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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교회론
1. 서 론
1.1 연구의 목적과 의의
1.2 연구의 범위와 한계
2. 초기 목회 시기의 교회 이해 (1913-1920)
2.1. 거짓된 교회들에 대한 항거
2.1.1.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
2.1.2. 신개신교주의에 대한 비판
2.1.3. 경건주의에 대한 비판
2.2. 그리스도 공동체로서의 교회
3. 기독론적 교회 이해
3.1. 교회의 본질
3.2. 교회의 사명
3.2.1. 말씀을 증언하는 교회
3.2.2. 시대사 속에서의 교회의 증언 책임
3.3. 참교회와 거짓교회
4. 교회와 성서
4.1. 교회를 위한 하나님 말씀
4.2.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권위
4.3.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
5. 성령과 교회의 세움
5.1. 교회 공동체와 성령의 역사
5.2. 교회와 세상(世上)
5.2.1. 세계사(世界事)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
5.2.2. 세상을 위한 교회
6. 결 론
6.1. 요 약
6.2. 평가와 전망
1. 서 론
1.1 연구의 목적과 의의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그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와 사명이 무엇이며 세상 속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 교회는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 이와 같은 교회의 자문은 초대교회때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장 활발하게 제기되고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실로 교회의 자기 이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좌우하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그칠 줄 모르고 신학적 지평 위에 솟아오르고 있다. 사실상 현대는 교회론의 시대라 할만큼 많은 관심이 교회에 쏠리고 있고, 지금도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옷을 입고 활발하게 교회에 관해 논쟁되고 있다. 한스 큉(Hans K ng)의 말대로 교회의 본질이 존재하되 그것은 항상 변화 가능한 역사적 형태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각 시대는 그 역사적 양상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교회론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현대 교회론은 조직적인 이해에서부터 사회적인 컨텍스트(context)가 고려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교회가 혼란 속에 빠지고 갈등을 겪고 있으므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고는 교회의 전통적 이해와 시대의 도전 가운데서 교회의 중요성을 질서 있게 체계화했던 칼 바르트(Karl Barth)의 교회론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는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야기했던, 위기에 직면하여 신학과 교회를 정체성의 위기로부터 구출해 낸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그의 책과 글 그의 사상과 신학은 신학생들의 서재에만 머물지 않고 20세기 교회의 실생활에 침투하여 그리스도 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특정한 교파나 교회, 혹은 신학 사조의 그룹에 머물지 않고 20세기의 교회의 공동 유산이 되었다.
바르트의 위대한 공헌은 신학의 현실을 교회의 신학으로 전개함으로써 신학의 과제를 교회를 위한 학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그의 {교회 교의학}에 총 집대성하였는데 그의 {교회 교의학}에는 기독론(Christologie)이 핵심을 이루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계약을 맺고 화해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교회 교의학}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바르트의 신학은 교회에 봉사하는 직분으로서 교회의 학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교회 중심적인 바르트의 교회론을 연구해 봄으로써 오늘날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사건과 관련하여 어떻게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 되며 모든 역사의 중심이 되는 가를 성찰하며, 그렇지 못한 점들을 반성해 보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1.2 연구의 범위와 한계
교회교의학에 서술되어 있는 바르트의 교회론은 너무 방대하여,전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방대한 그의 교회론을 모두 포함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그의 신학이 교회를 위한 실천적 학문임을 살펴보며, 바르트의 교회 이해를 통하여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교회의 바른 방향을 잡는데 하나의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본고 제2장에서는 칼 바르트의 초기 목회하던 시절에 대면해야 했던 특별히 빗나간 로마 카톨릭 교회와 신개신교주의, 경건주의에 대한 그의 교회 이해를 통해 교회 실상을 살펴보며, 그리스도 공동체로서의 교회 의미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되는 바르트의 교회관을 다룬다. 고백 교회의 투쟁기 기간에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교회와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지배권을 돌렸으며 거짓된 교회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제4장에서는 성서 원리를 강하게 부각시켰고 교회의 권위와 자유를 성서의 권위와 자유 아래에로 종속시킨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체적으로 듣고 받아들이는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 공동체적인 성격이 구체화되는 것은 교회의 고백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제5장에서는 성령안에 거하는 교회를 다루고자 한다. 성령에 의하여 피조된 교회, 성도들의 교제의 장으로서의 교회를 고찰 할 것이며, 세계사(世界事)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위한 교회를 논하게 될 것이다.
