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고쳐 쥔 윤성일의 이마에서 어느덧 진땀이 배어나왔고 등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손으로 긁을 수가 없다. 어금니를 물었다 푼 윤성일이 말했다.
“나 한달쯤 제주도에 있어야 될 것 같아. 일을 맡았거든.”
“응? 제주도?”
되묻는 김가영의 목소리에는 이미 기운이 빠져있다. 어깨를 늘어뜨린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그래, 제주도. 공사 현장인데 마침 일거리가 걸려서 말야.”
“....”
“지금 내가 제주도에 있어.”
내친김에 그래버렸다. 당장 내일 아침에 만나자는데 도리가 없다.
“그렇구나.”
실망의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여서 윤성일의 가슴에는 납덩어리가 넣어져 있는 것 같다. 김가영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 언제 제주도 갔는데?”
“너, 공항에서 만난 다음날 아침.”
숨을 고른 윤성일이 여러 번 수정해놓은 줄거리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아는 형한테 연락이 와서 그날 아침 첫 비행기로 제주도에 왔는데 정신이 없었어. 큰 공사고 나한테도 일거리가 큰 것이 맡겨져서 말야.”
“....”
“그러다가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말야. 내일, 내일 하다가 너한테 연락을 못하고 이렇게 된 거야.”
“....”
“한 달 후에 일 끝나고 갈게. 그동안 전화 연락은 수시로 하지, 뭐.”
“....”
“너 화났어?”
“아니?”
불쑥 윤성일이 묻자 김가영이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약했다. 핸드폰을 고쳐 쥐려던 윤성일이 팔의 힘이 빠지는 바람에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침대 끝에 부딪쳤던 핸드폰이 병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줌마!”
당황한 윤성일이 부르자 안동댁이 서둘러 다가왔다. 안동댁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에 닿았다.
“아이구, 저런.”
핸드폰을 집어든 안동댁이 윤성일에게 건네줄 때 송화구에서 김가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형, 그럼 다시 연락해.”
그러더니 핸드폰을 귀에 붙였을 때는 통화가 끊겨 있었다.
밤 10시가 되면 특실 안에는 윤성일과 안성댁, 그리고 간병인과 윤은지까지 넷이 남는다. 윤은지는 오늘도 퇴근하고 나서 9시 반쯤 병원으로 왔다. 윤은지는 오늘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다. 퇴근시간이 정해져있지 않아서 어제는 11시가 다되어서 이곳에 왔다.
“누나, 피곤할 텐데 여기 오지 마.”
윤성일이 말하자 윤은지는 픽 웃었다.
“야, 여기가 편해. 특실 서비스인데다 밥도 안성댁이 챙겨주고.”
“아, 시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 자식 입버릇 좀 봐.”
“내가 불편하단 말야.”
그러자 윤은지가 힐끗 안쪽을 보았다. 응접실에서 안성댁과 간병인이 TV 연속극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다가선 윤은지가 윤성일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안 오면 첫째나 둘째 올케가 여기서 교대로 밤샘을 해야 될 거다. 아버지 눈치가 보이거든. 오빠들도 가보라고 할 것이고. 아마 성북동 마나님도 며칠에 한번은 이곳에 왕림 하셔야 될 걸?”
성북동 마나님이란 오명화를 말한다. 이렇게 둘이 있을 때 오명화는 성북동 마나님이다. 저택이 성북동에 있기 때문이다. 윤은지가 말을 이었다.
“돈이란 게 뭔지. 다 자기가 평생 쓸 만큼 있는데도 욕심들을 부리는걸 보면 만정이 떨어진다. 그래서 난 네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윤은지가 허공에 매달린 윤성일의 깁스한 다리통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웃었다.
“아버지는 돈의 위력에 꼼짝도 하지 않는 네가 볼수록 미운 모양이더라.”
“제주도?”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김가영이 다시 마음속으로 물었다. 이곳은 홍대 앞 골목이다. 수백 개 식당, 카페, 가라오케, 커피숍이 밀집된 지역이어서 오후 5시만 되면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거리가 된다. 오늘 김가영은 친구 서보경과 함께 재즈카페에 들어와 있다. 음악과 소음으로 적당히 시끄러운 분위기가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다. 오히려 집중에 도움이 된다.
“좀 이상해.”
