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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4년 2월 28일 토요정례법회 ○
★ 청년 강연
일맥상통 1단 ‘남궁부’ 교우님의 ‘원불교를 만나서’
질문과 답변
Q. 허공은 교우님 :
강연 중에 기독교는 믿음으로 밀고, 우리는 스스로 하다보니 그런 부분에서 연료가 부족하다 얘기하셨는데
지금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A. 남궁부 교우님 :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함께 하시고 그러한 것들이 기독교에만 국한 된 것으로 알았다.
불교와 다르게 원불교는 자력적인 면 뿐 아니라 타력신앙도 활용할 수 있다.
법신불이란 것이 기독교의 감정적 인격적인 것 뿐만이 아니다. 원불교는 자타력병진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원불교 교법을 활용할 수 있는 부분. 그런 부분에서 불교든 기독교든 믿는 것이 좋지만
원불교는 자타력병진을 통해 실제로 활용할 수가 있다.
Q. 김명선 교우님 :
황금 같은 토요일을 빼기가 쉽지 않았는데
단장․중앙님의 공심으로 법회가 1순위는 아니더라도 2순위까지 올라왔다고 했는데 1순위는 무엇인가요?
A. 남궁부 교우님 :
정말 1순위가 되어가고 있는데,
내가 약속으로서 참가해야 할 중요한 자리, 학교 행사 등,
정말 내 자신으로서 중요한 자리인데 완전히 빼고서 여기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취사를 잘하는 과정에서 1순위가 될 수 있는 거 같다.
무조건 교당에만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Q. 문혜은 교우님 :
처음 교당에 오셨을 때, 비록 내가 원불교 집안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교당이나 법회 참석에 대해 마음열기가 어려우셨을 것 같다.
그리고 단회를 하면서 제가 부 교우에게 느낀 것은 이 친구는 스스로 느껴야만 움직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보니 본인 스스로가 본인을 믿어하지 않던 부 교우가 변해서 이런걸 느끼고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요.
부 교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거나 주변 친구들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신감이 생기셨는지?
A. 남궁부 교우님 :
말로서 원불교가 좋다라고 하는 것도 좋은데, 사실 그런 용기가 크진 않다.
정말 제가 몸소 잘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넌 왜 그렇게 하냐’ 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면 그때 원불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직까진 더 좋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반갑습니다.
2월의 마지막 밤인데 텔레비전 보시지 여기에 오셨는가.
오늘 남궁부 교우님이 강연 해주셨는데, 성이 남궁이고 이름이 부입니다.
원불교에 남궁 교무님이 다섯 분이 계신다. 다 남궁부 큰아버지 고모 이모 이렇다.
다 부 아버지의 형제 남매간이시다. 전부 다 출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복지관에 계신다.
우리 한국에서 복지기관 가장 크게 운영하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원불교입니다.
사단법인 삼동회라고, 복지기관을 제일 많이 갖고 있고 운영이 가장 잘 되고 있다.
원불교는 크게 세 가지 한다고 하죠?
교화(敎化) ․ 교육(敎育) ․ 자선(慈善) 이 세 가지가 원불교의 3대 사업입니다.
교화기관은 교당이나 총부, 각 교구, 훈련원이고, 교육기관은 학교라든가 선학대학, 서울에는 휘경 여․중고, 익산에는 5개의 중․고등교, 종합대학, 대안학교 등이 있다.
그 다음 자선은 보육원, 복지관, 자선원, 동그라미 재활원 등 여러가지, 또 병원, 전국의 보화당만 해도 꽤 많다.
원광대 병원이라든가 여러가지 운용을 하는 것은 원불교의 3대 사업이다.
이것은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제생의세의 사업이다.
대종사님은 원불교를 제생의세를 위해 내 주셨다. 보통 사람은 자기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산다.
