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무 임이조를 그리며
전통을 계승하고 대중화에도 힘쓴 이 시대의 진정한 예인
한국 전통춤의 명무(名舞) 임이조(林珥調) 선생이 세상을 떠나간 지 만 10년이 되었다. 그의 본명은 임규흥이다. 그는 1950년생으로 2013년 11월 30일 세상을 떠났으니 63세의 나이로 참 아까운 나이이다. 올해가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만10년이 된다. 당시 그는 쉴 틈 없이 이어진 국내외 공연으로 피로감이 누적되었던데다 급성 폐렴에 걸려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한국 춤의 명무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춤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한국 춤을 배운 후 최승희(崔承喜·1911~1967)의 스승이었던 이시이 바쿠(石井漠)로부터 현대무용을 사사하고 한국무용을 현대화한 작품 발표회를 여러 번 가졌던 무용가였다. 아버님도 연세대 영문과 출신으로서 성악에도 일가견이 있어 테너 가수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부모 양쪽으로부터 예술인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임이조가 무용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어머니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여섯 살 때 무용가 송범(宋范·1926~2007) 선생에게 그를 맡겨 발레를 배우게 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 춤에 입문을 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의 스승이자 대전의 권번 출신 예인인 오춘광(吳春光)으로부터 승무를 사사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 되었다. 그 후 1968년 겨울 상경해 1950~1960년대에 국립무용단의 인기 남성 무용수였던 은방초 선생을 사사하고 평생 수양어머니로 모셨던 명무 김옥진(1909~1970) 선생의 사사를 거쳐 김옥진 선생과 절친하였고 수양 이모로 섬겼던 만정 김소희(1917~1995) 선생의 소개로 열아홉의 나이에 평생 스승이 된 명무 우봉(宇峰) 이매방(1927~2015) 선생 문하에 들며 평생의 스승을 만났다.
어머니를 좇아 전통을 계승
임이조는 1981년 ‘전주대사습대회’ 무용부 장원을 수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1988년 ‘진주개천예술제’ 무용 부문 대통령상을 받은 후 명무의 반열에 올랐다. 평소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으나 1999년에 남원시립 국악연수원 예술 총감독을 거쳐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시립무용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우리 춤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대한민국 화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예능 보유자였던 이매방 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사이자,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이다.
그의 스승 이매방 선생은 “제자 임이조는 분명 노력하는 춤꾼이다. 그는 춤에 대한 나의 철학을 이해하고 있지만 사제 간의 제자 된 도리로서 무조건 스승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우리 춤의 원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춤꾼의 양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본다.”라고 그를 평가하여 제자 임이조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춤을 대중화한 다양한 시도
임이조는 전통춤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춤의 대중화를 위해 앞장선 춤꾼이었다. “전통무용도 대중과 같이 호흡해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임이조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만의 고유한 서정과 신명을 담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변화를 모색하였던 이 시대의 진정한 예인(藝人)이었다. 전통적인 한량무(閑良舞)는 한량·각시·주모·스님, 네 명이 등장하는 군무(群舞)이지만, 임이조는 한량무를 독무로 재창작하여 ‘임이조류 한량무’를 만들어냈다. 이외에도 1985년에는 ‘선’ 무용단을 창단하고 전통 창작무로 ‘교방살풀이춤’, ‘화선무’, ‘하늘과 땅(무당춤)’, ‘태평성대’, ‘하늘맞이’, ‘무혼’, ‘월인천강’ 등 다양한 창작 작품을 안무해 국내외 무대에서 자신의 작품을 열정적으로 선보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인은 전통춤에 현대무용을 접목해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이 대단하였다. 서울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재임 시 클래식발레의 대명사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를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전통춤으로 재해석한 창작무용극은 크게 호평받았다. 이 작품은 2011년 중국 상하이 국제아트페스티벌(CSIAF) 정식 공연에 초청받아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갈채와 환호를 받은 바 있다.
그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체질이었다. 그가 하는 공연의 포스터, 리플렛, 팜플렛 하나라도 최고를 추구하였다. 의상이나 소품 또한 정성을 다하였다. 그가 서울시립무용단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단원들이 지역으로 ‘찾아가는 공연’의 공연환경에 대해 불평을 하는 것에 대해 ‘무대가 좋네, 나쁘네, 이런 얘기 하지 마라. 내가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기도하는 마음으로 춤을 추면 관객들이 좋은 무대, 귀한 무대로 인정한다’라고 단원들을 토닥였다.
제자 사랑이 넘친 스승
내가 임이조 선생을 처음 만났던 것은 1978년이다. 당시 나는 <공간 그룹>이 펴낸 월간지 <월간 공간 > 편집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었다. 우리 <공간 그룹> 지하에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이 있었는데 그가 민속악단 <민속악회 시나위>의 반주에 맞혀 살풀이춤을 멋들어지게 추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둘은 20대에 만나 그가 세상을 떠나던 2013년까지 끈끈하게 인연을 이어갔던 것 같다.
내가 <월간 공간>을 떠나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를 우리 학교 실기 강사로 초빙하여 그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임이조 선생은 학생들을 따뜻하고 자상하게 가르쳐서 많은 학생이 그를 따랐다. 특히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레슨비를 받지 않고 열심히 지도해주셨던 것이 기억난다. 장시 내가 무용과 담임을 맡고 있었던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운 학생이 있어 임이조 선생에게 레슨비를 받지 않고 가르쳐줄 수 없냐고 망설임 끝에 부탁을 드렸는데 그는 선뜻 나의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때 그 학생은 지금은 성공한 무용가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늘 편하고 따뜻하게 대해준다. 임이조 선생과 오누이처럼 지냈던 우리 전통춤 계의 명무로 활동 중인 진유림 선생은 “그와 만났던 사람들은 그와 만나 대화하고 돌아설 때 상당한 마음의 위로를 받고 힘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와 나는 연배가 서로 비슷하여 가끔 술자리도 함께하며 서로의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그는 대중가요도 곧잘 불렀는데 가수 장현의 히트곡 ‘미련’을 즐겨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예술학교를 그만두고 나와 공연예술계에 몸담고 있을 때도 그와 자주 만났는데 판소리의 안숙선, 경기민요의 김영임, 서도소리의 유지숙, 전통춤의 임이조, 전통음악의 이생강 등 전통공연예술계의 거목들이 어린 나이부터 가무악의 기반이 튼튼하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예인들을 교육하는 ‘재인학교’를 만들어보자는데 의기투합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 커다란 동력을 잃고 말았다. 두고두고 아쉬움이 크다. 아직도 나는 그 꿈은 버리지 않고 있다.
내가 노원문화예술회관 관장으로 있을 때 노원문화예술회관의 전통예술 브랜드 공연인 춘하추동 명인 명창에 그를 초청하여 기획공연을 한 것이 그를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된 공연이 될 줄은 당시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올해 10월 1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제자들 주관으로 <임이조 10주기 추모 공연>이 있다고 한다. 춤꾼 임이조! 그가 좀 더 살았다면 우리 춤 계의 지평은 더욱 기름지고 넓어졌을 것이다.
2023년 9월호 월간객석 김승국의 한국문화에술계 보살피기 8 기고 칼럼 전문
#임이조 #명무 #전통춤 #창작춤 #대중화 #세계화 #서울시립무용단장 #이매방 #승무 #살풀이 #한량무 #문화훈장 #백조의호수 #공간사랑 #인연 #재인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