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가져왔습니다.”
오명화의 수족이며 대명학원 이사장실 과장인 장영기가 작은 상자를 탁자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자료도 모두 복원시켜 놓았습니다, 이사장님.”
“전(前) 휴대폰은 아주 못쓰게 되는 거죠?”오명화가 묻자 장영기는 부동자세로 선채 대답했다.
“예, 사모님. 그건 폐기시켰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오명화를 보더니 장영기는 소리 없이 물러갔고 응접실에는 다시 둘이 남았다. 오전 10시 반, 오명화는 이제야 학원에 출근할 채비를 마쳤고 전세희는 오늘 강의가 없다. 전세희가 턱으로 탁자위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이번에 새로 산 윤성일의 핸드폰이다.
“오늘 이거 갖다 줄 거야?”
“그래야지.”
했다가 오명화는 몸을 돌려 전세희를 보았다.
“내가 오늘 바쁜데 네가 성일이한테 핸드폰 갖다 줘.”
“내가 왜?”
전세희가 눈썹을 세웠을 때 안쪽 복도에서 윤정수가 나왔다. 윤정수도 외출 차림이다. 어제 부산 출장을 갔다가 늦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뭘 가지고 그래?”
윤정수가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는데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있다. 친딸이 아니지만 윤정수는 전세희를 예뻐했다. 그래서 전세희도 따르는 편이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오명화가 그러더니 탁자위의 핸드폰 상자를 집어 전세희에게 내밀면서 말을 잇는다.
“세희한테 심부름을 시켰어요. 핸드폰 성일오빠한테 갖다 주라고요.”
그러자 윤정수는 머리만 끄덕였고 전세희는 잠자코 상자를 받았다. 꼼짝 못하고 걸려든 것이다.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세요.”
화가 난 전세희가 윤정수에게만 인사를 했다.
“오냐.”
윤정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고 오명화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라있다. 그 웃음을 말로 표현하면 ‘여우같은 년’쯤 되었을 것이다.
바짝 다가앉은 박기춘이 윤성일에게 물었다.
“누군데?”
“넌 알 것 없고.”
윤성일이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이리 내.”
그러자 박기춘이 제 핸드폰을 꺼내 윤성일의 손에 쥐어주었다.
“너 한손으로 괜찮아?”
“그럼 두 손으로 버튼 누르냐?”
투덜거린 윤성일이 전원을 켜더니 박기춘에게 말했다.
“너 저기 소파에서 마실 것이나 꺼내 마시고 있어.”
“이 자식이 도대체.”
입맛을 다신 박기춘이 일어서더니 소파로 다가갔고 윤성일은 핸드폰의 버튼을 누른다. 오후 1시 반, 사고가 일어난 지 엿새째가 되는 날이다. 오른손은 깁스를 했고 왼손은 어깨뼈가 부서진 바람에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힘이 들었지만 오늘 아침부터 작동이 되었다. 그래서 박기춘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핸드폰을 빌린 것이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부터 김가영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끊임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먼저 통신 문제, 이쪽 핸드폰이 없어진 때문에 누구를 시켜야 했지만 여러 가지 걸림돌이 드러났다. 첫째, 덜렁 연락했다가 김가영이 자신의 배경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을 수습하려면 엄청난 고생을 해야 될 것이었다. 겪어봐서 아는 것이다. 그럼 누구한테 부탁하는 경우가 있는데 형제나 식구는 불가능했고 친구뿐이다. 그렇다면 박기춘이 적격이지만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김가영을 보여주기도 싫다. 그래서 핸드폰을 다시 사오도록 윤은지한테 부탁하고 나서 박기춘의 핸드폰을 빌린 것이다. 손가락을 겨우 움직여 버튼을 누른 윤성일이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신호음이 울리고 있다. 한번, 두 번, 세 번. 김가영은 이 시간에도 알바를 뛰고 있을 것이다. 하루 16시간씩 알바를 한다고 했으니까 8시간씩 두 탕. 신호음이 다섯 번, 여섯 번째 울렸다. 자나? 알바중이라 진동으로 해놓았나? 아니면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는 건가? 그럼 먼저 문자로 보내볼까? 어느새 전화벨이 여덟 번째 울리고 있다. 열 번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끊고 문자부터 보내자.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골치 아픈데. 벨이 열 번째 울렸으므로 윤성일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였다.
