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상동 사충단 앞에서 열리고 있는 장터 | |
| | | | | 동상동 연화사(포교당) 담장을 뒤로 하고 세워져 있는 사충각과 비석 | |
| | | | | 동상동 사충단을끼고 왕래하던 시장사람들.... | |
굳게 닫힌 사대문을 열어젖히고 사직을 지키려는 조상들의 함성과 의기에 절했다.
아직도 그때 백성들의 작은 집들이 분산성 밑에 따닥따닥 붙어살고 있다.
단을 지키는 자도 돌보는 자도 일상에 바쁜 모양이다.
그래서 일까? 조상집 안에 밭을 갈아 배추 등 채소를 부쳐 먹고 있구나. 조상께 미안하니 청소나 돌보기는 더욱 충실하게 해야 할텐데...
이곳에 모셔 둔 분들이 누군지나 알기는 알까.
사충단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김해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네 의병장 김득기·송빈·유식·이대형 선생의 공을 기리고 있는 묘단(廟壇)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이 병력을 이끌고 김해성을 공격해 오자 당시 성의 주장군이었던 서례원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들 네 의병장이 각기 의병들을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다 순절한 곳, 이것이 임진의병의 시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년 만인 선조 33년(1600) 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각자의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숙종 34년(1708) 지방 사람들의 도움으로 '송담사' 와 '송담서원' 을 세워 이들의 위패를 모셔 두었다가 순조 33년(1833)에 '표충사' 라 이름 지었다.
이후 고종 8년(1871)에 단을 설치하여 '사충단' 이라 이름 짓고 비를 세워두었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을 제사일로 정하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현재는 비각 이외에는 모두 새로 지은 것들로 비각은 앞면 1칸 옆면 1칸의 규모에 옆에서 보아 사람 인(人)자의 선을 그리는 맞배지붕을 올리고 있다. 그 안에 모셔둔 표충단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에 비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사충단은 처음에 김해시 동상동 881-11번지(포교당 앞)에 있었던 것을 동상동 227-6,8번지로 강제 이전 됐다가 구획정리에 의한 택지개발로 현재 위치인 동상동 161번지 분성산 중턱으로 이전되었다.
문화재인 사충단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만 했던 것은 왜적 때문이 아니라 특정인들의 물욕 때문이었다는 것이 사충단을 아는 시민들의 주장이다.
사충단이 무엇 때문에 어떤 사유로 도심 한복판에 100년을 넘게 있다가 어는 날 갑자기 사라져야만 했는지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시 관계자조차도 "옮긴 사유는 모르겠고 다만 처음 이전은 재래시장과 주택들이 계속 들어서는 바람에 옮겨젔을 것으로 추정 한다" 고 하였지만 사실이 아닌것 같다.
1993년9월16일 사단법인 김해시장번영회가 이 토지를 김해군으로부터 불하받아 소유권보존등기를 하였다가 6일후인 1993년 9월22일 당시 지역 유지였던 k모씨의 부인 앞으로 소유권을 넘겼다.
재래시장 확장에 필요하여 불하를 받았다면 6일만에 개인 앞으로 소유권 등기 이전을 해줄 리가 없다는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개인이 국유지를 불하받기 어렵게 되자 사단법인인 김해시장번영회를 내세워 일단 불하를 받고 6일뒤 특정인에게 소유권을 넘겨주는 편법을 섰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충단 토지의 소유권이전 등기를 마친 그 특정인은 그곳에 개인상가건물을 신축했다.
