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한 복장에 피곤한 모습의 중국인 청·장년 10여 명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PBS는 이런 내레이션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하루 하루 날품을 파는 노동자들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고용해 주길 기다리며 서 있다. 이들이 중국에서 온 합법적 이민자들인지, 불법 체류자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이 우리 사회의 빈민층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군가는 그들 이전에 미국에 온 중국 이민자들이 그랬듯이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지난 세월에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도전하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뉴욕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지금도 미국의 도시 어디에선가 만들어지고 있다』
뉴욕에는 오늘도 수많은 외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몰려든다. 수많은 南美계 사람들, 러시안 및 東유럽계 이민자들, 아프리카인들 그리고 아시아인들….
이들이 일하는 분야도 다양해지고 있다. 미술, 음악, 패션, 보석, 음식, 금융, 건설, 회계, 법률, 의료, 인테리어, 소매 및 도매업, 종교 등 각 분야에서 일한다. 이들은 이 도시에서 성공하는 것이 세계에서 성공하는 의미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의 매력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 그중에서도 맨해튼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마천루의 숲인 맨해튼은 골목골목마다 인간적인 향취가 넘치는 공간을 보석처럼 안고 있다. 겉에서 본 맨해튼과 속에서 보는 맨해튼은 전혀 다르다.
뉴욕 사람들은 「뉴요커(뉴욕 사람)」라는 말을 훈장처럼 간직하고 산다.
중국인인 내 친구 「한 영」은 上海(상해)에서 음악공부를 마치고, 마르코 벨로치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등 이탈리아의 유명 감독들의 영화음악을 만들고 있다. 그는 『뉴욕만큼 다양성이나 이질성을 존중하고, 관용하는 도시는 없다』며 『뉴욕은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최고의 도시』라고 극찬한다.
『뉴욕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는 유럽의 도시들과 뉴욕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NEW YORK을 좋아할 수 있는 네 가지 조건
많은 이들이 뉴욕을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로마로 부른다.
뉴욕은 일본의 교토처럼 온화하며 고풍스럽지도, 파리처럼 로맨틱하지도 않다. 로마처럼 영웅들이 건설한 웅장한 문화재가 널려 있지도 않다. 그런데 어떻게 뉴욕은 수많은 세계인들을 매혹할 수 있을까?
사실 뉴욕을 처음 찾는 많은 외국인들은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척박한 인심, 비싼 물가, 사나운 자동차들과 양보 없는 보행객들, 하루 종일 도심을 질주하는 병원 앰뷸런스와 경찰차, 칙칙한 지하철 역들,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택시운전사들, 불친절하고 위압적인 경찰들, 불편한 공중시설들로 뉴욕은 기억되기 십상이다.
필자의 안내로 며칠간 뉴욕을 돌아보고 『정감이 전혀 가지 않는 도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이들이 적지 않다.
뉴욕의 매혹에 빠져들 수 있는 소양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이들일까? 필자는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싶다.
네 가지 조건 중에 적어도 한 가지가 충족된다면 그는 뉴욕을 좋아할 가능성이 있다. 두 가지가 일치한다면, 그는 일년에 2週 이상 뉴욕에 체류하면서 브로드웨이와 미술관 거리를 걷고, 뉴욕이 제공하는 음식을 허리 사이즈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다.
필자가 제시한 네 가지 조건 중 세 가지 이상이 자신과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뉴욕에 아파트 하나를 마련해서 언제든지 뉴욕을 왕래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센트럴파크의 돌담길과 그리니치 빌리지의 붉은 벽돌집이 빽빽이 들어선 꼬불꼬불한 길들을 걸으며, 저녁 무렵 록펠러 센터의 레인보 룸에서 허드슨 강과 맨해튼을 붉게 드리우는 화려한 석양 속에서 잘 익은 와인을 음미하며, 뉴욕과 인생의 깊고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뉴욕을 좋아할 첫 번째 조건은 예술에 대한 사랑이다.
음악과 미술과 건축에 조예가 깊거나, 재즈와 연극 같은 대중 문화를 좋아해야 한다. 예술에 관한 지식이 깊지 않더라도 예술에 대한 知的 배고픔이 있으면 된다.
