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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자리
제정구에게 집이란 삶의 총체적인 자리요,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누려야 할 ‘몫’이었다. 주거가 ‘있는 자’들의 사치와 향락과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삶의 유린이요, 나무를 뿌리째 뽑아 던지듯 강제철거를 자행하는 것은 삶의 말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 이주는 뿌리 뽑힌 나무들이 한데 모여 살아갈 터전(숲)을 만드는 노동과 건설의 과정이자, 철거민 스스로 패배의식과 열패감을 씻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과정이요, 이웃간에 정과 생활을 나누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양평동 판자촌에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면서, ‘복음자리’ 사랑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공동체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제정구와 주민들의 선택은 역시 ‘집단 이주’였다. 정일우 신부를 비롯한 다른 공동체 식구들도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철거당하더라도 어디든 함께 이사를 가서 이웃으로 살자.’는 주민들의 성원은 집단 이주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동네에 살던 철거민들 중에 방을 얻지 못한 세대도 집단 이주 대열에 대거 동참했다.
빈민 현장 속으로
1977년 봄, 2만여 철거 세대 중에서 최종적으로 마음을 정한 170세대가 우여곡절 끝에 안착한 곳은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 김수환 추기경의 주선으로 독일 모 단체에서 융자금을 얻어 매입한 땅이었다. 부천 남부역에서 경원여객 버스를 타고 여우고개, 하오고개를 넘어 신천리까지 족히 40~50분은 걸리는 외지고 황량한 곳이었다. 막노동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이 서울을 떠나 집단 이주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모한 모험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양평동에서 제정구 일행과 함께 한 끈끈한 삶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가조차 찾아보기 힘든 허허벌판에 천막을 친 제정구는 주민들과 함께 터를 고르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는 대역사를 감행했다.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건설 현장을 누비는 제정구의 모습은 그의 아내 신명자의 표현대로 ‘펄펄 뛰는 야생마’와도 같았다. 대학에서 제적된 후 빈민운동에 투신한 그의 동생 제정원은 총무를 보았고, 정일우 신부는 ‘브리샤’를 몰고 서울을 왕래하며 필요한 물자와 경비를 조달했다. 이들 모두는 학기가 지난 아이들의 전학, 갑작스런 이주에 따른 행정 처리, 전기와 식수 문제 등 산더미 같은 일거리 속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냈다. “서울을 탈출하여 해방구로 간다.” (박재천,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사무국장)는 희열과 낭만도 없지 않아서, 이들은 시흥으로의 집단 이주를 ‘출애굽’, ‘엑소더스’로 부르며 서로를 격려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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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계동 재개발 활동 당시의 제정구 (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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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 현장 속으로
1977년 봄, 2만여 철거 세대 중에서 최종적으로 마음을 정한 170세대가 우여곡절 끝에 안착한 곳은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 김수환 추기경의 주선으로 독일 모 단체에서 융자금을 얻어 매입한 땅이었다. 부천 남부역에서 경원여객 버스를 타고 여우고개, 하오고개를 넘어 신천리까지 족히 40~50분은 걸리는 외지고 황량한 곳이었다. 막노동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이 서울을 떠나 집단 이주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모한 모험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양평동에서 제정구 일행과 함께 한 끈끈한 삶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가조차 찾아보기 힘든 허허벌판에 천막을 친 제정구는 주민들과 함께 터를 고르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는 대역사를 감행했다.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건설 현장을 누비는 제정구의 모습은 그의 아내 신명자의 표현대로 ‘펄펄 뛰는 야생마’와도 같았다. 대학에서 제적된 후 빈민운동에 투신한 그의 동생 제정원은 총무를 보았고, 정일우 신부는 ‘브리샤’를 몰고 서울을 왕래하며 필요한 물자와 경비를 조달했다. 이들 모두는 학기가 지난 아이들의 전학, 갑작스런 이주에 따른 행정 처리, 전기와 식수 문제 등 산더미 같은 일거리 속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냈다. “서울을 탈출하여 해방구로 간다.” (박재천,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사무국장)는 희열과 낭만도 없지 않아서, 이들은 시흥으로의 집단 이주를 ‘출애굽’, ‘엑소더스’로 부르며 서로를 격려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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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정구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뿌리 깊은 열망이 있었다는 정일우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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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자리 마을의 탄생
흔히 제정구를 ‘빈민운동의 성자’로 부르는 이가 많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용인하고 끌어안는 유형의 성자는 아니었다. 그의 영혼은 죽는 날까지 ‘가난의 희망’과 ‘참 나’를 찾아 순례하는 구도자였으나, 칼날 같은 현실 속에서는 단 한순간도 인간이기를, 특히 정직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는 미워해야 할 것을 지독스레 미워했고, 사랑해야 할 것을 열렬히 사랑했다. 사소한 이해관계 때문에 끊임없이 다투고 서로를 불신하는 빈민들의 비루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미워했으며, 작은 일에 감동하고 이웃간에 정을 주고받을 줄 알며, 역동적인 생명력을 간직한 그들의 삶을 사랑했다.
“왜, 술 마시면 ‘꼬장’ 부리는 사람 있잖아요? 밤에 가지도 않고 방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개별적으로 시비 붙어 오고 그러면, 마냥 받아주지 않아요. 그냥 치고받을 때는 불 같아요. 주민들이 뭔가 술수를 쓰고 거짓말하고 그런 거 절대 못 보죠. 피하는 법이 없어요. 늘 정면 돌파지. 그런데 특별히 제 선생한테 더 많이 깨진 사람들이 그때의 정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우리 기념사업회에서 제일 열성적인 회원이죠. 그러니까 아주 특별한 카리스마가 있는 거야.” (박재천)
제정구가 55세의 나이로 돌연 세상을 떴을 때, 가장 슬퍼한 것은 시흥에서 그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평소 제정구에게 유난히 자주 시비를 걸었던 이가 있었다. 나름대로 망자와 화해를 하겠다고 빈소를 찾아온 그는 끝내 술에 취해 유리창 몇 장을 깨는 소동을 벌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빈소에서 추태를 보인 그를 손가락질했지만, 시흥에서 고락을 함께 한 ‘공동체 식구’들은 사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만의 방식과 애정으로 제정구를 떠나보낸 것이었다.
제정구는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이 일으키는 소소한 분란과 시비를 ‘처음으로 계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소중한 의식’으로 받아들였고, ‘함께 집을 짓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통과해야 할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했다.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 그는 주민들에게 모두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바라볼 것을 끈기 있게 요청했고, 부단히 싸웠으며, 총회와 마을 잔치를 통해 이견을 좁혀 나갔다. 공동작업과 새참, 흥겨운 잔치마당은 주민들의 각박한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주민들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기 시작했고, 공공시설을 위해 푼돈을 모을 줄도 알게 됐다.
공동체를 꿈꾸며 만든 복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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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구는 복음자리 마을을 진정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했다. 생계대책이 없는 가난한 주민들을 지원할 수 있는 경제공동체를 구상하던 끝에 1979년에 복음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아름농장, 한우협동조합 등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철거 걱정 없는 내 집, 내 땅에서 산다는 안정감 속에서 주민들도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때마침 마을 근처에 공장이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취직하는 행운도 있었다. 주민들은 불과 2년 만에, 신천리 땅을 매입하기 위해 독일에서 빌린 돈을 전액 갚게 되었다.
그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80년에는 제2차 정착촌 한독마을과 목화마을이 잇달아 들어서게 되었다.
사진도움 / (사)제정구기념사업회
<김 기 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자료제공 :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