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수행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자는 것이다...2013.6 선교율대법회
<법문>
*
이 무더운 날 부처님 도량에 와서 우리가 무엇을 하자고 하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마음의 바라는 바 소망이 있을 것이고 꼭 성취하고 싶은 기도가 있을 것이다.
*
만고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단 한가지다.
우리들이 본래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한껏 드높이자고 것이다.
우리가 본래로 가지고 있는 지극히 고귀한 가치다. 우리는 이런 저런 사연에 의해서 그것을 망각하고 살아왔다.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숭고한 가치를 인식하고 확연히 육안으로 사물을 보듯이 깨달아서 우리의 가치를 마음껏 누리면서 살자고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다.
*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6년 고행을 거치고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이해다. 그 가치를 부처님은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것이다.
법화경이 그러한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
*
제9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학인과 무학인에게 수기를 주는 품이다.
수기라고 하는 것은 본래로 ‘당신의 진정한 가치는 나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라고 부처님이 보증하는 내용이다.
학인은 기도나 참선이나 절이나, 정진 등 수행과 공부를 통해서 불교를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알고 이해하고 싶다고 마음을 낸 사람이다. 촛불이라도 하나 더 켜고 향이라도 하나 더 켜서 부처님께 빌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다 학인이다.
무학은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하는 사람과, 또 이미 공부를 열심히 다해서 이제 배울 것은 어지간히 다 배웠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가운데도 초하루 기도차 왔으니 마지 못해서 여기 앉아서 법문을 듣지 뭐 더 들을 것 있겠나, ‘늘 그 소리가 그 소리고 특히 무비스님 하는 소리는 언제나 인불사상인데’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조심해야 한다. ‘나는 많이 배웠다, 다 배웠다, 학위도 여러 개다, 세상에 있는 지위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이런 착각이 그 사람을 불학무식한 사람인 무학인이 되어버리게 한다.
학인이든 무학인이든 부처님이 이들에게 ‘모두가 공히 그대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님일새’ 라고 보증을 내리는 내용이 오늘 공부할 수학무학인기품이다.
*
우리가 불교를 대했을 때 가장 값진 수행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말씀을 직접 읽는 독송이고 그것을 좀더 깊게 우리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글자를 써보는 서사다.
독송하고 서사하고 나름대로 해석해 보고 여러 사람에게 이해하도록 권하는 것들이 불교수행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수행이다.
그런데 절에 와도 전부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불교를 싸가지고 와서 법사가 뭐라고 하든지 주지스님이 뭐라고 하든지 교양대학에서 불교대학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불교만 하루종일 실컷 하다가 내려 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불교라면 굳이 봉은사까지 들고와서 할 필요가 없다. 길거리에서 해도 되고 자기 집에서 해도 된다.
이왕 여기에 왔다면 자기 불교는 좀 내려놓고 도대체 여기서는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 부처님의 진정한 마음이 무엇인가 이러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서 25년이라는 세월을 부처님 시봉을 했다. 제일 오랫동안 부처님 시자 노릇을 하였고, 라후라는 부처님의 친자식이다.
부처님과 이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 혈족으로는 라후라고 세상에서 그 인연을 함께 오래한 사람이 또한 아난 존자다. 경전에도 아난과 라후라는 모든 세간의 천신, 사람, 아수라들이 선지식으로 본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여성 출가를 반대하셨을 때 부처님의 이모가 아난에게 부탁하여 부처님을 설득하여서 여성 출가를 허락받은 사람도 아난이다.
그런데 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여기 이렇게 뒤켠에 나와있다.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종일 해도 부족하지만 아난존자는 공덕이 많은 사람이다.
경전을 결집해서 팔만대장경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하게 한 큰 공덕이 아난존자에게 있다.
부처님의 교설은 누가 설했든지 간에 무조건 부처님이 설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누가 편집을 했든지 간에, 지금 2013년 오늘에 와서 우리가 편집을 해도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경전을 편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불교 안에서 절대적인 원칙이다. 대승경전이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5백년 6백년 경에 결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고 아난존자가 편집한 것으로 우리가 믿고 경전을 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경전이 바로 우리가 지금 말하는 팔만대장경이고 화엄경이고 법화경이고 금강경이다.
그러한 공로를 아난존자가 갖고 있다.
이제 이 분들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마음도 가다듬을겸 다 같이 한단락을 읽겠다.