제6장에서는 결론적으로 전체를 요약하고, 이에 따른 평가와 전망을 다루고자 한다.
아쉬운것은, 바르트의 교회론이 한국 교회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상세히 밝히지 못한점이다. 그러나 우선은 바르트의 교회관을 철저히 이해해야만 그 구체적 접근도 가능하리라 사료되었기에, 적용에 관한 사항은 과제로 남겨두게 되었다.
2. 초기 목회 시기의 교회 이해 (1913-1920)
바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격동기로서 그에게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르트는 그 시대에서 새로운 반성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칼 바르트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위스 개혁교회의 목사요, 바젤에 있는 신학교 교수인 프리츠 바르트(Fritz Barth)의 장남이었다.
바르트는 초등교육을 베른에서 받았으며,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복음적 신학의 많은 영향과 진지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대학 생활은 당시의 편만해 있던 유럽의 교육제도를 따라 여러 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승들이 하르낙(Adolf Harnack), 헤르만(Wilhelm Herrmann)등 대부분 당시의 신학계를 주름 잡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기에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을 마음껏 호흡하면서 학문적으로 스승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통해 신학 수련을 쌓으며, 적극적으로 실천해 보려고 했다.
1909년에 바르트는 자신이 획득한 배움의 내용을 "종교적 개인주의" "역사적 상대주의" 라는 공통 분모로 묶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를 기독교적 경건을 도야하려는 관심에 의해 세워진, 본질적으로 교육적인 기관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 당시 지배하던 신학과 뜻을 같이하면서 교회를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 개선을 위해 존재하는 기구로 간주했다. 여기서 어떤 이는 경건의 장래를 생각했고 또 어떤 이는 지성의 육성을, 또 어떤 이는 사회적 상황이나 조직의 개선 혹은 변혁을 특별히 생각하기도 했다.
2.1. 거짓된 교회들에 대한 항거
2.1.1.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
바르트는 자펜빌(Safenwill)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종종 "교회"를 주제로 삼았다. 그의 지배적이고 특징적인 관심은 무엇보다도 매우 진지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사실에 있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이름 하에 버젓이 존재하는 이교적 우상 숭배이며, 거기에는 인간과 인간의 말과 행동을 찬양하느라 살아 계신 진리와 사랑의 하나님은 없어져 버렸으며 순전히 외식적인 것이 되어 버린 종교로 마음과 양심을 빼 버리고서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소위 선하고 칭찬 받을 만한 행업에 몰두하느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고 혹평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바르트는 베드로 수위권을 공박했으며 교황 계승에 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도 반박했다. 이어서 바르트는 카톨릭 교회가 예수의 복음과는 더 이상 공통점이 없는 저급한 미신이라고까지 말하면서, 거기에는 옛 이방 열강 제국의 영(靈)이 지배하려고 한다고 혹평했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이 카톨릭 교회 안에서 인간 본성의 악하고 저열한 충동의 욕구의 껍데기 속으로 빠져 든 것처럼 보았으며 여기서 바르트는 왜 종교개혁이 필요했었는지를 명시하였다.
1913년 11월 2일에 행한 설교에서 바르트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문자의 기독교, 과거의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그것은 영의 기독교의 진정한 계승자인 종교개혁 신앙과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2.1.2. 신개신교주의에 대한 비판
바르트는 초기 목회를 통해서 그의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던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 계기는 1914년에 발발한 세계 제 1차 대전과 이에 대한 독일의 93명의 저명 지성인들이 독일 황제의 전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포하였을 때 바르트는 그가 존경하던 스승들이 그 서명에 가담한 것을 보고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화한 자유주의 신학의 이데올로기를 실감 한데서 시작한다.
자펜빌이라는 소도시에서 목회 하던 젊은 바르트는 새롭고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즉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항상 그의 고민 거리가 된 것이다. 그는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던 스위스 종교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첫 발을 내딛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면서부터 그에게는 모든 기독교 선포 행위가 성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그는 성서 속에서 전혀 놀랍고 새로운 세계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서를 거듭 다양한 눈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주석 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1919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주석서에는 낭만주의, 이상주의, 경건주의 및 종교사회주의와도 투쟁한 그의 내면적 고심이 드러나 있고 그 시대와 교회에로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번득거린다.