김가영이 흐린 시선으로 앞쪽의 서보경을 보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으로 대학 2학년까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다녔으니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격은 다르다. 서보경은 외향적이며 계산이 빠르고 치밀하다. 다혈질이어서 자주 화를 내는데 김가영 앞에서는 삼가는 편이다. 그때 맥주를 병째 마시던 서보경이 머리를 돌려 김가영을 보았다.
“너 남자 생겼어?”
“아니?”
대번에 부정한 김가영이 눈동자의 초점을 잡고 되물었다.
“갑자기 남자는?”
“내 육감이.”
“미쳤냐?”
서보경은 아담한 체격에 동그란 얼굴의 귀여운 인상이다. 그러나 남자관계는 많아서 지금까지 김가영이 세어본 상대가 다섯 명이 넘는다. 하지만 반드시 끊고 나서 다른 상대를 만났기 때문에 복잡하지는 않다. 한 모금 맥주를 삼킨 서보경이 지그시 김가영을 보았다.
“네가 날 만나자는 주제가 모호해. 내 취직 문제를 듣고 싶다는 아리송한 이유는 설득력이 없어.”
“논설 쓰네.”
“알바 끝내고 부랴부랴 나를 만나러온 이유가 뭘까? 혹시나 내가 너보다 월등한 부분인 남자관계. 그것에 대한 조언을 얻으려는 것이 아닐까?”
“미친년.”
“조언이 아니더라도 내 경험담도 도움이 될 테니까. 너 같은 성처녀한테는 말야.”
그러다가 서보경이 코를 내밀고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혹시 아닌가? 뚫렸니?”
“시끄러. 미친년아.”
서보경이 지그시 김가영을 보았다.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서보경은 이제 4학년 졸업반이다. 취직시험에 매달려있고 지금까지 27곳에 응시했으며 19곳에서 탈락했다. 남은 8곳 중 1차에 붙은 곳이 3곳, 5곳은 아직 1차 발표도 나지 않았다. 상황은 비관적. 그래도 서보경은 끊임없이 입사원서를 작성하는 중이다. 붙고 봐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서보경이 입을 열었다.
“사랑은 섹스 후에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에휴, 골치야.”
한숨을 뱉은 김가영이 맥주병을 쥐었지만 시선은 떼지 않는다. 서보경이 말을 이었다.
“섹스를 하기전의 감정은 믿을 것이 못돼. 그때그때의 감정 상태가 소주 두잔 먹었을 때하고 두병 먹었을 때가 틀리니깐.”
“....”
“두잔 먹었을 때는 적당한 기분으로 보았겠지만 두병 마신 놈은 돼지도 치마만 입었다면 이뻐 보였을 테니까.”
“안 마신 놈은?”
“그런 감동이 없는 놈은 예외고.”
했다가 서보경이 눈을 치켜떴다.
“이년아, 장난 말고 경험자 이야기를 들어. 여자는 본능이건 뭐건 남자한테 몸을 주고나면 놈을 집안에 들여 놓았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고 남자들은 그 반대로 집안에 들어갔다는 의식이 박혀진단 말이다. 이 대목부터 중요하다.”
탁자위로 몸을 굽힌 서보경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가영을 보았다.
“잘 들어. 사랑은 다리 쫙 벌리고만 있으면 안돼. 다리 사이에 파리만 꼬여. 그러니까 다리 딱 붙이고. 그래, 문 다시 딱 닫고 놈을 보는 거야. 그럼 놈의 진면목이 다 보이는 거다.”
“무슨 말씀인지...”
“그러니까 대문 열쇠는 네가 갖고 네년이 열었다 닫았다 하란 말야. 이...”
서보경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으므로 김가영은 손바닥으로 막아야만 했다.
일요일 오전, 둘째형 윤수일이 예고도 없이 들렸다. 윤은지는 병원에 갔고 병실 안에는 간병인과 안성댁 둘이 남아 있을 때였다. 곧장 다가와 침대 옆에 앉은 윤수일이 윤성일은 보았다.
“너 그 여자하고 그날 처음 만났다면서?”
죽은 최희명이다. 윤성일의 시선을 받은 윤수일이 빙긋 웃었다.
“양아치 집안이더만. 외삼촌 되는 놈이 전과 3범인데 나한테 50억 내라고 했다가 공갈 협박으로 사흘 유치장에 박아놓았다가 내보냈다.”
“....”
“이것들이 나를 뭘로 보고.”