그러나 대종사님은 자타가 불이다. 모두가 하나인 일원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당신 것이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 교화가 되지 않아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
이 마음을 어떻게 수많은 경계 속에서 이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신앙생활을 통한 교화를 내놓으셨다.
사람의 인격의 90% 이상은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다.
무지가 있음으로써 얼마나 이 세상이 어지러운가.
지식과 행복은 대개 비례한다. 무식 할수록 오히려 불행하다.
보통사람은 무식 할수록 죄업이 많고 고통스럽고 빚이 많아진다.
그래서 교육 사업을 하는 것이다.
이 교육사업은 단순한 교육사업이 아니다. 이를 통해서 공도자를 키워내고자 하는 것이다.
석․박사를 따서 자기 혼자 잘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사업을 통해 사은의 은혜를 알아가고 받은 은혜에 대해 어떻게 세상을 위해 함께 할 것인가 하는 교육을 해 나간다.
다음은 자선이다.
자선은 약자를 위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 경제가 어려운 사람에게 삶의 활력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사업을 잘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화 ․ 교육 ․ 자선을 잘 하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한다. 공부는 마음공부를 말한다.
대산종사님은 공부 위주 교화 종, 교화위주 사업종이라고 하셨다.
물론 사업을 통해서 교화도 하고 공부도 하며 사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먼저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공부가 안된 상태에서 자선사업을 한다면?
교당에서 봉사한다는 것이 자선이죠.
공부가 안되면 복은 복대로 지으면서 죄는 죄대로 또 짓게 된다.
자기 교화가 되지 않으면 그런 것이다. 결국 늙어서 쭉정이만 남게 된다.
이는 마치, 자선이라는 것은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떠주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는 자기가 샘을 파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공부를 통해서 이것도 저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자기가 쓰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나는 겨우 현실적으로 눈 앞에 보이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만 떠주는 역할을 하면서 산다면
그것은 아직은 부족하다.
뉴스는 타겠죠. 아프리카 가고, 눈 앞에서 물 떠주면 사람들 좋아한다.
하지만 원천수, 물을 퍼낼 수 있는 방법과 원리를 알려주는 교화.
그 교화를 되도록 까지 해주는 이 마음공부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른다.
정말 아까 그 물이 스스로 파서 마음대로 먹든지, 샤워를 하든지, 야채를 씻든지, 공업용수를 쓰든가
마음대로 쓰는 것이 마음공부다.
그러면 얼마든지 남도 퍼줄 수 있고 안내 해줄 수도 있다.
그래서 교당은 뭐하는 곳이냐.
교화 ․ 교육 ․ 자선은 어떻게 보면 다 수양 ․ 연구 ․ 취사의 삼학이다.
삼학을 병진해야 한는데, 교당은 일단 마음공부 하는 곳이다.
제가 어제 어떤 분 상담을 했다. 원불교 잘 모르는 사람이다.
느낀 것이 한편으로는 교화 할 만 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마음공부의 필요성.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내가 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몰라서 답답해하고 때로는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병으로 와서 그런 사람, 스승, 신앙처를 찾아서 다니기도 한다.
조금만 살아보면 얼마나 마음이라는 것이 위력적이고 마음이 들어 일도 하고,
사람 관계도 마음이 들어 풀어 간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이 마음은 언제 어떻게 멈추고, 어떻게 지켜내며,
어떤 것이 내 참마음이며 어떻게 단련해야 할 것인가.
이 상처 난 마음, 찢어지고 아픈 이 마음을 어떻게 본래의 생생약동 탄력 있는 마음으로 큰 마음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이것을 알려주는 곳은 미안하지만 별로 없다. 영어․수학 가르쳐주는 곳은 많다. 컴퓨터도 의술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형한 것이라서 사람들의 관심도 없을 수 있고, 또 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별 짓 다한다. 고행을 하기도 하고, 굶어보기도 하고, 누군가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온갖 방법들을 하는데 사실 대종사님은 아주 간단하게 밝혀놓으신 것이다.