바르트는 로마서 9-11장의 주석을 통하여 교회와 이스라엘간의 연대성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적 공동체인 이스라엘, 즉 교회는 궁지에 빠졌고 실로 사이비 교회로 타락했음을 비판한다.
교회의 궁지는 그의 숙명이 아니라 잘못 때문이다. 그 잘못은 교회가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만이 그의 사역 속에서 유일한 통치자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교회는 항상 구하고 듣고 기다리지 못했다. 교회는 의의 구호 아래서 자신의 의에 몰두했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일을 추구함으로 결국 하나님 자신과 치명적인 불화에 빠졌다. 교회는 믿음과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에 결정적으로 실패했다. 교회는 바로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원치 않았다. 교회는 자신의 전통과 확고한 세상적 위치를 사랑하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말들만 늘어놓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새로운 변종의 종교성, 경건, 기독교로 이해하거나 정치적. 문화적 이적 현상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바르트가 무엇을 배격하려 했는지 분명해졌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인간의 목적에 유익하게 변형시키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안전한 길을 가려고 복음의 모든 거리끼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고 인간적 복리에 맞게 그의 일을 뜯어고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려는 당대의 교회에 맞서서 맹렬히 항거했다. 이러한 교회는 결국 이스라엘이 추구했던 길이기에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 속에 처한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저버림을 받았으며, 이제 교회는 '사이비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2.1.3. 경건주의에 대한 비판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에 착수하려던 그 즈음에 당시 여러 종류의 문헌들을 통하여 경건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경건주의(Pietismus)에 주목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경건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신학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경건주의 비판은 사실상 블룸하르트(Chr. Blumhardt), 벡(J.T. Beck), 쿠터(H. Kutter) 및 라가츠(L. Ragaz)의 영향권 아래서 이루어졌다. 그의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즉 개인주의와 기계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다.
블룸하르트는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는 인간의 개인적인 욕구와 사회적 욕구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위스 내에 종교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라가츠와 쿠터도 이에 참여하여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국한하는 스위스 개신교의 보수주의에 반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차원과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 나라 실현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주의적인 영혼 구원의 갈망의 성취가 아니라 개별화로부터 벗어난 포괄적, 전체적, 영육적 삶의 유기체로 이해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우주의 생명력으로 인해 회복되는 완전한 세계적 유기체로 파악된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를 철두철미 유기적인 관계, 살아 있는 친교와 공존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개인주의는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2. 그리스도 공동체로서의 교회
1913년부터 로마서 주석 제 1판이 발간된 1919년까지 바르트의 교회에 대한 관심은 '공동체' 혹은 '친교'로 이해하고 방어하려는 데 있었다. 교권 계급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인본주의적인 신개신교주의 교회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경건주의 교회에 대항하여 그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부각시켰고,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사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 접맥시켰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란 더 높은 뜻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내적으로 필연적인 공동체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이 세상에서 개인의 불행한 처지로부터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집합이나 무더기가 아닌, 질서정연한 조직의 형태를 띠는데, 결코 자신을 위하지 않고 매우 활동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복종한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점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기계적 일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적 일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지체들로 형성된 일치라는 것이다. 물론 이 공동체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몸' 사상으로부터 도출되었으며, 따라서 바르트의 교회론은 이 사상을 근본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안으로 들어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과 옛 세계 사이로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가 죄에 대하여 죽었으나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들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유기체 안에 뿌리박고 있고 그 안에서 성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 의 지체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 세상에서 그 머리가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면서 성장하고 완성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블룸하르트를 통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이 세상의 전적인 갱신자이며 세상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새로운 자임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요, 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기체요 그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신실로부터 믿는 자에게 주어진 성향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성장,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로 이식되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
3. 기독론적 교회 이해
1933년 초에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된 것은 바르트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소위 "독일의 기독교인들"은 독일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와 복음을 종합하였고, 히틀러에 의하여 독일의 공식적인 교회로 인정받았다. 이에 반응하여 바르트와 투루나이젠(Eduard Thurneysen)은 1933년 7월에 신학 잡지인 "오늘의 신학적 실존" (Theologische Existenz Heute)을 함께 펴내기 시작하였다. 이 잡지를 통하여 바르트와 같은 주장을 지닌 그의 동료들은 히틀러와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항변의 소리를 높이 올렸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어떤 영도자(F hrer)도 독일 교회를 인도해서는 안 되며, 결코 복음을 나치당이 절대화하는 "민족, 인종, 영도자"와 동일시 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고백교회는 1934년 독일 바르멘(Barmen)에 모여 '성서와 고백'이라는 토대 위에서 바르트가 기초한 "바르멘 신학선언서"(Barmer Theologische Erkl rung)를 발포하였다. 바르트 신학의 핵심과 그 시대의 신앙 양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바르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기적과 같이 나타났고 교회고백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로서의 기념비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3.1. 교회의 본질
종교 개혁자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참된 교회를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이것은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간을 구별하는 교회의 참된 표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바르트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므로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만이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며 교회를 참된 교회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교회의 충성은 구체적으로 오직 성서에 대한 충성일 뿐이다. 또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계시 속에서 행동하시고 심판하시며 용서하시고 성화 시키시고 약속하시면서 인간에게 대면해 오시는 인간의 진정한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된 성서를 항상 겸손히 연구하고 주석 해야 하며, 여기에 자신을 견주어 보아야 한다.