둘째,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즐기려는, 강한 호기심과 끈기 있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셋째, 세계의 정치·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知的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뉴욕이 앞으로 40년에서 50년 이상 21세기의 로마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뉴욕의 문화적·사회적 자산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존중하는 세계시민적 교양이 있어야 한다. 하늘 아래 어느 곳을 가든지, 초조해하지 않는 뱃심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NY, NY 그리고 212 이야기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는 뉴욕이란, 편지 봉투에 주소를 쓸 때 두 번째 줄의 첫 지명이 「New York」으로 표기되는 지역을 얘기한다. 뉴욕 市는 5개 행정자치구로 나누어져 있는데(Bronx, Brooklyn, Manhattan, Queens, Staten Island), 맨해튼만이 New York으로 쓰인다.
주소 표기 때 첫 번째 NY(New York)는 뉴욕 County, 즉 맨해튼을 뜻하며, 두 번째 NY는 뉴욕州를 지칭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맨해튼의 전화 지역번호는 212 하나뿐이었다. 급증하는 전화 수요 때문에 646이라는 새로운 지역번호를 만들려다가 맨해튼에서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NY, NY라는 우편기호 표시와 전화 지역번호 212는 맨해튼 사람들에게는, 세계 제일의 경제 및 문화 特區(특구)에 살고 있다는 우월감의 상징이었다. 맨해튼에 소재한 회사들은 자신들의 사업체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역량 있는 회사임을 증명해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전화의 지역번호가 갑자기 212에서 646으로 바뀔 수도 있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전화국과 행정 당국은 맨해튼을 남부와 중부 그리고 북부 및 동·서부 지역으로 구분해서, 특정 지역들의 지역번호를 일괄적으로 646으로 바꾼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해당지역의 주민들과 업자들이 손해배상 소송까지 전개하겠다는 자세를 보이자, 행정당국은 지역번호 변경안을 포기했다.
그래서 새로 접수되는 전화부터 646으로 한다는 시민적 합의에 이르게 됐다.
「좋은 음식, 좋은 음악」 클럽
뉴욕에 대한 수많은 안내책자가 있고, 뉴욕은 수많은 세계인들에게 알려진 도시다. 필자가 뉴욕 이야기, 그것도 맨해튼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밝히는 게 제일 먼저일 것 같다.
나는 지난 20여 년간 맨해튼에서만 살고 있다.
대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맨해튼에 소재한 대학들에서 했고, 15년 동안 근무한 직장의 사무실이 맨해튼의 중심부에 있다. 집도 맨해튼의 중심부에 있는 아파트다.
나의 임무는 주로 뉴욕 가톨릭 재단의 기금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맨해튼의 호텔과 공연장, 유명 식당과 바에서 금융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뉴욕의 밤을 즐겼다. 세계 곳곳에서 뉴욕을 방문하는 나의 고객들, 한국에서 오는 知人들을 안내해 뉴욕 타임스에 소개된 맛집 기행을 했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 풋내기 美食家들과 예술 애호가를 자처하는 독신 대학원생과 교직원 20여 명을 모아 「좋은 음식, 좋은 음악」 클럽을 만들었다. 한 달에 두 번씩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저녁을 신나게 먹고, 음악을 즐기며 보내는 게 클럽의 유일한 목표였다.
물론 美食家보다는 大食家(대식가)들이 많았고, 전문적 지식 없이 오페라와 뮤지컬들을 찾아다녔지만, 뉴욕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우리 회원들은 뉴욕의 차이나타운, 리틀 이탈리아, 이스트 빌리지, 웨스트 빌리지, 소호를 벗어나 뉴저지州와 롱아일랜드 그리고 보스턴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5년쯤의 왕성한 활동 끝에 대다수 회원들이 이 지역 유명 식당들의 음식 솜씨와 서비스 환경 그리고 와인을 비롯한 주류에 일가견을 갖게 됐다.
필자를 포함한 적지 않은 수의 회원들이 10파운드에서 20파운드 가량 체중이 불어나는 부작용을 기꺼이 감수했다.
필자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뉴욕을 바라본 것은 아니다.
주로 이용하는 항공사의 회원카드 기록에 따르면, 지난 6년간 내가 여행한 거리는 93만 마일이다. 총 마일리지는 약 140만 마일이다. 유럽의 도시, 미국의 도시들을 무수히 돌아다녔기 때문에 나의 뉴욕 이야기가 동네 자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맨해튼은 섬이다. 이 섬에는 약 180만 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고, 150만 명 정도의 유동인구가 매일 이 섬을 드나든다.
