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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건축을 열망하는 다윗
삼하 7:1-7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삼하 7:1-7 / [나단의 예언] 이제 다윗왕은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들로부터 그를 지켜 주셨기 때문에 자기의 왕궁에서 편안하게 살아갔다. 2) 그러던 어느날 왕은 자기만 좋은 집에서 살게 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예언자 나단에게 이와같이 상의하였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왕궁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아직도 천막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3) 나단이 아뢰었다. `무슨 일이든지 임금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임금님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4) 그런데 바로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5) `너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가서 이 말을 전하여라. `온 세상의 주인인 여호와가 네게 말한다. 너는 내가 거주할 성전을 지으려고 하느냐? 6) 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날로부터 이제까지 한 번도 어떤 집에서 산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천막 안에 살면서 너희와 함께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7) 나는 그동안 수많은 사사와 영도자들을 내세워 내 백성 이스라엘을 양 떼처럼 돌보게 하였으나 그들 중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왜 나를 위하여 송백으로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꾸짖은 일이 없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겠다는 마음을 품습니다.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1-3) 다윗 왕국의 상황은 평안하고 삶이 안정된 시기였습니다(1). 주변의 모든 대적을 정복하고 참된 안정과 평화와 번영이 있었습니다. 이런 안정은 좋은 것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여전히 뜨겁다는 증거가 오늘 본문입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 자신은 왕궁에서 평안히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는 허름한 천막 속에 있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2).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불러 성전 건축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나단은 다윗의 말을 듣자마자 감동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과 관계된 것을 존귀히 여기고 더 잘 모시기 위해 애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4-7)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살집을 건축하겠느냐?”묻고 계십니다(5).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건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건물을 지어야 하나님이 그 안에 살아가실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수준에 맞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재물을 다 쏟아서 붓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격에 맞는 성전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름한 천막 속에 지내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막 속에 거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막을 들고 다니며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백향목으로 지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7) 백성들이 거주하는 천막과 동일한 천막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사는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서 함께 사셨습니다. 백성들도 천막에 살고 하나님도 천막에 거하시는 모습은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과 함께 사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성전에 사시는 줄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실만한 그럴듯한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백성들과 함께, 백성들의 중심에 계시길 원하셨습니다.
적 용 : 교회는 성도와 함께 성도들의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삶의 중심에 있습니까?
위대한 과학자 에디슨은 손목시계를 차지 않고 항상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일했습니다. 잠시라도 일하는 손을 멈추고 시계를 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일은 ‘시간 위에 평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업적에 의해 평가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그는 어떤 일을 이루는데 2%의 영감과 98%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는 축음기를 발명할 때 한마디 말을 입력시키기 위해 하루 18시간에서 20시간에 걸쳐 씨름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마음을 다졌고 결국 해냈습니다.” 우리는 근간에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 이루어낸 결과가 있습니까?
호크마 주석
=====7:1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거하게 하신 때 - 본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유명한 다윗 언약(4-17절)을 주신 때가 다윗 통치 말기임을 보여 준다. 즉 본절에서 가리키는 때는 (1)다윗이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했을 때인데 여기에서 사방의 모든 대적은 블레셋(5:17-25;8:1) 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 족속(8:2-14)을 의미하므로 그때는 분명히 다윗의 말기이다. (2)또한 그때는 다윗이 백향목으로 지은 예루살렘 궁에 거했을때(2절)인데 이때는 두로의 히람 왕과 교류가 있었던 때(5:11)이므로 이러한 사실 역시 다윗의 통치 말기임을 입증해 준다. 5:11 주석 참조. 따라서 본장은 사실상 8장 이하의 내용보다 더 나중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본서가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기록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일관된 흐름을좇아 기록되었음을 보여 준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7:2
선지자 나단 - 나단(Nathan) 선지자는 다윗과 솔로몬 양대에 걸쳐 크게 활동한 선지자이다. 그는 본장의 다윗 언약 뿐만 아니라 밧세바와 다윗의 간음 사건, 솔로몬의 등극(登極)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12:1-15;왕상 1:8-30, 32, 39, 45). 또한 그는 성전예배에 있어서 음악을 장려하였고(대하 29:25), 다윗과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하기도하였다(대상 29:29;대하 9:29).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 예루살렘 정복(5:6-10) 및 주위 대적들을 모두 제압한 때에 다윗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뜻아니한 호의를 입었다. 그것은 곧 히람이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에 백향목 궁을 지어 준 것이었다. 이후 다윗은 그곳에서 거처하게되었는데 본절은 바로 이 일을 의미한다(5:11).
휘장 가운데 있도다 - 여기에서 휘장(curtains)은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홍색실로 수놓은 10폭의 앙장(仰帳)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으로 성막(tabernacle) 전체를 덮었다(출 26:1;36:8). 다윗은 이처럼 천으로 덮여 있는 성막속에 여호와외 궤가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시 69:9).
=====7:3
본절의 나단 선지자의 말 중, 전반부는 옳았지만 후반부는 그렇지 않았다. 즉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다는 말은 사실이었지만(9절;5:10;삼상 16:18;18:12) 다윗이행하려 한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5, 6, 13절).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 나단의 이와 같은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한말이 아니었고 단지 자기 생각에 옳다고 느낀 바를 피력한 것에 불과하였다(Keil,Lange). 즉, 그는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소원이 곧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줄로 알고 즉흥적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이러한 나단의 생각이나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앞장서거나 그에 협력하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본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0:31). 그러나 이번경우에만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 뿐인 것이다.
=====7:4
그 밤에 - 나단이 다윗의 의견에 적극 동조한 바로 그날(3절) 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의 그릇된 충언(忠言)을 즉각 시정해 주시기 위하여 이처럼 신속히 나단에게 계시하셨던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79).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 아마도 나단은 꿈(민 12:6;왕상 3:5)이나 이상(민 12:6;단 2:19;7:2, 13) 또는 직접적인 계시(창 26:24;민 22:20;삿 6:25-27;삼상 3:1-21)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이것을 '묵시'(vision)로 칭하고 있다. 창 40:5-19 강해, '계시의 정의 및 종류' 참조.
=====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과 관련된 당신의 뜻을 직접 다윗에게 계시하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일단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전달토록 간접적인 방법을 취하고 계심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하나님의 뜻과 나단 선지자의 조언(3절) 간의 불일치로 인해 다윗이 당혹치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2)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代言)하는 사명을 지닌 선지자들의 고유직분을 존중하셨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12:1-14 강해, '선지자' 참조.
네가...건축하겠느냐 - 다윗의 성전 건축 의사를 분명히 반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7:4에서는 '너는...건축하지 말라'고 더욱 확실한 부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 이유를 대상 22:8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것은 곧 다윗이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평화를 상징하는 성전을 건축할 자로서의 적합한 이미지는 아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 p. 345).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본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다윗의 진실한 마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이는 다만 아직 그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일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에 이르러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것만 보더라도 알 수있다(13절;대상 17:12;대하 3-6장).
=====7:6
7절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의사를 반대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들려주고 있는구절이다. 그 이유는 곧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한번도 고정된 곳에 계시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시며 이동용(移動用) 건축물에 계셔왔다는 사실이다.
내가...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과거 430년 동안 종노릇하였던 애굽 땅에서 건져 내셨던 역사적인 날을 가리킨다. 정통주의 학자들에 따르면 그날은 B.C. 1446년경 아빕월 15일이었다고 한다(출 12:41). 출애굽기 서론, '출애굽 연대' 참조.
집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이트'(* )는 (1)어떤 재료로 만들어진영구한 건축물(16:21;창 19:2;33:17), (2)예배 장소, 또는 성전(출 23:19;왕상 6:5),(3)사람이 거하여 안식하는 장소(욥 17:13;전 12:5)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하나님께서 영구히 거하시며 안식하시며 경배 받으실 만한 견고한 건축물을 의미한다.
장막과 회막 - 장막(tent)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헬'(* )은 '단순히 이동할 수 있는 임시 거주지', 곧 천막을 의미한다(삼상 17:54;대하 14:15). 반면 이와달리 회막(tabernacl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슈칸'(* )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놓은 장막'을 의미한다. 즉 '미슈칸'(* )의 동사형 '솨칸'(* )은 본래 '자리잡다', '앉다', '휴식을 취하다', '살다'란 뜻이다. 이렇게 볼 때'미슈칸'의 의미는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 곧 법궤가 자리잡고 있는 장막을 의미하는것임을 알 수 있다(출 25:9;민 1:50;시 46:5;84:2). 그러나 이와 같은 두 용어의 차이점은 본절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두 용어가 모두 이동용 거처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고정된 집에 거하시지 않고 이동용 천막에 거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지극히 거룩하시고 존귀와 영광으로 가득 차신 여호와 하나님(대상 16:27;겔 39:7)께서 화려한 장소에계시지 않고 비천한 장소에서 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인간의 수준으로 낮아지신 것을 의미한다.
=====7:7
무릇...더불어 행하는 - 여기에서 '행한다'(* , 할라크)는 말은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도우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모든 행사를 의미한다(Lange). 먹이라고 - 여기서 '먹인다'(* , 라아)는 말은 본래 목자가 가축을 돌보는것을 의미한다(창 37:13;민 14:33;삼상 16:11). 따라서 이 말은 주권자가 백성을 다스리거나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는 사실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삼하 5:2;시 23:1;슥 10:2). 여기서도 이 말은 백성을 '통치하다', '지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Keil).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 학자들은 본절의 '지파'라는 말을 놓고서 서로 해석을달리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이 말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지파를 사사로 보는 견해이다(Bertheau, Ewald, Thenius).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은 본절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7:6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즉, 본절의 '지파'(* , 쉬브테)라는 말이 대상 17:6에서는 '사사'(* ,쉬프테)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본절의 '지파'(* )는 '사사'(* )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한다. (2) '지파'(* )란 말을 그대로 인정하는 견해이다(Keil, Lange, Hengstenbery, Maurer). 이 견해에 따르면, 여기서 '어느 지파'란 다윗이전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단과같은 지파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두 견해 중 우리는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두 견해를 다 염두에 두고 본절을 대하는 것이 보다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사(士師)들 대부분이 에브라임, 므낫세,베냐민, 단과 같은 지파 출신이기 때문이다. 사사기 서론, '이스라엘의 사사들' 참조.
백향목 집 - '백향목'(cedar)은 그 당시 최고급 건축 자재이며 궁궐과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5:11 주석 참조. 그리고 '집'(* , 바이트)은 이미 6절에서 나온 말로 영구히 거할 수 있는 견고한 구조물을 의미한다. 즉 다시 말하자면, 이는 곧궁궐이나 성전 따위를 의미한다.
< 설 교 >
하늘 집을 짓는 마음으로
삼하 7:1-16 / 류영모목사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갔을 때 눈에 띄는 한 묘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간호 선교사로 와서 30년동안 헌신한 Mabel의 비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She hath done what she could.)
일찍이 청교도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이런 신앙고백을 나누었습니다.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 그것은 곧 지나갑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행한 것만이 영원히 남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받는 신앙이 있고 드리는 신앙이 있습니다. 받는 신앙이 시작이라면 드리는 신앙은 완성입니다. 받는 신앙이 이 땅의 축복이라면 드리는 신앙은 하늘의 축복, 영원한 축복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도 받았던 인물, 그리고 하나님을 몹시도 사랑했던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다윗” 입니다. 그는 시작이 아름다웠고 완성이 아름다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땅에서 복을 받았고 하늘에 복을 쌓을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I.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마음 하나로
오늘 본문의 다윗은 많은 시련 끝에 임금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여러 강대국들을 다 무찔렀습니다. 나라가 평안해 졌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을 거닐던 어느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지금 천막 가운데 있구나.” 하나님 앞에 송구하고 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인생의 절정을 누리고 있을 때에, 생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에,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나던가요? 내 집을 살 때 하나님의 집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행복할 때 하나님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윗의 변함없는 영적인 관심을 보십시오. 그가 왕이 되어 아름다운 궁전안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에 관한 관심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가난할 때 곧잘 예수를 믿던 사람이 돈 꽤나 벌고 나면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 종종 봅니다. 비천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몸부림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이 평안을 얻고 나면 주님을 저버리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됩니다.
지금 다윗은 출세를 했습니다. 명성을 얻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영적인 관심은 조금도 변하지를 않았습니다. “내 하나님의 장막은 초라한데 내 집은 너무 화려하구나.”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22장에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나옵니다.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유한 사람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찌라” (대상22:8-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살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역대하 6장 8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내게 좋도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둔 이것 하나로 내 마음이 기쁘다. 내 마음이 좋도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건축할 마음 하나로」「하늘 집은 짓는 마음으로」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는 마음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윗의 이 마음입니다. 여러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로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II. 교회가 걸어온 길
세계적인 신앙잡지 「Pulpit」을 발행한 스피노스 목사님은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이 늘 모자라는 문제가 있다. 죽어 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떠들고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이 많아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이 없기에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의 사람이 많아 이름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드리는 자(giver)로 가득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tipper)로 가득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으로 운영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에 의해 운행된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지내기가 편안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활발하게 전도하고,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져 화석화되어 간다.」
「빌딩 이즈 미션」(B/D is Mission)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건물이 선교한다는 겁니다. 성전건축은 그냥 빌딩이 아니고 거기에는 목회적인 의미가 있고 신학적인 의미가 있고 선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도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가장 좋은 일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III. 다윗 :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오랜 기간동안 우리의 신앙 고백으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성전건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사실을 깨닫고 복 받은 사람이 오늘 본문의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아갔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춤이나오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만 바라만 보더라도, 꿈만 꾸더라도 시가 터져 나왔던 사람, 노래가 터져 나왔던 사람, 눈물이 쏟아졌던 사람, 춤이 덩실덩실 나왔던 사람 그가 바로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가름할 수 있는 바로메타가 있습니다. 시금석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걸 보면 압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생각해도 좋고 주의 성전 뜰만 밟아도 좋고 바라만 봐도 좋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내 가슴속에 터질 듯이 넘치고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속에 지금 충만히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표현을 원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받는 큰 축복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고귀한 축복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복입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요 그런 점에서 다윗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자원하는 심령, 기쁨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억지로 하지 않고 즐겁게 참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귀한 것을 드려야 됩니다. 못 쓸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으셔서 우리에게 꿈땅비전에 동참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물질을 지으신 창조주입니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참여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려고, 더 은혜 주시려고, 더 복 주시려고 우리에게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가 시장갔다 오시면 눈깔사탕이라고 하는 왕사탕을 사오셨습니다. 그 사탕 하나 먹으면 아까워 가지고 입에 넣었다가, 빨았다가, 때 묻은 손 가지고 꺼냈다가 또 넣다가 빨았다가 온 동네를 쫓아다니며 자랑을 했습니다. 사탕을 하나씩 나눠주고 우리 할머니는 손자들이 그토록 맛있게 사탕 먹는 모습을 봅니다. 할머니가 보니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졌나 시험해 봅니다. “얘들아, 그 사탕 나 줘. 아...”
세 종류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놈은 “할머니가 어떻게 준 것을 또 뺏어?” 그러고 안 뺏기려고 줄행랑을 치는 놈, 어떤 놈은 그 왕사탕 그렇게 큰데도 불구하고 안 뺏기려고 아드득 아드득 깨물다가 혀도 깨무는 놈, 어떤 놈은 할머니가 달라니까 아깝지만, 그러나 할머니가 줬으니까, 사다주신 할머니가 달라는데 줘야지. 내가 눈물을 머금고 줘야지. 받아 가지고 “아~” 넣어주는 놈, 똑같은 자식입니다. 그 세 자식 중에 할머니는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알사탕 10개 사왔는데, 3개 주고 봉지에 7개가 남았습니다.
할머니 드리기 싫어 도망간 손자들 다 제쳐놓고 할머니 입에 사탕 넣어준 손자에게 아예 사탕 봉지째 맡겨 버립니다.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게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더 줄 자를 찾습니다. 복 줄 아들을 찾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주실 사람을 찾고 있는 겁니다. “누가 더 기도 많이 합니까? 누가 더 전도 많이 합니까? 누가 헌신 더 많이 합니까? 누가 충성 더 많이 합니까? 누가 더 은혜에 보답합니까?” 그것을 찾고 있습니다.
IV. 네 이름을 존귀케 하리라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마음 하나로 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고 했습니다. 네가 나의 이름을 높였기 때문에 내가 너의 이름을 높이겠다. 네가 나의 이름을 존귀하게 했기 때문에 내가 너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주겠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이름이 존귀해야 합니다. 왜요? 오늘 아침도 내 이름을 하나님이 지금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성령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 앞에 우리의 이름을 불러 지금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의 이름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만 하더라도 은혜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려고 할 때 가슴이 설레 여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이름이 존귀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은 그 이름이 영광스러운 사람이요, 그 이름에 추한 사람은 그 인생이 추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신구약 성경에,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은 다윗이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다윗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보다도 사도 바울 보다도 심지어는 예수라는 이름 보다도 다윗이라고 하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기억할 때에, 병 낫기를 사모할 때에, 주님 만나기를 사모할 때, 뭇 심령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에 그 이름 앞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 다윗의 이름을 함께 기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군천사들에 쌓여서 하늘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 주님 이땅에 오실 때에 재림의 예수를 명명하는 그이름이 어떤 이름입니까?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할렐루야.