“여보세요.”
숨가쁜 목소리로 김가영이 응답했다. 달려온 것 같다.
“여보세요?”
이쪽에서 잠깐 망설였더니 재촉하듯 다시 묻는다. 윤성일이 심호흡을 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나야. 윤성일.”
“어떻게 된 거야? 형 무슨 일 있어?”
다그치듯 묻는 김가영의 분위기가 오히려 더 편안해진 윤성일이 얼굴을 펴고 웃는다. 대신 성을 내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일은?”
겨우 그렇게 대답했더니 김가영의 말이 쏟아졌다.
“그럼 왜 닷새 동안 연락도 안했어? 전화는 꺼놓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무슨 일 때문인지 자세히 말 해주지 않으면 확 죽여버릴 거야.”
“아이구 무서라.”
윤성일의 눈이 번들거렸다.
“김가영이 이렇게 사나운 줄 몰랐는데?”
“장난 아냐!”
“너 지금 어디야?”
“응?”
했다가 김가영은 자신이 리듬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다시 소리쳤다.
“도대체, 형은...”
“내가 지금은 길게 이야기할 형편이 못되니까 오늘 저녁에 다시 통화할게.”
“형, 이 전화는...”
“이건 내 친구 전화니까 여기다 하지는 말아. 알았지?”
“형, 저녁때 전화 할 거지? 아니면 내가 해?”
“아니, 내가 할게.”
그리고는 전화기를 귀에서 뗀 윤성일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때 이쪽을 힐끗거리던 박기춘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여자구나?”
다가선 박기춘이 대뜸 그렇게 물었는데 눈썹이 좁혀져 있다.
“심각한 분위기던데. 누구냐?”
“넌 몰라도 돼.”
핸드폰을 쥔 윤성일이 버튼을 하나씩 차분하게 눌러 김가영의 전화번호를 지우고는 내밀었다.
“어라?”
핸드폰을 살핀 박기춘이 이번에는 눈을 치켜떴다.
“번호를 지웠어? 도대체 누구야?”
“나중에.”
통화에 집중한 때문에 긴장이 풀린 윤성일이 눈을 감았으므로 박기춘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윤성일이 여자는 다 오픈했던 것이다.
전세희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3시경이었으니 족히 세 시간은 농땡이를 친 셈이다. 병실에는 윤성일의 큰형수 김미정이 와있었는데 전세희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아이구, 어서와.”
반색한 이유가 뻔했기 때문에 전세희도 얼굴에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만만하게 본 상대다.
“수고하시네요.”
“아니, 내가 뭘.”
하더니 김미정이 가방부터 쥐었다.
“별일 없었고. 오후 6시쯤 둘째 동서가 오기로 했으니까 그때까지 여기 좀 봐주겠어? 아무래도 가족 하나는 항상 지키고 있어야지.”
김미정이 수선을 떠는 동안 전세희가 힐끗 안쪽 병상을 보았다. 붕대로 감아 매달아놓은 다리 한쪽만 보였고 윤성일의 상반신은 보이지 않았다.
“네, 그럴게요.”
전세희가 사근사근 말하자 김미정이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옆을 지났다.
“그럼 잘 부탁해.”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잠이 들었어.”
윤성일을 말하는 것이다. 김미정이 방을 나가자 간병인하고 주방 쪽에 있던 안성댁이 다가왔다. 윤정수 저택의 가정부가 며칠 전부터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소파에 앉은 전세희를 내려다보면서 안성댁이 낮게 물었다.
“아가씨, 마실것 좀 드릴까요?”
“됐어요.”
주위를 둘러본 전세희가 낮게 묻는다.
“큰형수님 언제 왔어요?”
“점심 먹고 두시쯤 왔으니까 한 시간쯤 있다 간 셈이네요.”
쓴웃음을 지은 안성댁이 말을 잇는다.