부자들이 사는 Upper East Side
뉴욕의 첫 번째 백만장자는 18세기 중반에 무역 및 도매업 및 소매업으로 엄청난 富를 쌓은 존 제이콥 애스터였다. 그 뒤를 카네기, 록펠러, 위트니 등이 이었다.
이들이 선택한 주거지가 이스트 사이드와 5번 애버뉴가 만나는 지역 인근이다. 현재도 남쪽으로는 59번街, 북쪽으로는 96번街, 서쪽으로는 5번 애버뉴 그리고 동쪽으로는 파크 애버뉴를 경계로 한 사각형 지역 안에 부자들은 모여 산다.
부자 동네의 흥미 있는 통계들
부자들의 쇼핑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매디슨 애버뉴 59街부터 96街까지 세계의 유명 브랜드가 밀집해 있다. 명품에 관심 있는 분들은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세계 어느 곳에도 이렇게 명품점이 몰려 있는 곳은 없다.
대부분의 점포들이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매디슨 애버뉴를 걸으며 명품점을 눈요기하고, 이 거리의 미술 전시관을 몇 곳 들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이 부자들의 사각형 안에는 정신과 의사들의 사무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밀집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의 정신 건강이 他지역 거주자들보다 나빠서가 아니다. 高價 브랜드 상점들과 마찬가지로, 시간당 300~500달러나 하는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료를 낼 수 있는 고객들이, 이 지역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맨해튼의 부자들은 헬스클럽에 운동하러 가듯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정신과 의사를 만나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심리 및 정신 건강에 대한 투자가 유행처럼 번져 있는 셈이다.
맨해튼 동쪽의 부자 마을에는 「아름다움의 마술사」로 불리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무실을 열고 있다. 성공한 성형외과 의사들이 사는 지역도 이곳이다.
이 부자 마을에는 富와 특권의 상징인 「회원제 클럽」이 밀집돼 있다.
유니언 클럽, 메트로폴리탄 클럽, 하모니 클럽, 닉커보커 클럽, 로토스 클럽 외에 여성 전용 클럽도 몇 개 있다. 회원제 클럽은 신입 회원을 선택하는 데 무척이나 까다롭다.
JP 모건은 「유니언 클럽」이 자신의 가입을 거절하자, 맨해튼의 요지인 5번 애버뉴 60街에 멋지고, 웅장한 「메트로폴리탄 클럽」을 만들었다. 회원들의 초청을 받아 여러 클럽의 파티에 참석해 보니 「메트로폴리탄 클럽」의 내부장식이 가장 화려했다. 모건다운 반격이었다.
뉴욕이 자랑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나 링컨 센터, 카네기 홀은 뉴욕의 부자들이 음악과 미술을 위해 엄청난 기금들을 아낌 없이 기부했기에 가능했다. 100여년 전에 백만장자들이 사는 저택들이 많이 있었던 5번 애버뉴의 70街에서 104번街가 한때 「백만장자의 길」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지금 그 길은 「박물관 거리」로 불린다.
갑부들과 그 자손들이 자신들의 저택들을 시민들을 위한 미술 전시관으로 사용하라고 기증했기 때문이다.
앤드루 카네기의 저택은 「쿠퍼 휴이트 국립디자인 미술관」, 유태인 금융가였던 펠릭스 와버그가 살았던 집은 「유태인 박물관」, 사업가 아터 헌팅턴의 저택은 「국립디자인 아카데미」, 카네기와 더불어 미국 철강업계를 이끈 헨리 클레이 프릭의 저택은 「플릭 컬렉션 미술관」이 됐다. 갑부들이 뉴욕 시민들에게 선물을 준 것이다.
「92Y」 이야기
맨해튼 부자들의 동네(Upper East Side) 동북단에 「92Y」라는 유아원이 있다.
시티뱅크의 웨일 회장이 자신들이 투자한 통신회사의 경영전망을 유리하게 발표해 준 통신株 분석가의 아이를 92Y의 유아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100만 달러를 기부한 스캔들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유아원이다.
9개월에 3만5000달러(4200만원)의 등록비를 받는 유아원이지만,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입학시키지 못해 확실한 「줄」들을 찾는다.
