 이혼한 친구가 많을까, 그러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이게 이들의 현실인가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모르긴 몰라도 대한민국도 그것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제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배경이나 학문이나 가문이나 이런 것보다도 과연 행복하게 성공적으로 살 것이냐 이것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됩니다. 결혼 생활이 성공할 것이냐를 고려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도 양보하고 자식도 양보해야 됩니다. 부모는 자기의 요구사항만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모도 양보해야 되고 자식도 자기 고집만 부려서는 안되고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부모님의 지혜,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됩니다. 서로 양보해야 됩니다. 부모는 자식의 애정, 판단을 좀 더 신뢰해 줘야 됩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당사자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고 정직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만약 남의 이목을 의식한다든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결정하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지혜롭고 겸손한 마음으로 판단해야 되는데 그것도 사실은 축복이에요.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여기에 몇 가지 이들의 결혼생활의 파경의 이유를 가늠하게 해 주는 것이 있는데 첫째는 16절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미갈이 남편을 업신여기니까 입으로 비판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걸 남편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존경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첨에 약합니다. 빈 말이라도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해요. 당신은 멋있어요.’ 그러면 진짜인줄 압니다. 그러나 업신여기면 그것은 파경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미갈이 왜 다윗을 업신여겼느냐?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의 의견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울의 딸이기 때문에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서 춤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그것을 숨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니까 결국은 그것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이 결혼생활에 큰 상처를 입힙니다. 온달 같은 남편과 결혼했을지라도 존중해줘야 됩니다. 그것이 남편에게 사랑을 받는 길입니?
그리고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한 번 자존심 상한 말을 들었다고 삐졌습니다. 이게 정말로 대장부인지 한번 자존심 상한 말을 들었다고 아내를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은 남자는 쪼잔한 남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남자가 이렇습니까. 한번 마음이 상하면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면 사람이 남자가 어떤 수고를 하든, 어떤 공로를 세우든 그것을 사람들이 다 알아주면 좋지만 다 알아주지 않는 것이 세상이에요. 그것이 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다 알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제 친구 목사가 한번은 제가 보는 앞에서 자기 아내에게 물어보더라구요.
‘당신은 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나요?’
그 말을 듣고 친구의 아내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sometimes - 가끔’
그렇게 대답하던데 저 같으면 자존심 상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답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사실 아내가 남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다면 그 자체가 대단한 것입니다. 같이 사는 남편의 설교를 들으면서 한번이라도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으로 위대한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남자가 자존심이 상할만한 일은 세상에 많습니다. 남자들이 쉽게 싸우는 이유가 뭐냐? 자존심 때문입니다. 마치 수사슴이 서로 뿔을 마주대고 싸우는 것처럼 남자들은 자존심 때문에 싸웁니다. 그러나 동시에 남자의 세계에는 무엇이 있느냐? 자존심을 굽히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군대에서도 배우고 직장에서도 배우고 가정에서도 배웁니다.
사자의 세계에서는 새끼 사자가 아빠 사자보다 먼저 먹이를 먹으려고 하면 아빠 사자가 새끼 사자를 뭅니다. 그래서 누가 보스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남자의 세계에요. 남자들은 그러므로 자기의 자존심을 굽히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이건 신앙적으로도 필요한 것이고 사회생활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고 가정에서도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도 어른들 앞에 자기 뜻을 굽히고 또 세상에서 대접을 받더라도 가정에서도 똑같은 이유로 대접받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세상에서는 임금이지만 자기 아내에게도 임금은 아닙니다. 자기 아내에게는 남편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임금대접 받기를 요구하다가는 본인도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부부와 다윗 부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이었느냐? 아브라함과 사라는 트러블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다윗과 미갈은 트러블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해로를 했고 다윗과 미갈은 파경을 맞은 것입니다. 트러블이 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트러블 없는 부부 없습니다. 다 트러블이 있습니다. 그러나 트러블 때문에 파경을 맞는다면 세상의 어느 부부가 같이 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함께 트러블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자 트러블을 극복하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애정에 손상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애정은 참 귀중하게 보존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남편 필립공 사이에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의견차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필립공이 화가 나서 방에 들어가서 방문을 잠갔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가 똑똑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요?’
