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휘가 수경(守經)이고 자는 자정(子正)이며 성은 권씨(權氏)인데 호가 자락당(自樂堂)이다. 비조(鼻祖)는 고려의 태사(太師) 휘 행(幸)인데, 이 때부터 벼슬한 분들이 연이어 나왔다. 5대조 휘 식(軾)은 시직(侍直)을 지냈고, 고조 휘 숭조(崇祖)는 별제이며, 증조 휘 사형(士衡)은 직장이고, 조부 휘 무성(武成)은 호군이다. 아버지 휘 희순(希舜)은 도사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나주 박씨(羅州朴氏)인데 충의위 박항(朴恒)의 딸이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17)에 문소(聞韶)의 사촌리(沙村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순수한데다 기개와 도량이 준정(峻整)하여, 겨우 스승을 찾아 글을 배우기 시작할 나이에 벌써 그 행동거지가 마치 어른 같았다. 공이 9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만났는데, 이 때 아버지 도사공(都事公)이 의병을 불러모아 가지고 전쟁터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공은 매일 새벽에 목욕 재계하고 하늘에다 절을 하면서 아버지가 개선(凱旋)하여 돌아오기를 빌었다. 그리고 절구 한 수를 짓기를, “어떡하면 만인을 상대할 병법을 배워서, 적들을 소탕하고 태평을 이룰꼬.[何能學萬敵 掃除致太平]” 하였는데,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 장현광(張顯光))이 이 말을 듣고 후일에 나라의 인재가 될 것이라고 공을 칭찬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는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 정구(鄭逑))을 찾아가 글을 배웠는데, 경전의 뜻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수사(修辭)적인 기교가 풍부한데다 민첩하여 동학(同學)들이 다들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뒤 상을 당하여 빈(殯)과 염(殮)을 모두《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장례를 마친 뒤에는 산소에다 여막(廬幕)을 짓고 묘(墓)를 지켰다. 궤전(饋奠)을 올릴 때는 반드시 몸소 깨끗이 몸을 씻고 정결하게 제수를 챙겼으며, 아침저녁으로 곡벽(哭擗)을 하였는데 그 애통해하는 모습이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 뒤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곳을 가리켜서, ‘효자의 여막이 있는 동네[孝廬洞]’라고 하였다.
상기가 끝나자, 천거를 받아 제릉(齊陵 태조 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더러 나갈 것을 권하면, 공이 문득 울면서 말하기를, “아무리 좋은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화려한 벼슬 자리가 주어진다고 한들,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가 다시 살아 와서 보실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조용히 지냈는데, 날마다 성리(性理)에 관한 책들을 읽고서 생각하며 반복하여 탐색하면서 세월이 가는 줄도 몰랐다. 거처하는 곳에 ‘자락당(自樂堂)’이라고 편액을 건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뜻이었다.
저술한 책으로는《기여집(起余集)》이 있는데 마음을 조존(操存)하고 성찰(省察)하는 요령에 관한 것이며,《담총집(談叢集)》이 있는데 분노와 욕망을 응징하고 막음으로써 허물을 고치어 선행으로 옮겨가는 방법에 관하여 말한 것들이니, 모두 한강(寒岡)에게 질정(質正)하여 바로잡은 것들이며 또한 퇴도 부자(退陶夫子)로부터 사숙(私淑)한 것들이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 인조5)에 오랑캐의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어가(御駕)가 강화도로 행행(行幸)하자, 조야가 흉흉하여 마치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다. 이에 공은 강개(慷慨)하여 복수의 눈물을 뿌리면서 동지들을 불러모아서 장차 날을 다투어 싸움터로 달려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때 마침 도적들이 물러가서 결국 중지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헌(旅軒)이 격문을 띄워서 공을 좌도 의병장(左道義兵將)으로 삼았다. 이 때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이 우도 호소사(右道號召使)로서 도 전체의 군무를 통섭(統攝)하였는데, 복명할 때에 아뢰기를, “의성(義城)의 의병장 권수경은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였고 의병들을 널리 불러모으는 일에 또한 열성적이었으며, 사람됨이 백집사(百執事 여러 담당관. 백관(百官))의 직임에 충당할 만한 자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양포(糧布)를 수취(收聚)하고 군비(軍費)를 잘 조달한 사실들을 보고했으므로, 특별히 전조(銓曹)에 명하여 참작해서 녹용(錄用)토록 하였다.