필자가 플러싱 지역 YMCA 이사장을 하는 동안, 『아이를 92Y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았다. 「92Y」에서 92는 92번街에 위치해 있다는 의미이고, Y는 「유태인 청년 및 젊은 여성 모임(Young Men’s & Young Women’s Hebrew Association)」의 첫 글자를 표시한 것이다. 이름에 Y가 들어 있어서, 이 지역의 YMCA가 운영하는 유아원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유태인 부호들의 막대한 기부금으로 성장한 92Y의 많은 프로그램에는 유태인 전통 문화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92Y가 제공하는 4000여 개의 교양, 문화, 건강, 교육, 공연, 강연, 체육 프로그램은 질과 양에서 세계 최고의 지역 서비스 센터다.
이 기관의 공연장에는 정경화, 안드레아 말코비치, 오거스트 윌슨 같은 세계의 유명 음악가들이 찾아오고, 한 달에 두세 번 개최되는 교양 강좌에는 올브라이트 前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바바라 부시 여사, 헨리 키신저 前 국무장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강사로 나온다.
이곳은 철저하게 유료 서비스로 운영되는 非영리기관의 모델이다.
뉴욕의 길들- 삶과 사유와 생활의 영양제
예를 들면, 정경화의 공연은 35달러, 부시 여사나 키신저 前 장관의 강연 입장권은 50달러(일반인)와 25달러(학생)씩이다.
물론 이 정도의 입장료로는 전체 행사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 공연과 강연에는 후원 기금 제공자의 이름이 늘 표시된다. 청소년들을 위한 유료 생일 파티도 해준다.
열두 명의 아이들이 참석해서 30분간 놀이 전문가가 놀아 주고, 30분간 케이크 등 음료를 먹는 한 시간짜리 생일파티라면, 요금이 445달러이다(케이크 등 음료와 방의 장식은 생일을 맞은 어린이의 부모가 준비해야 한다).
92Y에는 20명이나 되는 기금개발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로마로 불리는 맨해튼에는 중산층과 부자들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非영리기관들이 성업 중이다.
필자는 맨해튼을 오랫동안 떠났다가 돌아오면 여장을 푸는 즉시 운동화를 신고,산책에 나선다. 맨해튼에는 내 삶과 사고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 많은 길들이 있다.
제일 좋아하는 길은 5번 애버뉴에 있는 센트럴파크의 돌담길이다.
59번街에서 센트럴파크 북쪽 끝 110번街까지 직선으로 나 있는 이 길은 양쪽으로 덩치 큰 가로수가 무성하다. 59번街에서 출발해서 보통 100번街쯤에서 되돌아오는 코스다. 왕복 1시간30분쯤이 걸린다.
공원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풀들의 향내와 가로수들의 풋풋한 호흡을 느끼며, 연륜이 지긋이 든 돌담길과 이야기를 나누면 삶의 얘기를 나누는 기회가 된다.
단풍이 진 낙엽들이 뒹구는 늦가을 담장 길을 걸으면, 자연과 인생의 충만함과 풍요로움에 감동할 따름이다.
커피 한 잔을 들고 골목길을 걷다 보면
컬럼비아 대학교 부근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출발해서 리버사이드 공원을 따라 72번街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공원길도 좋다. 왕복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서쪽 허드슨 강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는 공원 안의 길이나, 맨해튼의 가장 서쪽 시내도로인 리버사이드路를 따라 걸으면, 시원한 강바람과 나무 냄새가 마음에 싱싱하게 전해진다.
세 번째 길은 뉴요커들이 빌리지라고 부르는 그리니치 빌리지 서쪽 귀퉁이의 조그마한 골목길들이다. 예전에는 변두리 지역이어서 도시계획에서 제외됐던 지역이다. 그런 연유로 좁고, 짧은 골목길들이 제멋대로 나있고, 개성을 지닌 조그만한 옛날 집들이 많이 있다. 이 골목길은 고풍스럽다.
노을이 질 무렵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이 골목길을 걷다 보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사색을 즐기기에 제격인 골목이다. 미국 문화계의 유명 인사들이 이 거리에서 살고 있다.
네 번째 길은 맨해튼의 중심을 동서로 가르는 57번街의 1번 애버뉴에서 8번 애버뉴까지의 길이다.
이 길은 57번街가 선사하는 새로움과 첨단 유행으로 가득하다.
「버그도르프 굿맨」 백화점의 예술성이 탁월한 윈도 디스플레이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바뀐다. 티파니, 불가리, 샤넬, 디오르, 입생로랑, 프라다, 코치, 버버리 등 유명 점포들의 전시품 역시 수시로 바뀐다. 전위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은 지나가는 이들의 눈과 감각을 즐겁게 해준다.