V. 안정의 복을 주신다
성전을 건축할 마음 하나만으로 다윗은 안정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해 주겠다”는 복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또 광야여행 할 때도 안정감이 없었습니다.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옮겨야 됐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으로 옮겨 다녀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다윗과 그 자손들에겐 안정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 삶이 안정되어지는 것, 가정이 안정되어지는 것, 자녀들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안정되어지는 것, 사회가 안정되어지는 것, 나라가 안정되어지는 것, 민족이 국가가 안정되어지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어떻게 안정될 수 있습니까?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에 안정감이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고 신앙이 안정되고 그 영혼이 안정되면 바로 너희들의 삶이, 사회가, 국가가 안정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옮겨 다니면 이스라엘 백성의 안정감이 없습니다. 성전건축하고 법궤가 자리잡게 되면 온 가족들이, 온 백성들이 마음중심을 성전에 담게 될 것이고 그 순간 너희들의 가정이 안정되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너희들 영혼들이 성전에 뿌리내리는 그 순간 너희 삶이 안정되게 될 것이다. 온 백성들이 성전에 마음 담고 살아가는 그 순간 너희 국가가 안정될 것이다. 할렐루야. 다윗은 안정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계속되어지는 12절 14절 15절 말씀에 보면 여러 가지 안정가운데 특별히 자손의 안정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내 위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네가 이땅에 살아가는 어느날 너는 조상들과 함께 죽겠지. 너의 자손들이 이 땅에 태어나 왕위를 계승하게 될텐데 그 왕위를 내가 견고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계속되는 말씀에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자손들이 실수할 게야. 네 자손들이 죄를 지을 거야. 네 자손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을 게야. 그러나 내가 저들을 왕위에서 쫓아 내지 아니할 것이다. 때로는 채찍을 들고 때로는 징계할 것이지만 너의 이름을 봐서 네 얼굴을 봐서 네 자손들을 내가 번성케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죄를 짓고 많은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지 아니하고 왕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왕권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경상남도 한 시골에 김성은이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6.25때 군에 입대했고 그가 27살의 나이에 별을 달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어머니께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경찰서장을 대동하고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리고 별이 달린 모자를 그 앞에 놓고 “어머니, 어머니 곁을 떠났던 그 자식이 별을 달고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시큰둥해 하셨습니다. “그 별은 언젠가는 떨어질 똥별이다. 나는 네가 하늘의 별을 달기를 원한다. 네가 어느 지역에 가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거기서 복음 전하는 일, 성전세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게야.” 이 사람은 4성 장군이 되었고 국방부장관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김성은 국방부장관입니다.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군부대에 수많은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그가 전역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땅을 다 팔아서 약수동에 한국교회가 낳은 예배당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으로 꼽혀지는 약수동 신일교회를 세웠습니다. 성전을 봉헌한 다음에 예배당 사진을 구석구석을 찍어서 어머니 앞에 찾아갔습니다. “어머니 이 예배당 저희들이 지어서 하나님 앞에 봉헌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나는 네가 목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런데 네가 목사는 되지 못했지만 이제야 네가 하늘의 별을 달았구나.” 그 예배당을 통하여 뭇 심령들의 하늘의 별이 되어서 오르게 될 것이다. 뭇 영혼 구원하게 될 것이다. 이제야 네가 땅에서 썩을 별이 아니고 떨어질 별이 아니고 하늘의 별을 달았구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VI.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복을 주신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왕조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조를 통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탄생하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예수 이름 앞에 사단은 두려워 떨게 될 것이며 다윗의 왕가를 통하여 태어난 예수의 이름 앞에 하늘문이 열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복된 축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복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바로 너의 왕위를 통하여 태어날 예수를 통하여 영원한 나라를, 하늘의 왕국을, 하나님 나라를 내가 건설하게 될 것이니라.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우리가 조심스럽게 읽어내려 가다보면 아주 우리의 관심을 주목시키는 한 구절이 나옵니다. 11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무슨 얘기이겠습니까? 네가 나의 집을 짓겠다구. 아니야. 너는 내 집을 지을 수가 없어. 나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겠다구. 아니야. 나는 집이 필요없는 존재야. 나는 성전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야. 이 성전이 아니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영광받을 수 있고 이 성전이 아니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이 땅을 구원할 수 있어. 네가 내 집을 짓는다고. 아니야. 네가 내 집을 짓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한다면 내가 너를 위하여 영원한 집을 짓는 것이 은혜가 아니겠더냐. 네가 나를 위하여 집을 지을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겠다. 할렐루야. 하늘의 집을 지어 주리라. 그래서 하늘 집을 짓는 마음으로 우리는 성전을 건축할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해 주셨고 영원한 나라를 건설해 주셨고 다윗의 영혼을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여 하늘 집을 지어 주셨던 것이지요. 성전 건축을 하려던 자신의 꿈은 하나님의 거절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다윗은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질 성전 건축을 위해 금과 은을 모으며 힘을 다하여 예비하기 시작했습니다.(대상29:2)
다윗은 그의 왕국이 자신이 집권중인 당대에만 대과없이 번영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통치하는 단견을 가진 왕이 아니었습니다. 먼 후 대를 바라보면서 ‘국가 백년 대계’를 세워 후손을 위해 현 시점에서 자신이 담당해야 할 일감을 찾아 미리 준비하는 경륜있는 통치자였습니다. 다윗 왕국은 후손들에게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빚을 지게 하는 나라가 아니라, 조상이 준비해 둔 풍성한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으며 태어나게 하는 나라였습니다.
비록 성전건축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다윗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뜻대로 행하려는 진심을 하나님께서는 깊이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곧 다윗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워주시겠다는 영원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집에 내가 사는 겁니다. 이 땅에서도 내가 집 짓는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내가 지은 집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복을 받고 너무 감사해서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종이 무엇이관대 이 복을 주십니까? 종의 집이 무엇이관대 이 엄청난 복을 주십니까? 종의 자식들이 무엇이관대 이 엄청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더란 말입니까?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울며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인생은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인생은 집짓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믿음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오 헨리의 단편 소설 중에 「20년 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지금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십년 후 이십년 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집을 짓지 못해서 이 땅에서 자신의 성전을 짓지 못해서 하늘 영원한 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십년후에도 교회의 구경꾼으로 이십년후에도 신앙의 방관자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불행한 대열에 여러분 가운데 누가 서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겠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나의 집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하늘 집 영생의 집을 지어 주시는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전을 지었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 집을 짓는 잘세 잘짓고 잘짓세 하늘 집을 잘 짓세 ♪♪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이동휘목사 / 삼하 7:1-29
1.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단숨에 쓰러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자, 다윗의 지지도가 날로 상승하여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사울 왕의 신하들까지도 모두 다윗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이에 사울 왕은 충신 다윗을 자신의 정권에 위협적인 인물로 여겨 기회만 있으면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자 전국에 걸쳐 다윗을 수배하거나 살해하라 명령합니다.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이때부터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울 왕은 추격자이고 다윗은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사울 왕이 전쟁에서 죽임당할 때까지, 도망자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여러 차례 주어졌었지만, 사울 왕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울의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은 후, 그 후손들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윗과 전쟁을 했지만, 그럴수록 사울 왕가는 점점 쇠하여져 가고,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갔습니다.
(삼하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사울의 집이 점점 약하여 가고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게 된 원인은, 사울과 그 가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고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삼하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듯 만사가 제대로 술술 풀려갔습니다. 다윗은 거침없이 전진했습니다. 블레셋 족속들도 평정했고, 멋지게 북쪽과 남쪽을 통합하여 통일 왕국을 이루었으며, 오랫동안 여부스 족이 지배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삼하5:6-9), 장대한 축제 행렬과 함께 법궤를 수도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단순히 다윗이 통치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배받으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려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왕의 보좌가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보좌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 하나님이 왕이심을 증거하는 자로서 왕이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골리앗도 죽었습니다. 사울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살아 있습니다. 그것도 백성들에게서 최고의 환호와 칭송을 받으며 당당히 살아 있습니다. 만사가 다윗을 통해 제자리가 잡혔습니다. 사울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왕정도 다윗에 의해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통상적인 왕은 아닙니다. 다윗은 권력을 휘두르는 오만하고 지체 높은 우두머리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종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며 공포하는 종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보좌를 하나심의 통치를 전하는 강단으로 사용하는 그러한 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통치를 노래하며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편93:1-5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93:1-5)
다윗의 이 기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확신이 흠뻑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다양한 기도와 고백에는, 일관되게 절대적인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확고부동의 다윗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로부터 천 년 후 예수께서도 “하나심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으로 세상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2. 다윗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실 ‘하나님의 집’ ‘성전’을 지어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다윗은 비천한 목동에 불과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가슴 벅찬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광야에서 거처할 곳 하나 없이 방랑해야만 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적들과 사울에게서 도망가느라 힘겨웠던 기나긴 세월이 마침내 지나가고, 이제 드디어 평온한 날이 온 것입니다.
(삼하7: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당연히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그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 드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이제 집, 다윗 궁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다윗에게 명예롭고 편안한 처소, 왕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명예롭고 편안한 처소를 베풀어 드려야 했습니다. 다윗은 그 결심을 그의 목사 나단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단은 열렬히 찬성했습니다.
(삼하7: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목사들은, 하나님께 무언가 받으려고만 하던 성도가 하나님께 무언가 드리고자 하는 모습을 보일 때 참으로 기뻐하며 사랑합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정직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을지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자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더 넘치도록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은 주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특기입니다. 주시되 다함이 없이 주십니다. 예수께서 “(마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청하는 데 대가(大家)였습니다. 그는 당차고 거침없이 간청했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용서와 사랑,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 그리고 성령을 구했습니다. 다윗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찬양을 드리는데, 그러한 찬양들은 모두 힘들여 간청하는 기도의 삶에서 캐내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시편 21편은 이렇게 간청하며 살았던 다윗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왕의 손이 왕의 모든 원수들을 찾아냄이여 왕의 오른손이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리로다.
왕이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비록 그들이 왕을 해하려 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왕이 그들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21:1-13)
이 시편 기도 찬양시는 다윗이 전쟁에 나가기 전,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 찬양이며, 또한 승전하고 돌아와 하나님께 드린 찬양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도우심과 베푸신 은혜로 가장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른 다윗이 그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제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리겠다는 다윗의 제안을 들은 나단은 즉시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습니다. 더 생각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가 죽어도 나는 네 아들 하나를 왕으로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겠다. 바로 그가 나를 위해 성전을 건축할 자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나라가 영원히 지속되게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다윗 너는 성전 건축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은 나단을 잠깐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제안을 나단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보셨던 것입니다. 나단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나단은 다윗을 다시 찾아가 어제의 ‘성전 건축’ 허락을 취소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했을 때 열렬이 찬성하고 지지했던 나단은, 당황스럽고 난처하지만 다윗의 제안을 막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선한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아서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열심인 것이 분명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다윗의 제안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열정,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겠다는 그 정열에 대해 인정해 주고 인도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아니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거창한 인간적 계획을 세웠지만, 하룻밤 기도하고 나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됨을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단은 그 밤에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에게, 하나님을 위한 다윗의 건축 계획이 다윗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방해가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은 본질상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 하7:4-17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세우고 싶다고? 잊어버려라.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워 줄 것이다. 나는 네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왕국을 세우는 중이다. 집을 세우는 이는 나지, 네가 아니다. 내가 너의 건축 시도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네가 이것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예루살렘이 온통 너의 건축 사업이 진행되는 광경과 소리, 목수의 망치, 석공의 끌, 트럭 운전사의 고함소리 등으로 가득해지면, 곧 사람들은 모두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벌인 일에 휩쓸릴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왕국이고 이 왕국의 왕은 나다. 나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소위 집 없이도 잘 지내 왔다.
도대체 누가 너한테 와서 나에게 집이 필요하고, 내가 집을 원한다고 하더냐? 집을 지을 일이 있거든 내가 지을 것이다. 너의 목동 시절부터 나는 너와 함께 일하며, 구원과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내 왕국을 건설해 왔다.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하는 일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그들이 알아볼 수 있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네가 할 일이다. 사울은 이 일에 실패했고 실패자는 하나로 족하다. 네가 지금 생각하는 그 집을 세우기에 적당한 때가 올 것이다. 사실 네 아들이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선 우리가 할 일은, 백성들의 상상력과 삶 속에 이 왕국의 주권자는 바로 나라는 것을, 그리고 너는 나의 왕권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기 위한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새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 세우고 있는 집이다. 바로 나의 주권에 대한 증거와 대표로서의 너의 왕권이다. 중요한 일부터 먼저 행하라.”(삼하7:4-17).
나단이 다윗에게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무엇을 해 오셨고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며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이 그를 위해, 그를 통해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관해 장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벌이겠다던 일이 어제까지만 해도 대단해 보였지만, 이제 보니 참으로 별것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 아주 중요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으로 가득했던 상태에서 자기 자신으로 가득한 상태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자기 행동의 변화나 마음가짐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들을 평정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통합시켰으며 백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다윗은, 그만 성공에 취해서 이제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무언가 호의를 베풀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알게 해주는 단서가 그가 나단에게 한 제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무엘 하7:2을 다시 보겠습니다.
(삼하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이 말 속에는, 이제 자신은 하나님보다 더 좋은 집에서 하나님보다 더 잘 살고 있으며, 자신의 힘있는 지위를 이용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만일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속 나갔다면, 다윗은 왕으로서 실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심보다 자신과 자신의 행함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왕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다윗이 이렇게 말할 때,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어 줄 것이다.” 이에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 앞에 꿇어 앉아 이렇게 기도합니다. 사무엘 하7:18입니다.
(삼하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윗이 성막에 나가 꿇어앉은 것은 지금껏 다윗이 행한 것 중 가장 중대한 행동입니다. 이것은 골리앗을 죽인 것보다도,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일보다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일보다도 더 중대한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다윗의 반응 여부에 따라 다윗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전성기에 있습니다. 단단하고 건장한 신체, 예리한 지성, 경배와 순종으로 뜨거운 영혼, 시련을 통해 성숙한 다윗, 하나님의 백성의 신뢰와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다윗,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다윗,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려는 열정에 불타는 다윗, 왕관을 쓰고 보좌에 앉은 다윗, 과연 그는 인접 국가들, 애굽, 시리아, 에티오피아, 앗시리아 등의 왕과 똑같은 왕이 될 것인가? 자신의 뜻만을 강요하는 폭군이 될 것인가? 권력을 휘두르는 오만한 왕이 될 것인가? 아랫사람을 자신을 위한 물건과 부속품으로 다루는 잔인한 왕이 될 것인가? 사울처럼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자신의 왕권을 위한 보조물 정도로 취급하려 들 것인가? 아니면 왕권에 대한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관습을 거부하고, 왕이요 주권자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대표하고 증거하는 자로서의 왕이고자 할 것인가? 다윗은 성막에 나가 하나님 앞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앉아서 왕으로서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권세를 내려놓고 권좌에서 내려와 그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잠잠히, 그리고 겸손히 나아갔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권력의 최고의 권좌에 앉거나, 학계, 재계 등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신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존재인 양 생각하거나 그렇게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누리는 권위나 특권에 의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하여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높임을 받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인간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건 우리는 결코 보통 사람과 다른 사람일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과 다른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바울처럼 재빨리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행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다윗은 성막에 나가 하나님 앞에 앉았습니다. 우리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행위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품었던 다윗. 그런 다윗을 멈춰 세운다는 것은, 마치 거침없이 들판을 무리지어 달리는 야생마들을 따라잡아 멈춰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다윗을 멈춰 세웠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윗은 자신을 멈춰 세우시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3.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세계와 인간 실존의 시작이요 중심이요 끝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계와 인간 실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심의 활동을 희미하고 어렴풋하게만 인식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자신만만할 때는, 즉 아는 것이 많고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추켜세울 때는, 마치 우리가 세계, 최소한 자신의 실존 세계의 시작이요 중심이요 끝인 양 상상하기 쉽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간섭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하는 중이건 우리는 그것을 그만두고 성전에 나가 가만히 앉아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앉을 때 우리가 그간 달려가느라 일으켰던 먼지가 가라앉게 됩니다. 일을 벌이느라 일으켰던 소음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비로소 진짜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를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놀라 숨을 죽이게 됩니다. 너무도 커다란 세계를 발견한 까닭입니다. 나의 열정보다 훨씬 더 뜨거운 열정을 가지신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세계, 나의 계획보다 훨씬 더 뚜렷하고 현명한 계획에 따라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거나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너무 적게 일하는 것이 대단히 걱정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로서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도 안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경우일 때가 많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을 적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앉았을 때, 그것은 체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차리는 것, 자신의 계획 대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왕이기를 포기하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참으로 순종하는 왕이기를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사무엘 하7:18-29입니다.
(삼하7:18-29)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그런즉 주 하나님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하나님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그의 기도를 들어 보면, 우리는 그가 나단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진지하게 귀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선포였습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알리는 대신에,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일하셨고 또 일하시고 계신 분으로 부릅니다. 다윗은 전에는 자기 자신으로 가득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으로 가득합니다. 다윗은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열일곱 번이나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그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삼하7: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다윗은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성소에 나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 때 진짜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사무엘 하7:16을 보겠습니다.
(삼하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다윗의 가문,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 다윗의 왕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셔야만 견고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사실을 바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성소에 나가기 무릎을 꿇고 앉기 전에도 많은 일을 했고, 그 후에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성령께서 하나님의 일, 그리스도의 일을 하실 때 그리스도인, 성도의 삶은 영광스럽고 생명력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세운 계획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을 놓치거나 하나님을 잊어버릴 염려가 분명히 있습니다. 시편 2편은 다윗의 이러한 중대한 경험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시2:1-12)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의도 때문에 오히려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잘못된 일을 저지를 때 우리는 보통 곧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스스로 우쭐해하고 주변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칭찬에 고무되어서 그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은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뜻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 어떠한 환경에 있든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 생각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앞에 먼저 성전에 나가 무릎을 꿇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 말씀하신대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말합니다.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다윗처럼 하나님으로 충만한 생활이 되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영원히 견고한 가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집을 세움
김종택목사 / 삼하 7:1-17
사람은 마음이 선해야 합니다. 배은망덕은 참으로 고약한 성품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고 남의 호의 가운데 잘 산 자는 항상 그 은혜를 고맙게 여기며 어떻게 해서든 그 은혜를 갚으려 해야 정상입니다. 남에게 고맙다고 말 한 마디 하면 그 말을 들은 자는 당연히 들어야 할 말인데도 마음이 그렇게 흐뭇해지고 그래서 더 돕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마땅히 감사함을 표해야 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십시오. 그게 선한 마음입니다. 또 말로만 그럴 게 아니라 자신의 것에서 조금 떼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좋습니다. 선물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의 마음 됨됨이가 평소에 어떠한지 잘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대적자들을 다 파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는 미처 하나님의 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으나 이제 전쟁이 수그러들고 나니 다윗은 하나님의 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윗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의 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볼 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성전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정말로 죄송했던 것은 자기 집은 좋은 목재로 잘 지어놨는데 하나님께서 계실 성전은 아직 없어서 법궤가 장막 안에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하나님의 일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돈벌어들일 일만 눈에 들어옵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왕이 되고 나서 잠시 전쟁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어 하나님의 일을 접어두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고 왕궁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자마자(1절)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평안한 가운데 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살피지 않는 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 다윗이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많은 성공과 평안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신의 집은 우뚝 서 있고 하나님의 성전은 아직 터도 정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다윗의 마음을 괴롭게 했습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여러분 지금 평안하십니까? 그 평안을 누가 주셨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노력하여 쟁취한 평안입니까? 그래서 지금 평안한데도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게 아니지요.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평안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대적들을 다 파하시고 이모저모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좋은 길을 열어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얻은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평안하시다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교회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평안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일에 나 몰라라 하는 자가 있다면 사랑의 배신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누리는 평안은 세상의 낙을 즐기기 위한 평안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일을 본격적으로 하라는 평안입니다.