동상동 881-11번지에는 22년전에 대한불교조계종 말사인 포교당의 담을 끼고 사충단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문화재를 옮긴 자리에 아무런 관리조치 없이 특정인에게 불하되어 건물신축과 함께 사찰에서 사용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k모씨는 건물신축 후 남은 사찰 안쪽의 사충단 토지일부(881-11번지69m2)를 1993년12월16일부로 또다시 김해시장번영회로 소유권이전등기를 해주는 등 국가 자산을 마음대로 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게다가 토지와 건축물의 대장에는 구 번지로 기재되어 있어 현재 번지와 달라 행정처리도 미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토지와 건축대장에 동상동 873번지는 재무부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그 중 일부는 881-1번지로 등록되어 있고 상가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사충단이 있던 당초 지번은 881-11 번지였고 사충단 토지를 수용 881-1로 병합한 후 포교당 내에 일부 남아 있는 토지는 수용이 불가하자 881-11로 분할 김해시장번영회로 등기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 관계자는 "너무 오래된 사안이라 잘은 모르지만 현재 번지는 재무부 재산으로 되어있다며 현장을 방문해 자세한 것을 확인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이어 "엄연히 건물이 들어서 있으면 불법건물이라도 세금을 내는 것이 이치인데 건축대장엔 건물이 없으니 무허가인 것 같다며 확실히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문화재가 있던 땅이라도 내장된 문화재 구역이라면 개인 불하가 불가하나 지상 문화재라면 이전 후에는 국가 토지로써 국가가 필요하면 행정에 의해 땅을 보존하거나 잡종재산으로 분류해 개인에게 불하할 수 있으며 873번지는 김해시 소재지만 김해시가 관리를 하지 않고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땅에 대한 지분관리를 하고 있다" 고 답했다.
20여년전 동상동 사충단을 중심으로 왼쪽 편은 당시 김해의 유지였던 K씨의 건물이 있었고 바로 뒤편에는 김해문화원으로 당시 원장은 지금은 작고한 Y씨였다.
행정관청에서도 사충단 토지의 지목과 지번을 변경하거나 분할, 통합하는 방법으로 지목을 일반대지로 변경, 특정인의 대형상가건축이 가능 하도록 했다는 당시 어른신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한마디로 문화재로 인하여 재산권행사를 재대로 못하던 주변 유지들이 힘을 모아 사충신의 묘단(廟壇)을 통째로 옮겼고 문화제보호지역을 해지하여 엄청난 이익들을 보았던 것으로 아는사람들은 알고있다.
사충단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서각인 류재열 선생은 "그때 당시 제사를 마을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지냈는데 사충신이 있는 사충단을 잘 관리하라고 논마지기 까지 사 주었는데 그 논이 온데간데없고 어느 날 가보니 사충단이 사라졌다 며" 개탄했다.
이렇게 갈팡질팡, 오락가락, 모르쇠로 문화재를 관리해온 시 당국 때문에 역사에서 김해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며 유적지인 사충신과 사충단이 후손들과 시민들 곁에서 강제로 잊혀져 가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김해시는 문화도시를 시책으로 표방하고 있다. 가야의 철기가 출도되고 더많은 자료가 쏟아져 나오는 이 시점에 문화의 소중함 보다는 축제의 화려함을 더 생각하는 것 같아 시민들은 씁쓸해 하고있다. 문화는 먹고 마시기보다는 계속 학습되어 면면이 이어져야 한다. 김해시민 절대 다수가 사충신과 사충단이 있는지 조차도 모른것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김해시가 지역의 문화재 보존관리와 역사인물에 대하여 시민들에게 알리는 사업에 보다 더 적극적이어야 입을 모으고 있다.
그당시 김해를 좌지우지 하던 몇몇 유지들에 의해 김해의 관문이자 좌청룡(김해시 부원동 남산)우 백호(김해시 서부동 임호산) 로 불리었던 남산을 밤낮으로 화약을 사용하여 암석들을 폭파하여 들어내고 시청을 옮긴 놓은 사람들인데 "사충단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모르나 역사는 살아있어야 한다" 시민들의 반응이다.
지역의 역사가 새로이 조명되고 훌륭한 인물을 본 받을 수 있는 행사와 사업에 관계기관 및 시민단체가 앞장서야 한다고 김해 시민들은 학수고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