‘나 여왕이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냐니까?’
‘당신의 아내요.’
그랬더니 삐거덕 거리면서 문을 열어주더라는 것입니다.
여성의 상처도 이해해줘야 되지만 남자의 상처도 이해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남자도 상처를 입기 쉬운 존재에요. 다윗 같은 남자도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샘솟듯 솟아나는 예배의 감격
삼하 6장 16~23절 / 권오서목사
들어가는 말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토크쇼의 여왕입니다. 한번은 그녀가 진행하는 토크쇼가 “아무리 터무니없는 꿈이라도 이루어진다”라는 주제로 진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날 토크쇼에는 깜짝쇼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날 깜짝쇼의 내용은 사전에 사연을 보내온 사람들 중 선별된 11명의 방청객들에게 각각 3360만원 상당의 자동차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왜 새 차가 필요한지 사연을 보내 당첨된 주인공들은 이 날 자신들에게 자동차가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방청객으로 참석했다가 당첨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때 자동차를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표정이 어떠했을까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기쁨에 겨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 모습이 잘 연상이 안 된다면, “러브하우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집을 고쳐줄 때, 사연을 보낸 주인공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동차 한 대가 내게 주어졌을 때 감격하고 기뻐합니다. 새롭게 집을 단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감격하고 기뻐합니다. 누가 곁에서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고 흥에 겨워합니다. 저는 오늘 이런 기쁨과 감격이 예배를 드리는 바로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 안에서 샘솟듯 솟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예배의 감격에 사로잡힌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다윗 왕입니다. 다윗 왕에게는 간절한 소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학수고대한 끝에 법궤를 가져올 수 있었던 다윗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수많은 신하들과 또 그들의 아내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이 가족들에게 축복해주러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윗을 비꼬듯이 말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쩌면 이스라엘의 왕이 그처럼 영광스럽게 보이십니까? 천한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왕은 오늘 신하들의 하녀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습니다.”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 아닙니까? 한 사람은 감격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감격에 겨워 있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서도 추태를 보이고 있다며 비아냥거립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왜 우리가 예배의 감격을 잃고 사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순간-사실 그 순간만큼은 감격이 넘쳐나야 합니다.
1. 그런데 우리의 예배 속에 감격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지만 감격이 없는 예배를 드리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의 체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요? 하나님보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체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감격이 없습니다.
미갈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체통이었습니다. 체면이었습니다. 왕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형식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법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도 미갈은 다윗이 누리고 있는 예배의 감격을 함께 느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신분이나 직책 때문에 전심을 다하여 예배하지 못합니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제대로 손뼉도 치지 못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통회하지도 못하고 간절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그냥 교회 문만 밟고 돌아갑니다. 늘 시간에 쫒깁니다. 예배가 시작된 지 불과 5분·10분 지났는데, 벌써 그때부터 시계를 쳐다봅니다. “언제쯤 끝날까?”, “왜 찬양은 여러 차례 반복하는 걸까?”, “왜 이리 광고가 길까?”, “왜 목사님의 설교에는 곁가지로 흘러가는 내용들이 많은가?”-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예배 백 번을 드린다고 해봅시다. 과연, 이런 예배를 드리면서 감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내 것이 되겠습니까?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미쳐 어떠한 변화라도 일어나겠습니까? 방송 프로그램도 감격이 있어야 시청율을 계속해서 유지시켜 나갈 수 있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감격을 느낄 수 없다면, 안타까운 말씀이지만, 우리의 삶에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은혜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궁중에 사는 오리들이 있었습니다. 오리들은 주일이 되면 아침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주변이 뛰어난 오리가 앞에서 설교를 하고, 다른 오리들은 그 설교를 듣습니다. 때로 날지 못하면서도 날려고 시도했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또한, 날개와 날고 싶은 본능을 준 창조주를 기억하며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에는 설교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 오리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과연, 이들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것이었습니다. 날개와 날고 싶은 본능을 준 창조주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날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날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궁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와 흡사합니다. 목사님들로부터 은혜로운 말씀을 듣습니다. 때로는 아멘으로 화답하고, 때로는 수긍도 해가면서, 때로는 ‘그래, 앞으로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살아야겠어!’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정작 예배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잊고 또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잃고 싶지 않아, 여전히 세상적인 것에 사로잡힌 채로 삽니다. 세상이 주는 명예와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가만히 놔둡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는 나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예배는 감격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는 더 이상 감격 없는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 내리지 않습니다.
