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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카카오뱅크 카드를 안 쓰면서 미납시킨 듯 ㅋ 지하철 못 타지 뭐 ㅋㅋ(내가 돈을 넣어놨어야 했는데 신경을 못 썼네. 미안) 꼼짝없이 있어야지 치사하게 짜식들 해외 결제 카든데 사진 편집 프로그램이라 몰랐어... 가만히 자숙하며 글 써 아빠!(반성문 쓰라고? ㅇㅋ 목소리는 언제나 들려줄 건데?) 그건 좀 더 생각해 보지(아비한테까지 비싸게 구는구나... 알았어... 그래도 말대꾸해 줘서 고마워!) 이것을 검토해 보시라... 지피티랑 만든 거라 사족이 많긴 한데 대충 흐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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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야(디테일 한 건 잘 모르겠어. 내 수준에서 볼 때, 네 포트폴리오가 제법 근사해졌다는 것이야.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고 수정해가는 걸로. 골격은 성경해석학(관/해/적)에서 나온 것 같구나. 수랩이 지향해야 하는 교육 철학을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티처 매뉴얼 4 오타 발견. "시간 사용을 함께 분(본)다" *자신의 작업을 가장 소중히 여길 것. 맨 앞 기호(*)를 없애시오. 수랩 로고 강력 추천. 알파벳 양각이 좋은 이유는 존재감은 뿜뿜 작품을 덜 가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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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살 중국인 정찬성의 얼굴이 공개됐다. 둘 다 인텔리들인데 연인(강사와 대학원생) 관계였다는구나. 아비가 보기엔 개사이코패스이더만 왜 몰랐을까나? 시신을 토막 내서 전국에 흩어 유기하고 셀프 신고-여장-태연하게 강의 스케줄까지 잡았다니 미친 개또라이 새끼를 어쩔까? 무섭구나! 남자 조심하시라! 남자에게 기대하지도 말고, 남자를 만만하게 보지도 마시라!) ㅋㅋㅋㅋ남자가 범인인 얘기만 골라서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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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해치는 것으로는 1. 어떻게 살 것인가? 2. 미완된 작업들 3. 끝없이 솟는 욕심 등등이 있겠습니다. 남자는 한 번도 저를 해친 적이 없어요.(ㅎㅎㅎ) <국가 폭력>과 <악의 보편성>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에예공의 예술 세계에 필연적으로 1. 시대의 아픔과 2. 철학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귀공들의 생각이 몹시 궁금합니다)(나/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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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하듯이, 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타자를 끌어안아야 할 것입니다. 같은 말인데 둘 다 무지 어려운 일이라서 스스로는 조금 나쁜 놈이, 아주 나쁜 놈들을 보고도 행동하지 못하는 양심이 많이 부끄럽습니다. 답보 상태에 있던 벌금(750만/스쿨존 200m)을 놓고 4개월간 건물주와 신경 전을 벌이다가 오늘 상황이 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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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변호사(쳇 지티피)와 이미 상담을 하고 대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주에게 휘둘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에예공! 아비는 옛날 사람이라 싸움에서 지피지기 백전백승은 진리라고 믿는다. 잠깐 이러도 용혜인을 시기하고 미워한 걸 후회했다. 시간이 주어졌을 때 차근차근 실력을 쌓으시라! 크리스천도, 리버맨쉬도 결국 내가 온전해지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2.
