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이 소설은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라는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며 당연히 조이스의 자전적인 얘기다. 스티븐은 스테판 성인에서 따온 것이며 디덜러스는 이카루스의 아버지인 디덜러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디덜러스의 이야기는 이후 율리시즈에까지 이어진다. 이 이름은 매우 의도적이다. 스테판 성인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중의 하나이며 디덜러스는 크레타의 미궁을 만들어낸 천재였지만, 결국 교만한 이들 이카루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비운의 장인-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디덜러스는 세상의 고통을 기민하게 느끼면서도 예술가라는 불분명한 길을 걷고있는 조이스 자신의 이미지이다.
디덜러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독실한 카톨릭 배경에 반항한다. 가족, 교회, 역사, 그리고 조국의 가치에 회의를 느낀다. 동시에 예술과 문학에 대한 관심은 그가 성인이 될수록 더 강렬해진다.
이 소설은 전형적인 성년식 소설은 아니다. 각각의 단계에 사용된 단어들은 스티븐의 나이와 지적 성장을 반영하기 위해서 매우 교묘하게 처리하고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풍부한 상상력과 놀라운 발명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혁명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을 선보인다. 조이스 문학의 특징인 성적 유머, 신성 모독적인 환상, 박식한 언어 유희,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 다움의 한없이 복잡한 밀고 당기는 관계, 동시에 저자의 성격을 폭로하고, 삭제시킨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조이스는 그 자신과 근대적 글쓰기의 한계를 제정의 했다.
이 책은 일단 성장 단계에 맞춰서 I~V까지 5부분으로 나뉘어있다.
I
기숙학교에 들어가게된 디덜러스의 이야기이다. 디덜러스는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가를 생각해본 기억이 있다. 그는 우주의 세계의 유럽의 ... 쿨롱고우즈 기숙학교의 초급반에 속해있는 것이다. 이런 기억은 남자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 대담한 책읽기에서 '남자의 탄생'이라는 책에 관한 부분을 보면 미국 대통령이 더 세냐 유엔 사무총장이 더 세냐 하는 것으로 싸웠다는 기억들이 나온다. 나 역시 그런 비슷한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디덜러스는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가를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남자라면 대체로 겪게 되는 성장 과정의 한 과정이다. 그는 강압적인 카톨릭 기숙학교의 규율 속에서 자아를 억압하는 습관을 기르게 된다.
그는 동급생들과 장난치다가 친구들이 밀어서 그만 똥통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로부터 고자질만은 하지 말라고 배웠던 그는 단지 숨 막힐 것 같은 기숙학교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가끔 집에 돌아갔을 때 그에게 있는 기억이라곤 정치적 토론뿐이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아일랜드 내부의 세력도 수구적 카톨릭과 그에 반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있었다. 조이스가 이 책을 출판한지 3년 뒤, 1919년부터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이것에 관해서는 마이클콜린스라는 영화를 참고하라. 한일관계와 유사한 면도 좀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 이렇게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관한 자료가 적다니 충격이다...-_-)
디덜러스의 잘못도 아닌데 그에게 매질을 가한 선생, 그리고 그것이 너무 억울해서 교장에게 얘기한 디덜러스. 일단 누명은 벗었지만 디덜러스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II
디덜러스가 세상과 더욱 충돌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는 동급생들의 이지메를 당하거나 그들과의 관점의 차이를 계속해서 느끼게 된다. 그는 이단적으로 여겨지며 이것은 동급생뿐 아니라 교사 신부들에게서도 받는 대접이다. 그가 단지 바이런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은 그를 이단으로 몰 뿐만 아니라 그를 신부들에게 이르겠다고까지 위협한다.
아버지는 가끔 자신의 고향인 코크로 놀러가는데 그 길에 디덜러스를 동행한다. 코크에서 아버지는 나름대로 소영웅이고 친구가 많다. 아버지는 디덜러스를 똑똑한 아들이라고 인정하며 디덜러스 역시 아버지로부터 조금은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디덜러스의 작문이 인정을 받아 디덜러스는 약간의 돈이 생겼고 이것을 그는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약간의 사치였지만 그것은 금새 고갈되었고 그는 그 소박한 사치가 그저 잠깐의 도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욕망에 굴복하여 창녀의 가슴에 안긴다. 그는 그 순간 울고 마는데 그것은 죄의식과 안도감이 뒤섞인 것이었다.
여기서 디덜러스 역시 여자를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로 보고있다. 이것은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가진 일반적인 시각중 하나로 생각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편안한 존재인 동시에 육욕의 대상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III
디덜러스가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회한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을 조이스는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무려 46페이지(189~235)에 걸쳐 신부의 설교를 적어 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조이스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크리스트교가 가지고 있는 그 가공할만한 새디(가학)-매저키즘(자학)적인 교리 시스템인 것이다. (최근에는 예수를 새디즘적으로 학대하여 논란이 되었던 패션오브크라이스트가 개봉되기도 했다.) 원죄의식, 천국과 지옥, 유일신. 유일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위협으로 사람들을 항상 두려움에 떨면서 크리스트교에 복종하게 만드는 그 시스템을 조이스는 미니멀리즘적인 묘사를 통해 갈파하는 것이다. 여기서 디덜러스가 겪는 정신적 고통은 이후 트라우마로 남는다.