2번 애버뉴에는 필자의 사무실과 집, 그리고 직장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엑설셔 헬스 클럽」이 있다. 3번 애버뉴를 지나면, 「하머허 슬레머」라는 상점이 있다. 5번 애버뉴 근처에 있는 「샤프 이미지」, 「브룩스톤」과 함께 성인용 장난감 판매점으로 유명하다.
6번 애버뉴 근처의 「루(Rue) 57」이나, 「셀리의 뉴욕」은 주말 점심을 흥겹게 하기에 적격이다. 카네기 홀 근처의 「카페 유로파(Cafe EUROPA)」는 맛있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즐기기에 좋다.
8번 애버뉴를 지나 9번 애버뉴 쪽으로 조금만 가면, 「케네디家(Kennedy’s)」라는 유명한 아이리시 펍이 있다. 70세에 가까운 다이닝 룸의 바텐더 모리스가 만들어 주는 칵테일은 뉴욕의 최고 수준이다.
맨해튼은 생활비가 무척 많이 드는 도시다. 부부가 각각 연봉을 10만 달러(1억2000만원) 정도 벌지 않으면 여유 있는 생활이 어렵다.
하지만 세계의 대도시들에 빈곤층 주거지역이 있듯이 맨해튼에도 영세민들이 살 수 있는 지역들이 있다. 할렘이나, 스페니시 할렘 등 맨해튼의 남단, 서단 및 북단에 위치한 일부 시영아파트나 그 부근지역이 低소득층 거주지다.
이곳을 제외하면 맨해튼의 임대 아파트 월세는 대개 2000달러(240만원)에서 시작한다. 아파트의 위치와 명성에 따라 1만달러(1200만원)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월세 인상 폭이 규제된 아파트에 오래 살아온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월세를 내고 산다. 이런 서민 입주자를 위한 보호 정책이 없었더라면, 맨해튼은 보통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부자들만의 섬이 됐을 것이다.
이런 제도 덕택에 부모의 월세권을 승계한 富者(부자) 자식들이 엄청나게 싼 월세를 내며,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은퇴한 보브 부부 이야기
자식 교육이 끝나고, 은퇴 자금이 어느 정도 모이면, 교외의 전원주택에서 살겠다는 희망을 가진 50~60代들이 많다. 하지만 자식들이 다 자라서 나가고, 기르던 개가 죽으면 맨해튼으로 이사하는 50~60代들도 왕왕 있다.
보브(78)와 아내 주디(72)는 맨해튼의 조용한 주거 지역인 수튼 플레이스에서 살고 있다. 이 부부는 22년 전 아들과 딸이 대학을 졸업한 이듬 해에, 방이 9개나 되는 롱아일랜드 남부 해변 동네의 집을 9만 달러에 팔고, 지금 사는 원 베드룸 아파트를 17만 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지금 이 아파트의 가격은 50만 달러 정도다.
보브는 아버지와 동생이 한국戰에 중령과 소위로 참전한 군인가족이다. 보브도 중령으로 예편했다.
보험중개업을 하다 64세에 은퇴한 보브와 교사 생활에서 55세에 은퇴한 주디는 『맨해튼이 지닌 문화적 자산들을 적극적으로 즐기지 않는다면 이 도시에 살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 부부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들과 오프 브로드웨이의 연극 및 공연들, 링컨 센터와 카네기 홀의 음악회들, 그리고 박물관 및 미술관들을 자주 찾는다. 週末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음식들을 맛보기 위해 외출한다.
보브는 『맨해튼은 은퇴한 노인들이 건강하게 활동하기에 좋은 도시』라고 했다. 보브는 뉴욕大의 평생교육대학에서 국제정치나 아시아 문화 등에 관한 강의를 3개 정도 수강한다.
그림 그리기가 취미인 주디는 57번街에 위치한 미술학교에 매일 오전 등교한다. 이 부부는 일년에 한 번씩 한 달쯤 해외여행을 하고, 겨울에는 플로리다에 가서 3개월 정도 지내고, 여름에는 롱아일랜드 해변가의 여름 아파트에서 3개월 정도 지낸다.
이들의 연간 수입은 사회보장 연금을 포함해서 15만 달러 정도, 여행경비는 주식에 투자한 100만 달러에서 나오는 돈으로 조달한다.