1. 아난과 라후라의 소원
1 이 때에 아난과 라후라가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도 가령 수기를 받는다면 유쾌하지 않겠는가.’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 머리를 숙여 발 밑에 예배하고 함께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이 일에 또한 그 몫이 있을까 합니다. 오직 여래만이 저희들이 귀의할 곳입니다. 또 저희들은 모든 세간의 천신, 사람, 아수라들이 선지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난은 항상 시자가 되어 법장을 수호하여 지니었고, 라후라는 부처님의 아들입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수기를 주신다면 저희들의 소원이 원만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소망도 또한 만족할 것입니다.”
앞에서 유수한 제자들이 수기를 받았고 심지어 오백명 까지 모두 수기를 받은 끝인데 아난존자와 라후라가 수기를 받지 못한 입장이다.
아난존자와 라후라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본래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마는 우정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미련한 우리들에게 아무리 못나고 탐진치 삼독이 들끓고 팔만 사천 번뇌가 죽 끓듯이 한다고 해도 인간의 고유한 본성은 그대로 부처님의 본성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내 생명이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천번 만번 귀에 못이 막히게 들어도 쉽게 납득이 되고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그러니까 이런 형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천 번 만 번 주지시켜주는 것이다.
*
불교 수행은 반복에 있다.
한 번만 불러도 관세음보살은 다 알아듣는다.
그런데도 천번 만번 관세음보살 부르고 지장보살 부르는 것은 반복을 함으로써 그것이 우리 마음에 젖어들고 아뢰야식 인 8식 속에 깊이 젖어들게 하기 위해서다. 반복이 수행이다.
앞에서 500명이라고 하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기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명한 아난존자와 라후라가 아직도 수기를 못받고 이렇게 수기를 구걸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봉은사 법회를 시작하는 첫시간부터 저역시 ‘당신은 부처님’‘사람이 부처님이다’ 하는 인불사상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 해왔다. 봉은사 로고에도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긴가 민가 싶고, 그냥 써놓은 글인가 보다 하는 것이지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도 안해봤을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안타까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 이러한 연극을 하는 것이다.
아난존자와 라후라를 등장시켜서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하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주 단순하지만 이것이 가슴에 와닿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2 그때 배우는 이와 다 배운 이들인 성문제자 이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드러내어 진실을 표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일심으로 합장하였습니다. 세존을 우러러 보면서 자신들도 아난과 라후라의 소원과 같다고 하고 한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앞에는 5백명이 수기를 받았으니 여기는 2천명이 등장해서 수기를 받는다. 강도가 점차 세진다. 이 이천명이 똑같은 이름으로 수기를 받는다.
왜 이런 형식을 자꾸 취하는가. 중생들의 근성을 보면 이렇게 반복해서 중언부언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처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복해서 중언부언해도 그야말로 간에 기별이 갈까 말까다.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무수히 되뇌어도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오늘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무더운 날 우리가 부처님 도량에 와서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이 본래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를 한껏 끌어올려서 개개인이 진정한 인간가치를 누리자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것이 빤하다. 이모양 이꼴로 살다가 말아야 하는가. 아니면 이보다 더 좀더 다른 가치에 대해 고심하고 눈을 떠야하는가.
따지고 보면 바깥 경계는 크게 문제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법화경이라고 하는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좀더 끌어올리고 나 스스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바깥 경계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만약에 그게 가능하면 얼마나 신기한 일이고 횡재인가.
이러한 시간을 통해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 보다 가치있는 존재구나’‘내가 굉장한 존재구나’ 하는 느낌을 진정으로 받는다면 참 큰 수확이다.
2. 아난은 산해혜 여래가 되리라.
3 이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오는 세상에 마땅히 설불하여 이름을 산해혜자재통왕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라 하리라. 마땅히 육십이 억 부처님께 공양하고 법장(法藏)을 수호하여 지닌 후에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게 하리라. 나라의 이름은 상립승번이니 그 국토가 청정하여 유리로 땅이 되어 있으리라. 겁의 이름은 묘음변만이요, 그 부처님의 수명은 한량없는 천만 억 아승지겁이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천만 억 무량 아승지겁 동안 산수로 계산하여도 다 알지 못할 것이니라. 정법(正法)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은 수명의 곱절이요, 상법(像法)은 정법의 곱절이 되느니라.
아난아, 이 산해혜자재통왕불은 시방의 한량없는 천만 억 항하사 부처님 여래들이 함께 찬탄하며 공덕을 칭찬하느니라.“
법화경에서 수행은 참선도 아니고 염불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며 경을 보는 것도 아니다.