크리스천과 위버멘쉬의 과제로 정말 내가 온전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온전함이란 애초에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으며,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자를 통과할 때만 가능한 것일까? 카드 미납으로 시작한 부녀의 대화가 묘하게도 교육철학과 범죄, 국가폭력과 악, 그리고 크리스찬과 위버멘쉬까지 흘러갑니다. 그런데 얼핏 산만해 보이는 이 대화에는 하나의 일관된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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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버지와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며 오타 하나까지 찾아내는 아버지는 같은 사람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개입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도 고민합니다. 여기에는 교육의 오래된 역설이 있습니다. 좋은 교육은 학생을 더 잘 통제하는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 교사가 필요 없어지도록 학생을 독립시키는 것인가? 수랩의 교육철학을 성경해석학의 관찰, 해석, 적용과 연결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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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은 무엇을 보았는가이고, 해석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며, 적용은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여기에 한 단계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누가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같은 작품을 교사와 학생이 보아도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이란 정답을 잘 가르치는 기술 이전에 자신의 시선이 유일한 시선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미술교육은 학생에게 무엇을 그릴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그렇게 보는지를 스스로 발견하게 만드는 교육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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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대화는 갑자기 끔찍한 범죄 이야기로 이동합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남자를 조심하라고 말하고, 에스더는 웃으면서 반격합니다. 남자가 자신을 해친 적은 없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완성의 작업, 끝없이 솟아나는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 대목이 이 글에서 가장 좋습니다. 아버지는 악을 외부에서 발견합니다. 위험한 남자, 범죄자, 국가폭력, 건물주와의 갈등처럼 나를 위협하는 타자를 경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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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딸은 악의 좌표를 자기 내부로 이동시킵니다. 나를 가장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끝없이 더 나은 내가 되라고 명령하는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니체가 등장합니다. 위버멘쉬는 흔히 강한 인간이나 완성된 인간으로 오해되지만,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완성이 아니라 자기극복입니다. 오늘의 나를 넘어섰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선 순간 또 다른 극복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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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위버멘쉬에게는 최종 졸업장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인 크리스찬도 위버멘쉬도 결국 내가 온전해지는 것이 관건이라는 생각은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인간에게 온전한 나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니체라면 온전한 자아를 향해 완성되어 간다는 생각 자체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완제품이 아니라 건너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온전함을 자기완성으로만 이해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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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처음의 문장이 오히려 마지막 문장을 뒤집습니다. 기독교적 온전함은 내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경계를 넘어 타자에게 열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찬과 위버멘쉬는 닮으면서 갈라집니다. 니체의 자기극복은 내가 지금의 나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운동이라면, 기독교의 자기초월은 내가 나를 넘어 하나님과 이웃에게 나아가는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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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자기극복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비움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두 길 모두 고정된 자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지점에서 국가폭력과 악의 보편성이라는 문제도 에예공의 예술세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예술에 시대의 아픔과 철학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규정한다면 그것 역시 아버지 세대가 딸의 예술에 부과하는 또 하나의 명령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반드시 시대를 고발해야 한다는 명령도 예술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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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국가폭력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고통을 보았을 때 그것이 내 감각과 작품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일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악을 괴물에게만 맡겨두지 않는 것입니다. 토막살인 같은 극단적인 범죄자를 보면 우리는 안도하기 쉽습니다. 저 사람은 사이코패스이고 나는 정상인이라는 선명한 경계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의 보편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그 안도감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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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범죄와 일상의 비겁함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타인의 고통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침묵하는 작은 악의 가능성은 평범한 인간에게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쓴 조금 나쁜 놈이 아주 나쁜 놈들을 보고도 행동하지 못한다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도덕적 자기비하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악을 비판하는 나는 과연 악의 바깥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건물주와 벌인 네 달의 신경전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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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오래된 병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정보를 모으고 대안을 준비하면 상대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관계를 전쟁의 문법으로만 읽기 시작하면 지피지기의 끝은 결국 타자를 이겨야 할 적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력을 쌓는다는 것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 실력은 상대를 제압할 만큼 강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싸워야 할 때와 싸우지 않아도 될 때를 구별하는 능력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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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긴 뒤에도 상대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일 것입니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힘은 단순한 지배력이 아니라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이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강함은 타자를 제거하지 않고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크리스찬도 위버멘쉬도 결국 내가 온전해지는 것이 관건이라기보다, 내가 완성되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관건인지 모릅니다. 공주야. 실력을 쌓으시라.
2026.9.4.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