2. 감격이 있는 예배를 어떻게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감격이 있는 예배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윗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일까요? 미갈이 사람의 체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신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배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수 있는 것, 하나님 앞에서 온 몸을 드릴 수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다윗이 몸을 드러낸 채로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높아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다윗이 법궤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모든 신하들과 하녀들이 보고 있는데서 몸을 드러내고 기뻐 찬양했겠습니까? 만약 다윗이 법궤 안에 있던 유물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기를 좋아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인디(independent music, 독립음악의 약자) 밴드 그룹인 카우치가 TV방송에서 하체를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방송을 시청하던 청소년들을 비롯한 많은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이 사건이 사전에 계획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들이 옷을 벗었습니까? 왜 이들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을 자행했습니까?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자기 그룹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디 밴드가 TV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그런 행운이 그들에게 찾아왔고, 어렵게 출연하게 되었으니 확실히 자신들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시청자들에게 자신들의 그룹을 각인시키고 싶었습니다. 결국, 자신들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몸을 드러냈습니다. 카우치라는 인디 그룹도 하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렇다고 똑같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카우치라는 인디 그룹이 자신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몸을 드러냈다면, 다윗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자신은 낮아져도 하나님은 높이려고 했던 것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자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을 높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높여야 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이 성도들에게 은혜롭게 들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가대의 찬양으로 높임을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휘자도 반주자도, 솔리스트도 아닙니다. 앞에 나와 기도하는 장로님의 기도가 성도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장로님의 기도가 훌륭하다고 해서 성도들이 장로님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감있는 기도를 하실 수 있는 장로님을 우리 교회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은혜로운 설교로 성도들을 변화시킨다 하더라도 존귀와 찬양을 받으셔야 할 분은, 목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지 목사 자신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철저히 높여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철저히 희생되어야 하며, 낮아져야 합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로 인해 하나님께 징계를 받습니다. 온역이 이스라엘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회개했고, 갓 선지자로부터 아리우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즉시 아리우나 타작마당으로 갔습니다. 다윗이 아리우나 타작마당으로 오는 것을 아리우나가 보았습니다. 아리우나가 다윗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유를 듣습니다. 그러자 아리우나는 선뜻 자신의 땅을 다윗에게 내어줍니다. 다윗이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기꺼이 내놓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이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은 오십 세겔이라는 값을 지불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이 값을 지불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다윗이 왕으로써의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낮아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 다윗이라고 해서 거저 받는 것을 싫었겠습니까? 왕에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바치는 아리우나를 보면서 왜 흐뭇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이런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다윗은 아리우나의 모습, 즉 왕인 자기 앞에서 타작마당과 소를 희생하던 아리우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격이 있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써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향해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는 나의 일터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지. 이렇게 하나님께만 집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 속에서 감격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3. 그렇다면, 감격이 있는 예배란 어떤 예배입니까?