법화경에서의 수행은 바로 이것이다.
아난존자가 부처가 되는데 조건이 62억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다. 지금 지구상 인구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70억 정도가 되는데 이미 경전에 62억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되어있다.
여러분들이 평생 만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경기장에 가서 수많은 관중을 한꺼번에 보는 것 말고 나하고 이런 저런 인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라고 치면, 활동이 왕성한 사람은 2, 3만 명도 만날 수 있겠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2, 3천명 만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62억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아난의 수행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것이다.
이것이 법화경의 수행이고 이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다.
참선만 해도 ‘나는 중생이고 깨달아야 부처가 된다’는 사고를 갖지만 법화경의 수행은 이미 모두가 부처님이다라고 믿는 것이다. ‘나도 부처님 그대도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대를 내가 부처님으로 받들어섬기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음식이나 옷을 들고 가서 봉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대로 물론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확실하게 내 자신이 부처님이고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의식을 확실하게 갖고서 누구든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을 부처님으로 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차를 몰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끼어들면 ‘예, 부처님 잘 가십시오. 바쁘시면 먼저 가십시오’ 하고 혼자라도 되뇌이고 혼자라도 생각하는 것이다.
돈 한푼 안들고 노력도 하나도 들지 않는다.
그러면 그 부처님은 아주 고맙다고 깜빡이 넣고 지나간다.그걸 보면 내 기분이 좋다.
얼마나 근사한가. 우리 불자라도 제발 좀 그렇게 살아야 된다. 본래가 부처다. 이미 우리는 완전한 부처라고 하는 자신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물론 잠깐 성질도 내고 신경질도 내고 욕도 하고 무시도 하는 순간이 있다. 이것은 뻔히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한순간 깜빡 하는 것을 절에서는 매하다고 하고, 어떤 문제가 생겨서 한번씩 잠깐 내가 매했다고 하면 봐주게 되어 있다.
우리 모두가 잠깐은 매할 수 있지만 밝은 시간이 더 많이 지속이 되면 늘 깨어있는 삶이 된다.
‘당신도 부처님 나도 부처님’‘우리 모두 부처님으로 살고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며 삽시다’ 이런 의식을 끊임없이 훈련하고 반복한다면 늘 깨어있는 삶이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사고를 우리가 제대로 마음속에 새기고 확신을 갖고 살아간다면 특별히 다른 수행이 필요없다.
이러한 생각하에서 서로가 존중하고 받들고 공양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삶이 되기 때문에 만인이 다 평등하고 평화로운 삶이 된다.
(3) 8천 보살이 의심하다.
이 때에 법회 중에 있던 새로 발심한 8천 보살들이 다 같이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대보살들도 이러한 수기를 받는다는 것을 오히려 듣지 못하였는데, 무슨 인연으로 모든 성문들이 이렇게 훌륭한 수기를 받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성문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보살들이라고 하는데 새로 발심한 보살들이 ‘우리도 아직도 수기를 받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성문들이 이렇게 훌륭한 수기를 받는가; 하는 내용이다. 필요없는 내용인데도 반복적으로 이야기 한다.
관세음보살 정근기도를 한 시간 하면 만 번 이만 번 삼만 번 부를 때마다 전혀 느낌이 다르다.
절을 해도 108배를 하든 1000배를 하든 똑같은 동작을 하지만 할 때마다 감정과 느낌이 다르다.
여기도 역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느낌이 다르다. 그러한 것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6.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보살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선남자들이여, 내가 아난과 함께 공왕불(空王佛)이 계신 데서 동시에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었느니라. 아난은 항상 많이 듣기를 좋아하였고, 나는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였느니라. 그래서 나는 이미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었고, 아난은 나의 법장을 수호해 지니느니라. 장차 오는 세상의 여러 부처님의 법장도 수호하면서 많은 보살들을 교화하여 성취케 하리라. 그의 본래의 서원이 그러하므로 이러한 수기를 받게 되었느니라.”
여기에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옛날 공왕불이라고 하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 때 석가모니하고 아난존자와 같이 발심출가 했다는 이야기다. 둘이 같이 발심출가했는데 아난 존자는 법문 듣기를 좋아하고 듣고 일어나면 그뿐인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듣고 나서 모든 사람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섬겼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밥먹을 때 어디가서 신을 찾아 신을 때 길거리에 나갔을 때 어디 갔을 때사람들 볼 때마다 ‘아 부처님 부처님’하고 속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진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진은 참선도 아니고 염불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난존자는 법당에서 당신이 부처님 듣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니까 전생에 똑같은 공왕부처님 앞에서 같이 발심했는데 한사람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어 있고 한사람은 시자가 되었다.
