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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2007/10/21
오늘 전례
오늘은 전교 주일로서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전교는 예수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증언하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비 신자들과 쉬는 교우들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복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의 묵상
우리의 신앙에 공통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준 성경의 인물 셋을 꼽으라면 아브라함과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고, 세상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어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차별 없이 세상 모든 민족이 그분의 백성이 되도록 하셨으며, 바오로 사도로 인해 이방인들은 유다인들이 졌던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단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억하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드디어 예수께서 이루신 사명을 제자들에게 인수인계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아직 미완성이기에 제자들이 이 사명을 이어받습니다. “열한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산으로 갔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갈릴래아는 예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공생활을 시작한 장소요 공생활 대부분을 보냈던 삶의 터전, 추억의 장소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인계하실 장소로 제자들에게 익숙한 갈릴래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만 보았던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을 이제 모든 제자가 함께 보게 되었지만 더러는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늘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 있으면서도 인식하지도 믿지도 못하는 우리의 의심이기도 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권능을 가지신 분에게 사명을 인수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황 베드로 수녀님의 <크는 달>이란 동시가 있습니다. ‘지구가/비켜주는 만큼/달이 크고//욕심/덜어낸 만큼/별빛이 맑다.’ 지구가 완전히 비켜주는 날, 달은 온전한 모습의 보름달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ㄴ) 그런데도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섬기는 권위로써 보름달이 되도록 이제 예수님은 자리를 비켜주십니다. 조금의 사심도 없는 인수인계인지라 그 빛이 맑고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때가 되면 사라지는 아름다움은 구약의 모세한테서도 빛났습니다. 그는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며 하느님과 고집 센 백성 사이에서 몸고생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하느님은 모세에게 “너의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간 것처럼 너도 네가 올라간 땅에서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가야 한다”(신명 32,50), “너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신명 32,52)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한마디 항의도 하지 않고 순순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사명을 맡기고 죽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17,4)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고 하셨는데,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예수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려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힘 있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사도를 뽑을 때 베드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처음부터 마지막, 부활과 승천까지 함께했던 이를 루카는 ‘사도’라 했습니다. 열두 사도는 아니지만 특별하고 위대한 소명 때문에 사도라 불린 바오로는 파견되지 않으면 선포할 수 없고, 선포하는 이가 없으면 믿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외쳤습니다.(로마 10,14-15 참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이천 년이 넘는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오늘의 우리도 탈레반에게 인질로 잡힌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분께서 심판관이 되시기를, 평화를 위장한 이라크 전쟁 때도 핵무기·살상 무기들이 보습이 되고 낫이 되길 바랐습니다.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서로 총칼을 겨눌 때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게 되기를 염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데 세상은 왜 더 힘들어지는지…. 성찰하면 교세의 양적 확산보다 질적인 양성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민족들의 복음화 이전에 내가 얼마나 복음화되어 있는지 돌아보면서 낙담 중에도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약속에 의지해 봅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의정부]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 변승식 신부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우리가 전교를 말하면서 떠올리는 희망은 아마도 위와 같은 장면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걷는 세상,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시길 바라는 기도와 같은 희망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18) 승천을 앞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그러한 희망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일러줍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이 일에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격려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려고 할 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이 말씀은, ‘남 앞에서 잘난 체 하지 마라’,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마라’는 우리 처세의 상식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다른 이의 믿음이나 가치관, 사상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도 벗어나는 듯하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이요, 진리니까’,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것이니까’라는 생각도, 결코 내가 남보다 낫다는 오만한 태도를 정당화하거나 사상적 강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해소하지는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깊이와 가치를 누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고도 신앙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금방 쉬는 신자가 되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우리의 말솜씨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교회를 찾았다면, 진리를 알고 배우게 되었다 해도 그것이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이기고 신앙을 지킬만한 힘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체험을 통한 믿음이었고 응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볼품없는 삶이라 해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복음을 체험하고 이끌리게 됩니다. 그런 그들을 초대하여 교회로 이끄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전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 17) 전교주일을 맞아, 내 삶의 모습이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을 통한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지 반성해봅시다. 우리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 모든 이를 주님의 나라로 이끄는 가장 아름다운 힘이 될 것입니다.
