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과 블레셋
삼상7:3-4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 7: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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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사실 성가시고,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기쟁이는 전기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하고,
영양사는 음식 만드는데 필요하고,
건축사는 건물을 유지.보수하는데 필요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뭣하는데 필요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아무런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내릴 수 있습니다.
조직교회에 있어서 본다면
모든 직책들이 그렇습니다.
이제는 AI시대로 돌입하면
모든 직무에 인간이 필요없게 될 것입니다.
설교도 AI가 담당하고,
재정도 AI가, 조직운영도, 사무도
AI가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의 힘으로 처리하고 해결하고자 한다면
선지자는 참으로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력으로
여전히 궁지에 몰린 일이 터진다면,
할 도리를 다 해 보겠지만
어쩔수없는 궁지가 여전히 남을 때,
그 때는 그들이 선지자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흔히 구약을 보면서
선지자를 총사령관처럼 이해하려는
오해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선지자의 존재는
여전히 ‘인간들 끼리의 범주에
놓여있는 것이 됩니다.
참 선지자의 역할은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뒤따라와서
인간 세계에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에 주어진 궁지는
실은 궁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연속적인 일하고 계심의 일환에 해당됩니다.
즉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침공케 하시는데
이는 이스라엘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변화란 딴 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을 두고 말합니다.
본문의 자리에는
금식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금식이란 ‘죽음’을 맛보게 하는 의식입니다.
왜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아무런 방비가 없이
온 이스라엘이 금식에 돌입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인간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바꾸기 위해서 그러합니다.
즉 사람의 방식은
이미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고
여기에서 더 길게 끌어서
살아보겠다는 집념이 표출됩니다.
마치 권력을 오래 유지하기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괸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이런 관점에서 유행된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인간들이기에
신을 섬기는 겁니다.
우상의 관점에서 보면,
죽은 인간은 더 이상
신을 섬길 필요가 없게 됩니다.
살아 있을 때 신에게 잘해서
죽음 이후의 삶까지 보장받겠다는 것이
우상적 발상아닙니까?
만약 이런 취지에서 금식한다면
이 금식은 그야말로
자신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도 않는 신의 변화를 기대하는
회개나 개혁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죽임으로서
‘죽음 속에서 기다리는 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의지가 펄펄 넘치지만
죽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의지’만 온전하게
펄펄 넘치게 됩니다.
참된 금식이란
자신의 것은 모조리 긁어내는 작업입니다.
마치 호박죽을 끓이기 위해
호박을 쪼개고 다루는 작업과 같습니다.
즉 ‘나를 살게 하는 그 무엇’ 조차
다 없애는 작업이 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룰
예상 못할 일’만 남습니다.
이것은 선지자조차도 알 길이 없습니다.
선지자가 특이한 점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본인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단지 앞 일을 말하는 기능만
해야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안다는 것은
인간이 노력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 위에
지속적으로 사건을 덮쳐지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증명을 위해
자기 백성을 사용하고 다루고 있음을
자기 백성들이 알아주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증명’에만 몰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정도로 나를 생각해주신단다. 그러나 나의 가치는 대단하다”
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달리 말해서 하나님은 대자연을 이끄시면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약속과 법이
이 취지를 담으려는 목적으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 와중에서 백성들은
금식을 해야합니까?
그것은 어떤 능력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위의 질을
새삼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즉 자신의 행함은 죄였음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인간의 입으로 털어내어놓기를 바랄까요?
그런 절차를 건너뛰고서도
얼마든지 블레셋 민족을 물리치고도 남는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인간의 죽음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펼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돗자리를 깔아야
그 위에 집에서 사온 점심을
펴놓고 먹을 수 있는 겁니다.
백성들이 금식을 하면서,
금식하는 그 훌륭한 행위에
주목하지 못하는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금식하는 당사자의 금식의 가치보다
자신이 비로소 죄 안에서,
곧 죽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현실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금식이란 자기 부정이요 자기 부인입니다.
금식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미하는 행위입니다.
즉 자신 안에 고통을 채워 넣는 겁니다.
하지만 ‘스스로 훼손하기’는
과연 의로운 행위가 될 수 있을까요?
차라리 금식을 안 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 아닐까요?
여기서 인간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주도권을 인간에게 넘겨주지 않으려한 반면에 인간들은 끊임없이 나라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잘못된 시도를
고쳐놓기 위해서는
죽음의 인생 위에 덮쳐지는 승리를
안겨주는 방식 뿐입니다.
우뢰침이란
곧 인간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과격함입니다.
그리고 예상 못함입니다.
진정한 금식이란
늘상 자기가 예상 못한 일을 찾는
마음가짐입니다.
미처 예상 못한 것을
하루 종일 찾아보세요.
그 은혜를 모으면
12광주리에 가득 찰 것입니다.
인생이란 자신이 살아온 것이 아니라
시간 위에서 자신이 그냥 흘러가는 겁니다.
아무 것도 남은 것 없이 말입니다.
금식이란 하나님의 지속적인 일하심에 따라
흘러가는 인간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 와중에서 에벤에셀
즉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진정한 취지도
함께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