그 뒤 9년이 지난 병자년(1636, 인조14)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계획을 도모했는데, 이 때도 모두 정묘년 때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조령(鳥嶺)에까지 이르렀다가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나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돌아왔다.
그 뒤 마침내 세상의 일들을 잊어버리고 시(詩)와 술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리고 역사책을 읽다가 고금의 흥폐(興廢)에 관한 것에 이르면 문득 책상을 치고 흐느끼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공이 일찍이 기러기를 읊은 시에,
내가 옛날에 칼을 잡고 융단에 섰을 때는 / 昔我戎壇仗劍弓
충천하는 의기가 무지개를 내뿜었다네 / 當年義氣吐長虹
장대한 뜻은 못 이루고 몸만 먼저 늙었으니 / 壯心未遂身先老
홀로 다락에 올라 날아가는 기러기 헤아리누나 / 獨上層坮數落鴻
라고 하였으니, 공의 지조를 알 만하다.
엄공 정구(嚴公鼎耉)가 일찍이 군수가 되었을 때 크게 학교를 일으키고 공을 맞아다가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더니 사도(師道)가 매우 높아졌다. 그래서 엄공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그 경론(經論)과 학술(學術)의 심오함과 열어서 이끌어 줌의 명백함은 비록 중앙의 국학(國學)이라도 그 스승의 직임을 능히 감당할 만하겠다.” 하였다. 주자(朱子)의 백록동(白鹿洞)의 동규(洞規)를 백곡서당(柏谷書堂)에다 걸어 두고 봄가을로 이 곳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으며, 또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을 시행하였는데 해마다 이것을 그 규칙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기해년(1659, 효종10)에 병이 심해지자, ‘충효근검(忠孝勤儉)’이란 네 글자를 손수 써서 자손들에게 주면서 경계하였다. 그리고는 부축을 받아 일어나서 반듯하게 의관을 정제한 다음 마침내 운명하니, 향년이 76세였다. 그 뒤 연신(筵臣)의 건의에 따라 동지돈녕부사에 초증(超贈)되었다.
배위(配位) 진성 이씨(眞城李氏)는 참봉 이형남(李亨男)의 딸이다.
공은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맏이 전(琠)은 동지돈녕부사이고, 다음은 구(玖)이며, 다음은 선(璿)인데 문장과 학행이 뛰어났고, 다음은 성(珹)이며, 다음은 기(玘)인데 봉사를 지냈다. 딸 맏이는 이한미(李漢美)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신석엽(辛碩燁)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슬프다. 공은 일찍부터 저 대방가(大方家)를 찾아가서 글을 배웠으므로 그 문로(門路)가 단정(端正)하고 적확(的確)하였으며 덕을 갖추고 학문을 성취하였으니, 그만하면 충분히 남쪽 지방의 으뜸 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만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또 병자년과 정묘년의 일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말하면 어린 시절에 읊었던 저 ‘만인을 대적하겠다[敵萬]’고 한 시구에서 이미 그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 그 몸을 잊은 채 의리를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서 죽기로 결심하고 허연 머리를 휘날리면서 행군길에 올라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싸우고자 달려갔으니, 비록 싸움을 중도에 그만두게 되어서 단 한 개의 수급(首級)도 베지 못하고 단 한 명의 포로도 잡아 바치지는 못하였지만, 그 투철한 충성과 우뚝한 절개로 말하면 이 또한 영구히 후세에 남길 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의 이른바 ‘그 본체를 밝혀서 그 활용에 통달한 덕을 이룬 군자’란 바로 공과 같은 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금상(今上) 경오년(1870, 고종7)에 여러 선비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에 따라 도학(道學)과 충절(忠節)이 탁이(卓異)하다 하여 공을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임신년(1872, 고종9) 봄에는 여러 선비들이 이어서 시호(諡號)를 내릴 것을 청하여 이를 예조에 내려서 논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계유년에 다시 이를 아뢰어서 드디어 임금의 윤가(允可)를 받았으니, 나라에서 도학과 충절에 대해 숭상하고 장려하는 법도가 참으로 지극하다 하겠다.
공의 9대손 영환(瑛煥)이 집안의 가승(家乘)을 가지고 와서 공의 사행(事行)에 대한 시장(諡狀)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니, 사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약간 바로잡아서 위와 같이 서술하여 이를 태상씨(太常氏 봉상시 정(奉常寺正))에게 제출하는 바이다.