'바르멘 선언' 제 1항에서 볼 수 있듯이 바르트는 성서의 원천 및 그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았다. 두 세 사람이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그분의 영과 숨결을 받아들이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현존하시면서 항상 새롭게 교회를 창조하시며 보존하시는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본질적인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제도화된 하나님의 계시인 양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관을 배격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뜻, 진리 및 은총이 인간의 소유물이 되거나 인간이 처분하고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가 인간의 구원 방법과 구원장치와 동일시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님을 강조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의 중간시기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실존 형태일 뿐이다.
'바르멘 선언' 제 3항에서 바르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는 몸이다. 교회는 민족, 국가, 사회단체가 아니라 형제들의 공동체이며 그것도 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삼은 그러한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고, 이 행동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교회를 창조하시며 교회를 보존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분은 교회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주체이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 또한 교회는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음으로써만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3.2. 교회의 사명
3.2.1. 말씀을 증언하는 교회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유지하시고,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을 주시며,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그 진정한 목표로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에 깊은 확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분의 말씀이 없이는 존속하거나 번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위로의 능력을 받아 은총을 입은 죄인들의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그 분의 분부에 따라 죄많은 세상 한 복판에서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증언 봉사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속에 반복하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명확한 반복이다. 즉 그것은 특정적인 시대와 그 가능성으로 인해 규정되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고백은 불가피하게 교회와 세상을 움직이는 그 시대의 질문 속으로 개입해 들어가면서 수행된다.
3.2.2. 시대사 속에서의 교회의 증언 책임
바르트에 의하면 특정 시대 속의 명확한 고백으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교회로 하여금 당대의 시대사에 대하여 책임적이게 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고 선포할 때, 시대를 떠난 어떤 추상적인 영역 속에 있지 않고 바로 그 시대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시대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고, 그것의 도전과 요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시대에서 시대사에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르트는 당시 독일의 고백교회가 증언해야 할 세 가지 책임을 지적하였다.
첫째는 교회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증언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상도 통치하시며, 악한 사람들의 주(主)도되시며 그들의 심판자, 구원자 및 보호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선포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은 지상에서 옳고 자유로운 국가를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정의와 자유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백성들과 통치자들에게 증언해야 할 사명이 있으며 국가 안에서 국가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셋째는 사죄에 관한 말씀으로 교회는 죄인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고 생명을 얻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르트는 교회의 임무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 요약하고 있다.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자로서 그 시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시대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을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3.3. 참교회와 거짓교회
참교회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고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응답하려는 인간의 활동이 존재하는 이 이중적 의미에서 존재하고 발생하고 유지되고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성에서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전제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참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일 가운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가운데 있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로서의 자기 진실성에 대한 싸움 안에 서 있다. 만약 참교회로써 살아가기 위하여 싸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바른 싸움은(딤후 2:5) 교회안에서 성령이 역사 하실 때 이루어진다. 교회의 진실성의 근거는 오랜 역사, 장소, 경건성의 강도, 제전의 아름다운 행위와 희생의 도덕성, 신학 등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의 척도에 의한 우월성이기 때문이다. 참교회의 진실성은 다만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힘을 가지신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참교회가 있는 곳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문제 삼는데 있으며 그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대해서만 묻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요, 구원자이기 때문에 참교회는 그 주에게 응답해야 되는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개혁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자기를 참교회로써 거짓교회와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신앙이 요구된다.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가졌다면 교회는 개혁안에 서 있을 것이며 개혁과 더불어 참교회와 거짓교회와의 구별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참 교회는 세상과의 연대성을 알고 시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주어진 사회이다.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주어진 '생명의 빛'에 그 눈을 뜨고 있는 한 세상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교회가 그 빛을 보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는 그 자신과 세상의 연대성을 보아야 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원인을 보고 찾아야 하고, 세상은 교회 속에서 자신의 원인을 보고 찾아야 한다. 성령의 깨우치는 힘에 의해서 참 교회는 세상의 밖으로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이끌려 들어오게 된다. 이것은 진정으로 세상에로 접근하려는 것이고 세상의 선악간의 구조 속에 같이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잃어버린 존재를 찾으며 참 세상의 모든 모양 속에 있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참 교회이다.