다윗이 그러한 심정을 선지자 나단에게 말하자 나단이 왕의 뜻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7절)?” 그렇습니다, 여러분! 원래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티끌같은 인간이 지어놓은 좁은 공간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게 사실은 웃기는 상황입니다. 또 성전이 지어짐으로 인해 사람들이 성전 밖은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것으로 오해하여 그 부작용이 참으로 큽니다. 사람은 자꾸 성과 속을 가르려 하고 속된 곳에서 맘놓고 죄를 지으려 합니다. 또 성전을 지어놓으면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성전을 더 중히 여기는 부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성전보다 장막이 더 그분께 맘편한 것입니다. 장막은 그것이 본래의 하나님의 처소가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장막은 하나님께서 임시로 임재해 계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서 본래 계시는 집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고향(?)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인간의 마음을 성전 삼아 계시기를 더 원하십니다. 이 땅에 지금 돌로 지어진 여러 성전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사실은 딱딱한(?) 장막(텐트)일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티끌같은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는 게 맞습니까, 아니면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살 땅과 집을 마련해 주시는 게 맞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규정하셨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자들을 위한 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은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 더 주의를 기울이셔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은혜를 더 베푸시려 인간들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다윗의 마음이 어떠함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용 안하셨습니다. 표면상 이유는 다윗이 전쟁을 많이 치러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약간 마음이 서운했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했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금하시면 해서는 안됨을 몸소 본으로 보여줬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세우는 일이나 성직자가 되는 것을 여러분 맘대로 정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특히 요즘처럼 성직에 들어서는 자들이 많은 때에는 더욱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직자로 쓰시겠다고 부르셨을 경우에 그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큰 은사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성직으로 부르신 증거는 아닙니다. 방언이나 병고치는 은사나 예언의 은사 받았다고 제멋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 받지 말란 말입니다. 요 며칠 전에 어떤 정신나간 목사가 70만원씩 받고 무자격자 여신도들에게 목사안수 해줬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경을 칠 일입니다! 그 목사 신학대학 다닐 때 성직매매가 얼마나 더러운 짓임을 배웠을 텐데...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다윗은 많은 전쟁을 치러 이스라엘이 빼앗겼던 땅을 찾고 또 넓혔고, 이스라엘의 국력을 신장시켰습니다. 그는 주위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웃 나라들이 강대해져서 전쟁이 빈번하면 이스라엘인들이 전쟁통에 제대로 하나님의 절기도 지킬 수 없고 제사도 드릴 수 없게 됩니다. 확고한 국경선과 강력한 국력이 이스라엘 야웨 종교의 기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지금까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하나님의 집)을 견고히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거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는 것을 말리신 진짜 이유가 뭐였을까요? 제가 볼 때에는 이렇습니다. 다윗은 목숨을 걸고 이웃 나라들과 많은 전쟁을 해서 이스라엘을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 놓았습니다. 주위의 여러 적대국들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 안정된 국내외 정세를 이룩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정상적인 국가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고, 다윗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완수했던 것이지요. 그런 다윗이 또 하나님의 성전까지 지으려면 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윗에게 ‘너 힘든데 이제 그만 쉬거라. 성전은 네 아들 때 지어도 되니 그 때 가서 짓도록 하자’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큰 수고를 한 다윗을 쉬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집(집안)을 세워주시겠다는 겁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세우고)(11절).” 지금까지는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데(나라를 세우는 데) 온 열정을 다 바쳤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견고히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업적을 이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의 야훼신앙의 설립을 위해 다윗이 흘린 땀을 결코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께서 흘린 땀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 많은 땀을 흘렸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집을 세워주십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큰 명예를 허락하시겠다 하십니다. “내가 ...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9절).” 여러분, 집안이 세워지기 위한 첫째 조건은 가문의 명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집안에 도둑놈이 하나 나오면 그 집안 이미 망한 것입니다. 집안에 역적 한 사람 나오면 삼족이 멸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집안에 명예로운 이름이 나오면 그 집안은 반석 위에 든든히 섭니다. 옛날에 많은 부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집안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 온 게 아니라 세상에 큰 일을 해서 집안의 명예를 드높인 자의 집안만 지금까지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집니다. 다윗이 위대한 인물로 되어서 지금도 이스라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 있습니다. 다윗은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또한 그의 명예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많은 노고를 아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존귀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귀히 여기는 자를 귀히 여기시고 당신을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들에게 존귀한 직분을 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다윗의 자손)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5-16절).” 좋은 직업이 있어야 돈을 벌어 결혼하여 집도 장만하고 자식을 낳아 가문을 세우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들이 계속하여 왕위를 물려받을 거라 약속하십니다. 사울 집안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왕위를 잃은 것 때문에 다윗이 자기 자손들도 왕위가 박탈되지는 않을까 불안해 할까봐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 하셨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자손들은 남유다가 멸망해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만왕의 왕 예수께서 다윗의 혈통을 따라 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이 얼마나 다윗에게 영광스런 일입니까? 육적 혈통으로 보자면 예수님께서는 다윗 집안 사람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 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에게 좋고도 고귀한 직업을 허락하셔서 부유하고 번창케 하십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창대케 해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친히 다윗 집안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나는 그(다윗의 자손)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14절).” 가장이 힘있고 의로우면 그 누구도 그 집안을 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다윗 집안의 가장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자손들이 그릇된 길로 가면 아비가 자식을 징계하고 훈계하듯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시겠다 하십니다. 물론 다윗 집안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잘 처리해 주시겠지요. 여러분,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다윗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집안의 가장이 되어주십니다. 주인이 되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집안을 붙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집안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삶으로 거룩한 가정, 거룩한 집안이 됩니다. 여러분의 집은 이미 지금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룹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붙들고 세우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집을 붙드시고 세워주십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교회를 헐고 성직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집을 허시고 여러분의 직업을 폐하십니다. 여러분은 다윗과 같이 항상 물심양면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조그만 헌신이라도 해보겠다는 마음을 갖고 사십시오. 다윗의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다윗처럼 살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집을 세워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만복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아멘!
다윗에게 주신 언약
이준원목사 / 삼하 7장 1~17절
어느 나라든지 발전하고 성장하려면 정치적으로 안정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정치가 안정되지 않으면 나라의 경제와 국민의 삶도 좋아지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요즘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크게 두 파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렇게 정국이 불안하니까 국민의 마음도 불안하고, 그러다 보니까 경제까지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때로는 아주 심한 말까지 해가며 싸울 수 있다는 자체가 뭘 의미합니까? 일종의 정치적 안정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전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는 그런 것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정권을 향해 비판을 가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었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는 시대였는데, 지금은 정당한 비판을 한다고 잡혀가거나 위협을 받지는 않으니까 좋아진 게 분명합니다.
요즘도 편이 갈라져서 그렇게 싸우는 것을 볼 때마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이전보다 나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한 가지 예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한국 국회를 배경으로 하는 광고가 나오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지난 2001년에 뉴질랜드에서 한국 국회의원들끼리 말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옷을 붙들고 물리적으로 충돌하며 막 싸우는 장면이 티브이에 나왔는데, 그것이 뉴스에 나온 게 아니라 광고에 나왔습니다. 막 치고받고 싸우고 붙들고 늘어지는데 “저렇게 해도 우리 셔츠는 절대로 찢어지지 않습니다.”라는 광고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국 정부에서 소송까지 걸었습니다. 한국 국회의 모습을 광고에 쓰지 못하도록 금지해달라고 했는데 패소했습니다. 일반 국민의 모습이 아니라 국회에서 그런 예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해도 괜찮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창피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는 그런 모습이 안 나오는 걸 보니까 확실히 좋아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 터지게 싸우는 국회의원들이 하나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자기들의 월급을 올릴 때입니다. 그때는 당과 상관없이 만장일치입니다.
그래도 역시 한국 사회 전체가 완전히 하나 되었던 때가 뉴질랜드 광고가 나온 바로 그 다음 해인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였습니다. 그때는 좌파와 우파가 없었고, 세대 간 갈등이나 남녀 간 갈등이 없었습니다. 월드컵 축구 경기를 통하여 전 국민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외치며 응원하는 것이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렇게 전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눈으로 나타나게 보여주는 성전입니다. 사실 다윗은 정치적 목적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성전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하던 다윗에게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의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사무엘하 7장은 사무엘서 전체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다윗 언약이 이전의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나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언약과 연결될 뿐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새 언약’(렘 31장)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1. 성전을 짓기 원하는 다윗 (1~7절)
1) 다윗의 소원 (1-3)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1절)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게 해주시니까 나라가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평안하고 여유가 생길 때 참 이상하게도 바른 방향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만히 두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잡초가 무성한 잡초밭이 됩니다. 땅을 가만히 놓아두면 저절로 아름다운 화원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잡초밭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편안하게 가만히 놓아두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잡초밭이 됩니다.
저쪽 뒤에 몇 년 전 공사하면서 농구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회사들도 동원하고 많은 분들이 서로 협력해서 세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놓아두니까 지금은 숲이 되었습니다. 씨들이 날아와서 그것이 땅에 떨어져 자라서, 잡초가 숲처럼 무성하게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놓아두면 사람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잡초밭이 됩니다. 그렇게 잡초밭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와 목장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봉사하고, 삶 공부를 하고, 매일 스스로 성경을 읽고, 큐티하고, 기도하는 것 등이 내 마음이 잡초밭이 되지 않도록 막고 아름다운 화원이 되도록 가꾸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이 이러한 주일예배입니다. 예배에 나올 이유가 많이 있지만 잡초밭이 아니라 아름다운 화원이 되도록 기초를 닦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이상하게 힘들어야지 긴장하고 궤도를 이탈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과 돈이 남아돌고 여유가 생길 때 보통 어떻게 합니까? 착하고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더 게을러지고 나태해집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이민을 왔다면 ‘앞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사나?’ 유학을 왔다면 ‘내가 과연 영어로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라는 등 걱정이 많았을 겁니다. 특히 어린 자녀를 데리고 왔다면 ‘사랑하는 내 아이를 이 외국에서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혹시 잘못된 길로 나가지는 않을까?’ 굉장히 고민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여 먹고살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니까, 또 그런 중에도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해보려고 노력하니까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고 생활이 안정되셨죠? 아주 편안하게 잘 살고 계시는 분도 있고, 약간은 어려워도 처음에 비하면 얼마나 편해졌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먹고살 만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잘 적응하며 일을 잘하게 되었을 때, 사업이 안정되었을 때, 학위를 땄을 때, 원하던 길로 나가게 되었을 때, 자녀도 잘 자라서 괜찮은 학교에 보냈을 때, 바로 그때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다 된 게 아닙니다. 그때가 시작입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목표를 잃고 방황하며 자기 쾌락을 추구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이제 먹고살 만하고 등 따시고 배부를 만하면 이상하게 쾌락의 길로 갑니다. 진짜 이상한(?) 방향이 아니더라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에 와서 ‘내가 작은 집이라도 있으면 참 좋겠다.’라고 했는데, 돈을 벌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니까 집을 장만합니다. 그런데 먹고살 만하니까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큰 집, 더 좋은 집을 찾습니다. 차도 웬만하면 되는데, 처음에는 중고차를 몰고 다니며 ‘새 차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최고급 차를 원합니다.
재정에 여유가 생길 때 그만큼 좋은 일에 사용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먹을까? 어떻게 하면 잘 쉴까? 어떻게 하면 좋은 데를 다녀볼까?’ 하며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해서 주로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정도 즐거움도 있고 행복도 있겠지만, 진정한 기쁨이 거기에 없습니다. 오히려 허무함, 불안, 염려만 남습니다. 여행도 정말 좋은 데 간 것은 좋은데 또 와야 합니다. 돌아올 때 생각하면 갑갑해집니다. 휴가도 갈 때는 좋은데 올 때는 답답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쉬는 것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좋은 것도 먹고 좋은 데도 다니고 여가를 즐기는 게 필요합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먹고살 만하고 여유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나만 잘 먹고 잘 살까’에만 머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허무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여유가 생길 때 자기만족만 구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뭐가 다릅니까? 나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존경할 만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삶을 내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유가 더 충분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를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적으로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삶이 힘들 때가 아니라 잘 풀리고 여유가 생길 때 잘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기를 원하던 바를 이루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때 오히려 위기의식을 느끼며, ‘하나님이 내게 이런 풍성함을 주신 것은 나만 잘 먹고 잘살라고 하신 게 아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동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거기에 다 쏟아부으라는 게 아니라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위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2절)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나단을 아니까 그냥 넘기지만, 여기가 나단이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그냥 ‘선지자’라고만 되어 있지만, 이 사람은 궁중 선지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궁에 거하면서 왕을 위해 돕는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을 위해 국가에서 큰 신전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이 국가의 운명과 번영을 좌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전을 지어서 신을 기쁘게 하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크게 지을수록 좋은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성전을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하나님의 복을 많이 경험한 때입니다. 이미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미 나라가 안정된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안정과 번영을 구하려고 지금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서 성전을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닌데, 그럼 왜 그런 마음을 품습니까?
지난번에 본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다 놓은 다음에 주님을 향한 자발적이고도 큰 헌신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합한) 사람이 된 것은 그가 항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고달프고 힘들었던 세월을 지나고, 7년 반 동안 유다 지파만의 왕이었던 것도 청산하고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떵떵거리며 군림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 같이 미천한 자를 이 자리에까지 올려주신 것은 결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마음을 가졌고 ‘무엇보다 이 나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 집은 두로 왕 히람이 최고의 목재인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가 있는 장막은 너무 초라하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의 화려함 여부에 분노하거나 불쾌하게 여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자기는 이토록 좋은 곳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저 초라한 장막에 있다는 것이 다윗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불편함입니다. ‘나만 이렇게 잘 먹고 잘 살아서 되겠는가? 하나님의 궤는 저 초라한 곳에 있는데.’
물론 하나님의 궤가 거기 있고 화려하게 건물을 지어놓으면 하나님의 궤에 더 좋은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화려한 성전에 있어야 한다는 화려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자기에게 하나님이 이토록 큰 복을 내려주셨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 나왔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까?’ 하는 마음에서 성전 건축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믿음의 사람은 자기가 지금 누리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 부른 찬양곡 <은혜>의 가사를 생각해보십시오. 목장에서도 그렇고 지난주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고 하면 주로 없다고 하거나, 똑같다고 하거나, 아니면 억지로 짜내서 ‘평안히 지내서 감사하다.’라는 정도로 합니다. 그런데 이 가사를 쓰신 분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감사할 생각했을까 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합니다. 내가 태어나 사는 것도 감사하고, 어린아이 시절도 감사하고, 숨 쉬며 사는 것도 감사하고, 이런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은혜이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코로나에 걸려서 호흡 곤란이 오면 숨 쉬는 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숨을 못 쉽니다. 그래서 인도 선교사님도 젊은 분이 코로나로 호흡 곤란이 와서 순교하지 않으셨습니까? 숨 쉬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닙니다. 여름에 더워서 땀이 나고 짜증 나십니까? 땀이 나오는 게 감사한 일입니다. 땀이 안 나와 보십시오. 큰일 납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얼마나 감사의 제목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감사할 게 없고, 만 날 똑같고, 불평불만만 있다면 하나님께 얼마나 죄송한 일입니까?
다윗은 그러한 마음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모든 축복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은 결코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베푸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 자기가 한 것이고 다 자기 것인데 어떻게 나누고 베풀겠습니까? 또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까?
일이 잘되어 갈 때 이렇게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며 나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고 자꾸 드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하며 살고 있는가?’ 여러분, 좋은 말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축복의 말도 할 수 있고, 민주화나 세계 평화도 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뭘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라고 할 때 말은 좋은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특히 잘될 때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 늘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얘 때문에 내가 너무 기쁘다.’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3절)
다윗과 함께 있던 선지자 나단도 역시 다윗의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며 다윗에게 동의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가능하며 그 결과로 인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단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이 다윗과 나단의 생각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기특한 생각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는 효자와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믿음의 사람이 가진 이런 아름답고 기특한 생각이 하나님의 계획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름답고 기특한 생각을 하는 것이 우선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선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한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다 보면 자기 의에 몰입될 수가 있습니다. ‘내가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고 나는 정말 믿음이 좋다.’ 하고 취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게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다윗과 나단의 생각은 참 귀한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나쁘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궤는 저렇게 초라한 장막에 있고 나는 이렇게 좋은 궁전에 살고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겠다.’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입니까?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여쭤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의와 열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생각이지만 하나님이 이때 원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나쁘다.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응답하실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수록 이런 데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내가 추진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다.’라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우리가 추진하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일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회도 하고 연석회의도 하며 마음을 모아서 함께 추진해 나갑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께 먼저 여쭤보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생각에 좋으니까 하는 것과 하나님이 좋으니까 하라고 하셔서 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 두 가지가 일치되도록 우리가 매일 애쓰며 나아가야 합니다.