[인천] 전교는 내 자신의 변화로부터
- 장기용 신부
전교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춘천] 마지막 유언 - 차흥길 신부
옛날 게으른 두 아들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자 영감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머리가 좋으나 공부하기를 싫어했고, 둘째 아들은 힘이 세고 재주는 좋으나 일하기를 싫어했습니다. 부자 영감은 어떻게 하면 두 아들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 궁리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부자 영감은 세상을 뜨기 직전에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광주] 꼭 해야 되는 일 - 기영호 신부
추석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농촌에서는 추수한다고 분주한데 여름날씨 같아 낮에 일하기 어렵습니다. 보이는 하늘과 땅은 그대로 같은데 세상이 변한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지구 곳곳에서 홍수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지금은 다른 동네이지만 내일은 우리 동네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칩니다.
[서울] 전교는 생활의 증거 - 정원순 신부
어머니는 초저녁잠이 많으시고 아침잠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시어 아침기도와 묵주기도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저의 아침잠을 깨우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견디다 못해 하루는 어머니께 아침기도를 다른 시간에 하시면 안 되는지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제 불평에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할 일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산] 마태 28, 16-20. - 서공석 신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서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라며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 위주의 유대교는 그 실효성을 잃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이 하늘과 땅을 위해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배우는 제자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하겠다는 마태오복음서 공동체의 결의가 담긴 말씀입니다.
<제2의 그리스도>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어떤 돈 많은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지라 누구에게 재산을 물려주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우선 괜찮은 중형 자동차를 한 대씩 사서 두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큰아들은 ‘아니,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 더 좋은 자동차가 아니라 겨우 이런 후진 자동차 하나 사주는 거야?’라고 생각했고, 반면에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사주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나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얼마 후에 이 부자는 큰아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물한 자동차가 다 찌그러진 채 마당에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지요. 이에 반해서 작은 아들의 집에는 선물한 차가 반짝반짝 잘 닦여서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큰아들 집에서 상한 기분이 작은 아들 집에 가서 좋아졌습니다. 몇 년 후에 부자는 전 재산을 작은 아들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을 했습니다. 큰아들의 항의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선물한 자동차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 그 자동차는 그렇게 찌그러뜨려서 마당에 방치할 정도로 싼 차도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겨우 이 정도의 차를 선물 하냐면서 나의 선물을 소홀하게 여겼다. 그런 너에게 내 재산을 맡기면 제대로 간수하겠느냐?”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주님과 우리들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정, 직장, 교회, 이웃, 자연, 건강, 물질적인 재산 등등……. 생각해보면 좋은 선물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찌그러뜨리고 방치한 적이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작은 아들처럼 주님께서 주신 모든 선물들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사명을 오늘 우리들에게 전달해주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을 전교주일로 정해서, 우리들에게 맡겨진 또 하나의 선물이라 할 수 있는 내 이웃이 주님을 알고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끌어야 함을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전교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 잘하는 사람만이, 그리고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거리로 나가서 “예수님 믿으세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것만이 전교도 아닙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전교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그 방법을 말씀하세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에 얼마나 큰 힘을 얻을 수 있는지요? 내가 어떤 어려움을 간직하고 있을 때, 고통과 시련으로 힘들어할 때,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그 약속은 큰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 말씀을 나의 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나 역시도 주님처럼 내 이웃과 언제나 함께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전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교가 바로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잘 관리하는 충실한 종의 모습이 아닐까요?
사랑의 동반자(‘행복한 동행’ 중에서)
“몹시 시장해 보이시는데, 기왕 오셨으니 저희 집에서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우리 셋은 함께 들어갈 수가 없소이다.” 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왜요?” 부인이 의아해하자, 그중 한 노인이 나머지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친구 이름은 부귀이고 다른 한 친구는 성공이지. 그리고 나는 사랑이라 하오. 집에 들어가서 남편과 잘 의논해 보시오. 우리 셋 중에 누구를 집으로 들일 것인지 말이야.” 부인에게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남편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부귀 노인을 모시도록 합시다.” 그러나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여보, 성공 노인을 모시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이 말했다. “사랑 노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우리 집안에 사랑이 가득 넘치게 말이에요.” 남편과 부인은 딸아이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사랑 노인을 집으로 들였다. 그런데 다른 두 노인도 함께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저희는 사랑 노인만 청했는데, 왜 두 분까지 들어오시는 거죠?” 두 노인이 대답했다. “사랑이 있으면 부귀와 성공도 함께하는 거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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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골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니 별들이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한번 주어진 삶속에서 꼭 해야 되는 일이냐?’는 식 같습니다. 그럼 저는 가만히 고개를 숙입니다. 제가 하는 일중 많은 일과 생각은 실은 가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누군가를 위해서건 나 자신을 위해서건 땀을 흘릴 때가 제일 가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힘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순간 또 헛된 일에 매달리고 걱정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