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 세움
2004년 3월 24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6:1-6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6:2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교회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는 무리입니다. 용서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저는 죄인이기에 더 이상 제가 무슨 권리를 주장하겠습니까'라고 스스로 자인하고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면서 용서를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뒤틀린 관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했다는 그 장하고 착한 마음씨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4:32절을 보면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용서하시되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공로를 토대로 하여서만 용서가 됩니다.
즉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를 용서하신 겁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해두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실을 보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한다는 조건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고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복음이 교회 됨의 관권입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는 사람들은 보게 되면, 그 신앙 좋다는 초대교회에 대해서 실망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이 넘치고 화목이 넘친다는 초대 교회에서 왜 파벌싸움이냐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결코 완벽하거나 완전한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자인 하는 자들의 모임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주안점은, 사도의 중재로 인해 구제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교회 되고 아니 되고는 이런 구제 문제가 놓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복음에 있음을 재확인했다는 데서 중요성을 찾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집사를 세우는 이유는, 집사들이 하는 역할이 교회의 지탱하는 중요한 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일은 따로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 위해서 세워진 자들입니다.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완벽한 교회 상을 구축하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열이면 열, 정작 복음의 정신을 그 교회에서 추방시켜 버릴 공산이 있습니다. 교회는 완벽을 추구하는 데가 아니라 복음을 전면으로 내세움으로서 우리가 다 용서받아야 될 자인 것을 날마다 알아 가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초대교회에 분란이 일어난 것입니까? 사도행전 2:43-47의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 때나 신약 때는 사람 사는 곳에는 하나님에 허락 하에 각가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왜 헬라파 과부가 왜 구제 리스트에서 빠졌는가를 따지고 든다면, 아예 왜 하나님께서는 '과부'라는 서글픈 팔자를 주셨는가 하는 점까지 따지고 들어야 될 것입니다.
가난이란 초대교회 뿐만 아니라 옛날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들 약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이웃 사랑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흔히 '약자보호법'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있어 졸지에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로 떠돌아 생활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있을 때에는 통째로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럴 때 눈에 보이지 않으신 여호와하나님께서 직접 후견인이 되셔서 막강한 사랑과 자비로 애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던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사실 그 땅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지주가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의 품군이 됩니다. 임대차 계약한 셈이지요. 하지만 그 뒤 빈번한 전쟁으로 인하여 졸지에 고아가 발생되고 과부가 생겨났습니다.
이로서 땅을 경작 할 노동력 부족으로 공평하게 분배된 토지를 빚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가진 자로 하여금 이제는 자신들이 약자들의 후견인이 되어서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율법으로 명시한 겁니다.
만약에 약자라는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재산에 탐을 낸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가진 자를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출애굽기 22장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약자 보호법의 정신이 성령을 통해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가난한 자들이 구제 받는 것을 마치 마땅히 챙겨야 하는 권리처럼 주장하고 나선다는 겁니다. 헬라파 유대인에 속하는 과부들이 구제 받을 리스트에서 자꾸만 빠지는 겁니다. 행정 착오가 아니라 의도적인 정치 술이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지 파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차별대우 받는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은 무엇이고 히브리파 유대인은 무엇입니까?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민족은 근 1000년 가까이 버티다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추방되고 맙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약속의 땅에 살만큼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 약속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와 사랑이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고 난 뒤 70년 후에 다시 돌아온 유대인들이 있었고 반면에 이왕 고향에 쫓겨난 입장이라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국에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이라고 할지라도 과거 선조들의 잘못을 두 번 다시 범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했던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에스더와 그 가족들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그 유대인의 메시아가 예수님인 것을 인정하고 같은 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되고 아니 되고는 과연 불평 없이 재물을 잘 분배하는데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사소한 것들을 통해 복음 전파를 가로막느냐 아니면 참여하느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주님의 은혜로 들어오는 재물을 그냥 방치할 수 없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하기에 그 업무를 그냥 방치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본질적 임무를 방해하도록 허락해서는 되지 않겠지요.
여기서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결정합니다. 복음 전파에 그 일을 위한 기도하는 것에 사도들이 전념하기 위해 사도들이 직접 구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씀드려서, 모든 제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참으로 교회 됨의 본질이 어디 있는 가를 분명히 새겨두고자 하는 겁니다.
구제가 없어도 교회는 되지만 사도가 전하는 복음 없이는 도저히 교회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란 많이 도움 받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쉽게 만족할 자들이 아닙니다. 구제하는 자와 구제 받는 자의 정신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용서해 주심이 두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스러워합니다. 구제를 잘하고 못하고를 이상적인 훌륭한 교회 됨으로 규정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복음은 교회의 재정 관리 문제로 인해 박해받고 결국에는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즉 교회라는 것을 그냥 쉽게 생각해 버리면, 관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을 구분하기 쉽습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은 복음이라고 보게 되고, 교회 건물에 대한 관리나 운영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처럼 인식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 대해서 사도는 우려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는 늘 회개해야 하는 단체입니다. 무엇으로 인하여 회개해야 합니까? 바로 은혜를 은혜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마땅한 권리나 권력처럼 연상하는 그 오만함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크게 구제 금을 지불하면 큰 은혜이고 적은 구제 금을 지불하면 적은 은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 그것이 마땅히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이 일 후로 다시는 교회에서 구제로 분란이 없었다는 그런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아니 됩니다. 단지 교회의 복음 앞에서는 구제나 돈 문제가 중요한 사항이 아님을 명심하는 계기로 삼아야 될 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칫하면 자신이 용서받아야 마땅한 죄인임을 잊고 지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늘 저희들이 용서받았음에 대해서 감격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십자가마을/이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