바르트의 교회관은 어디까지나 실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연결되는 것은 어떠한 기구나 조직체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요,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개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바르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교회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교회 위에 있는 어떠한 통치 기관이 아니요, 바로 교회 자체인 것이 드러나며 이러한 유대와 연결은 성령의 역사임이 밝히어진다. 바르트는 세계교회적인 교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교회적 교리 혹은 고백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러 종파의 교리를 초월한 보편적인 교리란 중성적인 것이요, 관념적인 것으로 이미 생명을 잃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오직 세계교회협의회가 할 일은 모든 개체 교회가 문제 삼고 있는 문제를 언제나 문제 삼아야 하며 그것을 초월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참 교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속에, 역사 속에 존재하시는데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있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참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다.
4. 교회와 성서
4.1. 교회를 위한 하나님 말씀
성서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의 형태를 가진다: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및 선포된 말씀. 그리고 기록된 말씀인 성서도 바르트에 의하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문장도 신앙고백이며, 오직 신앙의 근거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 성서 그 자체는 계시가 아니라 계시에 관한 인간의 증언일 뿐이므로, 증언은 그 속에서 증언된 대상, 즉 계시 그 자체와 단순히 일치하지 않는다. 성서는 인간의 언어 속에서 인간에 의해 쓰여진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르트는 성서를 계시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려는 의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계시가 성서의 근거, 대상 및 내용인 한에서, 성서는 계시와 일치하기도 한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성서는 계시와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에게 자신을 중재하며 그래서 우리에게 적응되는 계시가 된다. 즉 우리는 인간의 언어 속에서 인간에 의해 쓰여진 말들 속에서, 그리고 이 매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의 형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으로 척도가 되며, 구속력있고 권위를 행사한다. 이러한 유일한 형태 속에서 교회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한다. 그런데 성경은 정경의 형태로 우리와 만난다. 정경 형성은 하나님의 증인 선택과 증인 소명에 대한 교회의 고백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성서에 오류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경 역사의 완결성에 대한 절대적 보장은 교회에게나 교회 내의 어떤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다. 카논의 구체적 형태는 절대적인 게 아니고 항상 오로지 상당히 높은 상대성 속에서 닫혀져 있는 형태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는 우리가 자신의 결단에 근거하여 다른 문서를 교회 안에서 성서로 인정할 권한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확신에 따르면 그러한 정경구성의 변경은 오직 교회의 행위로서만, 의미 있고 유효한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교회의 새로운 결정이 명백히 내려지지 않는 한, 우리는 이미 내려진 결정을 효력 있고 권한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성서가 교회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오직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성서에 대하여 의미 있고 정당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과 불가분리하게 상관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든지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교회의 결정은 그 자체상 개개인의 결정에 원칙상 선행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4.2.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권위
성서에 대하여 교회는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를 떠나서는 교회가 아무런 독립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위하여서만 절대적이고 내용적인 권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존재, 근거 및 본질을 이루는 성서에 대하여 순종의 관계에 있다. 교회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존재가 성서라고 하는 더 높은 권위 아래 종속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행위일 때만 가능하다. 자기 통치란 오직 하나님의 특권을 참칭하는 행위요, 피조물의 불순종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카톨릭 교회와 신개신교회가 그러한 자기 통치에 빠져 있음을 공격했다.