우리 남궁부 강연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똘똘하다. 내가 남궁부 나이에 정말 저렇게 똘똘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구만 치고 다녔던 것 같다.
어떻게 대학 1학년 때 법회에 이렇게 오고 훈련 나고, 마음이 무엇인가 숭산 스님 책도 찾아보고 물어도 보고 했는가.
나는 그렇게 못했던 듯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아볼까, 당구 3쿠션을 칠까 하는 생각 했었다.
저는 가치관이 바뀐 것이 언제냐면, 군대에서 전서를 6번 읽고 나서
‘아, 내가 보았던 세상이 너무나 거꾸로 알고 있구나. 잘못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존경받는가, 어떤 것이 행복한가. 보인다.
그때까지는 막연했었다.
높은 직책, 좋은 학벌이나 돈․명예가 있으면 정말 그 사람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행복에 근접하지 않은가 생각 했었다.
그런데 법문을 보니 그렇지 않더라.
자기의 존재를 보아 얼마든지 마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얼마든지 피해보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존경받더라.
그것도 한순간이냐, 죽고 나서 존경인가, 다르더라.
우리 법을 보니 가치가 다르더라.
특신급이라는 것은, 선택이다.
보통급 때는 원불교를 인연 따라 소개 받아서 온다. 그런데 특신급 때는 가치관이 달라져 선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인과와 영생을 알고 보았더니 이것이 더 가치있더라 하는 것이다.
시간, 돈, 에너지, 만나는 사람을 과거에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그런데 이 법을 알고 보니 이것이 더 가치있더라 하는 것을 안다.
여러분 시간 나면 무엇을 선택하는가. 갑자기 돈 생기면 어떻게 쓰실 것인가.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
그 사람의 가치관, 인생관, 진리관, 생사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선택이 달라지더라.
그 선택이 달라진다는 것은 삶의 방향이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선택의 시점이 바로 특신급의 시점이다. 아주 중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 내 몸이 나인 줄 알고 죽으면 끝나는 줄 아는 것, 인과가 웬 인과인가.
내 욕심과 지견, 관습, 습관에 의해 판단하고 살 것인가. 아니면 대종사님의 교법에 대한 표준과 표본을 세워서 판단할 것인가.
이것은 삶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마 부 교우가 했던 생각을 여러분들도 다 하셨을 것이다.
종교 다니는 사람 특별한 사람 갖고, 액세서리처럼 다닐 수도 안 다닐 수도 있고.
한 때는 그랬을 것이다.
나는 이것 같이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강력하게 말해도 교무님 애쓰네,
나는 내 생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믿음이나 지견, 지혜, 인연 따라 다른 것이다.
우리의 마음공부는 끝없는 자기와의 대화요, 작은 나와 큰 나의 갈림길이다.
아까도 보면 강연 내용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확실히 바뀐다.
‘아, 이러니까 다니는구나.’ 하고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법회에 와서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을 확인하고 간다고 한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모른척 해버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확인하고, 그것이 친근하게 느껴지면 좋다고 한다.
그것은 배움, 믿음의 자세는 아니다.
너는 해라고 해서는 안된다. 서로 에너지가 불필요해진다.
저도 설교 하면서 흡수가 안되고 벽에 부딪치는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나도 힘들다.
그런 사람은 빨리 마음을 열든가 해야 한다.
가수는 자기가 노래가 좋아서도 하지만, 관중이 없으면 안 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주고 받는 것이며, 그래야 힘이 된다.
어린이법회 때는 간식이 중요하더라. 그런데 요즘은 간식도 웬만한 것 가지고는 안되는 것 같더라.
교무님 하기도 쉽지 않다.
요즘은 집에서 멀어도 안나온다. 그래서 결혼할 때 집의 위치를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벌써 자기 주장이 싹 틀 때 되면 안나온다.
