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고구마(Sweet Potato)는 불과 3~40년전, 보리고개,
때만 해도 서민들의 대용식량으로 이용되던 작물이었고, ‘군고구마’ 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좋은 간식꺼리의 하나였다. 한반도 남부 해안지방에 널리 재배되고 있는 고구마는 아열대 작물로 녹말이 주성분이며, 수분64%, 당질 31.7%, 단백질 1.1%로 구성되어 있어, 같은 서류(暑類)작물인 감자와 달리 높은 감미(甘味)를 함유하고 있다. 특히 비타민C와 칼로리가 높다. 그리하여 지금도 가공식품으로 널리 이용되는 작물이다.
또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일반 서민들의 주식 대용으로 널리 재배되어 우리 서민들의 식생활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오늘날에서는 전분, 주정, 사료, 가공용, 엽병채소용(葉柄菜蔬用) 및 생식용 등 여러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고구마는 한반도 남부 해안지방에서 재배하는데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농작물이다. 특히 매마른 땅이나 신개간지 다른 작물 재배에 부적당한 토양에서도 재배가 되며, 수확량이 많고, 특히 풍수해가 심한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도 안전하게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다.
그리고 재배방법도 특별히 어려운 작물이 아니다. 이렇게 ‘고마운’ 작물인 고구마는 한국에 전래된 이래 구황작물로 남부 해안지방에서 주로 재배되어 오다가, 1907년 수원 권업모법장(勸業摸疺場)이 설립된 후 육종사업이 착 수 되어 오늘날에는 여러 품종으로 개량, 재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마가 류큐에서 전래된 것으로 일부 기록된 것도 있으나, 원산지가 멕시코와 남미 지역인 농작물로, 2000년 전부터 남미에서 재배되던 토작물이었다. 이렇게 멕시코와 남미 원산지인 고구마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류큐에 전래되었고, 다시 우리 나라 남부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재배 되었는지 그 전래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고구마는 1763년 10월 통신정사 조엄이 사행 도중 대마도 사스나에서 처음 보고 구황작물로는 좋은 농작물로 생각되어 조선에 전래한 이래로 재배, 가공법이 널리 연구 개발되어 많은 저술이 있다.
실학자 정약용, 박재가의 저술 속에서도 고구마 재배에 관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으며, 구황작물로는 조선 전래 직후부터 조야의 관심을 모았던 작물이다. 특히 꿀과 조청을 재외하면 감미성 식품이 거의 없었던 조선에 있어서 단맛이 나는 고구마는 일반 서민대중에게는 인기 있는 식품이었다.
그리하여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온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재배, 증식, 가공법을 개발하여 서민의 식생활에 크게 기여한바가 있었다. 고구마는 1715년부터 대마도에서 재배되기 시작 했는데, 그러면 1763년 10월 조엄이 처음 종자용으로 몇말을 대마도 비선편 으로 급송하기 전인 1719년에도 조선 통신사가 다여왔고, 1748년에도 조선 통신사가 다여왔다.
두 차례 통신사 행열이 있었고 부산 초량왜관과 대마도간을 왕래하는 세견선이 수 없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구황작물로 유용한 이 작물이 왜 일찍 소개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결국 일반백성의 식생활에 관심과 안목을 가진 목민관의 눈에 띈 것이라 우리는 조엄의 품성과 애민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본고는 멕시코와 남미 원산지인 농작물이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는지 그 과정과 조엄이 부산으로 가지고 온 이후 어떻게 전파되어, 지난 250여 년간 서민들의 식생활에 크게 기여하여 ‘문익점의 목화전래’와 견줄만한 그의 공적인 고구마 조선전래를 살펴 보고자한다.
“동양으로 건너 온 고구마“
멕시코와 남미 원산지인 고구마는 1492년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신항로 탐사를 하던 중 서인도제도에서 처음 보았다.