보브는 『나는 경제적으로는 중상류 정도지만 문화생활은 최상류』라며 웃었다.
南美에서 이민 온 지 6년이 된 호세의 가족이야기
유독히도 춥고 눈이 많이 내린 지난해 겨울 호세(36)의 67세 된 홀어머니 글로리아는 아이를 봐주는 집으로 가던 중 눈길에 미끄러져서 엉덩이 뼈가 부서져 몸을 가누지 못한다.
호세의 가족은 스페니시 할렘에서 산다. 이 지역은 할렘에서 가까운 맨해튼의 동쪽 100번街에서 120번街 지역으로, 南美 출신 이민자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다.
맨해튼 중심에 있는 기업체의 우편실에서 일하는 호세나 집 부근 초등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는 부인 마리아는 어머니를 집에서 보살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글로리아가 병원에 있는 동안, 스페니시 병원 사회복지사를 만나 장기 거주 치료가 가능한 「너싱 홈」을 소개받았다. 글로리아는 지금도 그곳에서 살며 치료를 받고 있다.
호세의 세 아들들은 「소년 클럽」에서 운영하는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에 무료로 참가한다. 매일 오후 세 시간씩 친구들과 운동을 하고, 악기 연주와 그림 그리기를 한다.
아이들은 여름방학에 이 클럽에서 운영하는 무료 캠프에 2주간 가는 것을 가장 큰 재미로 느낀다. 이런 무료 의료·교육 혜택이 있기에, 빈민들이 모여 사는 황량한 이 동네에서의 삶이 늘 피곤하지만은 않다.
호세와 마리아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저축을 한다.
스페니시 할렘은 직장을 다니기에는 편리하지만, 청소년 갱과 마약 문제가 심각하다. 호세는 장남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맨해튼을 떠나, 맨해튼의 북부에 위치한 브롱스의 안정된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목표다.
딸이 초등학교를 입학할 쯤에는 맨해튼을 떠나겠다는 샌디
3년 전 결혼과 동시에 텍사스州 댈러스에서 맨해튼으로 이사온 샌디(35)는 올해 초 딸 엘리자베스를 낳고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다.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10년이 넘도록 분주한 금융계에서 일해 온 그녀는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샌디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딸을 조깅용 삼륜 유모차에 싣고, 센트럴파크를 천천히 달린다.
샌디의 남편 제임스는 월 스트리트에서 투자은행가로 일하고 있다. 샌디는 주거지로 맨해튼을 선택한 이유로 『센트럴파크와 박물관들 그리고 예술, 최고의 식당들』을 꼽았다.
샌디는 매디슨街에 있는 수백 개의 고급상점에서 쇼핑을 즐긴다. 5번街에 침실이 4개 있는 아파트를 갖고 있는 샌디 남편의 일년 수입은 120만 달러(14억원) 정도다.
수입이 많지만 지출도 엄청나게 많다. 私立 유아원 비용부터 만만치 않다.
샌디는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맨해튼을 떠나 조용한 주거지로 이사하겠다』며 『그때는 가끔씩 맨해튼을 찾아서 문화생활을 즐기겠다』고 했다.
세계의 모든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美食家의 천국
맨해튼에는 수만 개의 식당들이 있다.
대부분의 식당이 오후 11~12시까지 영업을 하고, 많은 식당과 바(Bar)가 새벽 2~3시까지 영업을 한다. 맨해튼에서는 무얼 먹고 마실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맨해튼에서는 세계 모든 나라의 음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유럽이나 일본의 여행객들은 팀을 만들어 맨해튼의 유명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매일 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을 즐겼다. 최근 들어 한국인들도 7~8명씩 함께 와서 6일 정도 체류하면서 맨해튼을 즐기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식당 안내책자 「자가트(ZAGAT)」에 10위권에 랭크된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일주일 전에 자리를 잡는 것도 어려울 경우가 많다.
필자의 미국인 친구 매튜는 여자 친구를 「유니언 스퀘어 카페」의 토요일 저녁 식사에 몇 번 초대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 식당에서 청혼해 결혼 승낙을 받아 냈다. 그리고, 매년 아내의 생일인 6월10일에는 이 식당에서 친지들과 함께 저녁 파티를 갖는다.
매튜는 탁상 달력의 5월14일에 붉은 동그라미를 쳐놓는다. 이 식당이 5월14일 오전 9시30분부터 28일 후인 6월10일의 식사 예약을 접수받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약 전화가 몰려 오전 10시면 예약이 끝나 버린다.