부모가 내 자식을 전무출신 시키고,
대종사님 법을 빨리 알게 하여 이 세상을 기쁘게 자신 있게 살아가게 하려면 그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저도 고등학교 때 딱 이 표현이었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데 ‘도덕적으로 좋은 말씀 듣는 곳’ 딱 이랬다.
거기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한 번 참회 해 볼 수 있는 곳’ 저도 이렇게 다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상담했더니 기독교는 어쩌고 불교가 어쩌고 하고 얘기하더라.
그런데 사실은 당신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닌가.
본래의 참 마음으로 온전한 정신을 살아볼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오늘 법문을 들으면서도 교무님이 사투리를 쓰네 안 쓰네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 속에 나와의 대조가 중요하다.
남궁부의 강연을 보면서도 나도 저런 적이 있구나 생각하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저런 생각을 하네,
저 사람이 나보다 법호 빨리 타겠네 생각해도 좋다.
기본적으로 자기와 비교해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통만법명일십(通萬法明一心)’이라고 한다.
만법을 통하여다가 한 마음을 밝히는 것, 이것만 잘하면 가히 대원정각을 이루리라고하셨다.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만법을 통하는 것 하나 하나가 다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 된다.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은 우주를 밝히는 것이다.
간격을 초월하는 것이다.
원불교 교무님이 이런 말 하더라, 원불교 교리가 이렇더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원불교의 삶이 내 마음에 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궁금했던 것을 저것으로 풀어 낼 수 있는가.
내 답답한 마음이 저것과 연결하여 내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연결해 보아야 한다.
황금 같은 시간이기 때문에 황금 같은 법회를 이 시간에 하는 것 뿐이다. 실제로 그렇다.
어느 교당이 황금 같은 시간에 왜 법회를 보는가 하여 수요일로 옮겼다고 한다.
나는 그 때 대단히 마음이 아팠다. 가치관이 뒤로 밀렸다.
여러분 수요일, 목요일날로 법회 옮겼다고 보세요. 그것은 법회 봤다는 위안을 삼는 일 뿐이다.
직장 문제, 차가 막힌다는 등의 온갖 얘기를 하면서 늦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으로 해서 만법을 통해 내 마음을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원정각 할 수 있겠는가.
일<사람<마음
이것을 정확히 가리내셔야 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내 마음을 알아서 잘 지켜 쓸 줄 알면, 사람 관계에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그렇게 아파하지 않는다.
일 못해서 괴로워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힘이 없으니 사람 관계가 얽히고, 설키고 감정 조절 하나 못하고 힘든 것이다.
그런데 환경 바뀌면 괜찮은가. 환경 바뀐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생각, 태도, 습관을 바꿔야 한다. 그게 쉬운 것 아니다.
환경이 너무 안좋고 위태롭다 해서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직장이 일년에 한번씩 바뀐다 하는 사람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 마음이 문제고, 자기가 사람관계 못하고 일을 잘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해서 뭐하자는 것인가.
사람관계 잘하자는 것이다. 사람관계 잘해서 일 잘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일만 쳐다보고, 사람 무시하고
때론 사람은 있는데 그 마음은 보지 못하고 사람 관계에서 술만 마시고 인간관계 맺는다고 하고 다니면 나중에 끝이 안좋다.
내가 여기 교당에 살면서 보람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우리 부같이 철딱서니 없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우리 법을 통해 나란 존재, 세상을 보는 시각 안목에 대해
또는 자기 능력과 가능성에 대해서 스스로 찾아갈 때이다.
무궁무진한 묘리, 조화가 나에게 있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확인할 때 엄청난 기쁨이 있을 것이다.
무어라고 말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 그리하여 그 기쁨을 자기가 알아갈 때 나의 행복은 거기에 있다.