“한 시간 있는 동안에도 앉아서 전화질이나 하고 있었구요.”
안성댁은 오명화가 채용한 가정부여서 가족 분위기를 잘 안다. 그래야 잔소리 듣지 않고 편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전세희의 시선을 받은 안성댁이 말을 이었다.
“저한테 회장님이 언제 오시느냐고만 묻더라구요. 그때 맞춰서 나오려고 하는 것 같구만요.”
머리를 끄덕인 전세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성일의 다리가 움직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성댁이 여우인 줄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현장을 목격하자 가슴이 텅 비어진 느낌이 든다. 하긴 집을 나온 지 오래 되었으니 그동안 많이 변했을 것이었다. 안성댁 이전의 가정부 임실댁은 20년이 넘도록 있다가 60세가 넘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1년쯤 되었을 땐가? 새 어머니 오명화가 들어오기 전이다. 매달린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에 버튼을 눌러 다리를 내리던 윤성일이 다가오는 전세희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윤성일이 정색하고 말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아니까 다행.”
툭 던지듯이 말을 받았지만 전세희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이렇게 정면대결은 처음인 것 같다. 아니, 이렇게 둘이만 있게 된 것도 12년 만에 처음인 것 같다. 병상으로 다가간 전세희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전세희답게 박스는 다 버리고 핸드폰만 건넨 것이다. 배터리도 가득 충전시켜서.
“자, 핸드폰.”
“응, 고맙다.”
반색하면서 핸드폰을 받는 윤성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와, 색깔 쥑인다.”
은색에 광택을 입힌 것인데 전세희가 보기에는 유치했다. 장명기가 고른 색깔이니 오죽할까? 전세희가 저절로 말했다.
“그거, 내가 고른 거 아냐. 난 그냥 심부름만 했을 뿐야.”
“아, 그래?”
“저 후진 색깔은 나하고 상관없다구.”
“그렇구나.”
“내가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냐.”
“지나다가 오줌 마려워서 겸사 겸사 들린 거겠지. 상관없어.”
“누웠다고 잘난 척 하지 마. 안 봐줘.”
그때 핸드폰을 든 윤성일이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
“여기 남자 화장실이다. 쌀려면 옆방으로 가.”
“형이야?”
벨이 두 번 울리고 나서 바로 전화를 받은 김가영이 소리쳤다.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 깔려졌다.
“응, 거기 어디냐?”
“편의점 알바야.”
“바쁘겠구나.”
“지금은 괜찮아.”
“언제 끝나는데?”
“밤 12시.”
“아이구.”
“형, 지금 어디야?”
“아, 여기 일 끝나고 나왔어.”
머리를 돌린 윤성일은 옆쪽 응접실을 보았지만 전세희는 보이지 않았다. 사각지대로 은폐한 것 같다. 그때 다시 김가영이 말했다.
“형, 나 내일 쉬니까 내일 만나자.”
“응?”
놀라 숨까지 들이켠 윤성일에게 김가영이 말을 잇는다.
“내일 아침에 만나서 교외나 가자. 저기 파주 쪽도 좋고 춘천. 그렇지, 평일이니까 강릉도 갔다올 수 있겠다.”
강릉이란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윤성일이 다시 심호흡을 했다. 손님이 없는지 김가영이 말을 잇는다.
“근데 형. 그동안 왜 연락이 그렇게 안 되었어?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말 안했나? 핸드폰 잊어버렸다고 말야. 그래서 새 핸드폰으로 바꿨어.”
“그래? 하지만 다른 전화로 사정 이야긴 할 수 있었잖아?”
“....”
“닷새 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별 생각을 다 했단 말야.”
“무슨 생각?”
“어쨌든 그건 내일 만나서 이야기해.”
“....”
“내일 아침 8시에 괜찮아?”
“으응?”
“참, 형. 차 있어? 없으면 버스타고 가도 돼. 어때?”
윤성일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자, 이제 각본대로 연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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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요
굿,,즐감,,,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즐감하고 갑니다 .
감사히 잘봤습니다~
즐감요~
감사
으이구
갈수록 첩첩산중이네1
잘읽었습니다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