2) 나단을 통해 주신 말씀 (4-7)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다윗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4-5절)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그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지 못한 다윗을 제어하시고 바른길로 돌리시기 위해서 나단에게 그 뜻을 급하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다윗이 지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6-7절)
‘너는 내가 살 집을 지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성전을 건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는 직접적으로 안 나오지만, 이 장면을 이야기해주는 역대상 22장에 보면, 다윗이 수많은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려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대상 22:8).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다윗이 전쟁을 많이 해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전쟁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전쟁을 해야 합니다. 다윗 때는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평안을 누리기는 했지만, 압살롬의 반역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러기 때문에 지금은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의 때는 지을 때가 아니다. 네가 할 일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다. 그게 너의 사명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인 네 아들 솔로몬이 지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진실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 건축을 계획하셨습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 자체가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전은 평화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에 의해 완성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요 2:19).
평화의 시기에 성전을 짓는 것이지, 아무 때나 짓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다른 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때도 그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따라야 합니다.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가 있었던 성막을 말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출애굽 한 이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 둘 회막(장막)을 만들었습니다(출 33:7). 영어로는 Tent of Meeting 또는 Tabernacle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로 수백 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궤는 계속해서 장막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건축을 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땅에 지어진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의미만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어디나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히 구약에서 그렇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성전 모형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최근에 제임스 웹(James Webb) 우주 망원경으로 전달된 사진들을 보면 우주가 정말 경이롭습니다. 저 멀리 우리가 도달할 수도 없는 곳의 사진이 전달되어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미국에서만도 여기서 저기 가는 데에 몇 시간씩 걸리고 얼마나 넓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거리라고 칠 수도 없을 정도로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온 우주가 하나님의 성전 모형으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주를 바라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로 이루어진 성막의 모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 작은 성막에 함께해주겠다고 하시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주셨습니다. 이후에 그 성전의 모형은 솔로몬 성전으로 이어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성전 안에 가두어지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솔로몬도 성전을 다 짓고 헌당할 때 바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지은 건물 안에 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와서 기도하면 들어주십시오.’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상징으로서의 건물인 것이지, 그 안에 사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당시 그 주변 민족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변 민족들은 무엇을 합니까? 주로 신전을 지어놓고 자기 신들의 우상을 만들어 그 안에 넣어놓고는 거기 가서 빕니다. 자기 소원을 빌며 제사를 드립니다.
그게 바로 우상 숭배인데, 우상 숭배의 특징이 딱 그겁니다. 어디 한 군데에 신을 모셔 놓고, 평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자기가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신전으로 가서 신전 안에 있는 신에게 자기 원하는 바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상 숭배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한 군데 계셔서 자기가 필요할 때만 가서 산타 클로즈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면 척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가르쳐주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좀 더 두시고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우상 숭배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만 계십니까? 교회는 성전이 아닌데 ‘성전 건축’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거룩한 건물’이라는 의미로 성전은 맞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면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교회당 안에서 주일에 모일 때 여기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아멘, 아멘’ 하며 은혜 받고, 돌아가서 내 삶 속에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우상 숭배 신앙입니다. 여기만 하나님이 계시고 내 삶 속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 신앙을 갖지 않도록 조심시키시기 위하여 지금은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심이 드러났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사흘 만에 세우겠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몸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요 2:21).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3:16).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모신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성령을 통해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거기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오면 요한계시록에 약속된 하나님의 성전이 진짜로 완성될 그 날을 기다리며 사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고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새 성전이 하늘로부터 이 땅에 임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어 그의 백성과 함께 영원히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계 21:1-4). 그게 하나님의 진짜 성전이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그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기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그의 백성과 함께하심을 성전의 모델을 통해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건물에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신 당신의 백성과 늘 함께하시며, 그들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높임을 받으시고 또 우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갈 때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또 동시에 교회를 같이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또 이웃을 사랑하며, 서로를 사랑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2. 다윗 언약 (8~17절)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실 다윗을 보실 때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래서 성전 건축을 지금은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네가 나의 집을 짓겠다고? 아니다. 내가 너의 집을 지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물론 다윗은 진짜 집, 즉 건물을 지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집, 즉 그의 가문을 영원하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첫째로,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8-9절)
실제로 그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해졌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국기를 보면 별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그 별이 무슨 별입니까? 그 별의 이름이 바로 ‘다윗의 별’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왕, 이상적인 왕으로 꼽히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열왕기를 읽어 보면 특히 유다 왕들을 누구와 비교합니까? 다윗입니다. ‘다윗과 같지 않았다.’ 또는 ‘다윗의 길을 걸었다.’라고 하며 항상 다윗과 비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을 위해 한 곳을 정하여 심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0절)
이 ‘한 곳’은 이제 예루살렘이 분명합니다. 모세 때는 어디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도 옮겨오고 성전도 앞으로 지을 텐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와서 예배하는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임이 드러납니다. 이제 방황과 환란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사 시대의 혼란과 같은 때는 오지 않을 것이며, 평안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실제로 다윗이 통치하던 기간 동안 고대 근동의 정세가 굉장히 조용했습니다. 여호수아 때 주신 말씀이 뭡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대로 지켜 행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좌 즉 서쪽에는 이집트가 있습니다. 또 우 즉 동쪽에는 메소포타미아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집트 나일강 문명과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끼여서 영향을 계속 받을 수밖에 없는데, 다윗 때는 두 쪽이 다 조용했습니다. 이집트는 26대 왕조가 쇠퇴해 가고 있었고, 메소포타미아는 앗시리아가 아직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에는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우연하게 보입니다. 역사를 볼 때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것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셋째로,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1절)
네 번째로, 다윗의 죽음 이후 그 씨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2절)
당장은 이것이 솔로몬을 의미하고, 계속해서 그의 후손들, 특히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다섯째로, 다윗의 후손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3절)
바로 ‘그’가 당장은 솔로몬을 의미하는데,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하는 말씀을 보면 이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4-15절)
이러한 모든 복은 결국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다윗의 나라가 영원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6절)
바로 이 말씀이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은 솔로몬에게 일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마 1:1)이었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자(요 2:19-22)였으며, 영원한 왕국이 그에게 속했고(엡 5:5), 하나님의 아들(막 1:1)이었다.
그렇다면 이 다윗 언약이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길 때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입니다(벧전 2:10).
둘째로, 왕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엡 1:3). 다윗에게 주신 이 모든 복을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곳에 거하는 자들은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왕 같은 지위와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벧전 2:9).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로 가거나 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됩니다. 그때까지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축복을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넷째로, 어떤 위협과 공격이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 때문에 곤란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를 늘 돌아보면서, 바로 이런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이런 믿음으로 매일 담대하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감사하는 자의 복
양인국목사 / 삼하 7:1-29
1. 다윗은 하나님께서 평안함을 주셨을 때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생각하며 감사하고자 했다. 특별히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출애굽 후 지금까지 성막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함으로 감사드리고자 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와 같은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를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감사하는 삶과 감사하는 자들이 받는 복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1절의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사방의 모든 대적을 넘어지게 해 주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샬롬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의 왕권을 견고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생각하며 성전을 지어 봉헌함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들에 대하여 감사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의 때를 만나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만, 평안할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잊고 산다. 그래서 솔로몬과 여호사밧 그리고 히스기야 등 경건한 왕들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해졌을 때 믿음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다음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께 특별히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고자 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7:2)” 다윗은 자신이 백향목 궁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성막에 모셔져 있는 것에 대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거하고 있는 곳보다 더 아름다운 곳에 모셔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영광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더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그는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고자 한 것이다.
다윗은 이와 같은 일을 실행하기 전, 먼저 선지자 나단을 찾아가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이것은 다윗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 생활화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다윗의 말을 들은 나단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7:3)” 이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이므로 마음의 소원대로 행하라는 뜻이다.
4절의 말씀이다.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7:4)” 여기 “그 밤”이란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말을 듣고 그에게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말함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도록 한 일을 격려 해 준 바로 그날 밤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 밤에 나단에게 임하셔서 다윗이 행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며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3:15,16)”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경외함으로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마음을 받으실 것을 알기 때문이고, 또한 이와 같은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7: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대하여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음 구절이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7:6,7)” 하나님은 출애굽 후에 지금까지 장막에 거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 봉헌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무엇이 부족하지도 않으시다. 하나님에게 장막과 백향목 사이에 차별이 있겠는가? 다만 “어느 곳에 머무시느냐”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기뻐 받으신 것은 출애굽한 후 지금까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주를 경외하는 온전한 마음임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다윗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목장에서 부르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아주셨다. 그리고 대적들과 싸워 이기게 해 주심으로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대적들로 하여금 그의 나라를 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과 또한 그가 수한(壽限)이 차서 조상들에게 돌아갈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7:8-12). 와 같은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은 그로 하여금 바울이 가지고 있던 고백과 같은 고백을 가지고 살려하심이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이와 같은 고백이 중요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감동스런 삶을 살게하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듣고 감격하여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7:18)”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알면 감동이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여기 감동은 환경과 소유의 유무를 초월하여 우리로 하여금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감동이 있는 삶은 언제나 허락해 주신 “지금 여기에서”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감동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느 시대보다도 풍족함 가운데 살고 있지만 복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풍족할수록 더욱 불행한 삶을 살지않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 잃어버린 감동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베풀어 주신 은혜들에 대하여 주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여 감동이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려는 다윗의 마음을 받으셨음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건축을 허락지 않으시고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자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축복해 주신 것처럼 앞으로 성전을 건축할 자를 축복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7: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에 대한 보증이다. 또한 하나님은 계속하여 만일 그의 자손들이 죄를 범하면 그들을 징계하심으로 바르게 인도해 주실 것이지만, 사울을 폐하신 것처럼 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것은 곧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 주시겠다는 의미다. 놀라운 사실은 사울은 일생을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살았지만 왕권을 지키지 못했고, 다윗은 왕권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힘썼지만 그의 왕권은 자기 시대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견고했다. 다윗과 그의 집에 임한 축복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의 성취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다윗의 삶을 통하여 주신 교훈의 말씀에 따라 살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시간이 더해 갈수록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참된 성전
한문석목사 / 삼하 7:1-13
응송 | 시 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서신 | 엡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 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 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 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 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 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복음 | 막 6:30-34, 53-56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 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 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 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 묵상 | meditatio
① 삼하 7:6을 묵상하십시오.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라는 하나 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가슴에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② 막 6:30-31을 묵상하십시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③ 엡 2:12-13을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상태와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상태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 기 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참된 성전
교회는 세상 안에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 속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상은 일상과 초월이 충돌하고, 생활과 수행이 충돌하고, 현실과 말씀이 충돌하는 공간입니다. 이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이러한 '성(聖)'과 '속(俗)'의 긴장감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아주 각별한 단어를 사용해서 신앙의 본질을, 그리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聖殿)'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서신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밝히는 기독교인의 정체는 '성전'과 연관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 나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기계적으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왜 그런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성전'이라고 정의(定義) 내렸으면,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성전과 당시 위용을 떨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이 다른 실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의 설계와 노동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에 의한 질서와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성전은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시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기초로 세워졌습니다(엡 2:20). 우리는 지난 주 구약성경을 통해서 다윗이 베 에봇을 입고 춤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에게 체통 없는 행동이라며 힐난까지 받았지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에 모심으로서 마침내 다윗 성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 된 것으로 인해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사실 다윗처럼 입지전적인 인물도 드뭅니다. 헤브론에서 남유다의 왕위에 오른 다윗은 북이스라엘의 왕인 이스보셋이 죽자 북이스라엘 지파의 장로들이 찾아와 그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옹립함으로서 강력한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법궤까지 다윗 성에 모셔옴으로서 종교적인 정통성도 확보하게 됩니다(삼하6:1-23).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 삼하 7:1
여기에서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란 다윗 왕이 정치적 종교적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더 이상의 대적과 정적의 위협이 없는 가장 평화로운 때를 맞이했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나라가 평화로워지자 다윗의 마음속에 한 가지 부담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가 아직 휘장 안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그가 나단 선지자를 불러서 하는 말과 나단 선지자의 반응을 보십시오.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렇게 백향목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둔 채 그대로 있소 | 삼하 7:2 공동번역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 삼하 7:3 공동번역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나단 선지자가 이렇게 짧게 대꾸한 것을 냉소적 반응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들이 무리도 아닌 것이 당시는 왕조 전통과 선지자 전통 사이에 적잖은 갈등이 실재하던 때였습니다. 왕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떤 공간 안에, 자기를 위해 안전하게 가두고 싶어 했지만 선지자들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다윗의 성전 건축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다윗에게 반문하십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 삼하 7:5 공동번역
사실 이 말씀은 반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역대상 17:4절에 보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라고 반대의사가 더 확실하게 표현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성전 건축을 반대하시는 이유에는 하나님 임재 방식에 대한 다윗과 다른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 삼하 7:6, 7
'다녔나니' 이 말씀은 동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씀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정적인 분이 아니고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히브리들의 출애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줄곧 히브리의 역사 속에서 그들과 행동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을 향한 자신의 계획이 오히려 하나님의 행동을 제한하는 결과로 초래되지 않도록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성전 건축을 포기합니다. 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십니다(삼하 7:12, 13). 그러나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예루살렘 성전은 결국 하나님을 가두고 백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나 오순절 등 중요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예루살렘 성전은 순례지로서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거룩하게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눈에 띠게 사람을 차별하는 공간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그리고 유대인의 뜰과 제사장의 뜰이 그것입니다.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에만 머물 수 있었고, 여인은 여인의 뜰에만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발짝도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거룩한 사람들과 속된 사람들이 엄격하게 구별되도록 규정되어져 있었고 그것은 엄연한 차별이요 담(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의 그 차별과 담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지긋지긋하게 사람들 삶을 지배하며 바울 시대까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바울 시대에는 이 차별이 성전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 엡 2:11
여기서 바울이 말씀하는 '너희'란 당시 에베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바울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서 '무할례자들'이라는 오명(汚名)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엡 2:12
바울이 더 기막힌 말을 합니다. 그 때에 에베소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들은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구원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삶과 종교적인 삶에서 소외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차별한 것은 도덕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을 뿐 아니라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만큼은 한 형제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바탕에는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 존재했습니다. 열등감이 덫이듯이 우월감도 덫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도를 바꾸면 이러한 덫에서 영혼이 해방될 수 있을까요? 이방인을 유대인의 뜰에까지 들어오게 하고, 유대인을 제사장의 뜰에까지 들어오게 하고, 할례의 유무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개혁하면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제도 개혁만으로 인간을 차별하는 문제들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건 참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본질적인 변화, 그리고 존재론적 변화가 없이는 사람들을 '밖'에 세우는 일 즉 차별의 악습이 해결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엡 2:13-16a
12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이라고 말했던 바울이, 13절에서는 '이제는 너희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때와 이제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입니까? '그때'는 너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지만, '이제'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있던 담을 허물었다고 말씀합니다(엡 2:14). 법조문에 지나지 않는 율법을 폐하심으로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엡 2:15). 예수님이 무슨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이들은 율법의 최고 집행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신성을 모독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신성모독이란 것에는,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닌, 창녀와 죄인들, 그리고 이방인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해 주는 예수의 반유대적인 모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서 율법의 권위를 지켜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허무하게 죽으심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을 끝내 허물지 못한 듯 보였습니다. 결국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철저하게 신뢰했다가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으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 질서의 승리로 보이던 십자가에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엡 2:16b-18
여기, 먼데 있는 자들과 가까이에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이 분은 누구이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앙의 질서를 혁명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구원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그 때' 그들에게 중요한 건 '율법을 지키느냐' 여부와 '성전에서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에게 믿어지느냐의 여부였습니다. 교회에서 사람을 소외시키는 악습이 극복되려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대표되는 낡은 질서가 거부되고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의 은총 아래서 모든 사람이 형제임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엡 2:20-22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제시합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엡 2:21). 그리고 둘째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 안에, 성령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내가 '성전(聖殿)'이 되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행이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전이다."라고 완결형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성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전으로서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의 말씀은 희망적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이미 완성된 모습이라면 얼마나 실망스러운 사실입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됩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지금은 허점투성이이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서,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나의 내면에서 예배가 그쳐지지 않고, 나의 내면에서 기도가 그쳐지지 않고, 나의 내면에서 찬양이 그쳐지지 않고, 말씀이 샘물처럼 청량하게 솟아나 내 영혼을 적시고, 내가 성전이라서 헌신해야 하고, 내가 성전이라서 봉사해야 하고, 내가 성전이라서 십자가를 지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가 뭐냐'고 묻거든 나는 '성전이 되어가는 존재'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복이 임합니다
조상호목사 / 삼하 7:1~17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에 6.25 전쟁이 터져서 대구 이남의 경상도 일부분을 제외하고 북한군에 의해 다 빼앗긴 채 패망하게 되었을 때,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어느 글에서 인천상륙작전을 하게 된 배후에는 이름 없는 한국군 한사람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어떤 장군도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무리한 작전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승산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에 깊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자기나라의 죄 없는 군인들만 더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일거에 바꾼 감동적인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 부랴부랴 한강 인도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쌍안경을 가지고 인도교 건너편의 형편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는 이미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있었고, 북한군들은 이미 서울 가까이 진격해오고 있었습니다. 쌍안경으로 강 건너편을 보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눈에 문뜩 강 이쪽 편에서 부동자세를 하고 있는 한국군인 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맥아더 장군은 자기가 타고 온 지프차로 그 병사에게로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끊어진 다리 앞에 서 있는 것이오?” 그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여기 서있을 작정이오?” 이때 병사는 부동자세를 한 상태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상부로부터 새로운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입니다.” 전세는 이미 기울어졌고 지휘 계통은 무너졌고 지휘관들도 자기 살 궁리를 하고 다 도망하는 형편에,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는 이 병사의 투철한 군인 정신을 목격한 맥아더 장군은 감동을 받고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이런 군인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감동을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 날로 미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은 패망직전에 빠져 있던 전쟁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한국군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감동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로 감동을 느낄 ‘감(感)’ 움직일 ‘동(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된장녀 논쟁으로 매스컴을 탄 스타벅스 커피점은 한국에 들어오면서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매스컴에 광고 한번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입소문으로, 혹은 된장녀 논쟁과 같은 일로 인해 수많은 언론과 사람들에게 스타벅스 커피점은 확실하게 인식되고 기억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스타벅스 커피점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데에는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작은 것에서 고객을 감동시켜라!”는 원칙입니다. 밖에서의 삶의 수준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스타벅스 커피점 안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즐기고 있는 동안만큼은, 어느 누구나 직원들로부터 대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별 것 아닌 작은 일 하나로부터 감동을 받습니다. 그곳에 있는 어떤 직원들도 얼굴 찡그리는 법이 없습니다. 스타벅스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객들을 어떤 형태로든 감동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객을 감동시키면, 고객은 반드시 지갑을 열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감동시키면 저녁 반찬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을 감동시키면 직장에서 퇴근한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님을 감동시키면 쉽게 용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감동시켜도 뭔가 일이 벌어지는데,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피난생활하며 고난을 당하다가 사울 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를 괴롭힐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윗은 잠시 동안이지만 궁전에서 평안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은 ‘하나님의 궤’ 즉 ‘법궤’가 생각이 났습니다. ‘법궤’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들게 하신 상징적인 법궤입니다. 그 안에 율법의 두 돌판과 만나를 보존하는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함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의 마음속에 이 ‘하나님의 궤’가 생각났습니다. 사실 그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어렵게 다시 찾아서 오벧에돔 집에 3개월 동안 보관하고 있던 법궤를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옮겨놓은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집회 때 말씀드렸지만, 오벳에돔 집에 보관하고 있던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속옷이 벗겨지고 속살이 보일 정도로 춤을 추며 좋아했습니다. 아내인 미갈이 뭐라고 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6장 17절에서, "야훼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야훼 앞에 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법궤를 임시로 보관하기 위해 만든 천막 중앙에 법궤를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빼앗겼던 법궤를 다시 찾아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이후 후속조치를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법궤를 그 상태로 방치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뜩 다윗의 마음속에 이 ‘하나님의 궤’가 생각이 났습니다. 다같이 1절과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야훼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멋지게 만들어진 궁궐에 살고 있는데 반해, 하나님의 법궤는 천막 속에 아무렇게 방치되어있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신은 당시 최고의 건축기술을 가진 두로의 목수와 석수들이 와서 건축한 궁궐에서 살고 있는데 반해, 빼앗겼다가 힘들게 다시 찾아온 하나님의 궤를 고작 천막 안에 그냥 방치해둔 것이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라고 말하며, 회개했습니다. 사실 아합 왕은 상아로 만든 궁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아합 왕처럼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합 왕을 비롯한 다른 왕들과 달랐습니다. 자기가 누려야 할 편안한 삶보다, 하나님의 궤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축복된 삶보다, 하나님을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긴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지금 성전을 짓겠다고 말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법궤는 천막 안에 방치되어 있는데, 나는 백향목으로 지어진 궁궐에 살고 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두 마디 말도 아닌 한마디 말에 감동 받으셨습니다.