스스로 나는 못났다 왜 바보일까 확인하고 있던 사람이 대종사님 유무념 공부, 신앙, 법문을 통해
때로는 사은사요 삼학팔조의 묘방을 통해 탁, 그 병이 치료되어
자신있게 기쁘게 살아간다면 국한을 넘어 큰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대종사님께도 가장 기뻐하실 일이고,
이 사회에도 유익된 일이요 스스로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부 같은 성격이 좋다. 한번 파고 들면 파고 들어야 한다.
우리 부는 다행이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1년 동안의 진도가 빠른 것이다.
지혜도 있고 똘똘하기도 하고, 까닭있게 파고드는 것도 있지만
만약 저 친구가 인연이 없었다면 오늘 했던 강연의 반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 친구는 자기가 안만큼 믿는다. 그런데 인연이 있고 어린 시절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안만큼 믿기도 하지만, 믿기를 먼저 하면 빠르다.
합리적인 사고로 생각할 때는 거부하고 싶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인과 믿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인과 맞아! 하면서 태어나지 않았다.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가치관 시야가 바뀔 수 있듯이 대종사님 안목으로 많이 바꿔나갈 수 있고 그렇게 되실 것이다.
아까 하심하자. 나를 낮추자. 그러면서 혼자 열심히 노력했네요.
염불도 해보고, 내가 이해해 줘야지 하면서. 스트레스도 받고.
공부를 하다보면 원불교가 나 죽이네, 이 소리를 수십번 한다.
그 소리가 바로 크는 소리다.
일어나기 싫은 데 일어나고, 밥 좀 더 먹고 싶은데 못 먹게 하고,
다리 아픈데 헌배하라 하고, 좀 자면 좋겠는데 단장은 전화해서 법회 올꺼지?
아이고, 원불교 때문에 불편하다 이거죠.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한다.
그 불편의 정당성 유무를 잘 파악해야 한다.
불편한 것은 나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생각이다. 그 불편이 나를 살려주는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쉽게 말하여 감기는 나를 살려주는 고통이다.
감기가 걸려줌으로써 너 좋은 말 할 때 몸 관리해라 하는 것 아닌가.
헌배해라.단회 때 발표해라 등등 다 이런 것들이 정당한 고통이다.
안 해 봤던 첫 경계를 맞이하면 사람이 딱 거부한다.
그 때 거부하는 그 마음을 빨리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믿음의 관계, 인연관계, 지혜의 관계, 은혜의 관계, 마음의 힘의 관계다.
그 때 탁, 돌릴 수 있다. 그 때 못하게 잡는 것이 바로 무서운 습관이요, 욕심, 무명이다.
교전을 읽으라고 해도 읽다 자버리지 않는가. 억지 춘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억지 춘향 안에서 내가 커나간다.
자존감과 개성이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열린 마음이 없는 너무나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크지를 못한다.
어릴수록, 늙을수록 타력이 필요하다. 젊은이는 자력이 필요하다.
원불교에 처음 온 사람은 타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자존심만 꼿꼿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빨리 열고 타력을 얻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돈과 명예가 전부가 아니다 이런 말을 했는데 갖다 주면 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각은 훌륭하시다.
강연이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미국 듀크대 박사가 쓴 논문 중 이런 것이 있다.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주면서 몇 월 몇 일까지 내라, 하나는 아무 때나 내라, 또 하나는 네가 하고 싶을 때 내라 하였다.
그런데 어느 기간을 정해 주었을 때 가장 효과가 좋았다. 이것은 타력의 필요를 말한 것이다. 자력으로는 쉽지 않다.
우리가 왜 도서관에 가는가? 타력은 묘한 힘이 있다.
기독교는 초입자가 좋다. 타력으로 밀어 부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력도 없는 사람이 타력도 배타하는 사람이 있다.
대종사님의 교법은, 대종사님의 교리가 아니라 내 삶의 에너지요 생명과 같은 것이다.
즉, 나를 위해 오신 분이다, 이것을 빨리 가까이 기운이 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으로 마음을 여는 것이다.