그렇다면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는 어떠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가? 바르트는 교회에 어떠한 권위를 부여했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성서에 순종함으로써 행사하는 진정한 권위인데, 그것은 오직 상대적 권위일 뿐이다.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의 반영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부권의 반영일 뿐이다. 먼저 제기되는 질문은, 참된 교회의 권위는 어떻게 성립되는가? 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진정한 교회의 인간적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체적으로 듣고 받아들이는 사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공동적인 성격이 구체화되는 것은 교회의 고백 속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 나에게 다가오고 내 자신의 신앙과 신앙고백에 선행하는 남들의 목소리에 대하여 일정한 합의와 공동적인 해명이 교회의 권위이다. 분명히 바르트는 거짓과 오류의 가능성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안에서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교회 안에서 효력을 미치는 죄인의 용서를 감안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죄 속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부르시고 지금껏 다스렸다"는 신뢰와 경외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고백은 혼란이 아닌 목소리의 전체 일치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일치는 상호간의 해명과 응답, 신앙에 관한 상호간의 증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대화 속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이 대화의 의도는 선포의 목적에 이르기 위해 옳은 신앙에 관해 서로 합의하는 데 있다. 물론 고백은 인간의 일이므로 항상 오직 부분적이고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합의일 뿐이다. 교회의 고백은 그렇기에 그 구체적인 형태에 있어서 항상 '결단'이다. 그것은 오늘 선 자리에서 오늘의 상황 속에서 교회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는 명확한 사건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결단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백으로서의 교회의 권위는 또한 영적인 권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합의의 영적인 특성 때문에 이런저런 결정을 신학적으로 교회의 권위로서 고정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결단의 '우발성'을 신학적인 원칙으로까지 끌어올릴 수 없다.
4.3.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
교회안에 독자적인 자유가 없듯이, 개인이 자신을 위하여 요구할 수 있는 독자적인 자유도 없다.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자유는 "말씀의 자유"이다. 그리고 이 자유 안에서야 비로소 "말씀 밑에 있는 자유"도 있다. 교회 안에 권위가 있기 때문에, 동시에 교회 안에 자유도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유란 말씀의 자유이며, 이러한 말씀의 자유 안에 있는 그 자유는 결국 또한 말씀 아래에 있는 자유이다. 교회의 자유는 말씀의 자유로 말미암아 정초 되고, 상대적. 형식적 자유로서 제한된다. 교회의 자유는 오직 순종의 매임 속에서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한 자유의 토대 위에서만 사건화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인 성서를 간과해선 안된다. 성서는 권위의 원리와 음성이듯이, 성서는 또한 자유의 원리와 음성으로서도 경청되어야 한다. 성서는 살아있는 활동적인 존재요 말하는 주체이다. 그렇기에 "말씀의 자유가 실로 중요하게 여겨짐으로써만 바로 그로부터, 그 말씀 때문에 그에 상응하고 그것으로부터 요구되며 창조되고 선사되는 인간의 자유가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되고, 그 자유는 바로 말씀 아래에 있는 자유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은 성서가 그 독특하고 유일한 주제로 인해 '주체'로서 확립되고, 이 주체인 성서가 다른 모든 주체들과 대결하고 논쟁하는 곳에서 고유한 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 능력이란 육신이 된, 인간에 의해 신앙되고 증언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서 인식되어질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는 교회를 설립, 보존, 통치하는 자유이다. 이 자유는 우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부르고, 우리를 중생과 새 창조의 말씀을 통해 살리고, 그 생명 안에 보존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섬기도록 한다.
그렇다면 성서의 자유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 안의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에 상응하는 자유로서, 다름 아닌 성서주서과 그 적용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행위로 나타난다. 말씀 밑에 있는 자유는 성서 밑에 "종속되는 자유로이 수행된 행위"에서 성립되고 성서를 해석하는 각종 행위 즉 관찰, 숙고 및 전용(專用)에서 성립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는 자발성과 능동성을 지닌 채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선물이요 기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인간성에 대한 고고한 자의식이나 비탄은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의 결단 안에서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간섭, 성령의 은사의 능력에 의한 것이데, 이러한 결단은 물론 인간의 전인성 속에서, 오직 믿음 가운데서만 일어난다.
성서해석의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신앙의 순종이 이루어질 때만 독자와 듣는 자가 "자기 자신의 관심사와 질문의 체계에서부터 벗어나서", "자기의 관심의 초점을" 성서말씀 자체에만 집중시킬 수 있다.
5. 성령과 교회의 세움
5.1. 교회 공동체와 성령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창조하고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는 능력은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이다. 성령이 활동함으로써 교회가 생겨났고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특별한 은총과 은사를 수여하시는 하나님,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화해 행위에 능동적으로 기꺼이 참여하게 하고 그러한 행위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각성시키시는 하나님이다. 성령은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고, 인간에게로 와서 화해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고, 인간의 편을 들어서 행동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긍정하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긍정하도록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다.