대부분의 유명식당들은 30일 前이나, 28일 前을 예약 접수 일로 정한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서, 부지런한 손님들에게 식사할 수 있는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매튜는 매년 5월14일 아침을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가는 수험생의 초조한 기분으로 맞는다. 매튜는 지난 6년 동안 예약을 성사시키는 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베테랑이다.
전화 예약 대신 인터넷(opentable.com)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예약 없이 유명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
물론 모두가 매튜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예약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맨해튼에서 조그마한 투자회사를 경영하는 존은 뉴욕의 명문 집안 출신이다. 연방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한 적도 있다. 존 같은 친구들에게는 예약이 꼭 필수조건은 아니다.
저녁 무렵 존과 친구 몇 명을 만나 「포시즌 호텔」의 바에서 와인을 마시던 중이었다. 한 친구가 「자가트 가이드」에 의해, 가장 인기 있는 식당으로 꼽힌 「그래머시 태번(Gramercy Tavern·20 Street Broadway와 Park Avenue 사이. Tel: 212-477-0777)」의 양갈비 구이와 디저트를 얘기했다.
존이 불쑥 『그럼 가지』하고 우리 일행을 이끌었다.
가장 분주한 오후 7시40분쯤 이 식당에 도착한 우리 일행 4명은 칵테일 한 잔을 마시면서 기다렸다가, 오후 8시쯤 근사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에 도착한 후, 존은 화장실로 향하는 구석 쪽에서, 식당 매니저와 귓속말을 나누었고, 그와 약간 길다고 느껴지는 악수를 나누었다.
존이 매니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것을 매니저의 손에 쥐어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존은 예약 없이도 뉴욕 제일의 식당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유명 식당 대기실에서 예약취소 손님이 발생하기를 한두 시간 기다리는 일은 일행 모두의 동의가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필자도 뉴욕에 갑자기 출장 온 美食家들의 요구로 저녁식사 때에 「르 크리크 2000(LE CIRQUE 2000)」(Madison Avenue 50街와 51街 사이, NY Place Hotel 內, Tel: 212-303-7788), 「장 조지(Jean Georges)」(Central Park 60街와 61街 사이, Trump International Hotel 내, Tel: 212-299-3900), 「바부(Babbo)」(110 Waverly Place, MacDougal Street와 6Avenue 사이, Tel: 212-777-0303), 「오레올(Aureole)」(61街 Madison Avenue와 Park Avenue 사이, Tel: 212-319-1660) 등에서 두 시간 이상 기다린 적이 적지 않다.
그냥 무작정 기다린다고 자리가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면서 평소 안면을 터둔 매니저를 상대로 비밀스럽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내 경우 성공률은 70% 정도였다.
이 유명 식당들의 비용은 세금과 봉사료를 포함해, 1인당 100~200달러(12만~24만원) 정도다. 유명 식당들도 수준에 따라 약간의 가격 차이가 있다.
New York, New York을 마치며
뉴욕에서 영화를 찍는 영화감독들은 『뉴욕의 모든 거리들은 영화 세트장이 될 만큼, 예술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맨해튼은 남녀노소 모든 계층과 인종들이 즐길 수 있는 인간적인 도시다. 복잡하고 분주하고, 금속과 콘크리트로 조형된 현대 도시의 차가움을 내뿜는 듯하지만, 마음을 열고 뉴욕의 혼을 즐길 여유를 가진 이들은 뉴욕의 다른 얼굴을 만나게 된다.
맨해튼이라는 이름은 맨해튼의 북부에 거주했던 알공퀸 인디언들이 작명했다. 알공퀸 언어가 사라진 지금 맨해튼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나돈다. 하나는 「언덕들이 많은 곳」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모두 취했던 곳」이다.
나는 두 번째 해석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맨해튼의 충천하는 열정 속에 하루를 보내고, 황혼에 물든 빌딩 숲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까지의 성취에 감사하며, 이상이 실현되는 내일을 기다리며, 축하와 격려의 잔을 나누다 보면, 우리는 모두 취할 수밖에 없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나의 직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빌딩에서 수천 명이 숨졌다. 그런데도 나는 맨해튼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드리 헵번은 「유럽의 어느 도시가 가장 마음에 드느냐」는 물음에 『단연코 로마』라고 답한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다녀본 세상의 도시에서 어디가 제일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뉴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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