계속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원불교는 이런 소리 하더라 하는 것은 은혜가 안된다.
유무념과 일기법으로 습관을 어느 정도 통제가 되고 위력이 있다 하셨는데, 이것은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통장에 돈 두는 것은 보인다.
그런데 심고 한번 모시고 유무념 체크 한 번 하여 자기가 마음 한번 챙기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모른다. 그것을 잘 모른다.
아무것도 아니면 사실 아무것도 기인 것이 바로 일기이다.
아까 건물 짓고 돈 받는 것이 큰 것인 것 같지만 사실 내 마음에 자기를 체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심고․일기가 더 중요하다. 신체적으로도 확실히 도움이 된다. 실지로 그러하며 자기가 느낀다.
표정도 밝아지고 긍정적인 삶, 감정조절도 잘 된다. 지속적으로 마음을 챙기고 보면 아이큐도 좋아진다.
내가 아이큐 검사지를 보고 내가 원숭이와 별 차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대종사님 법 만나고 나서 내가 무척 좋아진 것 같다.
내가 느낀 만큼 알아가기도 하지만 그 법문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
그렇게 된다면 우리 남궁부도 법회나 심고에 대한 가치를 알 것이다.
자기가 경험한 현재 판단에 만족하기 보다도 스승님의 말씀에 함께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직 당연해지는 것 같으면 법회 때 오기 싫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연해지면 기쁘게 기다려진다. 괴로울 것이 없다.
내일 법회인가, ‘오늘 일찍 자야겠네, 빨래할 것 미리 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그것이 적극적 공부 자세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갈 거냐 말 거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근실편인가.
누구는 쭉쭉 진급해 가는데 자기는 자기 하나 못 이겨 마음대조 하고 있으니 공부는 공부겠지만
남들은 돈 벌어 저축하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버는 것이 좋을까 하고 있는 것과 같다.
도학과학을 병진하는 것이 좋다. 맞다. 그러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서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결국은 도학이 과학을 선용하는 것이지 결코 과학이 도학을 끌어가는 것은 아니다.
미국 금융사태가 부동산 다 싸게 빌려주고, 카드 갖다 쓰라고 하니 갖다 썼다.
은행에서 싸게 빌려주니 그대로 가져다 써서 문제다. 카드를 개인당 6개 가지고 있었다 한다.
마음의 힘이 없으니 그렇다. 머리 좋은 경제인들이 틈새를 돈 되면 이용하고 이용하니, 이후에 무너지면 쭉쭉 다 무너진 것이다.
이는 도학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 좋은 지식인재도 중요하다.
그러나 지혜로운 도덕인재도 필요하다.
그래야 이 세상에도 도움이 되고 스스로도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질문과 답변
Q. 김세명 교우님 : ‘통만법명일심’에서 그냥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일심이라 한 이유는?
A. 교무님 : 거기서 일심이란, 참 마음이요 근본 마음을 말한다.
수양을 통해서 연구까지 해서 만법으로 써라. 이것이 그대로 삼학이다.
한 마음을 밝혀서 만법에 쓰기도 하고 만법을 통해다 한 마음을 밝혀내기도 하고.
거기서 일심은 사람들이 밖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아닌 내면에서 자기 안으로 가져다 오는 마음.
그 마음을 바탕으로 밖을 바라보는 마음을 이야기하여 일심을 쓰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 감상담
김세명 교우님 귀국 인사.
반갑습니다. 김세명입니다.
교무님께서 발표하라 하셔서 너무 떨려서 강연과 설법에 집중하지 못한 점도 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한국에 돌아와서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의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제가 학문을 공부하는데 학문이 진리 탐구가 목적인데 그것만으로는 제가 만족이 안됐다.
학문은 뭔가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미국에서 숱한 경계들 속에 좌선을 하면서
학문보다는 안으로 공부하는 것이 필요 하구나 이게 진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
앞으로 법회 때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