그의 일행은 스페인으로 귀환할 때 구구마 뿐만 아니라 옥수수. 땅콩. 감자. 고추. 호박. 강낭콩. 딸기. 담배. 해바라기. 당근. 코코아. 사탕수수. 등 다량의 종자를 함께 채취해 와서 스페인에 소개하여 서부 유럽에서 처음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콜럼버스 일행이 가지고 온 남미 원산지 작물 중에서 고구마는 오늘날 다른 작물과 비교하여 극히 일부 남부 유럽지역에서만 재배되고 있고 특히 감자(Potato)와 비교하여 그 가격이 매우 비싼 농작물이 되어 있다.
유럽으로 전파된 이 고구마는 1565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난 이후 스페인 선원들이 자주 출입하면서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왔던 고구마가 자연스럽게 필리핀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아열대 작물이 많은 필리핀에서는 크게 인기작물로 이용되지 못하였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가져 온지 100여 년만인 1594년 필리핀으로 간 명나라 상인 진진용(陳振龍)이 고구마를 보고 중국 남부지방에서 재배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종자를 얻어 복주(福州)지방에서 처음 재배를 하였다. 이 종자는 복주지방에의 토양에 잘 적응하는 작물이었고 재배법도 쉽고 수확량도 좋아 널리 재배하기 시작했다.
중국 복주지방으로 전래 된지 11년만에 다시 류큐로 전파되었는데, 류큐왕국 상령왕(1589~1620년) 때인 1601년 명나라로 간 사신 노쿠니 쇼칸 은 고구마를 보고 식랼사정이 어려운 류큐에서 재배하면 백성들의 식량조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되어 그 종자를 얻어 와 류큐 즉 오키나와 섬에서 처음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고구마가 류큐에서 전래된 것으로 잘못 소개되는 기록이 나오게 된 것이나 류큐왕국에서 직접 전래된 것은 아니다.(고구마는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가지고온지 270여 년후에 우리나라 부산까지 전파되어 온 것이다.)
고구마의 전래자 조엄
고구마를 조선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조엄이다.(조엄. 조선1719~1777년)
그는 1763년 7월 13일 통신사 정사로 발탁되어 사행중 첫 기항지인 대마도 북단 사스나포에서 고구마를 처음보고 구항작물로 서민들의 춘궁기에는 식량 대용으로 좋은 작물이라 생각되어 종자를 얻어 부산포로 가는 대마도 비선편으로 먼저 보냈다. 그리고 사행 중에도 이의 재배법, 보관법, 증식법, 등을 자세히 배워 기록해 두었음은 그의 (해사일기)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1763년 사행단은(통신사규모) 기선 3척과 복선 3척으로 구성되어 있어며, 총원은 477명이었다. 통제영에서 건조한 사행선은 1763년 8월에 부산포에 도착하고 경상좌수영에서 건조한 2척과 합류, 1763년 10월 6일 부산포 영가대를 출항하여 1764년 1월 20일 대판에 도착하였고, 1월 28일 대판성을 출발하여 육로로 2월 26일 막부의 장군이 있는 에도에 도착했다. 국서를 전달한 후 3월 11일 다시 에도를 출발하여 부산포에 도착한 것은 6월 22일이니 국내 행정을 제외하고 총 257일, 약 8개월 반이 소요된 사행길이다.
따라서 해로는 부산포를 출발하여 대판에 도착하기까지 105일이 걸렸으니 왕복 약 210일 정도가 걸린 것이었다. 물론 부산포에서 대마도 북단 사스나포까지만 직항로였고, 나머지는 중간 기항지가 있었으니 실제 운항일수는 편도를 기준으로 105일 중에서 약 1달 정도라, 선상생활만도 왕복 2달이나 해야 하는 공생길이었다. 이 사행은 임난 이후 12차(1607~1811년)에 걸친 대일 통신사행중에서 가장 긴 여정이었다.
정사 조엄이 부산포를 떠나 사스나에 도착한 것은 1763년 10월 6일 신시말 오후 6시경 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처음 고구마를 보고 종자를 얻어 즉시 부산포로 보냈다고 했으니, 고구마 종자가 처음 부산포에 도착한 것은 10월 중순으로 추정된다. 이때 고구마 종자를 싣고 부산포로 온 배는 대마도 비선이었다. 이들 비선은 통신사의 사행 중간보고를 위한 파발역도 수행하고 있었으니 , 통신사 일행의 선단6척이 10월 10일 사스나를 떠나자 즉시 비선을 부산포로 띄웠던 것이다. 조엄이 부산포에서 비선편으로 보낸 10월12일자 가서를 대마도 깅우라에서 받아 본 것이 10월 26일이었으니 이 비선을 통한 연락은 매우 신속했음을 알 수 있다.