그러더니 윤수일이 웃음 띤 얼굴로 윤성일을 보았다.
“너 새어머니 조카 되는 애하고 만난다면서?”
“예?”
놀란 윤성일이 윤수일을 보았다. 나이차가 8살이어서 윤성일은 중학 때부터 윤수일에게 존댓말을 썼다. 매일 놀아주는 상대도 아닌 터라 존댓말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윤성일이 중2때 윤수일은 대학 4학년이었다. 그리고 큰형 윤태일은 그보다 3년 위였으니 말할 것도 없다.
“누가 그래요?”
급한 김에 그렇게 되물었더니 윤수일이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느긋한 표정을 짓는다.
“진수 엄마한테서 들었다.”
진수 엄마는 윤수일의 처다. 윤수일이 말을 이었다.
“새엄마가 며칠 전에 진수 엄마한테 이야기 해줬다고 하더라.”
“....”
“그 집안, 새엄마 조카 집안 말이다. 너 알지?”
“....”
“삼도 해운은 임마. 대단한 회사다. 아버지도 은근히 좋아 하실 꺼다. 하긴 새엄마가 아버지한테는 미리 이야기를 해놓았겠지만 말야.”
윤성일은 금시초문이다. 강희나의 집안은 골프장 3개를 가진 졸부 급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강희나의 진술(?)을 들은 것이다.
“그 양반, 아버지한테 착실하게 점수 따고 있어.”
그러더니 지그시 윤성일을 보았다.
“어떠냐?”
“뭐가요?”
“걔 말이다. 여기도 몇 번 왔다면서?”
“생각 없어요.”
“생각 없다니?”
풀썩 웃은 윤수일이 입맛을 다시고 나서 말을 잇는다.
“이자식이 누가 음식 권하는 줄 아나? 얀마, 누가 너 좋다고 그러는 줄 알아? 다 집안 배경 보고 그러는 거다. 자식이 지 분수를 알아야지.”
이제 윤수일의 얼굴은 굳어져 있다. 상체를 세운 윤수일이 똑바로 윤성일을 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시키는 대로 해. 인마, 너 정말 이렇게 나가다간 인연 다 끊긴다. 조심해야 될 거다.”
경고다. 윤성일이 이제는 윤수일의 시선을 똑바로 받았다. 그러자 3초쯤 지났을 때 윤수일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5초가 되었을 때 시선이 비껴졌다. 그때 윤성일이 말했다.
“놔둬. 내가 맘대로 할 테니까.”
그 순간 윤수일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윤성일은 이제 다시 10여 년 만에 반말을 쓴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다. 그때는 큰형한테까지 반말을 했다.
“여기 있습니다.”
서류봉투를 탁자위에 놓은 사내가 웃음 띤 얼굴로 전세희를 보았다. 압구정동의 커피숍 안이다. 이곳은 칸막이가 된 방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커피 값이 2만5천원이다. 그런데도 젊은 남녀 손님이 많다. 사내가 말을 잇는다.
“먼저 통화를 해서 상대를 안심 시킨 후에 직접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일사천리지요.”
공치사를 늘어놓는 사내는 장영기가 소개시켜준 용역회사 과장이다. 전세희는 잠자코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었다. 먼저 10여장의 사진이 나온다. 젊은 여자. 날씬한 체격에 눈에 띄는 미모. 그때 사내가 말했다.
“김가영 씨는 두 군데 알바를 뛰고 있더군요. 하루 생활이 아주 빠듯했습니다.”
그렇다. 전세희는 김가영의 뒷조사를 시킨 것이다. 윤성일의 전화를 받고 먼저 저장되어있는 자료를 훑어본 후에 최근의 행적을 체크한 것이다. 그러자 윤성일과 김가영의 관계가 다 드러났다. 둘이 베트남에서 같이 여행을 다닌 것도 확인되었다. 김가영의 전화번호로 뒷조사를 하는 것은 용역회사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서류에는 김가영의 주소와 가족사항, 그리고 현재 대학 휴학 상태라는 것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수고했어요.”
머리를 끄덕인 전세희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3백만 원이다. 조금도 아까운 표정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봉투 안을 본 사내가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전세희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는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서류를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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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굿,,즐감,,,
^^
줄감요~
즐감하고 갑니다 .
감사히 잘봤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없는년이 불쌍하지..
감사
순애보가 시작되는구나
잘읽었습니다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