한마디 말에 감동 받으신 하나님
옛날 어느 마을의 푸줏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젊은 학생들이 모를 것 같아서 설명하지만, 옛날에는 요즘의 Butcher Shop을 푸줏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백정’이라고 불렀는데, 사람들은 백정들을 매우 천하게 여기며 아예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마을에 ‘지돌석’이라는 환갑을 넘긴 백정이 있었습니다. 그가 푸줏간을 내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양반 가문의 젊은 자제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석돌아, 쇠고기 한 근만 다오!” “알겠습니다.” 지노인은 대충 고기를 잘라 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들어온 또 다른 사람은 고기를 파는 사람이 아무리 백정 출신의 천한 신분이었지만, 환갑을 넘긴 노인에게 말을 놓기가 거북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지서방, 나도 쇠고기 한 근만 주시게!” “아이구, 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뜻밖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지노인은 제일 좋은 부위의 고기를 뭉턱 잘라 주었습니다. 먼저 고기를 산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받은 것보다 살도 많고 양도 훨씬 많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따져 물었습니다. “야 이 놈아! 한 자리에서 똑같이 청한 한 금인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이 내 것보다 월등히 많으냐?” 지 노인은 태연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손님 것은 석돌이 놈이 자른 것이고, 이분 것은 지서방이 자른 탓입니다.”
옛날부터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기분을 나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의 감정을 천당으로 옮겨놓기도 하고, 지옥으로 옮겨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24절에서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롭고 소망이 되는 말 한 마디가 상대방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이 담긴 진심어린 말 한마디에 감동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당신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다윗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법궤가 천막 안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다윗의 마음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일방적으로 축복을 약속해주셨습니다. 9절부터 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명예의 복
첫째로 명예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여기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명예를 높여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처럼, 그렇게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는 다윗만큼 유명한 왕도 없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뿐 아니라, 세상에서 존경 받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의 명예를 높여주십니다.
여러분들은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녀도 예수님을 감동시킨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때, 그녀는 옥합을 깨뜨려서 그 기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바르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고함을 쳤습니다. “어찌하여 값비싼 기름을 낭비하느냐? 차라리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14:6~9) 마리아는 주님을 감동시킴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디든지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그녀가 행한 일이 전해지고,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의 명예를 높여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의 이름을 반드시 존귀하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 평안의 복
둘째로 평안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야훼가 또 네게 이르노니 야훼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도 수시로 다른 나라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사사시대 때는 이방 나라의 공격을 받아 고난을 당하다가 사사가 나타나서 평안을 찾았다가, 다시 이방 나라의 공격을 받아 고난을 당하다가 사사가 나타나서 평안을 찾기를 반복하며 무려 360년 동안 그렇게 힘겹게 살았습니다. 사사시대 때의 평안의 일시적인 평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남의 나라에 시달리지 않고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안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3) 자손의 복
셋째로 자손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2절을 제가 쉬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네가 나이 많아 죽을 때에 나는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들 중 하나를 왕으로 세워, 그의 나라를 굳건하게 해 주겠다.” 다윗은 사울 왕의 가문에서 이어야 할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죽고 나서 다윗의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도 있고, 사울 왕의 가문처럼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 중 하나를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비록 다윗의 후손들이 잘못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막대기와 채찍으로 징계를 하시겠지만, 그 은총은 거두어가시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다윗 가문에게 왕의 지위를 허락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벌은 조금만 주시고 축복은 한없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약속은 다윗의 생애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솔로몬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걸쳐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고, 솔로몬에 이어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는 등, 사울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의 자손을 복되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의 자손을 잘 되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정리하면 다윗은 마음이 담긴 진심어린 말 한마디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명예의 복과 평안의 복과 자손의 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 외에 하나님을 감동시킨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킨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100세에 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가서 번제로 바치기 위해 아들을 묶은 후 칼로 내려치려고 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에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야훼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야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5~18) 감동을 받으신 하나님은 맹세까지 하시면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주시고, 그의 후손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그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약에도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가서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부하를 고쳐달라고 부탁을 하자,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그런데 그의 믿음의 고백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마태복음 8장 10절을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놀랍게 여겼다는 것을 영어로 ‘to wonder‘, ‘astonish‘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는 것처럼 놀라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감동시킨 백부장은 칭찬도 받고 하인도 고치고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이 복을 받지 아니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칭찬을 받기도 하고,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는 복을 받기도 하고, 재물의 복을 받기도 하고, 자손의 복을 받기도 하고 장수의 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한 형제님의 고백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혹시 그 형제님에게 누가될 것 같아 2주 동안 고민하다가,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개해도 좋을 것 같아 그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실 그 형제님을 통해서 성령님이 오늘 말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2주 전 주일예배에서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복을 받았다는 예를 들면서 성전건축헌금을 작정하자는 설교를 듣고 나름대로 고민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형제님의 말을 100% 똑같이 옮길 수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주일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어떻게 성전건축에 동참할까 한참 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가정들과 마찬가지로 저희 가정도 살림살이가 풍족하지 않지만, 어떻게 하면 성전건축에 동참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한 가지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사실 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200불 어치의 약을 매달 사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달 약을 구입하는 200불을 성전건축헌금으로 드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실 저의 간은 악화되면 간경화로 발전할 수 있고, 나중에는 간경화가 악화되면 간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 사먹을 돈을 매달 하나님께 드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집사람에게 이야기했더니 마음만 먹지 말고 목사님에게 직접 말하라고 자꾸 권유하는 바람에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그 형제님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형제님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제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만 나왔습니다. “하나님, 부족한 저에게 이렇게 귀한 성도님들을 섬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귀한 분들이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속성전건축이 잘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옵소서. 그리고 그에 따른 복이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저는 그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헌신에 감동을 받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하나님도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경영학 이론에 “돈을 벌려면, 고객을 감동시켜라. 고객을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감동하게 해라. 고객은 설득당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 ‘고객’이라는 단어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켜라.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감동하게 해라. 하나님은 설득당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득 당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감동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의 백부장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처럼 헌신과 봉사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시고, 솔로몬처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감동시킴으로 말미암아 명예의 복과 평안의 복과 자손의 복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소망
삼하 7장 1~3절 / 이정익목사
다윗은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목동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아들을 다 모아놓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중 한 아들을 왕으로 삼기 위하여 기름을 부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새에게 8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중 7명의 아들만 모아 놓았습니다. 그 7형제 모두가 왕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없느냐” 고 물으니 “말째가 하나 더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보아도 말째는 왕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급히 연락하여 들에서 양치 던 막내아들 다윗을 데려왔는데 그 “얼굴이 붉고 아름다웠다”(삼상 16:12)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다윗이 미동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다윗은 왕감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미동은 배우나 탤런트는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동건이나 배용준은 탤런트는 되지만 왕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왕감은 노무현 같이 이명박 같이 생겨야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미동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십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이 성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심부름을 갔습니다. 그때 전쟁터에서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에게 하나님이 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속에서 의분과 분노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 물맷돌을 던져 죽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그가 던진 물맷돌을 통해서 역사하심으로 죽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도 재수 좋은 것도 다윗이 죽인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였고 섭리였습니다. 다윗은 그때부터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이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고 온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때부터 기울기 시작하고 다윗의 위치는 점점 견고해져 사울시대는 지나가고 다윗이 왕이 되어 40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여기 다윗에게서 우리는 몇 가지 발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
시편을 보십시오. 구구 절절이 다윗은 애절하게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다윗시대가 가장 융성했습니다. 오늘도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염원은 다윗 때를 재현하는 것이 꿈이고 최대의 기대입니다. 다윗의 일생가운데서 밧세바 사건만 빼면 다윗은 아주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밧세바 사건은 다윗도 인간임을 나타낸 유일한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시기를 “네가 나의 길을 가면 영원히 네 자손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왕이 되는데 선출직도 아니고 자자손손이 자동적으로 그것도 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생 동안 왕족이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혈통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에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충성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은혜를 주시고 함께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안내하시고 형통을 주십니다. 오늘 자손들에게 집이나 돈을 물려주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당장은 별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것이 최고의 복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오늘은 사람들이 덜 중요한 것에 목을 매고 살아갑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술수를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여러 번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인데 어떻게 내 손으로 그 몸에 손을 댈 수 있는가 하고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을 직접 심판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 후 사울은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자연스럽게 제거되고 다윗이 왕이 됩니다. 사람은 왕이 되기 전과 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과 후가 전혀 변함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왕 된 후에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가 더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사무엘 때 이래로 기럇여아림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후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안치했다가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왔는데 초라하게 휘장 안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서 편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늘 마음에 걸리고 자책감이 들어 나단 선지자 불러 탄식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2절을 보면 “왕이 나단 선지자에게 이르되 불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가운데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는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초라한 성전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를 그토록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복은 심은 대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다윗의 소원
그러자 선지자 나단이 대답했습니다. 3절에서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안치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소원이고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나는 백향목으로 지은 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궤는 초라한 휘장 안에 거하시도다“ 그것이 늘 죄송했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복을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다윗이 얼마나 대견하고 고맙고 예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불러 그에게 계시하고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4절을 보면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이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이기게 하고 내가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9),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낳을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12),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16)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솔로몬이 왕이 되자마자 1천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입었는데 다윗은 더 없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복을 받을 때는 받을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외상이 없습니다. 심은 대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한대로 받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좋아하고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후로 하나님은 다윗이 가는 곳 마다 이기게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그 일이 있고 난 후 가는 곳 마다 이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1)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러지게 하고 조공을 받으며(2)” “소바왕을 쳐서 .. 보병 2만 명을 사로잡고(3)” “아람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6)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 이기게 하셨더라”(14)고 했습니다. 그때 7장18절에서 다윗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22절에서 그런즉 주 여호와여 주는 위대하시니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나이다.”
신앙도 희미한 신앙이 아니고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런 신앙자는 그 자체로서 복이고 은혜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한쪽으로 마음이 확실하게 기울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한 때 “경계인”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경계인이라는 말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양쪽을 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으로 말하자면 양다리 걸치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사랑도, 정치도, 신앙도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들과 싸울 때 “너희는 어느 때까지 머뭇거리겠느냐 ... 바알이냐 여호와냐 속히 택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경고하시기를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아니면 내 입에서 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소속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공산당에 입당원서를 쓸 때는 세 가지를 서약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굶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라고 합니다. 이런 각오도 없는 사람은 공산당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상범들이 감옥에서 20년 30년씩 있어도 전향하지 않습니다. 전향서 한 장만 쓰면 지금 즉시 석방되는데도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공산당을 위해서도 그렇게 중심을 바칩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무섭고 사상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 군인들, 공무원들, 젊은이들이 얼마나 생각이나 사상이 어설픈지 모릅니다. 2004년 1월 육사생도 신입생 250명의 사상을 검증했습니다. “우리의 주적은 누구냐”고 물으니 34% 미국이고 33%는 북한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안보를 가장 위협하는 나라가 누구냐”고 물으니까 미국 39% 이고 북한이 33%라고 대답하였습니다. 2005년도에 16세에서 25세까지 젊은이를 대상으로 갤럽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전쟁나면 누구를 돕겠느냐”하고 물으니 북한을 돕겠다는 대답이 65%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의식 성향을 조사했더니 36%만 자유민주체제가 우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민주화를 외치고 자기들은 75%가 미국에 유학 못가서 안달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어디서 배웠는가 하고 물으니 전교조 선생님들한테 배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본 연구소에서 일본 중국 한국 고교생들의 의식구조를 연구했습니다. “전쟁나면 나가서 싸우겠느냐”는 물음에 한국 10,2%, 일본은 41.1%, 중국은 14.4% 나왔습니다. “전쟁나면 외국으로 피해 나가겠다”고 대답한 사람은 한국이 10.4%, 일본은 1.7%, 중국은 2.3%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사상도 의식도 철학도 아주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나라는 시급한 것이 경제도 문제이지만 더 시급한 것은 이 의식의 수정작업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자기정체성이나 자기 철학이나 자기 주관이 분명치 못하면 도태됩니다. 하물며 신앙세계에야 오죽하겠습니까. 신앙인은 사상도 의식도 분명해야 하고 더 나아가 분명한 신앙관을 세워야 합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확신도 중심도 없이 신앙을 유지한다면 그 신앙에 무슨 생명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20년 30년을 믿었어도 영적인 샘물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세계에 대한 맛도 깊이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을 유지해야 하니 자신인들 오죽 힘들겠습니까. 또 그의 말에 누가 감동을 받겠고 사람도 감동이 없는데 어찌 하늘이 감동하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일편단심 이었습니다. 너무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를 사랑하셨고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 마다 이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꼭 짓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불허
그런데 마음이 간절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일은 몰라도 하나님의 일은 내 마음대로 다 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역대상 22장8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피 뭍은 손으로 내 거룩한 성전을 짓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닙니다. 돈 있다고 짓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지을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고 기도하는 집이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아무리 믿음이 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출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뜻이 있어야 하고 거룩히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거절하시고 그 대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짓도록 하셨습니다. 22장9절을 보면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10)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 짓고 싶었던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못하고 대신 건축 준비를 다 해 놓았습니다. 역대상 22장14절을 보면 “금 10만 달란트와 은 백만달란트, 놋과 철은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을 준비했습니다.”
저도 교회를 짓지 못하고 준비만 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우리교회는 매사가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매우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편입니다. 우리교회는 모험하고 행동하고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장로님들이 갑자기 열심을 내기 시작하고 마침내 전체가 동원되어서 스스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교회는 당회원 전체가 건축위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때를 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시작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영광입니다. 나도 영광이고 여러분들도 영광입니다. 평생 교회 짓는데 참여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성도들도 많은데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영광입니다. 헌금하느라 고생은 되겠지만 그 문제도 다윗에게 채워주신 것처럼 채워주실 것이니 걱정 안합니다. 주님의 일은 모험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번에 여러분들은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유언
그래서 마침내 다윗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성전건축을 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세 가지 유언을 하게 됩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왕상 2:2), “너는 여호와를 힘써 섬기라, 그러면 네게서 왕위가 영원히 이루어질 것“(3)이라. 내 꿈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아서 못했다, “이 일을 네가 꼭 이루라“(대상 22:9-12). 그래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이 성전건축하는 일부터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 세상에 최초의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 성전을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성전이 세워지면 큰 은혜가 주실 것입니다. 이 성전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질 것이고 이 성전에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것이고 많은 인재들이 탄생할 것이고 많은 실업인들, 경제인들, 사업가들, 교육자들, 정치가들, 공무원들, 지식인들, 성직자들, 예술가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배출 될 것입니다. 그 영광에 모두 참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네 집에 영원한 복이 되리라
삼하 7장 1~16절 / 류영모목사
유치원 점심 시간에 볶음밥이 나왔습니다. 한 아이가 양파를 골라내며 밥 알을 세고 있었지요. 울퉁불퉁하게 생긴 선생님이 이 아이에게 다가가서 "양파도 예쁘고 맛있게 먹어야 백설공주처럼 예뻐지지. 앞에 있는 은비 좀 보렴. 맛있게 먹으니까 얼굴도 저렇게 예쁘잖아." 이 아이가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며 묻습니다. "선생님 어릴 때부터 양파를 맛있게 잡수셨어요?" "그럼."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렇게 생겼어요." 이게 소위 말 발이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후세에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미국의 유명한 컨설턴트 Pater Drucker가 13살 때 받았던 질문입니다. 중학교 종교과목 시간이었습니다. 종교교육을 가르치던 목사님이 교실에 들어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희들은 죽은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 물론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 나이 40세가 될 때까지도 여전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산 것이다."