조엄이 부산포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포구를 출발한 것이 1763년 10월 6일 오전 6시경 첫 기항지 사스나에 도착한 것이 10월 6일 오후 6시경이다. 그리고 다음 기항지 오오우라(대판)로 떠난 것이 10월 10일이었다.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 파종시기를 놓쳐 한 해를 허비하게 된다. 그가 서둘러 종자 몇 말을 부산진 첨사에게로 급히 보낸 것은 다음 봄에 파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 처음 고구마가 도착은 1763년 10월 중순이 되며, 첫 파종은 다음 해인 1764년 봄이 된다.
조엄이 대마도 사스나포에서 종자용으로 몇 말을 부산진 첨사 이응혁(李 應爀)에게 먼저 보낸 때가 10월(음력) 중순이고, 다음해 봄 파종기까지 귀국할 수 없는 일정이라 절친한 친구 이시보(李時甫)의 아들이자 부산진 첨사로 있는 그에게 대마도 비선편으로 급히 보낸 것이다. 물론 사스나에서 조사한 보관 재배법도 알렸을 것이다. 한편, 부산진 첨사 이응혁은 부친의 친구인 정사 조엄의 부탁을 받고 종자를 받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다음 해 (1764년) 봄 절영도 봉래산 동쪽 해안지대 야산에다가 이 종자를 심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서 고구마를 처음 재배하게 된 시초이다. 조엄이 사행을 마치고 1764년 6월 22일 부산포로 귀환하여 동래부사 송문재에게 2차분 종자를 전달했으나 그가 신병으로 8월 20일 사임하자 이 종자는 다시 신임부사 강필리에게 인계되었다. 그리하여 강필리는 이의 재배법도 인계 받아, 이를 다시 보완하여 타지방까지 보급했던 것이다. 그는 조엄으로부터 전해 받은 보관법, 재배법, 증식법에 2차에 걸쳐 자신이 재배와 증식하면서 터득한 경험을 추가하여 만든 것이 소위[강씨감저보]인데, 현재 원본은 전해오지 않고 후일에 인용된 문헌에서 서명만이 보일 뿐이다.
이렇게 조엄이 부산지방에 처음 고구마를 전파하게된 것은 그가 1757년(영조33년)동래부사, 1758(영조34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바가 있어 부산, 경남 해안지방의 토양이 고구마 재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작물은 우리 나라 남부 도서지방이나 해안지방의 토양에 잘 맞고, 수확량이 좋을뿐만 안이라 야산에도 쉽게 재배가 될 수가 있었다. 또 무엇보다도 장기보관이 가능하고, 건조하여 가루나 과자로 만들면 주식 대용식품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미성이 높아 우리 사람들의 입맛에 잘 맞는 작물이었다.
첫댓글 좋은 정보 잘 봤습니다. 지금 구워먹는 고구마도 선조들의 관심에서 혜택을 입나봅니다. 1764년 첫 파종, 조엄 조상님 감사합니다.
한참 읽었어요~ㅎ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서문님 안녕 하시렵니까? 글 좀 세 네줄 사이로 띄어 놓기를 하시면 참 좋겠습니다. 이 애교매력 할마씨 눈이 가물거려서 원~ ㅎㅎ 서너줄 읽었는디 고구마 까 먹듯이 까 묵어 뿌렸구먼여 ㅋ
애교매력님께서 심한 표현으로 할머니라뇨? (엄살) ㅎㅎㅎ 읽는 이들 모두가 해당 될텐데요? 서문님의 구황작물로의 고구마 좋은 설명 글인데, 쉽게 읽기가 좀 아쉽네요?
서문님은 조상님의 은덕을 잊지않으시고....우리 조상님들...든든하시겠습니다...ㅎ~ 내내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