이것을 제대로 해석 못해서 아난존자는 경만 세세생생 공부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참선만 공부했다고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법화경에는 참선이라는 이야기가 없다.
법화경의 수행은 오로지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것이다.그러한 수행은 바로 옆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참선한다고 묵묵히 앉아만 있다면 아무에게도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편안할 뿐이다.
우리 수행의 방법에는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가 있다.
듣고 나서 사유하고 그것을 직접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지금 공부하는 것을 여기에 비춰본다면 누구를 볼 때라도 ‘누구든 부처라고 했는데 저걸 부처라고 봐야 하는가 원수라고 봐야 하는가’이런 갈등, 이런 고민도 해보는 것이다. 원수 같은 사람은 사회나 직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도 있다. 그런데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본래 부처라고 하는 소리를 안들었으면 갈등이 없겠고 고민이 없겠는데 들은 것은 있어서 갈등도 있고 고민도 심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고민할 줄 아는 것이 근사한 것이다.
이런 고민이야말로 바로 수행이다.
마음이 편안하고 좋을 때는 부처님으로 취급했다가 기분나쁘면 원수로 한 번씩 취급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사람이 사는 것이다.
그러다가 내 기분이 편안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항상 밝은 상태가 지속되면 그 사람을 늘 부처님으로 받들어섬길 수가 있다. 이것이 법화경의 수행법이다.
3. 라후라는 도칠보화 여래가 되리라
8 그때 부처님께서 라후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오는 세상에 부처님이 되어 이름을 도칠보화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라 하리라. 마땅히 열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부처님 여래께 공양하면서 항상 여러 부처님의 장자가 되리니, 지금과 같으리라.
이 도칠보화 부처님의 국토의 장엄과 수명의 겁 수와 교화하는 제자와 정법과 상법은 산해혜자재통왕 여래와 같아서 다르지 않으리라. 또 그 부처님의 장자가 될 것이며 그런 뒤에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리라.”
여기는 아까는 62억 부처님을 섬긴다고 했는데 여기는 지구 열 개를 부셔서 나온 그 먼지 숫자와 같이 많고 많은 부처님 여래께 공양하면서 항상 여러 부처님의 장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분들을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모든 생명 모든 사람 유정 무정 유형 무형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도 부족하다. 흙덩어리 돌덩어리 서 있는 무심한 나무까지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도 이 숫자를 어떻게 따라가겠는가.
이러한 가르침 속에는 만유개불 사상이 담겨 있다.
만유가 부처님이다라고 한 번 우리가 통 큰 생각을 해본다면 인격이 달라지고 큰 복을 받는다.
마음 한 번 잘 쓰는 것으로 큰 복을 받을 수 있다.
라후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장자인데 세세생생 부처님 아들로 태어난다니 얼마나 큰 복인가. 물론 복인지 죄인지 알 수 없지만 경에는 이렇게 해놓았다. 또 아난존자가 부처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장자가 될 것이라고 까지 되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아들로서의 의미를 좀더 확대해서 우리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라후라만 계속 부처님 아들이 되고 우리는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또 한 술 더 뜨면 왜 아들이 되는가, 바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아난존자도 부처라고 하는 보증을 받고 라후라도 부처라고 하는 보증을 받는다.
또 이 대목은 2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라후라는 우리들에게 영원히 부처님의 아들로 기억되듯이 앞으로 무수한 세월이 흘러도 역시 똑같을 것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오늘의 결론이고 제일 중요한 대목이 나오는데 다같이 읽겠다.
4. 이천 명의 아라한은 보상여래가 되리라
10 이때 세존께서 배우는 이들과 다 배운 이들 이천 명의 사람들이 생각이 유연하고 고요하고 청정하여 일심으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이 배우는 이들과 다 배운 이들 이천 명의 사람들을 보는가?”
“그렇습니다. 봅니다.”
“아난아, 이 사람들이 오십 세계의 티끌 수 부처님 여래에게 공양하며 공경 존중하고 법장을 수호하다가, 끝에 가서 시방세계에서 한꺼번에 성불하리라.
이름은 모두 같아서 보상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라 하리라. 수명은 일겁이요, 국토의 장엄과 성문과 보살과 정법과 상법도 모두 같으리라.”