일찍이 청교도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이런 신앙고백을 나누었습니다. "인생은 일생입니다. 단 한번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연습은 시행착오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지나갑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행한 것만이 영원히 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원들을 통해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금생과 내생에 복이 되길 기대하십니다. 이땅에서는 지옥처럼 살다가 죽어서나 가는게 천당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땅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원한 나라에서도 당당한 승리자로 복이 되어 살 권세와 특권이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도 받았던 인물, 그리고 하나님을 몹시도 사랑했던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다윗" 입니다. 그는 시작이 아름다웠고 완성이 아름다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땅에서 복을 받았고 그 복을 하늘에 쌓을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I.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마음 하나로
오늘 본문의 다윗은 많은 시련 끝에 임금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여러 강대국들을 다 무찔렀습니다. 나라가 평안해 졌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을 거닐던 어느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지금 천막 가운데 있구나." 하나님 앞에 송구하고 또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절정을 누리고 있을 때에, 생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에,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나던가요? 내 삶이 평안하고 형통할 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구나' 싶어 감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행복할 때 하나님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윗의 변함없는 영적인 관심을 보십시오. 그가 왕이 되어 아름다운 궁전안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에 관한 관심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가난할 때 곧잘 예수를 믿던 사람이 돈 꽤나 벌고 나면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비천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몸부림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이 평안을 얻고 나면 주님을 저버리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은 출세를 했습니다. 명성을 얻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영적인 관심은 조금도 변하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받은 복이 너무나 많은데 하나님께 드린 것이 없구나.'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22장에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지 않는 이유가 나옵니다.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유한 사람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찌라" (대상22:8-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살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역대하 6장 8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내게 좋도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이 마음을 둔 이것 하나로 "내 마음이 기쁘다. 내 마음이 좋도다"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윗의 이 마음입니다. 여러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로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비전은 분명합니다. 필요성도 충분합니다. 자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이 부족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부족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윗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소망 비전센타 건축에 감사하는 마음과 설레이는 마음을 가지십시다. 때로 믿음이 부족해도 부정적인 말을 삼가 하십시오. 부정적인 말은 언제나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이 전이 건축되는 그 날까지 긍정적인 말이 이 전 안에, 우리의 삶속에, 우리입술에 가득 차도록 하십시다.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헌신하지 못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부지런히 기도만 해 주십시오. 이 사람이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내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부지런히 전도하십시오. 그가 최선의 헌신자입니다. 우리교회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 성도들은 배가되고 3배가되는 역사를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II. 한소망교회가 걸어온 길
맨손으로 교회가 개척된지 6-7년만에 지금의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어 우리는 입당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다음은 숨가쁘게 헌신하고 희생했던 성도들이 있었길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름답게 헌신한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금생과 내생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토록 여유있어 보이고 넓게만 보였던 예배공간도 잠시 - 이곳으로 이사온지 6-7년 만에 주일이면 발디딜틈이 없고 또 다시 주차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신앙잡지 「Pulpit」을 발행한 스피노스 목사님은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이 늘 모자라는 문제가 있다. 죽어 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떠들고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이 많아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이 없기에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의 사람이 많아 이름을 알기가 어려워 애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드리는 자(giver)로 가득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tipper)로 가득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으로 운영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에 의해 운행된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지내기가 편안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활발하게 전도하고,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져 화석화되어 간다.」
우리 교회의 역사는 우리 교회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공동체임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창립 10주년 - 그때막 새천년 - 21세기를 맞이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교회를 하나님이 축복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 주님의 대답은 "한소망교회가 한국에 있는 여러 교회중에 하나가 되지말고 주님의 심장속에 있던 교회, 신약성경에 있는 그 교회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는 "아버지 마음속에 있는 그 교회가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대답이 셀교회였습니다. 셀교회의 절정 G12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한국 최초의 가장 강력한 셀교회가 되어 잠들고 침체된 한국교회를 깨우길 원하십니다. 이번에 건축하게 될 "한소망 비전센타"는 한국교회가 셀교회로 깨어나는, 이름 그대로 비전의 센타가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한국교회 예배가 새로워지고 전혀 새로운 모델의 능력있는 청년교회, 청소년교회, 어린교회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와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몰려와 셀교회, G12교회를 배워 통일한국과 세계선교의 지축을 흔들게 될 것입니다. 교회안에 피정의 집 - 수련센타가 있어 교인들은 이곳에서 부단히 자신의 영성을 갈고 닦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통일 한국땅 중심 - 일산, 파주 한복판에 세워질 한 팔로 고양시를 품고 한 팔로는 파주시를 끌어안게 될 "한소망 비전센타"는 한국교회가, 한민족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비전의 센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꿈같은 이야기라고요? 그렇습니다. 꿈같은 이야기를 하면 꿈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속해 있는 어떤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목사님들이 모이는 모임입니다. 신년하례차 얼마전에 모여서 금년 한해 각자 섬기는 교회의 근황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교회당 건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비전트립을 통해서도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는 늘 공간이 모자라는 구나.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에 건축의 역사가 있구나!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교회와 교인들을 축복하시는 구나."
III. 다윗 :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오랜 기간동안 우리의 신앙 고백으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성전건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가장 좋은 일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이 사실을 깨닫고 복 받은 사람이 오늘 본문의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아갔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춤이 나오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만 보더라도, 꿈만 꾸더라도 시가 터져 나왔던 사람, 노래가 터져 나왔던 사람, 눈물이 쏟아졌던 사람, 춤이 덩실덩실 나왔던 사람 그가 바로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편 84:1-5)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가름할 수 있는 바로메타가 있습니다. 시금석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걸 보면 압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생각해도 좋고 주의 성전 뜰만 밟아도 좋고 바라만 봐도 좋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내 가슴속에 터질 듯이 넘치고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속에 지금 충만히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표현을 원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받는 큰 축복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고귀한 축복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복입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가 시장갔다 오시면 눈깔사탕이라고 하는 왕사탕을 사오셨습니다. 그 사탕 하나 먹으면 아까워 가지고 입에 넣었다가, 빨았다가, 때 묻은 손 가지고 꺼냈다가 또 넣다가 빨았다가 온 동네를 쫓아다니며 자랑을 했습니다. 사탕을 하나씩 나눠주고 우리 할머니는 손자들이 그토록 맛있게 사탕 먹는 모습을 봅니다. 할머니가 보니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졌나 시험해 봅니다. "얘들아, 그 사탕 나 줘. 아..."
세 종류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놈은 "할머니가 준 것을 또 뺏어?" 그러고 안 뺏기려고 줄행랑을 치는 놈, 어떤 놈은 그 왕사탕 그렇게 큰데도 불구하고 안 뺏기려고 아드득 아드득 깨물다가 혀를 깨무는 놈, 어떤 놈은 할머니가 달라니까 아깝지만, 그러나 할머니가 줬으니까, 사다주신 할머니가 달라는데 줘야지. 내가 눈물을 머금고 줘야지. 받아 가지고 "아~" 넣어주는 놈, 똑같은 자식입니다. 그 세 자식 중에 할머니는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알사탕 10개 사왔는데, 3개 주고 봉지에 7개가 남았습니다.
할머니 드리기 싫어 도망간 손자들 다 제쳐놓고 할머니 입에 사탕 넣어준 손자에게 아예 사탕 봉지째 맡겨 버립니다.
여러분, 저는 몇 째 놈이었을까요? 그야 당연히 사탕을 봉지째 받은 셋째 놈이었지요.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게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더 줄 자를 찾습니다. 복 줄 아들을 찾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주실 사람을 찾고 있는 겁니다. "누가 더 기도 많이 합니까? 누가 더 전도 많이 합니까? 누가 헌신 더 많이 합니까? 누가 충성 더 많이 합니까? 누가 더 은혜에 보답합니까?" 그 사람 찾고 있습니다.
IV. 네 이름을 존귀케 하리라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마음 하나로 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고 했습니다. 네가 나의 이름을 높였기 때문에 내가 너의 이름을 높이겠다. 네가 나의 이름을 존귀하게 했기 때문에 내가 너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 주겠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이름이 존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이 땅에 이름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거하게 될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은 그 이름이 영광스러운 사람이요, 그 이름이 추한 사람은 그 인생이 추한 인생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은 다윗이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다윗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보다도 사도 바울 보다도 심지어는 예수라는 이름 보다도 다윗이라고 하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기억할 때에, 병 낫기를 사모할 때에, 주님 만나기를 사모할 때, 뭇 심령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에 그 이름 앞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 다윗의 이름을 함께 기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군천사들에 쌓여서 하늘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 주님 이 땅에 오실 때에 재림의 예수를 명명하는 그이름이 어떤 이름입니까?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V. 안정의 복을 주신다
성전을 건축할 마음 하나만으로 다윗은 안정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 삶이 안정되어지는 것, 가정이 안정되어지는 것, 자녀들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안정되어지는 것, 사회가 안정되어지는 것, 나라가 안정되어지는 것, 민족이 국가가 안정되어지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어떻게 안정될 수 있습니까?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에 안정감이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고 신앙이 안정되고 그 영혼이 안정되면 바로 너희들의 삶이, 사회가, 국가가 안정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옮겨 다니면 이스라엘 백성의 안정감이 없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가 자리잡게 되면 온 가족들이, 온 백성들이 마음중심을 성전에 담게 될 것이고 그 순간 너희들의 가정이 안정되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너희들 영혼들이 성전에 뿌리내리는 그 순간 너희 삶이 안정되게 될 것이다. 온 백성들이 성전에 마음 담고 살아가는 그 순간 너희 국가가 안정될 것이다. 할렐루야. 다윗은 안정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계속되어지는 12절 14절 15절 말씀에 보면 여러 가지 안정가운데 특별히 자손의 안정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위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네가 이 땅에 살아가는 어느날 너는 조상들과 함께 죽겠지. 너의 자손들이 이 땅에 태어나 왕위를 계승하게 될텐데 그 왕위를 내가 견고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계속되는 말씀에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자손들이 실수할 게야. 네 자손들이 죄를 지을 거야. 네 자손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을 게야. 그러나 내가 저들을 왕위에서 쫓아 내지 아니할 것이다. 때로는 채찍을 들고 때로는 징계할 것이지만 너의 이름을 봐서 네 얼굴을 봐서 네 자손들을 내가 번성케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복입니까?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죄를 짓고 많은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지 아니하고 왕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왕권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전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자손을 축복하십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 조상들이 이 전을 건축했다. 한소망교회 역사가 시작되는 초기에 우리아버지가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다. 우리 어머니가 기도의 눈물을 쌓았다. 그 하나만으로 너의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성전 지을 마음 하나로 네 자손들이 견고해 지리라. 할렐루야!
경상남도 한 시골에 김성은이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6.25때 군에 입대했고 그가 27살의 나이에 별을 달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어머니께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경찰서장을 대동하고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리고 별이 달린 모자를 그 앞에 놓고 "어머니, 어머니 곁을 떠났던 그 자식이 별을 달고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시큰둥해 하셨습니다. "그 별은 언젠가는 떨어질 똥별이다. 나는 네가 하늘의 별을 달기를 원한다. 네가 어느 지역에 가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거기서 복음 전하는 일, 성전 세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게야." 이 사람은 4성 장군이 되었고 국방부장관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국방부장관 김성은 장로입니다.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군부대에 수많은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그가 전역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땅을 다 팔아서 약수동에 한국교회가 낳은 예배당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으로 꼽혀지는 약수동 신일교회를 세웠습니다. 성전을 봉헌한 다음에 예배당 사진을 구석구석을 찍어서 어머니 앞에 찾아갔습니다. "어머니 이 예배당 어머니의 아들이 건축위원장으로 섬겨 저희들이 지어서 하나님 앞에 봉헌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나는 네가 목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런데 네가 목사는 되지 못했지만 이제야 네가 하늘의 별을 달았구나." 그 예배당을 통하여 뭇 심령들이 하늘의 별이 되어서 오르게 될 것이다. 뭇 영혼 구원하게 될 것이다. 이제야 네가 땅에서 썩을 별이 아니고 떨어질 별이 아니고 하늘의 별을 달았구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VI.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복을 주신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왕조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조를 통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탄생하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예수 이름 앞에 사단은 두려워 떨게 될 것이며 다윗의 왕가를 통하여 태어난 예수의 이름 앞에 하늘문이 열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복된 축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복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바로 너의 왕위를 통하여 태어날 예수를 통하여 영원한 나라를, 하늘의 왕국을, 하나님 나라를 내가 건설하게 될 것이니라.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우리가 조심스럽게 읽어내려 가다보면 아주 우리의 관심을 주목시키는 한 구절이 나옵니다. 11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무슨 얘기이겠습니까? 네가 나의 집을 짓겠다구. 아니야. 너는 내 집을 지을 수가 없어. 나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겠다구. 아니야. 나는 집이 필요없는 존재야. 나는 성전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야. 이 성전이 아니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영광받을 수 있고 이 성전이 아니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이 땅을 구원할 수 있어. 네가 내 집을 짓는다고. 아니야. 네가 내 집을 짓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한다면 내가 너를 위하여 영원한 집을 짓는 것이 은혜가 아니겠더냐. 네가 나를 위하여 집을 지을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겠다. 하늘의 집을 지어 주리라.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마음 하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해 주셨고 영원한 나라를 건설해 주셨고 다윗의 영혼을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여 하늘 집을 지어 주셨던 것이지요.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려던 자신의 꿈은 하나님의 거절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다윗은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질 성전 건축을 위해 금과 은을 모으며 힘을 다하여 예비하기 시작했습니다.(대상29:2)
다윗은 자신이 성전건축을 위해 자원을 준비할 수 있는 하나만으로 행복했습니다. 다윗은 이 복을 받고 너무 감사해서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종이 무엇이관대 이 복을 주십니까? 종의 집이 무엇이관대 이 엄청난 복을 주십니까? 종의 자식들이 무엇이관대 이 엄청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더란 말입니까?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울며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인생은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인생은 집짓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믿음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오 헨리의 단편 소설 중에 「20년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지금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십년후 이십년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집을 짓지 못해서 이 땅에서 자신의 성전을 짓지 못해서 하늘 영원한 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십년후에도 교회의 구경꾼으로 이십년후에도 신앙의 방관자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불행한 대열에 여러분 가운데 누가 서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겠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나의 집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하늘 집 영생의 집을 지어 주시는 축복입니다. 여허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리라! 여호와가 너의 가문을 이루리라!
VII. 맺으며
1만평 꿈땅 - 1만평 성전 건축! 너무 거창하게 느껴지십니까?
우리 인생의 기준을 높이십시다. 인생은 자신이 정한 기준이 곧 자기 자신입니다.
통일한국의 중심, 세계교회의 중심이 되는 큰 꿈을 자손들에게 물려줍시다.
"한소망 비전센타"는 서울 북부지역에서 최고의 명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조금만 더...
그대가 받는 보수보다 조금만 더 일하라.
그대가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하나님께 바쳐라.
그대가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만 더 열심을 내라.
그대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보다 조금만 더 높은 목표를 잡아라.
그대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조금만 더 가까이 하라.
그대의 불평과 불만보다 조금만 더 많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라.
그대가 땅의 것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조금만 더 위의 것을 사모하라.
그대가 지금 꿈꾸고 있는 것보다 조금만 더 큰 꿈을 꾸어라.