‘감격이 있는 예배’라고 해서 들떠 있는 예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나게 박수치고 손들고 찬양한다고 해서 감격이 있는 예배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모습이 감격 있는 예배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체로 감격이 있는 예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격이 있는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 없이는 감격이 있는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감격이 있는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장막 안에 옮겨놓고 가족들을 축복하기 위해 왔을 때, 미갈로부터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비꼬는 말을 듣습니다. 이때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부친과 그의 가족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소.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계속 춤을 출 것이오. 내가 이보다 더 바보 취급을 받아도 좋소. 하지만 당신이 말한 그 하녀들에게는 내가 존경을 받을 것이오.(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다윗이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춘 것이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이 뜻입니다. 자기가 춤추었던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아주 중요한 사건을 경험해야 합니다. 무슨 사건일까요?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만나야 다윗처럼 자신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배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렸는데도 하나님과 만나지 못했다면 얼마나 공허하겠습니까? 그 시간이 얼마나 무의미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일정한 장소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친구들과 뛰놀던 학교 운동장일수도 있고, 조그만 교회일 수도 있고, 첫 사랑을 만난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장소에 오랜 시간이 흘러 제삼자와 같이 갔다고 칩시다. 두 사람이 똑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사자가 느끼는 것과 제삼자가 느끼는 것은 확연히 다릅니다. 당사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곳일 수 있지만, 제삼자에게는 괜히 시간낭비만 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사자에게 그 장소는 어떠한 “사건”과 연루된 아주 중요한 곳인 반면, 제삼자에게는 아무런 사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에 왔지만,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고 교회를 빠져나갔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교회란 낯선 곳인 동시에 무의미한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을 경험했다면, 그런 사람은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 아닌, 하나님께서 계신 살아 있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자리는, 이 교회는 건물입니까?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찾는 성도들에게 찾아와 주셔서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축복의 터전입니까?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을 통해서 예배의 감격에 빠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이제 무더운 여름도 거의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휴가니 뭐니 하면서 혹시라도 예배생활에 게을러지지는 않으셨습니까? 예배의 감격을 되찾아야 합니다. 예배의 감격이 샘솟듯 솟아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명성이나 체면 때문에 얼마든지 예배의 감격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안에 있는 미갈을 제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체면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깊어지지 못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겠다는 다윗의 마음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예배의 감격은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할 때 더욱 커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특별한 사건이 있는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기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더욱더 힘써 예배의 자리로 나올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체면을 버리자
삼하 6장 16~23절 / 엄기호목사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체면’이란 말입니다.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체면을 구겼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체면을 세워야겠다”, “체면 좀 차려라”등등 ‘체면’에 관한 말들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체면이, 우리만이 갖고 있는 우리 문화 특유의 현상은 결코 아닙니다.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유교문화권은 물론이고, 구라파나 美대륙, 또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현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체면욕구는 좀 별난 데가 있습니다. 생활 전반에 걸쳐서 체면에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의식주의 선택, 승용차의 구입, 진학 및 취업, 학교성적과 진급, 선물의 선택, 명절맞이 인사, 결혼예물 등등 남의 이목을 끌 가능성이 있는 것이면 어떠한 행위나 소유물도 체면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사흘을 굶어도 남 앞에서는 이빨을 쑤신다”, “양말은 헐어도 구두는 번지르르하게 닦아 신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체면’은 ‘외식과 형식’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속과 겉’이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체면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체면을 가지고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체면을 버리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정직하고 깨끗하고 순진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체면을 생각지 않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다윗은 일찍이 목동으로서 이새의 말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소유한 철저한 신본주의의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고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하고자 했던 일은 하나님의 궤 곧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할 때에는 언제나 법궤가 앞서서 행진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법궤 운반’을 전개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법궤는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군에게 빼앗겼다가 지금까지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이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고 먼저, 3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였으니, 이는 법궤를 운반할 때 적군의 방해가 있을까하여 방비함이요, 또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 등으로 연주하게 하였으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법궤는 새수레에 실렸고, 20년 동안 법궤를 지키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법궤를 실은 소를 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법궤는 원래 레위 자손 중 그핫 자손이 어깨에 메어야 하는 법인데, 수레에 실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갑자기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저를 치시니 웃사가 그 법궤 곁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야웨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일을 중단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모셨습니다. 3개월이 지나는 동안 그 집에 하나님의 복이 크게 임했습니다.