내가 계속 엉터리 수기 싸구려 수기라고 하는데 앞서 오백명이 싸구려 수기를 받았고 여기는 이천 명이 보상여래가 되리라는 엉터리 수기를 받는다.
이런데서 우리가 깨달아야 된다.
이천명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면 무슨 작명가노릇을 하겠는가.그러나 이 말 속에는 무서운 비밀이 담겨 있다. 그 무서운 비밀이란 그토록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또 역시 내가 마지막으로 할 말은 ‘당신도 부처님이다’‘변함없는 부처님이다’‘틀림없는 부처님이다’‘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은 부처님이다’‘목에 칼을 들이대도 역시 당신은 부처님이다’하는 바로 이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식을 시키고 우리들 가슴에 심어주려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경전에서 이렇게 까지 나왔을 때는 우리 역시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은 만사 제쳐놓고 이 문제를 한 번 고민해 봐야 된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를 내렸는가.
두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부처다라고 하는 사실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람이 부처 아닐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그냥 그대로 지금 그대로 온갖 탐진치 삼독과, 사람 보기만 하면 어떻게 하면 사기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익볼까 내가 유리하게 할까 내가 많이 가질가 이런 못된 생각만 잔뜩 품고 있다고 해도 그래도 그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다.이것을 알아야 된다.
(박수)
그런 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 그 능력, 그 능력의 근원자리 마음을 쓸 수 있는 그 능력 그 자체가 바로 부처의 능력이다.
사기 치는 일은 나쁜일임에는 틀림없어지만 사기칠 줄 아는 능력은 선행을 하는 능력하고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지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인 근본을 보는 것이다.
세상에 제일손가락질 받는 나쁜 놈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가족들, 자기 자식들에게는 천하에 둘 도 없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세상에서 손락질 받는 나쁜놈이 집안에 가서는 선량한 가장이고 훌륭한 아버지다.
우리는 모두 그런 능력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다
부처님은 이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여러번 누차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저역시 천번 만번 법문을 해도 이 법화경을 앞에 놓고는 결국은 인불사상,사람이 그대로 부처다 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수행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을 행복하게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자. 이것만이 진정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열쇠다. 평화의 열쇠는 바로 이 점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유언처럼 설하신 법화경의 메시지이기도 하고 법화경의 종지이기도 하다.
저역시 법화경에서 그러한 것을 봤기에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의 가치를 한껏 드높여서 모두 가치있는 존재, 부처라고 하는 인격에까지 끌어올리자고 하는 뜻을 전하는 바이다.
너무 이른 깊은 더위가 한창인 6월 여름날, 음력 5월 초하루 법회가 열리는 봉은사 큰절은 종루에 까지 기도하는 사람으로 가득찼지요.
마당에는 차일을 치고 오밀조밀한 인형들로 사찰부엌을 재현하고 음식을 만드는 체험 프로그램이 오후에 있을 예정이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숨겨놓은 보물 찾기를 하느라 경내를 뛰어다닙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누군가 수레를 끌고 와서 목책에 무엇을 붙이는가 싶었는데 그곳이 바로 보물이 있던 자리였나봐요.
알았다면 애타게 묻는 어린이에게 한 번 슬쩍 일러주는 건데 그랬어요.
법회중에 간간이 바람이 불고 마당에 걸린 백등이 흩날렸어요. 활짝 활짝 열어놓은 법당에 쩌렁쩌렁 울리는 법문 소리, 다같이 읽는 경전의 리듬이 마냥 좋았습니다.
절이 있어서, 이렇게 잊고 있다가도 가슴을 치며 “네가 부처님이다. 기억하라, 새겨라” 하는 이야기 들을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열 개의 세계를 부숴 만든 먼지수만큼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여 여래가 될 라후라의 이야기가 나오네요.
그가 세세생생 부처의 아들이듯이 우리 역시 마음에 부처를 품고 있다는 변하지 않는 진실을 봉은사에서 들었습니다.
그날 햇빛만큼 오늘 비가 내리고 있네요.
어떤 보물을 찾아올까요.^^
|
첫댓글 _()()()_
_()()()_
_()()()_
_()()()_
_()()()_
_()()()_
_()()()_
_()()()_
_()()()_
_()()()_
_()()()_
_()()()_
_()()()_
_()()()_
_()()()_
고맙습니다. _()()()_
_()()()_
_()()()_
_()()()_
_()()()_
_()()()_
_()()()_
_()()()_
_()()()_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