성령의 역사로서 이제 기독교 공동체가 인류 가운데서 인간적 활동의 형태로 일어나는 역사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그분의 종과 친구와 자녀로서 살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났던 화해의 증인으로서 살게 하시는 일이 일어날 때, 존재한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분명히 언제나 믿어질 수 있을 뿐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결코 교회 공동체의 구체적인 형태가 그 자체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는 다만 그분이 역사적으로 세상과 만나시는 실존 형식일 뿐이다. 이것은 바르트의 교회론의 중심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교회의 통일로 출발점으로 삼는다. 교회의 통일은 관념적인 혹은 조직화된 전체 교회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가 그것의 전체성 속에서 늘 각개의 교회 공동체에 존재하고 있다. 반면에 교파적인 교회 분열은 하나의 걸림돌이며 본질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하나의 교회 공동체는 자체상 하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 교회는 그 교회의 특별한 존재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강요당하고 있음을 알고 그 교회의 존재가 어떤 인간적인 의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근거를 두었을 적에만 각 교회는 자신을 진지하게 취급할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도들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집되고 생동감을 얻게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다. 바로 이처럼 성령의 역사에 의해 모여든 인간들, 그와 상응하는 일을 행하도록 사명을 받은 인간들이 곧 성도들이다. 물론 바르트는 이러한 교제가 또한 죄인들의 교제(Communio Peccatorum)이며, 이들은 여전히 아담에게 속한 자들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성도(聖徒)들의 공동체(共同體)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사랑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5.2. 교회와 세상(世上)
교회의 실존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는 세상을 위해 무슨 의미를 갖는가? 교회의 실존과 세상을 위한 교회의 적합성에 관한 이러한 질문에 대해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5.2.1. 세계사(世界事)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
세계사(World-occurence)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진행되어 가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긍정적 의지의 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다.
그는 유일한 말씀으로서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모든 현실을 창조하셨고, 그 과정을 보존, 동반 통치하신다. 그러나 바르트는 세계사가 인간의 혼돈에 의해서도 지배된다는 것을 알았다.
실로 세계는 화해에 관해 무지하고 그 자신의 근거, 의미 및 목표에 눈이 멀며, 그 자신의 창조자, 이웃 인간 및 자기 자신과도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근본적 희망도 파악하지 못하며, 자신 속에서 자신과 매우 치명적 알력을 빚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바로 이 세계사가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와 부성적(父性的)인 섭리 아래서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세속사와 구원사를 구분하지 않으며, 세계사를 세속사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교회는 세계사 한복판 속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계사를 보고 그것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결코 타협해선 안되며, 자신의 불안, 무지와 무력을 핑계 대어선 안된다. 교회는 항상 오로지 전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기꺼이 세계사 안으로 들어가면서 살아야 한다.
세계사의 새로운 현실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만약 교회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다면, 교회는 세계사를 위한 뚜렷한 희망의 확고함 속에서 이 역할을 받아들인다. 교회는 세계사를 위한 분명한 희망을 갖고 확고한 신뢰 속에서 세계사 전체의 목표를 바라보고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5.2.2. 세상을 위한 교회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교회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곧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한다. 물론 그는 교회가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 설립과 더불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교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전권에 힘입어 세상으로 보냄 받음으로써 그 자체상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세 가지 임무가 있음을 말한다.
첫째는 교회가 세상에 관하여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화해 행위의 계시와 인식에 근거한 세상 지식 속에서 세상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회가 세상과 연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생명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는 곧 전적으로 세상에 참여해서 세상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우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봄으로써 세상과의 연대성을 인식하고 확증하게 된다.
셋째는 교회의 주어진 책임성이다. 교회가 세상에 관해 앎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연대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으로써, 교회는 세상에 대해 함께 책임적이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아래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해 고통을 받고,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에 대면해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일에 함께 협력하고, 행동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6. 결 론
6.1. 요 약
바르트의 신학은 항상 도상의 신학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결코 한 곳에 머무른 적이 없었고,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비우고 상대화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항상 상대화하면서도 자신의 사고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라는 붉은 실을 견고히 붙들려고 애썼다.
