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 한국전쟁
1. 북한군의 기습 남침과 육군본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불법 기습 남침할 때 나는 대한민국 육군 일등중사로서
서울 용산에 자리한 육군본부 고급 부관실 인사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일은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군인들은 외박나가고 몇몇 사람만이 영내 퀀셋막사에서 단꿈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행진곡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의 긴급뉴스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갈피를 못잡고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며 초조와 긴장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전군 장병의 인사기록 서류는 우선 창고에 임시 보관하고 파기서류를 청사 앞 빈터에 산더미처럼
쌍아놓고 소각하였다. 한편 일부 장교는 독전대를 편성해서 미아리 방면으로 출동하기도 했다.
이때 서무계장 김천선 준위가 전사했다.
27일 오후 후퇴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서울이 3일만에 적에게 유린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곧 복귀하니 진행중이 서류만 지참하라는 지시에 따라 짐을 꾸려가지고 차량에 분승,
시흥에 이르자 맥아더장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이 곧 서울에 진주하니 원대복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전세는 시시각으로 악화되어 28일 새벽 재차 후퇴명령이 하달되었다.
후퇴 차량이 정문을 나서자마자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그 넓은 길이 피난민으로 가득 메워져 진퇴양난이었다.
가까스로 한강다리 입구에 이르렀을 때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하늘을 찌르는 섬광속에서 한강대교는 폭파되어
강물속으로 사라졌다. 한강 일대는 순식간에 피난민과 군인이 뒤엉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갑자기 생사기로의
위기상황에 이르니 너나할것없이 살아남기위해 필사적이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안절부절하고있는데 각자 시흥보병학교에 집결하라는 지시가 전달됐다.
이 역사적인 민족의 비극을 하늘도 슬퍼하듯 가랑비가 내려 잠시동안 다리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이 전우들이
뿔뿔이 흩어져 나홀로 의지할곳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드넓은 백사장 둔치의 한강 기슭을 하염없이 헤맸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미 동은 트고 강남쪽에서는 포탄이 작렬하며 미아리 방면에서는 포성이 요란하였다.
이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한 병사가 용감무쌍하게 헤엄쳐서 강을 건너 노량진 쪽에서
쪽배 하나를 끌고 왔다. 그런데 이를 본 피난민들이 먼저 타려고 밀고 당기고 아우성이었다. 군인이 공포를 쏘아
질서를 바로 잡고 우선적으로 한강을 건너주어 위기일발의 순간에서 벗어났다.
2. 속수무책으로 후퇴만 거듭하다.
육군본부는 안양 방위학교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때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정일권 장군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지휘체계는 무너지고 행정은 마비되어 전황은 오리무중이었다. 얼마나 다급하고 답답했으면 근처에 있는
전투병력이라도 파악해 보려고 인사과 인원으로 병력 파악조를 편성해서 전선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미 지리멸렬,
후퇴만 거듭하고있는 부대를 어떻게 찾아서 파악하란 말인가! 생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꼴이되어 길을 헤매다가
적의 전차에 막혀 죽고, 부상당하고 실종되는 참사를 겪었다. 또한 후퇴 도중 아군의 전투기 오인사격으로 날벼락을
맞기도 하였다.
다음의 집결지는 대전 도청이었다. 여기서는 인사과 잔류 인원으로 전선에서 풍비박산되어 뿔뿔이 흩어져 내려오는
낙오병을 수습하다가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후퇴하였다. 그리고 다시 대구로 되돌아와서 대구여중에 자리잡았다.
3. 대구육군본부시대가 열리다.
최신형 전차를 앞세우고 속전속결을 감행한 북한군은 불과 두달여만에 왜관 다부동 전투(8월9일~9월 14일),
영천전투(9월5일~9월13일), 포항전투(8월11일), 마산전투(8월3일~8월13일)등을 거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제 남은 땅이라곤 대구와 부산뿐이다. 국토의 대부분을 빼앗긴 셈이다.
그 사이 우리는 난파된 배의 신세가 되어 떠돌아 다니기만 했으니 어찌 육군본부가 존재했다고 하리오!
우리나라 존망의 운명이 벼랑 끝에 서있는 절체절명의 절박한 위기에 처한 이 시점에서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전투력 증강을 위해 이제까지 중단된 인사업무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자각한 나머지 민간업체에 가서
책상과 의자를 징발하고 학교 강당 한구석에서 잔류인원 몇 사람이 집무를 시작하였다.
바로 인사과 명령계다. 처음으로 생긴 자생부서다. 야전전화통을 베게 삼고 책상이 침대였다.
제일먼저한 일은 난맥이 드러난 지휘관 임면이었다. 지휘부 메모지를 근거로해서 연대장, 사단장을 발령했다.
장교인사는 육군본부 특별명령(갑)이고 사병은 육군본부 특별명령(을)이다.