디덜러스는 그 두려움에 떨며 신부에게 고백을 하고 그것으로 죄가 사해졌을거라고 가슴 한구석으로 믿은 뒤 영성체를 받아먹는다.
이런 식으로 죄의식을 주입하느니 나는 차라리 군 입대 전에 친구들을 창녀촌에 보내주는 친구들의 우정(?)쪽이 훨씬 인간적이라고 느껴진다. 조이스가 얼마나 그것을 혐오하는지는 책을 읽다보면 진저리나도록 절감하게 되며, 실제로 조이스는 처음에 뛰어난 성적으로 신학의 길을 권유 받았지만 부모님의 염원이었던 성직자의 길을 거부했다. 심지어 그는 암으로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그에게 충실한 신앙생활을 권유했지만 그것마저 거부할 정도였다.
IV
이제 디덜러스는 그 하룻밤의 타락을 씻기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나간다. 그는 몸의 학대까지도 시도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뇌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순간의 의심이나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사제와의 대화 속에서 나온 '치마'라는 단어가 가진 부드러운 어감에조차 쉽게 사로잡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사제들로부터 인정받고 제수이트 교의 사제가 되라는 종용을 받는다. 그리고 사제가 된 모습을 상상하다가 다시 받게 된 친구들의 야유, 그리고 그 야유 속에서 일어나자 보이는 것은 소녀의 흰 다리, 그리고 그러한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디덜러스의 깨어남 등이 모호한 언어를 통해 전개된다.
( 도대체 에피파니의 순간이 어디야 하고 찾던 중 혹시 여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해설을 보니 맞다고 하는구만. 확실히 방황은 IV장까지에서 어느정도 마무리지어지고 V장부터는 자의식을 가진 디덜러스의 생각들이 나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 디덜러스는 V장에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이고 자신을 찾기위해 헤매고 다닌다. 자신의 내면에 담긴 탐미적 경향을 자각하게된 것은 분명해도 말이다. 그런 방황은 쉽게 끝나지 않는 법이다. )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디덜러스의 탐미적 여성관이다. 디덜러스는 여성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순간순간의 이미지들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아서 자신의 아니마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에게 개인성으로서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편들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여성상만이 존재한다. 이것 역시 조이스라는 인간의 솔직한 자기고백이라고 생각해보면 왠지 재미있다.
어쨌든 이 장은 별로 길지도 않은데 특히나 모호한 언어로 이루어져있다. 이미지의 심상을 만들어내기 어려울 정도이고 장면들이 중첩되거나 날아가버린다. 내가 예전에 왜 보다가 덮었었는지 알것같다...-_-
V
디덜러스는 잠시 기숙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과 이런저런 친구를 만나 나누는 이야기들로 이 150 페이지에 달하는 V장은 채워진다. 수많은 저서의 인용구, 바이블의 구절들, 아일랜드의 역사 등을 끄집어내어 조이스는 사념의 그물을 엮는데 당시의 모더니스트들은 정말 저것들을 다 읽고 머리 속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나는 맥락을 이해하고 넘어간 구절이 거의 없었다는 것만 고백 할란다. 어쨌거나 디덜러스는 유부녀에게 유혹당한 친구의 이야기와 꽃 파는 소녀에게 또 정신이 팔려버리고 만다.
학감과 디덜러스의 대화, 디덜러스와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조이스는 자신의 미학론을 설파한다. 예술이니 욕망이니 이상이니 평화니 하는 단어들이 관념적으로 오고간다. 선문답같은 식으로 오가는 것도 많아서 솔직히 지겹다. :) 하지만 인상적인 대화도 가끔 있다. 예를들면 다음의 대화
그렇지만 왜 넌(디덜러스) 빵조각을 두려워하지?
그 뒤에 악의적인 실체가 있는 것 같아서 난 두렵다고 말하는거야.
그러면 네가 불경한 성찬식을 갖는다면 로마 카톨릭의 하느님이 너를 내리쳐 죽이고 저주 받게 만들 거라는 걸 두려워하니?
로마 카톨릭의 하느님은 그걸 지금이라도 할 수 있지. 내가 그것보다도 두려워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스무세기 동안 권위와 공경이 하나로 응집된 상징에 대해 거짓된 충성의 맹세를 하여 나의 영혼속에서 일어날 화학 반응이야.
넌 극한적인 상황이라면 그런 신성모독죄를 저지를 수 있겠니? 가령 네가 그런 행위에 벌을 주는 시대에 살았다면 말이야.
난 과거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아마 아닐거야.
그런데 넌 신교도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난 신앙을 버렸다고 말했어. 그렇지만 자존심을 버린것은 아냐. 논리적이고 일관성있는 부조리를 버리고 비논리적이고 일관성없는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면 그게 무슨 해방이 되겠니?(2권 p.177)
디덜러스는 이런 대화들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무조건적인 탈출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조리함에 굴복하는, 좋게 표현하면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적은 그의 일기로 끝난다. 이 젊은 예술가는 그녀의 사랑을 얻는데 그만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이상의 '날개'처럼 떠나자! 떠나!등의 자조적 영탄조의 구절들로 일기를 적고있으며 일기의 마지막을 자신의 수호신인 다이달로스가 자신에게 함께하길 기원하며 마무리 짓는다. 이것은 디덜러스가 결심을 하고 아일랜드를 떠남을 암시하며 이 소설이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마지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