그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그의 신학 사고의 모든 차원에서 감지하게 하고 적합하게 만들려는 관심에 의해 온통 움직이고 있었다. 바르트는 구약성서의 출애굽을 교회 운동의 원천으로 이해하면서 신학 사고의 모델을 제시했다. 이 운동에는 오로지 처음이요 나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되돌아가려는 전향과, 옛 것에서 새 것으로 돌아가려는 방향전환이 속해 있다.
바르트 신학의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정초의 강력한 관철에는 그의 교회론도 종속되어 있다. 모든 교회론은 그리스도론 안에서 정초되고 이를 통해 비판적으로 제한되며 또한 적극적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바르트에게서 그리스도가 없이는 교회도 없듯이 그리스도론이 없다면 교회론도 없다.
먼저 2장에서는 바르트의 초기 목회시기에 있어서 잘못된 교회들에 대한 항거를 살펴보았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베드로 수위권과, 교황 계승에 관한 주장을 반박했으며 문자의 기독교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개신교주의에 대해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고 인간적 복리에 맞게 하려는 당대의 교회를 맹렬히 항거했다. 경건주의에 대해서는 개인주의와 기계주의를 비판하였다.
3장에서는 고백교회의 투쟁기에 나타난 바르트의 기독론적 교회 이해를 살펴보았다. 교회 안에서 주(主)로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새롭게 교회를 창조하시며 교회를 보존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교회의 본질적인 주체이신 것이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참 교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과 역사 속에 존재하시는데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장에서는 성서에 대하여 바르트는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및 선포된 말씀의 세 가지 형태를 가진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만이 성서의 거룩함과 통일성을 교회에게 주실 수 있으므로 교회는 성서의 증언을 굳게 붙들고 그 전체를 주석하고 선포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러한 성서의 권위는 교회의 권위를 부여해 주며 교회는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이루는 성서에 대하여 순종의 관계에 있다. 진정한 교회의 인간적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적으로 듣고 받아들이는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 공동적인 성격이 구체화되는 것은 교회의 고백 속에서이다.
5장에서는 성령의 일하심의 결과로써 교회가 생겨났음을 말하고 있다. 성령은 교회를 각성시키고, 소생시키며, 조명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회집되고 생동감을 얻게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 것이 성도들의 교제이다. 또한 바르트는 교회의 질서가 그 본질에 있어 필수적이며 이것은 명백하게 기독론적, 교회론적 개념에 따라 형제애적 그리스도 통치의 형태로, 즉 봉사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 복판에 서서, 그것에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해야 하며, 교회는 그 자체상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바르트는 말하고 있다.
6.2. 평가와 전망
바르트는 신학이 강의실에서만 맴도는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라 교회의 신학이라는 구체적 자각을 가져오게 하였다. 교회의 메시지와 교회 공동체, 선교 등 신학의 중심 문제를 등장시켜 성서의 기준에 비추어 음미하고 검토하므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주관적 경험주의를 기독론적으로 극복하는 길을 닦아 놓았다. 이제 바르트의 교회론에 입각하여 오늘의 교회가 관심 가져야 할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종적 계층 구조에서 탈피하여 보다 개방적인 대화와 평등이 있는 유기체적 모델이 요구되며 약한 자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은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는 거룩성을 지녔기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의 시간과 만남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에서 탈피하여, 모든 교회와의 연대 의식을 갖고 개인보다 공동체에 우선권을 두며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현실에 안주하려는 현세주의를 깨뜨리고 계속적인 회개와 창조적 대안들을 끊임없이 제안함으로 거짓과 위선을 배제하는 미래 지향적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영적인 실재와 역사성 사이에서 그 긴장과 모순을 자각하고 창조적인 대안을 말씀의 조명하에 현실화시켜 나갈 때, 참교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항상 도상의 신학이었으며, 그의 신학은 결코 한 곳에 머무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학은 단숨에 읽을 수 없다. 물론 그의 새로운 탈출은 다시금 끊임없이 처음이요 나중인 예수 그리스도로 되돌아오는 전향과 고백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하게 완전히 잡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히 완전히 사로잡는 주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르트의 모범에 따라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며 신학을 해야 한다. 그리고 바르트가 자신을 '바르티안'으로 부르길 원치 않았듯이, 그의 신학을 절대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신학은 바르트 자신에 의해서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에 의해서도 추월되어, 항상 '더 큰 분'인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손가락이 될 수밖에 없고, 교회도 이 손가락 이상이 되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정신에 충실한 태도일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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