내가 네 집을 세워주마
삼하 7장 1~17절 / 박덕기목사
복된 새해 첫 주일입니다. 왜 복된 새 해 첫 주일입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2004년 새 해를 똑같이 선물로 받았으니 복되고, 새 해 첫 주일을 성수하면서 출발을 잘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복되고, 오늘 복된 말씀 듣고 복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으니 참으로 복된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한결같이 복을 받는 일일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하는 소원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또한 우리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온 세계 인류의 공통적인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마다하고 싫어할 사람이 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듯 모두가 복을 좋아하고 사모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런데 여기 반드시 기억해야할 법칙이 있습니다. ‘복은 귀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내가 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내게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을 만한 생활이 없고, 내가 복 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복을 구하는 것은 마치 ‘연목구어’ 곧 산에 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자손손이 큰 복을 받는 길을 말씀을 통해서 제시해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예, 아브라함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러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말씀을 가리켜 ‘아브라함 언약’ 이라고 하는데, 그 골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하고 그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구원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후일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쳤을 때 재확인해 주시는데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과 비슷한 언약을 다윗에게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했고, 16절에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리켜 ‘다윗 언약’이라고 하며, 그 골자 역시 다윗의 자손을 번성케 해주시겠다는 것과, 그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 그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무궁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언약대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리켜 마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世系)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이 계속하여 왕위에 오르고, 육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후손으로 오셔서 천하 만민이 구원을 얻게 되는 이 엄청난 축복을 다윗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받게 되었을까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2에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찌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윗이 선지자 나단을 불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의향을 밝힌 말입니다. 다윗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자신의 거처와 하나님의 거처를 비교하였습니다. 즉 다윗은 ‘나는’과 ‘하나님의 궤는’을 대비시켜, 자기가 거하는 거처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처를 비교함으로써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어진 웅장한 궁에 거하는 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법궤는 초라한 장막에 있도록 이제껏 내버려 둔 데 대한 자신의 송구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열심이 누구보다도 특출하였던 다윗은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여 왕궁에 평안히 거하게 되자, 하나님의 궤가 초라한 장막에 거하고 있음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이래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부적으로는 국가의 질서를 확보하여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여야 했고, 외부적으로는 수많은 대적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정도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는 일을 마침으로 나라의 안정이 찾아 왔을 때, 그 평화로움 속에서 안락한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평안함이 찾아왔을 때에도 결코 안락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평안함이 찾아오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습성상 어려움을 당하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그래서 ‘臨死呼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때를 지나 평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면, 하나님을 잊고 교만에 빠지거나 이전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마저도 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께 고침을 받았던 열 문둥병자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이 지시하신 대로 가다가 길에서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 다시 돌아와 주님께 감사를 드렸던 사람은 단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사울왕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왕권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순종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해주시자 그만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마음대로 자행자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성도는 다윗처럼 곤고할 때나 평안할 때나 맨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화려한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는 장막에 거하는 것을 보고 송구스러워 견딜 수 없어 하는 마음,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다윗의 신앙 양심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양심은 뗄려야 뗄 수없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 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믿음을 배에 비유하고 양심을 저버린 믿음을 파선한 배에 비유하고 있음을 봅니다. Bengel은 말하기를 ‘믿음은 고귀한 향유 같고 착한 양심은 유리 그릇 같다’ 고 했습니다. 양심을 버린 믿음은 향유 병이 깨어지듯, 배가 파선하듯 파멸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은 초라하건 말건, 비가 새건 말건, 그저 자기 집만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양심이 불량한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떤 목사님은 예배당보다 더 좋은 집에 사는 신자의 가정에는 심방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궤는 장막에 있음을 송구스러워하며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에게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고 하시면서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여기 ‘좋도다’는 말은 본래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던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다윗이 품은 그 생각이 너무나 아름답고 진실해서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친히 창조하신 천지 만물만큼이나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속에서 처음 창조 때에 보았던 아름답고 질서 있는 세계를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크고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에 필적할 만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향해 성전을 지어 바치려고 하는 다윗의 마음에 대해, 마치 처음에 세상이 지어지는 것을 다시 보시는 것처럼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다윗이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음을 인하여 성전 건축은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하도록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실로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인 ‘다윗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그의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며 사방의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여주시겠다는 것으로, 다윗 개인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평안에 대한 약속입니다. 둘째는 다윗으로 왕조를 이루게 하고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다윗의 후손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다윗의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다윗의 후손이 범죄하면 징계는 하시되 왕위는 빼앗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다윗 언약은 일차적으로는 성전과 다윗 왕권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인류의 구속주가 되심으로써 택한 백성들의 영원한 왕이 되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왕국 건설을 담고 있는 언약이라는 점에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번에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이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좋은 기회를 부여 받은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성전 건축하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성전건축을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누구도 성전건축을 할 수 없습니다. 성전건축은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다윗 왕은 성전건축을 하고 싶은 소원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모든 보물과 물질을 다 준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건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전건축을 위해 하나님께 택함 받은 거룩한 일꾼입니다. 일 잘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돈 많은 일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참여할 수 있는 거룩한 일꾼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왜 성전건축이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주셨기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큰 역사인 것입니다. 성전건축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릅니다. 천국백성 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부활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 건축에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요, 사랑 중의 사랑이요, 복 중의 복인 줄 믿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 어떤 여집사님에게서 제 안식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 집사님의 남편이 본래 말이 없는 분인데, 성전 건축 헌금을 작정하고 집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기쁠 수가 없네. 내 생전에 이렇게 귀한 일에 동참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면서 얼마나 기뻐하는지 결혼 생활 수십 년 만에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권사님 역시 헌금 작정을 하고 나니 그렇게 기쁘고 흐뭇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한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 앞으로도 이렇게 귀한 헌신자들이 많이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눈깔사탕이라고 하는 커다란 왕사탕이 있었지요? 그 눈깔사탕을 입에 넣으면 한 입 가득차는데, 그 사탕이 아까워서 입에 넣고 빨았다가 때 묻은 손으로 꺼냈다가, 또 넣었다가 빨았다가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의 사탕 먹는 것을 보니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의 마음을 한 번 시험해 보려고 ‘아들아, 그 사탕 나 좀 다오!’ 했습니다. 그럴 때 세 종류의 아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아들은 ‘엄마는 어떻게 준 것을 또 뺐어?’ 그러면서 안 뺏기려고 줄행랑을 치는 녀석이 있고, 어떤 아들은 눈깔사탕이 그렇게 큰데도 불구하고 안 뺏기려고 아드득 아드득 깨물다가 혀를 깨무는 녀석도 있고, 어떤 아들은 엄마가 달라니까 아깝지만, 사탕을 사다주신 엄마가 달라는데 줘야지. 그러면서 ‘아’ 하며 엄마의 입에 넣어주는 기특한 아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자식들입니다. 그 세 자식 중에 엄마가 누구를 가장 사랑하겠습니까? 그래요. 맞습니다. 엄마가 눈깔사탕 10개를 사왔는데, 3개 주고 봉지에 7개가 남았습니다. 남은 것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엄마의 입에 ‘아’ 하고 넣어준 아들에게 ‘넌 봉지채 가져라.’고 주었습니다. 어떤 아들이 불평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누가 복을 더 받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가 더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표시입니다. 독일 북쪽 류벡이라는 도시는 소금을 캐는 도시인데 인구의 95%가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소원은 돈을 많이 벌어서 혼자 큰 교회당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백 미터 간격으로 큰 교회당이 있고 비싼 파이프 올간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독일 교회가 부흥할 때 이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표시로 큰 교회당들을 지었던 것입니다. 성전 건축하는 시대가 가장 복을 많이 받는 시대요 나라가 부강하고 잘 사는 시대입니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왕으로 있고, 비스마르크가 재상으로 있을 때, 빌헬름 왕이 베를린 도시 한 중심 번화가에 기념 교회당을 짓고 땅만 있으면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비스마르크가 대머리인데 사람들이 농담하기를 왕이 교회당을 짓다가 땅이 없으면 당신 머리 위에 교회당을 짓게 될는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유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카이저 빌헬름 왕이 주님을 사랑하여 교회당을 많이 지었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의 후손이 전쟁의 폐허 후에도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중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5천년 동안 조상들이 하나님이 진노할 불당이나 신당을 지어서 저주를 받아 전쟁과 가난과 피 흘림과 싸움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120년 동안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전을 지을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큰 복을 받았습니까? 여러분 유럽이나 미국을 돌아보세요. 지금 성전 건축하는 것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하나님 잘 섬기고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교회를 짓기는커녕 교회를 팔아먹고 있습니다. 교회가 공장이나 창고나 심지어는 술집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이 식어지면 같은 현상이 나타날는지 모릅니다. 유럽이나 미국 교회가 성전을 짓고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복을 받아서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 문을 닫고 팔아먹을 때 그들은 지금 타락과 혼동과 무질서와 재앙과 낮에도 시내를 다닐 수 없는 무서운 도시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고 전 연세대학교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본래 시골에서 다섯 마지기의 논농사를 짓던 가나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백 박사의 아버지는 일찍이 예수님을 믿어 생활과 행동이 진실한 신자로서 교회의 일에 남달리 충성하는 모범적인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그의 교회에서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백 박사의 아버지도 건축 헌금을 하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 박사의 아버지는 열심히 기도하고 깊이 생각한 후 땅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활의 보루인 논 다섯 마지기를 모두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한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논을 팔아 모두 건축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 가정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매우 어렵게 살고 있는데, 그 가정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교회에서는 의외로 많은 건축 헌금을 바친 것이 대하여 의아함을 느끼고 그 가정을 살펴보았더니 전 재산인 논을 모두 팔아 건축 헌금하고 끼니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교회에서는 이 사실을 선교사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백 박사의 아버지를 교회 사찰로 추천하여 생활을 해결해 주고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습니다. 백 박사의 아버지가 사찰로 일하는 동안 워낙 영리했던 백낙준은 선교사와 친해지고 사랑을 받아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렸고 계속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백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의 교육계에 끼친 영향과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 같이 가난한 중에도 자기 전 소유를 드린 백 박사 아버지의 신앙이 백 박사를 낳는 축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가진 것을 너무도 기뻐하셔서 그에게 다윗 언약이라는 놀라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다윗 언약은 엄청난 축복을 담고 있는 언약입니다. ‘네가 내 집을 짓겠다니, 아니라 오히려 내가 네 집을 세워 주마’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이혼율이 50%에 육박하는 죄스런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의 문 열리어라’는 웨딩마치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축하객들의 축하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성전 건축헌금에 동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개 집사야, 네가 내 집을 짓겠다니 참으로 고맙다! 이제 내가 네 집을 세워 주마!’ 하시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축복
삼하 7장 1~17절 / 이성우목사
‘열정 깨우기’라는 책을 쓴 용혜원 선생님은 그의 책에서 ‘열정’이라고 하는 이 중요한 단어를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정의하고 있는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열정은 부정적인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열정은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정말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라!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을 원한다면 열정을 쏟아 부어라. 열정을 가진 자는 정상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책머리에서 ‘열정’이라는 제목으로 시 한편을 남겨 놓았는데, 그 시를 한번 낭송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침없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폭죽 터지듯이 피어나는 봄꽃들처럼/ 살아있는 심장에서 뜨겁게/ 터져 나오는 불꽃이다. 마음의 중심에서 타올라 뜨겁게 내뿜는/ 강렬한 열기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고 숨어 있던/ 무한한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힘이다. 열정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가며 모든 가능성을 찾아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실패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꿈과 비전을 향해 마음껏 솟구치며/ 삶을 활짝 꽃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가슴이 식을 줄 모르고 뜨거운 사람들이/ 시대를 앞서 나가며 이끌어간다./ 뜨거운 열정 앞에 모든 악조건은 고개를 숙이고/ 열정은 고난 속에서 더 강렬해진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의 눈빛 속에서/ 성공을 읽어낼 수 있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이/ 성공을 만든다.”
그는 그 책에서 ‘열정’이 가지는 네 가지 특별한 성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공하려면 열정적으로 꿈꾸고 행동하라. 둘째는 열정적으로 일하면 일에서 자유로워진다. 셋째는 열정적으로 살면 몸과 마음이 행복해진다. 넷째는 열정은 절망을 희망의 거름으로 쓰게 한다. 열정이 가지는 네 가지 특별한 성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고 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삶에서 성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열정을 가지라.’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분명한 것 하나는 ‘열정’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사실이지만 심장이 멈추니까 아버님의 몸이 금방 싸늘해 지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심장의 박동이 약해지면서 심장으로부터 먼 쪽은 이미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다하고 죽음이 찾아오자 몸이 식어지더니 곧 바로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열정이 식는 것이요 모든 것이 굳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삶이 열정이 식어버리고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굳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이 찾아들고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서 언제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발견하게 되고 매력을 느끼십니까? 이 물음에 대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대답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 한 가지는 무슨 일이든지 땀을 흘리면서 열정을 쏟아서 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열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움직여 가시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부지런히 여러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의 심장 박동을 확인하셔서 열정이 식어버리지 않고 굳어버리지 않도록 하셔서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성공적이고 행복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도 열정이 필요하지만 사실 열정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곳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의 영역입니다. 이 세상을 맥 빠진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더 꼴불견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생활을 맥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아무런 감동이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그저 신앙생활의 겉모습만 있을 뿐인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더 놀라운 것은 그 속도나 범위가 더 넓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곳곳에 공동묘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땅이 점점 사막화되어 가듯이, 그리고 바다가 백화현상으로 인해서 점점 죽어가듯이, 우리 한국교회가 점점 중병이 들어가고 있고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열정을 회복하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놓여있는 우리들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다윗 왕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식어진 우리들의 가슴에 뜨거운 열정의 불을 붙여줄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오늘 본문 말씀은 소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 왕은 이스라엘 땅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여부스 족속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나서 7, 80여 년 동안 기럇여아림 땅에 방치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보좌격인 법궤를 그 곳으로 모셔오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요 왕이 되심을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하고자 했던 것이며, 더 나아가서 확고한 요새를 확보함으로써 정치적인 안정과 더불어서 백성들이 마음 놓고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는 성전의 터전을 닦아 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법궤를 모셔오는 과정 중에 다윗 왕이 보여준 그의 열정이 사무엘하 6장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다윗 왕은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그 법궤를 옮겨오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특별히 그는 한 번의 실패 후에 두 번째 시도를 통해서 법궤가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게 되었을 때, 왕의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백성들 앞에서 바지춤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온몸으로 기뻐하며 감격해 하는 모습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옴으로써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로 이스라엘의 모든 영역, 곧 정치, 종교,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세워나가시기를 원하셨던 신정국가의 면모가 갖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던 것인데,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철저하게 의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무엘하 7장 1-17절까지의 말씀은 앞서 보여주었던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남다른 열정이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다윗 왕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고 계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법궤를 모셔다가 예루살렘의 한 장막 안에 안치해 두었던 다윗은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어서 백향목 궁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가 장막에 모셔져 있음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거하실 집,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음이 오늘 본문 말씀의 전반부인 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모든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새로이 평안의 시대를 맞이한 다윗 왕이 자신의 일신상의 행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모습으로써 언제나 한결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다윗 왕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이스라엘 나라 안에 충만히 드러나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다윗 왕의 열정이 왕이 되기 이전이나 왕이 된 이후에나 한결같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이 자기를 왕으로 택하시고 끝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항상 그 사랑에 감격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사울 왕과 다윗 왕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으며,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게 되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비록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 왕의 열망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감격과 감사,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온 몸과 마음을 바쳐서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되고 받아드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식을 줄 몰랐던 다윗의 열정은 성전 건축을 위한 제반 준비들, 곧 건축에 대한 직접적인 물자의 준비들 외에도 성전에서 제사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잘 할 수 있기 위해서 모든 제사의식과 제사와 관련된 모든 지침들과 세부적인 행동지침까지, 그리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국민통합을 이루는 일까지 온전하고도 철저하게 준비를 했던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역대상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한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 왕이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 왕에게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하셨는데, 그 언약이 소위 ‘다윗 언약’이라는 것으로,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8-1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축복의 언약을 통해서 다윗의 이름이 위대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으며(9절), 다윗 왕조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왕조가 영원토록 견고하게 세워지게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10-16절).
이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 왕의 열정에 대해서 그의 가정과 나라의 미래를 영원히 보장해 주신 것으로, 우선순위를 바로 할 줄 아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며, 믿음과 순종의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오고 오는 모든 세대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는 말씀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세 가지 비전이 있는데, 열정, 나눔, 행복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그 중에 첫째가 바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품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이요 뿌리이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열정적으로 맺어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누리도록 이끌어주는 가장 분명한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필요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 왕은 그런 삶을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사람일 뿐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도 얼마든지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선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시기 위해서 놀라운 축복을 마음껏 베풀어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아침 주신 말씀이 여러분 모두의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이는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되어서 여러분 모두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화됨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윗왕의 말 한마디
삼하 7장 1~2절 / 김삼환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합리적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과학과 지식에 견주어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있는 어떤 잣대와 인간의 경험과 사람이 가진 그런 눈으로 평가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경험과 생각, 합리적인 이론과 이성과 과학 위에 두어야 하며 절대자,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아멘으로 순종할 때 놀라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된다.’라는 것도 받아들이기 참 어렵습니다. 사람마다 은사가 많이 있겠지만 저의 가장 큰 은사는 남을 돕는 약한 자와 어려운자를 도와주는 것이며, 저는 어려서부터 특별히 좀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명성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한 십년동안 1970년부터 1980년까지 있었던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공장교회입니다. 공장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 공장 안에 있는 분들은 의무적으로 교회에 나오도록 장로님이 만드셨습니다. 훌륭한 장로님이십니다. 우리교회는 80%가 그 안에 있는 분들이고 그 주변에 있는 분들은 한 20%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기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농촌에 있는 어려운 분들을 많이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많이 도와주고 취직을 많이 시켜주었습니다. 1970년에는 취직이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올라왔습니다. 올라오면 우선 있을 때가 없으니까 우리 집에 있습니다. 사택에서 보통 석 달, 넉 달, 다섯 달 재워주고 먹으며 우리 집에서 삽니다. 우리는 힘든 일이지만 한분 한분을 도와서 그분들이 길이 열리고 또한 그곳에 와서 결혼도 하고 취직해서 가정도 이루고 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집은 다 이사를 오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 집에서 6개월 동안 지내는데 별로 대접을 잘 받지 못했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어려워도 최선을 다했지만 자기는 그 중에 섭섭한 것 한 가지만 기억합니다. 잘 해준 것은 다 잊어버립니다. 늘 집 사람하고 그 집들이 모두 같이 자고 그래도 저와 우리 온 식구들은 불편하지만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한 사람 한 사람 길을 열어주고 직장으로 안내해서 그 시골에서는 농사 귀신이 될 텐데 서울에 와서 살면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올라왔습니다. 어떤 분은 섬에 있는 분도 데려왔습니다. 섬에서 공부하는 그 학생이 여기 와서 공부를 하고 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중학교 3학년 수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여기 와서 계속 재수하고 우리집에서 몇 년을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우리 집에서 2년을 같이 지낸 목사님도 계십니다. 그 때는 전도사님이지만 공부시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왔습니다.