결재는 전결권 위임이 없어 장교 사병을 막론하고 참모총장까지 올라가고 장교의 군번을 몰라 군번없는 명령이
발령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전투부대 병력 보충이다. 전력은 병력이 요체(핵심)이다. 전쟁발발 몇일 뒤 과천으로 후퇴한 16연대의
전투병력을 점검한 바 전사, 실종, 낙오등의 손실로 겨우 1개 중대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때 상황으로 보아
다른 부대도 불문가지, 대동소이하다고 보았다. 상황이 이런데 어찌 싸워서 이기기를 바라리오!
유효적절하고 신속한 병력보충이야말로 전투못지 않게 중요하였다. 우후죽순처럼 발족하는 부대창설, 부대 증편,
개편등에 따르는 인사조치, 후방 지원부대 충원등 전투력 증강을 위해 불철주야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낙동강전선에서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반격할 수 있는 전투력 보강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4. 인천상륙작전과 사병 인사관리의 혁신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호응해서 한국군도 낙동간 전선에서
일제히 총반격을 감행하였다. 전쟁 발발 두달여만이다. 그동안 모진 고통속에 하루도 편안한 날 없이 노심초사하며
피를 말렸다. 만일 이때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다면 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 후 군은 일취월장으로 발전하였으며 나는 200명의 인사과 요원을 관리하기 위해 과선임하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업무는 보조병에게 일임하고 배태원 소령이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인사과 역점사업인 사병군사특기 인사관리
시행계획을 적극 보좌하기로 하였다.
이 제도는 종래의 주먹구구식 사병인사 관리를 지양하고 사병 개개인에게 학력, 경력, 자질 등을 고려해서 군사특기
번호를 부여하고 이를 기준삼아 양성과 획득, 소요와 분배등 인적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일대 혁신책이다.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60만 대군을 염두에 둔 백년대계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나는 차트를 둘러메고 어렵사리
경비행기를 타고 속초의 1군단, 제주 신병훈련소, 포항, 군산의 신병교육대등 각 부대를 방문하고 전군 인사장교
소집교육등 최선을 다하였다. 마침내 이 제도는 전군에 보급되고 사병 신청서에 의한 효과적인 인사관리로 이어져
전투력 강화에 크게 아바지 하였다
5. 나는 한눈팔지않고 뚜벅뚜벅 나의 길을 걸었다.
나는 6.25 한국전쟁 3년간 난파된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인사과와 시종일관 운명을 같이하였다. 그 사이 두 번에 걸쳐
서훈도 받았다.
첫번째는 우리나라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을 때 전쟁의 원동력인 인력(장병)을 시의적절하고 신속 정확하게
지원해서 전투력 보강에 기여한 공이 인정되어 전쟁 1주년을 맞이해서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두번째는 60만 대군의 백년대계인 사병군사 특기 인사관리제도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전군에 보급해서 적재적소의
인사관리로 전투력 강화에 이바지한 공이 인정되어 전쟁 2주년을 맞이해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우리 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아 잃었던 국토를 회복하고 이제 부국강병의 꿈을 안고 60만 대군의
첨병으로 발돋움할때였다. 이에 발맞추어 나는 갑종장교 후보생으로 광주 보병학교에 입교해서 휴전 4일후인
1953년 8월 1일 대한민국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 대한민국 창군이래 최초로 부관장교로 임관(갑종50기)-
격랑의 세월속에서 기적같이 살아온 세상!
전쟁 3년동안 아낌없는 지도와 편달을 해준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인사과 장병여러분의 후의에 감사의 말씀을드립니다.
2013년 8월 1일
휴전60주년과 임관60주년을 맞이해서
노병 松山 조덕선 씀
추신: 현재 생존중인 부관병과 장병중에서 6.25 한국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시종일관 육군본부 고급부관실과
운명을 같이한 사람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 이외는 없는것 같다.
내 나이 86세(1928년생),
더 늦기전에 전쟁중 일화를 요약해서 유비무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이 글을 쓰며 나와 관련이 없는 업무나 인명 일체를 배재했음을 이해바란다.
(사병: 육군특무상사 1702522 조덕선(7연대) 장교: 육국중령 128032 조덕선(갑종50기))
첫댓글 <- 조덕선 원로 대선배님!!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아주 늦은 시간에 이글을 주시니`` 건강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6,25남침 직후 암울하고 긴박했던 전황속에서 직접 체험하신 사항
감명깊게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병과 의 초석이시며 원로이신 松山仁兄의 전공기와 병과역사에 대하여
감명깊게 읽어보았습니다.
다시한번 그공을 높이 찬양하며 병과후배들에게 넓이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충성! 존경하는 조덕선님
기적같이 살아오신 격랑의 세월
마음속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번 들어도 감회가 새로운 6.25전쟁의 참상 초 인간적인 노력에 고개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멋지게 편집과 사진까지 올려 주신 성의에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