다윗은 다시 용기를 내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마음을 먹고, ‘법궤 운반계획’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백성들은 다윗의 이 거룩한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하였습니다. 백성들의 헌신적인 협력에 힘입어 다윗이 기쁨으로 하나님의 궤를 메고 다윗성으로 올라오는데, 법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무난히 예루살렘에 안정한 후, 다윗은 에봇을 입고 야웨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고 즐거이 노래 부르며 나팔을 불며 환영 축하를 드렸습니다. 억제할 수 없는 감격에 겨워서 그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도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가 크게 흥왕할 때도, 그렇게 기뻐하며 춤을 추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빼앗겼다가 다시 돌아온 법궤 앞에서는 춤을 추었습니다.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흔들며 흥겹게 춤을 주는 바람에, 옷이 벗겨져 어느 정도 몸이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미갈은 몸이 드러나도록 춤을 추는 다윗을 보자 그 심중에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춤을 춘 것은 언제나 야웨 앞에서 행한 것이며, 꾸밈이 없고 순전한 기쁨의 표현이요, 감격의 발로였습니다. 결국 춤을 추었던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지만, 체면을 중시하며 춤추는 남편을 비난했던 미갈은 저주받아 그 후에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권위와 체면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체면을 버려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는데 체면을 버리라
사도행전 6장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했고, 히브리서 4장 16절에는 ‘은혜의 보좌 앞을 담대히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프랑스 격언에는 “피해는 모래에 쓰되, 은혜는 대리석에 써넣어라”는 것이 있고, 루터는 “은혜는 지나가는 소낙비와 같다. 그러므로 기회를 잃으면 그것을 못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내가 그래도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상적으로 지위와 권위가 있는데 남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체면을 지켜야지 하며, 생전 박수 한 번 치지 못하고, 열심히 통성기도 한 번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성령충만을 받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열심히 매여 달리고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만이 성령충만을 받고 능력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체면을 버리지 못하고, 깨뜨리지 못하는 사람은 생전 은혜를 충만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삭개오가 체면을 생각했으면 그는 구원도, 축복도 못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명예와 권세도 있었습니다.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처럼 뽕나무에 엉금엉금 기어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서 체면도 다 버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삭개오를 먼저 보시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리라”고 하셨으며, 그 집이 다 구원을 받고 아브라함 자손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고 찬송할 때 박수를 치면 은혜는 쏟아지며 성령은 충만히 임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데 체면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에도 지난 일에 대해선 체면을 버리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평생 동안 어떻게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실수했다고, 부끄러운 일 당했다고 고민하고 근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기의 체면을 상하는 일이나 공격적인 말을 듣고 쇼크를 받아 자리에 눕고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기를 꺼려하고 잠이 안 오고 노이로제에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한테 실수를 했거나 실패를 했어도 지난 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체면도 버려야 합니다.
실패한 것을 깊이 생각하면 마음의 상처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면을 생각하다 영의 병, 정신적인 병, 육체의 병에 걸리지 말고 담대히 털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범죄했을 때 회개하고서 담대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라’(벧전 2:9)고 했습니다. 실패했을 때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죄 없는 몸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욕을 당하시되 욕함이 없으셨으며,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했습니다. 실수하였든, 실패를 하였든지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은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범죄하고 잘못해도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면 용서받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긍휼하심을 믿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갑시다.