한 번은 밤 두시에 여름인데 문 밖에서 누가 두드려서 나가니까 비가 막 쏟아지는데 밤 두시에 한 분이 서 있습니다. 교회 사택 바로 10미터 맞은편에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겁이 납니까? 비 오는 밤에 누가 두드리니까 그 때는 전설의 고향을 많이 하던 때니까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여니까 정말 묘지에서 나온 것 같은 분이 서 있습니다. 결핵환자로 미사리 한강 가에서 몇 달을 있었는데 밤에 물이 들어와 수위가 올라오니까 거기서 피해 우리 집으로 불이 보이니까 그리 찾아온 것입니다. 비를 다 맞고 살이라고는 한 점 없는 앙상한 해골 같은 분이 서 있습니다. 공동묘지 바로 옆에 그런 분이 서 있으니 사람이 기절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안내 해 우리 집에서 또 집 사람이 잘해주었습니다. 하여튼 이런 일만 은사로 생각하고 너무 너무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섭섭하다고 유리창을 깨고 어떤 분은 나중에 술이 취해가지고 칼을 들고 왔습니다. 그 집 모두 이사해서 서울에서 자녀들 공부시켜 대학 나오고 잘 살지만 은혜를 아는 사람이 정말 몇 명이 있겠습니까? 성경에 나옵니다. 문둥병을 치료받아도 감사하는 사람은 한 명,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 그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를 사십년 하고 깨달은 것이 ‘아~ 성경에 하나님만 의지해라. 하나님만 믿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오랜 경험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정말 믿을 이는 하나님 밖에 없구나.’ 우리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서 누구를 위해서 순교를 한다 할지라도 사람은 그 은혜를 오래 간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하고 하나님 앞에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잘 하다가도 한 가지 실수만 하면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도 잘 가다가 요만한 것 하나에 돌아섭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친구 간에도 요만한 것, 오랜 우정이 어디 있습니까? 요만한 강을 못 넘고 요만한 어려움을 이해를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대표적인 인물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높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그는 나의 힘이시며 요새시며 나의 구원이시며 반석이시며 우리 하나님을 세세무궁토록 끝까지 사랑하고 의지한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윗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도와주어서 오는 것이 없는데 하나님 앞에 잘 하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쌓을 곳이 없습니다. 다윗은 인류역사에 남을 최고의 위대한 왕, 지도자가 되고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어 12지파를 사십년 동안 통치하는 데도 누수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이 그와 그의 왕국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는 복을 받았습니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그의 마지막을 보면 춤추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얼마나 넘치는 축복을 받았는지 몇 년 전에 미국에 있는 과학자들, 고고학 학자들, 인류학자들, 경제학자들이 모여서 우리 인류역사에 도대체 제일 잘 산 사람이 누구일까? 조사를 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로마, 헬라, 그리스, 이집트, 바벨론, 앗수르, 중국, 인도문명에 오늘 록펠러, 카네기까지 다 합해서 누가 제일 복을 받았을까 조사를 했는데 일등이 다윗입니다. 제일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 복이 누구로 말미암아 왔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가 벌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비즈니스맨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목동입니다. 돈 벌줄 모르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그의 배후에 늘 같이 하셨습니다. 다윗도 특별한 사람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도 아닙니다. 성격도 잘못되고 그의 인격도 구멍이 뚫어져 있고 그는 인간적으로 심히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신하의 아내를 데려다가 간음하고 그 신하를 죽였습니다. 무서운 살인죄라는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지 않는 큰 죄를 다윗은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지켜 보호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이 해주셨습니다. 모두가 그를 버려도 하나님이 그를 챙기시고, 모두가 짓밟아도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모두가 대적해도 하나님이 그의 오른 손을 들어주셔서 그는 역사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 축복을 받으며 자손만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이 완전하려고 하면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완전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행복하려고 하면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행복이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왕이 되어서 이 연대가 어느 때쯤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왕이 된 초기라고 모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서 나단 선지자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은 아직까지 휘장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나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하나님께 한 번 물어 봐 주십시오.’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너는 가서 이렇게 말하라. 내가 너에게 무슨 성전을 지어달라고 하더냐? 그것은 내가 준비한 사람이 따로 있다. 때가 되면 내가 준비한 사람을 통하여 내가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네 그 마음, 네가 생각한 그 생각이 너무 아름답구나.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성전을 안 지어주어도 내가 너를 복을 주겠다. 너의 평생에 너를 당할 자가 없도록 내가 너의 왕궁을 지키고 너의 자리를 지켜 너를 보호할 것이다. 너만 아니다. 너의 자손만대에 너의 자손들이 계속하여 이 왕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는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이 한 장 전체가 다 축복의 말씀입니다. 전체가 다윗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복을 받은 게 아닙니다. 안 짓고, 그 마음 하나 가지고 이 한량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다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면 좋겠느냐 이런 자세가 그를 위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섬기고 사람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어떻게 보답할까,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 나갈 때 그는 사람 앞에서도 존경받고 쓰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살아보면 돈을 벌면 돈에 눈을 뜨게 되고 권력을 가지면 권력에 눈을 뜨게 됩니다. 왕이 되면 왕으로서 다 만족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금, 은 보화를 더 가지려고 하고 더 큰 권력을 가지려고 하고 백향목 궁에다가 상아궁을 지으려고 하고, 다 더 좋은 것, 집도 늘이고 더 늘이고 사람이 다 그러는 거 아닙니까? 차를 가져도 더 좋은 차 가지려고 하고 옷을 입어도 더 좋은 옷 입으려고 하는 것이 사람이지, 이만하면 됐다 이게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예쁜 세계의 미인들을 데려다가 더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 왕들이지 ‘나는 됐습니다. 나는 너무너무 넘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이렇게 나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는 쉽게 읽어도 이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아! 너 그 마음 대단하다. 너 그 자세가 너무 좋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세상 끝날 까지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제 7장이 지나고 사무엘하서 8장, 9장은 어떻게 됩니까? 이 8장, 9장은 전체가 승리입니다. 다윗 왕국이 확장 되는데 남쪽으로 이집트, 저 북쪽으로 레바논, 저 유프라테스 강까지 어마어마한 백전백승하는 그의 나라의 무한한 영광과 번영이 8장 9장에 꽉 차게 밀려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잘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을 이깁니다. 행복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할 때, 둘 부부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입니다. 가정의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온 가정이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 섬기는 가정이 될 때 하나님이 자녀도 남편도, 부모도, 아내도, 다 같이 축복하여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사업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두 사람이 살아야 행복하다라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배 멀미를 잘 안하는데 배 멀미를 세게 한 일이 있습니다. 알래스카에 집회를 갔다가 목사님과 장로님, 집사님들이 낚시하러 가자 그래서 따라갔다가 배 멀미를 했습니다. 낚싯대를 이렇게 놓고 앉아서 잡았는데 저는 배 멀미를 안 하는데 한 시간도 안 걸려서 배 멀미를 합니다. 하여튼 어제 먹은 것까지 다 토합니다. 다 토하고 견뎌날 수가 없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온 몸이 춥고 떨리고 배에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창 잡으려고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알래스카도 좋은 고기는 바로 옆에 없습니다. 큰 좋은 낚시는 알래스카에서도 또 비행기를 타고 갑니다. 한 시간 가서 거기서 큰 배를 빌려서 세 시간 나갔습니다. 저도 잠깐 넣었는데 광어가 이런 게 나옵니다. 사람보다 더 큰 광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가서 한창 잡으려고 그러는데 돌아오니 모두 신경질을 내고 속상해 합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목사님 때문에 못 잡고 다 오니까. 그래서 모두 그럽니다. 다른 사람은 다 안하는데 저 혼자 배 멀미를 하는 이유가 낚시를 할 때 낚싯대만 바라보면 안 된답니다. 멀리 바라보고 다른 곳도 보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저는 거기에만 보고 있으니 이 물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계속 물이 움직이니까 그만 머리가 돈 것입니다. 바로 제가 그걸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 둘 부부만 바라보면 행복한 줄 아십니까? 둘 부부만 보면 금방 사랑의 멀미가 금방 옵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데 두 사람만 바라보니 권태의 멀미가, 싫증의 멀미가 금방 옵니다. 그래서 신혼여행 갔다가 올라오기 전에 벌써 싸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멀미가 금방 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의 아름다움도 72시간밖에 못 간답니다. 꽃에 관심을 아무리 가져도 세계적인 꽃도 72시간 이상 바라볼 수 가 없게 되어 있답니다. 꽃에 대한 싫증이 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일지라도 72시간 이상 어떻게 바라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보기도 72시간도 어렵습니다. 주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부부간의 사랑은 백 년을 가도 변치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 내 사랑은 오래갈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시는 사랑은 그 가정이 천년만년 가도 배 멀미가, 사랑의 멀미가 나지 않습니다. 계속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오늘 사업을 하고 돈만 바라보면 돈 멀미가 금방 옵니다. 돈 때문에 막 스트레스가 오고 돈 때문에 신경 너무너무 과민하게 걱정근심 하다가 멀미가 와서 금방 모두 병듭니다. 돈 너무 사랑하다가 십일조도 못하고 주일도 못 지키고 멀미가 벌써 옵니다. 돈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 없는 돈 가지고 뭐하겠다는 것입니까? 십일조도 하나 못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 한번 바로 못하고 돈에 빠졌습니다. 사랑의 멀미 권력의 멀미 죄악의 멀미에 오늘 현대인들은 길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나아가면 이 세상의 모든 일에 새 힘을 주셔서 멀미나는 일이 일절 없습니다. 주의 사랑이 함께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하나님 앞에는 영적으로는 제로입니다. 그러나 육적으로는 완전하고 최고가 되어야 하고 누구보다도 귀한 집에서 누구보다도 좋은 차를 타고 누구보다도 제일 좋은, 최고의 미인을 만나야 행복하리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나는 부족해도 다윗같이 모든 것이 부족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잘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과 번영과 발전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오면, 아버지께 나오면 아버지가 복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는 민족은 하나님이 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미국 돈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새겨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그 돈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미국 달러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돈이니까 그 돈이 세계를 지배합니다. 여러분이 세계를 지배하는 기업이 되고 인생을 살아가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우뚝, 영적으로 우뚝, 성령으로 우뚝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적으로는 괜찮습니다. 나는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게 행복입니다. 육은 완전하면 행복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영적으로 올라가고 완전해야 행복하며 육적으로는 부족해야 행복합니다.
시골에서 보면 과일도 너무 익으면 안 됩니다. 수박도 너무 익으면 못 먹습니다. 그걸 아셔야 됩니다. 덜 익을 때 익을까 말까 씨가 반만 까맣고 반은 누르스럼해야 그게 맛있는 것입니다. 참외가 완전히 익으면 안 됩니다. 덜 익어야 맛있습니다. 복숭아도 다 익으면 안 됩니다. 농촌에서 벼를 벨때 추수를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완전히 익어 벼를 추수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추수를 해서 정미소에 가면 쌀이 토막토막 다 납니다. 너무 열매가 완전해 그렇습니다. 다 익으면 안 됩니다. 덜 익어야 쌀이 맛이 있습니다. 콩도 다 익은 것을 베면 밭에 다 떨어집니다. 덜 익을 때 가져와야 합니다. 행복? 부족해야 덜 익어야 행복합니다. 왜 20대에 결혼하느냐? 모두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때는 철이 없으니까 그때 만나야 됩니다. 60에 결혼을 해 보십시오. 다 아는데, 너무 아는데 무엇이 행복이겠습니까? 멋모르고 살아야 합니다. 뭐든지 부족해야 은혜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교회생활 부족해야 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만삭되지 못했다.”라고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말씀했습니다. 9절에는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솔로몬도 나는 어린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데 내가 어찌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다윗도 겸손할 때 은혜를 주시고 그의 아들 솔로몬도 겸손하니까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앞서다 뛰어나다 잘났다 이게 다 위험한 것입니다. 이게 바벨탑입니다. 무너집니다. 또 시골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우리 교회에 오면 시골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감나무 같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가을이 되면 학교 갔다 올라올 때 온 동네가 다 벌겋습니다. 감이 막 익어있는데 그런데 감이 먼저 익는 곳이 있습니다. 한 나무라도 먼저 익습니다. 어디서 익느냐? 제일 꼭대기에 있는 감은 햇볕을 많이 받으니까 빨리 빨게 집니다. 그러면 이 감은 주인이 못 땁니다. 누구 것이냐? 까마귀 것입니다. 벌겋게 잘 익은 것 오냐 내거다 내 잘났다 그러는 거 벌겋게 익고 혼자 우뚝 서면 그거 와서 주워 먹습니다. 사과도 내잘났다 나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났다 내 색깔 봐라 뻘겋다 멋지다 그러면 그건 까치가 와가지고 다 사과위에 앉아서.. 까치가 밑으로 들어가서 못 찍어 먹으니까 언제나 위에서 제일 익은 것 내잘났다는 것을 꼭 찍어 먹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잘났다는 것 때문에 불행하고 잘났다는 것 때문에 시험 들며, 잘났다는 것 때문에 교회생활도 승리 못하고 가정생활도 승리 못하는 것입니다. 겸손할 때는 항상 은혜가 오는데 교만할 때는 모든 은혜의 문이 다 닫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역사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언제나 ‘나 따라와라.’ 하고 언제나 최고로 만들어 놓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 보면 ‘너는 나 본받아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지시고 마구간에 태어나시며 언제나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제자들 발을 씻겨주고 어린아이를 사랑하시며, 나사렛에서 사시고 목수의 일을 하시며, 예수님은 3D업종을 하셨습니다. 3D의 삶을 사셨습니다. 제일 힘들고 누추하고 더러운 일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가 보면 나중이 잘 되고 마귀를 따라 가 보면 나중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장닭 한 마리가 모든 천하를 통일하고 모든 장닭을 다 정복하고 암탉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 오랜 전쟁이 끝나고 그는 지붕위에 올라가서 승리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나는 천하를 통일했다. 나는 천하의 왕이다.’ 하고 파드드득 날라 올랐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독수리가 먹을 것이 없어가지고 찾아 헤매던 때에 무슨 지붕위에 웬 식탁이 준비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현실이 여러 가지로 어렵다고 하지만 주님을 높이고 다윗 같은 심령으로 살면 어려운 기업도 없고 어려운 가정도 없습니다. 자녀 교육이 어려울리도 없고 사업이 어려울리도 없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혼자 눈으로 보니까 문제가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이 세상에 진리 되시는, 길이 되시는, 능력이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시면 해결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최고가 되려고 하는 것은 다 지나고 보면 그것은 별것 아닙니다. 최고의 옷, 최고의 것, 다 별것 아닙니다. 요사이는 모두 골프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골프가 원래 유럽에 있는 목동들이 하는 놀이였습니다. 그게 다 양 먹이고 천민들이 하는 가장 천한 사람들이 하는 놀이가 요사이 모두 대단한 줄 아는 골프입니다. 우리 동네 친구들은 소먹이고 꼴을 해가지고 놉니다. 시간이 많으니까 그냥 안놉니다. 자치기를 한다든지 그 다음 낫치기라는 게 있습니다. 낫을 갖다 놓고 탁 치고 이기면 꼴을 하나 먹고 일을 하기 싫으니까 따먹고 갑니다. 그 다음에 또 비상치기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돌을 가지고 돌을 맞추는데 등에다 돌을 얹고 가서 놓기도 하고 머리에다 이고 가서 탁 치는 것을 비상치기라고 합니다. 또 마대라고 손에다가 하는 마대치기도 있고 그런 걸 모두 같이 합니다. 골프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요사이 모두 돈 많은 사람들이 먹는 호박죽도 알고 보면 옛날에 천한 사람들이 먹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어도 안 먹습니다. 그거 별것 아닙니다. 저는 쌀밥 먹지 호박죽 안 먹습니다. ‘아~ 이거 대단하다.’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이 대단하고 그 외에는 별것 없습니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예수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합니다. 심령이 강건합니다. 미래에 꿈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겉옷은 화려하나 심령은 썩었습니다. 너무 많은 영양섭취로 인하여 많은 병이 생겨날 정도로 영양분 섭취를 많이 하지만 내 속사람은 영양실조로 기도의 문이 닫혔습니다. 내 영혼은 거미줄을 쳐놓고 있습니다. 온갖 세상의 것은 다 알지만 진리는, 구원의 길은 하나도 모르는 영적 문을 다 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밝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심령은 어둡기 그지없습니다. 감사와 기쁨과 소망이 없는 그 영혼은 죽은 영혼인 것입니다. 주님을 귀히 여기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나무꾼의 아들이고 콜럼버스는 직조공의 아들입니다. 클린턴은 가난한 집 배달부의 아들이었습니다. 무디는 구두수선공의 아들이었고 밀턴은 전당포집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다윗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용하시는 소재들도 보잘 것 없는 소재가지고 물맷돌 가지고, 창과 활로 이기는 게 아닙니다. 물맷돌 가지고 나라를 승리하게 합니다. 삼손은 나귀턱뼈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 사르밧 과부는 빈대떡을 구워가지고 은혜 받아 먹고 삽니다. 전부 다 보잘 것 없는 소재 가지고 룻이라고 하는 여인은 이삭 줍는 바구니를 들고 이삭 줍다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물맷돌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나귀턱뼈야 많지 않습니까? 정육점에 가면 뼈다귀는 한 짐 얻어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보리떡같이 보잘 것 없고 나귀턱뼈같이 보잘 것 없는 것도 아니 모세는 지팡이지 않습니까?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도 주의 손에 잡히면 하나님이 그 일로 통하여 큰 역사 일어나게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가진 것 무엇이 없습니까? 오늘 많은 사람들은 너무 자기의 삶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다. 얼굴 조금 못 난데에 대해 불만하고 조금 공부 못한다고 해서 자살해 죽고 2류 대학 나와도 3류 대학을 다녀도 아니 대학을 안 나와도, 남들이 가진 것 못 가져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생활에도 너무 성경 많이 아는 것 그거 위험합니다. 제가 보면 성경 많이 알려고 하는 사람치고 이단에 안 빠진 사람이 없습니다. 농촌에 가 보십시오. 성경 하나 모르고 교회 잘 다니는 사람은 오만 복을 다 받습니다. 들으면 농사짓느라 또 다 잊어버리고 그래도 복을 다 받습니다. 좀 잘 잊어버리십시오. 그래야 제가 다시 설교할 것 아닙니까? 너무 너무 좋은 것 그게 좋은 게 아닙니다. 저걸 언제 설교 했더라 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너무 전도 많이 하는 사람, 너무 기도 많이 하는 사람 그게 좋은 게 아닙니다. 적당하게 하십시오. 할렐루야! 우리교회는 적당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말 정량에 못 미치는 미달 목사입니다. 함량미달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붙잡으면 평생 지켜주십니다. 예수님이 보화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귀합니까? 이제 성경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잠언 3장 13절부터 찾아보겠습니다. 잠언서는 지혜의 책이고 욥기는 고난의 책입니다. 전도서는 헛되다라는 허무함의 책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부지런하고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지혜로운 사람은 잘못된 길 악인의 길을 가지 않는다 이것이 잠언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면 지혜를 예수님으로 생각하면서 봐야 합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3절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그 다음 21절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지혜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혜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 번 여러분이 이렇게 읽어보겠습니다. 지혜라고 할 때 ‘예수님은’ 그러면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3절 ‘예수님을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예수님은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여호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내 아들아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앞에 떠나지 않게 하라.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의 장식이 되리니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 즉 네 잠이 달리로다.” 그 다음 4장 6절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 찌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얼마나 귀합니까? 이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앞날 위에 주님을 사랑하면서 다윗같이 오직 이 한마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