주의 일에 봉사할 때 체면을 버리라
봉사는 남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봉사란 주인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전도하라면 ‘제가 주제 넘게 무슨 전도를 합니까’ 하고, 직분을 받으라면 ‘제가 뭘 주제 넘게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하며 체면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체면을 너무 생각하지 맙시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릴 때 체면을 생각지 아니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봉사할 때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남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 말씀처럼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처럼 ‘원수를 용서해야 합니다.’ 또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고 했고, 디모데는 ‘나그네를 대접하며’(딤전 3:2)라고 했으며, 히브리서 기지는 ‘손님을 대접하면 복받는다’(13:2)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는데 체면을 버립시다.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고,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한 체면을 버립시다. 무엇보다 주의 일에 봉사할 때 체면을 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체면을 버리자
삼하 6장 16~23절 / 김홍도목사
오늘 밤에 드릴 말씀은 "체면을 버리자" 하는 제목인데 그저 체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체면을 버리자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숭배할 인물이 몇이 있다면 다윗왕을 첫째로 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칭찬을 받은 왕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찍이 목동으로서 이새의 말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서 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고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가 오랫동안 빼앗겼다가 가져 올 때에 너무 기뻐서 춤을 덩실 덩실 추었습니다. 일찍이 다윗은 왕이 될 적에도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크게 진흥한다고 도 그렇게 기뻐서 춤춰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다윗이 법궤가 돌아올 때 춤을 추었는데 춤을 출 때에 왕으로서는 체면을 깎는 그런 모습을 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내,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고 했습니 다. 그래서 다윗왕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슬이 시퍼래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부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 내셨도다" 하고 남편을 비웃고 흉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그 말을 듣고서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늘의 은혜와 신령한 은혜를 받고 기뻐서 박수하고 춤추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 의 은혜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영광된 일이라면 체면을 다 버렸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체면을 차릴 때는 잘 차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무례히 행치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 너무 체면도 없고 예의도 없으면 어디가나 욕을 먹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면에서 체면을 버려야 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래도 대학을 나오고 세상적으로 지위와 권위가 있는데 하면서 생전 박수 한 번 안 하고 열심히 기도 한 번 안 하는 그런 사람은 성령 충만을 못받습니다. 그 체면을 버리기 전에는 못받습니다. 열심히 매달리고 부르짖고 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고 능력도 받지 그 체면을 깨뜨리지 못하는 사탐은 생전 은혜를 충만히 못받습니다.
삭개오가 체면을 생각했으면 그는 구원도 축복도 못받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개, 돼지 취급을 하고 소외된 고독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나를 멸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뽕나무 위를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좋은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삭개오가 아이들처럼 뽕나 무에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체면도 다 버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러한 삭개오를 예수님은 꿰뚫어 보시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리라"고 하시고 그 집을 다 구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받는 데 체면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기도할 때 부르짖어 기도하고 박수하며 찬송할 때 박수하십시오. 체면을 생각하면 은혜를 못받습니다.
저도 체면 생각하고 점잔 뺐으면 은혜를 못받았을 것입니다. 목사나, 전도사라는 체면을 다 떼어버리고 "주여" 하고 매어 달렸더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체면을 생각하느라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는 데 체면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2.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에도 지난 일에 대해선 체면을 버립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떻게 실수를 한 번도 안하겠습니까? 실수했다고, 부끄러운 일 당했다고 고민 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은 어떤 사람의 체면을 상하게 하였는데 거기에 대해서 공격하는 말을 듣고 쇼크를 받아서 그후부터 아픈 곳이 없는데도 자리에 눕고, 사람 많은 곳에 가기를 싫어하고 밤에는 잠이 안오고 하는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마귀병인 것입니다.
누구한테 실수를 했거나 실패를 했어도 지난 일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고 체면도 버려야 합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대학을 나오고 은행에 계장이었던 사람인데 과장에게 무슨 체면을 상하는 말을 듣고 그 다음부터 고민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나일론 빨랫줄을 사다가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 살아갈 때 어떻게 한 번도 실수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는데 너무 체면을 생각하다가 영의 병, 정신병에 걸리지 말고 담대히 털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범죄했을 때 죄를 회개하고서 담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의 피로 씻음받은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번죄하고 잘못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면 용서받은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히브리서 9:13에 보면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긍휼하심을 믿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3. 주의 일에 봉사할 때 체면을 버립시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두 달란트, 세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담대히 나가어 장사를 했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하다 밑지면 어떻게 하나 돈 잃어 버리고 손해보면 주인한테 혼나겠고 그러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나" 그리고는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와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라고 꾸짖고 내쫓았습니다.
오늘날도 여러 사람들이 "아휴, 제가 뭘 주제넘게 전도를 합니까?" "제가 주제넘게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그러면서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러지 마십시오. 잘못해도 우리는 일할 분야를 찾아서 주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체면을 너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릴 때 체면을 생각하면 그러한 일을 했겠습니까? 주님의 일을 하는 데도 우리는 체면을 버리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데 체면을 버리고 혹 실수하고 실패했을지라도 회개하고 지난 일에 대해서는 체면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체면을 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윈합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